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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11:조운흘1(1352이후-1374이전)
작성자장병창 @ 2010.01.09 06:15:31
  예천고을원(11) : 조운흘(1)(1352이후-1374이전, 문헌상 고려 때 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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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운흘(趙云仡, 1332-1404)은 고려 공민왕(1352-1374) 때 지보주사(知甫州事, 現 醴泉郡守)이다.


  경기도 양주 사람, 호는 석간, 본관은 풍양, 난계 김득배의 사위, 1357년(공민왕 6)에 문과에 급제,

  안동서기 등을 거쳐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형부 원외랑으로서 왕을 모시고 용궁면 덕봉리 왕의산(王衣山), 용문면 선리 어림성(御臨城)을 거쳐 안동, 다시 상리면 석묘리 춘생(春生), 문경, 상주, 개성까지 다녔다.

  1347년 봄에 전법 총랑 벼슬을 버리고 상주에서 살면서 일부터 미친 척하여 소를 타고 다녔다.

  1377년에 기용되어 좌사의대부, 판전교시사를 하였지만 1381년에 물러가 경기도 광주에 살면서 두 사찰을 다시 지어 노동자들과 노고를 함께 하였다.

  1388년에 다시 기용되어 밀직 제학, 서해도 도관찰출척사, 첨서밀직사사가 되었다.

  1392년(태조 1) 왕이 강릉 대도호부사에 임명하였는데, 은혜와 사랑이 있어 강릉의 사람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이듬해 검교정당문학으로 물러나 경기도 광주에 살았다. 정승 조준과 친하였는데, 어느 날 초청되어 갔다.

  기생들과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조운흘은 승려의 검은 옷에 삿갓을 쓰고 참석하였다가 눈을 감고 높은 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노래하니, 조준이 사과하여 말하기를, “선생이 이를 싫어하는군요”하고, 명하여 풍악을 중지시키고 차를 마시고 헤어졌다.

  병이 들자, 스스로 묘지를 짓기를, “자헌대부 정당문학 조운흘은 풍양현 사람이니, 고려 태조의 신하 평장사 조맹의 30대손이다. 공민왕 때 함안군 이일복의 제자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두루 중앙과 외직의 벼슬을 지냈으니, 다섯 주의 고을 원이 되고...”라고 하였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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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운흘(趙云흘) : 고려 공민왕 때 지보주사(知甫州事, 現 醴泉郡守)이다. 1332(충숙왕 복위 1)-1404(태종 4), 호는 석간(石磵), 본관은 풍양, 난계(蘭溪) 김득배(金得培)의 사위이다. 뜻을 세우는 것이 기이하게 걸출(奇傑)하여 옛스럽고, 호탕함이 남보다 뛰어나고 경전에서 가르치는 뜻을 곧이 곧대로 행하여 당시의 풍속(時俗)을 따르기를 즐겨하지 않으니, 기거 동작이 지극히 발랐다. 1357년(공민왕 6)에 문과에 급제, 안동 서기(安東書記), 합내 사인(閤內舍人), 1361년(공민왕 10)에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할 때 조정의 신하들이 많이 도망하여 숨어 구차하게 삶을 구하였으나, 조운흘은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으로서 호종하였다. 사건이 평정되자, 녹공이 3등으로 되었다. 세상 이속에 아무 욕심이 없고, 초연하게 세상 밖의 일에만 생각이 있었다. 1374년(공민왕 23) 봄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으로서 관직을 버리고 물러가 상주의 노음산(露陰山) 아래에 살면서 일부러 미치고 스스로 어두운 척 하였고,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소를 탔는데, ''''기우찬(騎牛讚)'''', ''''석간가(石磵歌)''''를 지어 그 뜻을 보이었다. 1377년(우왕 3)에 기용되어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올랐고, 다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옮겼지만, 그가 좋아할 바는 아니었다. 1381년(우왕 7)에 물러가 광주(廣州) 옛 원강촌(垣江村)에 살면서 자은사 승려 종림(慈恩僧宗林)과 더불어 세속을 떠나 교제하며 판교원(板橋院)과 하평원(河平院)의 양 사원을 중창(重創)하여 스스로 원주(院主)라고 칭하였는데, 해진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서 노무자들(役徒)과 더불어 그 노고를 같이하니, 지가라는 자가 그가 높은 벼슬(達官)인지 알지 못하였다. 1388년(우왕 14)에 기용되어 밀직 제학(密直提學)이 되었으나 그 때 조정에서 의논하여 각 도에 안렴사(按廉使, 現 道知事)가 직종의 차례(職秩)가 낮아 직무를 능히 거행할 수가 없다고 하여, 양부(兩府, 僉議府와 密直司)에서 위엄과 덕망이 있는 자를 골라 도관찰출척사(現 道知事)로 삼아 왕의 정치적 의견서(敎書)와 왕이 내리는 의장(儀仗)의 나무 도끼(斧鉞)를 주어 보냈는데, 조운흘은 서해도(西海道)의 도관찰출척사가 되어 기강을 진작시키고 지방 세력가를 억누르고 약한 이를 도와서,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털끝 만치도 용서하지 아니하니, 도내가 다스려졌다. 소환되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임명되었다. 1392년(태조 1) 가을에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여 강릉대도호부사를 제수하였는데, 은혜와 사랑이 있어 강릉의 사람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게 되었다. 1393년(태조 2) 가을에 병으로 사임하니,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임영되었다. 조운흘이 물러가 광주(廣州)의 별서(別墅)에 거처하였는데, 당시 검교의 예로 녹봉을 받게 되었으나 조운흘은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였다. 정승 조준(趙浚)이 조운흘과 더불어 서로 사귐이 있었는데, 손님을 전송하는 일로 인하여, 한강을 건넜다가 같은 재상과 더불어 기생들을 거느리고 술 거리를 싸가지고 가서 찾으니, 조운흘은 승려의 검은 옷(緇衣)에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문까지 나와 길에 두 손을 마주 잡고 얼굴을 앞으로 들며 허리를 굽혀 절(揖)하고 맞이하여 띠집(茅亭)에 이르러 앉았다. 조준이 풍악을 잡히고 술자리를 마련하니, 조운흘은 짐짓 귀가 먹어 듣지 못하는 척하고, 눈을 감고, 바르게 앉아서 높은 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노래한 것이 두 번이었는데, 옆에 마치 아무도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니, 조준이 사과하여 말하기를, "선생이 이를 싫어하는군요."하고, 명하여 풍악을 중지시키고, 차(茶)를 마시고 돌아갔다. 그가 세속을 희롱하기가 이와 같았다. 병이 들자, 스스로 묘지(墓誌)를 짓고, 아무 거리낌 없이 앉은 채로 죽었다. 그 묘지는 이러하였다.

   "자헌대부 정당문학 조운흘은 풍양현(豊壤縣, 京畿道 楊州) 사람이니, 고려 왕 태조의 신하 평장사 조맹(趙孟)의 30대 손이다. 공민왕 때에 함안군(咸安君) 이인복(李仁復)의 제자로서 과거에 급제(登科)하여 두루 중앙과 외직(中外)의 벼슬을 지냈으니 다섯 주의 수령이 되고, 네 도의 관찰사가 되어 비록 크게 드러날 자취도 없었으나 또한 더러운 이름도 없었다. 나이 73세에 병으로 광주(廣州) 옛 원성(垣城)에서 죽으니, 후손이 없다. 옛 양주(楊州) 아차산(蛾嵯山) 남쪽 마사야(摩詞耶)에 장사지낸다."라고 하였다. [저서] : 1) 정선(精選)한 시문집으로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이 있는데, 2권 1책, 10.9x15cm이다. 최해(崔瀣, 高麗)가 배점(排點)하였고, 순천부(順天府)에서 1566년(명종 21)에 발행하였다. 충북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김갑기(金甲起)가 역주(譯註) 하여 서울 이우출판사(二友出版社)에서 1983년에 출판한 <나려한시선(羅麗漢詩選)>(403, 147쪽, 23cm)의 부록에 <삼한시귀감>의 영인본(影印本)이 있는데, 성균관대 도서관(서울)에 소장되어 있다(인터넷 야후 2001). 2) 그는 신라와 고려 때의 작품을 추려엮은 한시집인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을 내었는데, 3권 1책이다. <삼한귀감(三韓龜鑑)>이라고도 하는 이 책은 최해(崔瀣)가 엮은 <동인지문(東人之文)> 중에서 다시 선집(選輯)하였는데, 최해의 비점(批點)이 그대로 실려있고, 현재 잔본(殘本)만 전하는 <동인지문>의 낙장(落張) 부분의 작품도 실려있어 이 책의 비중은 크다. 수록된 시는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고려 충렬왕 때까지의 작품으로 작자와 어수(語數)에 따라 분류하였다.(두산세계대백과사전, Yahoo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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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운흘(趙云흘) : 1332(충숙왕 복위1)-1404(태종 4), 고려 공민왕 때의 지보주사(知甫州事, 現 醴泉郡守), 치적이 있었다. 호는 석간(石磵), 본관은 풍양, 평장사(平章事) 맹(孟)의 후손, 난계(蘭溪) 김득배(金得培)의 사위,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제자, 1357년(공민왕 6)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안동 서기(安東書記)가 되고, 합내 사인(閤內舍人)을 거쳐 1361년 홍건적의 침입 때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으로 남쪽에 피란하는 왕을 호종(扈從)하여 1363년 2등 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 직강(國子直講)이 되고, 전라, 서해(西海), 양광(揚廣) 3도 안렴사(按廉使)를 거쳐 1374년(공민왕 23) 전법총랑(典法摠郞) 때 사직했다. 상주 노음산(尙州露陰山) 아래에 은거하며 ''''석간서하옹(石磵捿霞翁)''''이라 자칭하였다. 거짓 미치광이로 가장하여 자기의 자취를 감추었다. 출입할 때는 소를 타고 다니면서, <기우도(騎牛圖)>, <찬석간가(贊石磵歌)> 등 작품을 지었다. 1377년(우왕 3)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기용,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냈으나, 1380년 사퇴, 광주(廣州) 고원강촌(古垣江村)에 은거, 자은사(慈恩寺)의 승려 종림(宗林)과 교유(交遊)하며 초연하게 신선의 뜻을 품었고, 판교원(板橋院), 사평원(沙平院)을 중건하여 스스로 원주(院主)가 되었다. 허술한 옷에 초신을 신고 일군들과 함께 일하였다. 지나가는 사람은 그가 큰 벼슬을 지닌 사람인 줄 몰랐다. 1388년 전리판서(典理判書)에 또다시 기용되고, 이 해 창왕 즉위 후 서해도 도관찰사(西海道都觀察使)로 나가 왜구를 토벌하고, 첨서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1390년(공양왕 2) 계림부윤(鷄林府尹)을 역임하고, 1392년 조선 개국 후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 때 선정한 후 신병으로 사직, 다시 검교 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나, 검교(檢校)는 전례(前例)에 의하여 녹봉을 받았는데 조운흘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조운흘은 그 사람됨이 원래 소박하고 세세한 일에 구속되지 않는 걸출한 인물로서 자기의 뜻대로 꿋꿋이 행동하고 시세(時勢)를 따라 진퇴(進退)하지 않았다. 벼슬에서 물러나 광주(廣州) 별장(別莊)에서 여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석간집(石磵集)>, 편저로는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이 있다. <만기요람>에 ''''해도개발지론(海島開發之論)''''이란 글이 실려있다.

  그가 전라도에 있을 때에 평리(評理) 염지범의 첩의 형이 그 도당들과 함께 태산 사람인 김언룡의 말을 훔쳤다. 조운흘이 심문하니 다 자백하였으므로 그 벌로 천 필을 받고 그 두목을 죽였다. 마침 김윤관이 조운흘을 대신하였는데, 그는 염지범의 부탁을 받고 김언룡에게서 천 5백 필을 도로 찾아서 돌려 주었다. 그는 아전(衙前)을 시켜 심문한 문건을 가지고 김언룡 및 도적을 호송하여 법사에 가서 판결하게 하였다. 도적은 중로에서 문건을 훔쳐가지고 도망하여 염지범의 집에 가서 숨었다. 김언룡은 뒤를 따라 가서 그를 찾아 헌사에 고발하였다. 헌사에서는 염지범이 재상(宰相)으로서 도적을 비호한다고 규탄하고 그를 체포하려는데 염지범은 도망하였다. 김윤관을 볼기를 때리고 그의 이름을 삭제하였다. ᄋ 좌강이대부(1377)로 임명되었을 때, 자기의 동료들과 함께 임금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옛날부터 임금으로서 학문에 의거하지 않고, 능히 천하 국가를 다스린 일은 없습니다. 학문의 요령은 딴 것이 아니라 즉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고 뜻을 성실케 하고 마음을 바로잡는 것뿐입니다. 때문에 돌아가신 왕께서는 강관(講官), 시학(侍學)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도학(道學)을 밝히게 하여 은근히 바른 길을 걷게 한 것은 그 계획이 원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서연 강의(書筵講義)를 어떤 때는 진행하고 어떤 때에는 중지되고 있으니 저희들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선왕(先王)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다시 서연(書筵)을 차려 정직한 선비들로 하여금 날마다 측근에 있도록 하며 정부의 여가를 이용하여 경서와 역사를 학습하여 좋은 정치상 방도를 듣기에 재미를 붙이며 품성을 수양하여 최선의 정치를 실시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ᄋ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임명되었다가 또 밀직 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되었다. 당시에 안렴사(按廉使)의 직위가 낮아서 자기의 직무을 잘 수행하지 못하므로 양부(兩府)에서 위신과 명망이 있는 자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임명하고 교서(敎書)와 부월(부越)을 주어서 파견(派遣)하자는 의론(議論)이 있었다. 조운흘(趙云흘)은 서해도(西海道) 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갈 무렵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저는 듣건대 ''''좋은 미끼를 던지면 반드시 큰 고기가 모여 들고, 훌륭한 상을 준다면 반드시 좋은 장수가 나타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계속하기를, ''''실속없는 혜택을 주어 실제의 복을 받게 한다.''''라고 한 말은 잘 형용한 말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각 집마다 부유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고 국내 국외에서 걱정이 없을 때에도 위험성을 생각합니다. 하물며 우리 나라는 수로(水路)로는 왜국과 가깝고 육지로는 오랑캐 땅과 인접되고 있으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경은 서해(西海)로부터 양광(楊廣), 전라(全羅), 경상(慶尙)까지 바다길이 근 2천여 리가 됩니다. 바다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큰 섬은 대청, 소청의 교동, 강화(江華), 진도(珍島), 절영(絶影), 남해(南海), 거제(巨濟) 등 큰 섬이 20개나 있고, 작은 섬들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 섬들에는 토지가 비옥하고 어염(魚鹽)의 자원이 있는데 지금 모두 다 황폐되어 경영하지 않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응당 5군 장수와 8도 군관(軍官)들에게 각각 호부 금패(戶部金牌)를 주고 천호(千戶), 백호(白戶)들에게 패면(牌面)을 주어 크고 작은 바다 섬들을 그들의 식읍(食邑)으로 하고 이것을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하면 장수 자신의 부(富)로 될 뿐 아니라 자손 만대까지 생활이 충족할 것이니 이렇게만 하면 사람마다 전쟁에 나가기를 자원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전쟁에 나가기를 자원한다면 군함도 자체로 준비하며 군량도 자체로 해결하여 가지고 와서 유격군(遊擊軍)이 되어 적을 불의에 치게 된다면 적이 감히 우리를 노리지 못할 것입니다. 백성의 생활이 부유해지고 인구가 늘고 호수가 증가되어 촌락이 서로 잇닿아 일반 물정이 흥성거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백성은 어염(魚鹽)의 이익을 얻고 국가에서는 군량을 운반할 염려가 없어질 것입니다. 이리하여 조상의 토지가 오늘에 와서 다시 완정될 것입니다. 대신들과 의론하여 실시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우왕은 그의 글을 도당(都堂)에 회부하였다. 조운흘은 지방장관으로 있으면서 강기를 정돈하여 일신케 하고 억센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보호하였다. 법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추호도 용서하지 않아 관내가 아주 잘 안정되었다.

  죽을 무렵에 자기 묘지(墓誌)를 쓰기를, "조운흘은 본래 풍양(豊壤) 사람이며, 고려 태조의 신하 평장사(平章事) 조명(趙명)의 30대의 손자이다. 공민왕 때 흥안군 이인복의 시관 때에 과거(科擧)에 급제하였다. 서울과 지방 관리를 역임하여 5개 주(州)의 수령(守令)으로 있었고, 4개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비록 커다란 명성과 업적은 없다 하더라도 과오은 없었다. 나이 73세에 병으로 광주 고원성에서 죽었다. 자식이 없었다. 해와 달을 구슬로 삼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제물로 삼았다. 옛 양주(楊州) 아자산 남쪽 마가야에 안장(安葬)하였다. "행단 우의 공자, 쌍 나무 아래의 석가모니 등 고금의 성현들이 어디 유달리 생존하고 있는 자가 있는가? 아! 인생은 끝났다."라고 하였다.(石磵集, 高麗史 112卷 趙云흘傳, 筆苑雜記 第2卷, 醴泉郡誌, 海東名將傳 1卷 김종권 엮음 277-278쪽, 燃黎室記述 別集 第17卷 邊圄典故 諸島, 용재총화 第3卷, 高麗史節要 第34卷 恭讓王元年九月, 三韓詩龜鑑, 海東雜錄 1卷, 文學大事典 1981 905쪽, 原色世界大百科事典 25卷 239쪽, 韓國人의 姓譜, 新增東國輿地勝覽 第24卷 安東大都護府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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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운흘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320_0260/ 여지도서 / 慶尙道 / 安東 / 名宦 / 趙云仡 恭愍朝爲書記 ...(www.history.go.kr 2007)

조운흘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33_0110_0010_0130/ 동사략/紀年東史約卷之九 朝鮮茅亭李源益編 / 高麗紀 / 二十一年 / ...以崔瑩爲門下侍中, 我太祖守侍中, 李穡判三司事, 禹玄寶 尹珍 安宗源爲門下贊成事, / 瑩與我太祖入政房, 欲盡出林廉所用, 太祖, 曰林廉執政日久, 凡士大夫皆其所擧, 今但問才之賢否耳, 烏咎其旣往乎, 宗源軸之子, 淸謹安詳有名當世, 時, 趙云仡爲西海道觀察使, 將行上書, 曰國界西海二千餘里, 水中可居之洲, 曰大靑小靑絶/ <9권01_0369-2>/ 影等, 大小島不可勝數, 皆有沃壤魚鹽之利, 宜令五軍將帥, 以大小海島爲其食邑, 不惟一身之富, 子孫萬世衣食有餘, 人人誰不各自爲戰乎, 各自爲戰, 則戰艦自備兵糧自齎, 而爲遊兵出其不意, 則賊不敢窺?矣, 禑下其書都堂, 云?自號石澗, 捿霞翁, 佯狂自晦出入必騎牛, 者騎牛圖, 贊石澗歌, 以見志退居廣州古垣, 江村營沙平板橋, 兩院自稱院, 主?衣草?, 與役徒同其勞, 不知其爲達官, / 修漢陽重興城, ...(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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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운흘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33_0120_0010_0080/ 동사략 / 紀年東史約卷之十 朝鮮茅亭李源益, 編 / 本朝紀 / 三十一年 / ...與咸傳霖 趙英珪等胥動浮言, 崙本車姓之外裔, ?屬與咸趙鄭道傳同派而原?之修譜也, 直書不諱, 崙等含憾, 至是乘機潛遣力士, 追原?於松京路中, 椎殺之, 以馬?索穿結其舌曳而辱之, 內外族黨之迎候於松麻之間者, 滿月臺東北三十里有麻洞松峴諺稱?痛洞 七十餘人竝殞, 仍?海州神光寺所藏車柳世譜, 吉再聞其死, 引書床投燈而哭, 趙云仡執杖擊案, 李養中打破?器, 皆傷其非命也, / 贈車原?爲左贊成, / 方河崙等之陷原?也, 崔? 金桂蘭力辨其?, 靖安君怒叱崙, 曰予舍祀?今爾頹耶, 特贈贊成而猶未正奸臣矯殺之罪, 及原?子安卿等俱擧賢良, 崙等又以崔 瑩也 鄭夢周也 餘黨撫安羽翼等說, ?誣不乙, 安卿托郊西觀漲, 自經於林木間, ...(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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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운흘 [記事] : 태종실록 8권/ 태종 4년( 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12월 5일 임신 1번째 기사/ 검교 정당 문학 조운흘의 졸기/ 검교 정당 문학(檢校政堂文學) 조운흘(趙云仡)이 졸(卒)하였다. 조운흘은 호(號)가 석간(石磵)이었는데, 뜻을 세우는 것이 기걸(奇傑)하여 옛스럽고, 호탕(豪宕)함이 남보다 뛰어나고, 경적(經籍)의 뜻을 곧이 곧대로 행하여 시속(時俗)을 따르기를 즐겨하지 않으니, 기거 동작이 지극히 발랐다. 신축년에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구적(寇賊)을 피하여 남쪽으로 순행(巡行)할 때 조정의 신하들이 많이 도망하여 숨어 구차하게 삶을 구하였으나, 조운흘은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으로 호종(扈從)하였다. 사건이 평정되자, 녹공이 3등으로 되었다. 세상 이속에 아무 욕심이 없고 초연(超然)하게 세상 밖의 일에만 생각이 있었다. 홍무(洪武) 갑인년 봄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으로서 관직을 버리고 물러가 상주(尙州)의 노음산(露陰山) 아래에 살면서 일부러 미치고 스스로 어두운 척 하였고,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소를 탔는데, 기우찬(騎牛讚)․석간가(石磵歌)를 지어 그 뜻을 보이었다. 정사년에 기용되어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에 제배되었고, 다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옮겼지만, 그가 좋아한 바는 아니었다. 신유년에 물러가 광주(廣州) 옛 원강촌(垣江村)에 살면서 자은승(慈恩僧) 종림(宗林)과 더불어 세속을 떠나 교제하여, 판교원(板橋院)과 사평원(沙平院)의 양 사원을 중창(重創)하여 스스로 원주(院主)라고 칭하였는데, 해진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서 역도(役徒)와 더불어 그 노고를 같이하니, 지나가는 자가 그가 달관(達官)인지 알지 못하였다. 무진년에 기용되어 밀직 제학(密直提學)이 되었으나, 그 때 조정에서 의논하여, 각 도에 안렴사(按廉使)가 직질(職秩)이 낮아 직사(職事)를 능히 거행할 수가 없다고 하여, 양부(兩府)에서 위엄과 덕망이 있는 자를 골라 도관찰 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삼아 교서(敎書)와 부월(斧鉞)401) 을 주어 보냈는데, 조운흘은 서해도(西海道)의 도관찰 출척사가 되어 기강을 진작시키고, 호강(豪强)한 이를 억누르고 약한 이를 도와서,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털끝만치도 용서하지 아니하니, 부내(部內)가 다스려졌다. 소환되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제배되었다. 임신년 가을에 태상왕(太上王)이 즉위하여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를 제수하였는데, 은혜와 사랑이 있어 부(府)의 사람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게 되었다. 계유년 가을에 병으로 사임하니, 검교 정당 문학(檢校政堂文學)에 제배되었다. 조운흘은 물러가 광주(廣州)의 별서(別墅)에 거처하였는데, 당시 검교(檢校)의 예로 녹봉을 받게 되었으나, 조운흘은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였다. 정승 조준(趙浚)이 조운흘과 더불어 교유가 있었는데, 손님을 전송하는 일로 인하여 한강(漢江)을 건넜다가 동렬(同列) 재상과 더불어 기악(妓樂)을 거느리고 주찬(酒饌)을 싸 가지고 가서 찾으니, 조운흘은 치의(緇衣)402) 에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문(門)까지 나와 길게 읍(揖)하고 맞이하여 모정(茅亭)에 이르러 좌정(坐定)하였다. 조준이 풍악을 잡히고 술자리를 마련하니, 조운흘은 짐짓 귀가 먹어 듣지 못하는 척하고, 눈을 감고 정좌(正坐)하여 높은 소리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창(唱)한 것이 두 번이었는데, 옆에 마치 아무도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니, 조준이 사과하여 말하기를, ꡒ선생이 이를 싫어하는군요.ꡓ하고, 명하여 풍악을 중지시키고, 차(茶)를 마시고 돌아갔다. 그가 세속을 희롱하고 스스로 고고하기가 이와 같았다. 병이 들자, 스스로 묘지(墓誌)를 짓고, 아무 거리낌 없이 앉은 채로 죽었다. 그 묘지는 이러하였다. ꡒ자헌 대부(資憲大夫) 정당 문학(政堂文學) 조운흘(趙云仡)은 풍양현(豊壤縣) 사람이니, 고려왕 태조(太祖)의 신하 평장사(平章事) 조맹(趙孟)의 30대 손이다. 공민왕 대에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하로서 등과(登科)하여 두루 중외(中外)의 벼슬을 지냈으니, 다섯 주(州)의 수령이 되고, 네 도(道)의 관찰사가 되어, 비록 크게 드러난 자취도 없었으나 또한 더러운 이름도 없었다. 나이 73세에 병으로 광주(廣州) 옛 원성(垣城)에서 종명(終命)하니, 후손이 없다. 일월(日月)로써 상여(喪輿)의 구슬을 삼고, 청풍(淸風)과 명월(明月)로써 전(奠)을 삼아, 옛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남쪽 마하야(摩訶耶)403) 에 장사지낸다. 공자(孔子)는 행단(杏壇)404) 위이요, 석가(釋迦)는 사라 쌍수(沙羅雙樹)405) 아래였으니, 고금의 성현(聖賢)이 어찌 독존(獨存)하는 자가 있으리오! 아아! 인생사(人生事)가 끝났도다.ꡓ/【영인본】 1 책 316 면/【분류】 *인물(人物) / *어문학-문학(文學)/ [註 401]부월(斧鉞) :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큰 도끼와 작은 도끼. ☞ / [註 402]치의(緇衣) : 검은 옷. 승복(僧服). ☞ / [註 403]마하야(摩訶耶) : 마하(摩訶:Maha)는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는 대(大)․다(多)․승(勝)의 삼의(三義)이고, 야(耶:ya)는 불타(佛陀) 제자(弟子)의 일문(一門)을 말함. 곧 불타(佛陀)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들이 있는 곳. ☞ / [註 404]행단(杏壇) : 옛날 공자(孔子)가 사수(泗洙)에서 그 제자(弟子)들을 가르치던 유지(遺趾). 공자(孔子)는 행단(杏壇) 위에서 강(講)하였다고 함. ☞/ [註 405]사라 쌍수(沙羅雙樹) : 석가모니가 인도의 구시나갈라성(拘尸那揭羅城) 밖 발제하(跋堤河)가에 있는 사라수(沙羅樹:Sala)의 수풀 속에서 입적(入寂)할 때, 그 주위 사방에 각각 한 쌍씩 서 있었던 있었던 사라수(沙羅樹). 하나의 뿌리에서 두 개의 줄기가 나와서 한 쌍을 이루었다고 함. ☞ (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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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운흘 [記事] : 선조실록 111권/ 선조 32년( 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4월 25일 갑술 4번째 기사/ 홍문관이 이순신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관해 아뢰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ꡒ이순신(李舜臣)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관하여 전례를 고찰한 다음 아뢸 것을 전교하셨습니다. 우리 나라의 전사(前事)에, 신라(新羅)의 대각간(大角干) 김유신(金庾信)의 사당은 강릉부(江陵府) 화부산(花浮山)에 있는데 이는 관청에서 세운 것인지 백성들이 건립한 것인지 고증할 수가 없으며, 고려의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의 사당은 진주(晉州) 부중에 있는데 천희(天禧)4263) 중에 거란병(契丹兵)과의 전투에서 공이 있자 고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고려 문하 주서(門下注書) 길재(吉再)의 사당은 선산부(善山府) 금오산(金烏山) 아래 있고, 감사가 현재 건립하고 있는 포충사(褒忠祠)와 표절사(表節祠)는 평양부(平壤府)에 있습니다. 고려 고종조(高宗朝)에 필현보(畢玄甫)가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군 정의(鄭?)를 파견하여 현보를 효유하게 했었는데 오히려 현보가 그를 주장으로 삼으려 하여 유혹도 하고 협박도 하였지만 굴복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장서기(掌書記) 오선각(吳先覺)은 묘청(妙淸)의 난리 때 어리석은 체하며 참여하지 않았고 대장군 조인(趙璘)은 신돈(辛旽)을 죽이려고 꾀하다가 그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만력(萬歷)4264) 기축년4265) 에 감사 윤두수(尹斗壽)가 이들을 모두 정표(旌表)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권징(權徵)이 잇따라 부임하여 위에 알려서 사액(賜額)을 받았습니다. 고려의 안종원(安宗源), 본조의 조운흘(趙云仡)․신유천(辛有天)․유양(柳亮)은 모두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지냈는데, 백성들이 덕정(德政)에 감화되어 모두 생사당을 건립했고, 녹도 만호(鹿島萬戶) 이대원(李大源)은 손죽도(損竹島)에서 전사하였는데 조정에서 포상(褒賞)과 벼슬을 더해 주었으며 감사 윤두수가 본진(本鎭) 수군(水軍)들의 소원에 따라 사당을 세워 그가 죽은 날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이 밖에는 상고할 것이 없었습니다.ꡓ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영인본】 23 책 605 면/【분류】 *풍속-예속(禮俗), *인사-관리(管理), *역사-전사(前史)/ [註 4263]천희(天禧) : 송 진종(宋眞宗)의 연호. ☞ / [註 4264]만력(萬歷) : 명 신종(明神宗) 연호. ☞ / [註 4265]기축년 : 1589 선조 22년. ☞ (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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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운흘 [記事] : 정조실록 37권/ 정조 17년( 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4월 29일 신묘 3번째 기사/ 장연의 대청도 소청도에 백성을 모아 농사짓게 하다/ 장연(長淵)의 대청도(大靑島)와 소청도(小靑島)에 백성들을 모집하여 농사짓고 살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앞서 좌참찬 정민시가 아뢰기를, ꡒ서북의 폐사군 지역인 후주(厚州)의 서남쪽 섬들은 처음에 야인들이 들어와 살고 해적들이 침략해옴으로 인해서 그 땅을 버려두었지만, 지금은 야인이나 해적의 걱정이 없어진 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백성들이 농사짓고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옛말에 날로 백리의 땅을 넓힌다 하였는데, 지금 우리는 유용하게 쓸 땅을 노는 땅으로 두고 있으니 극히 무의미한 일입니다. 고려 때 조운흘(趙云仡)은 ꡐ대청과 소청 등의 섬은 모두 비옥한 땅과 고기 잡고 소금 굽는 이익이 있다.ꡑ 하였고, 고 상신 유성룡은 ꡐ신미도(身彌島) 등은 땅이 넓어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사람이 살 수 있다.ꡑ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장연의 대청도와 소청도를 황해 수사로 하여금 자신의 비장(裨將)을 보내 둘러보아 장문하게 하고, 선천(宣川)의 신미도와 철산(鐵山)의 대가차리도(大加次里島)․가도(?島)는 선천 부사가 직접 둘러보아 장문하게 한 뒤에 의논하여 조처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ꡓ 하니, 상이 그가 아뢴 말을 합당하게 여겼었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 황해도 수군 절도사 이우현(李禹鉉)이 치계하기를, ꡒ대청도는 동서의 거리는 30리이고, 남북의 거리는 20리입니다. 동쪽으로 소강 행영(所江行營)과의 거리는 뱃길로 2백 리이고, 북쪽으로 백령진(白翎鎭)과의 거리는 30리이며, 동북쪽으로 장연(長淵) 무룡포(舞龍浦)와의 거리는 1백 30리입니다. 겹겹의 산과 봉우리가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내동(內洞)․고사동(庫舍洞)․사언동(沙堰洞)․판안구미(板案仇味) 등 네 개의 큰 골짜기가 있습니다. 내동은 북쪽의 높은 산봉우리 아래 부스러진 기와 조각들이 있는데, 세속에 전해오는 말로는 원(元)나라 황제가 살았던 옛터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래는 바로 옥자포(玉子浦)로 길이는 10리쯤 되고 너비는 수리(數里)쯤 되는데 좁은 곳도 2백여 보(步)는 되었습니다. 그런데 윗쪽은 토질이 척박하여 다만 사이 사이로 밭을 만들 수 있었고, 아랫쪽은 모래땅이 기름져서 개간할 만하였습니다. 고사동은 길이가 3리쯤 되고 너비는 2백여 보쯤 되는데, 윗쪽은 층을 이루는 바위와 널려진 돌들이 묻혀 있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여 경작할 만한 땅이 없고 아래쪽은 지형이 조금 평평하면서 흙빛이 거무스레하여 개간할 만하였습니다. 그런데 골짜기 어귀의 포구와 잇닿는 곳에 가로막은 뚝 하나가 있었는데 모두가 돌무더기라서 매양 밀물이 들 때이면 짠물이 스며들어 왔습니다. 사언동은 하나의 긴 골짜기에 불과합니다. 양쪽의 벼랑은 모두 암벽이고 가운데 작은 개울 하나가 구불구불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어 전혀 개간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판안구미는 너비가 사언동과 대략 서로 같은데, 골짜기 막바지에 땅이 평평하여 백여 말[斗]의 곡식을 부릴 만하였습니다. 대체로 네 골짜기 중 내동이 가장 개간하기에 적합하고 그밖의 세 골짜기는 산이 아니면 골짜기이고 골짜기가 아니면 벼랑이며, 솔․느릅․뽕․상수리․개암․오동․떡갈․노나무 등이 곳곳마다 빽빽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그리고 사면의 바다 기슭은 가파른 벼랑이라서 방어 시설을 할 수 없고 어살을 칠 곳도 없으며 소금이나 굽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소청도는 대청도 남쪽 뱃길로 30리쯤에 대청도와 마주하여 있습니다. 남북이 10여 리이고 동서가 5리인데 북쪽으로 백령진과의 거리는 60리이고, 동쪽으로 소강 행영과의 거리는 1백 80리이며, 동북쪽으로 장연의 무수룡포(舞袖龍浦)와의 거리는 1백 50리입니다. 네 개의 산봉우리가 늘어서 솟아 있는데, 동북쪽으로는 사대구미(寺垈仇味)․경생동(鯨生洞)․모전구미(茅田仇味)․탑동(塔洞) 등 네 개의 골짜기가 있으나 밑바닥까지 다 석벽(石壁)이어서 한뙈기도 경작할 만한 땅이 없고, 남쪽으로는 능동(能洞)과 왜진동(倭津洞)이 있으나 모두 바닷가에 바싹 붙어 있으며, 서쪽으로는 우모진(牛毛津)․죽전현(竹田峴)․내진(內津) 등 세 곳이 있으나 또한 모두 높고 험준하여 씨를 뿌려 가꿀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섬의 서남쪽은 땅이 비옥하므로 개간해서 전답을 만들만합니다. 나무들은 대체로 떡갈나무가 많고 동백(冬栢)과 춘백(春栢)이 십중 칠팔이었습니다.ꡓ 하니, 비변사가 아뢰기를, ꡒ지금 백성의 수효가 날로 늘어가는 때에 모든 이용 후생에 관계되는 도리를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두 섬의 면적이 이미 광활하니, 백성들에게 경작을 허락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하겠습니다. 또 해상의 방어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배들이 출몰하여 고기를 잡아가지 않는 해가 없습니다. 만일 지금부터 땅을 개간하고 백성을 모아들여 그들을 추격하여 잡고 감시하게 하기를 마치 연해의 여러 곳과 같이 한다면 또한 변경을 굳건히 하는 정사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백성을 모아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고, 농우소와 종자 곡식을 편리할 대로 도와주게 하되, 우선은 나무를 베어 팔아서 개간하는 데에 드는 물력(物力)에 보탬이 되도록 하게 하소서.ꡓ 하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다./ 【영인본】 46 책 385 면/ 【분류】 *호구(戶口) / *농업(農業) / *군사(軍事) / *외교(外交) / *과학-지학(地學)(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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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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