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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11-2:조운흘(1352이후-1374이전)
예천고을원(11-2) : 조운흘(1352이후-1374이전, 문헌상 고려 때 유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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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記事] :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ID : np_da_1939_07_30_0840/ 신문명 동아일보 / 기사제목 山岳詩人 ; 石磵의 淸狂(滄海) / 발행년월일 1939-07-30 / 면수 03 / 단수 03 / 표제어 조운흘(趙云仡, 石磵)(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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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記事] : 사진유리필름자료 / ID : fl_001_004_001_0005 / 제목 三韓詩龜鑑(1)/ 분류 古書 集部 總集類 / 등록번호 사자 0762 / 본문 三韓詩龜鑑(1) : 崔瀣(1287~1340)가 신라 고려 명현의 시문을 모은 東人之文 二十五卷을 정선한 三韓詩龜鑑 明宗 45年(1566) 順天府 重刊本의 卷之上 卷首 부분 崔致遠 寓興條. 拙翁崔瀣 批點 石磵趙云?(1332~1404) 精選, 배접지가 萬曆 元年 전라감사문서이다. / 설명 趙云仡, 嘉靖 45年 (1566)/ 木版本, 1(2), 한문/ 四周雙邊, 8행 14자, 上下內向黑魚尾, 上黑口/ 卷首題:三韓詩龜鑑/ 소장:東京市 內閣文庫, 현재 日本國會圖書館上野分館(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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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記事] : 사진유리필름자료 / ID : fl_001_004_001_0052 / 제목 三韓詩龜鑑(1)/ 분류 古書 集部 總集類 / 등록번호 GF 2018 [16-145-03] / 본문 三韓詩龜鑑(1) : 崔瀣(1287~1340)가 신라․고려 명현의 시문을 모은 東人之文 二十五卷을 정선한 三韓詩龜鑑 明宗 45年(1566) 順天府 重刊本의 卷之上 卷首 부분으로 崔致遠 寓興條, 拙翁崔瀣批點 石磵趙云仡(1332~1404) 精選. 배접지가 萬曆 元年 전라감사의 문서이다. / 설명 趙云仡, 嘉靖 45年 (1566)/ 木版本, 1, 한문/ 四周雙邊, 8행 14자, 上下內向黑魚尾, 上黑口, 상태양호/ 사자 0762와 중복, 본1998, 卷首題:三韓詩龜鑑/ 소장:東京市 內閣文庫, 현재 日本國會圖書館上野分館(www.history.go.kr 2007)
조운흘 [記事] :사진유리필름자료/ ID : fl_001_004_001_0006/ 제목 三韓詩龜鑑(2)/ 분류 古書 集部 總集類/ 등록번호 사자 0763 / 본문 三韓詩龜鑑(2) : 崔瀣(1287~1340)가 신라․고려 名賢의 시문을 모은 東人之文 二十五卷을 정선하여 편찬한 三韓詩龜鑑으로서, 본 자료는 明宗 45年(1566) 順天府 重刊本의 卷下 2頁. 拙翁崔瀣 批點 石磵趙云仡(1332~1404) 精選 등이 쓰여 있는데, 배접지는 萬曆 元年 전라감사문서. / 설명 趙云仡, 嘉靖 45年 (1566)/ 木版本, 2(4), 한문/ 四周雙邊, 8행 114자, 上下內向黑魚尾, 上黑口/ 卷首題:三韓詩龜鑑/ 소장:東京市 內閣文庫, 현재 日本國會圖書館上野分館(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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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記事] : 사진유리필름자료 / ID : fl_001_004_001_0053 / 제목 三韓詩龜鑑(2-1)/ 분류 古書 集部 總集類 / 등록번호 GF 2019 [16-145-04] / 본문 三韓詩龜鑑(2-1) : 崔瀣(1287~1340)가 신라․고려 名賢의 시문을 모은 東人之文 二十五卷을 정선하여 편찬한 三韓詩龜鑑으로서, 본 자료는 明宗 45年(1566) 順天府 重刊本의 卷下 2頁. 拙翁崔瀣批點 石磵趙云仡(1332~1404)精選 등이 쓰여 있는데, 배접지는 萬曆 元年 전라감사문서. / 설명 趙云仡, 嘉靖 45年 (1566)/ 木版本, 1, 한문/ 四周雙邊, 8행 14자, 上下內向黑魚尾, 上黑口, 상태양호/ 사자 0763-01과 중복, 본1999, 卷首題:三韓詩龜鑑/ 소장:東京市 內閣文庫, 현재 日本國會圖書館上野分館(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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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記事] : 사진유리필름자료/ ID : fl_001_004_001_0054 / 제목 三韓詩龜鑑(2-2) / 분류 古書 集部 總集類 / 등록번호 GF 2020 [16-145-05] / 본문 三韓詩龜鑑(2-2) : 설명 趙云仡, 嘉靖 45年 (1566)/ 木版本, 1, 한문/ 四周雙邊, 8행 14자, 上下內向黑魚尾, 上黑口, 상태양호/ 사자 0763-02와 중복, 본2000, 卷首題:三韓詩龜鑑/ 소장:東京市 內閣文庫, 현재 日本國會圖書館上野分館(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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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趙云仡) :출처: 브리태니커관련태그/ 고려·조선문신, 1404년죽음, 1332년태어남/ 한국어 위키백과/ 1332(충숙왕 복위 1)~1404(태종 4)/ 본관은 풍양(豊壤).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서기로 임명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합문사인(閤門舍人)이 되었다. 1361년 형부원외랑으로 임명되었으며,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1363년에 2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국자직강을 거쳐 전라·서해·양광 3도의 안렴사를 역임했다. 1374년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있다가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露陰山)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 칭하며 〈기우도찬 騎牛圖贊〉·〈석간가 石磵歌〉 등을 짓고, 자은사(慈恩寺)의 중과 교제하며 지냈다. 1377년(우왕 3) 좌간의대부로 재등용되었는데, 이때 왕에게 다시 서연을 열어 경사(經史)를 학습하여 좋은 정치를 이루라는 글을 올렸다. 1380년 다시 사직하고 광주(廣州) 고원강촌(古垣江村)에 살면서, 판교원(板橋院)·사평원(沙平院)을 중수하여 원주(院主)라 자칭하고 신분을 감추었다. 1388년 다시 전리판서로 등용되었고, 밀직제학을 거쳐 서해도도관찰사로 기강을 바로잡았다. 그해 창왕이 즉위한 뒤 중앙으로 복귀하여 동지밀직사사를 거쳐 1390년(공양왕 2) 계림부윤이 되었다. 조선 건국 후 강릉대도호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광주로 갔다. 곧 검교정당문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녹봉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는 역사적 격동기에 자기 뜻을 분명하게 세우지 못한 채 괴로워했는데, 이는 〈동문선〉 중에 나오는 그의 칠언절구 5수에 잘 나타나 있다. 저서로는 〈석간집〉이 있으나 남아 있지 않고, 편서 〈삼한시귀감 三韓詩龜鑑〉이 전한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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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卽事 / 趙云仡| ◈ …… 미술서예작품/ 갈까마귀 조회 18 | 09.01.21 11:50/ 卽事/ 柴門日午喚人開(시문일오환인개)/ 步出林艇坐石苔(보출임정좌석태)/ 昨夜山中風雨惡(작야산중풍우악)/ 滿溪流水泛花來(만계유수범화래)/ 한낮에 아이 불러 사립문 열고/ 숲속 전자로 건너가 이끼낀 돌위에 앉았다/ 지난밤 산속에 풍우가 사납더니/ 시내 가득 흐르는 물에 꽃잎이 떠오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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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창간보(신해보 1731)| ▶풍양시조의 유래▒/ 應九(응구) 조회 39 | 05.05.18 22:36/ 우리 풍양조씨의 창간보인 신해보(영조 7년, 1731)는 실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발의(發議)한 지 장장 17년 만에 출판된 역사적 간행물이었다... 신해보(辛亥譜)에는 시조 시중공의 휘자(諱字)밑에 차하세계실전(此下世系失傳), 곧 "이로부터 아래로는 세계가 실전되었다"고 기록하고 그에 관한 주(註)를 달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석간공 운흘(石磵公 云仡)의 자찬묘지(自撰墓地)에 의하면 ‘태조공신(太祖功臣) 조맹(趙孟)의 三十대손’이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천화공(天和公 : 殿直公을 가리킴)은 시조의 24대손이 된다. 다만 여러 가문의 족보를 상고하건대 고려 5백년(정확히 말하면 475년임) 동안에 댓수가 많아야 20대 미만에 불과했으니이 묘지에 있는 三十대의 三자는 二자의 착오일지도 모르겠다"는 것. 그리하여 그때 "단정(斷定)할 수가 없다"하여 전직공을 별행으로 잡아쓰고 1세(一世)로 쳐서 기록하였다. 위와 같은 기록의 경위를 다시 부연(敷衍)하여 보기로 한다. 석간공의 자찬묘지란 우리 세보상 전직공(천화공이라고도 함)의 6대손 되는 휘 운흘(諱 云仡)이 자신의 사후에 쓸 묘지를 스스로 지은 155자의 짤막한 문장을 말한다. 석간공은 고려 말엽에 태어나 이조 초기까지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대문장가로서 호군공, 회양공, 금주공과는 재종간이다.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문과에 올라, 5개주의 수령(守令)과 4개도의 도백(道伯)을 지내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고, 나라가 어지러워가자 상주 노음산(露陰山)에 은거하였다가 조선이 건국된 뒤에 다시 출사하여 한 때 강릉부윤을 지냈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광주(廣州)의 고원성(古垣城 : 현 천호동)에서 살다가 별세하여서는 양주(楊州)의 아차산(峨嵯山 : 현 워커힐 뒤산)에 묻히었다. 공은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의 유작(遺作)이 많지는 않지만 편저(編著)로서 삼한시 귀감(三韓市龜鑑)이 전하고 몇 편의 시(詩)와 산문(散文)이 흩어진 채로 소개되는 정도이다. 그러나 공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읽어보면 생동감이 넘치는 주옥같은 직품들이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의 역대 문장가 중에서 공만큼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을 남긴 분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생각해 보지만, 아마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만약 공에게 후손이 있었다면 그 이름은 더욱 드러났을 것이고 그 후손된 긍지도 만만치는 않았겠지만 불행히도 후사(後嗣)가 없다. 그건 그렇고 공이 자찬(自撰)한 묘지(墓誌)는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에 실려있는 것이 가장 오래된 원전(原典)이다. 한데 그 원전에 "조운흘은 본관이 풍양인인데 고려 태조의 신하 조맹의 삼십대 손이다(趙云仡本豊壤人 高麗太祖臣平章事趙孟三十代孫)"라고 쓰여 있으므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고 옛날 신해보 이전의 각 가보(家譜)에서는 이에 근거하여 전직공을 시중공의 24대손으로 직서(直書)한 것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식자의 눈으로 볼 때는 시중공께서 살아 계셨던 고려초기로부터 석간공께서 태어나던 고려 말엽까지는 410년∼420년 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해서 30대라는 댓수가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것. 4백 10∼20년 동안에 30대가 나려면 종손으로만 전하여 15세∼16세 사이에 출생했어야만 가능하다는 계산인데 실제로는 이러한 조기 출산이 줄곧 있을 수는 없다는 선인(先人)들의 결론이다. 그리하여 三十대의 三자는 二자의 착오라 하여 20대라는 주장도 있었던 모양이나 타성씨(他姓氏)들의 것을 보면 모두 동 기간의 댓수가 한결같이 10대에서 11, 12 또는 14, 15대에 불과했다는 예를 들어 이것 또한 믿을 바가 못된다고 부인한다. 그러다가 결국에 가서 생각해 낸 것이 고려사 열전에 三十대손으로 된 것은 十三대를 거꾸로 쓴 착오임이 분명하다는 심증이 굳어졌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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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조운흘(趙云仡)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욕설*육담*야화/ 홍삼한방 조회 56 | 09.09.26 11:12/ 조운흘(趙云흘)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새벽이면 꼭 "아미타불"을 염송하였다. 하루는 관내 군현을 순시 중 배천(白川)에 당도하여 잠을 자다 새벽이 되자 밖에서 갑자기, "조운흘!" "조운흘!" 을 염송하는 소리가 들려와 가만히 살피니 배천 현감 박희문이었다. 조운흘이 괴이하여 그 연유를 물으니 박희문이 말하기를, "관찰사께서는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성불(成佛)코저 하시니, 저는 ''''조운흘''''을 염송하여 관찰사가 되고저 그리 했나이다." 라고 답하니 후일 이 이야기를 듣는 이 모두 웃었다 한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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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江陵 鏡浦臺(강릉경포대)/ 漢詩/漢文/ 2004/09/15 21:56/ *홍장고사(紅粧古事)/ 고려 말 강원도 안렴사 박신(朴信)이 부임한 이래 강릉 명기 홍장(紅粧)을 사랑했는데, 임무를 마치고 서울로 가기 며칠 전 강릉 부윤인 조운흘(趙云仡)이 장난을 꾸몄다. 박신에게 미리 홍장이 신선이 되어 가버렸다고 이야기하고, 박신을 보내는 송별연을 경포에서 베풀었다. 조운흘은 미리 배 한척에 신선처럼 꾸민 홍장을 태워, 한 뱃사공을 두루마기를 늘어뜨린 옷을 입히고, 배를 장식하여 근처를 배회하게 하였다. 배에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써 달았다./ 新羅聖代老安詳/ [출처] 江陵 鏡浦臺(강릉경포대)|작성자 허산재(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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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趙云仡) : 본관(本貫) 풍양(豊壤)/ 시대(時代) 1332(충숙왕 복위 1)~1404(태종 4)/ 호(號) 석간(石磵)/ 이력(履歷) 고려·조선의 문신. 호는 석간(石磵), 평장사(平章事) 맹(孟)의 후손.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인. 1357년(공민왕 6) 문과(文科)에 급제, 안동 서기(安東書紀)가 되고, 각문 사인(閣門舍人)을 거쳐 1361년(공민완10)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에 올라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남쪽에 피란하는 왕을 호종(扈從)하여 1363년 2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 직강(國子直講)이 되고 이어 전라 서해 양광 삼도 안렴사(全羅西海楊廣三道按廉使)를 지내고, 1374년(공민왕23)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서 벼슬을 버리고 상주(尙州) 노음산(露陰山)기슭에 은거, 출입할 때는 소를 타고 다니면서 「기우도(騎牛圖)」·「찬석간가(贊石磵歌)」 등 작품을 지었다. 1377년(우왕 3) 다시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에 기용,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고, 1380년 광주(廣州) 고원강촌(古垣江村)에 은퇴, 자은사(慈恩寺)의 중 종림(宗林)과 친교를 맺으며 사평원(沙平院)·판교원(板橋院)을 중건하여 스스로 원주(院主)가 되었다. 1388년(우왕14) 전리 판서(典理判書)에 기용되고, 이 해 창왕 즉위 후 서해도도관찰사로 나가 왜구(倭寇)를 토벌했으며,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1390년(공양왕 2)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나갔다. 1392년 조선 개국 후에 강을부사(江陵府使)로서 선정(善政)을 베풀고 이듬해 신병으로 사직,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광주에서 여생을 마치었다./
구리시 인물(人物)/ 조운흘(趙云 ) 1332(충숙왕 복위1) ~ 1404(태종 4)/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고려사]에 묘가 아차산 남록에 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본관은 풍양(豊穰), 호는 석간(石磵), 서하옹(西霞翁)이다. 평장사(平章事) 조맹의 후손으로, 흥안군(興安君) 이인복의 문인이다.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가 되었고, 합문사인(閤門舍人)을 거쳐 1361년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 올랐다. 홍건적의 침입때 남쪽으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 하여 1363년 2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감직강(直講)이 되고 이어 전라, 서해, 양광의 삼도안렴사(三道安廉使)를 지냈다. 1374년 전법총랑이 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상주 노음산(露陰山) 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 하며 출입할 때는 소를 타고 다녔다. 이 때 [기우도찬(騎牛 圖讚)], [석간가]등의 작품을 지었다. 1377년(우왕 3) 다시 좌간의대부(左揀議大夫)에 기용되고,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있다. 가 1380년 사임하고 廣州(광주) 고원강촌으로 은퇴하였다. 그곳에서 자은사(慈恩寺)의 중 종림(宗林)과 친교를 맺으며 사평원, 판교원을 중수하고 스스로 원주(院主)라 칭하였다. 1388년 다시 전리판서에 기용되고, 이해 밀직제학(密直提學)에서 서해도관찰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西密直司事)를 거쳐 1390년(공양왕2) 계림부윤(鷄林府尹)을 지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강릉부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신병으로 사직하고 광주로 내려갔다가 다시 검교정당문학(檢校政黨文學)에 임명되었다. 그 후 사직하고 광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스스로 묘지(墓誌)를 짓고 73세에 죽었다. 저서로 [석간집]이 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편서로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이 전하고, 그 밖에 [동문선]에 5수의 칠언절구가 현전한다.
조운흘(趙云흘)/ 공은 1332년(고려 충숙왕원년) 건(虔)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회양공 신(淮陽公 愼)과는 재종(6촌)간이다.호를 석간(石磵)이라고 하였으며 스스로는 석간서하옹(石磵捿霞翁) 또는 몽촌(夢村)이라고 하였다. 1357년(공민왕6년)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 서기가 되고 각문사인(閣門舍人)을 거처 1361년(공민왕10년)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 올라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쪽에 피난하는 왕을 호종하여 1363년 2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직강(國子直講)이 되고 이어 전라,서해,양광 삼도 안렴사를 지내고 1374년(공민왕23년)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서 벼슬을 버리고 상주 노음산 기슭에 은거 출입할때는 소를 타고 다니면서 <기우도:騎牛圖> <찬석간가:贊石磵歌>등 작품을 지었다. 1377년(우왕3년) 다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기용.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고 1380년 광주 고원강촌에 은퇴,사평원(沙平院),판교원(板橋院)을 중건하여 원주(院主)가 되었다. 1388년(우왕14년) 창왕 즉위후 서해도 도관찰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했으며 첨서밀직사사, 동지밀직사사를 거처 1390년(공양왕2년) 계림부윤을 지냈다. 1392년 조선 개국후 강능부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저서로 석간집(石磵集),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이 있다. 1404년(태종4년)에 돌아 가셨고 무후하며 묘는 현 서울의 동쪽 아차산에 있으나 실전되었다/
문헌(文獻)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26년, 1531)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 경상도 慶尙道 [1] > 경주부 慶州府/ 상성군(商城郡) : 본래는 서형산군(西兄山郡)이었다. 동안군(東安郡) : 본래는 생서랑군(生西郞郡)이었다. 명환 고려 조운흘(趙云?) : 모두 부윤으로 있었다./ 2.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생사당(生祠堂)을 받은 사람들. 생사당(生祠堂)이란 감사, 수령 등의 공덕을 앙모하여 그를 생전부터 봉사하는 사당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람들은 아래와 같다. ...2) 풍양인 조운흘(趙云?:1331~1404) 1393년 강릉대도호부사.. (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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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趙云仡) : 저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일 2009-10-30(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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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고원촌(古垣村)의 조석간(趙石磵)/ 조석간(趙石磵)/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호가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인 조운흘(趙云?)을 가리킨다. 그는 우왕(禑王) 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뒤에 광주(廣州) 고원촌(古垣村)에 퇴거하였다.의 옛집을 지나다/ 저자서거정(徐居正)/ 자료유형간행물/ 발행일2009-04-06(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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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趙云仡) : 발행일2009-04-06/ 자료소개관련인물 :맹(孟)|이인복(李仁復)|최해(崔瀣)|최해/ 관직 :평장사|합문사인(閤門舍人)|형부원외랑|국자감직강|삼도안렴사(三道按廉使)|전법총랑(典法摠郞)|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전리판서(典理判書)|밀직제학(密直提學)|서해도관찰사|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계림부윤(鷄林府尹)|강릉부사|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 관련서적 :≪석간집 石磵集≫|≪삼한시귀감 三韓詩龜鑑≫|≪동인지문 東人之文≫|≪동문선≫/ 관련지역 :고려|조선|전라|서해(西海)|양광(楊廣)|상주|노음산(露陰山)|광주(廣州) 고원강촌(古垣江村)|광주(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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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자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지었던 조운흘(趙云仡)/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尙道 慶州府 및 卷 24. 醴泉郡 名宦 條]/ 이웅재/ 조운흘(趙云仡 : 1332[충숙왕 복위 1]~1404[태종 4])은 한양부(漢陽府) 풍양현(豊壤縣: 현 남양주시) 사람으로, 호는 석간(石澗) 또는 서하옹(棲霞翁)이라고도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고 담대하여 매사에 얽매이기를 싫어했으며 세상에 영합하지 않았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홍건적의 난 때에는 왕을 호종하여 2등공신이 되었으며 국자감직강(國子監直講)을 거쳐 전라, 서해, 양광의 삼도안렴사(三道按廉使)를 지내고,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있다가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露陰山) 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 칭하며 외출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우왕 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재 등용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사임하고, 광주 고원강촌(古垣江村: 현 몽촌[夢村])으로 퇴거하였다. 그곳에서 신분을 감추고 판교원(板橋院), 사평원(沙平院)을 중수하여 원주(院主)라 자칭하면서 공사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창왕 때에는 서해도 도관찰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하기도 하고, 그 후 계림부윤(鷄林府尹), 강릉부사(江陵府使) 등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시절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환란을 피하고자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며 지냈다. 서해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에는 매양 아미타불을 불렀다. 하루는 관내 군현을 순시 중 배천(白川)에 당도하여 잠을 자는데, 새벽이 되자 밖에서 갑자기, "조운흘!" "조운흘!" 을 염송하는 소리가 들려와 가만히 살피니 배천 현감 박희문이었다. 조운흘이 괴이하여 그 연유를 물으니 박희문이 말하기를, "관찰사께서는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성불(成佛)코저 하시니, 저는 ''''조운흘''''을 염송하여 관찰사가 되고저 그리 했나이다." 라고 답하니 후일 이 이야기를 듣는 이 모두 웃었다 한다. 그는 또 거짓으로 “청맹(靑盲: 눈은 멀쩡하나 보지 못하는 병)이 되었다.”며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머물렀다. 그러자 그의 첩이 자신의 아들과 서로 놀아나며 늘 눈앞에서 수작을 하였으나, 수년 동안 모르는 척하다가 난리가 진정되고서야 눈을 부비며 자신의 눈병이 나았다며 아들과 사통한 첩을 데리고 뱃놀이를 가서 그 죄를 다스려 강에 던졌다고 한다.(용재총화 3권)/ 조선조에 들어와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고원강촌에 퇴거하여 살았는데, 스스로 묘지명을 지었으니,/ "나이 73세에 병으로 광주(廣州) 고원성(古垣城'''')에서 별세하였다. 자식이 없었다. 해와 달을 구슬로 삼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제물(祭物)로 삼았다. 옛 양주(楊州) 아차산(?嵯山) 남쪽 마가야(摩訶耶)에 장사를 지냈다."고 했는데, 현재 묘지와 비석은 없고 묘비명만『고려사』권112 조운흘전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와 관련된 기생 홍장(紅粧)과 관련된 이야기도 널리 회자(膾炙)되는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고려 우왕시절이었다. 강원감사 박신(朴信)은 백성을 잘 다스려 칭송이 드높았다. 그는 강릉기생 홍장(紅粧)을 깊이 사랑하였다. 홍장은 당시 2백여 명 기생 가운데 가장 출중한 미모를 지녔다고 한다. 강릉부사 조운흘이 홍장과 박신의 사이를 알고 한번 놀려주고자 꾀를 냈다. 그는 홍장이 갑자기 죽었다고 박신에게 거짓으로 알리니 박신은 몹시 서러워하였다. 박신(朴信)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였다. 조운흘은 경포대 한송정(寒松亭)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석양에 경포호수에 이르니 경호(鏡湖)는 십 리나 뻗쳐 물결과 주변이 어울린 아름다움이란 비길 데가 없었다. 두 사람의 취흥이 무르익었을 때, 문득 멀리 호수를 바라보니 그림배 한 척이 스르르 미끄러져 오는데, 그 속에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그 소리가 신선세계의 소리처럼 심금(心琴)을 울렸다. 박신은 놀라 물으니, 조부사는 이는 필시 선녀의 놀음일 것이라 하면서 우리도 가까이 가서 같이 놀아보자고 하여 호수에 배를 띄웠다. 여인이 탄 배가 가까이 왔다. 선녀처럼 보였던 여인은 분명 홍장이었다. 박신은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조부사에게 속았음을 깨달았다. 세 사람은 경포호수에서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떠난 박신을 두고 홍장이 노래한다./ 울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지마소./ 초원(草原) 장제(長堤)에 해 다 저물었네./ 객창(客窓)에 잔등(殘燈) 돋우고 세워보면 알리라./ 1년 후 박신은 순찰사가 돼 강릉에 다시 들렀는데, 홍장의 굳은 절개를 보고 그녀를 한양으로 데려가 부실을 삼았단다./ 조선 효종 때의 신후담(愼後聃)은 이와 같은 홍장과 박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남겼다. 「홍장전」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김태준(金台俊)의 『조선소설사』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09.10.3. 원고지 15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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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한시의 그늘에 서서/벗과 함게 떠나는 봄 | 한시 2005.12.01 12:06 방울꽃/ 공개 친구 블로그// 謫宦傷心涕淚揮 귀양살이 신세 마음 상해 눈물 흩건만,/ 送人兼復送春歸 벗을 보내고 겸하여 봄까지 보내네./ 春風好去無留意 봄바람은 잘 가서 머무를 마음일랑 두지 말기를/ 久在人間學是非 인간 세상에 오래 머물면 시비만 배우리니./ -조운흘(趙云仡),/ <送春日別人 봄날 벗을 보내며>/ 상주 노음산(露陰山) 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고 하였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고 하는 조운흘. 그 풍유의 사내 조운흘도 어찌할 수 없는 세상살이의 서러움은 있었던가 봅니다. 풍우(風雨) 드센 고장난 세월 속으로 눈 먼 시간이 미끄러지는 좌천의 서러운 시절이건만, 떠나는 벗도 모자라 함께 봄마저 떠나갑니다./ ''''나''''란 사람은 하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나''''는 수많은 다수이듯이, 하나의 봄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선 수많은 다수의 봄일 것입니다. 조운흘이 이 시에 담아놓은 봄은 벗과 함께 떠나는 봄이요, 또 그 벗처럼 떠나보내기 아쉬운 봄이지만, 또한 아쉬워도 흔쾌히 보내고 싶은 봄입니다. 풍진의 시비 세상은 누가 옳으니 누가 그르니 하며 끊임없이 싸우는 번뇌의 땅이니까요./ 내 마음의 길만으로는 건너갈 수 없는 세상! 인생의 속내는 알고 보면 눈물과 웃음이 그 시작과 끝 속에서 늘 하나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옮음과 그름을 나누기에 그 둘이 서로 싸우고, 영화와 치욕을 나누기에 그 둘이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게 끊임없이 둘로 나뉘어 반목하는 세상의 번뇌 속을 봄이 헤매일까 두렵습니다. 어쩌면 저 벗도 봄과 함께 시비의 세상을 떠나려 길을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깨어진 꿈은 그 날을 자기 가슴에 꽂는 것이어서 시비를 배운 그 슬픔을, 떠나는 벗과 봄은 아니 배우기를…. 시비를 떠나버린 세상의 밖, 세월의 뒤주에서 잊혀진 듯 고요히 머물기를! 그런 까닭일까요…, 그의 말을 깊이 들었던지 봄은 여지껏 우리 세상으로 다니려 오긴 하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고 단지 몇 달씩만 머물다 이내 떠나 버립니다. 그래서 봄의 마음엔 세상도 시비를 얹을 수가 없나 봅니다. 하나의 시비란 늘 그 시비를 길이 논할 때만 생기는 것이니까요!(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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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신목민학]<494>/ 시의회 스캔들/ 2009.07.02 (목)/ 강릉부사 조운흘(趙云仡)(1332~1404)은 청백하다고 이름이 났었다. 기생들이 농담하기를 “꿈에 주관(主官·주인)을 모시고 동침하였는데 지금 동료들과 함께 해몽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조운흘이 글을 지어 답했다. “마음은 영서.../ 중도일보 > 사회(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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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記事] :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ID : np_da_1939_07_30_0840/ 신문명 동아일보 / 기사제목 山岳詩人 ; 石磵의 淸狂(滄海) / 발행년월일 1939-07-30 / 면수 03 / 단수 03 / 표제어 조운흘(趙云仡, 石磵)(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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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記事] : 사진유리필름자료 / ID : fl_001_004_001_0005 / 제목 三韓詩龜鑑(1)/ 분류 古書 集部 總集類 / 등록번호 사자 0762 / 본문 三韓詩龜鑑(1) : 崔瀣(1287~1340)가 신라 고려 명현의 시문을 모은 東人之文 二十五卷을 정선한 三韓詩龜鑑 明宗 45年(1566) 順天府 重刊本의 卷之上 卷首 부분 崔致遠 寓興條. 拙翁崔瀣 批點 石磵趙云?(1332~1404) 精選, 배접지가 萬曆 元年 전라감사문서이다. / 설명 趙云仡, 嘉靖 45年 (1566)/ 木版本, 1(2), 한문/ 四周雙邊, 8행 14자, 上下內向黑魚尾, 上黑口/ 卷首題:三韓詩龜鑑/ 소장:東京市 內閣文庫, 현재 日本國會圖書館上野分館(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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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記事] : 사진유리필름자료 / ID : fl_001_004_001_0052 / 제목 三韓詩龜鑑(1)/ 분류 古書 集部 總集類 / 등록번호 GF 2018 [16-145-03] / 본문 三韓詩龜鑑(1) : 崔瀣(1287~1340)가 신라․고려 명현의 시문을 모은 東人之文 二十五卷을 정선한 三韓詩龜鑑 明宗 45年(1566) 順天府 重刊本의 卷之上 卷首 부분으로 崔致遠 寓興條, 拙翁崔瀣批點 石磵趙云仡(1332~1404) 精選. 배접지가 萬曆 元年 전라감사의 문서이다. / 설명 趙云仡, 嘉靖 45年 (1566)/ 木版本, 1, 한문/ 四周雙邊, 8행 14자, 上下內向黑魚尾, 上黑口, 상태양호/ 사자 0762와 중복, 본1998, 卷首題:三韓詩龜鑑/ 소장:東京市 內閣文庫, 현재 日本國會圖書館上野分館(www.history.go.kr 2007)
조운흘 [記事] :사진유리필름자료/ ID : fl_001_004_001_0006/ 제목 三韓詩龜鑑(2)/ 분류 古書 集部 總集類/ 등록번호 사자 0763 / 본문 三韓詩龜鑑(2) : 崔瀣(1287~1340)가 신라․고려 名賢의 시문을 모은 東人之文 二十五卷을 정선하여 편찬한 三韓詩龜鑑으로서, 본 자료는 明宗 45年(1566) 順天府 重刊本의 卷下 2頁. 拙翁崔瀣 批點 石磵趙云仡(1332~1404) 精選 등이 쓰여 있는데, 배접지는 萬曆 元年 전라감사문서. / 설명 趙云仡, 嘉靖 45年 (1566)/ 木版本, 2(4), 한문/ 四周雙邊, 8행 114자, 上下內向黑魚尾, 上黑口/ 卷首題:三韓詩龜鑑/ 소장:東京市 內閣文庫, 현재 日本國會圖書館上野分館(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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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記事] : 사진유리필름자료 / ID : fl_001_004_001_0053 / 제목 三韓詩龜鑑(2-1)/ 분류 古書 集部 總集類 / 등록번호 GF 2019 [16-145-04] / 본문 三韓詩龜鑑(2-1) : 崔瀣(1287~1340)가 신라․고려 名賢의 시문을 모은 東人之文 二十五卷을 정선하여 편찬한 三韓詩龜鑑으로서, 본 자료는 明宗 45年(1566) 順天府 重刊本의 卷下 2頁. 拙翁崔瀣批點 石磵趙云仡(1332~1404)精選 등이 쓰여 있는데, 배접지는 萬曆 元年 전라감사문서. / 설명 趙云仡, 嘉靖 45年 (1566)/ 木版本, 1, 한문/ 四周雙邊, 8행 14자, 上下內向黑魚尾, 上黑口, 상태양호/ 사자 0763-01과 중복, 본1999, 卷首題:三韓詩龜鑑/ 소장:東京市 內閣文庫, 현재 日本國會圖書館上野分館(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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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記事] : 사진유리필름자료/ ID : fl_001_004_001_0054 / 제목 三韓詩龜鑑(2-2) / 분류 古書 集部 總集類 / 등록번호 GF 2020 [16-145-05] / 본문 三韓詩龜鑑(2-2) : 설명 趙云仡, 嘉靖 45年 (1566)/ 木版本, 1, 한문/ 四周雙邊, 8행 14자, 上下內向黑魚尾, 上黑口, 상태양호/ 사자 0763-02와 중복, 본2000, 卷首題:三韓詩龜鑑/ 소장:東京市 內閣文庫, 현재 日本國會圖書館上野分館(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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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趙云仡) :출처: 브리태니커관련태그/ 고려·조선문신, 1404년죽음, 1332년태어남/ 한국어 위키백과/ 1332(충숙왕 복위 1)~1404(태종 4)/ 본관은 풍양(豊壤).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서기로 임명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합문사인(閤門舍人)이 되었다. 1361년 형부원외랑으로 임명되었으며,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1363년에 2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국자직강을 거쳐 전라·서해·양광 3도의 안렴사를 역임했다. 1374년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있다가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露陰山)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 칭하며 〈기우도찬 騎牛圖贊〉·〈석간가 石磵歌〉 등을 짓고, 자은사(慈恩寺)의 중과 교제하며 지냈다. 1377년(우왕 3) 좌간의대부로 재등용되었는데, 이때 왕에게 다시 서연을 열어 경사(經史)를 학습하여 좋은 정치를 이루라는 글을 올렸다. 1380년 다시 사직하고 광주(廣州) 고원강촌(古垣江村)에 살면서, 판교원(板橋院)·사평원(沙平院)을 중수하여 원주(院主)라 자칭하고 신분을 감추었다. 1388년 다시 전리판서로 등용되었고, 밀직제학을 거쳐 서해도도관찰사로 기강을 바로잡았다. 그해 창왕이 즉위한 뒤 중앙으로 복귀하여 동지밀직사사를 거쳐 1390년(공양왕 2) 계림부윤이 되었다. 조선 건국 후 강릉대도호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광주로 갔다. 곧 검교정당문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녹봉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는 역사적 격동기에 자기 뜻을 분명하게 세우지 못한 채 괴로워했는데, 이는 〈동문선〉 중에 나오는 그의 칠언절구 5수에 잘 나타나 있다. 저서로는 〈석간집〉이 있으나 남아 있지 않고, 편서 〈삼한시귀감 三韓詩龜鑑〉이 전한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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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卽事 / 趙云仡| ◈ …… 미술서예작품/ 갈까마귀 조회 18 | 09.01.21 11:50/ 卽事/ 柴門日午喚人開(시문일오환인개)/ 步出林艇坐石苔(보출임정좌석태)/ 昨夜山中風雨惡(작야산중풍우악)/ 滿溪流水泛花來(만계유수범화래)/ 한낮에 아이 불러 사립문 열고/ 숲속 전자로 건너가 이끼낀 돌위에 앉았다/ 지난밤 산속에 풍우가 사납더니/ 시내 가득 흐르는 물에 꽃잎이 떠오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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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창간보(신해보 1731)| ▶풍양시조의 유래▒/ 應九(응구) 조회 39 | 05.05.18 22:36/ 우리 풍양조씨의 창간보인 신해보(영조 7년, 1731)는 실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발의(發議)한 지 장장 17년 만에 출판된 역사적 간행물이었다... 신해보(辛亥譜)에는 시조 시중공의 휘자(諱字)밑에 차하세계실전(此下世系失傳), 곧 "이로부터 아래로는 세계가 실전되었다"고 기록하고 그에 관한 주(註)를 달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석간공 운흘(石磵公 云仡)의 자찬묘지(自撰墓地)에 의하면 ‘태조공신(太祖功臣) 조맹(趙孟)의 三十대손’이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천화공(天和公 : 殿直公을 가리킴)은 시조의 24대손이 된다. 다만 여러 가문의 족보를 상고하건대 고려 5백년(정확히 말하면 475년임) 동안에 댓수가 많아야 20대 미만에 불과했으니이 묘지에 있는 三十대의 三자는 二자의 착오일지도 모르겠다"는 것. 그리하여 그때 "단정(斷定)할 수가 없다"하여 전직공을 별행으로 잡아쓰고 1세(一世)로 쳐서 기록하였다. 위와 같은 기록의 경위를 다시 부연(敷衍)하여 보기로 한다. 석간공의 자찬묘지란 우리 세보상 전직공(천화공이라고도 함)의 6대손 되는 휘 운흘(諱 云仡)이 자신의 사후에 쓸 묘지를 스스로 지은 155자의 짤막한 문장을 말한다. 석간공은 고려 말엽에 태어나 이조 초기까지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대문장가로서 호군공, 회양공, 금주공과는 재종간이다.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문과에 올라, 5개주의 수령(守令)과 4개도의 도백(道伯)을 지내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고, 나라가 어지러워가자 상주 노음산(露陰山)에 은거하였다가 조선이 건국된 뒤에 다시 출사하여 한 때 강릉부윤을 지냈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광주(廣州)의 고원성(古垣城 : 현 천호동)에서 살다가 별세하여서는 양주(楊州)의 아차산(峨嵯山 : 현 워커힐 뒤산)에 묻히었다. 공은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의 유작(遺作)이 많지는 않지만 편저(編著)로서 삼한시 귀감(三韓市龜鑑)이 전하고 몇 편의 시(詩)와 산문(散文)이 흩어진 채로 소개되는 정도이다. 그러나 공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읽어보면 생동감이 넘치는 주옥같은 직품들이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의 역대 문장가 중에서 공만큼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을 남긴 분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생각해 보지만, 아마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만약 공에게 후손이 있었다면 그 이름은 더욱 드러났을 것이고 그 후손된 긍지도 만만치는 않았겠지만 불행히도 후사(後嗣)가 없다. 그건 그렇고 공이 자찬(自撰)한 묘지(墓誌)는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에 실려있는 것이 가장 오래된 원전(原典)이다. 한데 그 원전에 "조운흘은 본관이 풍양인인데 고려 태조의 신하 조맹의 삼십대 손이다(趙云仡本豊壤人 高麗太祖臣平章事趙孟三十代孫)"라고 쓰여 있으므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고 옛날 신해보 이전의 각 가보(家譜)에서는 이에 근거하여 전직공을 시중공의 24대손으로 직서(直書)한 것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식자의 눈으로 볼 때는 시중공께서 살아 계셨던 고려초기로부터 석간공께서 태어나던 고려 말엽까지는 410년∼420년 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해서 30대라는 댓수가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것. 4백 10∼20년 동안에 30대가 나려면 종손으로만 전하여 15세∼16세 사이에 출생했어야만 가능하다는 계산인데 실제로는 이러한 조기 출산이 줄곧 있을 수는 없다는 선인(先人)들의 결론이다. 그리하여 三十대의 三자는 二자의 착오라 하여 20대라는 주장도 있었던 모양이나 타성씨(他姓氏)들의 것을 보면 모두 동 기간의 댓수가 한결같이 10대에서 11, 12 또는 14, 15대에 불과했다는 예를 들어 이것 또한 믿을 바가 못된다고 부인한다. 그러다가 결국에 가서 생각해 낸 것이 고려사 열전에 三十대손으로 된 것은 十三대를 거꾸로 쓴 착오임이 분명하다는 심증이 굳어졌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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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조운흘(趙云仡)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욕설*육담*야화/ 홍삼한방 조회 56 | 09.09.26 11:12/ 조운흘(趙云흘)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새벽이면 꼭 "아미타불"을 염송하였다. 하루는 관내 군현을 순시 중 배천(白川)에 당도하여 잠을 자다 새벽이 되자 밖에서 갑자기, "조운흘!" "조운흘!" 을 염송하는 소리가 들려와 가만히 살피니 배천 현감 박희문이었다. 조운흘이 괴이하여 그 연유를 물으니 박희문이 말하기를, "관찰사께서는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성불(成佛)코저 하시니, 저는 ''''조운흘''''을 염송하여 관찰사가 되고저 그리 했나이다." 라고 답하니 후일 이 이야기를 듣는 이 모두 웃었다 한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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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江陵 鏡浦臺(강릉경포대)/ 漢詩/漢文/ 2004/09/15 21:56/ *홍장고사(紅粧古事)/ 고려 말 강원도 안렴사 박신(朴信)이 부임한 이래 강릉 명기 홍장(紅粧)을 사랑했는데, 임무를 마치고 서울로 가기 며칠 전 강릉 부윤인 조운흘(趙云仡)이 장난을 꾸몄다. 박신에게 미리 홍장이 신선이 되어 가버렸다고 이야기하고, 박신을 보내는 송별연을 경포에서 베풀었다. 조운흘은 미리 배 한척에 신선처럼 꾸민 홍장을 태워, 한 뱃사공을 두루마기를 늘어뜨린 옷을 입히고, 배를 장식하여 근처를 배회하게 하였다. 배에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써 달았다./ 新羅聖代老安詳/ [출처] 江陵 鏡浦臺(강릉경포대)|작성자 허산재(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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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趙云仡) : 본관(本貫) 풍양(豊壤)/ 시대(時代) 1332(충숙왕 복위 1)~1404(태종 4)/ 호(號) 석간(石磵)/ 이력(履歷) 고려·조선의 문신. 호는 석간(石磵), 평장사(平章事) 맹(孟)의 후손.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인. 1357년(공민왕 6) 문과(文科)에 급제, 안동 서기(安東書紀)가 되고, 각문 사인(閣門舍人)을 거쳐 1361년(공민완10)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에 올라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남쪽에 피란하는 왕을 호종(扈從)하여 1363년 2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 직강(國子直講)이 되고 이어 전라 서해 양광 삼도 안렴사(全羅西海楊廣三道按廉使)를 지내고, 1374년(공민왕23)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서 벼슬을 버리고 상주(尙州) 노음산(露陰山)기슭에 은거, 출입할 때는 소를 타고 다니면서 「기우도(騎牛圖)」·「찬석간가(贊石磵歌)」 등 작품을 지었다. 1377년(우왕 3) 다시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에 기용,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고, 1380년 광주(廣州) 고원강촌(古垣江村)에 은퇴, 자은사(慈恩寺)의 중 종림(宗林)과 친교를 맺으며 사평원(沙平院)·판교원(板橋院)을 중건하여 스스로 원주(院主)가 되었다. 1388년(우왕14) 전리 판서(典理判書)에 기용되고, 이 해 창왕 즉위 후 서해도도관찰사로 나가 왜구(倭寇)를 토벌했으며,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1390년(공양왕 2)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나갔다. 1392년 조선 개국 후에 강을부사(江陵府使)로서 선정(善政)을 베풀고 이듬해 신병으로 사직,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광주에서 여생을 마치었다./
구리시 인물(人物)/ 조운흘(趙云 ) 1332(충숙왕 복위1) ~ 1404(태종 4)/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고려사]에 묘가 아차산 남록에 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본관은 풍양(豊穰), 호는 석간(石磵), 서하옹(西霞翁)이다. 평장사(平章事) 조맹의 후손으로, 흥안군(興安君) 이인복의 문인이다.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가 되었고, 합문사인(閤門舍人)을 거쳐 1361년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 올랐다. 홍건적의 침입때 남쪽으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 하여 1363년 2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감직강(直講)이 되고 이어 전라, 서해, 양광의 삼도안렴사(三道安廉使)를 지냈다. 1374년 전법총랑이 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상주 노음산(露陰山) 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 하며 출입할 때는 소를 타고 다녔다. 이 때 [기우도찬(騎牛 圖讚)], [석간가]등의 작품을 지었다. 1377년(우왕 3) 다시 좌간의대부(左揀議大夫)에 기용되고,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있다. 가 1380년 사임하고 廣州(광주) 고원강촌으로 은퇴하였다. 그곳에서 자은사(慈恩寺)의 중 종림(宗林)과 친교를 맺으며 사평원, 판교원을 중수하고 스스로 원주(院主)라 칭하였다. 1388년 다시 전리판서에 기용되고, 이해 밀직제학(密直提學)에서 서해도관찰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西密直司事)를 거쳐 1390년(공양왕2) 계림부윤(鷄林府尹)을 지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강릉부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신병으로 사직하고 광주로 내려갔다가 다시 검교정당문학(檢校政黨文學)에 임명되었다. 그 후 사직하고 광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스스로 묘지(墓誌)를 짓고 73세에 죽었다. 저서로 [석간집]이 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편서로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이 전하고, 그 밖에 [동문선]에 5수의 칠언절구가 현전한다.
조운흘(趙云흘)/ 공은 1332년(고려 충숙왕원년) 건(虔)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회양공 신(淮陽公 愼)과는 재종(6촌)간이다.호를 석간(石磵)이라고 하였으며 스스로는 석간서하옹(石磵捿霞翁) 또는 몽촌(夢村)이라고 하였다. 1357년(공민왕6년)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 서기가 되고 각문사인(閣門舍人)을 거처 1361년(공민왕10년)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 올라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쪽에 피난하는 왕을 호종하여 1363년 2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직강(國子直講)이 되고 이어 전라,서해,양광 삼도 안렴사를 지내고 1374년(공민왕23년)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서 벼슬을 버리고 상주 노음산 기슭에 은거 출입할때는 소를 타고 다니면서 <기우도:騎牛圖> <찬석간가:贊石磵歌>등 작품을 지었다. 1377년(우왕3년) 다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기용.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고 1380년 광주 고원강촌에 은퇴,사평원(沙平院),판교원(板橋院)을 중건하여 원주(院主)가 되었다. 1388년(우왕14년) 창왕 즉위후 서해도 도관찰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했으며 첨서밀직사사, 동지밀직사사를 거처 1390년(공양왕2년) 계림부윤을 지냈다. 1392년 조선 개국후 강능부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저서로 석간집(石磵集),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이 있다. 1404년(태종4년)에 돌아 가셨고 무후하며 묘는 현 서울의 동쪽 아차산에 있으나 실전되었다/
문헌(文獻)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26년, 1531)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 경상도 慶尙道 [1] > 경주부 慶州府/ 상성군(商城郡) : 본래는 서형산군(西兄山郡)이었다. 동안군(東安郡) : 본래는 생서랑군(生西郞郡)이었다. 명환 고려 조운흘(趙云?) : 모두 부윤으로 있었다./ 2.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생사당(生祠堂)을 받은 사람들. 생사당(生祠堂)이란 감사, 수령 등의 공덕을 앙모하여 그를 생전부터 봉사하는 사당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람들은 아래와 같다. ...2) 풍양인 조운흘(趙云?:1331~1404) 1393년 강릉대도호부사.. (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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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趙云仡) : 저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일 2009-10-30(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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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고원촌(古垣村)의 조석간(趙石磵)/ 조석간(趙石磵)/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호가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인 조운흘(趙云?)을 가리킨다. 그는 우왕(禑王) 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뒤에 광주(廣州) 고원촌(古垣村)에 퇴거하였다.의 옛집을 지나다/ 저자서거정(徐居正)/ 자료유형간행물/ 발행일2009-04-06(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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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趙云仡) : 발행일2009-04-06/ 자료소개관련인물 :맹(孟)|이인복(李仁復)|최해(崔瀣)|최해/ 관직 :평장사|합문사인(閤門舍人)|형부원외랑|국자감직강|삼도안렴사(三道按廉使)|전법총랑(典法摠郞)|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전리판서(典理判書)|밀직제학(密直提學)|서해도관찰사|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계림부윤(鷄林府尹)|강릉부사|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 관련서적 :≪석간집 石磵集≫|≪삼한시귀감 三韓詩龜鑑≫|≪동인지문 東人之文≫|≪동문선≫/ 관련지역 :고려|조선|전라|서해(西海)|양광(楊廣)|상주|노음산(露陰山)|광주(廣州) 고원강촌(古垣江村)|광주(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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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자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지었던 조운흘(趙云仡)/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尙道 慶州府 및 卷 24. 醴泉郡 名宦 條]/ 이웅재/ 조운흘(趙云仡 : 1332[충숙왕 복위 1]~1404[태종 4])은 한양부(漢陽府) 풍양현(豊壤縣: 현 남양주시) 사람으로, 호는 석간(石澗) 또는 서하옹(棲霞翁)이라고도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고 담대하여 매사에 얽매이기를 싫어했으며 세상에 영합하지 않았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홍건적의 난 때에는 왕을 호종하여 2등공신이 되었으며 국자감직강(國子監直講)을 거쳐 전라, 서해, 양광의 삼도안렴사(三道按廉使)를 지내고,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있다가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露陰山) 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 칭하며 외출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우왕 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재 등용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사임하고, 광주 고원강촌(古垣江村: 현 몽촌[夢村])으로 퇴거하였다. 그곳에서 신분을 감추고 판교원(板橋院), 사평원(沙平院)을 중수하여 원주(院主)라 자칭하면서 공사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창왕 때에는 서해도 도관찰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하기도 하고, 그 후 계림부윤(鷄林府尹), 강릉부사(江陵府使) 등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시절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환란을 피하고자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며 지냈다. 서해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에는 매양 아미타불을 불렀다. 하루는 관내 군현을 순시 중 배천(白川)에 당도하여 잠을 자는데, 새벽이 되자 밖에서 갑자기, "조운흘!" "조운흘!" 을 염송하는 소리가 들려와 가만히 살피니 배천 현감 박희문이었다. 조운흘이 괴이하여 그 연유를 물으니 박희문이 말하기를, "관찰사께서는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성불(成佛)코저 하시니, 저는 ''''조운흘''''을 염송하여 관찰사가 되고저 그리 했나이다." 라고 답하니 후일 이 이야기를 듣는 이 모두 웃었다 한다. 그는 또 거짓으로 “청맹(靑盲: 눈은 멀쩡하나 보지 못하는 병)이 되었다.”며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머물렀다. 그러자 그의 첩이 자신의 아들과 서로 놀아나며 늘 눈앞에서 수작을 하였으나, 수년 동안 모르는 척하다가 난리가 진정되고서야 눈을 부비며 자신의 눈병이 나았다며 아들과 사통한 첩을 데리고 뱃놀이를 가서 그 죄를 다스려 강에 던졌다고 한다.(용재총화 3권)/ 조선조에 들어와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고원강촌에 퇴거하여 살았는데, 스스로 묘지명을 지었으니,/ "나이 73세에 병으로 광주(廣州) 고원성(古垣城'''')에서 별세하였다. 자식이 없었다. 해와 달을 구슬로 삼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제물(祭物)로 삼았다. 옛 양주(楊州) 아차산(?嵯山) 남쪽 마가야(摩訶耶)에 장사를 지냈다."고 했는데, 현재 묘지와 비석은 없고 묘비명만『고려사』권112 조운흘전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와 관련된 기생 홍장(紅粧)과 관련된 이야기도 널리 회자(膾炙)되는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고려 우왕시절이었다. 강원감사 박신(朴信)은 백성을 잘 다스려 칭송이 드높았다. 그는 강릉기생 홍장(紅粧)을 깊이 사랑하였다. 홍장은 당시 2백여 명 기생 가운데 가장 출중한 미모를 지녔다고 한다. 강릉부사 조운흘이 홍장과 박신의 사이를 알고 한번 놀려주고자 꾀를 냈다. 그는 홍장이 갑자기 죽었다고 박신에게 거짓으로 알리니 박신은 몹시 서러워하였다. 박신(朴信)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였다. 조운흘은 경포대 한송정(寒松亭)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석양에 경포호수에 이르니 경호(鏡湖)는 십 리나 뻗쳐 물결과 주변이 어울린 아름다움이란 비길 데가 없었다. 두 사람의 취흥이 무르익었을 때, 문득 멀리 호수를 바라보니 그림배 한 척이 스르르 미끄러져 오는데, 그 속에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그 소리가 신선세계의 소리처럼 심금(心琴)을 울렸다. 박신은 놀라 물으니, 조부사는 이는 필시 선녀의 놀음일 것이라 하면서 우리도 가까이 가서 같이 놀아보자고 하여 호수에 배를 띄웠다. 여인이 탄 배가 가까이 왔다. 선녀처럼 보였던 여인은 분명 홍장이었다. 박신은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조부사에게 속았음을 깨달았다. 세 사람은 경포호수에서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떠난 박신을 두고 홍장이 노래한다./ 울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지마소./ 초원(草原) 장제(長堤)에 해 다 저물었네./ 객창(客窓)에 잔등(殘燈) 돋우고 세워보면 알리라./ 1년 후 박신은 순찰사가 돼 강릉에 다시 들렀는데, 홍장의 굳은 절개를 보고 그녀를 한양으로 데려가 부실을 삼았단다./ 조선 효종 때의 신후담(愼後聃)은 이와 같은 홍장과 박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남겼다. 「홍장전」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김태준(金台俊)의 『조선소설사』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09.10.3. 원고지 15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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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한시의 그늘에 서서/벗과 함게 떠나는 봄 | 한시 2005.12.01 12:06 방울꽃/ 공개 친구 블로그// 謫宦傷心涕淚揮 귀양살이 신세 마음 상해 눈물 흩건만,/ 送人兼復送春歸 벗을 보내고 겸하여 봄까지 보내네./ 春風好去無留意 봄바람은 잘 가서 머무를 마음일랑 두지 말기를/ 久在人間學是非 인간 세상에 오래 머물면 시비만 배우리니./ -조운흘(趙云仡),/ <送春日別人 봄날 벗을 보내며>/ 상주 노음산(露陰山) 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고 하였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고 하는 조운흘. 그 풍유의 사내 조운흘도 어찌할 수 없는 세상살이의 서러움은 있었던가 봅니다. 풍우(風雨) 드센 고장난 세월 속으로 눈 먼 시간이 미끄러지는 좌천의 서러운 시절이건만, 떠나는 벗도 모자라 함께 봄마저 떠나갑니다./ ''''나''''란 사람은 하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나''''는 수많은 다수이듯이, 하나의 봄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선 수많은 다수의 봄일 것입니다. 조운흘이 이 시에 담아놓은 봄은 벗과 함께 떠나는 봄이요, 또 그 벗처럼 떠나보내기 아쉬운 봄이지만, 또한 아쉬워도 흔쾌히 보내고 싶은 봄입니다. 풍진의 시비 세상은 누가 옳으니 누가 그르니 하며 끊임없이 싸우는 번뇌의 땅이니까요./ 내 마음의 길만으로는 건너갈 수 없는 세상! 인생의 속내는 알고 보면 눈물과 웃음이 그 시작과 끝 속에서 늘 하나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옮음과 그름을 나누기에 그 둘이 서로 싸우고, 영화와 치욕을 나누기에 그 둘이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게 끊임없이 둘로 나뉘어 반목하는 세상의 번뇌 속을 봄이 헤매일까 두렵습니다. 어쩌면 저 벗도 봄과 함께 시비의 세상을 떠나려 길을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깨어진 꿈은 그 날을 자기 가슴에 꽂는 것이어서 시비를 배운 그 슬픔을, 떠나는 벗과 봄은 아니 배우기를…. 시비를 떠나버린 세상의 밖, 세월의 뒤주에서 잊혀진 듯 고요히 머물기를! 그런 까닭일까요…, 그의 말을 깊이 들었던지 봄은 여지껏 우리 세상으로 다니려 오긴 하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고 단지 몇 달씩만 머물다 이내 떠나 버립니다. 그래서 봄의 마음엔 세상도 시비를 얹을 수가 없나 봅니다. 하나의 시비란 늘 그 시비를 길이 논할 때만 생기는 것이니까요!(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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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흘 : [신목민학]<494>/ 시의회 스캔들/ 2009.07.02 (목)/ 강릉부사 조운흘(趙云仡)(1332~1404)은 청백하다고 이름이 났었다. 기생들이 농담하기를 “꿈에 주관(主官·주인)을 모시고 동침하였는데 지금 동료들과 함께 해몽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조운흘이 글을 지어 답했다. “마음은 영서.../ 중도일보 > 사회(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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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