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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1,733:백화꽃화원...백화사...
작성자장병창 @ 2022.03.11 06:09:48

  도청신도시 예천 1,733 : 백화꽃화원...백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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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화꽃화원(百花꽃花園) [花園] : 예천읍 노하리 67-28번지에 있는 화원으로, 화환, 화분, 축하 부케, 근조 화환, 관엽 등을 배달 판매한다.(yescall 2002)

 

  백화꽃화원 : 백화꽃화원/ 꽃집,꽃배달, 도로명 주소 경북 예천군 예천읍 효자로 101, (지번) 예천군 예천읍 노하리 67-67(daum 2017)

  백화꽃화원 : [백화꽃화원]예천군꽃집/예천군화원/예천군꽃바구니/ 2012.03.12./ 백화꽃화원§예천군꽃집/예천군화원/예천군꽃바구니 경북 예천군 예천읍 노하리에 있는 이곳을 소개합니다. 꽃바구니 경조화한 동서양란 부케 생화 관엽 등과 각종 행사용.../ blog.naver.com/bankpia/ 생활에 필요한 정보(daum 2017)

 

  백화꽃화원 : 예천화원/ 2 행운꽃집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노상리 33, 꽃집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노하리, 예향꽃집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서본리 3-12, 백화꽃화원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노하리 67/ skinnara.co.kr/html/board/view.asp?M_SEQ=2261369 지역정보(daum 2017)

 

  백화사(白華寺), 천덕사(天德寺), 절 [터] : 개포면 신음리 앞산인 천덕산(天德山, 一名 白華山) 남쪽 기슭에 있던 사찰로, 동서쪽에 두 누(樓)가 있었는데, 동쪽은 정당루(政堂樓), 서쪽은 관공루(觀空樓)라 하였다. 묵암 탄연 선사(黙菴坦然禪師, 1069-1158)에 의해 창건되어 번창해온 용궁현에서 가장 큰 사찰로 추정되고 있는데, 지금은 수풀에 묻힌 석축터가 보이고, 식수로 사용했던 옹달생의 흔적, 그리고 식생활에 긴요하게 이용했던 돌호박(방아확)이 버려져있고, 기와 조각도 간간히 눈에 띈다.

 

  고려 말에 익재 이제현(益齋李齊賢)의 관공루기(觀空樓記)가 있다. 1940년 경 훼철되고, 절터에는 축대와 초석, 멧돌, 절구통 등이 산재되어 있다. 절터의 규모로 보아 거찰인 둣 주변에서 기와 파편 등을 찾아볼 수 있고, 천덕산(天德山)에 있다 하여, 일명 천덕사(天德寺)라고도 한다. [傳說] : 1) 이 절 뒤에 명당 묘터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던 중 이조 말엽 문경 산북(聞慶山北) 되화의 장수 황씨(長水黃氏)가 이 묘터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을 모아 광대골(廣大谷)에서 광대놀이를 시켰다. 스님들이 절을 비우고 구경을 간 사이 몰래 묘를 썼는데, 그 이튿날 난데없는 고목나무가 우뚝 서 있기에 주지가 지팡이로 밀었더니 고목나무 속에서 벼룩 한 떼가 나와 절로 침입하자 스님들은 얼씬도 못하였고, 절도 못 쓰게 되었다. 그 날 밤 주지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새 터전을 잡아주었다고 한다. 2) 어느 황 부자가 18세기 중엽에 아버지의 행상을 3개 준비하여 줄을 지어 이 절 앞을 지나갔다. 그 중 2개는 시체가 없는 빈 행상이었다. 황씨의 부탁을 받은 광대들이 빈 행상을 메고서 회괴하게 하여서 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구경을 나오도록 하였다. 열심히 구경하는 동안 황씨는 절 뒤로 가서 묘를 썼다. 그 후 황씨 집안은 번성하고 절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 후 그 절터에는 빈대들이 옛날이 그리워 주춧돌 위에서 놀고 있었다고 한다. 3) 안동 권씨가 서커스단을 조직하여 절 아래 내성천(乃城川)에서 공연을 하였다. 이 때 이 절의 스님들도 모두 이 구경을 하였다. 이 때 미리 준비하였던 안동 권씨는 조상의 묘를 절 뒤 명당자리에 썼다. 그 후 스님들이 절로 돌아오자 빈대들이 기어 나와 직육면체를 만들며 천정으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절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李齊賢의 <館空樓記>] : 묵암 탄사(黙菴坦師)가 용궁군(龍宮郡)의 천덕산(天德山)에 사원을 지었는데, 두 누가 있다. 서쪽에 있는 누를 관공(館空)이라고 하는데, 그 무리의 늙은이 중 호를 운수(雲수)라고 하는 이가 기문을 썼고, 동쪽에 있는 누를 정당(政堂)이라고 하는데, 정당 한 재상(政堂韓宰相)이 일찌기 남쪽 지방으로 와서 놀 때에 그 위에 오른 까닭으로 이름한 것이다.

 

  정당(政堂)이 돌아가매, 묵암 탄사(黙菴坦師)가 사람을 시켜 나에게 기문을 구하는 것으로서 누의 영광이 된다 하더니, 그러한 후에 스님이 뒤따라 이르렀다. 내가 서로 본 다음 묻기를, '보제(菩提), 달마(達磨)는 탑을 만들고 절을 일으키는 것을 인공으로 만드는 복으로 삼고, 혼자 깨달아 항상 아는 것으로 참된 공덕으로 삼고, 비록 천자의 높은 지위로도 여기에 용납되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소. 스님은 달마를 스승으로 하면서 도리어 건축에 노심하여 집을 웅장하게 하고, 유명한 관리에게 이름을 부탁하여 구경거리를 사치스럽게 하려 하니, 거기에 대하여 무슨 말이 있을 것이요.'라고 하였다. 스님은 말하기를, '이제 어떤 사람이 장차 천리 길을 가려 한다면, 게을러서도 안 되니, 대개 반쯤 가서 중지하게 되고, 몰라서도 안 되니, 인도하여 길로 가게 하여도 도달하지 못한다. 내가 보건대 지금 세상에서 우리 불도(佛徒)들이 도(道)를 배운다는 것은, 옛 사람의 찌꺼기를 얻어 가지면서도 부지중 방자(不知中放恣)하여 명예와 이익에 취해 버리고 마니, 이것이 중도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자가 아니겠는가. 혹 산 속에서 얼어 떨고 주리면서 마음을 수련하고 각오하려 하나, 들은 것이 적고, 듣고서 의심하여 올바른 도를 얻지 못하니, 지름길로 갔으나 몽매한 자와 같지 않겠는가. 내가 이를 고치려고 발분(發憤)해서 절을 짓고, 우리 불도(佛徒)들을 전부 규합하여 명예와 이익에 취하는 폐단을 버리고, 산속에서 얼고 주리는 것을 면하게 하여, 그 게으른 자를 이끌고, 그 몽매한 자를 인도한다면, 우리 스승의 '혼자 깨달아 항상 아는 이치'를 반드시 깨달아 알고, 의심이 저절로 풀려질 것이니, 내가 장차 우리 스승의 도를 크게 하려는 것이요, 짐짓 인공으로 하는 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휘로(暉老)가 배 상국(裵相國)에게 와 만공(滿公)이 백소부(白少傅)에게 서로 주고받은 문답은 절에서 거룩한 일로 전하는데, 어찌 일찍이 높은 관리에게 부탁한 것을 혐의하겠는가, 우리 누의 이름을 한공(韓公)으로부터 얻게 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 이치는 같은 것이오.' 하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사과하면서 그 말을 써서 기문(記文)으로 한다. 그 산천의 좋은 경치와 형세가 좋은 것, 그리고 창건하고 낙성한 연월에 대해서는 운수(雲수)가 이미 말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적지 않는다."라고 하였다(동문선 제69권). [李齊賢의 詩] : 승경(勝景) 노니는 곳은 붙잡고 오르는 것이 많은데/ 이 절은 낮은 산에 머물러 가장 좋구나./ 하나의 물줄기는 비단 펼친 듯 멀리 뻗쳤고/ 두 고개는 옷깃처럼 그윽함을 보호한다./ 부처 밖과 마음 밖을 구하지 말라/ 인간은 곧 꿈속에 있는 것이네/ 듣기만 하여도 누 이름 얻은 이치 알 수 있는데/ 어찌 모름지기 주인 얼굴 가서 대할 것인가/(益齋集). [權思復의 詩] : 이름 난 절 있음은 들었지마는 한 번도 와 보지 못했건만/ 산과 호수 좋은 건 시를 보고 알았네./ 동문(洞門) 잠그지 않아도 속인 오기 어렵고/ 누 위에 수렴 걷으니 한가로운 스님일세./ 천고의 산수 경치 흥폐(興廢)한 밖/ 산언저리 사이에서 6시로 북과 종 두드리네./ 노인이 선사의 명 거역치 못해/ 거친 글 써내니 얼굴이 붉어진다./ [廉興邦의 詩] : 우뚝한 누는 별을 손으로 만질 수 있는데/ 탄공산(坦公山)엔 소나무 삼나무 가득하구나./ 용이 설법 듣고 나오니 구름은 흩어지고/ 새가 경 외우고 오니 소리 다시 한가롭다/ 두솔청(兜率廳) 위에 한 몸 기대고 있느니/ 스님의 앉음새의 삼세는 잠깐 사이일세./ 관공(館空)의 뜻 해득하는 사람 없는데/ 분명한 설법 또한 낯이 부끄럽도다./(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白忠欽의 詩] : 개포면 황산리 사람으로, 한시 중앙대회에서 입상한 작품이다. 그 내용은 "고사 천년(古寺千年)에 승(僧)이 거(居)하고/ 백화산상(白華山上)에 오공(鳥空)재"이다. [權近의 詩] : 천덕사 관공루(天德社觀空樓) 시의 운(韻)을 차(次)한다/ (自註) : 사(社)에 두 개의 누각이 있는데, 동쪽 것은 정당루(政堂樓)니, 우리 외조(外祖) 복재 문절공(復齋文節公)이 정당(政堂)이 되었을 때에 와서 등림(登臨)한 곳이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고, 서쪽 것이 관공루(觀空樓) 이것이다. 청명(靑冥)의 선경(仙境)은 아득하여 더위잡기 어려운데/ 오직 인간에 이 산이 있는 것이 기쁘구나./ 뜰을 둘러 흐르는 물소리는 나그네 꿈을 깨우고/ 누각에 가득한 구름은 중을 짝하여 한가롭네./ 유유한 공(空)의 이치는 삼생(三生) 속이고/ 오늘에 등림(登臨)하니 감탄이 많구나./ 벽 가운데에 할아버지 얼굴을 대한 듯하다./(陽村集 第7卷, 남효근 慶北 홈페이지 2000)

 

  백화사(白華寺) [터] : 개포면 신음리 천덕산(天德山)에 있던 사찰로, 절터에는 축대와 초석 등 다듬은 돌과 자연석이 산재되어 있고, 절터의 규모로 보아 무척 큰 사찰인 듯 주변에서 기와 파편 등을 찾아볼 수 있고, 일명 천덕사라 하기도 하였다. 조선말까지 있었으나 전설에, 빈대 때문에 불태웠다고도 하고, 어느 세도가가 묘를 쓰기 위해 불태웠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절은 용궁현에서 제일가는 대찰로서 안동에서 개경으로 내왕하는 중요한 교통로에 인접하고, 경관이 수려하여 시인 묵객과 고관대작들의 방문이 많았던 것 같다. 이 절과 인연이 있었던 이들이 남긴 글 중에서 이 절의 사적을 미루어 볼 수 있다. 다행이도 이 절의 창건은 고려 때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익재난고>에 전하는, “백화선원 정당루기(白華禪院 政堂樓記)‘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현은 이 절의 창건주인 묵암탄사(黙庵坦師)의 방문을 받고 그의 간청에 따라 대화한 내용을 중심으로 글 한 편을 지어주었는데, 이 글의 내용으로 보아 이제현의 명성을 날리던 원 나라 간섭기와 공민왕 때를 중심으로 하여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동서에 높다란 루가 2개나 있는 큰절이었던 것 같다. [全元發의 詩] : 봄날 옛 절에서 놀고자 허위허위 올라오니/ 푸른 솔숲 십리에 깔려있고 산은 겹겹일새/ 속세의 흐린 티끌 깨끗한 이 절을 더럽힐까 두려운데/ 스님이 한가로우니 떠가는 흰 구름도 한가롭다/ 맑은 달밤에 헌함에 기대노니/ 바람은 꽃 사이를 거쳐 책상 위를 스쳐간다/ 누구와 참된 즐거움 이야기할까/ 한 잔의 차(茶) 속에 환한 웃음 감도네./(龍宮鄕校誌 上卷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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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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