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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1,810:보만재집...보명의숙
작성자장병창 @ 2022.05.18 06:03:14

  도청신도시 예천 1,810 : 보만재집...보명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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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만재집(保晩齋集) [冊] : 예천 출신 보만재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의 저술 중 일부(奎4376, 奎4377, 奎5440)로, 16권 8책, 활자본(活字本, 聚珍字), 31x20.5cm,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은 22x15.1cm, 10행(行) 20자(字), 판심은 상 흑어미(上黑魚尾)이다. 1787년(정조 11) 그의 아들인 서형수(徐瀅修), 서호수(徐浩修), 손자 서유?(徐有?) 등에 의해 편집되었고, 1822년(순조 22) 서유?가 간행하였다. 그런데 편집 경위를 보면, 저자의 생존 당시인 1782년 정조의 명으로 징고(徵稿)된 것이 저서 4집(集) 64권, 총서(叢書) 60권 등 방대한 저작 중 겨우 시문(詩文)에만 그쳤으므로 1787년 서형수 등은 4집(四集) 중에서 고금체시(古今體詩) 2권, 소(疏), 차(箚), 서(序), 기(記), 비지(碑誌), 잡문(雜文) 등 14권을 선취(選取)하여 현재 대로 16권 8책으로 증편(增編)한 것이고, 당초의 간행은 16권으로 증편되기 이전인 1787년 정조가 규장외각(奎章外閣)에 간행을 명령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과연 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다른 본(本)이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간행 명령만 내려지는 데 그친 듯하다. 권두(卷頭)에 정조의 어제시(御製詩)가 정지검(鄭志儉)의 글씨로 실렸는데, 이는 1782년(정조 6) 징고(徵稿) 때에 선사(宣賜)된 것이고, '보만(保晩)'은 바로 전년(前年)에 하사한 호(號)이다. 다음에 이복원(李福源)의 서문이 있는데, 이복원은 당(唐) 나라의 문신 하지장(賀知章)이 치사(致仕)하고 돌아갈 때 당 태종이 오언율시(五言律詩)를 하사한 고사(故事) 등을 들어 서명응이 받은 왕의 총애를 치하하고 있다. 권말(卷末)에 서유?의 발문이 있는데, 이 책의 편집, 간행의 경위를 상세히 언급하고, 이 책 외에 저자의 저술 책 이름을 나열하였다. 권1에 사(辭), 악가(樂歌), 시(詩)가 있는데, 이 중 악가에 '친림관예악가(親臨觀刈樂歌), 풍년일장(豊年一章), 숭단일장(崇壇一章) 등 궁중 행사 때의 의식에 쓰는 악가 13편이 실렸다. 권2에 시(詩), 제화(題畵 4首), 사호보만재가(賜號保晩齋歌), 독노자(讀老子), 월식시(月蝕詩) 등 64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권3에 소차(疏箚), 진치법서(陳治法書) 외 4편의 소차가 실렸는데, 모두 사직(辭職) 소차이다. 장문(長文)으로 된 '진치법서'는 저자가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정치에 관한 자기의 견해를 피력한 상소로서, 일강 팔목(一綱八目)을 정치의 원리로 설정, 일일이 설명하고 있다.

 

  1강(一綱)은 이른바 분예지(奮睿志)요, 팔목(八目)은 명강학(明講學), 무성실(務誠實), 계일욕(戒逸慾), 회청납(恢廳納), 정사전(正祀典), 흥학교(興學校), 개공거(改貢擧), 장무략(壯武略)인데, 앞의 4목은 본체(本體)로서 그 용(用)인 뒤의 4목보다 우선한다고 논하고, 그 까닭을 상세히 논증하고 그 시행 세칙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권4는 소차(疏箚)로서, 진관학폐막변통소(陳館學弊막變通疏), 진기영편차(進祈永篇箚) 외 4편인데, 전자는 저자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때,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운영난을 타개하려고 올린 상소로서, 그 예산액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고, 후자인 '진기영편차'는 기천영명(祈天永命)의 뜻으로 영조의 장수를 비는 제목이나, 실은 노년(老年)이라 하여 정사(政事)에 등한할까를 염려하여, 동정(動靜), 청납(廳納), 현능(賢能), 명실(名實), 유일(遺逸), 상벌(賞罰), 조령(條令) 등의 치법(治法)을 9칙(九則)으로 세분하여 그 시행을 청하는 상소이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올린 글이다. 권5는 소차(疏箚)로서, 이조 참판, 대제학, 대사간 등의 사직(辭職)을 청하는 상소 20여 편이다. 권6은 서(書)로서, 재종질 서지수(再從姪徐志修)를 비롯하여 이휘중(李徽中), 남유용(南有容), 채희범(蔡希範), 신??(申??), 황경원(黃景源), 정존겸(鄭存謙), 홍명한(洪名漢), 홍낙명(洪樂命), 이헌경(李獻慶), 정창조(鄭昌朝), 이복원(李福源) 등과 교환한 사신(私信)과 묘당(廟堂), 호남원생(湖南院生) 등에 답한 서(書)가 수록되었다. 권7에 서(序) 28편이 있다. '신법혼천도서(新法渾天圖序)'는 운관(雲觀, 觀象所)에 소전(所傳)되는 개천도(蓋天圖)에 대해 그 불합리점을 평소 염려해 왔는데, 이런 저자의 고충을 들은 문광도(文光道)가 개천도의 결점을 보결(輔缺)하여 다시 그리고, 이름을 '신법혼천도"라 한 것이다. 문광도는 역수(曆數)에 정통한 이로, 저자의 아들 서호수와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합탄연구시서(合灘聯句詩序)'는 멀리 함경북도 6진 땅에서 상봉한 신재(新齋) 홍낙명(洪樂命), 실학자 정항령(鄭恒齡),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 정효선(鄭孝善) 등 당대의 명사들과 만나 연구시(聯句詩)를 합작하고 서명응이 그 서문을 쓴 것이다.

 

  합탄촌(合灘村)은 종성(鍾城)과 회령(會寧)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본사서(本史序)'는 농정사(農政史)에 관한 제가(諸家)의 설을 모으고 이를 다시 정정(訂正)하여 서명응이 편집하였다. 이름을 <본사>라고 한 것은 '본사서'에서 농정은 천하의 대본이니 만큼, 그 역사는 역사 중에서도 근본이 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방언류석서(方言類釋序)'는 중국, 몽고, 청(滿洲), 왜(倭) 4개국의 방언(方言), 곧 언어를 수록하고, 앞에 한글로 음을 부록한 책으로, 서명응은 설관(舌官) 홍명복(洪命福) 등을 데리고 한(漢), 청(淸), 몽(蒙), 왜(倭)의 방언을 널리 수집 편찬하여 이들 4개 국어의 필수적인 학습서가 되었다. '북학의서(北學議序)'는 실학자 박제가의 <북학의>에 실학에 많은 관심과 조예가 있는 서명응이 서문을 쓴 것이다. 그는 서문에서, "우리 나라는 산과 물에서 나오는 이익을 고작해야 무너진 데를 수리하고 떨어진 데를 깁는 보수의 비용에 쓰는 형편"이라고 우리의 현실을 지적하고, 하다가 안되면, 한다는 말이 고작, "우리 나라는 가난한 나라니까"라고 체념하는데, "나라가 과연 가난한가? 아니면 수법이 잘못되어서인가"라고 과학에 무지했던 당시의 현실을 신랄하게 지적하였다. 권8은 기(記)로서, 정이당(貞이堂), 부용당(芙蓉堂), 여청당(餘淸堂), 겸낙정(兼樂亭), 세한정(歲寒亭), 제광정(濟光亭) 등을 위시한 루(樓), 당(堂), 각(閣), 재(齋), 관(館), 헌(軒) 등의 기문 28편이 수록되었다. 이 중 정조의 호에 대해 쓴 홍재기(弘齋記)도 포함되어 있다. 권9에 발(跋), 제(題), 잡저(雜著), 어서북원첩(御書北苑帖), 선원보략(璿源譜略)의 7편의 발문과 삭방풍요(朔方風謠), 보만재총(保晩齋叢)의 제(題)가 수록되었다. 잡저(雜著)는 논문(論文), 전기(傳記), 찬(贊) 등 14편인데, 논문은 정조 즉위 후 충청도 백성에게 내린 왕의 논문으로 과거 대리 청정(代理廳政)을 반대했던 정후겸(鄭厚謙), 홍인한(洪麟漢) 등의 죄상을 공포함과 아울러 충청도 백성의 마음을 진무(鎭撫)하는 글이고, 전기는 제업문회(齊業文會)를 조직하여 문중의 젊은이들 70여 명을 모아 학업에 정진케 한 죽헌(竹軒) 안광수(安光洙)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도와 지방 어선을 동원 군량을 보급함으로써 명량대첩에 크게 이바지한 사호(沙湖) 오익창(吳益昌)의 행장(行狀)이고, 찬(贊)은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의 상찬(像贊)이다.

 

  권10에 옥책(玉冊), 죽책(竹冊), 반교문(頒敎文), 친제문(親祭文) 등 관각(館閣) 제체(諸體)가 대부분으로 모두 48편이다. 권11에 비(碑), 묘갈(墓碣), 수양산비(首陽山碑), 기자정전기적비(箕子井田紀蹟碑), 화월당대사부도비(華月堂大師浮屠碑) 및 문익점(文益漸), 정제현(鄭齊賢), 이창의(李昌誼) 등의 신도비(神道碑)와 손기남(孫起南), 서종일(徐宗一), 정창조(鄭昌朝), 신명익(愼溟翊), 한순계(韓舜繼), 서종벽(徐宗璧), 이명달(李命達) 등의 묘갈(墓碣)이 수록되었다. 권12에 묘표(墓表), 묘지(墓誌), 저자의 선고(先考) 서종옥(徐宗玉), 아우 서명성(徐命誠) 및 풍덕부사(豊德府使) 서명무(徐命茂), 통덕랑(通德郞) 임명호(林命浩) 등의 묘표와 조의격(趙義格), 이주진(李周鎭), 정여직(鄭汝稷), 정문계(鄭文啓), 황주하(黃柱河) 및 저자의 선고(先考), 망녀(亡女), 형수 등의 묘지가 수록되었다. 권13은 행장(行狀)인데, 영조의 행장이 전권(全卷)을 차지하고 있어, 영조와 정조가 세자로 있을 때 대리청정을 둘러싼 당시의 정치 내막 및 사도세자 사건 등 영조 당시의 정치 사정을 아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권14에 저자의 선고 서종옥과 선비(先비) 덕수 이씨의 행장이다. 권15에 시장(諡狀), 박사수(朴師洙), 이창의(李昌誼), 이행(李荇), 김상성(金尙星), 이전(李澱)의 시장이다. 권16은 여측편(여測篇)인데, 저자의 나이 46세이던 1761년 여름 병으로 인해 한가한 틈을 이용, 평소에 생각한 태극(太極), 음양오행(陰陽五行) 등의 역리(易理)와 사단칠정(四端七情) 등 이기설(理氣說) 및 천문, 일기(日氣) 등 자연 현상에 대한 고찰을 비롯하여 음률(音律), 진법(陣法), 시문 작법 등 다방면에 걸친 소견을 피력하고 있다. 여측이란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린다는 뜻으로 겸손하게 붙인 제목이다. 정치가와 학자로 널리 알려진 저자이니 만큼 중요한 전적이 된다.(인터넷 야후 2001)

 

  보명의숙(普明義塾) [敎育] : 용궁면 읍부리(邑部里)에 있던 학교로, 용궁청년회(龍宮靑年會)에서 1922년에 설립하여 이순성(李順成), 이종성(李鍾成), 김인배(金仁培)가 윤차(輪次)로 가르쳤다. 학생은 90명이었다.(東亞日報 1922.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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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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