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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13-20:하윤(1372부임)
작성자장병창 @ 2010.06.05 06:55:04
  예천고을원(13-20) : 하윤(1372 부임, 영의정까지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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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윤 [記事] :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1월 16일 을묘 2번째 기사/ 허조가 찬한 종묘 작헌 의주에 대해 하윤 등과 논하다/ 우부대언(右副代言) 서선(徐選)이 예조에서 올린 종묘 작헌 의주(宗廟酌獻儀註)를 아뢰었다. 임금이 영의정부사 하윤을 보고 이것을 물으니, 하윤이 대답하였다. ꡒ이것은 신이 잘 모르는 일이지만, 곧 허조(許稠)가 찬(撰)한 것입니다. 《당송의(唐宋儀)》에는 ꡐ작헌(酌獻)3236) 할 때 그 실(室)에서 약간 물러서서 서쪽에서 재배(再拜)하고, 약간 동쪽에서 재배한다.ꡑ는 글이 있는데 전조에서 그대로 따랐으며, 5실(五室) 이외에도 또 공덕이 있어 옮기지 않는 신주가 아울러 11실이 되므로, 절하는 수가 매우 많아 역대의 임금이 예를 행하기를 꺼려하여, 혹은 한해에 한 차례 들어가거나, 혹은 세대가 끝나도록 들어가지 않아서, 종묘에 들어가는 일을 광세(曠世)3237) 의 성전(盛典)으로 삼게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삼가 황조(皇朝)에서 반강(頒降)3238) 한 예제(禮制)를 살펴 보건대, 모든 주현(州縣)의 성황신(城隍神)의 제사에는 참신(參神)과 사신(辭神)3239) 의 두 차례에 걸쳐 재배한다는 글이 있습니다. 신이 태조(太祖)를 부묘(附廟)할 때에 상정(詳定)하여 아뢰어 일찍이 윤허를 받아서 시행하였습니다. 이제 허조는 황조(皇朝)의 공후(公侯) 제례(祭禮)에 ꡐ한 차례의 헌작이 겨우 끝나면 섬돌로 나아가 북향하고 재배한다.ꡑ는 예문(禮文)을 가지고 예(例)를 들어서 청하지만, 그러나, 술을 권함은 곧 독축(讀祝)이 끝나자마자 신위(神位)마다 재배함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곧 여러 신위에 모두 작헌하고 나서 이에 곧 절하고 권하게 되었으니, 온당치 못한 것 같습니다. 또 참신(參神)과 사신(辭神)엔 모두 서쪽을 향하여 절하게 되어 있는데, 홀로 작헌(酌獻)의 절만을 북쪽을 향하는 것도 또한 근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당송(唐宋)의 제도도 아니요, 또 황조(皇朝)의 예전(禮典)도 아닙니다. 또 어찌 황조(皇朝)의 공후(公侯)가 민사(民社)3240) 를 업신여기는 자가 아닌 것을 알겠습니까?ꡓ 허조가 아뢰었다. ꡒ무릇 예제(禮制)의 빼고 더함은 적의(適宜)한 데 따라서 중정(中正)에 맞추는 것이니, 어찌 망령되게 자기 뜻대로 행하고 옛법을 모두 폐지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옛사람의 성제(盛制)를 얻어 볼 수 없게 하겠습니까?ꡓ 하윤이 잠자코 가만히 있으니, 남재(南在)가 말하였다. ꡒ공자(孔子)가 ꡐ종묘의 예는 번거로우면 게을러지고, 간략하면 소홀해진다.ꡑ고 하였으니, 번거롭지도 않고 간략하지도 않아야 오래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ꡓ 임금이 말하였다. ꡒ영의정의 말이 진실로 옳다. 그러나, 요사이 항상 비뉵(鼻?)3241) 을 앓기 때문에 혹시 종묘에 들어가 작헌할 때에 갑자기 피가 나올까 두려워 감히 울주(?酒)를 붓지 못하고, 세자로 하여금 울주(?酒)를 붓는 것을 섭행(攝行)하도록 하였는데, 행사 다음날 비뉵(鼻?)이 바로 나왔다. 만약 제사지낼 때 피가 나왔다면 어찌 혐의스럽지 않았겠는가?ꡓ 그러나, 허조(許稠)는 고문(古文)을 끌어다가 증거로 하여 고집부리며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그 의주(儀注)는 이러하였다. ꡒ역대로 종묘(宗廟)에서는 작헌(酌獻)한 후에 배례하였습니다. 당(唐)나라는 주(周)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작헌한 후마다 신주(神主) 앞에서 북향하여 배례하였고, 송나라는 하나같이 당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였고, 《문공가례(文公家禮)》도 또한 같습니다. 조정(朝廷)의 《공후사선의주(公侯祀先儀注)》에, ꡐ작헌(酌獻)한 뒤에 자리에 돌아가 북향하여 배례한다.ꡑ고 하였습니다. 전조(前朝)에서는 당나라 제도에 의거하여 매양 작헌한 후에는 신전(神前)에 북향하여 배례하였고, 본조(本朝)에서도 국초(國初)에는 역시 당나라와 송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매번 작헌한 후에 신위전(神位前)에 북향하여 배례하였습니다. 계사년에 상정(詳定)한 의주에는 작헌한 후 내려와 자리에 돌아와 서향(西向)하여 배례(拜禮)하게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작헌한 후에 배례하는 것은 유주(侑酒)3242) 하는 까닭이라고 하겠는데, 북향하여 작헌하고, 서향하여 유주(侑酒) 한다는 것은 조금도 근거가 없습니다. 빌건대, 《문공가례(文公家禮)》에 의거하여 5실(五室)에 작헌한 후 영외(楹外)3243) 의 한복판에서 북향하여 재배하는 것이 예법의 뜻에 거의 합치합니다.ꡓ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종묘의 묘실(廟室)이 너무 좁아 궤전(饋奠)3244) 에 곤난한 것을 의논하였다. 임금이 또 하윤을 보고, ꡒ당초에 영선(營繕)하던 유사(有司)가 집을 짓는 데 잘못한 것이니, 이제 이것을 고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ꡓ하니, 하윤이 말하였다. ꡒ만약 음양(陰陽)의 이치에 구애되는 것이라면, 신은 감히 알지 못합니다. 진실로 그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 제도를 고친다고 해서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종묘(宗廟)의 제도로서 당(堂)을 같이하고 실(室)을 다르게 하는 것은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에 시작되었습니다. 경솔한 마음으로 옛 것을 고치거나 역대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게 된다면, 결국 3대(三代)3245) 의 제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송(宋)나라 신종(神宗)에 이르러 복고(復古)에 뜻을 두었으나 마침내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송나라 유자(儒者)들이 이것을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이제 복고(復古)할 수 있다면 만세에 더욱 다행한 일이겠습니다.ꡓ 박신(朴信)이 말하였다. ꡒ재목과 기와가 없다거나 인력을 아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특히 종묘는 지중(至重)한 것이니, 경솔하게 고치기에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ꡓ/ 【영인본】 2 책 50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註 3236]작헌(酌獻) : 술잔을 올림. ☞ / [註 3237]광세(曠世) : 한세대에 없었던 일. ☞ / [註 3238]반강(頒降) : 천자가 제후에게 역서나 법제를 내려 주던 일. ☞ / [註 3239]사신(辭神) : 참신(參神)은 신주(神主)에 절하여 뵈는 것이며, 사신(辭神)은 신주에 절하여 하직하는 것임. ☞ / [註 3240]민사(民社) : 동리의 1백 가(家)마다 세우던 토지신(土地神) 사당. ☞ / [註 3241]비뉵(鼻?) : 코피가 나는 증세. ☞ / [註 3242]유주(侑酒) : 제사에 잔을 신에게 올려 술을 권하는 하나의 순서. ☞ / [註 3243]영외(楹外) : 종묘의 건물에는 퇴기둥이 있는데, 이 기둥을 중심하여 안을 영내(楹內)라고 하고 밖을 영외(楹外)라고 함. ☞ / [註 3244]궤전(饋奠) : 신에게 음식을 드림. ☞ / [註 3245]3대(三代) : 하(夏)․은(殷)․주(周)의 시대.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1월 28일 정묘 5번째 기사/ 상호군 김월하의 아들 김부가 귀화하기를 청하니 허락하다/ 상호군(上護軍) 김월하(金月下)의 아들 김부(金富)가 서울에 머물러 살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김부는 모련위(毛憐衛)에 살면서 중조(中朝)3266) 의 천호(千戶) 벼슬을 받았는데, 와서 그 아버지를 근친(覲親)하고 그대로 머물러 살기를 청하니, 임금이 의정부에 명하여 이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하윤(河崙)과 이직(李稷)이 말하였다. ꡒ김부가 비록 중조(中朝)의 벼슬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일찍이 직사(職事)가 없었습니다. 어버이를 위하여 머물기를 원하니, 그 청을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 조정에서 명소(命召)한다면 사실대로 대답하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습니까?ꡓ 남재(南在)가 말하였다. ꡒ우리 나라에서 지성으로 대국(大國)을 섬기는데, 그 벼슬을 받은 사람을 머물러 두게 하는 것은 의리가 아닙니다.ꡓ 임금이 하윤 등의 의논을 따랐다./ 【영인본】 2 책 53 면/ 【분류】 *외교-명(明)/ [註 3266]중조(中朝) : 명(明)나라 조정.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2월 4일 임신 4번째 기사/ 처 상을 당한 경상․전라도 도안무사 이은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경상․전라도 도안무사(慶尙全羅道都按撫使) 이은(李殷)에게 쌀․콩과 종이를 하사하였다. 하윤이 아뢰었다. ꡒ이은이 처의 상복(喪服)을 만났으니, 슬픔을 위로하여 우대함이 마땅합니다. 만약 복(服)으로 인하여 일을 보지 않는다면 권농(勸農)이 늦어질까 두렵습니다.ꡓ 이러한 까닭으로 미두(米豆) 20석(石)과 종이 1백 권을 하사하고 그대로 일을 보게 하였다./ 【영인본】 2 책 53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농업-권농(勸農)(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3월 18일 병진 3번째 기사/ 개국․정사․좌명 3공신의 영정을 나누어 주다/ 개국․정사․좌명(開國定社佐命) 3공신(三功臣)의 영정[影子]을 나누어 주니,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 등이 예궐(詣闕)하여 배사(拜謝)하였다./ 【영인본】 2 책 56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4월 9일 병자 2번째 기사/ 집터에 대한 세와 시중의 포백세를 징수하기로 의논하다/ 2품 이상에게 명하여 성중(城中)의 집터[家基]와 시중(市中)의 포백(布帛)에 대하여 세(稅)를 거두는 것의 편부(便否)를 의논하게 하였다. 병조 판서 김승주(金承주) 등은, ꡒ포백세(布帛稅)3290) 는 거둘 수 있으나, 가기세(家基稅)3291) 는 면제해야 합니다.ꡓ하고, 호조 판서 박신(朴信)만은 홀로, ꡒ두 가지 세를 마땅히 다 거두어야 합니다.ꡓ하였다. 의논이 올라가니, 임금이 이를 어렵게 여기어, 우대언(右代言) 한상덕(韓尙德)으로 하여금 3의정(議政)의 집에 가서 묻게 하였다. 남재(南在)와 이직(李稷)은 모두 이르기를, ꡒ민호에 세를 거두는 법[稅戶之法]은 옛 제도에도 약간 있으며, 또 시행한 지도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저화(楮貨)를 사용하여 세를 받는 것이 마땅하며 해(害)가 없을 것입니다. 포백세 같은 것으로 말하면 옛날에는 없었던 것이며, 또 이미 장사아치[商賈]에게 세를 받으면서 또 다시 세전(稅錢)을 받는다면, 이것은 두 차례나 세를 받는 것입니다. 또 더구나, 원방(遠方)의 군졸(軍卒)들이 포(布)를 사 가지고 쌀을 사기 위하여 날을 보내는 자가 많아져서, 백성들이 반드시 괴롭게 여길 것입니다.ꡓ하니, 하윤이 말하였다. ꡒ이제 하나의 법[一法]을 제정하여 마땅히 만세(萬世)에 전하여야 합니다. 집터에 대하여 세를 받는 것은 전(傳)의 기록에 실려 있지 아니하고, 중국에서도 포백에 대하여 세를 받는 일은 없습니다. 조정(朝廷)에서 방금 사용하고, 또 저화의 법을 쓰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취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ꡓ 한상덕이 곧 두 의정의 말을 하윤에게 고하니, 하윤이 대답하기를, ꡒ만약 그렇다면 갑사(甲士)에게는 세를 면하게 함이 좋겠다.ꡓ하였다. 이튿날 임금이 여러 판서(判書)에게 ꡐ어제의 하윤의 의논ꡑ을 가지고 말하니 모두 함호(含糊)3292) 하고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박신만은 마땅히 거두어야 된다도 힘써 말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옳게 여기어 마침내 포백세와 가기세를 모두 거두도록 명하고, 인하여 외방(外方)에서 번상(番上)한 숙위 별패(宿衛別牌)와 외패(外牌)․갑사(甲士) 등은 쌀을 바꿀 포백을 병조에 고하여 표(標)를 달고 저자[市]로 나아가게 하여, 모두 세를 받지 말도록 명하였다./ 【영인본】 2 책 57 면/ 【분류】 *재정-잡세(雜稅) / *금융-화폐(貨幣) / *군사-중앙군(中央軍)/ [註 3290]포백세(布帛稅) : 포백(布帛)을 사고 팔 때 거두는 세금. ☞ / [註 3291]가기세(家基稅) : 서울의 집터[家基]에다 해마다 매기는 세금. ☞ / [註 3292]함호(含糊) : 말을 입안에 우물거리고 분명치 않게 말함.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4월 11일 무인 1번째 기사/ 편전에서 정승․판서 등을 인견하고 술자리를 베풀다/ 편전(便殿)에서 정사를 보았다. 하윤(河崙)․남재(南在)․이직(李稷)과 육조 판서(六曹判書)․대언 등을 인견(引見)하고 일을 의논하고, 이어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영인본】 2 책 57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4월 13일 경진 2번째 기사/ 향리의 입제(笠制)를 상정하다/ 향리(鄕吏)의 입제(笠制)3298) 를 상정(詳定)하였다. 예조(禮曹)와 의례 상정소(儀禮詳定所)에서 함께 의논하여 홍무(洪武) 20년간에 고친 의관(衣冠)의 예(例)에 의해 참고하였는데, ꡒ호장(戶長)과 기관(記官)은 평정건(平頂巾)이고, 통인(通引)과 장교(將校)․역리(驛吏)는 두건(頭巾)인데,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유지모(油紙帽)를 함께 사용하고, 관청의 문을 출입할 때와 대소(大小) 사객(使客)을 영접할 때에는, 그 겉에 흑색 죽감(竹坎)을 붙인 두첨(頭?)을 쓰는데, 그 너비[廣]가 2촌(寸)입니다.ꡓ 임금이 그대로 따르니, 예조 판서 황희가 아뢰었다. ꡒ영의정 하윤이 일찍이 말하기를, ꡐ조정(朝廷)3299) 의 관리는 모두 항상 사모(紗帽)를 쓴다.ꡑ고 하였는데, 본국으로 말하면 노상(路上)에선 입(笠)을 쓰고, 사모(紗帽)는 공처(公處)에서만 쓰니, 매우 불륜(不倫)합니다. 그리고 또, 두 가지 물건을 아울러 갖추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 조관(朝官)으로 하여금 항상 사모를 쓰게 함이 옳겠습니다.ꡓ 임금이 말하였다. ꡒ영의정의 말이 진실로 합당하나, 물론(物論)3300) 이 그 불편함을 싫어할 것이다. 그 법을 세움에 있어서 무지(無知)한 사람들이 의혹(疑惑)하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지만, 사리를 아는 사람들 역시 입 앓는 소리를 하고 매우 괴이하게 여길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어찌 노씨(老氏)3301) 의 무위(無爲)와 같아서 백성들이 스스로 화(化)함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일로서 어쩔 수 없는 것은 맡아서 욕과 책망을 받는 것이니, 이 같은 작은 일은 아직 예전 제도 그대로 두면 많은 말들이 거의 없어질 것이다.ꡓ 황희가 재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영인본】 2 책 58 면/ 【분류】 *의생활-관복(官服)/ [註 3298]입제(笠制) : 갓의 제도. ☞ / [註 3299]조정(朝廷) : 중국. ☞ / [註 3300]물론(物論) : 공론. ☞ / [註 3301]노씨(老氏) : 노자.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5월 4일 경자 1번째 기사/ 민무회 등의 죄를 청하지 않은 사헌부 관원을 의금부에 내리다/ 사헌부 대사헌 이은(李垠)과 집의(執義) 이유희(李有喜), 장령(掌令) 강종덕(姜宗德)․정지당(鄭之唐), 지평(持平) 김익렴(金益濂)․금유(琴柔)를 의금부에 내렸다. 의금부에 교지(敎旨)를 내렸다. ꡒ민무회(閔無悔)와 염치용(廉致庸) 등이 노비의 일로 인하여 불충한 말을 떠들었기 때문에,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더니, 조율(照律)하여 아뢰기를, ꡐ대역(大逆)으로 논죄하도록 청합니다.ꡑ하였다. 그러나, 염치용은 감등(減等)하여 시행하였고, 민무회는 의친(議親)3319) 으로 논하지 말게 하였다. 육조와 의금부․승정원․사간원에서도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청하였는데, 사헌부는 그 직책이 국가의 법을 관장하고서도 이를 듣지 못하여 그 죄를 청하지 아니하였고, 또 그들이 아뢴 조목 안에는 ꡐ대소 인원(人員)이 함부로 상서하여 어떤 자는 자기의 죄를 모면하기를 엿보고, 어떤 자는 자기의 욕심을 이루려고 도모한다.ꡑ고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누구를 위하여 발설한 것이다. 또 이중무(李仲茂)와 장수(張脩) 등의 노비를 서로 다툰 일에 대해서도 마음을 써서 정밀하게 살피지 아니하고, 다만 방장(房掌)인 호조 좌랑 하지명(河之溟)의 죄만 청하였으니, 이것은 한편으로 치우쳐서 신하로서의 충의(忠義)가 없기 때문이다. 낱낱이 국문하여 아뢰도록 하라.ꡓ 대언(代言)을 두 의정(議政)의 집에 보내어 사헌부 관원을 의금부에 내린 까닭을 일렀다. 하윤(河崙)과 남재(南在)․이직(李稷)․유정현(柳廷顯) 등이 대궐에 나아와 아뢰었다. ꡒ의금부에서 성상의 교지를 의정부에 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은 등을 옥에 가둔 까닭을 알지 못하였으나, 어제 전(傳)하신 교유(敎諭)를 받아 성상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헌부 관원들이 그 직책에 칭당(稱當)치 못함은 진실로 예감(睿鑑)과 같습니다.ꡓ 임금이 말하였다. ꡒ본래는 인견(引見)하고 면대해서 일러주고자 하였으나, 재계(齋戒)로 인하여 그러지 못하였다. 염치용과 민무회의 일은 4월 초6일에 발단되었고, 내가 초9일에 육조에게 추핵(推?)하기를 명하여 거짓말이 현저하게 드러났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그들을 국문하여, 염치용과 민무회의 불충한 정상을 소연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특별히 말감(末減)에 좇아, 육조와 사간원 대언(代言) 등이 재삼 죄주기를 신청(申請)하였으나, 사헌부는 풍기(風紀)를 맡은 관청으로 생각하면 이것을 편안히 여겨 염려하지 않았어야 되겠는가? 내 진실로 그들의 간사한 마음가짐을 더럽게 여겼으나, 꾹 참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끝까지 참을 수 없어서 지금 옥에 내려 다스리는 것뿐이다. 우리 나라는 본래부터 군신(君臣)의 예절이 있는 나라라고 일컬어 오는 터에 헌사에서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정승(政丞)들은 지위가 높고 직품도 높으니 진실로 세미(細微)한 임무에 친히 응할 수 없다고 하겠으나, 어찌 감히 강기(綱紀)를 바로잡는 권병(權柄)을 가지고서도 이같이 도리어 심하게 하는가? 우리 나라의 기강(紀綱)이 또한 가소로울 뿐이다.ꡓ

  하윤 등이 서로 보면서 놀라 머리만 수그리고 잠잠히 있었다. 이직은 황공해 함이 더욱 심하였다. 이윽고 하윤이 아뢰기를, ꡒ앞서 육선(肉膳)을 다시 드시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여름철을 당하였으니, 속히 육선을 도로 드시는 것이 옳겠습니다.ꡓ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ꡒ내 본래부터 병이 없고, 또 명일(明日)에 별[星]에 제사지내기로 하였으니, 이것이 지나면 마땅히 복선(復膳)하겠다.ꡓ/ 【영인본】 2 책 61 면/ 【분류】 *정론(政論) / *사법-재판(裁判) / *신분-천인(賤人) / *왕실-국왕(國王)/ [註 3319]의친(議親) : 팔의(八議)의 하나. 곧 임금의 단문 이상친(袒免以上親), 왕대비(王大妃)․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시마 이상친(?麻以上親), 왕비(王妃)의 소공 이상친(小功以上親), 세자빈(世子嬪)의 대공 이상친(大功以上親)의 범죄자를 처벌할 때 형(刑)의 감면(減免)을 의정(議定)하던 일.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5월 8일 갑진 2번째 기사/ 민무회․염치용의 일로 형조에 명하여 의정부를 핵문하게 하다/ 형조에 명하여 의정부를 핵문(劾問)하게 하였다.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완산 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와 금천군(錦川君) 박은(朴?)이 대궐에 나아와 아뢰었다. ꡒ전일에 신 등이 염치용의 불충한 죄를 모반 대역(謀反大逆)의 율(律)에 좇아 아뢰었으나, 성상의 자애(慈愛)를 입어 감등(減等)하여 시행하였습니다. 이제 우의정 이직(李稷)의 말을 들으니, ꡐ염치용은 노비(奴婢)를 얻지 못한 연유로 해서 분한(忿恨)을 이기지 못하여 이 같은 허탄(虛誕)한 말을 발설한 것 뿐인데, 지금 모역(謀逆)의 율(律)에 해당시킴은 잘못이다.ꡑ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이 말을 듣고서는 감히 출사(出仕)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신 등을 유사(攸司)에 내리어 변명(辨明)하게 해주소서.ꡓ 임금이 육조(六曹)를 불러 그 진위(眞僞)를 추핵(推?)하게 하고, 또 명하여 대언(代言) 조말생(趙末生)을 영의정 하윤(河崙)의 집에, 한상덕(韓尙德)을 좌의정 남재(南在)의 집에, 탁신(卓愼)을 우의정 이직(李稷)의 집에 보내어, 의금부에서 조율(照律)한 것이 ꡐ맞지 않는다ꡑ는 뜻을 물어서 오게 하니, 대언(代言) 등이 복명(復命)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하윤(河崙)과 남재(南在)․이직(李稷) 등이 대궐에 나아와 하윤이 상언(上言)하였다. ꡒ염치용의 죄를 감등(減等)하는 것에 여러 신하들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특히 염치용이 신을 가리켜 ꡐ뇌물을 받았다.ꡑ고 한 까닭에, 신은 혐의를 피[避嫌]하여 감히 죄를 청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ꡓ 이직이 아뢰었다. ꡒ염치용은 불충한 말을 드러내 놓고 말하였으니, 그 죄는 주륙(誅戮)함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성상이 감등(減等)하는 일도 매우 이치에 합당하므로 주륙을 청함은 옳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또 대신이 일을 청하는 것을 가볍게 할 수 없고, 또 생각하건대, ꡐ역모ꡑ란 두 글자가 합당하지 못하다고 여긴 것 뿐이지 반드시 의금부의 조율(照律)이 잘못되었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ꡓ 임금이 말하였다. ꡒ그대가 같이 일을 의논한 것은 대신들이다. 신하로서 정승(政丞)에 이르기는 어려운 것인데, 경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바로서 지위가 극품(極品)에 있다. 비록 사리를 알지 못하는 대신이라 하더라도 응당 이 같은 말은 발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경은 대체(大體)를 알지 않는가? 내 또한 생각하건대, 반드시 이 같은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 여긴다.ꡓ 이직이, ꡒ신을 유사(攸司)에 내리시어 발명(發明)하게 하여 주소서.ꡓ하고, 물러가자, 참찬(參贊) 유정현(柳廷顯)을 불러 그 까닭을 물으니, 유정현이 대답하였다. ꡒ4월 27일에 찬성(贊成) 이숙번(李叔蕃)이 사람을 시켜 신을 부르기에, 신이 그 집으로 갔었습니다. 이숙번(李叔蕃)이 말하기를, ꡐ염치용(廉致庸)과 민무회(閔無悔)의 말이 주상에게 미쳤으니 그 죄가 주륙에 해당한다. 그러나, 주상이 말감(末減)에 좇아 시행하였고, 헌사(憲司)에서도 한 번도 죄를 청하지 아니하니, 이제 무슨 낯으로 다시 죄를 청하겠는가? 우리들이 진실로 죄를 청해야 한다.ꡑ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ꡐ옳다ꡑ고 하니, 이숙번이 ꡐ이직의 사위가 민무회의 형이니, 반드시 그 죄를 청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ꡑ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ꡐ대의(大義) 앞엔 친족(親族)도 없다. 어찌 인척(姻戚)의 도당 때문에 공의(公義)를 폐하겠는가?ꡑ 하고, 즉시 사인(舍人) 조서로(趙瑞老)를 보내어 3의정(議政)에게 통지하였습니다. 조서로가 돌아와 그 회답을 말하기를, ꡐ영의정은 말하기를, 염치용이 나를 가리켜 뇌물을 받았다고 하므로, 〈나는〉 혐의가 있어 죄를 청하기 어렵다.ꡑ 하였고, 좌의정은 말하기를, ꡐ부(府)에서 합하여 죄를 청하고자 한다면 그에 따르겠다.ꡑ고 하여, 여전히 어물쩍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고, 우의정은 말하기를, ꡐ염치용의 죄는 주상이 단안을 내리기에 여지가 없으니, 다시 죄를 청함은 옳지 못하다.ꡑ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말뜻을 들으니 모두가 죄를 청하려 하지 않음이었습니다. 5월 초1일에 일식(日食)을 구(救)하기 위하여 자문(紫門)에 모였었는데, 의정부의 영의정은 오지 아니하였고, 좌의정과 우의정이 자리에 있기에, 신이 또 앞서의 의논을 말하였습니다. 이직이 애써 말하기를, ꡐ염치용은 노비를 빼앗긴 데 격분하여 원망의 말을 한 것뿐이지, 위계(危計)를 꾀하고 악역(惡逆)을 한 것도 아니니,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는 것은 너무 무거운 듯하다. 본래 상소(上疏)에 따라서 다스렸으니, 어찌 감히 다시 청하여 그 죄를 더하겠는가?ꡑ 하므로, 신이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을 변하여 말하기를, ꡐ이 일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인데 장관(長官)이 하려고 하지 않으니, 이를 어쩔 것인가?ꡑ 하였습니다. 초7일에 이르러 3정승과 함께 대궐에 나아와 교지(敎旨)를 들은 뒤 집으로 돌아갈 때, 이직이 길에다 말을 세우고 신을 기다리기에, 신이 말에 채찍질을 가하여 그 앞으로 갔더니, 이직이 저에게 말하기를, ꡐ지난번에 죄를 청할 것을 의논하다가 이루지 못했는데, 지금 주상의 명령을 듣고 보니, 부끄럽고 뉘우침을 이기지 못하겠다. 공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한한다.ꡑ 하였으므로, 신이 말하기를, ꡐ내가 죄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공이 들어주지 아니하여, 지금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과연 징험이 되지 않았는가?ꡑ 하니, 이직이, ꡐ진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그 죄를 청하지 않은 것이 도리어 임금의 덕(德)을 보충하는 소이(所以)가 될는지 어찌 알겠는가?ꡑ 하였습니다.ꡓ 임금이 즉시 육조에 명하여 의정부에 묻기를, 의금부에서 조율(照律)한 것이 타당치 못하다고 한 까닭을 묻게 하고, 형조로 하여금 이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영인본】 2 책 62 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정론(政論)(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5월 9일 을사 3번째 기사/ 우의정 이직을 성주에 안치하다/ ...하윤은 대답하기를, ꡐ염치용과 민무회 등이 망령된 말로써 내 몸을 헐뜯어, 내가 피혐(避嫌)하지 않을 수 없어서 감히 죄를 청하지 못했다.ꡑ 하였으며, 다시 이숙번에게 ꡐ한 재상으로서 죄를 청하려 하지 아니한 자의 성명(姓名)ꡑ을 물었더니, 이숙번이 ꡐ이직(李稷)이라.ꡑ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이직에게 이숙번과 유정현에게 대답한 말속의 사연(辭緣)을 물었더니, 이직이 ꡐ불충한 죄가 경하다 하여 의논을 저지한 것이 아니고, 다만 염치용 등은 본래 불충한 죄인이나, 모반을 꾀하여 모여서 할 말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니, 「모반」이란 글자의 뜻에 매우 가깝지 못하다고 한 것뿐이요, 이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은 일인데도, 유사(攸司)에서 극형의 조항에다 비율(比律)하여 계문(啓聞)함에 이르렀으나, 성상이 포용하는 도량으로 감등(減等)하여 재단(裁斷)하고, 「정부(政府)의 대신(大臣)으로서 만약 죄를 다시 청하려거든 말이 반드시 이치에 합당하여야 하니, 각각 생각을 잘 함이 옳겠다.」 하였으므로, 모두들 「어렵다.」고 말하였다. 또 역대의 인신(人臣)들이 행사(行事)한 자취가 모두 사책(史冊)에 실려 있는데, 비록 주장이 이미 결정한 일이라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미편(未便)한 것이 있으면 이를 고집하여 봉서(封書)를 올려 논박한 것도 있으며, 각각 소견을 가지고 가부(可否)를 서로 말한 것도 있다. 일찍이 내 스스로 생각하기를, 「재주와 덕이 오활한 사람으로 성상의 은혜를 특별히 입어, 이 몸이 대신이 되었으니, 임금을 섬기는 일을 모두 옛사람을 법받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이 일을 논의한 것뿐이지, 감히 염치용과 민무회의 죄가 경하다고 하여 나 혼자 청죄(請罪)의 의논을 저지한 것은 아니다.ꡑ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생각하건대, 이직은 휴척(休戚)을 함께 해야 할 대신입니다. 만약 불충한 사람이 있어 전하가 너그러운 법전[寬典]을 따른다 하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그 죄를 강력히 청하여 법대로 처치하게 함이 옳았을 것인데, 염치용 등의 불충한 죄를 이숙번과 유정현 등이 청죄[請誅]하고자 함에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의금부의 조율(照律)이 잘못이라 하고, 그 가산의 적몰이 너무 중하다고 함에 이르렀으며, 장차 그들의 죄를 상달하고자 함에 청죄(請罪)의 의논을 저지하여, 마침내 상달하지 못하게 하였고, 핵문(劾問)할 때를 당해서도 언사(言辭)를 아름답게 꾸몄으니, 그 마음이 음흉하고 불충함이 막심합니다. 빌건대, 유사에 내려 국문하여 그 죄를 바루소서. 좌의정 남재(南在)는 유정현이 죄를 청하기를 주창하는데도, 자신이 수상(首相)이면서 그대로 맡겨 두고 청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정상이 불충에 관계됩니다. 빌건대, 아울러 유사에 내려 율(律)에 따라 과단(科斷)하소서

  영의정 하윤(河崙)은 비록 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그 죄를 청했어야 마땅한데, 자기 한 몸의 혐의를 피하여 그 죄를 청하지 아니하였고, 찬성 이숙번과 참찬 유정현은 비록 죄를 청하기를 먼저 주창하였다 하더라도, 이직의 말을 믿고 마침내 죄를 청하지 않았으니, 모두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ꡓ 상소가 올라가니, 임금이 보고 ꡒ간원(諫院)의 청은 진실로 합당하다.ꡓ하고, 이 명령이 있었다. 이어서 하윤․이숙번․유정현의 죄는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영인본】 2 책 63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註 3324]합좌(合坐) :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나라의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던 일. 그 장소는 조회청(朝會廳)이 아닌 자문(紫門) 같은 곳이었음.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5월 13일 기유 2번째 기사/ 하윤․이숙번․유정현 등과 중국에 진헌할 금․은을 마련할 방책을 의논하다/ 하윤(河崙)과 이숙번(李叔蕃)․유정현(柳廷顯)을 불러서 직책에 나오라고 명하니, 세 사람이 함께 대궐에 나아왔다. 이에 지신사 유사눌(柳思訥)에게 명하여 하윤 등에게 의논하였다. ꡒ국가에서 금(金)과 은(銀)을 생산하지 않는데 해마다 조정(朝廷)에 이를 진헌(進獻)하니, 수속(收贖)할 때에 은(銀)을 징수함이 어떻겠는가?ꡓ 유사눌이 또 여형(呂刑)3339) 의 속금법(贖金法)3340) 과 황조율(皇朝律)3341) 에서 소매은(燒埋銀)3342) 을 징수하는 법, 전조(前朝)에서 동(銅)을 징수하던 예(例)를 인용하여 강력하게 그 의논을 주장하고, 또 겸하여 동(銅)도 징수하고자 하니, 하윤은 옳다고 하였으나, 유정현은 잠자코 있었다. 이숙번이 홀로 말하였다. ꡒ은(銀)은 본토(本土)에서 생산되는 것도 아니고, 민간에 흩어져 있는 것 또한 많지 아니한데, 만약 죄를 범하여 어려운 때에 모두 다 은으로 징수한다면, 백성들이 살 곳을 잃음이 심할 것입니다. 저화(楮貨)로 말하면 비록 관(官)에서 만들고 있으나, 민간에 유포(流布)되어 있으니, 만약 물건을 가지고 바꾼다면 일조(一朝)에 많이 얻을 수 있어서, 찾기 힘든 은(銀)과는 같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속(收贖)할 때에 은과 동과 저화를 일체 함께 수납하게 하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ꡓ 유사눌이 또, 감사(監司)가 수령(守令)을 포폄(褒貶)할 때에 그 실정을 많이 잃고 있으므로, 각 고을의 교수(敎授)로 하여금 그 수령을 포폄하게 하려고 하니, 하윤이, ꡒ옳습니다. 만약에 이같이 한다면 수령들이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ꡓ하였다. 이숙번이 말하였다. ꡒ만약 이같이 한다면 교수의 권한은 중해지고, 감사는 가만히 앉아서 휘파람만 불것입니다. 또 교수관도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니 더욱 번거로와질 것입니다. 결코 시행해서는 아니 됩니다.ꡓ/ 【영인본】 2 책 64 면/ 【분류】 *역사(歷史)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광업-광산(鑛山) / *외교-명(明) / *금융-화폐(貨幣)/ [註 3339]여형(呂刑) : 《서경(書經)》의 편명. ☞ / [註 3340]속금법(贖金法) : 금으로 수속(收贖)하는 법. ☞ / [註 3341]황조율(皇朝律) : 명 나라의 형률(刑律). ☞ / [註 3342]소매은(燒埋銀) : 살인(殺人)을 하였을 때 죽은 사람의 장례비(葬禮費)를 살인자에게 징수하던 은(銀). 매장은(埋葬銀).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5월 13일 기유 3번째 기사/ 의정부에서 염치용 등의 죄를 청하다/ 의정부에서 상소하여 염치용(廉致庸)과 민무회(閔無悔) 등의 죄를 청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ꡒ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염치용은 망령된 말을 날조하여 성상의 덕(德)에 누(累)를 끼치고자 하였으니, 진실로 불충합니다. 그리고, 민무회는 그 말을 듣고 따라서 이를 부연(敷衍)해 말을 퍼뜨렸으며, 윤흥부(尹興阜)는 염치용에게 아첨하여 성상의 총명을 기망(期罔)하였으니, 모두가 불충합니다. 전하가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好生之德]으로 가벼운 법을 좇도록 허락하였으나, 인신(人臣)의 죄로서 불충보다 더 큰 것은 없는데, 죄가 있어도 벌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써 다스리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그 죄를 밝게 바루어서 뒷사람을 경계하소서.ꡓ 처음에 이숙번과 유정현(柳廷顯) 등이 의논하였다. ꡒ지난번에 염치용과 민무회․윤흥부 등의 죄를 청하려고 하였으나, 이직이 거절하였기 때문에, 우리들로 하여금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아, 똑 같이 죄를 청하지 아니한 죄를 받게 하였으니, 이번에는 이직의 죄도 아울러 기록하여 신청(申請)함이 좋겠다.ꡓ 하윤이 따르지 아니하며, ꡒ먼저 염치용 등의 죄를 청하고 추후에 이직의 죄를 청하는 것이 옳다.ꡓ고 하니, 염치용과 민무회의 죄만을 청하기로 하여, 〈여럿이〉 서명을 하고 먼저 내었는데, 이숙번과 유정현이 서로 의논하기를, ꡒ이직의 죄도 청하지 않을 수 없다.ꡓ고 하여, 이때에 두 사람이 단독으로 서명을 하여 신청한 것이었다. 임금이 이 글을 보고, 사인(舍人) 조서로(趙瑞老)와 이희로(李希老)를 불러 하윤(河崙)이 장신(狀申)3343) 에 참여하지 아니한 사유를 묻게 하였다. 이어서 유사눌 등에게 일렀다. ꡒ내 말을 잘 듣거라. 하윤은 나에게 공(功)도 있고 충성도 있으니, 가볍게 그를 버릴 수는 없다. 이직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개국하던 초기에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 종형(從兄)인 까닭에 그를 발탁하여 지신사(知申事)로 삼아 공신(功臣)의 반열에 참여시켰다. 무인년에는 남은(南誾)과 정도전(鄭道傳)에게 편당(偏黨)하였으나, 때마침 자기 집에서 잤기 때문에 다행히 그 화(禍)를 면했다. 그러나, 그 재주와 덕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지위가 우상(右相)에 이르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에게 액운이 있어서 실언(失言)한 것을, 사간원과 육조에서 상언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내 어쩔 수 없어서 그 고향에 안치시킨 것이다. 지금 또 하윤으로 하여금 이간(離間)하여 홀로 있게 하니, 나라에는 하루도 노신(老臣)이 없을 수 없다. 다시 하윤과 잘 의논[完議]하여 함께 서명해서 그 죄를 청함이 옳다.ꡓ 그 상소는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려보내지 않았다./ 【영인본】 2 책 65 면/ 【분류】 *정론(政論) / *역사(歷史)/ [註 3343]장신(狀申) : 소를 올려 신청하는 일.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5월 14일 경술 1번째 기사/ 의정부에서 하윤․이숙번․유정현 등이 상소하여 이직의 죄를 청하다/ 의정부에서 상소하여 이직(李稷)의 죄를 청하였다. 하윤(河崙)이 이숙번(李叔蕃)․유정현(柳廷顯)과 함께 상언하였다. ꡒ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인신(人臣)의 죄로서 불충보다 더 큰 것은 없으며, 더욱이 당악(黨惡)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는 당여(黨與)에 대하여 더욱 엄(嚴)합니다. 오늘날 염치용(廉致庸)과 민무회(閔無悔)는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성상의 덕(德)에 누(累)를 끼쳤으니, 비록 반역한 모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불충한 마음이 벌써 나타나, 그 죄가 주륙(誅戮)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금부와 육조․간원에서 서로 잇달아 죄를 청하였는데 헌사에서 청하지 아니하였으니, 이 또한 불충이 됩니다. 본부(本府)에서 의논하여 죄를 청하려고 하였으나, 우의정 이직이 한사코 거절하여 듣지 않았으니, 신하된 도리를 매우 잃었습니다. 소식(蘇軾)의 칩룡(蟄龍)3344) 이란 시(詩)를 읽기까지 하여 그 죄를 풀려고 하였고, 전에 남은(南誾)에게 편당(偏黨)하여 그 집에 모여서 잤는데도 다행히 그 화(禍)를 면하였습니다. 그리고, 민무구(閔無咎)에게 편당하여 헌사(憲司)의 장(長)이 되어 가지고도 한 번도 죄를 청한 적이 없었으니, 그의 당악(黨惡)함이 일찍이 여러 번 이와 같았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당악이 또한 이와 같으니, 비록 미미한 공[微功]이 있다 하나 그 죄를 가리기에는 부족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가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유사(攸司)로 하여금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여 뒷사람을 경계하소서.ꡓ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ꡒ지금 벌써 외방으로 내쫓았는데, 어떻게 죄를 더하겠는가?ꡓ하매, 사간원에서도 상소하여 이직과 민무회․염치용의 죄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니 모두 사직하였다./ 【영인본】 2 책 65 면/ 【분류】 *정론(政論)/ [註 3344]소식(蘇軾)의 칩룡(蟄龍) : 송(宋)나라 소식(蘇軾)이 지은 ꡐ뿌리는 구천에 이르도록 굽어짐이 없으리니 세상에서 오직 칩룡만이 알리라.ꡑ라는 시(詩)로서, 숨어 있는 용(龍)이 때를 얻지 못함을 비유하여 읊은 것임.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1415 을미 / 명 영락(永樂) 13년) 5월 17일 계축 2번째 기사/ 영의정부사 하윤 등을 파직시켜 진산 부원군으로 삼다/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을 파직시켜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찬성(贊成) 이숙번(李叔蕃)을 안성 부원군(安城府院君)으로, 이조 판서 한상경(韓尙敬)을 서원군(西原君)으로, 병조 판서 김승주(金承?)를 평양군(平壤君)으로 삼았다. 임금이 이조와 병조에 명하기를, ꡒ공신(功臣)을 보전(保全)하려면 임직(任職)으로 일을 맡기지 않는 것이 옳겠다.ꡓ하고, 전대(前代)의 성패(成敗)한 자취와 송 태조(宋太祖)가 석수신(石守信)3346) ․왕심기(王審琦)3347) 등에게 회유한 말과, 심지어 무인년 개국 공신(開國功臣)이 실패한 연유까지를 낱낱이 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하윤 등이 모두 파직(罷職)되고 다만 봉군(封君)만 갖게 되었다./ 【영인본】 2 책 65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註 3346]석수신(石守信) : 송(宋)나라 태조(太祖) 때 공신(功臣). 준의(浚儀) 사람으로서 시호는 무렬(武烈). 귀덕군 절도사(歸德軍節度使)로서 이균(李筠)을 토평하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음. ☞ / [註 3347]왕심기(王審琦) : 송(宋)나라 태조(太祖) 때 공신(功臣). 요서(遼西) 사람으로서 자는 중보(仲寶). 송나라 때 중국을 평정하고 동평장사(同平章事)가 되었음. ☞(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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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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