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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1,694:백송리...
작성자장병창 @ 2022.02.03 06:14:00

  도청신도시 예천 1,694 : 백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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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송리(신도청시대 예천의 장소성과 인문魂을 찾아서 <14> 백송리의 공간 상징 미학) [기고] : 우리나라에는 명당이 유난히 많다. 조선팔대명당, 영남사대길지, 호남팔대지, 강릉팔명당, 성주5명기(名基), 예천10명당 등 마을터, 집터, 묘터를 합치면 지역마다 골짝마다 명당 일색이다. 구한말 우리나라를 찾았던 한 선교사는, "한반도는 어디를 가나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기록했지만, 우리 선조들은 그 많은 산들을 오히려 나라를 지켜주는 ‘삼신산(三神山)’과 12종산(宗山), 또는 고을을 지켜주는 ‘진산(鎭山)’과 주산(主山) 등으로 승화시켰다.

 

  하기야 동서양의 토지관이 다르니 바위와 숲으로 이루어진 산이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동식물들의 ‘기(氣) 충전 명소’라는 사실을 그네들이 알 리 없다. 오래도록 풍수 연구를 한 국내의 한 저명한 풍수학자는 또, ‘풍수는 인문학’이라고 자신 있게 단언한다. 정녕 그렇다면 필자는 일찌감치 풍수 공부를 접었을 것이다. 서양 선교사와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기(氣)의 바다’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소치로 여겨진다. 풍수는 ‘기 바다’의 장소적 특성 차이를 살피는 점에서는 자연과학이요, 땅에다 주산(主山)과 안산(案山), ‘봉황포란형’과 ‘옥녀직금형’ 같은 각종 명형국지(名形局地) 이름을 붙이는 측면에서는 인문과학이다. 필자는 우리 땅의 도처 산수(山水)에 의미 부여되어 있는 후자를 특히 ‘기호(記號)의 바다’라고 일컫는다.

 

  그것은 ‘파란 불’과 ‘빨간 불’이라는 기표(記標)에 각각 ‘건너가도 좋다’와 ‘건너가지 말라’는 기의(記意)가 담겨 있는 ‘신호등’이라는 기호와 하등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신호등은 순수 인문학적 기물(氣物)이지만, 풍수에서 말하는 주산[마을 지킴이 산]과 같은 기호는 자연지물(自然地物)이라는 점이 다르다. 우리가 여행을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멀리 어디쯤에서 ‘이제 집에 거의 다 왔구나’ 하고 느껴지게 만드는 자연지물, 그게 바로 기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의 바다’와 ‘기호의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청정한 기의 바다[자연환경]에 풍부한 기호의 바다[인문학적으로 부여된 공간 의미]가 덧붙여진 것이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이다. 이 땅 안의 그런 명당 마을로는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白松里)가 단연 으뜸이다. 백송리의 겉모습은 여느 한적한 농촌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는 수려한 자연도 자연이려니와 그 너머에 함축돼 있는 공간 상징 미학의 세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땅이름 짓기에서부터 경관(景觀) 구성, 그리고 터[장소] 활용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아름답다’고 얘기하니까 어떤 독자는 또 여기에서 기와집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통마을 모습을 상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이든 공간이든 진정한 아름다움은 겉모습[외관]에 있지 않다. ‘자연스러움’이 최고의 미(美)다. 백송리 아름다움의 백미는 억지가 없는,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변화’에 있다. 마을이름의 변화도, 마을경관의 변화도 다 자연스럽다. 백송리는 ‘변역(變易: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이 곧 불역(不易:불변의 진리)’이라는, 『주역』의 만고불변의 진리를 몸소 보여주면서도 본래의 장소 정체성(正體性)을 고스란히 지켜나가고 있다. 21세기 도시문화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언어로만 자연을 말할 뿐 실제로는 자연을 떠나버렸다. ‘인문적 기호의 바다’에 푹 빠져 실존 감각과 존재의 의타기성(依他起性)을 통찰케 해주는 자연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정서는 메말라가고 사회는 각박해진다.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인간의 존엄성은 갈수록 추락한다. 백송리의 삶터 공간 상징 미학의 세계는 과연 우리들에게 무엇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일까.

 

  ◆유교적 지명(地名) 상징 미학 : 예전 유학자들은 자신이 살아갈 터를 직접 골라야 하는 경우,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이인위미(里仁爲美)’라는 말을 큰 틀로 삼았다. 내용인즉, 마음이 어질고 무던한 풍속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을 잘 골라서 거처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예천과 안동 고을의 경우는 두 고을이 다 같이 예향(禮鄕)으로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에 그 두 지역 간에 이거(移居)하거나 또는 향내(鄕內)에서 이곳저곳으로 옮겨가면서 살고자 할 때, 그 기준은 별로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선비정신을 함양할 빼어난 산수(山水)가 주거지 가까이에 있는가 없는가가 더 큰 잣대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풍산류씨가 풍산을 떠나 아름다운 부용대를 낀 하회를 점거했듯이 진성이씨가 금당실을 떠나 선몽대를 낀 백송리를 세거지로 삼았기에 하는 말이다. 함양박씨가 살고 있던 백송리(그 때는 백금리)에 이굉(李宏·1515~1573)이 입향한 것은 153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 새로운 삶터를 정한 명문가는 대개 종택이나 사당을 혈처(穴處)에 앉히는 것을 필두로 하여, 산과 강 같은 주변 자연과 마을에 대해 자신들의 유교 관념적 가치관과 소망을 담은 각종 지명(地名)을 새로 붙이는 게 보통이었다. 백금리 일대의 일차적 지명 변화도 그 때 일어났다. 진성이씨 집안은 예전에 이미 쓰고 있었던 건지산(巾芝山) 대신에 건지산(搴芝山)을, 백금리(白金里) 대신에 행소리(杏消里)라는 새로운 지명을 쓰기 시작하고, 이후에 차차로 난산(卵山)과 우암산(遇巖山), 백송리 같은 새 지명을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건지산·난산·우암산이라는 세 개의 산 이름과 백금리·행소리·백송리라는 세 개의 마을 이름에 깃들어 있는 유교적 인문혼(魂)이다. 백송리 마을 뒤의 건지산은 ‘선비[芝]를 배출하는[搴] 산’, 즉 후손을 ‘현관영달’ 시킨다는 상징성이 있으며, 마을 앞의 난산은 유교사회 각 가문의 또 다른 꿈이었던 ‘후손 다산(多産)’이라는 염원을 실현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난산은 보통 독립된 한 개의 산으로서 알과 같은 형상을 띠고 있을 때 붙여지는 산 이름이다. 그런데 백송리의 난산은 지맥의 맨 앞 봉우리만 따로 떼어내 생각할 것 같으면 알의 모습이지만 용맥 전체로 볼 때는 뱀과 같은 형상을 지녔다. 땅의 형상 자체보다는 상징적으로 부여하는 의미를 더 중요시하는 이런 술법을 풍수에서는 지명 비보(地名裨補)라고 한다. 예부터 후손의 풍요와 다산은 주로 조상 묘터의 특성과 연관 있는 것으로 설명돼 오는데, ‘알미’ 또는 ‘알뫼’라고도 불리는 바로 그 난산에 입향조 부부를 비롯한 우암 이열도의 묘가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 추측에 한층 신빙성을 더한다.

 

  ▲ 우암 묘앞 부모 이굉의 묘역 : 우암산은 우암 이열도의 아호를 딴 산 이름이다. 선몽대 뒷산인데 백송리 마을의 동쪽에 놓여 있다. 우암은 입향조 부부가 낳은 걸출한 인물로서 ‘유선몽대(儒僊夢臺)’의 주인공이다. 우암산 선몽대는, ‘산은 높아서 명산이 아니라 신선 같은 사람이 살아야 명산[山不在高 有仙則名]’이라는 옛말을 입증해 주는 역사적인 명소다.

 

  ▲ 백금리 지명 유래 : 진성이씨가 입향하기 전의 백송리의 원래 마을 이름은 ‘백금리’였다. 마을 북쪽 내성천변의 흰 모래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을 보고 지어진 땅이름으로 전해온다. 문제는 ‘백금’이라는 지명이 풍기는 어감이었다. ‘백금’은 선비의 표상인 ‘청렴’과는 너무나 상반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진성이씨들은 입향 후 백금리라는 마을이름을 ‘행소리’로 바로 바꿔버렸다. 행소리를 한자로 옮기면 ‘杏消里’가 되는데 진성이씨 온혜종파 세보에 또렷이 적혀 있다. 온혜파와 백송파 간에 건지산(搴芝山)이라는 한자 지명을 공유하고 있는 것을 보면 행소리라는 땅이름을 지을 때도 ‘한 집안’ 사람으로서 많은 정보를 교환한 듯해 보인다. ‘행(杏)’은 중국식으로 살구나무를 지칭하든 아니면 한국식으로 은행나무를 지칭하든 그것은 모두 유교와 관련돼 있다.

 

  행단(杏壇)이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곳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소(消)’는 『시경(詩經)』 「정풍(鄭風)」에 나오는 하수(河水:황하의 위쪽 근원) 가의 읍(邑)을 가리킨다. 내성천변에 위치한 현재의 백송리와 그 지리적인 입지 환경이 매우 흡사하다. 그 두 글자의 상징적인 의미를 따와서 합한 지명이 곧 ‘행소리’다. 그것은, ‘강의 상류에 입지한 ‘소(消)’와도 같은 유교마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마을을 지키는 뒷산 이름이 ‘선비를 뽑겠다’는 ‘건지산’이고, 또 그 품에 안긴 마을 이름이 ‘공자를 받드는 선비촌[儒家村]’이라는 뜻의 ‘행소리’였기에, 조선시대에는 예천의 이 ‘행소리’가 이 나라 안 최고의 유교적 삶터 지명 환경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 ‘행소리’라는 지명이 한자어로 필기되기보다는 주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많이 불리다 보니 ‘흰쇠리⇒힌소리·흰소리⇒흰 솔’로 조금씩 말뜻이 변화되고, 그러다가 마침내 ‘백송(白松)’이라는 한자어가 새로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그리고 대략 1900년을 전후해서 ‘백송리’라는 한자 지명이 공식적인 행정 지명으로 등장하게 된다.

 

  혹자는 진성이씨들이 입향할 때 선몽대 뒷산에 흰 소나무[백송]가 있어서 곧장 백송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잘못 전승돼 오고 있는 전설이다. 소나무 자체가 굽힘 없는 선비의 절개에 비유되기도 하거니와 더욱이 ‘백송[흰 소나무]’이 지닌 흰색은 순수함·고귀함·신성함 같은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주민들 사이에서도 ‘백송리’라는 지명이 별 거부감 없이 빠르게 수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백금리와 행소리, 그리고 백송리라는 세 가지 마을이름이 갖는 상징적 경관을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백금리’라는 전통지명은 선몽대 앞에 펼쳐진 흰 모래사장을 보면 될 테고, ‘행소리’라는 전통지명은 마을 앞 선몽대로 가는 길 양쪽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와, 곧 이어서 마을 북쪽에서 만나는 동에서 서로 길게 흐르는 내성천 줄기를 바라보면서 ‘중국 하수 가의 소읍(消邑) 풍경’도 이러했거니 하고 짐작하면 된다. 그리고 ‘백송리’라는 지명의 정체성은 종택에 심어져 있는 세 그루의 백송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두 그루는 작고한 이계로 종손의 동생인 이태로 박사(86·서울대 법대 명예교수)가 20여 년 전에 심은 것이고, 나머지 한 그루는 근래에 문중에서 기념 식수해 놓은 것이다. 전자는 수피가 벗겨지며 조금씩 백송다움을 드러내고 있지만, 후자는 아직 어린 백송이어서 줄기가 회녹색에 가깝다. 그 백송나무들은 한자와 한글을 병행해 사용하는 우리의 언어 풍토에서 ‘백송리’라는 새로운 마을이름이 저절로 생성되자 진성이씨 집안에서 순리에 따라 상징적으로 심어 놓은 나무들이다. 후손들이 애써 백송을 구해 심어 놓은 것을 보면 예전의 그 아름답던 마을 유풍(儒風)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몇 백 년 후에는 그 백송도, 하늘을 향해 용틀임하듯 치솟은 저 선몽대의 푸른 소나무들 부럽지 않게 고결한 흰 빛을 더욱 도도히 발할 것이다. 그 즈음의 가을에 어떤 뜻 있는 철인(哲人)이 선몽대를 찾아 이 백송들과 은행나무, 그리고 내성천 흰 모래밭이 이루는 백송리의 유가적 지명 상징 미학의 세계를 지금보다 훨씬 더 오묘하고 심미적인 새로운 철학 언어로 예찬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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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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