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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8:장준(1276이임)
예천고을원(8) : 장준(1276이임, 예천 단양 장씨 제학공파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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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張悛)은 1276년(충렬왕 2)에 이임한 보주 부사(甫州副使, 現 醴泉郡守)이다.
초명은 한문(漢文), 자는 사준(士悛), 호는 청독(淸獨), 본관은 단양, 예천 제학공파의 파조, 신(愼)의 아들이다.
1258년(고려 고종 45) 6월 14일에 평장사 최자와 간의대부 홍진이 시험관으로 실시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그 후 청환직에만 머루르다가 권문세족이 왕성하므로 조상의 가르침에 따라서 벼슬을 버리고 숨었다.
원종 임금이 절차를 갖추어서 벼슬로 불렀으나,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즉 원종이 기거주라는 벼슬로 불렀으나 궁궐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원종이 크게 화가 나서 태상경에게 이르기를, “이는 선비로서 임금을 욕되게 한 것이니, 역사 기록에 실지 않도록 하라”고까지 명령하였다.
원종이 승하한 후, 다시 벼슬에 나가 1276년(충렬왕 2)에 경상도 보주 부사를 지냈는데, <고려사> 권107의 권단전에서, “권단이 경상도 안렴사(現 道知事)로 있을 때(1276), 보주부사 장준은 집이 단산(現 丹陽)에 있어 보주와 가까웠고, 장준은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자이다.”라고 기록하였다.
그 후 국학좨주 겸 보문작 직제학에 이어 제학으로 승진하였다. 장준의 후손은 조선 명종 때 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잠재 장근이 예천읍 동본2리 덕만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렬왕(1275) 때는 원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모든 관직을 중국보다 낮추었는데, 예천고을 원도 지사(知事)에서 부사(副使)로 낮추어져서 예천 군수를 당시에는 보주 부사라고 하였다.
공민왕 때 모든 관직을 옛처럼 복구시켰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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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張悛, 張漢文) : 1276년(충렬왕 2)에 이임한 보주부사(甫州副使, 醴泉郡守)이다. 초명(初名)은 한문(漢文), 개명은 준(悛), 자는 사준(士悛), 호는 청독(淸獨), 본관은 단양, 예천 제학공파(提學公派)의 파조(派祖)이다. 1258년(高宗 45) 문과에 장원 급제(壯元及弟)하였다. 곧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17권 고종 45년 6월조에서, "왕이 장한문(張漢文) 등 33인에게 급제를 주었다."라고 기록하였고, <고려사> 제24권에서, "고종 45년 무오(戊午) 6월 14일(壬辰日)에 장한문 등에게 급제를 주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 <고려사> 제73권에서, "고종 45년 6월에 평장사(平章事) 최자(崔滋, 1186-1260)가 지공거(知貢擧), 간의대부 홍진(諫議大夫洪縉)이 동지공거(同知貢擧)로 되어 진사(進士, 朝鮮의 文科와 같음)를 뽑았는데, 장한문 등 33인에게 급제를 주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 후 청환직(淸宦職)에만 머무르다가 권문세족(權門勢族)이 왕성하므로 선조(先祖)의 가르침을 따라서 벼슬을 버리고 숨었다. 원종(元宗)이 절차를 갖추어서 벼슬로 불렀으나, 거절하고 끝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원종이 기거주(起居注) 벼슬과 청독(淸獨)이라는 호를 하사(下賜)하였으나, 궁궐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원종이 크게 화가 나서 태상경(太常卿)에게, "이는 선비로서 임금을 욕되게 한 것이니, 역사 기록에 실지 않도록 하라."라고까지 명하였다. 원종이 승하한 후, 다시 벼슬에 나가 1276년(忠烈王 2)에 경상도 보주 부사(甫州副使)를 지냈는데, <고려사> 제107권의 권단전(傳)에서, "권단이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 現 道知事)로 있을 때(1276) ...보주 부사(甫州副使) 장준(張悛)은 집이 단산(丹山, 現 丹陽)에 있어 보주(甫州)와 가까웠고 ...장준은 과거(科擧)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자이다..."라고 기록하였다. <고려사>에는 과거에 장원 급제한 이들만 모두 기록하고 있는데, 장씨(張氏)로서 고려조에 장원 급제한 이는 교(喬, 1023), 영재(令才, 1117), 문경(聞慶, 1172), 천기(天驥, 1240), 한문(漢文, 1258), 우빈(于贇, 1305) 6명이다. 그 후 국학 좨주 겸 보문각 직제학(國學祭酒兼寶文閣直提學)에 이어 제학(提學)으로 승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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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張漢文, 張悛) : 1276년(충열왕 2) 보주 부사(甫州副使 : 現 醴泉郡守)이다. “提學公 遺事//公의 諱는 漢文으로 쓰고, 初諱는 悛이며, 字는 士俊이며, 호는 淸獨이다. 高麗 高宗 四十五年 戊午(一二五八) 文科에 壯元 及弟하였다. 곧 <高麗史節要> 第十七卷 高宗 四十五年 六月條에서, "王이 張漢文 等 三十三人에게 及弟를 주었다.(賜張漢文等三十三人及弟)" 라고 記錄하였고, <高麗史> 卷 第二十四에서, "高宗 四十五年 戊午 六月 壬辰(十四) 日에 張漢文 等에게 及弟를 주었다." 라고 記錄하였다. 또, <高麗史> 卷 第七十三에서, "高宗 四十五年 六月에 平章事 崔滋(一一八六~一二六0)가 知貢擧요, 諫議大夫 洪縉이 同知貢擧로 되어 進士(朝鮮의 文科와 같음)를 뽑았는데, 張漢文 等 三十三人에게 及弟를 주었다." 라고 記錄하였다. 公께서는 그 後 淸宦職에만 머무르다가 權門勢族이 旺盛하므로 先祖의 가르치심을 따라서 벼슬을 버리고 숨었다. 元宗 임금께서 節次를 갖추어서 벼슬로 부르셨으나, 公께서는 拒絶하고 끝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元宗 임금께서 起居注 벼슬과 淸獨이라는 號를 下賜하셨으나, 宮闕을 向하여 네 번 절하고, 이를 辭讓했다. 이에 元宗이 크게 화가 나서 太常卿에게, "이는 선비로서 임금을 辱되게 한 것이니, 歷史 記錄에 실지 않도록 하라." 라고까지 命하셨다. 元宗 임금께서 昇遐하신 後, 公께서는 다시 벼슬에 나가 忠烈王 二年 丙子(一二七六)에 慶尙道 甫州 副使(現 醴泉郡守)를 지냈는데, <高麗史> 卷 第一0七의 權㫜傳에서, "권단이 慶尙道 按廉使(現 道知事)로 있을 때(一二七六)... 甫州 副使 張悛은 집이 丹山(現 丹陽)에 있어 甫州와 가까웠고... 장준은 科擧에 壯元으로 及弟한 者이다..." 라고 記錄하였다. <高麗史>에는 科擧에 壯元 及弟한 분들만 모두 記錄하고 있는데, 우리 張氏로서 高麗朝에 壯元 及弟한 어른들은 諱 喬(一0二三), 諱 令才(一一一七), 諱 聞慶(一一七二), 諱 天驥(一二四0), 諱 漢文(一二五八), 諱 于贇(一三0五) 여섯 어른이다. 當時 나라 制度가 科擧에서 及弟한 사람이 아니면 文翰官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公께서는 文翰職인 國學 祭酒 兼 寶文閣 直提學에 이어 提學으로 昇進하였다. 國學은 忠烈王 元年(一二七五)에 國子監을 改稱한 國立大學이었고, <圃蔭先生世譜>에서 公께 對하여, "國學典 祭酒(좨주) 兼 寶文閣 提學 封丹陽君 配 大芳李氏"로 記錄하고 있고, 丹陽은 忠肅王 五年(一三一八)에 丹山을 改稱한 地名이다. 以上의 여러 事實들을 살피면, 公께서는 高麗 高宗, 元宗, 忠烈王, 忠肅王 等 四朝를 섬겼다. 甲子譜(一八0四)와 丙寅譜(一八0六)의 跋文(諱 有極)을 살피니, 提學公의 以上 世系를 찾았으나 그 때까지 不敢連系한 理由가 重宗之道였기에, 宗議에 따라 太師公을 一世 祖로 모시게 되었다. 有極(一七六二~一八一三)의 跋文에서, "昨年(一八0三)에 丹陽의 宗老, 宗維, 師德 씨가 祖上의 뜻을 이어받아 丹陽張氏 家牒들을 한데 모아 族譜를 처음 編纂할 것을 스스로 責任지고, 여러 고을에 흩어져 있는 家牒들을 널리 모아서, 비로소 丹陽의 上仙巖寺에서 일을 했다... 내가 譜所로 가서 여러 門戶의 家牒을 여기저기 찾아서 眞實로 믿을 수 있는 文獻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家牒에 실리지 않은 것이므로 重宗之道 때문에 代를 敢히 이를 수 없으므로 提學公 이름 아래에 後孫들이 살필 수 있도록 簡略한 註釋을 달았다..." 라고 記錄하였다. 그리고 註釋에서, "平壤 張維翰의 家牒에 依하면, 元老 아랫代에 愼이 있고, 그 아랫代에 號를 淸獨公이라고 하는 公(提學公)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家牒에 실리지 않았으므로 敢히 世系를 잇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또한, 高麗史를 읽다가, 高麗 忠烈王 때 公께서 丹陽에 집을 두시고서 醴泉 郡守를 歷任하셨음을 알게 되어, 公의 事蹟 記錄 中 明宗을 元宗으로 修正 記錄하게 되었다. 이 모두를 公께서 引導하셨음으로 굳게 믿는다. 公은 生卒 未詳이나 四朝를 歷事한 것으로 미루어 80壽 以上 누렸음을 짐작하게 한다. 乙亥年(一九九五) 八月 日 後孫 炳昌 謹識”(丹陽張氏乙亥大同譜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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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보주부사 1276 이임) 47. 권단 [고려사]/ 정인지 외 저 | ㈜누리미디어/ ...도 전에 먼저 진주의 아전이 가지고 있던 은폐(은화)를 쓰고 부임 이후 백성들에게서 가혹하게 수탈하였으며 왕의 의복에 쓸 능라의 실 값을 받아 사사 일에 소비하였으며, 보주(甫州) 부사 장준(張悛)은 집이 단산(丹山)에 있어 보주와 가깝기 때문에 보주 사람.../ 고려사 > 고려사 번역문 > 《고려사》 제107권 - 열전 제20 > 권단/ 보주(甫州)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 역사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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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張漢文) [記事] : 본관(本貫) 단양(丹陽), 자(字) 사준(士俊), 이력(履歷) 고려(高麗)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단양군 장순익(張順翼)의 아들 장재일(張載鎰)이 고려조에서 상장군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장한문(張漢文)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보문각 직제학을 역임하고 나라에 공을 세워 단양군에 봉해져서 가세를 일으켰다./ [고려문과] 고종(高宗) 45년 (1258) 무오(戊午) 고종 45년 무오방(高宗 四十五年 戊午榜)/ [출전] 《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daum 웹문서 http://www.shinjongwoo.c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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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 [記事] : 흥성장씨 족보 - 고려시대 장씨의 활약/ 遣元使 高宗 35년 10월 1252 張純亮 樞密院副使 卒 高宗 39년 4월 1253 張子邦 校尉·散員 高宗 41년 8월 1258 張漢文(丹陽) 科擧 及第 高宗 45년 6월 1269 張季烈 太府少卿?御史大夫 元宗 10년 6월 1269 張顥 秘書郞 元宗 10년 12...(http://blog.naver.co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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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 [記事] : 張氏 人物의 年代/ 2009.09.25 신고/ ) 1207 張 鎰 昌寧張氏 始祖 章簡公 出生 高麗史 1215 張 暐 (張乙用) 興海張氏 始祖 純靖公 出生 " 1258 張漢文 高宗45年 壯元及第 (提學公) 丹陽張氏 1305 張 桂 大德9年 進士及第 紅牌 保存 (寶物第51號) 1392 太祖 朝鮮 開國(http://cafe.daum.net/kyelsung 결성장씨(結城張氏)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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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 [記事] : 장(張)씨의 분관 현항/ 2009.01.27 신고/ 단양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장순익 이후 몇 대를 실전하여 후손들은 장연유 계(張延裕系), 장한문 계(張漢文), 장춘 계(張春), 장맹우 계(張孟友), 장명한 계(張明漢), 장철견 계(張鐵堅), 장복지 계(張福智), 장만길 ...(http://cafe.daum.net/gbed9924 결성장씨 43대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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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 [記事] : 고려사 73권 지27 고종9년(1222) 4월 참지정사 최보순이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다./ 2008.06.10 신고/ 동진사 23명, 명경 2명, 은사 2명이 급제 하였다. 45년 6월 평장사(平章事) 최자(崔滋)를 지공거로 삼고 간의대부(諫議大夫) 홍진(洪縉)을 동지공거로 삼아 치른 과거에서 진사 장한문(張漢文) 등 33명이 급제 하였다.(http://cafe.daum.net/joodeokjae 주덕재 (전주최씨 문성공 후손 모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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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張漢文) [記事] : 저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일2009-10-30/ 장한문(張漢文)/ [고려문과] 고종(高宗) 45년 (1258) 무오(戊午) 고종 45년 무오방(高宗 四十五年 戊午榜)/ [출전]《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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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 [記事] : 고려왕조사 6 (부록-조선조 고려관계기록 외)/ e-Book/ 유재하 지음 | 학문사 | 2009.08.12/ 책본문 기마병. 를州.s州에 주둔. A몽고 奈..慾達의 군사, 平州에 와서 주둔. A과거에서 張漢文등 급제..A평장사 制f 별세. A7월. 流福情. 몽고에서 피살. A8월,.를9i .車羅大, 개경에 ... 323 페이지(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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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 [記事] : 고려왕조사 3 (명종-원종)/ e-Book/ 유재하 지음 | 학문사 | 2006.05.14/ 책본문 .임진일에 지공거(知貢擧) 최자(崔滋)와 동지공거(同知貢擧) 홍진(洪縉)이 장한문(張漢文)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북계 여러 성의 호장(戶長)·낭장(郞將)에게 각각 은 1근씩과... 585 페이지(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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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張悛)은 1276년(충렬왕 2)에 이임한 보주 부사(甫州副使, 現 醴泉郡守)이다.
초명은 한문(漢文), 자는 사준(士悛), 호는 청독(淸獨), 본관은 단양, 예천 제학공파의 파조, 신(愼)의 아들이다.
1258년(고려 고종 45) 6월 14일에 평장사 최자와 간의대부 홍진이 시험관으로 실시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그 후 청환직에만 머루르다가 권문세족이 왕성하므로 조상의 가르침에 따라서 벼슬을 버리고 숨었다.
원종 임금이 절차를 갖추어서 벼슬로 불렀으나,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즉 원종이 기거주라는 벼슬로 불렀으나 궁궐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원종이 크게 화가 나서 태상경에게 이르기를, “이는 선비로서 임금을 욕되게 한 것이니, 역사 기록에 실지 않도록 하라”고까지 명령하였다.
원종이 승하한 후, 다시 벼슬에 나가 1276년(충렬왕 2)에 경상도 보주 부사를 지냈는데, <고려사> 권107의 권단전에서, “권단이 경상도 안렴사(現 道知事)로 있을 때(1276), 보주부사 장준은 집이 단산(現 丹陽)에 있어 보주와 가까웠고, 장준은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자이다.”라고 기록하였다.
그 후 국학좨주 겸 보문작 직제학에 이어 제학으로 승진하였다. 장준의 후손은 조선 명종 때 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잠재 장근이 예천읍 동본2리 덕만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렬왕(1275) 때는 원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모든 관직을 중국보다 낮추었는데, 예천고을 원도 지사(知事)에서 부사(副使)로 낮추어져서 예천 군수를 당시에는 보주 부사라고 하였다.
공민왕 때 모든 관직을 옛처럼 복구시켰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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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張悛, 張漢文) : 1276년(충렬왕 2)에 이임한 보주부사(甫州副使, 醴泉郡守)이다. 초명(初名)은 한문(漢文), 개명은 준(悛), 자는 사준(士悛), 호는 청독(淸獨), 본관은 단양, 예천 제학공파(提學公派)의 파조(派祖)이다. 1258년(高宗 45) 문과에 장원 급제(壯元及弟)하였다. 곧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17권 고종 45년 6월조에서, "왕이 장한문(張漢文) 등 33인에게 급제를 주었다."라고 기록하였고, <고려사> 제24권에서, "고종 45년 무오(戊午) 6월 14일(壬辰日)에 장한문 등에게 급제를 주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 <고려사> 제73권에서, "고종 45년 6월에 평장사(平章事) 최자(崔滋, 1186-1260)가 지공거(知貢擧), 간의대부 홍진(諫議大夫洪縉)이 동지공거(同知貢擧)로 되어 진사(進士, 朝鮮의 文科와 같음)를 뽑았는데, 장한문 등 33인에게 급제를 주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 후 청환직(淸宦職)에만 머무르다가 권문세족(權門勢族)이 왕성하므로 선조(先祖)의 가르침을 따라서 벼슬을 버리고 숨었다. 원종(元宗)이 절차를 갖추어서 벼슬로 불렀으나, 거절하고 끝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원종이 기거주(起居注) 벼슬과 청독(淸獨)이라는 호를 하사(下賜)하였으나, 궁궐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원종이 크게 화가 나서 태상경(太常卿)에게, "이는 선비로서 임금을 욕되게 한 것이니, 역사 기록에 실지 않도록 하라."라고까지 명하였다. 원종이 승하한 후, 다시 벼슬에 나가 1276년(忠烈王 2)에 경상도 보주 부사(甫州副使)를 지냈는데, <고려사> 제107권의 권단전(傳)에서, "권단이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 現 道知事)로 있을 때(1276) ...보주 부사(甫州副使) 장준(張悛)은 집이 단산(丹山, 現 丹陽)에 있어 보주(甫州)와 가까웠고 ...장준은 과거(科擧)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자이다..."라고 기록하였다. <고려사>에는 과거에 장원 급제한 이들만 모두 기록하고 있는데, 장씨(張氏)로서 고려조에 장원 급제한 이는 교(喬, 1023), 영재(令才, 1117), 문경(聞慶, 1172), 천기(天驥, 1240), 한문(漢文, 1258), 우빈(于贇, 1305) 6명이다. 그 후 국학 좨주 겸 보문각 직제학(國學祭酒兼寶文閣直提學)에 이어 제학(提學)으로 승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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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張漢文, 張悛) : 1276년(충열왕 2) 보주 부사(甫州副使 : 現 醴泉郡守)이다. “提學公 遺事//公의 諱는 漢文으로 쓰고, 初諱는 悛이며, 字는 士俊이며, 호는 淸獨이다. 高麗 高宗 四十五年 戊午(一二五八) 文科에 壯元 及弟하였다. 곧 <高麗史節要> 第十七卷 高宗 四十五年 六月條에서, "王이 張漢文 等 三十三人에게 及弟를 주었다.(賜張漢文等三十三人及弟)" 라고 記錄하였고, <高麗史> 卷 第二十四에서, "高宗 四十五年 戊午 六月 壬辰(十四) 日에 張漢文 等에게 及弟를 주었다." 라고 記錄하였다. 또, <高麗史> 卷 第七十三에서, "高宗 四十五年 六月에 平章事 崔滋(一一八六~一二六0)가 知貢擧요, 諫議大夫 洪縉이 同知貢擧로 되어 進士(朝鮮의 文科와 같음)를 뽑았는데, 張漢文 等 三十三人에게 及弟를 주었다." 라고 記錄하였다. 公께서는 그 後 淸宦職에만 머무르다가 權門勢族이 旺盛하므로 先祖의 가르치심을 따라서 벼슬을 버리고 숨었다. 元宗 임금께서 節次를 갖추어서 벼슬로 부르셨으나, 公께서는 拒絶하고 끝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元宗 임금께서 起居注 벼슬과 淸獨이라는 號를 下賜하셨으나, 宮闕을 向하여 네 번 절하고, 이를 辭讓했다. 이에 元宗이 크게 화가 나서 太常卿에게, "이는 선비로서 임금을 辱되게 한 것이니, 歷史 記錄에 실지 않도록 하라." 라고까지 命하셨다. 元宗 임금께서 昇遐하신 後, 公께서는 다시 벼슬에 나가 忠烈王 二年 丙子(一二七六)에 慶尙道 甫州 副使(現 醴泉郡守)를 지냈는데, <高麗史> 卷 第一0七의 權㫜傳에서, "권단이 慶尙道 按廉使(現 道知事)로 있을 때(一二七六)... 甫州 副使 張悛은 집이 丹山(現 丹陽)에 있어 甫州와 가까웠고... 장준은 科擧에 壯元으로 及弟한 者이다..." 라고 記錄하였다. <高麗史>에는 科擧에 壯元 及弟한 분들만 모두 記錄하고 있는데, 우리 張氏로서 高麗朝에 壯元 及弟한 어른들은 諱 喬(一0二三), 諱 令才(一一一七), 諱 聞慶(一一七二), 諱 天驥(一二四0), 諱 漢文(一二五八), 諱 于贇(一三0五) 여섯 어른이다. 當時 나라 制度가 科擧에서 及弟한 사람이 아니면 文翰官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公께서는 文翰職인 國學 祭酒 兼 寶文閣 直提學에 이어 提學으로 昇進하였다. 國學은 忠烈王 元年(一二七五)에 國子監을 改稱한 國立大學이었고, <圃蔭先生世譜>에서 公께 對하여, "國學典 祭酒(좨주) 兼 寶文閣 提學 封丹陽君 配 大芳李氏"로 記錄하고 있고, 丹陽은 忠肅王 五年(一三一八)에 丹山을 改稱한 地名이다. 以上의 여러 事實들을 살피면, 公께서는 高麗 高宗, 元宗, 忠烈王, 忠肅王 等 四朝를 섬겼다. 甲子譜(一八0四)와 丙寅譜(一八0六)의 跋文(諱 有極)을 살피니, 提學公의 以上 世系를 찾았으나 그 때까지 不敢連系한 理由가 重宗之道였기에, 宗議에 따라 太師公을 一世 祖로 모시게 되었다. 有極(一七六二~一八一三)의 跋文에서, "昨年(一八0三)에 丹陽의 宗老, 宗維, 師德 씨가 祖上의 뜻을 이어받아 丹陽張氏 家牒들을 한데 모아 族譜를 처음 編纂할 것을 스스로 責任지고, 여러 고을에 흩어져 있는 家牒들을 널리 모아서, 비로소 丹陽의 上仙巖寺에서 일을 했다... 내가 譜所로 가서 여러 門戶의 家牒을 여기저기 찾아서 眞實로 믿을 수 있는 文獻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家牒에 실리지 않은 것이므로 重宗之道 때문에 代를 敢히 이를 수 없으므로 提學公 이름 아래에 後孫들이 살필 수 있도록 簡略한 註釋을 달았다..." 라고 記錄하였다. 그리고 註釋에서, "平壤 張維翰의 家牒에 依하면, 元老 아랫代에 愼이 있고, 그 아랫代에 號를 淸獨公이라고 하는 公(提學公)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家牒에 실리지 않았으므로 敢히 世系를 잇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또한, 高麗史를 읽다가, 高麗 忠烈王 때 公께서 丹陽에 집을 두시고서 醴泉 郡守를 歷任하셨음을 알게 되어, 公의 事蹟 記錄 中 明宗을 元宗으로 修正 記錄하게 되었다. 이 모두를 公께서 引導하셨음으로 굳게 믿는다. 公은 生卒 未詳이나 四朝를 歷事한 것으로 미루어 80壽 以上 누렸음을 짐작하게 한다. 乙亥年(一九九五) 八月 日 後孫 炳昌 謹識”(丹陽張氏乙亥大同譜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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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보주부사 1276 이임) 47. 권단 [고려사]/ 정인지 외 저 | ㈜누리미디어/ ...도 전에 먼저 진주의 아전이 가지고 있던 은폐(은화)를 쓰고 부임 이후 백성들에게서 가혹하게 수탈하였으며 왕의 의복에 쓸 능라의 실 값을 받아 사사 일에 소비하였으며, 보주(甫州) 부사 장준(張悛)은 집이 단산(丹山)에 있어 보주와 가깝기 때문에 보주 사람.../ 고려사 > 고려사 번역문 > 《고려사》 제107권 - 열전 제20 > 권단/ 보주(甫州)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 역사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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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張漢文) [記事] : 본관(本貫) 단양(丹陽), 자(字) 사준(士俊), 이력(履歷) 고려(高麗)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단양군 장순익(張順翼)의 아들 장재일(張載鎰)이 고려조에서 상장군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장한문(張漢文)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보문각 직제학을 역임하고 나라에 공을 세워 단양군에 봉해져서 가세를 일으켰다./ [고려문과] 고종(高宗) 45년 (1258) 무오(戊午) 고종 45년 무오방(高宗 四十五年 戊午榜)/ [출전] 《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daum 웹문서 http://www.shinjongwoo.c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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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 [記事] : 흥성장씨 족보 - 고려시대 장씨의 활약/ 遣元使 高宗 35년 10월 1252 張純亮 樞密院副使 卒 高宗 39년 4월 1253 張子邦 校尉·散員 高宗 41년 8월 1258 張漢文(丹陽) 科擧 及第 高宗 45년 6월 1269 張季烈 太府少卿?御史大夫 元宗 10년 6월 1269 張顥 秘書郞 元宗 10년 12...(http://blog.naver.co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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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 [記事] : 張氏 人物의 年代/ 2009.09.25 신고/ ) 1207 張 鎰 昌寧張氏 始祖 章簡公 出生 高麗史 1215 張 暐 (張乙用) 興海張氏 始祖 純靖公 出生 " 1258 張漢文 高宗45年 壯元及第 (提學公) 丹陽張氏 1305 張 桂 大德9年 進士及第 紅牌 保存 (寶物第51號) 1392 太祖 朝鮮 開國(http://cafe.daum.net/kyelsung 결성장씨(結城張氏)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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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 [記事] : 장(張)씨의 분관 현항/ 2009.01.27 신고/ 단양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장순익 이후 몇 대를 실전하여 후손들은 장연유 계(張延裕系), 장한문 계(張漢文), 장춘 계(張春), 장맹우 계(張孟友), 장명한 계(張明漢), 장철견 계(張鐵堅), 장복지 계(張福智), 장만길 ...(http://cafe.daum.net/gbed9924 결성장씨 43대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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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 [記事] : 고려사 73권 지27 고종9년(1222) 4월 참지정사 최보순이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다./ 2008.06.10 신고/ 동진사 23명, 명경 2명, 은사 2명이 급제 하였다. 45년 6월 평장사(平章事) 최자(崔滋)를 지공거로 삼고 간의대부(諫議大夫) 홍진(洪縉)을 동지공거로 삼아 치른 과거에서 진사 장한문(張漢文) 등 33명이 급제 하였다.(http://cafe.daum.net/joodeokjae 주덕재 (전주최씨 문성공 후손 모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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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張漢文) [記事] : 저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일2009-10-30/ 장한문(張漢文)/ [고려문과] 고종(高宗) 45년 (1258) 무오(戊午) 고종 45년 무오방(高宗 四十五年 戊午榜)/ [출전]《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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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 [記事] : 고려왕조사 6 (부록-조선조 고려관계기록 외)/ e-Book/ 유재하 지음 | 학문사 | 2009.08.12/ 책본문 기마병. 를州.s州에 주둔. A몽고 奈..慾達의 군사, 平州에 와서 주둔. A과거에서 張漢文등 급제..A평장사 制f 별세. A7월. 流福情. 몽고에서 피살. A8월,.를9i .車羅大, 개경에 ... 323 페이지(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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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문 [記事] : 고려왕조사 3 (명종-원종)/ e-Book/ 유재하 지음 | 학문사 | 2006.05.14/ 책본문 .임진일에 지공거(知貢擧) 최자(崔滋)와 동지공거(同知貢擧) 홍진(洪縉)이 장한문(張漢文)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북계 여러 성의 호장(戶長)·낭장(郞將)에게 각각 은 1근씩과... 585 페이지(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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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