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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13-22:하윤(1372부임)
예천고을원(13-22) : 하윤(1372 부임, 영의정까지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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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5월 25일 병진 2번째 기사/ 남재를 영의정으로, 유정현․박은을 좌․우의정으로 임명하는 등 주요 인사이동/ 하윤(河崙)을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남재(南在)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유정현(柳廷顯)을 좌의정(左議政)으로, 박은(朴?)을 우의정(右議政)으로, 박신(朴信)을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으로, 윤향(尹向)․심온(沈溫)을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으로, 민여익(閔汝翼)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원(李原)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구종지(具宗之)를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조말생(趙末生)에게 이르기를, ꡒ좌의정 하윤이 70에 치사(致仕)3800) 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청하는데, 바로 자신이 치사 하고자 함인가?ꡓ하니, 조말생이 대답하였다. ꡒ하윤이 이 앞서에 아뢰기를, ꡐ신자(臣子)가 왕사(王事)에 근로하다가 나이 70세 이르면 치사(致仕)하고 한가함을 얻어서 여생(餘生)을 마치는 것은 옛날의 양법(良法)입니다.ꡑ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70에 이르면 여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 70이 된 자로 하여금 모두 치사(致仕)하도록 하소서. 만약에 전하께서 그들이 노성(老成)하다 하여 물을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그들을 부르면 좋겠습니다. 그가 어찌 치사(致仕)하고자 하여서 이러한 청을 부지런히 하겠습니까?ꡓ 임금이 말하였다. ꡒ하윤이 나라를 자기 집같이 걱정하여 계책을 드릴 것이 있으면 문득 진언(進言)하였다. 지금 국가가 편안한 것도 돌아보건대 하윤의 유지(維持)한 힘이 아닌가? 내가 장차 들어주려 한다.ꡓ 하윤이 이때에 이르러 의정(議政)의 직책이 해면되자, 대궐로 나아가 사은(謝恩)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로하여 타일렀다./ 【영인본】 2 책 118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註 3800]치사(致仕) : 관리가 70이 되면 벼슬길에서 물러나던 제도. 조선 초기에는 녹(祿)을 그대로 주었음.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6월 4일 갑자 5번째 기사/ 안성 부원군 이숙번에게 농장에 거주하게 하다. 이숙번의 죄를 청하는 여러 상소문/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을 때에도 정승(政丞) 하윤(河崙)과 성상 앞에 들어가 앉았다가, 이숙번이 먼저 나오고, 하윤이 머물러 있으면서 국정을 아뢨는데, 이숙번이 계하(階下)에 잠복하여 엿듣고 의이(疑貳)3839)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6월 9일 기사 1번째 기사/ 창녕 부원군 성석린 등이 상소하여 이숙번의 죄를 청하다/ 공신(功臣)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 등이 상소하여 이숙번(李叔蕃)의 죄를 청하니, 지신사(知申事) 조말생(趙末生)으로 하여금 전지(傳旨)하기를, ꡒ다시는 청하지 말라.ꡓ하였다. 성석린이 또 말하기를, ꡒ천지간에 다만 군신(君臣)과 부자(父子)만이 있을 뿐인데, 신 등은 이 사람의 불충(不忠)하고 무례한 것을 보고서 어찌 감히 묵묵(黙黙)하여야 하겠습니까? 주상께서 공신을 보전(保全)하고자 하는 것을 누가 감격하여 떠받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이 범한 것은 작지 아니하니, 보전하는 것은 불가합니다.ꡓ하고,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말하기를, ꡒ이숙번의 불충하고 무례한 것이 언행(言行)에 나타난 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각각 본 것을 가지고 써 올렸으니 불신(不臣)한 실정이 더욱 명백하여졌습니다. 마땅히 그 죄를 바로잡아서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뚜렷이 함께 알게 하여야 하는데, 하물며, 원훈 대신(元勳大臣)을 일조(一朝)에 추방하면서 그 죄를 밝히지 아니한다면 나라 사람이 이를 의심할 것이니, 실로 미편합니다.ꡓ하고, 우의정 박은(朴?)이 또 말하기를, ꡒ일찍이 주상께서의 하교(下敎)가 있기를 ꡐ이 사람의 죄가 어찌 이직(李稷)보다 더 함이 있겠는가?ꡑ고 하였으나, 그러나 신 등의 소견(所見)은 더욱 심한 것이 있습니다.ꡓ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ꡒ내선(內禪)3848) 은 나의 마음에서부터이요, 이숙번의 음모는 아니다. 목인해(睦仁海)의 난(亂)에 나라 사람이 모두 놀랐는데, 어찌 홀로 이숙번만이겠는가? 이숙번은 천성이 본래 광망(狂妄)하고 행사(行事)에 자주 차오(差誤)를 가져 왔으나, 마음에 먹은 것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신(信)을 잃는 것은 불가하다.ꡓ/ 【영인본】 2 책 122 면/ 【분류】 *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註 3848]내선(內禪) : 임금이 살아 있을 때 왕위를 후사(後嗣)에게 물려주는 일. 이것에는 임금 자의(自意)에 의한 것과 타의(他意)에 의한 것의 두 가지가 있었음. 이와 반대로 성(姓)이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선위(禪位)하는 것을 외선(外禪)이라고 함.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6월 20일 경진 3번째 기사/ 하윤․한상경․변계량이 《고려사》를 3분하여 개수하다. 하윤이 졸하여 이루지 못하다/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하윤(河崙)과 지관사(知館事) 한상경(韓尙敬)과 동지관사(同知館事) 변계량(卞季良)이 《고려사(高麗史)》를 3분(三分)하여 그 집에서 개수(改修)하였다. 하윤이 춘추관의 장무(掌務) 김원로(金元老)를 불러서 말하기를, ꡒ더운 때에 날마다 모여서 근무하는 것은 편하지 못하다. 전조(前朝)의 충정왕(忠定王) 이전의 역사를 마땅히 셋으로 나누어 그 하나는 나에게 보내고, 그 하나는 지관사(知館事)의 집에 보내고, 그 하나는 동지관사(同知館事)의 집으로 보내면 우리들이 나누어 보고 찬정(竄定)하겠다.ꡓ하였으나, 이 해 겨울에 하윤이 졸(卒)하여, 일은 마침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영인본】 2 책 123 면/ 【분류】 *역사-편사(編史)(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6월 22일 임오 1번째 기사/ 세자가 계사에 참여하다. 이조 건의로 검교관을 없애는 대신 일부 직제를 늘리다/ 세자(世子)가 내조계청(內朝啓廳)으로 나와 계사(啓事)에 참여하였다. 이조에서 아뢰었다. ꡒ자기 일을 하는 자가 그 녹(祿)을 먹는데, 이제 검교(檢校)의 각품(各品)은 자기 일이 없는데도 앉아서 천록(天祿)을 먹으니, 매우 미편(未便)하므로, 이를 혁파하기를 바랍니다. 종1품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1인과 정2품 삼군 도총제(三軍都摠制) 각각 1인씩과 종2품 삼군 총제(三軍摠制) 각각 1인씩을 더 설치하고, 육조 참의(六曹參議) 각각 1인씩을 혁파하고, 참판(參判) 각각 1인씩을 두어 품질(品秩)을 종2품으로 하여서 그 일이 없이 천록(天祿)을 쓸데없이 먹는 자들을 근절하소서.ꡓ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 앞서 조말생(趙末生)과 서선(徐選)을 하윤(河崙)의 집으로 보내어 혁파할른지 그대로 둘른지의 가부를 의논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ꡒ진산(晉山)이 만약 재상(宰相)의 가설(加設)을 불가하다고 하면 고하기를, ꡐ만약에 가설하지 않는다면 재상의 직이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성(異姓)의 봉군(封君)을 혁파한다면, 이러한 무리를 둘 곳이 반드시 없어질 것이니, 모두 실망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용관(冗官)의 도태(陶汰)는 이러한 무리를 대접하여 안심시킨 뒤에 잇달아 의논하여 시행하고, 오늘의 계책은 반드시 이와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ꡑ고 하라.ꡓ하였다. 조말생 등이 하윤의 집에 이르러 교지(敎旨)를 알리니, 하윤이 말하기를, ꡒ전조(前朝)가 성하였을 때에도 성(省) 다섯과 추(樞) 일곱으로서 국사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늘날의 재상(宰相)의 수는 1백에 이르니, 만약에 또 더 설치한다면 특히 불가하다. 그러나, 성상께서 진념(軫念)함도 또한 가(可)하다고 하겠다.ꡓ하니, 조말생 등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ꡒ진산(晉山)의 말이 진실로 옳으나, 그러나, 오늘날에 당하여서는 모름지기 이렇게 하여야 마땅하다.ꡓ하고, 바로 이조(吏曹)로 하여금 상정(詳定)하게 하니, 그 실상은 하윤이 정한 것이었다./ 【영인본】 2 책 124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6월 22일 임오 3번째 기사/ 심온․황희를 간사한 소인이라고 폄하한 글을 하윤이 올리니 하윤에게 실망의 뜻을 두다/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실봉(實封)한 글을 올리니, 임금이 조말생(趙末生)을 인견(引見)하고 좌우(左右)를 물리친 다음에, 하윤의 실봉(實封)한 것을 보여 주었다. 대략은 이러하였다. ꡒ정치를 하는 도리는 사람을 쓰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한 사람의 군자(君子)를 쓰면 다스려지고, 한 사람의 소인(小人)을 쓰면 어지러워지는 것을 성상께서는 깊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간(大姦)이 외식(外飾)하면 비록 지극히 밝다 하더라도 또한 이를 알기 어렵습니다. 심온(沈溫)과 황희(黃喜)는 매우 간악한 소인(小人)이니, 정부(政府)․육조(六曹)와 이조(吏曹)에 있는 것도 마땅하지 못하고, 직책이 전선(銓選)을 맡는 것은 더욱 불가합니다.ꡓ 조말생이 읽기를 끝마치자, 임금이 말하였다. ꡒ진산(晉山)은 충직한 신하이므로 내가 그 덕의(德義)를 높여서 신하라고 일컫지 않고 항상 빈사(賓師)로서 대접하였다. 그러나, 이 실봉(實封)에는 내가 심히 미편(未便)하다. 황희(黃喜)는 내가 일찍부터 한집안으로 대접해 왔고, 더군다나 심온(沈溫)은 충녕 대군(忠寧大君)의 장인이다. 이 두사람이 무슨 불초(不肖)한 것이 있기에 비방하기를 이와 같이 심하게 하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ꡐ임금이 치밀(緻密)하지 못하면 신하를 잃고, 신하가 치밀하지 못하면 몸을 잃는다.ꡑ고 하였다. 대신의 실봉(實封)을 외부에 드러냄은 불가하나, 그러나, 너는 글을 읽어 사리를 아는 유생(儒生)인데, 어찌 내가 너에게 비밀히 보여 준 뜻을 알지 못하는가? 너는 진산(晉山)의 집으로 가서 그 까닭을 물어서 아뢰라.ꡓ 조말생이 하윤의 집에 이르러 황희와 심온을 간악한 소인(小人)이라고 지적한 실증을 물으니, 하윤이 대답하였다. ꡒ황희와 심온은 본래 쇄쇄(??)한 소인(小人)들입니다. 이 앞서 황희와 심온이 통동(通同)3865) 하여 이중무(李仲茂)의 노비를 오결(誤決)하였고, 황희는 또 홍유룡(洪有龍)의 첩의 노비를 다투어 얻었으니, 어찌 사람의 마음이 있고서야 남의 자식과 그 아비의 노비를 다툴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다만 한 가지 일일 뿐이요, 간악하고 불초(不肖)한 일이 아직도 많아 있습니다. 신이 어찌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아뢰겠습니까? 황희는 옛 공로가 있고, 심온은 종실(宗室)과 관련된 사람이니, 폐기(廢棄)하면 불가하지만 추기(樞機)에 쓴다면 진실로 불가합니다.ꡓ 조말생이 돌아와 아뢰니, 임금이 말하였다. ꡒ뒤에 마땅히 친히 진산(晉山)을 보고 다시 말하겠다.ꡓ/ 【영인본】 2 책 124 면/ 【분류】 *정론(政論) / *인물(人物)/ [註 3865]통동(通同) : 공모.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7월 8일 정유 1번째 기사/ 생활이 어려운 조신언에게 쌀․콩 각각 5석을 주고, 관직 제수를 의논하다/ 조신언(趙愼言)에게 쌀․콩 각각 5석을 주었다. 임금이 좌우에 이르기를, ꡒ조박(趙璞)의 아들 조신언(趙愼言)의 처는 회안군(懷安君)의 딸이다. 생활이 몹시 어렵다니, 만일 굶어 죽게 되면 내가 비록 구제하지 않더라도 국가(國家)가 어찌 구제하지 않겠는가? 상왕(上王)이 아들[繼嗣]이 없는데 불로(佛老)를 상왕이 아들이라고 하지도 않고, 아들이 아니라고 하지도 않으니, 조박이 상왕의 신하가 되어서 어찌 아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어미가 조박의 일가인 것뿐이다. 상왕이 나를 봉(封)하여 세자를 삼은 뒤에 불로(佛老)가 중[僧]이 되어, 이미 천년(天年)3901) 을 마치었으니, 조박(趙璞)의 자손을 금고(禁錮)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각각 뜻을 말하라.ꡓ하니, 이원(李原)․황희(黃喜) 등이 대답하기를, ꡒ조박이 천명(天命)이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상왕이 아들이라고 하지 않는데 조박이 먼저 아들이라고 하였으니, 그릅니다.ꡓ하였다. 임금이, ꡒ조박이 먼저 아들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니라고 고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다. 이와 같은 일은 내가 음덕(陰德)을 베풀겠다.ꡓ하고, 날이 저물자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하기를, ꡒ조신언(趙愼言)이 살기가 어려우니 쌀․콩 각각 5석을 주라.ꡓ하고, 조금 뒤에 또, ꡒ경들이 조박(趙璞)․조신언이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을 나도 또한 안다. 내가 조신언을 보아서가 아니라, 질녀(姪女)를 보아서이다. 그 아비의 과전(科田)을 도로 받게 하고, 돈녕부(敦寧府) 관원이 되게 하여 녹을 받아서 살게 하고자 한다.ꡓ하고, 이어서 조말생(趙末生)을 성석린(成石璘)․하윤(河崙)․유정현(柳廷顯)의 집에 보내고, 홍여방(洪汝方)을 남재(南在)․박은(朴?)의 집에 보내어 그 가부를 의논하였다. 성석린은, ꡒ조신언은 회안군(懷安君)의 죄뿐만 아니라 아비 조박(趙璞)의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니, 감히 제수(除授)하는 것으로 아뢸 수 없습니다.ꡓ하였고, 하윤과 유정현도 또한 불가하다 하였고, 하윤은, ꡒ조박의 죄가 종사에 누(累)가 되니, 조신언이 그 머리를 보전한 것으로 족합니다. 어찌 진신(縉紳)3902) 조사(朝士)의 사이에 낄 수 있겠습니까? 회안군(懷安君)의 죄가 저와 같으니, 성상은 우애하는 마음으로 비록 그 사위[壻]에게 벼슬을 주시더라도 신의 마음은 법대로 처치하고자 합니다.ꡓ하였고, 남재는 홀로 가하다 하였다. 이날에 그 말을 갖추 아뢰니, 임금이 말하였다. ꡒ여러 사람들이 모두 불가하다 하니, 어떻게 제수할 수 있겠는가?ꡓ/ 【영인본】 2 책 127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사법(司法) / *농업-전제(田制)/ [註 3901]천년(天年) : 타고난 수명(壽命). ☞ / [註 3902]진신(縉紳) : 고위(高位) 고관(高官).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7월 8일 정유 3번째 기사/ 문소전․선원전․건원릉․제릉의 사시 대향제를 회복하다/ 문소전(文昭殿)․선원전(璿源殿)․건원릉(健元陵)․제릉(齊陵)의 사시 대향제(四時大享祭)를 회복하였다. 임금이. ꡒ사시 대향을 종묘에만 행하는 것이 불가하니, 건원릉․문소전․선원전․제릉에도 행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ꡓ하니, 하윤(河崙)이, ꡒ정법(正法)으로는 종묘(宗廟)에만 제사하는 것이 가합니다. 만일 두루 행하고자 하면, 차라리 후(厚)한 데에 잃는 것이 낫고, 또한 큰 잘못도 아닙니다. 종묘에는 제사가 5실(室)에 그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상복(喪服)이 제도가 다르니, 이것이 곧 친친(親親)의 강쇄(降殺)3903) 입니다.ꡓ하였다. 드디어 다시 행하라고 명하였다./ 【영인본】 2 책 127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註 3903]강쇄(降殺) : 등급에 있어서 아래로 낮춤.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8월 2일 신유 2번째 기사/ 문과․무과의 별시를 시행하게 하다/ 예조(禮曹)․병조(兵曹)에 명하여 문과(文科)․무과(武科)를 별시(別試)3934) 하였다. 임금이, ꡒ지난 여름에 가뭄을 근심하였으니, 많은 사람이 함께 기뻐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 장차 경복궁(景福宮)에 거둥하여 문과․무과를 시험하겠다.ꡓ하고, 이어서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하윤(河崙)에게 고하니, 하윤이, ꡒ명년이 식년(式年)3935) 이고, 또 외방(外方) 사람이 시기에 맞추어 오지 못하면 실망할 것이니, 청컨대, 새 사람을 시험하지 말고 중시과(重試科)3936) 를 베푸소서.ꡓ하였다...(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8월 6일 을축 1번째 기사/ 하윤과 의정부․육조에 명하여, 각도의 공물에 관한 규정을 만들다/ 하윤(河崙)과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에 명하여, 각도의 공물(貢物)을 상정(詳定)하였다. 호조(戶曹)에서 아뢰었다. ꡒ저포(紵布)․면주(綿紬)․목면(木綿)의 위전(位田)3946) 을 고쳐 상정하였는데, 10승(升) 저포 한 필에는 밭은 2결(結) 50복(卜), 논은 1결 25복이고, 9승 면주, 7승 목면 한 필에는 밭은 3결, 논은 1결 50복입니다. 면주와 목면이 아울러 1천 41필인데, 위전이 2천 2백 93결이고, 논이 2백 93결입니다.ꡓ/ 【영인본】 2 책 131 면/ 【분류】 *재정-공물(貢物) / *농업-전제(田制)/ [註 3946]위전(位田) : 관청의 경비나 제사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설치된 토지. 위토(位土).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8월 15일 갑술 1번째 기사/ 침림하에 경회루에서 문과․무과의 과거 시험을 치르다/ 문과․무과를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친시(親試)하고, 상왕(上王)을 봉영(奉迎)하여 구경하였다.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예조 판서(禮曹判書) 조용(趙庸)․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변계량(卞季良)․지신사(知申事) 조말생(趙末生)․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이적(李迹) 등에게 명하여 문과시(文科試)를 관장하였다. 통훈(通訓) 이하를 모두 부시(赴試)하게 하였으니, 하윤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영인본】 2 책 131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8월 21일 경진 1번째 기사/ 신덕왕후 및 성비가 계모인가 하는 문제를 신하들에게 묻다/ 편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좌우에 이르기를, ꡒ계모(繼母)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ꡓ하니, 유정현(柳廷顯)이 대답하기를, ꡒ어머니가 죽은 뒤에 이를 계승하는 자를 계모라고 합니다.ꡓ하였다. 임금이, ꡒ그렇다면 정릉(貞陵)이 내게 계모가 되는가?ꡓ하니, 대답하기를, ꡒ그때에 신의 왕후(神懿王后)가 승하하지 않았으니, 어찌 계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ꡓ하였다. 임금이, ꡒ정릉(貞陵)이 내게 조금도 은의(恩義)가 없었다. 내가 어머니 집에서 자라났고 장가를 들어서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의가 있겠는가? 다만 부왕(父王)이 애중(愛重) 하시던 의리를 생각하여 기신(忌晨)의 재제(齋祭)를 어머니와 다름 없이 하는 것이다.ꡓ하고, 또 묻기를, ꡒ성비(誠妃)는 내게 계모인가?ꡓ하니, 유정현(柳廷顯) 등이, ꡒ계모입니다.ꡓ하매, 임금이, ꡒ그렇다면 성비가 내 궁(宮)에 오면 중궁(中宮)은 남쪽을 향하고, 성비는 동쪽에 있으니, 그 예가 잘못 되었다.ꡓ하였다. 조말생(趙末生)이 아뢰기를, ꡒ신이 일찍이 하윤(河崙)과 더불어 성비의 일을 의논하였는데, 하윤이 말하기를, ꡐ제후(諸侯)는 두 번 장가 들지 않으니, 예(禮)에 두 적처(嫡妻)가 없다.ꡑ고 하였습니다.ꡓ하니, 임금이, ꡒ이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ꡓ하고, 예조 참판(禮曹參判) 허조(許稠)와 조말생에게 묻기를, ꡒ제후(諸侯)는 재취를 하지 않으므로 예에 두 적처가 없다는 것은, 이것은 적비(嫡妃)의 생시(生時)를 말하는 것인가? 죽은 뒤를 말하는 것인가? 만일 죽은 뒤를 말한다고 하면 이것은 부인(婦人)의 도(道)와 같은 것이다.ꡓ하였다. 허조(許稠)는, ꡒ죽은 뒤에도 또한 재취(再娶)하지 않아야 마땅합니다.ꡓ하고, 조말생은, ꡒ《춘추(春秋)》에 이르기를, ꡐ성자(聲子)3956) 로 계실(繼室)3957) 을 삼았다.ꡑ 하였으니, 신은 적비가 죽은 뒤에는 재취하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ꡓ하니, 임금이 허조에게 말하였다. ꡒ《춘추전(春秋傳)》의 주(註)에 이 일을 자세히 말하였으니, 경은 자세히 보라.ꡓ/ 【영인본】 2 책 132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註 3956]성자(聲子) : 노(魯)나라 은공(隱公)의 생모(生母) 혜공(惠公)의 비첩(婢妾). ☞ / [註 3957]계실(繼室) : 두예(杜預)의 《춘추경전집해(春秋經傳集解)》에 보면, ꡒ원비(元妃)가 죽으면 차비(次妃)가 내사(內事)를 대신하여 다스리지만 오히려 부인(夫人)이라 칭할 수 없는 까닭으로 이를 계실(繼室)이라 이른다.ꡓ하였음.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9월 25일 계축 1번째 기사/ 구종수는 경성군에 귀양보내고, 이오방은 공주 관노에 환속시키다/ 구종수(具宗秀)는 장 1백 대를 때려 경성군(鏡城郡)에 귀양보내고, 이오방(李五方)은 1백 대를 때려 공주(公州) 관노(官奴)에 환속(還屬)시켰다.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서 이원(李原)․황희(黃喜)를 인견하고 구종수의 죄악과 세자의 행실을 교유(敎諭)하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ꡒ구종수의 한 짓이 응견(鷹犬)의 일에 불과할 따름입니다.ꡓ하고, 또 ꡐ세자는 연소(年少)합니다. 세자는 연소합니다.ꡑ하고, 두 번씩이나 말하였다. 하윤(河崙)이 구종수의 일을 듣고, 예궐(詣闕)하니, 임금이 내전(內殿)에서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이 있기 전에 하윤이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ꡒ세자의 직책이 장차 종사(宗社)를 주관할 터인데, 지금 거칠고 음란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어찌하겠습니까? 마땅히 구종수를 베어 후래(後來)를 경계하고, 더욱 방금(防禁)을 더하여 난(亂)의 근원을 근절하소서.ꡓ하니, 임금이 그 말에 감동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ꡒ구종수가 궁성(宮城)을 넘었으니, 죄가 교형(絞刑)에 해당합니다.ꡓ하니, 임금이 정부(政府)․육조(六曹)․대간(臺諫)에 전지하기를, ꡒ이 사람을 또한 삼복(三覆)을 기다린 뒤에 형을 집행할 것인가?ꡓ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안등(安騰)이 아뢰기를, ꡒ옥(獄)의 의심나는 것은 삼복(三覆)3974) 을 기다려야 하지마는, 궁성을 넘어 들어간 것은 죄가 더 큰 것이 없으니, 무엇을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ꡓ하니, 여러 경(卿)들이 모두 안등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금 있다가 대사헌(大司憲) 김여지(金汝知)와 좌사간(左司諫) 박수기(朴竪基) 등이 아뢰기를, ꡒ구종수의 죄는 다시 의논할 것이 없으나, 궁성을 넘어 들어간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그 까닭을 국문한 연후에 죽이소서.ꡓ하였다. 이에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함께 출입한 자를 물었으나, 말이 세자에게 관련되므로 숨기고 다시 캐어 묻지 않았다. 그 어미가 신정(申呈)하여 사형을 용서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누(累)가 세자에게 미친다고 하여 말감(末減)3975) 에 따라 장(杖) 1백 대와 도(徒) 3년에 처하여 경성(鏡城)으로 귀양보내고, 이오방은 장 1백 대를 때려서 본역(本役)에 따라서 역(役)을 정하였다./ 【영인본】 2 책 134 면/ 【분류】 *사법-법제(法制) / *사법-행형(行刑) / *신분(身分) / *왕실-종친(宗親)/ [註 3974]삼복(三覆) : 사죄(死罪)에 해당하는 죄인을 신중히 처결하기 위하여 세 차례나 거듭하여 죄상을 조사하던 법. 사죄 삼복법(死罪三覆法). ☞ / [註 3975]말감(末減) : 죄를 감면하여 주던 것.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10월 2일 경신 2번째 기사/ 동교에 거둥하여 제산릉 고증사 진산 부원군 하윤을 전송하다/ 동교(東郊)에 거둥하여 제산릉 고증사(諸山陵考證使)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을 전송하였다. 처음에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하기를, ꡒ진산(晉山)이 10월 초2일 함길도(咸吉道)에 가는데, 비록 위로하여 잔치하고자 하나, 저 사람이 술을 마시지 못하고, 또 오래 앉는 것을 편안히 하지 못한다. 내가 풍악을 베풀어서 문밖에 전송하고자 하나, 다만 동향 대제(冬享大祭)가 초7일에 있으니, 섭행(攝行)이라고는 하지마는 7일 재계(齋戒)에 혐의가 있을까 의심한다. 성문밖에 전송하는 것이 가하겠는가?ꡓ하니, 조말생(趙末生)이 대답하기를, ꡒ친히 행하면 7일 재계를 하여야 하지마는, 만일 섭행이면 3일 재계를 하는 것이 이미 정한 제도가 있습니다. 또 여러 능(陵)을 위하여 전송하는데 무엇이 해롭겠습니까?ꡓ하매,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선암(鐥巖)에 나가 전송하고, 인하여 안마(鞍馬)․모구(毛?)․모관(毛冠)․임(笠)․화(靴)와 유의(?衣)3978) 1습(襲)을 주고, 종사관(從事官)에게 각각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하윤이 그 첩의 아들을 임금에게 뵈이고 말하기를, ꡒ이 아이의 이름은 하장(河長)이고, 또 그 아우가 있는데 하연(河延)입니다. 청컨대, 전하는 불쌍히 여기소서.ꡓ하였다. 세자가 또한 동교(東郊)에서 전송하였다./ 【영인본】 2 책 135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註 3978]유의(?衣) : 겨울 옷.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10월 21일 기묘 2번째 기사/ 하윤의 병을 묻기 위해 전의 판관 이헌을 정평에 보내다/ 전의 판관(典醫判官) 이헌(李軒)을 정평(定平)에 보냈으니, 하윤(河崙)의 병을 묻기 위해서였다./ 【영인본】 2 책 137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10월 23일 신사 1번째 기사/ 진산 부원군 하윤이 자신의 병세를 알리는 내신을 보내다/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상서하였다. 상서는 이러하였다. ꡒ하윤이 후하게 성은(聖恩)을 입어 길에서 병이 없었으나, 이달 12일에 예원군(預原郡)에 이르러 비로소 턱 위 오른쪽에 종기가 나는 것을 알았습니다. 13일 정평부(定平府)에 이르러 이틀을 머물러서 질침(蛭針) 1백여 매를 쓰고, 16일 함흥부(咸興府)에 이르러 정릉(定陵)․화릉(和陵)을 알현하고 이틀을 머물러서, 또 질침 1백여 매를 쓰고, 19일에 도로 정평(定平)에 이르러 삼가 상은(上恩)을 입어 특별히 내신(內臣)을 보내어 내온(內?)을 주시니, 신이 병중에 지수(祇受)3991) 하고 감격하였습니다. 22일에 또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묻고 구료(救療)하셨습니다. 신이 쇠하고 늙은 가운데에 다행히 사명(使命)을 받았으니, 병 없이 빨리 돌아가서 성려(聖慮)를 번거롭게 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지금 종기의 형세가 점점 넓어지고 아파서 베개에 엎드려 신음하는데 내의(內醫)가 봉교(奉敎)하고 와서 치료하여 주니, 신이 감격하여 목이 메어 말을 다하지 못하겠습니다.ꡓ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 하구(河久)가 가서 아비의 병을 시병(侍病)하기를 청하니, 역마(驛馬)를 주어 보냈다./ 【영인본】 2 책 137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註 3991]지수(祇受) : 임금의 하사(下賜)를 받음.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10월 29일 정해 1번째 기사/ 하윤이 자신의 병세와 치료 상황에 관해 상서하다/ 하윤(河崙)이 또 상서하였다. ꡒ하윤이 운수가 쇠하고 복(福)이 지나쳐서 사명을 받드는 중에 병에 걸렸습니다. 삼가 상은(上恩)을 입어서 특별히 내의(內醫) 이헌(李軒)을 보내시어 와서 치료하여 조금 차도를 얻었는데, 요여(腰輿)로 서행(徐行)하여 돌아가고자 하니, 이헌이 움직여서는 안 되고 반드시 풍한(風寒)을 피하여야 한다고 경계하였습니다. 질침(蛭針)3994) 을 쓴 나머지 피[血]를 인침(人針)3995) 을 써서 빼고자 하니, 이헌은 그런 말을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고 저지하였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건대, 성인(聖人)의 학문은 경(經)과 권(權)이 있으니, 의술(醫術)인들 또한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질침(蛭針)으로 피를 빼는 것은 비록 수백 개에 이르러도 해가 없으니, 인침(人針)으로 피를 빼는 것이 또한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 또 인후(咽喉)의 종기 같은 것은 장차 막히어 기절하게 되면 반드시 인침을 쓰는데도 오히려 해가 없는데, 더구나 인후 밖의 종기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상자(上慈)는 불쌍히 조찰(照察)하시어 늙은 의원 무리들에게 영을 내리어 질침으로 다하지 못한 것을 인침으로 남은 피를 빼는 편부(便否)와 전에 경험이 있고 없음을 집의(集議)하여 적어서 제시하게 하여 여생을 보전하게 하소서.ꡓ 또 상언하기를, ꡒ이달 28일에 신의 자식 하구(河久)가 허가를 받고 병을 물으러 왔으니, 놀라고 기쁜 것을 어찌 측량하겠습니까? 29일에 상은(上恩)을 입어서 또 노의(老醫) 양홍달(楊弘達)을 보내 와서 병을 치료하니, 대개 치료하지 못한 것을 더 치료하게 한 것입니다. 또 신의 자식 하영(河永)을 와서 보게 하니, 상은을 입은 감격의 정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생각건대, 내의(內醫) 두 사람이 계속하여 왔으니 감히 아울러 머무르지 못하겠고, 또 이헌이 온 지가 이미 7일이 지났고, 그 치료 증험하는 방법을 신이 데리고 온 방민(方敏)과 함길도(咸吉道) 교유(敎諭) 한보지(韓補之)가 대강 전하여 배웠으니, 자식 하구와 함께 돌려보냅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건대, 신이 쇠하고 병든 가운데에 상은(上恩)이 조첩(稠疊)함을 입어서 겨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상자(上慈)는 불쌍히 여겨 조찰(照察)하소서.ꡓ/ 【영인본】 2 책 137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의약-의학(醫學) / *인물(人物)/ [註 3994]질침(蛭針) : 침(針)의 하나. ☞ / [註 3995]인침(人針) : 침(針)의 하나.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11월 6일 계사 2번째 기사/ 진산 부원군 하윤의 졸기/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정평(定平)에서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이르니, 임금히 심히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고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3998) 하고 쌀․콩 각각 50석과 종이 2백 권을 치부(致賻)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 정인지(鄭麟趾)를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ꡒ원로(元老) 대신은 인군의 고굉(股肱)이요, 나라의 주석(柱石)이다. 살아서는 휴척(休戚)을 함께 하고, 죽으면 은수(恩數)를 지극히 하는 것은 고금의 바뀌지 않는 전례(典禮)이다. 생각하면 경은 천지가 정기를 뭉치고 산악(山嶽)이 영(靈)을 내리받아, 고명 정대(高明正大)한 학문으로 발하여 화국(華國)의 웅문(雄文)이 되었고, 충신 중후(忠信重厚)한 자질로 미루어 경세(經世)의 큰 모유(謀猷)가 되었다. 일찍 이부(二府)3999) 에 오르고 네 번 상상(上相)이 되었다. 잘 도모하고 능히 결단하여 계책에는 유책(遺策)이 없었고, 사직을 정하고 천명을 도운 것은 공훈(功勳)이 맹부(盟府)에 있다. 한결같은 덕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우리 국가를 보호하고 다스렸는데, 근자에 고사(故事)를 가지고 나이 늙었다 하여 정사를 돌려 보냈다. 그 아량을 아름답게 여기어 억지로 그 청에 따랐다. 거듭 생각건대, 삭북(朔北)은 기업(基業)을 시초한 땅이고 조종(祖宗)의 능침(陵寢)이 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돌아보아 살피려고 하는데, 실로 적합한 사람이 어려웠다. 경의 몸은 비록 쇠하였으나,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하여 먼 길의 근로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스스로 행하고자 하였다. 나도 또한 능침(陵寢)이 중하기 때문에 경(卿)의 한 번 가는 것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외에 나가서 전송한 것이 평생의 영결(永訣)이 될 줄을 어찌 뜻하였겠는가? 슬프다! 사생(死生)의 변(變)은 인도(人道)에 떳떳한 것이다. 경이 그 이치를 잘 아니 또 무엇을 한하겠는가! 다만 철인(哲人)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제부터 이후로 대사(大事)에 임하고 대의(大疑)를 결단하여 성색(聲色)을 움직이지 않고, 국가를 반석의 편안한 데에 둘 사람을 내가 누구를 바라겠는가? 이것은 내가 몹시 애석하여 마지 않는 것이다.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하니, 영혼이 있으면 이 휼전(恤典)을 흠향하라.ꡓ 하윤(河崙)은 진주(晉州) 사람인데, 순흥 부사(順興府使) 하윤린(河允麟)의 아들이었다. 지정(至正) 을사년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좌주(座主) 이인복(李仁復)이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기어 그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신해년에 지영주(知榮州)가 되었는데, 안렴사(按廉使) 김주(金湊)가 그 치행(治行)을 제일로 올리니, 소환되어 고공 좌랑(考功佐郞)에 제수되어 여러 벼슬을 거치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무진년에 최영(崔瑩)이 군사를 일으켜 요양(遼陽)을 침범하니, 하윤이 힘써 불가함을 말하였는데, 최영이 노하여 양주(襄州)에 추방하였다.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계유년에 기용하여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가 되었다. 태조가 계룡산(?龍山)에 도읍을 옮기고자 하여 이미 역사를 일으키니, 감히 간하는 자가 없는데, 하윤이 힘써 청하여 파하였다. 갑술년에 다시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병자년에 중국 고황제(高皇帝)가 우리의 표사(表辭)가 공근(恭謹)하지 못하다고 하여 우리 나라에서 문장을 쓴 사람 정도전(鄭道傳)을 불러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태조가 비밀히 보낼지 안보낼지를 정신(廷臣)들에게 물으니, 모두 서로 돌아보고 쳐다보면서 반드시 보낼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하윤이 홀로 보내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니, 정도전이 원망하였다. 태조가 하윤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서 상주(上奏)하여 자세히 밝히니, 일이 과연 풀렸다. 그때에 정도전이 남은(南誾)과 꾀를 합하여 유얼(幼?)을 끼고 여러 적자(嫡子)를 해하려 하여 화(禍)가 불측(不測)하게 되었으므로, 하윤이 일찍이 임금의 잠저(潛邸)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물었다. 하윤이 말하기를, ꡒ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써서 이 무리를 쳐 없애는 것뿐입니다.ꡓ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윤이 다시, ꡒ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上位)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찌하겠습니까?ꡓ하였다. 무인년 8월에 변이 일어났는데, 그때에 하윤은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있었다. 빨리 말을 달려 서울에 이르러 사람으로 하여금 선언(宣言)하고 군사를 끌고와 도와서 따르도록 하였다. 상왕(上王)이 위(位)를 잇자 하윤에게 정당 문학(政堂文學)을 제수하고 정사공(定社功)을 녹훈(錄勳)하여 1등으로 삼고, 작(爵)을 진산군(晉山君)이라 주었다. 경진년 5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가 되고, 9월에 우정승(右政丞)이 되매 작을 승진하여 백(伯)으로 삼았다. 11월에 임금이 즉위하자 좌명공(佐命功)을 녹훈하여 1등으로 삼았다. 신사년 윤3월(閏三月)에 사면하였다가 임오년 10월에 다시 좌정승(左政丞)으로 제수되어 영락 황제(永樂皇帝)의 등극(登極)한 것을 들어가 하례하는데, 하윤이 명(明)나라에 이르러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ꡒ새 천자가 이미 천하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였으니, 청컨대, 우리 왕의 작명(爵命)을 고쳐 주소서.ꡓ하니, 황제가 아름답게 여기어 계미년 4월에 명나라 사신 고득(高得) 등과 함께 고명(誥命)․인장(印章)을 받들고 왔다. 임금이 더욱 중하게 여기어 특별히 전구(田口)를 주었다. 갑신년 6월에 가뭄으로 사면하기를 빌고, 을유년 정월에 다시 복직하였다가 정해년 7월에 또 가뭄으로 사피하기를 청하였다. 기축년 겨울에 이무(李茂)가 득죄하자 온 조정이 모두 베기를 청하였는데, 하윤이 홀로 영구(營救)4000) 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하기를, ꡒ하윤이 ꡐ죽일 수 없다.ꡑ고 하니, 이것은 실로 그 마음에서 발한 것이다.ꡓ하였다. 을미년 여름에 이직(李稷)이 그 향리에 안치(安置)되었는데, 하루는 하윤이 예궐(詣闕)하니, 임금이 내전에서 인견하였다. 하윤이 말이 없이 웃으니, 임금이 그 까닭을 물었다. 하윤이 대답하기를, ꡒ이직의 죄가 외방(外方)에 내칠 죄입니까?ꡓ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 임진년 8월에 다시 좌정승이 되고 갑오년 4월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금년 봄에 이르러 나이 70으로 치사(致仕)하기를 비니, 임금이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는데, 하윤이 청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여 부원군(府院君)으로 집에 나갔다. 하윤이 천성적인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복[端委]4001) 차림으로 묘당(廟堂)에 이르러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되도록 대체(大體)를 살리고 아름다운 모책과 비밀의 의논을 계옥(啓沃)한 것이 대단히 많았으나, 물러나와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 몸을 가지고 물건을 접하는 것을 한결같이 성심으로 하여 허위가 없었으며, 종족(宗族)에게 어질게 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실(信實)하게 하였으며, 아래로 동복(?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다. 인재(人材)를 천거하기를 항상 불급(不及)한 듯이 하였으나, 조금만 착한 것이라도 반드시 취하고 그 작은 허물은 덮어 주었다. 집에 거(居)하여서는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잔치하여 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성질이 글을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유유(悠悠)하게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어서 자고 먹는 것도 잊었다. 음양(陰陽)․의술(醫術)․성경(星經)․지리(地理)까지도 모두 지극히 정통하였다. 후생을 권면(勸勉)하여 의리를 상확(商確)함에는 미미(??)하게 권태를 잊었다. 국정(國政)을 맡은 이래로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 사대(事大)하는 사명(辭命)과 문사의 저술이 반드시 윤색(潤色)․인가(印可)를 거친 뒤에야 정하여졌다. 불씨(佛氏)와 노자(老子)를 배척하여 미리 유문(遺文)을 만들어 건사(巾?)4002) 에 두고 자손을 가르치는 것이 섬실(纖悉)하고 주비(周備)하였다. 또 상사(喪事)와 장사(葬事)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고 불사(佛事)를 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하윤이 죽은 뒤에 그 글이 나오니, 그 집에서 그 말과 같이 하였다. 자호(自號)는 호정(浩亭)이요, 자(字)는 대림(大臨)이요,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아들은 하구(河久)와 서자(庶子)가 세 사람인데, 하장(河長)․하연(河延)․하영(河永)이었다. 하윤이 죽자 부인 이씨(李氏)가 애통하여 음식을 먹지 않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임금이 듣고 약주(藥酒)를 하사하고 전지하기를, ꡒ상제(喪制)는 마치지 않을 수 없으니, 비록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제를 마치지 못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부디 술을 마시고 슬픔을 절도 있게 하여 상제를 마치라.ꡓ하였다. 이씨가 사람을 시켜 승정원(承政院)에 나와 상언하기를, ꡒ가옹(家翁)이 왕명을 받들어 외방에서 죽었으니, 원컨대, 시체를 서울 집에 들여와 빈소(殯所)하게 하소서.ꡓ하니, 명하여 예조(禮曹)에 내리어 예전 제도를 상고하여 계문(啓聞)하게 하고, 이어서 전지하기를, ꡒ《예기(禮記)》 증자문편(曾子問篇)에 이러한 의논이 있었다.ꡓ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ꡒ사명을 받들고 죽으면 대부(大夫)․사(士)는 마땅히 집에 돌아와 염(殮)하고 초빈(草殯)하여야 합니다.ꡓ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인본】 2 책 138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註 3998]소선(素膳) : 육류(肉類)가 없는 수라. ☞ / [註 3999]이부(二府) : 의정부(議政府)와 중추원(中樞院). ☞ / [註 4000]영구(營救) : 죄에 빠진 사람을 구원함. ☞ / [註 4001]관복[端委] : 주(周)나라 시대에 관리가 착용하던 현단복(玄端服)과 위모관(委貌冠)을 말하는데, 곧 관리의 관복(冠服)을 뜻함. ☞ / [註 4002]건사(巾?) : 비단을 바른 상자. ☞(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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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記事] :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5월 25일 병진 2번째 기사/ 남재를 영의정으로, 유정현․박은을 좌․우의정으로 임명하는 등 주요 인사이동/ 하윤(河崙)을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남재(南在)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유정현(柳廷顯)을 좌의정(左議政)으로, 박은(朴?)을 우의정(右議政)으로, 박신(朴信)을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으로, 윤향(尹向)․심온(沈溫)을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으로, 민여익(閔汝翼)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원(李原)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구종지(具宗之)를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조말생(趙末生)에게 이르기를, ꡒ좌의정 하윤이 70에 치사(致仕)3800) 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청하는데, 바로 자신이 치사 하고자 함인가?ꡓ하니, 조말생이 대답하였다. ꡒ하윤이 이 앞서에 아뢰기를, ꡐ신자(臣子)가 왕사(王事)에 근로하다가 나이 70세 이르면 치사(致仕)하고 한가함을 얻어서 여생(餘生)을 마치는 것은 옛날의 양법(良法)입니다.ꡑ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70에 이르면 여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 70이 된 자로 하여금 모두 치사(致仕)하도록 하소서. 만약에 전하께서 그들이 노성(老成)하다 하여 물을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그들을 부르면 좋겠습니다. 그가 어찌 치사(致仕)하고자 하여서 이러한 청을 부지런히 하겠습니까?ꡓ 임금이 말하였다. ꡒ하윤이 나라를 자기 집같이 걱정하여 계책을 드릴 것이 있으면 문득 진언(進言)하였다. 지금 국가가 편안한 것도 돌아보건대 하윤의 유지(維持)한 힘이 아닌가? 내가 장차 들어주려 한다.ꡓ 하윤이 이때에 이르러 의정(議政)의 직책이 해면되자, 대궐로 나아가 사은(謝恩)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로하여 타일렀다./ 【영인본】 2 책 118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註 3800]치사(致仕) : 관리가 70이 되면 벼슬길에서 물러나던 제도. 조선 초기에는 녹(祿)을 그대로 주었음.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6월 4일 갑자 5번째 기사/ 안성 부원군 이숙번에게 농장에 거주하게 하다. 이숙번의 죄를 청하는 여러 상소문/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을 때에도 정승(政丞) 하윤(河崙)과 성상 앞에 들어가 앉았다가, 이숙번이 먼저 나오고, 하윤이 머물러 있으면서 국정을 아뢨는데, 이숙번이 계하(階下)에 잠복하여 엿듣고 의이(疑貳)3839)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6월 9일 기사 1번째 기사/ 창녕 부원군 성석린 등이 상소하여 이숙번의 죄를 청하다/ 공신(功臣)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 등이 상소하여 이숙번(李叔蕃)의 죄를 청하니, 지신사(知申事) 조말생(趙末生)으로 하여금 전지(傳旨)하기를, ꡒ다시는 청하지 말라.ꡓ하였다. 성석린이 또 말하기를, ꡒ천지간에 다만 군신(君臣)과 부자(父子)만이 있을 뿐인데, 신 등은 이 사람의 불충(不忠)하고 무례한 것을 보고서 어찌 감히 묵묵(黙黙)하여야 하겠습니까? 주상께서 공신을 보전(保全)하고자 하는 것을 누가 감격하여 떠받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이 범한 것은 작지 아니하니, 보전하는 것은 불가합니다.ꡓ하고,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말하기를, ꡒ이숙번의 불충하고 무례한 것이 언행(言行)에 나타난 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각각 본 것을 가지고 써 올렸으니 불신(不臣)한 실정이 더욱 명백하여졌습니다. 마땅히 그 죄를 바로잡아서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뚜렷이 함께 알게 하여야 하는데, 하물며, 원훈 대신(元勳大臣)을 일조(一朝)에 추방하면서 그 죄를 밝히지 아니한다면 나라 사람이 이를 의심할 것이니, 실로 미편합니다.ꡓ하고, 우의정 박은(朴?)이 또 말하기를, ꡒ일찍이 주상께서의 하교(下敎)가 있기를 ꡐ이 사람의 죄가 어찌 이직(李稷)보다 더 함이 있겠는가?ꡑ고 하였으나, 그러나 신 등의 소견(所見)은 더욱 심한 것이 있습니다.ꡓ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ꡒ내선(內禪)3848) 은 나의 마음에서부터이요, 이숙번의 음모는 아니다. 목인해(睦仁海)의 난(亂)에 나라 사람이 모두 놀랐는데, 어찌 홀로 이숙번만이겠는가? 이숙번은 천성이 본래 광망(狂妄)하고 행사(行事)에 자주 차오(差誤)를 가져 왔으나, 마음에 먹은 것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신(信)을 잃는 것은 불가하다.ꡓ/ 【영인본】 2 책 122 면/ 【분류】 *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註 3848]내선(內禪) : 임금이 살아 있을 때 왕위를 후사(後嗣)에게 물려주는 일. 이것에는 임금 자의(自意)에 의한 것과 타의(他意)에 의한 것의 두 가지가 있었음. 이와 반대로 성(姓)이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선위(禪位)하는 것을 외선(外禪)이라고 함.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6월 20일 경진 3번째 기사/ 하윤․한상경․변계량이 《고려사》를 3분하여 개수하다. 하윤이 졸하여 이루지 못하다/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하윤(河崙)과 지관사(知館事) 한상경(韓尙敬)과 동지관사(同知館事) 변계량(卞季良)이 《고려사(高麗史)》를 3분(三分)하여 그 집에서 개수(改修)하였다. 하윤이 춘추관의 장무(掌務) 김원로(金元老)를 불러서 말하기를, ꡒ더운 때에 날마다 모여서 근무하는 것은 편하지 못하다. 전조(前朝)의 충정왕(忠定王) 이전의 역사를 마땅히 셋으로 나누어 그 하나는 나에게 보내고, 그 하나는 지관사(知館事)의 집에 보내고, 그 하나는 동지관사(同知館事)의 집으로 보내면 우리들이 나누어 보고 찬정(竄定)하겠다.ꡓ하였으나, 이 해 겨울에 하윤이 졸(卒)하여, 일은 마침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영인본】 2 책 123 면/ 【분류】 *역사-편사(編史)(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6월 22일 임오 1번째 기사/ 세자가 계사에 참여하다. 이조 건의로 검교관을 없애는 대신 일부 직제를 늘리다/ 세자(世子)가 내조계청(內朝啓廳)으로 나와 계사(啓事)에 참여하였다. 이조에서 아뢰었다. ꡒ자기 일을 하는 자가 그 녹(祿)을 먹는데, 이제 검교(檢校)의 각품(各品)은 자기 일이 없는데도 앉아서 천록(天祿)을 먹으니, 매우 미편(未便)하므로, 이를 혁파하기를 바랍니다. 종1품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1인과 정2품 삼군 도총제(三軍都摠制) 각각 1인씩과 종2품 삼군 총제(三軍摠制) 각각 1인씩을 더 설치하고, 육조 참의(六曹參議) 각각 1인씩을 혁파하고, 참판(參判) 각각 1인씩을 두어 품질(品秩)을 종2품으로 하여서 그 일이 없이 천록(天祿)을 쓸데없이 먹는 자들을 근절하소서.ꡓ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 앞서 조말생(趙末生)과 서선(徐選)을 하윤(河崙)의 집으로 보내어 혁파할른지 그대로 둘른지의 가부를 의논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ꡒ진산(晉山)이 만약 재상(宰相)의 가설(加設)을 불가하다고 하면 고하기를, ꡐ만약에 가설하지 않는다면 재상의 직이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성(異姓)의 봉군(封君)을 혁파한다면, 이러한 무리를 둘 곳이 반드시 없어질 것이니, 모두 실망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용관(冗官)의 도태(陶汰)는 이러한 무리를 대접하여 안심시킨 뒤에 잇달아 의논하여 시행하고, 오늘의 계책은 반드시 이와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ꡑ고 하라.ꡓ하였다. 조말생 등이 하윤의 집에 이르러 교지(敎旨)를 알리니, 하윤이 말하기를, ꡒ전조(前朝)가 성하였을 때에도 성(省) 다섯과 추(樞) 일곱으로서 국사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늘날의 재상(宰相)의 수는 1백에 이르니, 만약에 또 더 설치한다면 특히 불가하다. 그러나, 성상께서 진념(軫念)함도 또한 가(可)하다고 하겠다.ꡓ하니, 조말생 등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ꡒ진산(晉山)의 말이 진실로 옳으나, 그러나, 오늘날에 당하여서는 모름지기 이렇게 하여야 마땅하다.ꡓ하고, 바로 이조(吏曹)로 하여금 상정(詳定)하게 하니, 그 실상은 하윤이 정한 것이었다./ 【영인본】 2 책 124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6월 22일 임오 3번째 기사/ 심온․황희를 간사한 소인이라고 폄하한 글을 하윤이 올리니 하윤에게 실망의 뜻을 두다/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실봉(實封)한 글을 올리니, 임금이 조말생(趙末生)을 인견(引見)하고 좌우(左右)를 물리친 다음에, 하윤의 실봉(實封)한 것을 보여 주었다. 대략은 이러하였다. ꡒ정치를 하는 도리는 사람을 쓰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한 사람의 군자(君子)를 쓰면 다스려지고, 한 사람의 소인(小人)을 쓰면 어지러워지는 것을 성상께서는 깊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간(大姦)이 외식(外飾)하면 비록 지극히 밝다 하더라도 또한 이를 알기 어렵습니다. 심온(沈溫)과 황희(黃喜)는 매우 간악한 소인(小人)이니, 정부(政府)․육조(六曹)와 이조(吏曹)에 있는 것도 마땅하지 못하고, 직책이 전선(銓選)을 맡는 것은 더욱 불가합니다.ꡓ 조말생이 읽기를 끝마치자, 임금이 말하였다. ꡒ진산(晉山)은 충직한 신하이므로 내가 그 덕의(德義)를 높여서 신하라고 일컫지 않고 항상 빈사(賓師)로서 대접하였다. 그러나, 이 실봉(實封)에는 내가 심히 미편(未便)하다. 황희(黃喜)는 내가 일찍부터 한집안으로 대접해 왔고, 더군다나 심온(沈溫)은 충녕 대군(忠寧大君)의 장인이다. 이 두사람이 무슨 불초(不肖)한 것이 있기에 비방하기를 이와 같이 심하게 하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ꡐ임금이 치밀(緻密)하지 못하면 신하를 잃고, 신하가 치밀하지 못하면 몸을 잃는다.ꡑ고 하였다. 대신의 실봉(實封)을 외부에 드러냄은 불가하나, 그러나, 너는 글을 읽어 사리를 아는 유생(儒生)인데, 어찌 내가 너에게 비밀히 보여 준 뜻을 알지 못하는가? 너는 진산(晉山)의 집으로 가서 그 까닭을 물어서 아뢰라.ꡓ 조말생이 하윤의 집에 이르러 황희와 심온을 간악한 소인(小人)이라고 지적한 실증을 물으니, 하윤이 대답하였다. ꡒ황희와 심온은 본래 쇄쇄(??)한 소인(小人)들입니다. 이 앞서 황희와 심온이 통동(通同)3865) 하여 이중무(李仲茂)의 노비를 오결(誤決)하였고, 황희는 또 홍유룡(洪有龍)의 첩의 노비를 다투어 얻었으니, 어찌 사람의 마음이 있고서야 남의 자식과 그 아비의 노비를 다툴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다만 한 가지 일일 뿐이요, 간악하고 불초(不肖)한 일이 아직도 많아 있습니다. 신이 어찌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아뢰겠습니까? 황희는 옛 공로가 있고, 심온은 종실(宗室)과 관련된 사람이니, 폐기(廢棄)하면 불가하지만 추기(樞機)에 쓴다면 진실로 불가합니다.ꡓ 조말생이 돌아와 아뢰니, 임금이 말하였다. ꡒ뒤에 마땅히 친히 진산(晉山)을 보고 다시 말하겠다.ꡓ/ 【영인본】 2 책 124 면/ 【분류】 *정론(政論) / *인물(人物)/ [註 3865]통동(通同) : 공모.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7월 8일 정유 1번째 기사/ 생활이 어려운 조신언에게 쌀․콩 각각 5석을 주고, 관직 제수를 의논하다/ 조신언(趙愼言)에게 쌀․콩 각각 5석을 주었다. 임금이 좌우에 이르기를, ꡒ조박(趙璞)의 아들 조신언(趙愼言)의 처는 회안군(懷安君)의 딸이다. 생활이 몹시 어렵다니, 만일 굶어 죽게 되면 내가 비록 구제하지 않더라도 국가(國家)가 어찌 구제하지 않겠는가? 상왕(上王)이 아들[繼嗣]이 없는데 불로(佛老)를 상왕이 아들이라고 하지도 않고, 아들이 아니라고 하지도 않으니, 조박이 상왕의 신하가 되어서 어찌 아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어미가 조박의 일가인 것뿐이다. 상왕이 나를 봉(封)하여 세자를 삼은 뒤에 불로(佛老)가 중[僧]이 되어, 이미 천년(天年)3901) 을 마치었으니, 조박(趙璞)의 자손을 금고(禁錮)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각각 뜻을 말하라.ꡓ하니, 이원(李原)․황희(黃喜) 등이 대답하기를, ꡒ조박이 천명(天命)이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상왕이 아들이라고 하지 않는데 조박이 먼저 아들이라고 하였으니, 그릅니다.ꡓ하였다. 임금이, ꡒ조박이 먼저 아들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니라고 고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다. 이와 같은 일은 내가 음덕(陰德)을 베풀겠다.ꡓ하고, 날이 저물자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하기를, ꡒ조신언(趙愼言)이 살기가 어려우니 쌀․콩 각각 5석을 주라.ꡓ하고, 조금 뒤에 또, ꡒ경들이 조박(趙璞)․조신언이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을 나도 또한 안다. 내가 조신언을 보아서가 아니라, 질녀(姪女)를 보아서이다. 그 아비의 과전(科田)을 도로 받게 하고, 돈녕부(敦寧府) 관원이 되게 하여 녹을 받아서 살게 하고자 한다.ꡓ하고, 이어서 조말생(趙末生)을 성석린(成石璘)․하윤(河崙)․유정현(柳廷顯)의 집에 보내고, 홍여방(洪汝方)을 남재(南在)․박은(朴?)의 집에 보내어 그 가부를 의논하였다. 성석린은, ꡒ조신언은 회안군(懷安君)의 죄뿐만 아니라 아비 조박(趙璞)의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니, 감히 제수(除授)하는 것으로 아뢸 수 없습니다.ꡓ하였고, 하윤과 유정현도 또한 불가하다 하였고, 하윤은, ꡒ조박의 죄가 종사에 누(累)가 되니, 조신언이 그 머리를 보전한 것으로 족합니다. 어찌 진신(縉紳)3902) 조사(朝士)의 사이에 낄 수 있겠습니까? 회안군(懷安君)의 죄가 저와 같으니, 성상은 우애하는 마음으로 비록 그 사위[壻]에게 벼슬을 주시더라도 신의 마음은 법대로 처치하고자 합니다.ꡓ하였고, 남재는 홀로 가하다 하였다. 이날에 그 말을 갖추 아뢰니, 임금이 말하였다. ꡒ여러 사람들이 모두 불가하다 하니, 어떻게 제수할 수 있겠는가?ꡓ/ 【영인본】 2 책 127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사법(司法) / *농업-전제(田制)/ [註 3901]천년(天年) : 타고난 수명(壽命). ☞ / [註 3902]진신(縉紳) : 고위(高位) 고관(高官).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7월 8일 정유 3번째 기사/ 문소전․선원전․건원릉․제릉의 사시 대향제를 회복하다/ 문소전(文昭殿)․선원전(璿源殿)․건원릉(健元陵)․제릉(齊陵)의 사시 대향제(四時大享祭)를 회복하였다. 임금이. ꡒ사시 대향을 종묘에만 행하는 것이 불가하니, 건원릉․문소전․선원전․제릉에도 행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ꡓ하니, 하윤(河崙)이, ꡒ정법(正法)으로는 종묘(宗廟)에만 제사하는 것이 가합니다. 만일 두루 행하고자 하면, 차라리 후(厚)한 데에 잃는 것이 낫고, 또한 큰 잘못도 아닙니다. 종묘에는 제사가 5실(室)에 그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상복(喪服)이 제도가 다르니, 이것이 곧 친친(親親)의 강쇄(降殺)3903) 입니다.ꡓ하였다. 드디어 다시 행하라고 명하였다./ 【영인본】 2 책 127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註 3903]강쇄(降殺) : 등급에 있어서 아래로 낮춤.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8월 2일 신유 2번째 기사/ 문과․무과의 별시를 시행하게 하다/ 예조(禮曹)․병조(兵曹)에 명하여 문과(文科)․무과(武科)를 별시(別試)3934) 하였다. 임금이, ꡒ지난 여름에 가뭄을 근심하였으니, 많은 사람이 함께 기뻐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 장차 경복궁(景福宮)에 거둥하여 문과․무과를 시험하겠다.ꡓ하고, 이어서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하윤(河崙)에게 고하니, 하윤이, ꡒ명년이 식년(式年)3935) 이고, 또 외방(外方) 사람이 시기에 맞추어 오지 못하면 실망할 것이니, 청컨대, 새 사람을 시험하지 말고 중시과(重試科)3936) 를 베푸소서.ꡓ하였다...(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8월 6일 을축 1번째 기사/ 하윤과 의정부․육조에 명하여, 각도의 공물에 관한 규정을 만들다/ 하윤(河崙)과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에 명하여, 각도의 공물(貢物)을 상정(詳定)하였다. 호조(戶曹)에서 아뢰었다. ꡒ저포(紵布)․면주(綿紬)․목면(木綿)의 위전(位田)3946) 을 고쳐 상정하였는데, 10승(升) 저포 한 필에는 밭은 2결(結) 50복(卜), 논은 1결 25복이고, 9승 면주, 7승 목면 한 필에는 밭은 3결, 논은 1결 50복입니다. 면주와 목면이 아울러 1천 41필인데, 위전이 2천 2백 93결이고, 논이 2백 93결입니다.ꡓ/ 【영인본】 2 책 131 면/ 【분류】 *재정-공물(貢物) / *농업-전제(田制)/ [註 3946]위전(位田) : 관청의 경비나 제사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설치된 토지. 위토(位土).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8월 15일 갑술 1번째 기사/ 침림하에 경회루에서 문과․무과의 과거 시험을 치르다/ 문과․무과를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친시(親試)하고, 상왕(上王)을 봉영(奉迎)하여 구경하였다.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예조 판서(禮曹判書) 조용(趙庸)․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변계량(卞季良)․지신사(知申事) 조말생(趙末生)․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이적(李迹) 등에게 명하여 문과시(文科試)를 관장하였다. 통훈(通訓) 이하를 모두 부시(赴試)하게 하였으니, 하윤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영인본】 2 책 131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8월 21일 경진 1번째 기사/ 신덕왕후 및 성비가 계모인가 하는 문제를 신하들에게 묻다/ 편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좌우에 이르기를, ꡒ계모(繼母)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ꡓ하니, 유정현(柳廷顯)이 대답하기를, ꡒ어머니가 죽은 뒤에 이를 계승하는 자를 계모라고 합니다.ꡓ하였다. 임금이, ꡒ그렇다면 정릉(貞陵)이 내게 계모가 되는가?ꡓ하니, 대답하기를, ꡒ그때에 신의 왕후(神懿王后)가 승하하지 않았으니, 어찌 계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ꡓ하였다. 임금이, ꡒ정릉(貞陵)이 내게 조금도 은의(恩義)가 없었다. 내가 어머니 집에서 자라났고 장가를 들어서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의가 있겠는가? 다만 부왕(父王)이 애중(愛重) 하시던 의리를 생각하여 기신(忌晨)의 재제(齋祭)를 어머니와 다름 없이 하는 것이다.ꡓ하고, 또 묻기를, ꡒ성비(誠妃)는 내게 계모인가?ꡓ하니, 유정현(柳廷顯) 등이, ꡒ계모입니다.ꡓ하매, 임금이, ꡒ그렇다면 성비가 내 궁(宮)에 오면 중궁(中宮)은 남쪽을 향하고, 성비는 동쪽에 있으니, 그 예가 잘못 되었다.ꡓ하였다. 조말생(趙末生)이 아뢰기를, ꡒ신이 일찍이 하윤(河崙)과 더불어 성비의 일을 의논하였는데, 하윤이 말하기를, ꡐ제후(諸侯)는 두 번 장가 들지 않으니, 예(禮)에 두 적처(嫡妻)가 없다.ꡑ고 하였습니다.ꡓ하니, 임금이, ꡒ이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ꡓ하고, 예조 참판(禮曹參判) 허조(許稠)와 조말생에게 묻기를, ꡒ제후(諸侯)는 재취를 하지 않으므로 예에 두 적처가 없다는 것은, 이것은 적비(嫡妃)의 생시(生時)를 말하는 것인가? 죽은 뒤를 말하는 것인가? 만일 죽은 뒤를 말한다고 하면 이것은 부인(婦人)의 도(道)와 같은 것이다.ꡓ하였다. 허조(許稠)는, ꡒ죽은 뒤에도 또한 재취(再娶)하지 않아야 마땅합니다.ꡓ하고, 조말생은, ꡒ《춘추(春秋)》에 이르기를, ꡐ성자(聲子)3956) 로 계실(繼室)3957) 을 삼았다.ꡑ 하였으니, 신은 적비가 죽은 뒤에는 재취하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ꡓ하니, 임금이 허조에게 말하였다. ꡒ《춘추전(春秋傳)》의 주(註)에 이 일을 자세히 말하였으니, 경은 자세히 보라.ꡓ/ 【영인본】 2 책 132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註 3956]성자(聲子) : 노(魯)나라 은공(隱公)의 생모(生母) 혜공(惠公)의 비첩(婢妾). ☞ / [註 3957]계실(繼室) : 두예(杜預)의 《춘추경전집해(春秋經傳集解)》에 보면, ꡒ원비(元妃)가 죽으면 차비(次妃)가 내사(內事)를 대신하여 다스리지만 오히려 부인(夫人)이라 칭할 수 없는 까닭으로 이를 계실(繼室)이라 이른다.ꡓ하였음.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9월 25일 계축 1번째 기사/ 구종수는 경성군에 귀양보내고, 이오방은 공주 관노에 환속시키다/ 구종수(具宗秀)는 장 1백 대를 때려 경성군(鏡城郡)에 귀양보내고, 이오방(李五方)은 1백 대를 때려 공주(公州) 관노(官奴)에 환속(還屬)시켰다.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서 이원(李原)․황희(黃喜)를 인견하고 구종수의 죄악과 세자의 행실을 교유(敎諭)하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ꡒ구종수의 한 짓이 응견(鷹犬)의 일에 불과할 따름입니다.ꡓ하고, 또 ꡐ세자는 연소(年少)합니다. 세자는 연소합니다.ꡑ하고, 두 번씩이나 말하였다. 하윤(河崙)이 구종수의 일을 듣고, 예궐(詣闕)하니, 임금이 내전(內殿)에서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이 있기 전에 하윤이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ꡒ세자의 직책이 장차 종사(宗社)를 주관할 터인데, 지금 거칠고 음란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어찌하겠습니까? 마땅히 구종수를 베어 후래(後來)를 경계하고, 더욱 방금(防禁)을 더하여 난(亂)의 근원을 근절하소서.ꡓ하니, 임금이 그 말에 감동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ꡒ구종수가 궁성(宮城)을 넘었으니, 죄가 교형(絞刑)에 해당합니다.ꡓ하니, 임금이 정부(政府)․육조(六曹)․대간(臺諫)에 전지하기를, ꡒ이 사람을 또한 삼복(三覆)을 기다린 뒤에 형을 집행할 것인가?ꡓ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안등(安騰)이 아뢰기를, ꡒ옥(獄)의 의심나는 것은 삼복(三覆)3974) 을 기다려야 하지마는, 궁성을 넘어 들어간 것은 죄가 더 큰 것이 없으니, 무엇을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ꡓ하니, 여러 경(卿)들이 모두 안등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금 있다가 대사헌(大司憲) 김여지(金汝知)와 좌사간(左司諫) 박수기(朴竪基) 등이 아뢰기를, ꡒ구종수의 죄는 다시 의논할 것이 없으나, 궁성을 넘어 들어간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그 까닭을 국문한 연후에 죽이소서.ꡓ하였다. 이에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함께 출입한 자를 물었으나, 말이 세자에게 관련되므로 숨기고 다시 캐어 묻지 않았다. 그 어미가 신정(申呈)하여 사형을 용서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누(累)가 세자에게 미친다고 하여 말감(末減)3975) 에 따라 장(杖) 1백 대와 도(徒) 3년에 처하여 경성(鏡城)으로 귀양보내고, 이오방은 장 1백 대를 때려서 본역(本役)에 따라서 역(役)을 정하였다./ 【영인본】 2 책 134 면/ 【분류】 *사법-법제(法制) / *사법-행형(行刑) / *신분(身分) / *왕실-종친(宗親)/ [註 3974]삼복(三覆) : 사죄(死罪)에 해당하는 죄인을 신중히 처결하기 위하여 세 차례나 거듭하여 죄상을 조사하던 법. 사죄 삼복법(死罪三覆法). ☞ / [註 3975]말감(末減) : 죄를 감면하여 주던 것.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10월 2일 경신 2번째 기사/ 동교에 거둥하여 제산릉 고증사 진산 부원군 하윤을 전송하다/ 동교(東郊)에 거둥하여 제산릉 고증사(諸山陵考證使)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을 전송하였다. 처음에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하기를, ꡒ진산(晉山)이 10월 초2일 함길도(咸吉道)에 가는데, 비록 위로하여 잔치하고자 하나, 저 사람이 술을 마시지 못하고, 또 오래 앉는 것을 편안히 하지 못한다. 내가 풍악을 베풀어서 문밖에 전송하고자 하나, 다만 동향 대제(冬享大祭)가 초7일에 있으니, 섭행(攝行)이라고는 하지마는 7일 재계(齋戒)에 혐의가 있을까 의심한다. 성문밖에 전송하는 것이 가하겠는가?ꡓ하니, 조말생(趙末生)이 대답하기를, ꡒ친히 행하면 7일 재계를 하여야 하지마는, 만일 섭행이면 3일 재계를 하는 것이 이미 정한 제도가 있습니다. 또 여러 능(陵)을 위하여 전송하는데 무엇이 해롭겠습니까?ꡓ하매,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선암(鐥巖)에 나가 전송하고, 인하여 안마(鞍馬)․모구(毛?)․모관(毛冠)․임(笠)․화(靴)와 유의(?衣)3978) 1습(襲)을 주고, 종사관(從事官)에게 각각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하윤이 그 첩의 아들을 임금에게 뵈이고 말하기를, ꡒ이 아이의 이름은 하장(河長)이고, 또 그 아우가 있는데 하연(河延)입니다. 청컨대, 전하는 불쌍히 여기소서.ꡓ하였다. 세자가 또한 동교(東郊)에서 전송하였다./ 【영인본】 2 책 135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註 3978]유의(?衣) : 겨울 옷.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10월 21일 기묘 2번째 기사/ 하윤의 병을 묻기 위해 전의 판관 이헌을 정평에 보내다/ 전의 판관(典醫判官) 이헌(李軒)을 정평(定平)에 보냈으니, 하윤(河崙)의 병을 묻기 위해서였다./ 【영인본】 2 책 137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10월 23일 신사 1번째 기사/ 진산 부원군 하윤이 자신의 병세를 알리는 내신을 보내다/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상서하였다. 상서는 이러하였다. ꡒ하윤이 후하게 성은(聖恩)을 입어 길에서 병이 없었으나, 이달 12일에 예원군(預原郡)에 이르러 비로소 턱 위 오른쪽에 종기가 나는 것을 알았습니다. 13일 정평부(定平府)에 이르러 이틀을 머물러서 질침(蛭針) 1백여 매를 쓰고, 16일 함흥부(咸興府)에 이르러 정릉(定陵)․화릉(和陵)을 알현하고 이틀을 머물러서, 또 질침 1백여 매를 쓰고, 19일에 도로 정평(定平)에 이르러 삼가 상은(上恩)을 입어 특별히 내신(內臣)을 보내어 내온(內?)을 주시니, 신이 병중에 지수(祇受)3991) 하고 감격하였습니다. 22일에 또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묻고 구료(救療)하셨습니다. 신이 쇠하고 늙은 가운데에 다행히 사명(使命)을 받았으니, 병 없이 빨리 돌아가서 성려(聖慮)를 번거롭게 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지금 종기의 형세가 점점 넓어지고 아파서 베개에 엎드려 신음하는데 내의(內醫)가 봉교(奉敎)하고 와서 치료하여 주니, 신이 감격하여 목이 메어 말을 다하지 못하겠습니다.ꡓ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 하구(河久)가 가서 아비의 병을 시병(侍病)하기를 청하니, 역마(驛馬)를 주어 보냈다./ 【영인본】 2 책 137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註 3991]지수(祇受) : 임금의 하사(下賜)를 받음.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10월 29일 정해 1번째 기사/ 하윤이 자신의 병세와 치료 상황에 관해 상서하다/ 하윤(河崙)이 또 상서하였다. ꡒ하윤이 운수가 쇠하고 복(福)이 지나쳐서 사명을 받드는 중에 병에 걸렸습니다. 삼가 상은(上恩)을 입어서 특별히 내의(內醫) 이헌(李軒)을 보내시어 와서 치료하여 조금 차도를 얻었는데, 요여(腰輿)로 서행(徐行)하여 돌아가고자 하니, 이헌이 움직여서는 안 되고 반드시 풍한(風寒)을 피하여야 한다고 경계하였습니다. 질침(蛭針)3994) 을 쓴 나머지 피[血]를 인침(人針)3995) 을 써서 빼고자 하니, 이헌은 그런 말을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고 저지하였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건대, 성인(聖人)의 학문은 경(經)과 권(權)이 있으니, 의술(醫術)인들 또한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질침(蛭針)으로 피를 빼는 것은 비록 수백 개에 이르러도 해가 없으니, 인침(人針)으로 피를 빼는 것이 또한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 또 인후(咽喉)의 종기 같은 것은 장차 막히어 기절하게 되면 반드시 인침을 쓰는데도 오히려 해가 없는데, 더구나 인후 밖의 종기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상자(上慈)는 불쌍히 조찰(照察)하시어 늙은 의원 무리들에게 영을 내리어 질침으로 다하지 못한 것을 인침으로 남은 피를 빼는 편부(便否)와 전에 경험이 있고 없음을 집의(集議)하여 적어서 제시하게 하여 여생을 보전하게 하소서.ꡓ 또 상언하기를, ꡒ이달 28일에 신의 자식 하구(河久)가 허가를 받고 병을 물으러 왔으니, 놀라고 기쁜 것을 어찌 측량하겠습니까? 29일에 상은(上恩)을 입어서 또 노의(老醫) 양홍달(楊弘達)을 보내 와서 병을 치료하니, 대개 치료하지 못한 것을 더 치료하게 한 것입니다. 또 신의 자식 하영(河永)을 와서 보게 하니, 상은을 입은 감격의 정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생각건대, 내의(內醫) 두 사람이 계속하여 왔으니 감히 아울러 머무르지 못하겠고, 또 이헌이 온 지가 이미 7일이 지났고, 그 치료 증험하는 방법을 신이 데리고 온 방민(方敏)과 함길도(咸吉道) 교유(敎諭) 한보지(韓補之)가 대강 전하여 배웠으니, 자식 하구와 함께 돌려보냅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건대, 신이 쇠하고 병든 가운데에 상은(上恩)이 조첩(稠疊)함을 입어서 겨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상자(上慈)는 불쌍히 여겨 조찰(照察)하소서.ꡓ/ 【영인본】 2 책 137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의약-의학(醫學) / *인물(人物)/ [註 3994]질침(蛭針) : 침(針)의 하나. ☞ / [註 3995]인침(人針) : 침(針)의 하나. ☞(www.history.go.kr 2007)
하윤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11월 6일 계사 2번째 기사/ 진산 부원군 하윤의 졸기/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정평(定平)에서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이르니, 임금히 심히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고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3998) 하고 쌀․콩 각각 50석과 종이 2백 권을 치부(致賻)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 정인지(鄭麟趾)를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ꡒ원로(元老) 대신은 인군의 고굉(股肱)이요, 나라의 주석(柱石)이다. 살아서는 휴척(休戚)을 함께 하고, 죽으면 은수(恩數)를 지극히 하는 것은 고금의 바뀌지 않는 전례(典禮)이다. 생각하면 경은 천지가 정기를 뭉치고 산악(山嶽)이 영(靈)을 내리받아, 고명 정대(高明正大)한 학문으로 발하여 화국(華國)의 웅문(雄文)이 되었고, 충신 중후(忠信重厚)한 자질로 미루어 경세(經世)의 큰 모유(謀猷)가 되었다. 일찍 이부(二府)3999) 에 오르고 네 번 상상(上相)이 되었다. 잘 도모하고 능히 결단하여 계책에는 유책(遺策)이 없었고, 사직을 정하고 천명을 도운 것은 공훈(功勳)이 맹부(盟府)에 있다. 한결같은 덕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우리 국가를 보호하고 다스렸는데, 근자에 고사(故事)를 가지고 나이 늙었다 하여 정사를 돌려 보냈다. 그 아량을 아름답게 여기어 억지로 그 청에 따랐다. 거듭 생각건대, 삭북(朔北)은 기업(基業)을 시초한 땅이고 조종(祖宗)의 능침(陵寢)이 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돌아보아 살피려고 하는데, 실로 적합한 사람이 어려웠다. 경의 몸은 비록 쇠하였으나,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하여 먼 길의 근로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스스로 행하고자 하였다. 나도 또한 능침(陵寢)이 중하기 때문에 경(卿)의 한 번 가는 것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외에 나가서 전송한 것이 평생의 영결(永訣)이 될 줄을 어찌 뜻하였겠는가? 슬프다! 사생(死生)의 변(變)은 인도(人道)에 떳떳한 것이다. 경이 그 이치를 잘 아니 또 무엇을 한하겠는가! 다만 철인(哲人)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제부터 이후로 대사(大事)에 임하고 대의(大疑)를 결단하여 성색(聲色)을 움직이지 않고, 국가를 반석의 편안한 데에 둘 사람을 내가 누구를 바라겠는가? 이것은 내가 몹시 애석하여 마지 않는 것이다.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하니, 영혼이 있으면 이 휼전(恤典)을 흠향하라.ꡓ 하윤(河崙)은 진주(晉州) 사람인데, 순흥 부사(順興府使) 하윤린(河允麟)의 아들이었다. 지정(至正) 을사년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좌주(座主) 이인복(李仁復)이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기어 그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신해년에 지영주(知榮州)가 되었는데, 안렴사(按廉使) 김주(金湊)가 그 치행(治行)을 제일로 올리니, 소환되어 고공 좌랑(考功佐郞)에 제수되어 여러 벼슬을 거치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무진년에 최영(崔瑩)이 군사를 일으켜 요양(遼陽)을 침범하니, 하윤이 힘써 불가함을 말하였는데, 최영이 노하여 양주(襄州)에 추방하였다.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계유년에 기용하여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가 되었다. 태조가 계룡산(?龍山)에 도읍을 옮기고자 하여 이미 역사를 일으키니, 감히 간하는 자가 없는데, 하윤이 힘써 청하여 파하였다. 갑술년에 다시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병자년에 중국 고황제(高皇帝)가 우리의 표사(表辭)가 공근(恭謹)하지 못하다고 하여 우리 나라에서 문장을 쓴 사람 정도전(鄭道傳)을 불러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태조가 비밀히 보낼지 안보낼지를 정신(廷臣)들에게 물으니, 모두 서로 돌아보고 쳐다보면서 반드시 보낼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하윤이 홀로 보내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니, 정도전이 원망하였다. 태조가 하윤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서 상주(上奏)하여 자세히 밝히니, 일이 과연 풀렸다. 그때에 정도전이 남은(南誾)과 꾀를 합하여 유얼(幼?)을 끼고 여러 적자(嫡子)를 해하려 하여 화(禍)가 불측(不測)하게 되었으므로, 하윤이 일찍이 임금의 잠저(潛邸)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물었다. 하윤이 말하기를, ꡒ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써서 이 무리를 쳐 없애는 것뿐입니다.ꡓ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윤이 다시, ꡒ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上位)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찌하겠습니까?ꡓ하였다. 무인년 8월에 변이 일어났는데, 그때에 하윤은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있었다. 빨리 말을 달려 서울에 이르러 사람으로 하여금 선언(宣言)하고 군사를 끌고와 도와서 따르도록 하였다. 상왕(上王)이 위(位)를 잇자 하윤에게 정당 문학(政堂文學)을 제수하고 정사공(定社功)을 녹훈(錄勳)하여 1등으로 삼고, 작(爵)을 진산군(晉山君)이라 주었다. 경진년 5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가 되고, 9월에 우정승(右政丞)이 되매 작을 승진하여 백(伯)으로 삼았다. 11월에 임금이 즉위하자 좌명공(佐命功)을 녹훈하여 1등으로 삼았다. 신사년 윤3월(閏三月)에 사면하였다가 임오년 10월에 다시 좌정승(左政丞)으로 제수되어 영락 황제(永樂皇帝)의 등극(登極)한 것을 들어가 하례하는데, 하윤이 명(明)나라에 이르러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ꡒ새 천자가 이미 천하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였으니, 청컨대, 우리 왕의 작명(爵命)을 고쳐 주소서.ꡓ하니, 황제가 아름답게 여기어 계미년 4월에 명나라 사신 고득(高得) 등과 함께 고명(誥命)․인장(印章)을 받들고 왔다. 임금이 더욱 중하게 여기어 특별히 전구(田口)를 주었다. 갑신년 6월에 가뭄으로 사면하기를 빌고, 을유년 정월에 다시 복직하였다가 정해년 7월에 또 가뭄으로 사피하기를 청하였다. 기축년 겨울에 이무(李茂)가 득죄하자 온 조정이 모두 베기를 청하였는데, 하윤이 홀로 영구(營救)4000) 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하기를, ꡒ하윤이 ꡐ죽일 수 없다.ꡑ고 하니, 이것은 실로 그 마음에서 발한 것이다.ꡓ하였다. 을미년 여름에 이직(李稷)이 그 향리에 안치(安置)되었는데, 하루는 하윤이 예궐(詣闕)하니, 임금이 내전에서 인견하였다. 하윤이 말이 없이 웃으니, 임금이 그 까닭을 물었다. 하윤이 대답하기를, ꡒ이직의 죄가 외방(外方)에 내칠 죄입니까?ꡓ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 임진년 8월에 다시 좌정승이 되고 갑오년 4월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금년 봄에 이르러 나이 70으로 치사(致仕)하기를 비니, 임금이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는데, 하윤이 청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여 부원군(府院君)으로 집에 나갔다. 하윤이 천성적인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복[端委]4001) 차림으로 묘당(廟堂)에 이르러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되도록 대체(大體)를 살리고 아름다운 모책과 비밀의 의논을 계옥(啓沃)한 것이 대단히 많았으나, 물러나와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 몸을 가지고 물건을 접하는 것을 한결같이 성심으로 하여 허위가 없었으며, 종족(宗族)에게 어질게 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실(信實)하게 하였으며, 아래로 동복(?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다. 인재(人材)를 천거하기를 항상 불급(不及)한 듯이 하였으나, 조금만 착한 것이라도 반드시 취하고 그 작은 허물은 덮어 주었다. 집에 거(居)하여서는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잔치하여 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성질이 글을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유유(悠悠)하게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어서 자고 먹는 것도 잊었다. 음양(陰陽)․의술(醫術)․성경(星經)․지리(地理)까지도 모두 지극히 정통하였다. 후생을 권면(勸勉)하여 의리를 상확(商確)함에는 미미(??)하게 권태를 잊었다. 국정(國政)을 맡은 이래로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 사대(事大)하는 사명(辭命)과 문사의 저술이 반드시 윤색(潤色)․인가(印可)를 거친 뒤에야 정하여졌다. 불씨(佛氏)와 노자(老子)를 배척하여 미리 유문(遺文)을 만들어 건사(巾?)4002) 에 두고 자손을 가르치는 것이 섬실(纖悉)하고 주비(周備)하였다. 또 상사(喪事)와 장사(葬事)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고 불사(佛事)를 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하윤이 죽은 뒤에 그 글이 나오니, 그 집에서 그 말과 같이 하였다. 자호(自號)는 호정(浩亭)이요, 자(字)는 대림(大臨)이요,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아들은 하구(河久)와 서자(庶子)가 세 사람인데, 하장(河長)․하연(河延)․하영(河永)이었다. 하윤이 죽자 부인 이씨(李氏)가 애통하여 음식을 먹지 않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임금이 듣고 약주(藥酒)를 하사하고 전지하기를, ꡒ상제(喪制)는 마치지 않을 수 없으니, 비록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제를 마치지 못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부디 술을 마시고 슬픔을 절도 있게 하여 상제를 마치라.ꡓ하였다. 이씨가 사람을 시켜 승정원(承政院)에 나와 상언하기를, ꡒ가옹(家翁)이 왕명을 받들어 외방에서 죽었으니, 원컨대, 시체를 서울 집에 들여와 빈소(殯所)하게 하소서.ꡓ하니, 명하여 예조(禮曹)에 내리어 예전 제도를 상고하여 계문(啓聞)하게 하고, 이어서 전지하기를, ꡒ《예기(禮記)》 증자문편(曾子問篇)에 이러한 의논이 있었다.ꡓ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ꡒ사명을 받들고 죽으면 대부(大夫)․사(士)는 마땅히 집에 돌아와 염(殮)하고 초빈(草殯)하여야 합니다.ꡓ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인본】 2 책 138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註 3998]소선(素膳) : 육류(肉類)가 없는 수라. ☞ / [註 3999]이부(二府) : 의정부(議政府)와 중추원(中樞院). ☞ / [註 4000]영구(營救) : 죄에 빠진 사람을 구원함. ☞ / [註 4001]관복[端委] : 주(周)나라 시대에 관리가 착용하던 현단복(玄端服)과 위모관(委貌冠)을 말하는데, 곧 관리의 관복(冠服)을 뜻함. ☞ / [註 4002]건사(巾?) : 비단을 바른 상자. ☞(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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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