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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3:임장부(1010재임)
예천고을원(3) : 임장부(1010.3.3 재임, 개심사지오층석탑을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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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장부(林長富)는 1010년(고려 현종 1) 3월 3일에 재임 중인 보주 호장(甫州戶長)이다.
임장부는 예천읍 남본2리 솔개들(松浦坪)에 있는 개심사지오층석탑(開心寺址五層石塔)을 쌓은 주동자로 동량(棟梁)이면서 호장이었다.
임장부는 종9품 상(上)에 해당되는 무관직(武官職)인 배융교위(陪戎校尉)를 겸직하기도 하였다.
이 석탑에 음각되어 있는 180자의 기문을 통해 볼 때 1010년(현종 1) 3월 3일에 보주의 호장 임장부의 어머니가 부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광군(光軍)과 향도(香徒) 그리고 승속(僧俗) 1만 명의 힘을 합쳐 100여 평 부지 위에 5층석탑을 세워 이듬해 4월 초8일 준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임장부가 보주 호장일 때인 1005년(목종 8)에는 10년 전(995)에 설치된 용주자사(龍州刺史)가 폐지되고 용주군(龍州郡)으로 내려 지사(知事)를 두었는데, 1012년(현종 3)에는 용궁군(龍宮郡)으로 고쳤다.
또 1018년(현종 9)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보주(醴泉), 은풍현(上下里面), 감천현(甘泉縣)이 안동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용궁군과 산양현은 상주의 속현이 되었다.
속현이 되면 고을 원이 파견되지 않고 안동이나 상주 고을 원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같은해 거란족이 예천에 쳐들어와 하리면 탑리에 있던 흥덕사(興德寺)가 불타고 석탑 3기가 파손되었다.
이 무렵 풍양면 흔효리의 석조여래입상이 제작 설립되고, 예천읍 용산리 왕승골에 백룡사석불입상 2구가 제작 안지되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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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장부(林長富) : 1010년(고려 현종 1) 3월 3일에 재임 중인 보주 호장(甫州戶長, 醴泉 郡守)이다. 임장부는 예천읍 남본2리 개심사지오층석탑의 축조(1011) 주동자로, 동량(棟梁)이면서 호장이었다. 임장부는 종9품 상(上)에 해당되는 무관직(武官職)인 배융 교위(陪戎校尉)를 겸직하였다. 이 석탑에 음각되어 있는 180자의 기문을 통하여 볼 때 1010년(현종 1) 3월 3일에 보주의 호장 임장부의 어머니가 부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광군(光軍)과 향도(香徒), 그리고 승속(僧俗) 1만 명의 힘을 합쳐 100여 평의 부지 위에 5층석탑을 세워 이듬해 4월 초8일에 준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개심사지 5층석탑 [記事] : 예천 번화가로 들어가는 길목인 예천읍 ''''솔개들''''이라 불리는 논 한복판에 자리한 개심사터 5층석탑(보물 제53호)은 고려시대인 1010년(현종 1년)에 건립됐다. 마음을 연다는 뜻의 開心寺가 있었던 자리인데 지금은 탑만 외로이 서 있다. 2층 기단위에 5층으로 세워진 이 석탑은 높이 4.3m로 그리 크진 않지만 정연한 비례와 적당한 상승감을 보여주고 있다. 2층 기단중 아래층에는 한 면에 眼像이 셋씩 나있고 그 안상 안에 십이지신상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 그 위 상층 기단엔 각 면마다 가운데 탱주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하나씩 팔부중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 그 위 1층 탑신의 남쪽 정면에는 양 옆에 칼을 잡고 서 있는 인왕산이 새겨져 있다. 이 탑엔 탑신과 갑석 처마 밑에 문자가 새겨져 있다. 상대갑석 처마 밑에 새겨진 96자를 해독하면 ''''고려 현종 원년(1010년)에 이 고을 호장 임장부의 어머니가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僧俗 10,000인의 힘을 모아 4월초파일에 준공했다'''' 는 내용이라고 한다.(산과 우리산악회 카페 2009.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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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지오층석탑 [記事] : 예천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인 예천읍 남본리, 검은 매가 나래를 펴고 내려앉으려는 형국인 흑응산(黑鷹山) 밑, ‘솔개들’ 한 복판의 논 가운데에 오층석탑이 단정히 서 있다. 마음을 연다는 뜻의 개심사(開心寺)가 있었던 자리인데 지금은 흔적이 없고 이 탑만 외로이 서 있다. 절도 이 탑이 세워진 시기에 같이 또는 좀 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없어진 시기는 알 수 없는 모양이다. 2층 기단 위에 5층으로 세워진 이 석탑은 높이 4,3m로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정연한 비례와 적당한 상승감을 지니고 있으며, 여러 모양의 그림과 글씨가 조각되어 있어 다른 곳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이채로운 탑이다. 2층 기단 중의 아래층에는 한 면에 안상(眼像)이 셋씩 나 있고 그 안상 안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하나씩 새겨져 있으며, 그 위 상층기단에는 각 면마다 가운데 탱주(撑柱)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하나씩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조각돼 있다. 또 그 위의 1층 탑신의 남쪽 정면에는 자물쇠가 꼭 채워진 문 모양과 양 옆에 칼을 잡고 서 있는 인왕상(仁王像)이 새겨져 있다. 전에 어딘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조각을 보았는데 아마도 탑에 봉안한 사리를 수호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 탑의 특징은 십이지신상과 팔부중상 외에도 탑신과 갑석 처마 밑에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탑신에 있는 글자는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안되고, 상대갑석(上臺甲石)처마 밑에 새겨진 96자는 형태는 온전하지만 난해한 고자(古字)여서 판독을 못하다가 최근 어느 학자에 의하여 명확하게 판독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이 고을 호장 임장부(戶長 林長富)의 어머니가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승속(僧俗) 1만인의 힘을 모아 4월 초파일에 준공하였다는 내용이라고 하니 이로써 탑의 건립시기와 건립주체가 밝혀졌을 뿐 아니라 권문세가나 호족세력이 아닌 일개 지방 아전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서민대중이 세운 것이라는 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안내하는 분의 말로는 50년 전 자기가 어렸을 적만 해도 탑신에 새겨진 글자들이 글을 몰라서 못 읽었지 글자는 제대로 보였었는데, 1000년 동안 보존되어온 글자들이 50년 사이에 모두 마멸된 것을 보면서 산업사회의 공해가 이토록 심각한 것임을 절감한다고 했다.(ask.nate.com 2004.09.06 21:15 조회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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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지5층석탑(開心寺址 5層石塔과 寄附文化 : 謙遜한 寄附精神을 담은 開心寺址 5層 石塔) [記事] : 예천 읍내를 가로지르는 조그마한 강가 들판에 높이 4m가 조금 넘는 아담하지만 기품 있는 5층탑이 외롭게 서 있다. 이 탑은 서민적인 조각 기법과 함께, 탑의 조성 배경과 시기, 기부자나 기여자의 명부가 적혀 있다는 데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탑이다. 우리나라에 많은 탑이 있으나 건립배경과 시기, 기부자 명단이 적혀 있는(塔記) 탑은 이 탑이 유일하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탑의 건립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탑의 규모가 줄어들고, 건립의 주체가 지방 호족이나 유지가 된다. 대개는 건립비용을 이들이 부담한다. 이러한 사실은 탑지(塔誌)에 기록되고 탑에 봉안되기도 하고, 사찰의 역사에 기록되기도 한다. 그런데 개심사지 5층석탑은 탑기가 새겨진 위치가 특별하다. 탑의 상층 기단부를 덮고 있는 덮개돌 아래에 모두 190자에 이르는 명문이 적혀 있다.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예천군 호장인 임장부의 어머니가 발원하였고, 좋은 사리를 구하여 예천군민과 다인현민으로 구성된 향도 및 광군조직을 동원해 탑을 지었다는 내용과 함께, 탑의 건립에 기여한 여러 이름이 같이 적혀져 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이 덮개돌의 아래쪽 면에 적혀 있어서 탑을 보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도록 했다. 탑의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에는 십이지신상과 8부중상이 아름답게 부조돼 있다. 만일 기여자의 이름을 탑의 바깥에 새겼다면 이런 조각상은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이 탑의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자신의 선행을 감추며 얼마나 겸손해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어느 누구인들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고 싶지 않으랴. 그래서 요즘 건립되는 탑들은 대개 웅장한 자태를 뽐내지만 영락없이 기단부나 몸돌에 기부자의 이름이 크게는 주먹만한 글자로 새겨져 도배하듯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탑은 천년이 지나도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는다. 오늘날 기부자들은 이제 천박함을 버리고 겸손한 기부정신을 이 탑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다. 이 탑은 우리에게 그런 교훈을 준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박준식(문헌정보학·교수)(gokmu.com 2008-11-30 오후 5:5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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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향리연구(高麗時代 鄕吏硏究) [冊] : 박경자의 저서로, 국학자료원에서 2006년 5월 11일에 발행하였다. 288쪽에 “...석탑을 건립한 동량이 호장이요 배융교위인 임장부의 모주라는 점에서 가능하다. 즉, 호장은 향리의 최고직이요 배융교위는 종9품 상에 ...”가 수록되어 있다. 판매가 10,000원(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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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장부(林長富)는 1010년(고려 현종 1) 3월 3일에 재임 중인 보주 호장(甫州戶長)이다.
임장부는 예천읍 남본2리 솔개들(松浦坪)에 있는 개심사지오층석탑(開心寺址五層石塔)을 쌓은 주동자로 동량(棟梁)이면서 호장이었다.
임장부는 종9품 상(上)에 해당되는 무관직(武官職)인 배융교위(陪戎校尉)를 겸직하기도 하였다.
이 석탑에 음각되어 있는 180자의 기문을 통해 볼 때 1010년(현종 1) 3월 3일에 보주의 호장 임장부의 어머니가 부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광군(光軍)과 향도(香徒) 그리고 승속(僧俗) 1만 명의 힘을 합쳐 100여 평 부지 위에 5층석탑을 세워 이듬해 4월 초8일 준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임장부가 보주 호장일 때인 1005년(목종 8)에는 10년 전(995)에 설치된 용주자사(龍州刺史)가 폐지되고 용주군(龍州郡)으로 내려 지사(知事)를 두었는데, 1012년(현종 3)에는 용궁군(龍宮郡)으로 고쳤다.
또 1018년(현종 9)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보주(醴泉), 은풍현(上下里面), 감천현(甘泉縣)이 안동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용궁군과 산양현은 상주의 속현이 되었다.
속현이 되면 고을 원이 파견되지 않고 안동이나 상주 고을 원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같은해 거란족이 예천에 쳐들어와 하리면 탑리에 있던 흥덕사(興德寺)가 불타고 석탑 3기가 파손되었다.
이 무렵 풍양면 흔효리의 석조여래입상이 제작 설립되고, 예천읍 용산리 왕승골에 백룡사석불입상 2구가 제작 안지되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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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장부(林長富) : 1010년(고려 현종 1) 3월 3일에 재임 중인 보주 호장(甫州戶長, 醴泉 郡守)이다. 임장부는 예천읍 남본2리 개심사지오층석탑의 축조(1011) 주동자로, 동량(棟梁)이면서 호장이었다. 임장부는 종9품 상(上)에 해당되는 무관직(武官職)인 배융 교위(陪戎校尉)를 겸직하였다. 이 석탑에 음각되어 있는 180자의 기문을 통하여 볼 때 1010년(현종 1) 3월 3일에 보주의 호장 임장부의 어머니가 부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광군(光軍)과 향도(香徒), 그리고 승속(僧俗) 1만 명의 힘을 합쳐 100여 평의 부지 위에 5층석탑을 세워 이듬해 4월 초8일에 준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개심사지 5층석탑 [記事] : 예천 번화가로 들어가는 길목인 예천읍 ''''솔개들''''이라 불리는 논 한복판에 자리한 개심사터 5층석탑(보물 제53호)은 고려시대인 1010년(현종 1년)에 건립됐다. 마음을 연다는 뜻의 開心寺가 있었던 자리인데 지금은 탑만 외로이 서 있다. 2층 기단위에 5층으로 세워진 이 석탑은 높이 4.3m로 그리 크진 않지만 정연한 비례와 적당한 상승감을 보여주고 있다. 2층 기단중 아래층에는 한 면에 眼像이 셋씩 나있고 그 안상 안에 십이지신상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 그 위 상층 기단엔 각 면마다 가운데 탱주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하나씩 팔부중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 그 위 1층 탑신의 남쪽 정면에는 양 옆에 칼을 잡고 서 있는 인왕산이 새겨져 있다. 이 탑엔 탑신과 갑석 처마 밑에 문자가 새겨져 있다. 상대갑석 처마 밑에 새겨진 96자를 해독하면 ''''고려 현종 원년(1010년)에 이 고을 호장 임장부의 어머니가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僧俗 10,000인의 힘을 모아 4월초파일에 준공했다'''' 는 내용이라고 한다.(산과 우리산악회 카페 2009.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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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지오층석탑 [記事] : 예천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인 예천읍 남본리, 검은 매가 나래를 펴고 내려앉으려는 형국인 흑응산(黑鷹山) 밑, ‘솔개들’ 한 복판의 논 가운데에 오층석탑이 단정히 서 있다. 마음을 연다는 뜻의 개심사(開心寺)가 있었던 자리인데 지금은 흔적이 없고 이 탑만 외로이 서 있다. 절도 이 탑이 세워진 시기에 같이 또는 좀 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없어진 시기는 알 수 없는 모양이다. 2층 기단 위에 5층으로 세워진 이 석탑은 높이 4,3m로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정연한 비례와 적당한 상승감을 지니고 있으며, 여러 모양의 그림과 글씨가 조각되어 있어 다른 곳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이채로운 탑이다. 2층 기단 중의 아래층에는 한 면에 안상(眼像)이 셋씩 나 있고 그 안상 안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하나씩 새겨져 있으며, 그 위 상층기단에는 각 면마다 가운데 탱주(撑柱)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하나씩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조각돼 있다. 또 그 위의 1층 탑신의 남쪽 정면에는 자물쇠가 꼭 채워진 문 모양과 양 옆에 칼을 잡고 서 있는 인왕상(仁王像)이 새겨져 있다. 전에 어딘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조각을 보았는데 아마도 탑에 봉안한 사리를 수호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 탑의 특징은 십이지신상과 팔부중상 외에도 탑신과 갑석 처마 밑에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탑신에 있는 글자는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안되고, 상대갑석(上臺甲石)처마 밑에 새겨진 96자는 형태는 온전하지만 난해한 고자(古字)여서 판독을 못하다가 최근 어느 학자에 의하여 명확하게 판독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이 고을 호장 임장부(戶長 林長富)의 어머니가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승속(僧俗) 1만인의 힘을 모아 4월 초파일에 준공하였다는 내용이라고 하니 이로써 탑의 건립시기와 건립주체가 밝혀졌을 뿐 아니라 권문세가나 호족세력이 아닌 일개 지방 아전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서민대중이 세운 것이라는 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안내하는 분의 말로는 50년 전 자기가 어렸을 적만 해도 탑신에 새겨진 글자들이 글을 몰라서 못 읽었지 글자는 제대로 보였었는데, 1000년 동안 보존되어온 글자들이 50년 사이에 모두 마멸된 것을 보면서 산업사회의 공해가 이토록 심각한 것임을 절감한다고 했다.(ask.nate.com 2004.09.06 21:15 조회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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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지5층석탑(開心寺址 5層石塔과 寄附文化 : 謙遜한 寄附精神을 담은 開心寺址 5層 石塔) [記事] : 예천 읍내를 가로지르는 조그마한 강가 들판에 높이 4m가 조금 넘는 아담하지만 기품 있는 5층탑이 외롭게 서 있다. 이 탑은 서민적인 조각 기법과 함께, 탑의 조성 배경과 시기, 기부자나 기여자의 명부가 적혀 있다는 데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탑이다. 우리나라에 많은 탑이 있으나 건립배경과 시기, 기부자 명단이 적혀 있는(塔記) 탑은 이 탑이 유일하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탑의 건립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탑의 규모가 줄어들고, 건립의 주체가 지방 호족이나 유지가 된다. 대개는 건립비용을 이들이 부담한다. 이러한 사실은 탑지(塔誌)에 기록되고 탑에 봉안되기도 하고, 사찰의 역사에 기록되기도 한다. 그런데 개심사지 5층석탑은 탑기가 새겨진 위치가 특별하다. 탑의 상층 기단부를 덮고 있는 덮개돌 아래에 모두 190자에 이르는 명문이 적혀 있다.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예천군 호장인 임장부의 어머니가 발원하였고, 좋은 사리를 구하여 예천군민과 다인현민으로 구성된 향도 및 광군조직을 동원해 탑을 지었다는 내용과 함께, 탑의 건립에 기여한 여러 이름이 같이 적혀져 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이 덮개돌의 아래쪽 면에 적혀 있어서 탑을 보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도록 했다. 탑의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에는 십이지신상과 8부중상이 아름답게 부조돼 있다. 만일 기여자의 이름을 탑의 바깥에 새겼다면 이런 조각상은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이 탑의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자신의 선행을 감추며 얼마나 겸손해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어느 누구인들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고 싶지 않으랴. 그래서 요즘 건립되는 탑들은 대개 웅장한 자태를 뽐내지만 영락없이 기단부나 몸돌에 기부자의 이름이 크게는 주먹만한 글자로 새겨져 도배하듯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탑은 천년이 지나도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는다. 오늘날 기부자들은 이제 천박함을 버리고 겸손한 기부정신을 이 탑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다. 이 탑은 우리에게 그런 교훈을 준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박준식(문헌정보학·교수)(gokmu.com 2008-11-30 오후 5:5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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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향리연구(高麗時代 鄕吏硏究) [冊] : 박경자의 저서로, 국학자료원에서 2006년 5월 11일에 발행하였다. 288쪽에 “...석탑을 건립한 동량이 호장이요 배융교위인 임장부의 모주라는 점에서 가능하다. 즉, 호장은 향리의 최고직이요 배융교위는 종9품 상에 ...”가 수록되어 있다. 판매가 10,000원(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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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