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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1,686 : 백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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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리(白松里 由來, 행소리 마을) [記事] :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뻗어내려 오다가 태백산을 솟아나게 하고, 서쪽으로 맥(脈)을 타고 내려와 소백산이 장엄하게 서 있다. 남쪽을 다시 맥을 이루어 백여 리를 내려오면 영주, 안동, 예천 중심에 학가산이라는 영산(靈山)이 우뚝 서 있다. 서면으로 사오십 리 지점에 오면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노적봉(露積峰)처럼 아름다운 봉우리가 있으니, 이 산이 해발 230m의 건지산(乾芝山)이며, 마을의 주봉(主峰)으로 주위 작은 산을 모아 백송리(白松里)를 만들고 있다. 우측으로 분통골을 만들고, 내려와 구름재(雲登嶺)를 지나 앞산 너머 줄기로 난산(卵山)이 휘돌아 나와 멈추어서있고, 건너뛰어 들다리산(石橋山)을 지나 몽대산(夢臺山, 또는 遇巖山)이 있고, 옆에 군자산(君子山)이 있으며, 건너편에 삼봉산(三峰山)이 있어 소골산(小谷山)을 이어 불미골산을 이루어 건지산으로 이어지기 전 두 번째 난산을 만들어 놓았다.
이리하여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건지산 주봉을 내려오다가 작은건지산(小乾芝山)을 지나 풋구동(또는 북극동)이 길게 나와 멈추니, 등 아래 백여 호의 집이 보기좋게 자리잡고 있으니 이 마을이 행소리이다. 아주 옛날에는 어떻게 불리어왔는지 알 수 없으며, 조선조 초엽부터는 백금리(白金里) 또는 흰서리로 불리어지다가 근래에 와서 행정명으로 백송리로 불리어지고, 흰서리란 말이 변하여 행소리로 불리어진다. 또 전하는 말로는 동리 뒷산에 흰솔(白松)이 있었다는 말도 있다. 조선 초엽 함양 박씨가 살았으며, 지금은 재사(齋舍)만 있다. 또 전설로는 ‘백송리는 황씨 터이다.’라는 말과 황씨가 들어와서 살면 수 년 내에 부자가 된다는 말도 있다. 진성 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온 역사는 조선조 중종 때부터였다고 한다. 행소리마을 주위를 동서남북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東, 君子洞으로 가는 길] : 동리에서 동쪽으로 가서 돌다리산(石橋山)과 몽대산 사이 계곡을 오르면 히골재 고개가 있다. 이 고개 마루에는 60여 년 전에도 고사목(枯死木)이 서 있었고, 산신(山神)을 섬기는 성황당 들무덤이 있었다. 지금은 길이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동리를 출입하는 가장 큰 길이었다. 고개를 넘어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군자골(君子洞)이란 골짜기가 나온다. 여기를 돌아가면 덕고개가 나온다. 재를 넘어 우측으로 안골(內谷)이 있고 여기서 넘어가는 설럼재가 보인다. 좌측으로 개고개골(介峴谷)이 있고, 오천(浯川)으로 가는 신작로 고개가 보인다. 히골재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장기포(長基浦) 또는 영성개 갯들이 있다. 이 들이 옛날에 유명한 오천장터였다. 지금 오천장터는 호명면 소재지이다. 영성개에서 내성천을 건너 화심봉(花心峰)이 있고, 맞은편에는 나비봉이 있다. 그 멀리 오천서당(浯川書堂) 마을이 보인다. [西, 갭짝으로 가는 길] : 풋굿동과 삼봉산 사이골로 들어가면 소골(좁은 골)이 나온다. 입구에는 선성 김씨 검바우 입향조 재사가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함양 박씨 금동 입향조 재사인 지산재(芝山齋)가 있으며, 여기서 쳐다보면 고양이에게 놀라 쥐가 멈추어 섰다는 봉우리가 있다. 봉우리 사이로 들어서면 갭짝재(개쪽재)가 나온다. 재 줄기 위로는 불미골과 좌측으로 절골(寺谷)이 있다. 지금도 기와 조각이 나오고 있다. 위에는 일제시대 동리 공동묘지가 있다. 재를 넘어서면 개들이 있고, 들 끝에는 두리벙끝이라는 산라락 끝이 있다.
내성천 건너에는 고미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고, 저 멀리 담바우로 들어 가는 길이 아련히 보인다. [南, 道德洞으로 가는 길] : 구름재(雲登嶺)를 올라 남산굼(南山굼)에 다다르면 ‘모중넘어’(또는 茅種嶝)이 있다. 좁은 길을 오르면 황새등(鶴嶝)인데, 손무덤 동리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황새등을 넘어서면 도둑골이다. 지금은 도둑골로 변하고 전답만이 있는 골인데, 곳곳에서 부엌 터와 기와, 옹기 조각이 나오고 있다. 이 골 밑에는 오른골들이 있고, 작은 등을 지나면 미리미큰골이 있고, 골 밑에는 벙개라는 들과 마을이 있다. 그 멀리 맏배이골들이 보인다. 미리미들 꼭대기에는 말미고개재가 있다. 여기에 있는 바위 위에 흔적이 파여있는데, 사람들은 장수발자국이라 한다. 고개를 넘어서면 장구매기골이 나오고, 좌측으로 들어가면 빈소골(殯所洞)이 있는데, 450여년 전에 진성 이씨 우암 이열도가 3년 간 시묘살이를 하였던 곳이어서 지금도 빈소골로 불리워진다. 난산을 주위로 들 이름이 알미들로 불리워진다. [北, 醴泉으로 가 는 길] : 마을에서 서북으로 내려가면 내성천이 나온다. 내성천 변에는 선몽대(仙夢臺)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450여년 전 진성 이씨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가 지었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직접 써준 ‘仙夢臺’ 현판이 지금도 걸려있다. 정자 주위에는 수 백년 묵은 송림이 둘러있고, 내성천 맑은 물이 흐르며, 정자 뒤로 기암절벽이 둘어있으며, 강변의 흰모래(白沙)는 개포면 서울나드리(京津)까지 이어져 평사십리(平沙十里)를 만들고, 주위 경치를 ‘선대동천(仙臺洞天)’이라 부르기도 한다. 도랑을 건너 삼봉산을 떠바치고 있는 바위가 행상바위(喪輿바위)로 불리워지고 있다. 내성천 건너에는 좌측으로 집골, 모개나무골, 화심등(花心嶝)으로 이어지고, 우측으로는 감나물골, 대추나무골이 있으며, 본 통로 외이골로 들어서면 이 골 이름이 고미동리에서는 안채이(雁唱谷)이라 부른다. 우측으로 작은굼, 큰굼으로 이어지고 골 막바지에 이르면, 유명한 오백이재가 나온다. 이 고개는 사방 십리가 무인지경(無人之境)이어서 무서운 곳이다. 이 재를 넘자면 사람이 500명이 모여서 넘었다고 하여 재 이름이 오백이재이고, 지금도 재 마루에는 수 백년 묵은 느티나무가 서서 지키고 있다.(이재환 虎鳴面 白松里 126-1 醴泉文化 第18輯 2005 36-40쪽)
백송리(白松里) [마을] : 호명면(虎鳴面)에 속한 행정 리(行政里)로, 진성 이씨(眞城李氏) 40여 가구의 마을에 23명의 박사(博士), 검사(檢事), 전문의(專門醫)가 있다. 법학 2, 약학 1, 공학 6, 의학 2, 정치 2, 국문학 3, 전문의 2, 독문학(獨文學) 1, 경제학 1, 농학 1, 검사 1, 우주항공학 1명이다. 또 부부의 인연을 맺어 백송리로 시집온 박사 3명(家政學, 史學, 營養學)도 있다. 백송리가 일찍 교육에 눈을 뜬 것은 이민희(경성제대 2회 졸업, 전 상업은행 전무)가 서울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그의 아들들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서울 나들이와 유학생이 늘어났고, 백송리는 자연스럽게 공부로 뜻을 이루려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백송리 뒷편에는 아담한 건지산(蹇芝山, 235m)이 수많은 인재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다. [傳說] : 백송리 행소리마을 뒤 높은 산 중턱에 있는 넓은 바위 옆에 잎과 나무 줄기가 흰색인 소나무가 있었다 하여 지명이 백송이라 불리어졌다고 전하고, 옛날에는 이 마을 사람들이 정월 보름날에 마을이 1년 간 무사를 비는 동제를 여기서 지냈다고 한다. 추측하건대, 이것은 이 곳 지명인 행소리를 백송(白松)으로 한자 표기하면서 생겨난 전설인 듯 하다. 한자로 뜻을 주어 행소리를 표기한 보기로 백송 외에도 백금리(白金里)가 있다.(醴泉新聞 1998.11.5, 이종교 慶北 홈페이지 2000)
백송리([慶北 最長壽마을을 찾아서] ③醴泉郡 虎鳴面 白松里) [記事] : 백송리 진성 이씨 집성촌인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마을 어르신들이 종갓집에 모였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 사이로 내려오는 겨울 햇살이 따사롭다. 켜켜이 기와를 이고 있는 처마가 날렵하다. 담쟁이 넝쿨이 빽빽한 돌담, 넓게 뻗은 대청마루, 양반집 규수가 수를 놓던 별채도 보인다.
고택마다 전통의 향기가 그윽한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2010년 2월 1일 경상북도 용역 조사에서 도내 최장수마을 4곳 가운데 하나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 곳이다. 퇴계 이황 선생의 종손이 터를 일군 진성 이씨 집성촌으로, 안동 하회마을을 옮겨 놓은 듯하다. 예로부터 대과에 급제한 선비가 많았고, 지금도 현직 박사만 32명을 배출해 '박사촌'으로도 불린다. "할매!" 올해 100세를 맞은 전명조 할머니가 종가에 걸음하자 류도연(91) 할머니가 두 손을 부여잡는다. 지팡이를 짚긴 했지만 전 할머니의 기력은 아직 왕성하다. 어제도 산길을 따라 혼자 아랫집에 다녀오셨다. 류 할머니 역시 70대 못지않게 정정하다. "스물한 살 되던 정월 초이튿날 가마 타고 시집왔어. 양반 동네에 시집간다고 얼마나 부러워하던지…." 할머니는 시집오던 날을 또렷이 기억해내며 수줍게 웃는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이중선(74)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바쁜 모습이다. 부인(72)과 함께 집 한쪽에 땔감을 쌓으시더니 이내 팔을 걷어붙이고 경운기 시동을 건다. 추운 날씨면 말썽을 부리기 일쑤인 경운기도 부지런한 할아버지 앞에선 얌전해진단다. 할아버지는 "추수를 끝내고 쌓아둔 볏단을 옮겨와야 한다."며 총총히 사라지셨다. 전 할머니, 류 할머니, 이 할아버지까지 백송리 어르신들에게 세월이 비껴가는 이유는 뭘까. 백송리 주민들의 첫 번째 장수 비결 역시 천혜의 자연환경에 있는 듯했다. 마을을 감싼 빽빽한 소나무 숲이 쉼 없이 맑은 공기를 내뿜고, 봉화~영주~예천을 가로지르는 내성천 청정수가 인접해 흐르고 있다. 박찬하(81) 할머니는 "조상 대대로 장수하는 노인들이 많았다"며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선 누구나 오래 사는 법"이라고 자랑했다. 묵묵히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마을 노인들의 근면한 성품도 장수의 한 요인이다. 이한주(67) 할아버지는 "날 따시면 동네 어르신들은 모두 들에 나가 계신다."며 "쉴 새 없이 꿈쩍거리시는 게 오래 사는 비결인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은 선비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들답게 욕심 없이 화합하며 살아간다. 이준희(64) 이장은 "자식들 잘 키우고 어른 잘 모시면 그만이지, 바라는 건 없다"며 "재물에 욕심 내지 않고, 다툼 없이 살아가는 것 또한 우리 동네 장수 비결인 것 같다"고 했다. 용계댁이라고 소개한 할머니(72)는 "매년 10월 첫째 주면 선몽대에서 제사를 모시는데 50년 전 시집온 첫해나 지금이나 찹쌀만 다섯 말을 해 떡을 한다."며 "제사가 끝나면 모두가 사이좋게 제수 음식을 나눠 먹는다."고 말했다.(임상준 記者 每日新聞 201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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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