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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13-1:하윤(1372부임)
예천고을원(13-1) : 하윤(1372부임, 영의정까지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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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河崙, 1347-1416)은 1372년(공민왕 21)에 부임한 지보주사(知甫州事, 現 醴泉郡守)이다.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진주, 부사 윤린(允麟)의 아들,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하니, 시험관 이인복(李仁復)이 한 번 보고 사람됨이 큰 것을 알아채고, 아우의 딸과 결혼케 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영주목과 1372년 예천을 잘 다스려 당시 도지사는 그의 치적을 가장 높이 평가하여 보고했다.
고공 좌랑을 거쳐 첨서밀직사사에 이르러 최영의 요동 공격 정책을 극력 반대하다가 양주에 귀양갔다.
이성계가 즉위한 뒤 경기좌우도 도관찰사로 기용되었을 때 계룡산 천도를 홀로 반대하여 중지케 했다. 첨서중추원사로 있을 당시 명 나라 태조가 글을 잘못 지은 정도전을 소환하자, 하윤은 정도전을 대신하여 명 나라에 들어가 명 태조의 오해를 풀었다. 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이르러 난을 평정하고 공을 세웠다.
정종이 즉위하자, 정당문학이 되어 정사1등공신에 오르고, 진산군에 봉해졌고, 우의정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1등공신에 책록되고, 1400년에 좌정승이 되어 명 나라 영락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로 명 나라에 다녀온 후 벼슬을 그만두고 진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왕명을 받들어 먼저 왕의 무덤을 돌아보기 위하여 함길도에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에 죽었다.
음양, 의술, 성경(星經), 지리 등에도 정통하였고, 일찌기 <태조실록> 15편을 찬수하였고, 저서로 <호정집>이 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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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河崙) : 1272년(공민왕 21)에 부임한 지보주사(醴泉郡守)이다. 1347(충목왕 3)-1416(태종 16),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진주, 부사 윤린(允麟)의 아들이다.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하니, 시험관 이인복(李仁復)이 한 번 보고 사람됨이 큰 것을 알아채고 아우 인미(仁美)의 딸과 결혼케 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영주목(榮州牧)과 1372년(공민왕 21) 보주를 잘 다스려 안렴사(按廉使) 김주(金湊)는 그의 치적을 가장 높이 평가하여 보고했다. 그러나 기록에는 지보주사로서 잘못하여 경상도 도사(都事)가 파직시키려 했다. 감사 김주가 이를 말렸다. 이 이유인 즉, ''''하윤의 기색을 보니, 조그마한 수령으로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당시 선최의 날을 맞아 감사가 각 고을 수령의 치적을 심사해서 상부에 올리는데, 하윤의 치적을 윗자리에 적어 처리했다는 것이다. 그 뒤 김주가 정사의 란에 걸려 형세가 심히 위급했을 때 김주의 아내가 하윤에게 알리어, 하윤이 힘을 다해 위급을 면하게 했다는 것이다. 고공 좌랑(考功佐郞)을 거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러 최영의 요동 공격정책(攻遼政策)을 극력 반대하다가 양주(襄州)에 귀양갔다. 이성계가 즉위한 뒤 경기좌우도 도관찰사(京畿左右道都觀察使)로 기용되었을 때에 계룡산 건도 역사(建都役事)의 부당함을 홀로 역설, 마침내 중지케 했다.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 있을 당시 명 나라 태조가 표사(表辭)의 근실하지 못한(不謹) 문제로 그 글을 지은 정도전을 소환하자, 하윤은 정조전을 대신하여 명 나라에 들어가 명 태조의 오해를 풀었다.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이르러 난을 평정하고 공을 세웠다. 정종이 즉위하자, 정당문학이 되어 정사1등공신에 오르고 진산군(晋山君)에 피봉되었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1등공신에 책록되고 1400년(태종 즉위)에 좌정승이 되어 명 나라 영락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賀登極使)로 명 나라에 다녀왔고, 1414년(태종 14) 영의정부사가 되어 70세에 벼슬을 그만 두고 진산부원군에 피봉, 왕명을 받들어 먼저 왕(先王)의 무덤(능침)을 돌아 보기(巡審) 위하여 함길도(咸吉道)에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에 죽었다. 음양, 의술, 성경(星經), 지리 등에도 정통하였고, 일찌기 <태조실록> 15편을 찬수하였다. 저서로 <호정선생문집(浩亭先生文集)>이 있는데, 2책(겹장), 30cm이다. 경성(京城)에서 1940년에 발행하였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人物考, 인터넷 야후 2001).
[李肯翊의 燃藜室記述 第1卷 太祖朝 故事本末 1398年 가을] : 과거에 하윤이 예천 군사(醴泉郡事 : 現 醴泉郡守)가 되어서 그 고을 기생을 모두 관계하여 음탕함이 한이 없었는데, 전최(殿最)하는 날, 도사(都事)가 장차 하등(下等)에 두려고 하니, 감사(監司) 김주(金湊)가 말리기를, "하윤의 기상을 보니, 한 고을에 오래 굽히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만 덮어 주라."하여, 드디어 상등(上等)에다 두었었다. 이 때에 와서, 김주가 정사의 난에 방석의 편에 가담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는데, 김주의 부인이 하윤의 말 앞에 꿇어 앉아 말하기를, "저는 김주의 처입니다." 하니, 하윤이 힘을 써서 구해주어 난을 면하였다.(海東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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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河崙) : 1347(충목왕 3)-1416(태종 16), 1372년(공민왕 21)의 지보주사(知甫州事, 現 醴泉郡守),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본관은 진주, 순흥부사(順興府使) 윤린(允麟)의 아들, 어릴 때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성질이 중후(重厚)하였고, 소년 시절에 이미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음양(陰陽), 복서(卜筮), 성경(星經), 지리(地理) 등에도 연구가 깊었다. 1365년(공민왕 14)에 그는 19세의 약관(弱冠)으로 과거(科擧)에 급제하였는데, 좌수 이인복(座首李仁復)은 그를 한번 보고 사람됨이 대성(大成)할 것을 알아채어 그 아우 인미(仁美)의 딸과 결혼케 하여 자기의 조카사위로 삼았다. 그 후 하윤은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어 신돈(辛旽)의 자행(恣行)을 공박하다가 지보주사(知甫州事)로 좌천(左遷)되었는데, 그의 외숙(外叔)인 강회백(姜淮伯)은 항상, "너는 장래에 재상(宰相)이 될 인물이니, 시골에 묻혀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격려하였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쫓겨난 하윤은 군치(郡治)에 대한 의욕이 나지 않아서 그냥 풍류로 세월을 보냈으나 큰 뜻을 품고 있었다. 군(郡) 안에 있는 기생(妓生)과 놀기만 하였다. 이 때 도사(都事)가 그의 치적을 보고 조사한 후 경상 안렴사慶尙按廉使) 처소에서 여러 가지로 논의하였다. "지보주사 하윤(知甫州事河崙)의 치적이 가장 나쁘오." 경상감사(慶尙監司) 김주(金湊, 1372 初任, 1389-1891 再任)는 이 말을 듣고 ,"하윤이 어느 면이 나쁘오."라고 하며, 그의 단점을 내세우라고 하였다. "그 자는 군(郡)에서 국가의 소유물인 기생들과 닥치는 대로 음란한 행동으로 농락하였고, 자기 마음대로 폭정을 하여 도저히 가망이 없소," "그래도 안 될 말이요. 그 자의 뒤에는 정안군(太宗 李芳遠)이 있소.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나오." "아무리 정안군이 뒤에 있다 하지만 잘못을 그대로야 둘 수 있소? 나는 가장 최하위(最下位)를 주어야 하겠소." "안 되오. 그의 기상(氣像)을 보면 한 읍(邑)의 지방관으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요. 어서 그의 치적을 상지상(上之上)으로 만드오." 이로써 하윤의 명성이 높았다. 그는 이방원(李芳遠)의 큰 야심을 알고 찾아가 여러 가지로 공론(公論)하였다. 그 후에 김주(金湊)가 정사(定社, 芳碩)의 난에 관련되어 기세가 아주 위급할 때 김주(金湊)의 아내가 하윤의 말 머리에 꿇어 앉아서, "나는 김(金) 아무개의 아내입니다."라고 하니, 하윤이 힘써 구하여 죄를 면하였다. 하윤은 고공좌랑(考功佐郞)을 거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의 벼슬에 올랐다.(韓國史話 李相玉著 東西出版社 243쪽, 人物韓國史(3) 74-75쪽, 용재총화 제10권, 海東雜錄, 練藜室記述 第1卷 太祖條 故事本末 太宗定社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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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高麗 때 醴泉고을 員, 歷史人物 再照明, 朝鮮王朝 創業의 宿命的 맞수 鄭道傳과 河崙) [記事] : 태조 이성계를 도왔던 정도전(醴泉監獄에 갇혔던 이). 태종 이방원을 도왔던 하윤. 이 두 사람은 고려시대 유학자 이색의 문하생이면서도 끝내 목숨까지 빼앗는 정적이 되었다. 이들의 출신 배경과 학문, 그리고 개혁정책을 재조명한다. [풍수지리 밝았던 하윤] : 하윤(河崙)은 1365년(공민왕 14년) 겨우 1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나 1368년(공민왕 17년)에 감찰 규정(監察糾正)이 되어, 당시의 집권자 신돈(辛旽)의 문객(門客)을 규탄하다가 신돈의 미움을 받아 파직됐다. 이 때 그의 외삼촌 강회백(姜淮伯, 甘泉面 寓居)이 위로하기를, 『너는 장래에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이니, 결코 시골에 묻혀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고 했다. 그가 42세가 되던 1388년(우왕 14년)에 최영(崔塋)이 철령위(鐵嶺衛) 문제로 군사를 일으켜 명(明) 나라 요동(遼東)을 정벌하려고 했다. 하윤은 이를 반대하다가 양주(襄州)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에 의한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이 성공하자 그는 곧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우왕(禑王)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 창왕(昌王)이 옹립된 직후인 1388년(창왕 1년) 여흥(驪州)에 유폐되었던 우왕은 김저(金佇, 一名 金遜, 金海金氏 醴泉入鄕祖) 일파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하윤은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권근(權近) 등과 같이 우왕을 지지하는 유학자 일파로 간주되어 또 유배를 당했다. 이처럼 하윤은 고려 말엽의 유학자로서 이색 정몽주(鄭夢周) 정도전 등과 함께 친명파(親明派)에 속했으나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 일파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46세가 되던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는데 이 때부터 정도전이 권력을 잡고 전성기를 누렸으나 하윤은 언제나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서 지방의 관찰사와 부사 같은 한직에 머물렀다. 그는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 남은(南誾) 등의 개국공신파에게 견제당하여, 중앙정계에서 자기의 역량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현실의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하여 하윤은 풍수지리학을 통해서 여러 번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하윤은 이색의 문생(門生)으로서 정도전과 함께 정통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으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관상학(觀相學) 등의 잡설(雜說)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불교와 도참설(圖讖說)을 배척하고 정통 유학의 이론만을 고집하던 정도전과 다른 점이었다. 당시 정통 유학자들은 이러한 잡설을 배격했다. 그러나 하윤은 이러한 잡설에까지 정통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사상은 고루한 유학자와는 달리 현실성과 다양성을 지녔다고 할 수도 있다. 1393년(태조 2년) 3월에 나라에서 계룡산(鷄龍山)으로 천도(遷都)하려고 하자, 하윤은 계룡산의 형세를 비운(悲運)이 닥쳐올 흉한 땅이라고 주장하여 천도 계획을 중지시켰다. 이리하여 하윤은 풍수학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인정을 받아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하윤은 다시 한양(漢陽)의 무악(毋岳)이 지리설에 맞는 길지(吉地)라고 추천하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했으나, 실권자 정도전과 조준(趙浚) 등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무악(毋岳)은 지금 서울의 신촌 일대를 말한다. 하윤은 끝까지 무악이 가장 좋은 명당이라고 주장했으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려 인종(仁宗) 때에 묘청(妙淸)이 서경(西京,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다가 김부식(金富軾) 등 유학자들의 반대로 좌절된 것과 같았다. 중 묘청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으나 당시의 하윤은 그러한 힘도 없었다. 아마 이러한 좌절이 그로 하여금 정안대군(靖安大君) 이방원(李芳遠)에게 접근하게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방원 만남 간청한 하윤] : 하윤과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하윤은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방원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방원의 장인 민제(閔霽)를 만나서 간청하기를,『내가 사람의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공의 둘째 사위만한 인물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그를 만나보기를 원합니다』고 했다. 민제는 사위 이방원에게 권유하기를,『하윤이라는 사람이 대군을 꼭 한번 뵙고자 하니, 한번 그를 만나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이리하여 이방원과 하윤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하윤이 이방원을 만나보기 위해서 꾸며낸 계략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당시 여러 왕자 가운데 가장 야망이 크고, 머리가 뛰어났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과 하윤은 이렇 듯 출세의 기회를 포착하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또 두 사람에게는 남들보다 뛰어난 아이디어도 있었다. 만약 하윤의 지모(智謀)가 없었더라면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윤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한 인물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정도전과 남은 일당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번과 이방석을 제거했다. 또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박포(朴苞) 일당을 죽이고,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유배시켰다.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 그의 손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속설(俗說)에도 하윤은 살꽂이(箭串) 다리에서 태종 이방원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제1, 2차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가서 머물던 태조 이성계가 무학(無學) 대사 등의 간곡한 건의에 따라 서울로 돌아오던 날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살꽂이 다리까지 마중을 나가서 부왕을 맞이했다. 이 때 하윤이 태종에게 건의하기를,『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의 노기가 아직 풀리지 아니했을 터이니, 막사 차일(遮日, 천막)의 중간 지주(支柱)를 아주 굵은 나무로 만들도록 하소서』라고 했다. 태종 이방원은 하윤의 말대로 아름드리 큰 나무로 차일 지주를 세웠다. 태조 이성계가 아들 태종을 보자마자 노기충천하여 활을 잡고 마중 나오는 아들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태종은 황급히 차일의 지주 뒤로 몸을 피하여 그 위기를 넘기고, 날아온 화살은 차일의 지주에 꽂혔다. 이것을 본 태조는 크게 웃으면서『모두가 하늘의 뜻이다』하고 단념했다. 지금 남아 있는「살꽂이」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정몽주와 절친했던 정도전] : 고려 말에 태어난 정몽주(1337~1392년) 정도전(1342~1398년) 하윤(1347~1416년) 세 사람의 출생 연도를 보면 나이가 각기 5년씩 차이가 난다.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에 정도전보다 5년 선배였던 정몽주는 정도전을 항상 동생처럼 이끌어 주고, 성리학의 심오한 세계를 깨우쳐 주었다. 하윤도 이색의 문생(門生)이었는데, 정몽주와는 10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으므로 정몽주를 무척 어려워 했다. 하윤은 원래 정도전과는 친숙하지 않았던 것 같고 오히려 권근(1352~1409년)과 가까이 지냈는데, 하윤은 권근보다 나이가 다섯 살 위였다. 정몽주가 1392년에 비명에 죽고 조선 왕조가 개국되자 정도전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며,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도전이 비명 횡사하자 하윤의 전성시대가 오게 되었다...(金九鎭 弘益大 敎授 新東亞 1997-11-01 23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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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6 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실린 연려실 이긍익(李肯翊)의 예천군수(1392 赴任) 하윤에 대한 기록으로, 그 내용은, “연려실기술 제1권/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태종 정사(太宗定社) 무인년(1398) 가을/ ○ 과거에 하윤이 예천 군사(醴泉郡事)가 되어서 그 고을 기생을 모두 관계하여 음탕함이 한이 없었는데, 전최(殿最)하는 날 도사(都事)가 장차 하등(下等)에 두려고 하니, 감사(監司) 김주(金湊)가 말리기를, ꡒ하윤의 기상을 보니, 한 고을에 오래 굽히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만 덮어 주라.ꡓ 하여, 드디어 상등(上等)에다 두었었다. 이 때에 와서 김주가 정사의 난에 방석의 편에 가담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는데, 김주의 부인이 하윤의 말 앞에 끓어 앉아 말하기를, ꡒ저는 김주의 처입니다.ꡓ 하니, 하윤이 힘을 써서 구해주어 난을 면하였다./ 최항(崔恒)이 과거에 응시하여 지은 시에 이르기를, ꡒ대지가 뜨거워서 일월이 이글거리니, 들리는 우레 다만 하늘 한 쪽뿐이구나.ꡓ 하였으니, 이것은 방번(芳蕃)과 방석(芳碩)의 변란에 온 나라 신민이 모두 하윤의 피해를 입었으며, 태조가 비록 개국한 공이 있으나 먼 지방으로 옮겨가 한갓 울분을 더하기만 하는 것이 마치 하늘에서 큰 우레 소리가 울리나 다만 조그마한 한 쪽 하늘에서 소리나는 것과 같아 누가 경계하고 누가 두려워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해동잡록(海東雜錄)》”이다.(www.minchu.or.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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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6 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실린 민족문화추진회의 기사로, 그 내용은, “《조선고서간행회본》과의 대조 보충분/ 各道都事. 古稱外臺. 觀於河崙將置下考之事. 都事之與於殿最. 而監司之不能專擅. 可知. ?繩列郡. 彈壓一道. 必有其責. 而始高麗都巡問之職衙門無定所. 常作客官. 近日. 漸以鄕曲未通淸文官差送. 尸位數慢. 然異唐之縣丞. 式年掌試. 始以三司除出. 而試事畢卽還. 當初設官之意. 豈徒然哉. 補述/ 각도 도사(都事)를 옛날에는 외대(外臺)라 하였는데, 경상 도사(慶尙都事)가 예천 군수(醴泉郡守) 하윤(河崙)을 하고(下考)에 두려고 하였던 일로써 본다면 도사가 수령의 전최에 참여하여 감사가 능히 전단하지 못하게 한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고을을 규찰하고 한 도를 진압하던 것이 반드시 그 책임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고려 때 도순문(都巡問)의 직(職)으로 아문(衙門)이 일정한 처소가 없고 항상 객관(客官)이 되었었는데 요즘은 점점 시골의 통청문관(通淸文官 淸要職의 후보자로 인정된 문관)이 되지 못한 문관으로 임명하여 직책만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唐) 나라 현승(縣丞)과는 다르다. 식년에 향시(鄕試)를 맡게 될 때에는 비로소 삼사(三司)에서 가려 보내되 시험을 마치면 곧 돌아가니, 당초에 도사의 관직을 설치한 뜻이 어찌 이렇게 헛되었는가. 보술(補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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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1 刊) 용재총화(?齋叢話)에 실린 성현(成俔)의 예천군수(1392 赴任) 하윤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용재총화 제10권 ○ 호정(浩亭) 하윤(河崙)이 예천 군수가 되어 고을 기생을 모두 사사로이 다...”이다.(www.minchu.or.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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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국학원전 용재총화(慵齋叢話, 1525)에 실린 용재 성현(成俔)의 예천군수(1372 赴任) 하윤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齋叢話卷之十/ ○ 호정(浩亭) 하윤(河崙)이 예천 군수가 되어 고을 기생을 모두 사사로이 다루고 거리낌 없이 음란하였다./ 전최(殿最) 날 도사(都事)가 호정의 허물을 논박하여 곧 하고(下考)하려고 하였더니, 당시 김주(金湊)가 감사로 있었는데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ꡒ하윤의 기상을 보니 한 고을에 오래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니니 아직 논하지 말라.ꡓ 하고 드디어 상등[上第]으로 고과하였다. 그 후에 김주가 정사(定社)의 난에 관련되어 기세가 아주 위급할 때 김주의 아내가 호정의 말 머리에 꿇어앉아서, ꡒ나는 김 아무개의 아내입니다.ꡓ 하고 말하니, 호정이 힘써 구하여 죄를 면하였다./ 호정 하윤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자, 그 당시 정안군(靖安君)이던 태종이 집 잔치에 참여하였다. 여러 손님들이 많이 모였는데 태종이 앞에 나아가서 술을 부을 적에 호정은 일부러 취한 척하며 상위의 찬과 탕을 뒤집어 엎어, 왕자의 옷을 더럽히자, 태종이 크게 노하여 일어났다. 호정이 자리에 있는 손님들에게 말하기를, ꡒ왕자가 노하여 가니 가서 사죄해야겠다.ꡓ 하고 드디어 따라나섰다. 종이 태종에게 고하기를, ꡒ감사가 옵니다.ꡓ하였으나, 태종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문(大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리므로 호정도 역시 말에서 내렸다. 중문(中門)에 들어가니 호정도 또 중문에 들어가고, 내문(內門)에 들어가니 또한 내문에 따라 들어왔다. 태종이 비로소 이를 의심하여 돌아보고, ꡒ웬 일이냐?ꡓ고 물었다. 호정은 말하기를, ꡒ왕자의 일이 위급합니다. 소반을 뒤집어 엎은 까닭은 장차 나라에 위태로운 환란이 있을 것이기에 이를 미리 알린 것입니다.ꡓ 하니, 그제서야 비로소 침실로 불러들여 계책을 물었다. 호정이 말하기를, ꡒ신은 왕명을 받았으니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안산 군수(安山郡守) 이숙번(李叔蕃)이 정릉 이안군(移安軍)을 거느리고 서울에 올 것이니, 이 사람에게 큰 일을 부탁할 만합니다. 신도 또한 진천(鎭川)에 가서 머물러 기다리겠사오니, 만약 일이 이루어지면 신을 급히 부르십시오.ꡓ 하고 호정은 드디어 떠났다. 태종이 이숙번을 불러 그 연고를 말했더니, 이숙번은 아뢰기를, ꡒ손바닥 뒤집듯이 쉽사온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ꡓ 하고, 드디어 태종을 모시고 궁중의 종과 이안군을 이끌고, 먼저 군기감(軍器監)을 빼앗아 갑옷을 입고 병기를 가지고 나와 경복궁을 둘러쌌다. 태종이 남문 밖에 막차를 쳐서 그 가운데 앉고 또 막차 하나를 그 밑에 치니, 사람들이 누구의 자리인지 알지 못했는데, 호정이 올라와 가운데 자리잡으니 사람들이 모두 머지 않아 재상이 될 줄 알았다. 정사(定社)의 공은 모두 호정과 이숙번의 힘이었다...”이다.(www.minchu.or.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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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133/ 주석번호/제목 [註133] 七月 …… 賜故王?諡恭愍 / 高麗는 縣案이 解決되자 禑王 11年 5月에 門下評理 尹虎․密直副使 趙?을 明에 보내서 謝恩 兼 請襲․請諡를 올렸고(原文의 ꡐ七月 禑上表請襲爵 …… ꡑ은 이 使行에서 한 것이다), 同年 6月에도 密直使 安翊․密直副使 張方平을 보내서 賀聖節하였다. 이에 明에서는 禑王을 高麗國王으로 삼고 恭愍王을 諡하여 恭愍으로 하였다. 그리고 國子監學錄 張溥를 詔書使로 삼고, 國子監典簿 周倬을 諡?使로 삼아서 高麗에 派遣했다(『明實錄』洪武 18年 7月 癸酉條). 이에 高麗는 그 해 10月 門下府事 曺敏修․贊成事 張自溫(張子溫)과 禹玄寶․簽書密直司事 河崙을 明에 보내어 謝恩하고 曆日과 符驗을 請했다. 이 후에 高麗의 對明關係는 正常化되었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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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08/ 주석번호/제목 [註208] 鄭總(擢) / 原文의 鄭總은 鄭擢의 잘못이다. 鄭擢은 麗末․鮮初의 文臣으로, 太祖 5年 正朝表箋文문제로 是非가 생기자, 計?使 河崙이 明에 가서 辨明한 뒤에 老母를 奉養한다 하여 풀려 돌아왔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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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09/ 주석번호/제목 [註209] 送撰表人鄭總(擢)等三人至 …… 道傳病不能行/ 朝鮮에서는 太祖 5年 6月 丁酉에 到着한 明使의 督促을 받고, 同年 7月 甲戌에 明使를 먼저 보내고 이어 判司譯院事 李乙修를 管押使 삼아서 撰表箋人 藝文春秋學士 權近․右承旨 鄭擢․該(當時의)啓稟校正人 敬興府舍人 盧仁度를 管送시키고, 아울러 漢城尹 河崙을 啓稟使로 보내면서 表箋譴責에 대한 事情을 具奏케 했다. 이 上奏에 의하면,/ 進賀洪武二十九年正旦表文 係成均大司成 鄭擢修撰 箋文 係判典校寺事 金若恒修撰 其時爲因鄭擢患病 止將撰箋人金若恒 …… 將大司成鄭擢所撰進賀 洪武二十九年正旦表草到於提調官判三司事鄭道傳處 ?請校正間 爲緣本官掌宗廟遷移祭享等事 不曾改抹校正 却將表草於次提調官知門下府事鄭? 藝文館提學權近處校正 所供是實(中略)其鄭道傳 …… 不曾改抹校正 事無干連 又緣本人患?脹脚氣病證 不能起送 …… 今見賀正使柳?等 未蒙放還 …… 寬宥以慰國人之望(『太祖實錄』太祖 5年 7月 甲戌條)/ 이라고 했다. 原文에서 ꡐ撰表人三人ꡑ이란 權近․鄭擢 ․盧仁度의 3人이다. 이들이 明에 到着하자 柳? 등은 放還되었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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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10/ 주석번호/제목 [註210] 帝以總(擢)等亂邦?? 留不遣 / 洪武帝는 朝鮮에 보낸 計稟使 河崙과 撰表人 3人 등을 만나 본 후, 河崙과 鄭擢은 回還시키고 權近과 盧仁度는 抑留케 했다. 鄭擢은 老母의 奉養을 위해 配慮해 준 것이다(『明實錄』洪武 29年 9月 丁卯條와『太祖實錄』太祖 5年 11月 戊午條의 計稟使 河崙․撰表人 鄭擢의 歸還에 붙인 禮部咨文). 그런데 權近은 金陵에 머물면서 文人으로서의 才能을 十分 發揮해서 朝鮮과 明의 關係를 好轉시켰다. 權近은 洪武帝의 要求에 대하여 二十四首 詩賦를 지어 올렸다.(末松保和, 前揭論文 pp.407~409 參考. 이는 ꡐ權近行狀ꡑ에 의했다. 再引用치 않음)./ 原文의 鄭總은 鄭擢의 거듭된 誤記이고, 더욱이 ꡐ帝以總等亂邦?? 留不遣ꡑ은 前述한 대로 鄭擢이 아니고 權近等이 되어야 할 것이다(註 208) 參考). 權近은 太祖 6年 3月 戊午에 前年末에 갔던 賀正使인 安翊․金希善과 같이 돌아 오면서 洪武帝의 勅慰詔書(唐妃의 吊意)․宣諭․御製의 長句四韻詩三篇과 禮部咨文을 齎來했다. 그러나 鄭?등이 抑留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참조> / 『明史』朝鮮列傳 註 208)/ 鄭總(擢)/ 原文의 鄭總은 鄭擢의 잘못이다. 鄭擢은 麗末․鮮初의 文臣으로, 太祖 5年 正朝表箋文문제로 是非가 생기자, 計?使 河崙이 明에 가서 辨明한 뒤에 老母를 奉養한다 하여 풀려 돌아왔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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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12/ 주석번호/제목 [註212] 建文初 …… 許之 / 朝鮮 太祖는 그 7年 9月 5日에 王位를 世子 芳果에게 讓位하고 上王이 되었다. 芳果는 卽位후 暾이라고 改名했다. 朝鮮 第 2代王 定宗이다. 太祖는 同年 8月 己巳에 李芳遠(뒤의 太宗)이 鄭道傳․南誾․沈孝生의 王子除去의 謀議를 구실로 쿠테타(王子의 亂)를 일으키자 政治에 뜻을 잃고 定宗인 芳果에게 讓位한 것이다. 그 2年 후 定宗 2年 11月에 定宗은 所謂 芳幹의 亂을 겪고(芳幹은 ꡐ擧兵作亂ꡑ, ꡐ謀害同氣ꡑ로 流配됨), 河崙 등의 奏請으로 上王(太祖)의 允許를 얻어 芳遠을 後嗣로 삼고, 이해 11月 癸酉에 後嗣에 讓位하고 말았다. 定宗이 上王이 되고, 太祖는 太上王이 되었다. 李芳遠은 곧 3代王인 太宗이다. 이렇게 2次에 걸친 不得已한 讓位는 實上 太宗의 卽位工作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하간 王位가 交替될 때마다 朝鮮에서는 明에 計稟하여 그 許諾을 請했다. 太祖가 定宗에게 讓位한 후 判三司事 ?長壽를 遣使했으나, 三年一聘에 該當되지 않는다는 구실로 沮止당하여 다시 定宗 元年(建文 元年) 正月에 建文帝의 賀登極使 金士衡과 洪武帝의 陳慰使 河崙이 派遣되어 讓位承襲을 許諾받았다(『定宗實錄』定宗 元年 6月 丙寅條)...(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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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14/ 주석번호/제목 [註214] 永樂元年正月 芳遠遣使朝貢 / 太宗은 永樂帝의 卽位詔書를 받고 바로 그 해 10月 乙丑에 左政丞 河崙․知議政府事 李詹․判漢城府事 趙璞을 明에 보내어 河崙․李詹은 賀登極하고, 趙璞은 賀正케 했다. 河崙 등은 太宗 3年 4月 甲寅에 明使와 같이 돌아왔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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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15/ 주석번호/제목 [註215] 陪臣 / 『禮記』「典禮」下 ꡐ自稱曰陪臣某ꡑ의 疏에 ꡐ陪 重也 其君已爲王臣 己今又爲己君之臣 故自稱對王曰重臣ꡑ이라 하였다. 陪臣은 여기에서 緣由한 것이다. 各 功臣 또는 榮爵을 받은 사람들이 그 代表的인 陪臣들이었다. 鄭道傳․趙浚․河崙 등이 그들이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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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30/ 주석번호/제목 [註230] 金印․誥命 / 朝鮮王國의 金印․誥命은 朝鮮 太祖의 開國以來 所願이던 것이었는데, 建文 3年 6月 己巳에 明使 通政寺丞 章謹․文淵閣侍詔 端木禮에 의해서 傳達되었다. 그러나 永樂帝는 簒奪해서 卽位하자 都指揮 高得․通政司左通政 趙居仁․宦官太監 黃儼․曹天寶 등을 시켜서 金印․誥命을 다시 下賜하고, 建文帝가 下賜하였던 金印․誥命을 ?回시켰다(『太宗實錄』太宗 3年 4月 甲寅條․『明實錄』永樂 元年 2月 甲寅條). 이렇게 建文帝때 내려진 金印․誥命을 回收하고, 永樂帝가 다시 下賜한 것은 永樂帝가 簒奪한 후 建文帝를 拂拭했기 때문이다. 『太宗實錄』太宗 3年 5月 丁亥條에 의하면, 永樂帝의 新金印․誥命을 다시 얻게된 것은 前年 永樂帝의 賀登極使로 갔던 左政丞 河崙의 功이 컸다고 한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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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48/ 주석번호/제목 [註248] 鄭擢 / 麗末․鮮初의 文臣이다./ <참조> /『明史』朝鮮列傳 註 208)/ 鄭總(擢)/ 原文의 鄭總은 鄭擢의 잘못이다. 鄭擢은 麗末․鮮初의 文臣으로, 太祖 5年 正朝表箋文문제로 是非가 생기자, 計?使 河崙이 明에 가서 辨明한 뒤에 老母를 奉養한다 하여 풀려 돌아왔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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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040_0120_0240/ 여지도서/ 忠淸道 / 淸風 / 樓亭 / ...寒碧樓俯臨大江奇勝爲上游冠自前朝已有之府使 宋處寬有記而不傳今有晉山君河公崙 ...晉山府院君 浩亭 河崙記○重修記曰 萬曆辛丑夏余自丹山訪宋侯仁?於沙熱是時梅雨新晴?洲欲沒乘?而下歷龜潭?玉筍瞥然之傾不覺冷風之吹我而上寒碧...(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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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040_0120_0240/ 여지도서 / 江原道 / 襄陽 / 古跡 / ...河趙臺 在府南三十里小麓?入海中?絶爲臺臺之左右巖壁奇古海濤衡激浪雪飄散世傳國初河崙 趙浚遊賞處故遂名之...(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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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060_0020_0170/ 여지도서 / 補遺篇(京兆, 松都, 水原) / 松都舊誌序 / 松誌都卷之七 / 附錄 / ...車原?高麗大匡伯孝全十九世孫也晦跡平山水雲巖洞足不履城市極言攻遼不可回軍後趙浚 李良祐言以記功答曰左脅金鱗尙在余何汚開土上祖之忠義乎寧喫五斗醋不參有功選嚴辭峻志以示不染之意爲鄭道傳 咸傳霖 趙英珪 河崙 / <상권1035-1>/ 所椎殺內外族類死亡略盡吉再聞原?死引書床投諸燈而痛哭趙云?擊其案而痛哭時人謂投燈之父擊案之盲淮安大君芳?放歸田里之日想原?非命不覺喪心至農人田舍之飮却忘騎去牛以歸李養中遁在野外之日怨原?非命不勝深憤至鄕人獵川之會打破其所盛?器而去時人謂之忘牛之子破?之翁...(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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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00_0060_0070/ 여지도서 / 咸鏡道(關北邑誌) / 咸鏡南道永興府邑誌 / 山川 / ...龍興江 在府北二里許其源有四一自沸流水一出馬踰嶺一出艾田峴一出巨次嶺底至于鎭靜寺前合爲一派流入東海 太祖大王登極後奉命臣河崙因都巡問使 姜淮白言乃以龍興名焉蓋以東南流遂轉 濬源殿玄武而 太祖大王誕降肇基之地故也而有渡涉船二隻...(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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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70_0220/ 여지도서 / 慶尙道 / 慶州 / 驛院 / ...惠利院 在府東南三十二里○河崙序鷄林 新羅氏之古都入前朝爲巨府人物之繁?史具可見也及其叔世倭寇爲患者數十年可悲之甚矣予於庚午春將適蔚州道過城南寄宿天王寺堂頭然上人接以良話明日出門則寺以東杳無人烟行九十餘里以至于蔚州則孤城去海不滿十里賴有戰艦分泊浦口以備不虞耳其戍卒率兩月一更代魚鹽之貿易/ <하권0342-2>/ 者亦時至其於九十里往還之間祈寒暑雨或値日暮無所於止息草竊之可慮虎豹之可畏不能不呻吟耿耿以待曙光於林?之間矣予將還又宿天王寺語及羈旅之苦行役之難上人曰予雖出家爲養老親不能遠離鄕井子之所言予所悉知也親已沒願以追福之餘就於半途?一小院力不能足耳予間而義之明日上人送之大悲院丁丑春予尹府而至則上人尙奐恙公退之暇相與之話舊上人乃日予於向之半途卜得古之人所謂德方洞者前後皆山草木叢茂澗水中流可以爲?房可以爲凉軒旁有閑地又可以種蔬果誠宜置院以便行旅而南靜洲得溫李節制從周共助其費幾乎有成矣予聞而喜之欲於暇日相與一往觀之而未遂也今子奉使命又過府境上人出而見之喜蒲于色曰吾之院旣成而子方有中國之行不敢請陽村權公已記之矣予猶不得院名請子幸名之以光吾院予曰吾東方道途之有院宇卽周禮廬宿之遺意而爲政者之所當務也今上人孝其親以誠又推其餘以及於行路之人是其惠人利物之念發乎天性之所固有而不/ <하권0342-3>/ 客已者若此其?深山窮谷之中坐於空寂如槁木寒灰奐所事於世者相去豈不遠乎是宜有以名其院而使夫來者有所觀感也於是名之曰惠利仍次其前後之相語者以爲序云...(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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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80_0060/ 여지도서 / 慶尙道 / 晉州 / 形勝 / 嶺南第一 李仁老集晉陽溪山勝致爲嶺南第一 巨岳大江 李詹序人物之生有補於國者多巨岳大江磅?淸淑之氣有以致之 東方之陸海 前人晉陽評晉陽東方之陸海也歲出水土物以貢國者居嶺南諸州之半 飛鳳止于北望/ <하권0364-1>/ 晉拱于南 河崙鳳鳴樓記云云長江流其間東西諸山宛轉而四環(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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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80_0070/ 여지도서 / 慶尙道 / 晉州 / 城池 / 矗石城 在州南一里石築周四千三百五十九尺高十五尺內有井泉各三有軍倉○河崙城門記自古以來理亂循環蓋其天數之盛衰人事之得失相因而然也古之人脩人事以應天數故寇難或興而終莫能爲患也子於吾鄕之城有感馬予昔總角之日游學于此每見城塹之遺基不知其歲月問之耆舊亦莫徵當是時閭閻熙熙烟火相望海寇之鼠竊者雖或間發康州吉岸之伐亦足以?挫而合浦之鎭分兵相救若雷?而風飛然人不知修城塹爲急務也予旣冠從宦十餘年萊寇之登陸者歲益深在丁巳之秋廷議重備邊遣使諸道分理州縣之城鄒人卽舊基築以土不能經久隨復頹?奉使者豈得辭其責己未秋今知密直裵公來鎭康州移牒牧官?復修之遣參佐督其役易土以石功未半而寇陷賴江城郡之山城一鄕人有所依據得以却寇鋒然城挾而高不能以容衆又去州理遠滄卒勢不能及寇旣退牧使金公因民情而出令日州之城今/ <하권0364-2>/ 可畢修矣聞者咸願爲之役於是丁均其役躬自監督不日而畢城周八百步高三?有奇置門三西曰義正北曰智濟南曰禮化皆樓其上焉登而四顧則菁川繞于西長江奔于南品字隍列於東三池匯其北又開塹于城池問自西而東析而又南以至于江形勢之勝固可以一當百矣城旣成矣寇不復敢近而一境賴以安鳴呼作之之難不如興復之爲難有始之難不如有卒之爲尤難也事半而功倍者予於金公見之矣公諱仲光爲政務大體有長者風嘗爲濟州牧使反側之?服其義及還朝宰相以能理劇擧故有是任判官 李君仕忠亦端人也助公以成 新增大寺池 在北門外截地有?乃出八城門路也此池回抱城北有關防 加防 在城■門外壬辰鑿之以爲城塹(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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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80_0110/ 여지도서 / 慶尙道 / 晉州 / 風俗 / 俗尙詩書 尙富麗 俱地理誌 閭閻熙熙烟火相望/ <하권0366-4>/ 河崙矗石樓記 好學爲業 河崙四敎堂記好學爲業風俗已成 農夫?婦服其勤孝子慈孫竭其力 河崙矗石樓記(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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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80_0120/ 여지도서 / 慶尙道 / 晉州 / 宮室 / 客館 河崙序鄕之客舍失於火至于再不克重?者有年歲癸未今判書 廣州安公以左司諫大夫出爲牧使乃相舊基稍廣其制而新之今牧吏崔公判官殷君繼而增修之安公諱魯生崔公諱?殷君名汝霖皆以循良見稱於世(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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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80_0130/ 여지도서 / 慶尙道 / 晉州 / 學校 / 鄕校 在州東三里有四敎堂○河演記略曰吾鄕之學校卒無講堂前敎官趙寶仁議于州牧措置備梯今敎官姜元亮勤督告成乃名堂爲四敎走書請記晉之爲邑智理之英南海之精?釀沖融土地之沃饒人物之?華非他邑之比吾嘗聞殷烈公 姜民瞻學於校中功業?赫厥後人林尤盛近古文敬公 姜君寶吾先祖元正公諱楫 御史大夫諱允源及菁川君 河乙沚 參贊 鄭乙輔與夫國初以來文忠公 河崙 文正公 鄭以吾 ?正公 河敬復皆就鄕校而拔華若文武俱鳴於當/ <하권0367-1>/ 時吾鄕地靈人傑之美世所稱說然未必不由敎養之致今也諸生尋常講讀之有便當春秋勝如成均課試之法牧宰敎官暇日道遙於其上或關卷講問或出題賦詩??乎詠沂之趣從容乎樂育之樂優遊乎?樸早麓之興矣雖然屬名之旨豈爲此歎爲學之道有二有務實之學有務名之學務其實而不顧乎外者爲已也務其名而未脫乎徇名之習者爲人也人生八歲皆入小學以至大學之敎日用欽食動靜言語無非學也?植涵養循序而進及其成功尊德性硏經學非有意於文章而爲其文也出於義理之原非有意於政事而爲其政也發爲道德之用是則正心修身所以治平之本也夫子之四敎敎人以文學修行而存忠信也忠信本也名堂之義深切焉爲學之道何以加此諸生所當服膺而日新況値 聖朝右文之化思皇以寧之時乎云云○姜碩德詩十年風化洽群晴鳴鳳高崗孕秀精新闢?堂澄學海常關筆陣動詩城秋深絲竹含風靜春暖菁莪冒雨馨盛化卽今多吉事吾鄕諸彦盡窮經○李詹謁聖眞詩厥宇丹靑一炬亡頑童尙解護文坊十年/ <하권0367-2>/ 海嶠風塵裏獨整衣冠謁素王(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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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80_0150/ 여지도서 / 慶尙道 / 晉州 / 舊增?墓 / 河崙墓 在州北梧耳方(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80_0250/ 여지도서 / 慶尙道 / 晉州 / 樓亭 / ...矗石樓 在矗石城內城下有長江江上有巨巖矗矗架疊築樓於其上故名焉大野平遠江流控帶群巒拱揖?巖削壁塹/ <하권0370-2>/ 絶西南岸竹汀蘭掩暎左右沙烏翔鳴風般往來眞第一名勝○河崙記樓觀之經營爲治者之餘事耳然一樓之興廢而一鄕之人心可知矣因一鄕之人心而一時之世道可知矣則亦豈可以餘事而少之哉予爲此說久矣今於吾鄕之矗石樓益信之矣樓在龍頭寺南石崖之上予昔少年登望者累矣樓之制宏敞軒豁俯臨渺茫長江流其下象峯列于外閭閭桑竹隱?其間翠壁長洲聯接其側農夫蠶婦服其勤孝子慈孫竭其力至若禽鳥鳴翔魚鼈游泳?於一區而得其所者俱可觀矣且其名樓之義則淡菴白先生曰江之中有石矗矗故樓曰矗石始手於金公而再成於安常軒皆壯元也故又有壯元之名焉題詠之美則有勉齋鄭先生之排律六韻常軒安先生之長句四韻亦有耘隱?先生之六絶句和韻而繼之者有若及菴閔先生尋齋許先生皆佳作前輩之風流文彩因可想見矣不事前朝之季百度陵夷邊備亦弛海寇深入民墜塗炭樓亦?燼矣天啓 聖朝聖神相承治敎已明恩濡境中感振海外向之爲寇者?關乞降絡繹而獻琛海濱之地人烟再/ <하권0370-3>/ 密斑白之老酌酒而相慶曰不圖今日服見昇平然 上心猶以爲吾治未足每降敎旨禁用民力守令於事涉農桑學校之外不敢擅興一投鄕之父老前判事 姜順前司諫 崔麟等議曰龍頭寺邑初所置矗石樓一方勝景廢之久不能重新是吾鄕人之責也?各出財使鄕僧奠香龍頭寺者端求幹其事歲癸巳判牧使 權公衷與判官 朴弛潔採父老之言修築江防分民作隊隊各一推以除田里積年之患不十日而畢乃於是役助其不給召集遊手者?勤其力至秋九月而告成危樓聿新勝觀如舊予旣以人心世道爲喜且於父光之意有感焉後之登是樓者見汀草之始生念天地生物之心思不以一毫不仁之慘而宮民生見田?之方長念天地長物之心思不以一毫不急之務而奪民時望圖林之始實念天地成物之心思不以一毫非義之欲而侵民利見場圓之方積念天地育物之心思不以一毫非法之念而掠民財推是心而擴充之不敢獨樂於已而必欲與民同之人皆知世道之和人心之樂實源於 上德之深厚而皆願效於封人之祝矣則父光之拳拳焉/ <하권0370-4>/ 用意而興復者夫豈偶然哉予致仕之日己近思欲匹馬還鄕與諸父老每於良辰勝日觴詠樓上同樂其所樂以終餘年父老其待之...(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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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河崙, 1347-1416)은 1372년(공민왕 21)에 부임한 지보주사(知甫州事, 現 醴泉郡守)이다.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진주, 부사 윤린(允麟)의 아들,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하니, 시험관 이인복(李仁復)이 한 번 보고 사람됨이 큰 것을 알아채고, 아우의 딸과 결혼케 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영주목과 1372년 예천을 잘 다스려 당시 도지사는 그의 치적을 가장 높이 평가하여 보고했다.
고공 좌랑을 거쳐 첨서밀직사사에 이르러 최영의 요동 공격 정책을 극력 반대하다가 양주에 귀양갔다.
이성계가 즉위한 뒤 경기좌우도 도관찰사로 기용되었을 때 계룡산 천도를 홀로 반대하여 중지케 했다. 첨서중추원사로 있을 당시 명 나라 태조가 글을 잘못 지은 정도전을 소환하자, 하윤은 정도전을 대신하여 명 나라에 들어가 명 태조의 오해를 풀었다. 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이르러 난을 평정하고 공을 세웠다.
정종이 즉위하자, 정당문학이 되어 정사1등공신에 오르고, 진산군에 봉해졌고, 우의정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1등공신에 책록되고, 1400년에 좌정승이 되어 명 나라 영락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로 명 나라에 다녀온 후 벼슬을 그만두고 진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왕명을 받들어 먼저 왕의 무덤을 돌아보기 위하여 함길도에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에 죽었다.
음양, 의술, 성경(星經), 지리 등에도 정통하였고, 일찌기 <태조실록> 15편을 찬수하였고, 저서로 <호정집>이 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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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河崙) : 1272년(공민왕 21)에 부임한 지보주사(醴泉郡守)이다. 1347(충목왕 3)-1416(태종 16),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진주, 부사 윤린(允麟)의 아들이다.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하니, 시험관 이인복(李仁復)이 한 번 보고 사람됨이 큰 것을 알아채고 아우 인미(仁美)의 딸과 결혼케 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영주목(榮州牧)과 1372년(공민왕 21) 보주를 잘 다스려 안렴사(按廉使) 김주(金湊)는 그의 치적을 가장 높이 평가하여 보고했다. 그러나 기록에는 지보주사로서 잘못하여 경상도 도사(都事)가 파직시키려 했다. 감사 김주가 이를 말렸다. 이 이유인 즉, ''''하윤의 기색을 보니, 조그마한 수령으로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당시 선최의 날을 맞아 감사가 각 고을 수령의 치적을 심사해서 상부에 올리는데, 하윤의 치적을 윗자리에 적어 처리했다는 것이다. 그 뒤 김주가 정사의 란에 걸려 형세가 심히 위급했을 때 김주의 아내가 하윤에게 알리어, 하윤이 힘을 다해 위급을 면하게 했다는 것이다. 고공 좌랑(考功佐郞)을 거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러 최영의 요동 공격정책(攻遼政策)을 극력 반대하다가 양주(襄州)에 귀양갔다. 이성계가 즉위한 뒤 경기좌우도 도관찰사(京畿左右道都觀察使)로 기용되었을 때에 계룡산 건도 역사(建都役事)의 부당함을 홀로 역설, 마침내 중지케 했다.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 있을 당시 명 나라 태조가 표사(表辭)의 근실하지 못한(不謹) 문제로 그 글을 지은 정도전을 소환하자, 하윤은 정조전을 대신하여 명 나라에 들어가 명 태조의 오해를 풀었다.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이르러 난을 평정하고 공을 세웠다. 정종이 즉위하자, 정당문학이 되어 정사1등공신에 오르고 진산군(晋山君)에 피봉되었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1등공신에 책록되고 1400년(태종 즉위)에 좌정승이 되어 명 나라 영락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賀登極使)로 명 나라에 다녀왔고, 1414년(태종 14) 영의정부사가 되어 70세에 벼슬을 그만 두고 진산부원군에 피봉, 왕명을 받들어 먼저 왕(先王)의 무덤(능침)을 돌아 보기(巡審) 위하여 함길도(咸吉道)에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에 죽었다. 음양, 의술, 성경(星經), 지리 등에도 정통하였고, 일찌기 <태조실록> 15편을 찬수하였다. 저서로 <호정선생문집(浩亭先生文集)>이 있는데, 2책(겹장), 30cm이다. 경성(京城)에서 1940년에 발행하였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人物考, 인터넷 야후 2001).
[李肯翊의 燃藜室記述 第1卷 太祖朝 故事本末 1398年 가을] : 과거에 하윤이 예천 군사(醴泉郡事 : 現 醴泉郡守)가 되어서 그 고을 기생을 모두 관계하여 음탕함이 한이 없었는데, 전최(殿最)하는 날, 도사(都事)가 장차 하등(下等)에 두려고 하니, 감사(監司) 김주(金湊)가 말리기를, "하윤의 기상을 보니, 한 고을에 오래 굽히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만 덮어 주라."하여, 드디어 상등(上等)에다 두었었다. 이 때에 와서, 김주가 정사의 난에 방석의 편에 가담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는데, 김주의 부인이 하윤의 말 앞에 꿇어 앉아 말하기를, "저는 김주의 처입니다." 하니, 하윤이 힘을 써서 구해주어 난을 면하였다.(海東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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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河崙) : 1347(충목왕 3)-1416(태종 16), 1372년(공민왕 21)의 지보주사(知甫州事, 現 醴泉郡守),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본관은 진주, 순흥부사(順興府使) 윤린(允麟)의 아들, 어릴 때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성질이 중후(重厚)하였고, 소년 시절에 이미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음양(陰陽), 복서(卜筮), 성경(星經), 지리(地理) 등에도 연구가 깊었다. 1365년(공민왕 14)에 그는 19세의 약관(弱冠)으로 과거(科擧)에 급제하였는데, 좌수 이인복(座首李仁復)은 그를 한번 보고 사람됨이 대성(大成)할 것을 알아채어 그 아우 인미(仁美)의 딸과 결혼케 하여 자기의 조카사위로 삼았다. 그 후 하윤은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어 신돈(辛旽)의 자행(恣行)을 공박하다가 지보주사(知甫州事)로 좌천(左遷)되었는데, 그의 외숙(外叔)인 강회백(姜淮伯)은 항상, "너는 장래에 재상(宰相)이 될 인물이니, 시골에 묻혀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격려하였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쫓겨난 하윤은 군치(郡治)에 대한 의욕이 나지 않아서 그냥 풍류로 세월을 보냈으나 큰 뜻을 품고 있었다. 군(郡) 안에 있는 기생(妓生)과 놀기만 하였다. 이 때 도사(都事)가 그의 치적을 보고 조사한 후 경상 안렴사慶尙按廉使) 처소에서 여러 가지로 논의하였다. "지보주사 하윤(知甫州事河崙)의 치적이 가장 나쁘오." 경상감사(慶尙監司) 김주(金湊, 1372 初任, 1389-1891 再任)는 이 말을 듣고 ,"하윤이 어느 면이 나쁘오."라고 하며, 그의 단점을 내세우라고 하였다. "그 자는 군(郡)에서 국가의 소유물인 기생들과 닥치는 대로 음란한 행동으로 농락하였고, 자기 마음대로 폭정을 하여 도저히 가망이 없소," "그래도 안 될 말이요. 그 자의 뒤에는 정안군(太宗 李芳遠)이 있소.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나오." "아무리 정안군이 뒤에 있다 하지만 잘못을 그대로야 둘 수 있소? 나는 가장 최하위(最下位)를 주어야 하겠소." "안 되오. 그의 기상(氣像)을 보면 한 읍(邑)의 지방관으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요. 어서 그의 치적을 상지상(上之上)으로 만드오." 이로써 하윤의 명성이 높았다. 그는 이방원(李芳遠)의 큰 야심을 알고 찾아가 여러 가지로 공론(公論)하였다. 그 후에 김주(金湊)가 정사(定社, 芳碩)의 난에 관련되어 기세가 아주 위급할 때 김주(金湊)의 아내가 하윤의 말 머리에 꿇어 앉아서, "나는 김(金) 아무개의 아내입니다."라고 하니, 하윤이 힘써 구하여 죄를 면하였다. 하윤은 고공좌랑(考功佐郞)을 거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의 벼슬에 올랐다.(韓國史話 李相玉著 東西出版社 243쪽, 人物韓國史(3) 74-75쪽, 용재총화 제10권, 海東雜錄, 練藜室記述 第1卷 太祖條 故事本末 太宗定社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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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高麗 때 醴泉고을 員, 歷史人物 再照明, 朝鮮王朝 創業의 宿命的 맞수 鄭道傳과 河崙) [記事] : 태조 이성계를 도왔던 정도전(醴泉監獄에 갇혔던 이). 태종 이방원을 도왔던 하윤. 이 두 사람은 고려시대 유학자 이색의 문하생이면서도 끝내 목숨까지 빼앗는 정적이 되었다. 이들의 출신 배경과 학문, 그리고 개혁정책을 재조명한다. [풍수지리 밝았던 하윤] : 하윤(河崙)은 1365년(공민왕 14년) 겨우 1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나 1368년(공민왕 17년)에 감찰 규정(監察糾正)이 되어, 당시의 집권자 신돈(辛旽)의 문객(門客)을 규탄하다가 신돈의 미움을 받아 파직됐다. 이 때 그의 외삼촌 강회백(姜淮伯, 甘泉面 寓居)이 위로하기를, 『너는 장래에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이니, 결코 시골에 묻혀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고 했다. 그가 42세가 되던 1388년(우왕 14년)에 최영(崔塋)이 철령위(鐵嶺衛) 문제로 군사를 일으켜 명(明) 나라 요동(遼東)을 정벌하려고 했다. 하윤은 이를 반대하다가 양주(襄州)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에 의한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이 성공하자 그는 곧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우왕(禑王)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 창왕(昌王)이 옹립된 직후인 1388년(창왕 1년) 여흥(驪州)에 유폐되었던 우왕은 김저(金佇, 一名 金遜, 金海金氏 醴泉入鄕祖) 일파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하윤은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권근(權近) 등과 같이 우왕을 지지하는 유학자 일파로 간주되어 또 유배를 당했다. 이처럼 하윤은 고려 말엽의 유학자로서 이색 정몽주(鄭夢周) 정도전 등과 함께 친명파(親明派)에 속했으나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 일파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46세가 되던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는데 이 때부터 정도전이 권력을 잡고 전성기를 누렸으나 하윤은 언제나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서 지방의 관찰사와 부사 같은 한직에 머물렀다. 그는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 남은(南誾) 등의 개국공신파에게 견제당하여, 중앙정계에서 자기의 역량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현실의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하여 하윤은 풍수지리학을 통해서 여러 번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하윤은 이색의 문생(門生)으로서 정도전과 함께 정통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으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관상학(觀相學) 등의 잡설(雜說)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불교와 도참설(圖讖說)을 배척하고 정통 유학의 이론만을 고집하던 정도전과 다른 점이었다. 당시 정통 유학자들은 이러한 잡설을 배격했다. 그러나 하윤은 이러한 잡설에까지 정통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사상은 고루한 유학자와는 달리 현실성과 다양성을 지녔다고 할 수도 있다. 1393년(태조 2년) 3월에 나라에서 계룡산(鷄龍山)으로 천도(遷都)하려고 하자, 하윤은 계룡산의 형세를 비운(悲運)이 닥쳐올 흉한 땅이라고 주장하여 천도 계획을 중지시켰다. 이리하여 하윤은 풍수학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인정을 받아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하윤은 다시 한양(漢陽)의 무악(毋岳)이 지리설에 맞는 길지(吉地)라고 추천하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했으나, 실권자 정도전과 조준(趙浚) 등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무악(毋岳)은 지금 서울의 신촌 일대를 말한다. 하윤은 끝까지 무악이 가장 좋은 명당이라고 주장했으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려 인종(仁宗) 때에 묘청(妙淸)이 서경(西京,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다가 김부식(金富軾) 등 유학자들의 반대로 좌절된 것과 같았다. 중 묘청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으나 당시의 하윤은 그러한 힘도 없었다. 아마 이러한 좌절이 그로 하여금 정안대군(靖安大君) 이방원(李芳遠)에게 접근하게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방원 만남 간청한 하윤] : 하윤과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하윤은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방원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방원의 장인 민제(閔霽)를 만나서 간청하기를,『내가 사람의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공의 둘째 사위만한 인물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그를 만나보기를 원합니다』고 했다. 민제는 사위 이방원에게 권유하기를,『하윤이라는 사람이 대군을 꼭 한번 뵙고자 하니, 한번 그를 만나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이리하여 이방원과 하윤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하윤이 이방원을 만나보기 위해서 꾸며낸 계략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당시 여러 왕자 가운데 가장 야망이 크고, 머리가 뛰어났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과 하윤은 이렇 듯 출세의 기회를 포착하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또 두 사람에게는 남들보다 뛰어난 아이디어도 있었다. 만약 하윤의 지모(智謀)가 없었더라면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윤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한 인물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정도전과 남은 일당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번과 이방석을 제거했다. 또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박포(朴苞) 일당을 죽이고,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유배시켰다.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 그의 손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속설(俗說)에도 하윤은 살꽂이(箭串) 다리에서 태종 이방원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제1, 2차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가서 머물던 태조 이성계가 무학(無學) 대사 등의 간곡한 건의에 따라 서울로 돌아오던 날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살꽂이 다리까지 마중을 나가서 부왕을 맞이했다. 이 때 하윤이 태종에게 건의하기를,『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의 노기가 아직 풀리지 아니했을 터이니, 막사 차일(遮日, 천막)의 중간 지주(支柱)를 아주 굵은 나무로 만들도록 하소서』라고 했다. 태종 이방원은 하윤의 말대로 아름드리 큰 나무로 차일 지주를 세웠다. 태조 이성계가 아들 태종을 보자마자 노기충천하여 활을 잡고 마중 나오는 아들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태종은 황급히 차일의 지주 뒤로 몸을 피하여 그 위기를 넘기고, 날아온 화살은 차일의 지주에 꽂혔다. 이것을 본 태조는 크게 웃으면서『모두가 하늘의 뜻이다』하고 단념했다. 지금 남아 있는「살꽂이」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정몽주와 절친했던 정도전] : 고려 말에 태어난 정몽주(1337~1392년) 정도전(1342~1398년) 하윤(1347~1416년) 세 사람의 출생 연도를 보면 나이가 각기 5년씩 차이가 난다.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에 정도전보다 5년 선배였던 정몽주는 정도전을 항상 동생처럼 이끌어 주고, 성리학의 심오한 세계를 깨우쳐 주었다. 하윤도 이색의 문생(門生)이었는데, 정몽주와는 10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으므로 정몽주를 무척 어려워 했다. 하윤은 원래 정도전과는 친숙하지 않았던 것 같고 오히려 권근(1352~1409년)과 가까이 지냈는데, 하윤은 권근보다 나이가 다섯 살 위였다. 정몽주가 1392년에 비명에 죽고 조선 왕조가 개국되자 정도전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며,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도전이 비명 횡사하자 하윤의 전성시대가 오게 되었다...(金九鎭 弘益大 敎授 新東亞 1997-11-01 23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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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6 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실린 연려실 이긍익(李肯翊)의 예천군수(1392 赴任) 하윤에 대한 기록으로, 그 내용은, “연려실기술 제1권/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태종 정사(太宗定社) 무인년(1398) 가을/ ○ 과거에 하윤이 예천 군사(醴泉郡事)가 되어서 그 고을 기생을 모두 관계하여 음탕함이 한이 없었는데, 전최(殿最)하는 날 도사(都事)가 장차 하등(下等)에 두려고 하니, 감사(監司) 김주(金湊)가 말리기를, ꡒ하윤의 기상을 보니, 한 고을에 오래 굽히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만 덮어 주라.ꡓ 하여, 드디어 상등(上等)에다 두었었다. 이 때에 와서 김주가 정사의 난에 방석의 편에 가담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는데, 김주의 부인이 하윤의 말 앞에 끓어 앉아 말하기를, ꡒ저는 김주의 처입니다.ꡓ 하니, 하윤이 힘을 써서 구해주어 난을 면하였다./ 최항(崔恒)이 과거에 응시하여 지은 시에 이르기를, ꡒ대지가 뜨거워서 일월이 이글거리니, 들리는 우레 다만 하늘 한 쪽뿐이구나.ꡓ 하였으니, 이것은 방번(芳蕃)과 방석(芳碩)의 변란에 온 나라 신민이 모두 하윤의 피해를 입었으며, 태조가 비록 개국한 공이 있으나 먼 지방으로 옮겨가 한갓 울분을 더하기만 하는 것이 마치 하늘에서 큰 우레 소리가 울리나 다만 조그마한 한 쪽 하늘에서 소리나는 것과 같아 누가 경계하고 누가 두려워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해동잡록(海東雜錄)》”이다.(www.minchu.or.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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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6 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실린 민족문화추진회의 기사로, 그 내용은, “《조선고서간행회본》과의 대조 보충분/ 各道都事. 古稱外臺. 觀於河崙將置下考之事. 都事之與於殿最. 而監司之不能專擅. 可知. ?繩列郡. 彈壓一道. 必有其責. 而始高麗都巡問之職衙門無定所. 常作客官. 近日. 漸以鄕曲未通淸文官差送. 尸位數慢. 然異唐之縣丞. 式年掌試. 始以三司除出. 而試事畢卽還. 當初設官之意. 豈徒然哉. 補述/ 각도 도사(都事)를 옛날에는 외대(外臺)라 하였는데, 경상 도사(慶尙都事)가 예천 군수(醴泉郡守) 하윤(河崙)을 하고(下考)에 두려고 하였던 일로써 본다면 도사가 수령의 전최에 참여하여 감사가 능히 전단하지 못하게 한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고을을 규찰하고 한 도를 진압하던 것이 반드시 그 책임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고려 때 도순문(都巡問)의 직(職)으로 아문(衙門)이 일정한 처소가 없고 항상 객관(客官)이 되었었는데 요즘은 점점 시골의 통청문관(通淸文官 淸要職의 후보자로 인정된 문관)이 되지 못한 문관으로 임명하여 직책만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唐) 나라 현승(縣丞)과는 다르다. 식년에 향시(鄕試)를 맡게 될 때에는 비로소 삼사(三司)에서 가려 보내되 시험을 마치면 곧 돌아가니, 당초에 도사의 관직을 설치한 뜻이 어찌 이렇게 헛되었는가. 보술(補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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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1 刊) 용재총화(?齋叢話)에 실린 성현(成俔)의 예천군수(1392 赴任) 하윤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용재총화 제10권 ○ 호정(浩亭) 하윤(河崙)이 예천 군수가 되어 고을 기생을 모두 사사로이 다...”이다.(www.minchu.or.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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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국학원전 용재총화(慵齋叢話, 1525)에 실린 용재 성현(成俔)의 예천군수(1372 赴任) 하윤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齋叢話卷之十/ ○ 호정(浩亭) 하윤(河崙)이 예천 군수가 되어 고을 기생을 모두 사사로이 다루고 거리낌 없이 음란하였다./ 전최(殿最) 날 도사(都事)가 호정의 허물을 논박하여 곧 하고(下考)하려고 하였더니, 당시 김주(金湊)가 감사로 있었는데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ꡒ하윤의 기상을 보니 한 고을에 오래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니니 아직 논하지 말라.ꡓ 하고 드디어 상등[上第]으로 고과하였다. 그 후에 김주가 정사(定社)의 난에 관련되어 기세가 아주 위급할 때 김주의 아내가 호정의 말 머리에 꿇어앉아서, ꡒ나는 김 아무개의 아내입니다.ꡓ 하고 말하니, 호정이 힘써 구하여 죄를 면하였다./ 호정 하윤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자, 그 당시 정안군(靖安君)이던 태종이 집 잔치에 참여하였다. 여러 손님들이 많이 모였는데 태종이 앞에 나아가서 술을 부을 적에 호정은 일부러 취한 척하며 상위의 찬과 탕을 뒤집어 엎어, 왕자의 옷을 더럽히자, 태종이 크게 노하여 일어났다. 호정이 자리에 있는 손님들에게 말하기를, ꡒ왕자가 노하여 가니 가서 사죄해야겠다.ꡓ 하고 드디어 따라나섰다. 종이 태종에게 고하기를, ꡒ감사가 옵니다.ꡓ하였으나, 태종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문(大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리므로 호정도 역시 말에서 내렸다. 중문(中門)에 들어가니 호정도 또 중문에 들어가고, 내문(內門)에 들어가니 또한 내문에 따라 들어왔다. 태종이 비로소 이를 의심하여 돌아보고, ꡒ웬 일이냐?ꡓ고 물었다. 호정은 말하기를, ꡒ왕자의 일이 위급합니다. 소반을 뒤집어 엎은 까닭은 장차 나라에 위태로운 환란이 있을 것이기에 이를 미리 알린 것입니다.ꡓ 하니, 그제서야 비로소 침실로 불러들여 계책을 물었다. 호정이 말하기를, ꡒ신은 왕명을 받았으니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안산 군수(安山郡守) 이숙번(李叔蕃)이 정릉 이안군(移安軍)을 거느리고 서울에 올 것이니, 이 사람에게 큰 일을 부탁할 만합니다. 신도 또한 진천(鎭川)에 가서 머물러 기다리겠사오니, 만약 일이 이루어지면 신을 급히 부르십시오.ꡓ 하고 호정은 드디어 떠났다. 태종이 이숙번을 불러 그 연고를 말했더니, 이숙번은 아뢰기를, ꡒ손바닥 뒤집듯이 쉽사온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ꡓ 하고, 드디어 태종을 모시고 궁중의 종과 이안군을 이끌고, 먼저 군기감(軍器監)을 빼앗아 갑옷을 입고 병기를 가지고 나와 경복궁을 둘러쌌다. 태종이 남문 밖에 막차를 쳐서 그 가운데 앉고 또 막차 하나를 그 밑에 치니, 사람들이 누구의 자리인지 알지 못했는데, 호정이 올라와 가운데 자리잡으니 사람들이 모두 머지 않아 재상이 될 줄 알았다. 정사(定社)의 공은 모두 호정과 이숙번의 힘이었다...”이다.(www.minchu.or.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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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133/ 주석번호/제목 [註133] 七月 …… 賜故王?諡恭愍 / 高麗는 縣案이 解決되자 禑王 11年 5月에 門下評理 尹虎․密直副使 趙?을 明에 보내서 謝恩 兼 請襲․請諡를 올렸고(原文의 ꡐ七月 禑上表請襲爵 …… ꡑ은 이 使行에서 한 것이다), 同年 6月에도 密直使 安翊․密直副使 張方平을 보내서 賀聖節하였다. 이에 明에서는 禑王을 高麗國王으로 삼고 恭愍王을 諡하여 恭愍으로 하였다. 그리고 國子監學錄 張溥를 詔書使로 삼고, 國子監典簿 周倬을 諡?使로 삼아서 高麗에 派遣했다(『明實錄』洪武 18年 7月 癸酉條). 이에 高麗는 그 해 10月 門下府事 曺敏修․贊成事 張自溫(張子溫)과 禹玄寶․簽書密直司事 河崙을 明에 보내어 謝恩하고 曆日과 符驗을 請했다. 이 후에 高麗의 對明關係는 正常化되었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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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08/ 주석번호/제목 [註208] 鄭總(擢) / 原文의 鄭總은 鄭擢의 잘못이다. 鄭擢은 麗末․鮮初의 文臣으로, 太祖 5年 正朝表箋文문제로 是非가 생기자, 計?使 河崙이 明에 가서 辨明한 뒤에 老母를 奉養한다 하여 풀려 돌아왔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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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09/ 주석번호/제목 [註209] 送撰表人鄭總(擢)等三人至 …… 道傳病不能行/ 朝鮮에서는 太祖 5年 6月 丁酉에 到着한 明使의 督促을 받고, 同年 7月 甲戌에 明使를 먼저 보내고 이어 判司譯院事 李乙修를 管押使 삼아서 撰表箋人 藝文春秋學士 權近․右承旨 鄭擢․該(當時의)啓稟校正人 敬興府舍人 盧仁度를 管送시키고, 아울러 漢城尹 河崙을 啓稟使로 보내면서 表箋譴責에 대한 事情을 具奏케 했다. 이 上奏에 의하면,/ 進賀洪武二十九年正旦表文 係成均大司成 鄭擢修撰 箋文 係判典校寺事 金若恒修撰 其時爲因鄭擢患病 止將撰箋人金若恒 …… 將大司成鄭擢所撰進賀 洪武二十九年正旦表草到於提調官判三司事鄭道傳處 ?請校正間 爲緣本官掌宗廟遷移祭享等事 不曾改抹校正 却將表草於次提調官知門下府事鄭? 藝文館提學權近處校正 所供是實(中略)其鄭道傳 …… 不曾改抹校正 事無干連 又緣本人患?脹脚氣病證 不能起送 …… 今見賀正使柳?等 未蒙放還 …… 寬宥以慰國人之望(『太祖實錄』太祖 5年 7月 甲戌條)/ 이라고 했다. 原文에서 ꡐ撰表人三人ꡑ이란 權近․鄭擢 ․盧仁度의 3人이다. 이들이 明에 到着하자 柳? 등은 放還되었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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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10/ 주석번호/제목 [註210] 帝以總(擢)等亂邦?? 留不遣 / 洪武帝는 朝鮮에 보낸 計稟使 河崙과 撰表人 3人 등을 만나 본 후, 河崙과 鄭擢은 回還시키고 權近과 盧仁度는 抑留케 했다. 鄭擢은 老母의 奉養을 위해 配慮해 준 것이다(『明實錄』洪武 29年 9月 丁卯條와『太祖實錄』太祖 5年 11月 戊午條의 計稟使 河崙․撰表人 鄭擢의 歸還에 붙인 禮部咨文). 그런데 權近은 金陵에 머물면서 文人으로서의 才能을 十分 發揮해서 朝鮮과 明의 關係를 好轉시켰다. 權近은 洪武帝의 要求에 대하여 二十四首 詩賦를 지어 올렸다.(末松保和, 前揭論文 pp.407~409 參考. 이는 ꡐ權近行狀ꡑ에 의했다. 再引用치 않음)./ 原文의 鄭總은 鄭擢의 거듭된 誤記이고, 더욱이 ꡐ帝以總等亂邦?? 留不遣ꡑ은 前述한 대로 鄭擢이 아니고 權近等이 되어야 할 것이다(註 208) 參考). 權近은 太祖 6年 3月 戊午에 前年末에 갔던 賀正使인 安翊․金希善과 같이 돌아 오면서 洪武帝의 勅慰詔書(唐妃의 吊意)․宣諭․御製의 長句四韻詩三篇과 禮部咨文을 齎來했다. 그러나 鄭?등이 抑留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참조> / 『明史』朝鮮列傳 註 208)/ 鄭總(擢)/ 原文의 鄭總은 鄭擢의 잘못이다. 鄭擢은 麗末․鮮初의 文臣으로, 太祖 5年 正朝表箋文문제로 是非가 생기자, 計?使 河崙이 明에 가서 辨明한 뒤에 老母를 奉養한다 하여 풀려 돌아왔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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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12/ 주석번호/제목 [註212] 建文初 …… 許之 / 朝鮮 太祖는 그 7年 9月 5日에 王位를 世子 芳果에게 讓位하고 上王이 되었다. 芳果는 卽位후 暾이라고 改名했다. 朝鮮 第 2代王 定宗이다. 太祖는 同年 8月 己巳에 李芳遠(뒤의 太宗)이 鄭道傳․南誾․沈孝生의 王子除去의 謀議를 구실로 쿠테타(王子의 亂)를 일으키자 政治에 뜻을 잃고 定宗인 芳果에게 讓位한 것이다. 그 2年 후 定宗 2年 11月에 定宗은 所謂 芳幹의 亂을 겪고(芳幹은 ꡐ擧兵作亂ꡑ, ꡐ謀害同氣ꡑ로 流配됨), 河崙 등의 奏請으로 上王(太祖)의 允許를 얻어 芳遠을 後嗣로 삼고, 이해 11月 癸酉에 後嗣에 讓位하고 말았다. 定宗이 上王이 되고, 太祖는 太上王이 되었다. 李芳遠은 곧 3代王인 太宗이다. 이렇게 2次에 걸친 不得已한 讓位는 實上 太宗의 卽位工作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하간 王位가 交替될 때마다 朝鮮에서는 明에 計稟하여 그 許諾을 請했다. 太祖가 定宗에게 讓位한 후 判三司事 ?長壽를 遣使했으나, 三年一聘에 該當되지 않는다는 구실로 沮止당하여 다시 定宗 元年(建文 元年) 正月에 建文帝의 賀登極使 金士衡과 洪武帝의 陳慰使 河崙이 派遣되어 讓位承襲을 許諾받았다(『定宗實錄』定宗 元年 6月 丙寅條)...(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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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14/ 주석번호/제목 [註214] 永樂元年正月 芳遠遣使朝貢 / 太宗은 永樂帝의 卽位詔書를 받고 바로 그 해 10月 乙丑에 左政丞 河崙․知議政府事 李詹․判漢城府事 趙璞을 明에 보내어 河崙․李詹은 賀登極하고, 趙璞은 賀正케 했다. 河崙 등은 太宗 3年 4月 甲寅에 明使와 같이 돌아왔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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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15/ 주석번호/제목 [註215] 陪臣 / 『禮記』「典禮」下 ꡐ自稱曰陪臣某ꡑ의 疏에 ꡐ陪 重也 其君已爲王臣 己今又爲己君之臣 故自稱對王曰重臣ꡑ이라 하였다. 陪臣은 여기에서 緣由한 것이다. 各 功臣 또는 榮爵을 받은 사람들이 그 代表的인 陪臣들이었다. 鄭道傳․趙浚․河崙 등이 그들이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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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30/ 주석번호/제목 [註230] 金印․誥命 / 朝鮮王國의 金印․誥命은 朝鮮 太祖의 開國以來 所願이던 것이었는데, 建文 3年 6月 己巳에 明使 通政寺丞 章謹․文淵閣侍詔 端木禮에 의해서 傳達되었다. 그러나 永樂帝는 簒奪해서 卽位하자 都指揮 高得․通政司左通政 趙居仁․宦官太監 黃儼․曹天寶 등을 시켜서 金印․誥命을 다시 下賜하고, 建文帝가 下賜하였던 金印․誥命을 ?回시켰다(『太宗實錄』太宗 3年 4月 甲寅條․『明實錄』永樂 元年 2月 甲寅條). 이렇게 建文帝때 내려진 金印․誥命을 回收하고, 永樂帝가 다시 下賜한 것은 永樂帝가 簒奪한 후 建文帝를 拂拭했기 때문이다. 『太宗實錄』太宗 3年 5月 丁亥條에 의하면, 永樂帝의 新金印․誥命을 다시 얻게된 것은 前年 永樂帝의 賀登極使로 갔던 左政丞 河崙의 功이 컸다고 한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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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ID : jo_023_001c_01_248/ 주석번호/제목 [註248] 鄭擢 / 麗末․鮮初의 文臣이다./ <참조> /『明史』朝鮮列傳 註 208)/ 鄭總(擢)/ 原文의 鄭總은 鄭擢의 잘못이다. 鄭擢은 麗末․鮮初의 文臣으로, 太祖 5年 正朝表箋文문제로 是非가 생기자, 計?使 河崙이 明에 가서 辨明한 뒤에 老母를 奉養한다 하여 풀려 돌아왔다...(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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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040_0120_0240/ 여지도서/ 忠淸道 / 淸風 / 樓亭 / ...寒碧樓俯臨大江奇勝爲上游冠自前朝已有之府使 宋處寬有記而不傳今有晉山君河公崙 ...晉山府院君 浩亭 河崙記○重修記曰 萬曆辛丑夏余自丹山訪宋侯仁?於沙熱是時梅雨新晴?洲欲沒乘?而下歷龜潭?玉筍瞥然之傾不覺冷風之吹我而上寒碧...(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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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040_0120_0240/ 여지도서 / 江原道 / 襄陽 / 古跡 / ...河趙臺 在府南三十里小麓?入海中?絶爲臺臺之左右巖壁奇古海濤衡激浪雪飄散世傳國初河崙 趙浚遊賞處故遂名之...(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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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060_0020_0170/ 여지도서 / 補遺篇(京兆, 松都, 水原) / 松都舊誌序 / 松誌都卷之七 / 附錄 / ...車原?高麗大匡伯孝全十九世孫也晦跡平山水雲巖洞足不履城市極言攻遼不可回軍後趙浚 李良祐言以記功答曰左脅金鱗尙在余何汚開土上祖之忠義乎寧喫五斗醋不參有功選嚴辭峻志以示不染之意爲鄭道傳 咸傳霖 趙英珪 河崙 / <상권1035-1>/ 所椎殺內外族類死亡略盡吉再聞原?死引書床投諸燈而痛哭趙云?擊其案而痛哭時人謂投燈之父擊案之盲淮安大君芳?放歸田里之日想原?非命不覺喪心至農人田舍之飮却忘騎去牛以歸李養中遁在野外之日怨原?非命不勝深憤至鄕人獵川之會打破其所盛?器而去時人謂之忘牛之子破?之翁...(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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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00_0060_0070/ 여지도서 / 咸鏡道(關北邑誌) / 咸鏡南道永興府邑誌 / 山川 / ...龍興江 在府北二里許其源有四一自沸流水一出馬踰嶺一出艾田峴一出巨次嶺底至于鎭靜寺前合爲一派流入東海 太祖大王登極後奉命臣河崙因都巡問使 姜淮白言乃以龍興名焉蓋以東南流遂轉 濬源殿玄武而 太祖大王誕降肇基之地故也而有渡涉船二隻...(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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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70_0220/ 여지도서 / 慶尙道 / 慶州 / 驛院 / ...惠利院 在府東南三十二里○河崙序鷄林 新羅氏之古都入前朝爲巨府人物之繁?史具可見也及其叔世倭寇爲患者數十年可悲之甚矣予於庚午春將適蔚州道過城南寄宿天王寺堂頭然上人接以良話明日出門則寺以東杳無人烟行九十餘里以至于蔚州則孤城去海不滿十里賴有戰艦分泊浦口以備不虞耳其戍卒率兩月一更代魚鹽之貿易/ <하권0342-2>/ 者亦時至其於九十里往還之間祈寒暑雨或値日暮無所於止息草竊之可慮虎豹之可畏不能不呻吟耿耿以待曙光於林?之間矣予將還又宿天王寺語及羈旅之苦行役之難上人曰予雖出家爲養老親不能遠離鄕井子之所言予所悉知也親已沒願以追福之餘就於半途?一小院力不能足耳予間而義之明日上人送之大悲院丁丑春予尹府而至則上人尙奐恙公退之暇相與之話舊上人乃日予於向之半途卜得古之人所謂德方洞者前後皆山草木叢茂澗水中流可以爲?房可以爲凉軒旁有閑地又可以種蔬果誠宜置院以便行旅而南靜洲得溫李節制從周共助其費幾乎有成矣予聞而喜之欲於暇日相與一往觀之而未遂也今子奉使命又過府境上人出而見之喜蒲于色曰吾之院旣成而子方有中國之行不敢請陽村權公已記之矣予猶不得院名請子幸名之以光吾院予曰吾東方道途之有院宇卽周禮廬宿之遺意而爲政者之所當務也今上人孝其親以誠又推其餘以及於行路之人是其惠人利物之念發乎天性之所固有而不/ <하권0342-3>/ 客已者若此其?深山窮谷之中坐於空寂如槁木寒灰奐所事於世者相去豈不遠乎是宜有以名其院而使夫來者有所觀感也於是名之曰惠利仍次其前後之相語者以爲序云...(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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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80_0060/ 여지도서 / 慶尙道 / 晉州 / 形勝 / 嶺南第一 李仁老集晉陽溪山勝致爲嶺南第一 巨岳大江 李詹序人物之生有補於國者多巨岳大江磅?淸淑之氣有以致之 東方之陸海 前人晉陽評晉陽東方之陸海也歲出水土物以貢國者居嶺南諸州之半 飛鳳止于北望/ <하권0364-1>/ 晉拱于南 河崙鳳鳴樓記云云長江流其間東西諸山宛轉而四環(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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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80_0070/ 여지도서 / 慶尙道 / 晉州 / 城池 / 矗石城 在州南一里石築周四千三百五十九尺高十五尺內有井泉各三有軍倉○河崙城門記自古以來理亂循環蓋其天數之盛衰人事之得失相因而然也古之人脩人事以應天數故寇難或興而終莫能爲患也子於吾鄕之城有感馬予昔總角之日游學于此每見城塹之遺基不知其歲月問之耆舊亦莫徵當是時閭閻熙熙烟火相望海寇之鼠竊者雖或間發康州吉岸之伐亦足以?挫而合浦之鎭分兵相救若雷?而風飛然人不知修城塹爲急務也予旣冠從宦十餘年萊寇之登陸者歲益深在丁巳之秋廷議重備邊遣使諸道分理州縣之城鄒人卽舊基築以土不能經久隨復頹?奉使者豈得辭其責己未秋今知密直裵公來鎭康州移牒牧官?復修之遣參佐督其役易土以石功未半而寇陷賴江城郡之山城一鄕人有所依據得以却寇鋒然城挾而高不能以容衆又去州理遠滄卒勢不能及寇旣退牧使金公因民情而出令日州之城今/ <하권0364-2>/ 可畢修矣聞者咸願爲之役於是丁均其役躬自監督不日而畢城周八百步高三?有奇置門三西曰義正北曰智濟南曰禮化皆樓其上焉登而四顧則菁川繞于西長江奔于南品字隍列於東三池匯其北又開塹于城池問自西而東析而又南以至于江形勢之勝固可以一當百矣城旣成矣寇不復敢近而一境賴以安鳴呼作之之難不如興復之爲難有始之難不如有卒之爲尤難也事半而功倍者予於金公見之矣公諱仲光爲政務大體有長者風嘗爲濟州牧使反側之?服其義及還朝宰相以能理劇擧故有是任判官 李君仕忠亦端人也助公以成 新增大寺池 在北門外截地有?乃出八城門路也此池回抱城北有關防 加防 在城■門外壬辰鑿之以爲城塹(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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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80_0110/ 여지도서 / 慶尙道 / 晉州 / 風俗 / 俗尙詩書 尙富麗 俱地理誌 閭閻熙熙烟火相望/ <하권0366-4>/ 河崙矗石樓記 好學爲業 河崙四敎堂記好學爲業風俗已成 農夫?婦服其勤孝子慈孫竭其力 河崙矗石樓記(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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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80_0120/ 여지도서 / 慶尙道 / 晉州 / 宮室 / 客館 河崙序鄕之客舍失於火至于再不克重?者有年歲癸未今判書 廣州安公以左司諫大夫出爲牧使乃相舊基稍廣其制而新之今牧吏崔公判官殷君繼而增修之安公諱魯生崔公諱?殷君名汝霖皆以循良見稱於世(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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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80_0130/ 여지도서 / 慶尙道 / 晉州 / 學校 / 鄕校 在州東三里有四敎堂○河演記略曰吾鄕之學校卒無講堂前敎官趙寶仁議于州牧措置備梯今敎官姜元亮勤督告成乃名堂爲四敎走書請記晉之爲邑智理之英南海之精?釀沖融土地之沃饒人物之?華非他邑之比吾嘗聞殷烈公 姜民瞻學於校中功業?赫厥後人林尤盛近古文敬公 姜君寶吾先祖元正公諱楫 御史大夫諱允源及菁川君 河乙沚 參贊 鄭乙輔與夫國初以來文忠公 河崙 文正公 鄭以吾 ?正公 河敬復皆就鄕校而拔華若文武俱鳴於當/ <하권0367-1>/ 時吾鄕地靈人傑之美世所稱說然未必不由敎養之致今也諸生尋常講讀之有便當春秋勝如成均課試之法牧宰敎官暇日道遙於其上或關卷講問或出題賦詩??乎詠沂之趣從容乎樂育之樂優遊乎?樸早麓之興矣雖然屬名之旨豈爲此歎爲學之道有二有務實之學有務名之學務其實而不顧乎外者爲已也務其名而未脫乎徇名之習者爲人也人生八歲皆入小學以至大學之敎日用欽食動靜言語無非學也?植涵養循序而進及其成功尊德性硏經學非有意於文章而爲其文也出於義理之原非有意於政事而爲其政也發爲道德之用是則正心修身所以治平之本也夫子之四敎敎人以文學修行而存忠信也忠信本也名堂之義深切焉爲學之道何以加此諸生所當服膺而日新況値 聖朝右文之化思皇以寧之時乎云云○姜碩德詩十年風化洽群晴鳴鳳高崗孕秀精新闢?堂澄學海常關筆陣動詩城秋深絲竹含風靜春暖菁莪冒雨馨盛化卽今多吉事吾鄕諸彦盡窮經○李詹謁聖眞詩厥宇丹靑一炬亡頑童尙解護文坊十年/ <하권0367-2>/ 海嶠風塵裏獨整衣冠謁素王(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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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80_0150/ 여지도서 / 慶尙道 / 晉州 / 舊增?墓 / 河崙墓 在州北梧耳方(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80_0250/ 여지도서 / 慶尙道 / 晉州 / 樓亭 / ...矗石樓 在矗石城內城下有長江江上有巨巖矗矗架疊築樓於其上故名焉大野平遠江流控帶群巒拱揖?巖削壁塹/ <하권0370-2>/ 絶西南岸竹汀蘭掩暎左右沙烏翔鳴風般往來眞第一名勝○河崙記樓觀之經營爲治者之餘事耳然一樓之興廢而一鄕之人心可知矣因一鄕之人心而一時之世道可知矣則亦豈可以餘事而少之哉予爲此說久矣今於吾鄕之矗石樓益信之矣樓在龍頭寺南石崖之上予昔少年登望者累矣樓之制宏敞軒豁俯臨渺茫長江流其下象峯列于外閭閭桑竹隱?其間翠壁長洲聯接其側農夫蠶婦服其勤孝子慈孫竭其力至若禽鳥鳴翔魚鼈游泳?於一區而得其所者俱可觀矣且其名樓之義則淡菴白先生曰江之中有石矗矗故樓曰矗石始手於金公而再成於安常軒皆壯元也故又有壯元之名焉題詠之美則有勉齋鄭先生之排律六韻常軒安先生之長句四韻亦有耘隱?先生之六絶句和韻而繼之者有若及菴閔先生尋齋許先生皆佳作前輩之風流文彩因可想見矣不事前朝之季百度陵夷邊備亦弛海寇深入民墜塗炭樓亦?燼矣天啓 聖朝聖神相承治敎已明恩濡境中感振海外向之爲寇者?關乞降絡繹而獻琛海濱之地人烟再/ <하권0370-3>/ 密斑白之老酌酒而相慶曰不圖今日服見昇平然 上心猶以爲吾治未足每降敎旨禁用民力守令於事涉農桑學校之外不敢擅興一投鄕之父老前判事 姜順前司諫 崔麟等議曰龍頭寺邑初所置矗石樓一方勝景廢之久不能重新是吾鄕人之責也?各出財使鄕僧奠香龍頭寺者端求幹其事歲癸巳判牧使 權公衷與判官 朴弛潔採父老之言修築江防分民作隊隊各一推以除田里積年之患不十日而畢乃於是役助其不給召集遊手者?勤其力至秋九月而告成危樓聿新勝觀如舊予旣以人心世道爲喜且於父光之意有感焉後之登是樓者見汀草之始生念天地生物之心思不以一毫不仁之慘而宮民生見田?之方長念天地長物之心思不以一毫不急之務而奪民時望圖林之始實念天地成物之心思不以一毫非義之欲而侵民利見場圓之方積念天地育物之心思不以一毫非法之念而掠民財推是心而擴充之不敢獨樂於已而必欲與民同之人皆知世道之和人心之樂實源於 上德之深厚而皆願效於封人之祝矣則父光之拳拳焉/ <하권0370-4>/ 用意而興復者夫豈偶然哉予致仕之日己近思欲匹馬還鄕與諸父老每於良辰勝日觴詠樓上同樂其所樂以終餘年父老其待之...(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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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