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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15-1:김겸(1393.11.6이후부임)
예천고을원(15-1) : 김겸(1393.11.6 이후 부임-1400.8.4 이전 이임) : 예천향교를 작은하무실에서 백전리 현 위치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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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겸(金謙, 1375-1425)은 1393년(태조 2) 11월 6일 이후에 부임하여 1400년(정종 2) 8월 4일에 이전에 이임한 지보주사(知甫州事, 現 醴泉郡守)이다. 자는 익보(益甫), 호는 만송(晩松), 시호는 평원(平原), 본관은 상산(慶州에서 分籍), 월성군 수(需)의 후손, 정종 왕비 순덕대비의 당질, 1396년(태조 5)에 식년 문과에 진사과 6위로 급제하여 군기시 직장에 제수되어 갑옷을 잘 수송하였다는 공으로 차례를 뛰어넘어 교서감 승에 승진하였고, 그 후 지보주사, 우사간대부, 형조 전서(1402), 개성 유후(1405), 한성부 윤에 승진하였다.
우군 총제(1406), 해풍도 감사, 공안부 윤을 거쳐 중군 총제(1408)로서 봉명사신이 되어 명 나라에 사은사로 북경에 갔고, 첨지의정부사, 전주 윤, 개성 유후, 경상도 도관찰출척사(1422), 지돈령 부사(1423), 경기도 감사, 중국 황제 성조가 죽으매 진향사가 되어 향을 드렸고, 돌아와서 유후 재임 중 개성에서 죽었다. 향년 51세였다.
김겸은 자질과 성품이 너그럽고 부드럽고, 근신하고 중후하여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영예가 있었다. 김겸이 대호군으로 있을 때인 1407년(태종 7) 6월 21일 궁중에서 기우제를 행하였는데, 이 때 김겸이 왕에게 아뢰기를, “제가 전에 보주(예천)고을 원으로 있을 때 소동파의 시에 대한 해석 중에 비를 비는 법이 실려 있으므로 제가 그 법에 따라 시험해서 과연 비를 얻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왕이 이 말을 듣고, 이날 김겸을 관연루 아래에서 제사를 지낼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김겸이 예천고을 원으로 있을 때 예천향교를 예천읍 대심리 작은하무실에서 백전리 261-4번지 현 위치로 옮겼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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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겸(金謙) : 1393년(태조 2) 11월 6일 이후에 부임하여 1400년(정종 2) 8월 4일 이전에 이임한 지보주사(現 醴泉郡守)이다. 예천향교(醴泉鄕校)를 예천읍 대심리 작은하무실에서 백전리 261-4번지 현 위치로 옮겼다. 1375(우왕 1)-1425(세종 7), 자는 익보(益甫), 호는 만송(晩松), 시호는 평후(平厚), 본관은 경주, 월성군 수(月城君需)의 아들, 정종 왕비 순덕대비(順德大妃, 定安王后)의 당질(堂侄)이다. 1396년(태조 5)에 식년 문과에 진사과 6위로 급제하여 군기 직장(軍器直長)에 제수되고, 1398년(태조 7) 가을에 직숙 군기시(直宿軍器寺)가 되어 갑주(甲冑)를 잘 수송하였다는 공으로 차례를 뛰어넘어 봉훈 교서감 승(奉訓校書監丞)에 승진하였고, 벼슬을 여러 번 옮겨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에 이르렀고, 1402년(태종 2)에 차례를 뛰어넘어 형조 전서에 임명되었으며, 1405년(태종 5) 여름에 개성 부유후(開城副留後), 한성부 윤(漢城府尹)에 승진하였다. 1406년(태종 6)에는 동지우군총제(同知右軍摠制), 겨울에는 해풍도 감사(海豊道監司), 1407년(태종 7) 겨울에 공안부 윤(恭安府尹), 1408년(태종 8)에 중군 총제(中軍摠制)로서 봉명사신(奉命使臣)이 되어 명(明) 나라에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갔고, 겨울에는 다시 한성부 윤, 1413년(태종 13) 겨울에 중국 조정에 들어가 진하(進賀)하였으며 1414년(태종 14)에 돌아와 복명하고, 첨지의정부사, 1418년(태종 18) 겨울에 자헌대부에 승진, 나가서 전주 윤(全州尹)이 되었으며, 1420년(세종 2) 봄에는 또 개성 유후에 제배되고, 1422년(세종 4) 12월에 경상도 도관찰출척사(慶尙道都觀察黜陟使)가 되어 1423년(세종 5) 12월까지 재임하였다. 1423년(세종 5) 겨울 지돈령 부사(知敦寧府事), 경기도 감사, 1425년(세종 7) 여름에 중국 황제 성조(成祖)가 죽으매 봉명사신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향을 진헌하였고, 돌아와서 유후로 재임 중 개성에서 죽었다. 향년 51세였다. 사람됨이 자질과 성품이 너그럽고 부드럽고, 근신하고 중후(重厚)하여 이르는 곳마다 성예(聲譽)가 있었다. 사위 윤사(尹思, 居서울, 字子能, 本漆原)는 1447년(세종 29) 식년 생원시에 3등 81위로 합격하였다.
김겸(金謙) : 1375(우왕 1)-1425(세종 7), 조선 태종 때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 자는 익보(益甫), 호는 만송(晩松), 시호(諡號)는 평원(平原), 본관은 상산(商山, 慶州에서 分積), 수(需)의 13세손, 정신(鼎臣)의 장자, 정종왕비 (定宗王妃)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당질(堂姪), 윤사(尹思, 字子能, 生員)의 장인이다. 1396년(태조 5)에 진사시에 합격, 동년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고 군기시 직장(軍器寺直長), 교서감 승(校書監丞), 1402년(태종 2) 형조 전서(刑曹典書)를 거쳐 개성부 유후(開城府留後), 한성 부윤(漢城府尹), 공안 부윤(恭安府尹)이 되었다가, 중군 총제(中軍摠制) 때 명(明) 나라에 사은사(謝恩使, 1408)로 다녀와서 다시 한성 부윤(漢城府尹)이 되고, 1418년(태종 18)에 지보주사(知甫州事)로서 예천향교(醴泉鄕校)를 예천읍 대심리 작은하무실에서 백전리 261-4번지 현 위치로 옮겼다. 1420년(세종 2)에 개성 유후(開城留侯), 1422년(세종 4) 12월에 경상도 도관찰출척사(慶尙道都觀察黜陟使, 1422.12)로 부임하여 1923년(세종 5) 12월까지 재임하였다.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1423), 그리고 경기도 관찰사(觀察使) 등을 역임하고, 1425년(세종 7) 명 나라 성조(成祖)가 죽자 진향사(進香使)로 또 명 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개성 유후(開城留侯)가 되어 재임 중 타계했다.(慶尙道先生案, 司馬榜目)
[太祖實錄] : 1407년(태종 7) 6월 21일 궁중에서 열린 석척 기우(祈雨) 때, 순금사 대호군(巡禁司大護軍)으로서 왕에게 아뢰기를, "전에 보주 수령으로 있을 때 소동파의 시를 보니, ''''독 가운데 석척이 참으로 우습다''''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그 주(註)에 비를 비는 법이 갖추 실려 있으므로 제가 그 법에 따라 시험해서 과연 비를 얻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곧 관연루 아래에서 시험할 것을 왕이 명령하였다. 동년 8월 26일 제1차의 왕자의 난 때, 정안군(後 太宗)의 명에 따라 군기 직장으로서 무기고를 열고 갑옷과 창을 내어 화통군(火통軍) 100여 명에게 주었다.
[太宗實錄] : 1401년(태종 1) 5월 8일에 경연(經筵)에서 시독관 간의(侍讀官諫議)로서 왕과 정사(政事)를 논의하였다. 1402년(태종 2) 11월 29일에는 형조 전서(刑曹典書)로서 왕명에 의해 박만(朴蔓) 등을 국문하였고, 동년 12월 27일에는 병조 전서(兵曹典書)로 옮겼다. 1407년(태종 7) 6월 21일 궁중에서 열린 석척 기우(祈雨) 때, 순금사대호군(巡禁司大護軍)으로서 관연루 아래에서 왕명에 의해 기우제를 지냈다. 1408년(태종 8) 4월 20일에는 공안부 윤(恭安府尹)으로서 명 나라 서울로 가서 사은(謝恩)하였고, 1413년(태종 13) 10월 17일에는 한성부 윤으로서 정조사(正朝使)로 명 나라 서울에 갔다. 그 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1414.4.3)가 되었다.
[世宗實錄] : 전주부 윤(全州府尹, 1418.11.4)이 되었고, 인덕궁 상(仁德宮喪)이 있자 전주부윤 겸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 1419.10.7)가 되었다. 1419년(세종 1) 12월 27일에는 돈체사(頓遞使)로서 대행 상왕의 재궁(梓宮)을 발인하였고, 좌군총제(左軍摠制, 1420.1.7)가 되었다. 개성 유후(開城留後) 때는 약왕원(藥王院) 앞 들판에서 두 임금을 뵈었고(1420.2.3), 개성 정능동(靖陵洞)에서 왕을 내알(1420.2.18)하였다. 자헌대부(資獻大夫)로 승품(1420.3.16)되었고, 우군 도총제(1421.12.7), 평안도 도관찰사(1422.12.13), 경상도 도관찰사(1422.12.19)가 되었고, 1422년(세종 4) 12월 25일에는 왕을 배사(拜辭)하여, 약품(藥品)을 하사받았다. 지돈녕 부사(1423.12.11)를 거쳐, 경기도 감사 때는 왕이 종묘(宗廟)에 강무(講武)를 행하자 알현(1424.9.27)하였고, 왕이 동교(東郊)에서 머물 때 겹옷 한 벌을 하사(1424.10.5)받았고, 왕께 건의하여 경기도에 내년 공물을 면제 또는 반감하여 민생을 구휼(1424.11.20)케 하기도 하였다. 1425년(세종 7) 7월 5일에는 제용감 제조(濟用監提調)로서 왕에게 참최복(斬衰服)을 바쳤고, 동년 7월 16일에는 진향사 지돈녕(進香使知敦寧)으로 북경으로 가서 이듬해 10월 27일에 돌아왔다. 유후사 유후(留後司留後, 1425.10.24)로 임명되었다.
김겸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110_0270/ 여지도서 / 慶尙道 / 醴泉 / 名宦 / 高麗 趙云?本朝全伯英 金謙 安省 李惠 嘗知甫州有詩名 李伯謙 尹起? 金仁民 鄭從韶舊增朴漢柱 政擧治平吏畏民服 新增兪? 有峴山?淚碑(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比安 / 題詠 / 官居今冷落 金謙詩云云古瓦綠苔封 四山松翠近?楹 李永肩詩云云階下寒塘徹底淸 雙溪合抱玉灣回 徐居正詩云公館依然島嶼開馬渡翠橋鼇背過鳥飛蒼壁盡中來 新增 觀察使 金慕齋安國詩膠庠設敎更無他賢聖千言意不多小學功夫休間斷要須切琢又磋磨○觀察使 柳西崖成龍詩山有扶蘇濕有龍美人相憶倚高墉寥雲?黑迷歸雁落日蒼?下遠松老去都無浮世戀談來尙露舊時鋒還慙按節虛宣化薄俗寧論比屋封○金三淵昌翕詩牛刀游刃有恢張運筏靑?水路長象取雷天宏棟宇處宜??妙軒房 朝廷牌閣尊千歲營府牙旗納五方過客欲?張老頌已聞新燕語雕樑右客舍題詠/ <하권0705-2>/ 金三淵昌翕詩南遊萬勝倦投揚又爲屛山借龍光午峀排張華嶽??川包絡洛江長?亭水烏窺官席潘滌風花赴客觴但使二難頻此會不愁剪敗到松篁右屛山亭題詠(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5월 8일 병신 2번째 기사/ 경연에서 정사를 논의하다. 편전에서의 사관 입시 문제가 거론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동지사(同知事) 이첨(李詹)이 《대학연의(大學衍義)》의 탕지반명장(湯之盤銘章)을 진강(進講)하고, 참찬관(參贊官) 승지(承旨) 박신(朴信)․시강관(侍講官) 조용(趙庸)․시독관(侍讀官) 간의(諫議) 김겸(金謙)․사농 경(司農卿) 김과(金科) 등이 참여하여 서로 논난(論難)하였는데, 임금의 강론이 매우 정(精)하였다. 강(講)이 파(罷)하매 주찬(酒饌)을 베풀었다. 사관 민인생(閔麟生)이 아뢰기를, ꡒ지금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강론(講論)하심이 매우 정(精)하고, 온화한 말씀이 친밀하시니, 원컨대 전하께서 비록 편전(便殿)에 앉아 정사를 들으실 때라도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입시(入侍)하여 아름다운 말[嘉言]을 기록하게 하소서.ꡓ하니, 임금이 김겸에게 일러 다시 사관(史官)의 말을 들어보라 하였다. 이첨․박신․조용․김과가 모두 아뢰기를, ꡒ경연에 입시하는 것은 가하지마는, 어찌하여 정사를 듣는 때에 들어오려고 합니까? 신 등도 역시 전조(前朝) 신씨(辛氏)의 사관이었는데, 두렵고 위축되어 감히 뵙지 못하였습니다.ꡓ하였다. 인생이 아뢰기를, ꡒ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은 것입니다. 어찌 감히 전조(前朝)로써 오늘에 비교할 수 있습니까?ꡓ하고, 김겸이 아뢰기를, ꡒ신이 본사(本司)와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다시 아뢰겠습니다.ꡓ하였다./ 【영인본】 1 책 204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역사-편사(編史) / *역사-전사(前史)(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402 임오 / 명 건문(建文) 4년) 11월 29일 무신 1번째 기사/ 도순문사 박만․도진무 박문숭 등을 순위부에 가두고, 국문케 하다/ 박만(朴蔓)․박문숭(朴文崇)․허형(許衡)․박관(朴貫)․황길지(黃吉至)를 순위부(巡衛府)에 가두고,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에 명하여 잡치(雜治)하게 하였다. 만(蔓)은 도순문사(都巡問使)이고, 문숭(文崇)은 도진무(都鎭撫)이고, 형(衡)은 경력(經歷)이고, 관(貫)은 정주 목사(定州牧使)이고, 길지(吉至)는 지의주사(知宜州事)인데, 이때에 와서 예궐(詣闕)하였으므로 술을 내려 주었다. 대사헌(大司憲) 박신(朴信)․좌사간(左司諫) 조용(趙庸)․형조 전서(刑曹典書) 김겸(金謙)에게 명하여 순위부에 교좌(交坐)하여 국문(鞫問)하게 하고,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을 시켜 명령하였다. ꡒ박만․허형 등은 싸우지 않을 때에 도망하여 왔으니, 어찌 죄가 있겠는가? 형장(刑杖)을 가하지 말라. 박관은 일찍이 체임(遞任)되었는데도 오지 않고, 안변(安邊)에 이르러 지체하여 있었다. 또 영흥 소윤(永興少尹) 김권(金?)과 더불어 일을 꾀하고도 그 연고를 바른대로 말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형문(刑問)을 가하라.ꡓ/ 【영인본】 1 책 252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변란(變亂)(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402 임오 / 명 건문(建文) 4년) 12월 20일 기사 2번째 기사/ 우사간 권담이 박만에게 가벼운 죄를 적용한 위관 조영무 등을 논핵하다/ 우사간(右司諫) 권담(權湛) 등이 위관(委官) 조영무(趙英茂)․순위부 만호(巡衛府萬戶) 최유경(崔有慶)․윤저(尹?), 대사헌(大司憲) 박신(朴信)․형조 전서(刑曹典書) 김겸(金謙)․좌사간(左司諫) 조용(趙庸)을 논핵(論劾)하였으니, 경(輕)한 율(律)을 적용하여 박만(朴蔓)을 장류(杖流)에 처하였기 때문이었다./ 【영인본】 1 책 253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변란(變亂)(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402 임오 / 명 건문(建文) 4년) 12월 27일 병자 1번째 기사/ 우정승 이무 등을 중군 도총제 등으로 겸직을 제수하다/ 우정승 이무(李茂)․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조영무(趙英茂)로 모두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겸하게 하고,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영안군(寧安君) 양우(良祐)․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이저(李佇)로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를 겸하게 하고,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이거이(李居易)․완천군(完川君) 이숙(李淑)․사평부 좌사(司平府左使) 이빈(李彬)으로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를 겸하게 하고, 김겸(金謙)으로 병조 전서(兵曹典書)를, 조용(趙庸)으로 형조 전서(刑曹典書)를 삼았다./ 【영인본】 1 책 254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1407 정해 / 명 영락(永樂) 5년) 6월 21일 계묘 2번째 기사/ 궁중에서 시험삼아 석척 기우를 행하다. 행사 모습을 소개/ 궁중(宮中)에서 석척 기우(??祈雨)998) 를 행하였다. 순금사 대호군(巡禁司大護軍) 김겸(金謙)이 말하기를, ꡒ전에 보주(甫州) 수령(守令)으로 있을 때 소동파(蘇東坡)의 시(詩)를 보니, ꡐ독 가운데 석척이 참으로 우습다.ꡑ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그 주(註)에 비를 비는 법이 갖추 실려 있으므로, 겸(謙)이 그 법에 따라 시험해서 과연 비를 얻었습니다.ꡓ하였는데, 임금이 이 말을 듣고, 이날 김겸(金謙)을 불러 물어보고 곧 광연루 아래에서 시험할 것을 명하였다. 그 법은 뜰에다 물을 가득 넣은 두 개의 독[甕]을 놓고, 석척(??)을 잡아다 독 가운데 넣고 자리[席]을 베풀고 분향(焚香)하며, 남자 아이 20인을 시켜 푸른옷을 입고 버들가지[柳枝]를 가지고 빌기를, ꡒ석척(??)아! 석척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며 비를 주룩주룩 오게 하면 너를 놓아 보내겠다.ꡓ고 하는 것이었다. 이틀 동안이나 빌었으나 비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동자(童子)들을 놓아 보내고 각각 쌀 1석씩을 주었다./ 【영인본】 1 책 399 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註 998]석척 기우(??祈雨) : 도마뱀[??]이 용(龍)과 비슷하다 하여 이를 잡아 병에 넣고 기우(祈雨)하는 것. ☞(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 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4월 20일 무술 1번째 기사/ 파평군 윤곤과 공안부 윤 김겸을 사은사로 경사에 보내다/ 파평군(坡平君) 윤곤(尹坤)․공안부 윤(恭安府尹) 김겸(金謙)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으니, 사은(謝恩)하기 위함이었다./ 【영인본】 1 책 437 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1409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5월 6일 정축 2번째 기사/ 사신 윤봉이 모친의 장사에 후하게 부의하고 그 형제들을 벼슬시키다/ 봉어(奉御) 윤봉(尹鳳)이 돌아갔다. 윤봉은 풍해도(?海道) 서흥현(瑞興縣) 사람인데, 어미가 죽어 해[年]가 지나도록 장사하지 못하였으므로, 윤봉이 먼저 가서 그 어미를 장사지내고 돌아오고자 하니,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모화루(慕華樓)에서 전송하고, 한성 윤(漢城尹) 김겸(金謙)으로 반송사(伴送使)를 삼고, 풍해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그 어미를 후하게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윤봉이 그 여러 형제들에게 벼슬을 주도록 청하니, 모두 서반(西班)의 사직(司直)․사정(司正)을 제수하고, 각각 전 자급(資給)에서 한 급(給)을 더하였는데, 모두 10여 인이었다./ 【영인본】 1 책 488 면/ 【분류】 *외교-명(明)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 1412 임진 / 명 영락(永樂) 10년) 10월 23일 을해 3번째 기사/ 박만․임순례를 외방에 자원 안치하고 자손을 영원히 서용치 말게 하다/ 명하여 박만(朴蔓)․임순례(任純禮)를 외방에 자원 안치(自願安置)2310) 하고, 자손은 영구히 서용(敍用)하지 말도록 하니, 대간이 여러 번 청하기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명(命)이 있었다. 대간에서 또 상소(上疏)하였다. ꡒ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최유경(崔有慶)이 순군 만호(巡軍萬戶)가 되고,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신(朴信), 전 한성 윤(前漢城尹) 김겸(金謙), 판공주목사(判公州牧事) 권담(權湛) 등이 대간이 되었을 때, 형조에서 박만의 사죄(死罪)를 천조군마율(擅調軍馬律)2311) 로 논하였으니, 몽롱하게 신문(申聞)한 죄를 다스리소서.ꡓ명하여 거론(擧論)하지 말게 하였다./ 【영인본】 1 책 652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정론-간쟁(諫諍) / *변란(變亂)/ [註 2310]자원 안치(自願安置) : 죄인을 적소(謫所)에서 풀어 자기가 원하는 곳에 안치(安置)하던 제도. ☞ / [註 2311]천조군마율(擅調軍馬律) : 군마를 함부로 조발한 형률. ☞(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1413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10월 17일 계해 1번째 기사/ 신정을 하례하고자 형조 판서 최용소․한성부 윤 김겸을 명나라에 보내다/ 형조 판서 최용소(崔龍蘇)․한성부 윤 김겸(金謙)을 보내어, 경사(京師)2753) 에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하게 하였다./ 【영인본】 1 책 691 면/ 【분류】 *외교-명(明)/ [註 2753]경사(京師) : 명나라 서울. ☞(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1414 갑오 / 명 영락(永樂) 12년) 4월 3일 병오 2번째 기사/ 김구덕을 한성부 윤으로 김겸을 참지의정부사로 임명하다/ 김구덕(金九德)을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삼고, 김겸(金謙)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삼았다./ 【영인본】 2 책 10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2권/ 세종 즉위년( 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11월 4일 경술 3번째 기사/ 노귀산․하자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노귀산(盧龜山)으로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를 삼고, 하자종(河自宗)과 탁신(卓愼)으로 공안부 윤(恭安府尹)을 삼고, 강회중(姜淮仲)과 한옹(韓雍)으로 인수부 윤(仁壽府尹)을 삼고, 홍여방(洪汝方)으로 예조 참판을 삼고, 성엄(成?)으로 형조 참판을 삼고, 김익정(金益精)으로 좌대언(左代言)을 삼고, 이수(李隨)로 우대언(右代言)을 삼고, 윤회(尹淮)로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삼고, 최사강(崔士康)으로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삼고, 유영(柳穎)으로 동부대언(同副代言)을 삼고, 이유(李愉)로 함길도 도관찰사(都觀察使)를 삼고, 김겸(金謙)으로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삼고, 정상(鄭尙)으로 판충주목사(判忠州牧事)를 삼았다. 하자종은 하연의 아버지이다./ 【영인본】 2 책 27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5권/ 세종 1년( 1419 기해 / 명 영락(永樂) 17년) 10월 7일 무인 2번째 기사/ 전주 부윤 김겸이 멋대로 관직을 떠나 분상하다. 그를 국장 도감 제조로 삼다/ 전주 부윤 김겸(金謙)이 제멋대로 관직을 떠나 인덕궁(仁德宮) 상(喪)에 분상(奔喪)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ꡒ예(禮)인즉 그릇되나, 의(義)인즉 옳다.ꡓ고 하고, 국장 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를 하라고 명하였다./ 【영인본】 2 책 340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1419 기해 / 명 영락(永樂) 17년) 12월 27일 정유 2번째 기사/ 대행 상왕의 재궁이 발인하다/ 대행 상왕의 재궁이 발인하게 되는데, 상왕이 흰 옷과 검정 띠[帶]의 차림으로 인덕궁에 나아가 견전(遣奠)을 올리고 봉사하기를 의식에 따라 하였다.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청천 부원군(靑川府院君) 정탁(鄭擢)․예조 참판 김자지(金自知) 등에게 명하여 재궁을 모시어 가게 하고, 또 돈체사(頓遞使) 김겸(金謙)과 총호사(摠護使) 정진(鄭津)․예장 도감 제조(禮葬都監提調) 최이(崔?) 등에게 명하기를, ꡒ재궁이 임진(臨津)을 건널 때에 각별히 노력하라.ꡓ하였다. 백관들이 모화루(慕華樓)에서 노제(路祭)를 베풀고, 공신들도 또한 노제를 준비하였었으며, 각사에 한 명씩 재궁을 받들고 능소에까지 갔다./ 【영인본】 2 책 360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1월 3일 임인 4번째 기사/ 순효 대왕의 지문과 애책문/ 순효 대왕(順孝大王)을 후릉(厚陵)에 장사하였다. 지문(誌文)에 말하기를, ꡒ영락 17년 세차 기해년 가을 9월 26일 무진에 온인 공용 순효 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이 돌아가시매 성덕 신공(聖德神功) 상왕 전하 및 주상 전하께서 애통함이 지극히 간절하여 상을 입음에 예를 극진히 하고, 임금이 군신을 거느려 존호(尊號)를 받들어 올리었다. 그 이듬해 경자년 정월 초3일 임인에 예로써 송경(松京) 해풍군(海?郡) 안정 왕후(安定王后)의 능에 합장하니, 이것은 유명(遺命)에 의한 것이다. 대왕은 우리 태조 강헌 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온인 공근(溫仁恭謹)하며, 용맹과 지략이 범인에 뛰어났다. 고려에 벼슬하여 여러 번 승진하여 장상(將相)에 이르렀다. 일찍이 태조를 따라 출정(出征)하여 공을 세웠다. 경오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예산(禮山)에서 왜적을 잡아 승리를 거두었다. 임신년 가을 7월에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영안군(永安君)에 책봉되었고,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가 편치 못하였을 때, 권신(權臣)이 음모를 꾸며 난리를 꾸미고자 하거늘, 우리 상왕이 기미를 밝게 보아 그를 죽여 버리고 태조께 청하여, 대왕을 세자(世子)로 책봉하였다. 9월 정축일에 태조의 내선(內禪)을 받아 임금이 되었다가, 경진년 봄 3월에 위를 이을 아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 상왕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그 해 가을에 몸이 편하지 못하여 우리 상왕에게 왕위를 전하니, 상왕이 인문 공예(仁文恭睿)라는 존호를 올리었다. 상왕은 애경(愛敬)으로 효도를 다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대왕의 춘추는 63세요, 왕위에 있은 지 3년이고, 한가히 있어 몸을 조리하기는 20년이었으니, 이것이 평생 애(哀)․영(榮)의 대략이다. 비(妃)는 김씨이니, 증 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이다. 성품이 투기(妬忌)하지 않고 모시는 비첩에까지도 예로써 대우하였으므로, 우리 상왕이 순덕(順德) 왕대비라는 존호를 올렸다. 후에 정안 왕후(定安王后)로 추증(追贈)하였다. 아들은 없고, 궁첩에 아들이 15인이고, 딸이 10인이 있다. 이원생(李元生)은 의평군(義平君)에 봉하였고, 다음은 이무생(李茂生)이요, 다음은 어리니, 지씨(池氏)가 낳았다. 이군생(李群生)은 순평군(順平君)에 봉하였고, 다음은 이의생(李義生)이요, 다음 셋은 모두 어리다. 딸은 전주 부윤(全州府尹) 김겸(金謙)의 아들 김세민(金世敏)에게 출가하였으니, 숙신 옹주(淑愼翁主)로 봉하였고, 다음은 모두 어리니, 기씨(奇氏)가 낳았다. 그 나머지 남녀는 다 어리다. 의평은 금주 감무(衿州監務) 최치숭(崔致崇)의 딸에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으니, 모두 어리다. 순평은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설존(薛存)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영락 18년 경자 정월 일 삼가 기록한다.ꡓ라고 하였다. 애책문(哀冊文)에는 말하기를, ꡒ영락 17년 세차 기해 9월 계묘 삭(朔) 26일 무진에 인문 공예 상왕이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다. 인덕궁(仁德宮)을 빈소(殯所)로 하고, 시호를 온인 공용 순효 대왕이라고 올렸다. 이듬해 경자년 정월 경자 삭 초3일 임인에 이르러 후릉(厚陵)에 장사하였으니, 예(禮)로써 하였다. 빈전(殯殿)에 새벽이 되어 영이(靈?)가 떠나려 할 때, 달은 명정(銘旌)에 비치고, 슬픈 바람은 상엿줄[縞?]에 불도다. 사왕(嗣王) 신(臣) 아무는 삼가 발인 전[祖儀]을 받들어 잠깐 시간을 늦추자니, 신선의 거동을 더위잡기 어려우니 섭섭하고, 임금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이에 글하는 신하[詞臣]를 명하여 성실하신 덕을 찬송하옵니다. 그 글에 말하기를, ꡐ아아, 성하신 태조 일찍이 큰 업을 창조하였도다. 우리 선후(先后)에 미쳐서 밝게 계승하였도다. 효우(孝友)는 천성[因心]이요, 학문도 돈독하였도다. 세자[潛邸]로 있을 때에도 도움이 넓고 많았도다. 저 왜적을 굴복시키니, 백성이 창을 버리었도다. 영성(盈成)함을 성하게 응하여 은혜가 동식물에 미치도다. 중병으로 인하여 정사를 보실 수 없게 되매, 덕있는 이에게 위를 사양하고 일찍 나랏일에서 떠났도다. 오직 상성(上聖)이 명을 받아 왕위에 나아갔도다. 거의 20년 동안에 다스린 도가 화흡[熙洽]하도다. 문명(文明)에 이르러 역수[歷服]를 계승하였도다. 진실로 오늘에 이르게 됨이 모두 열어 준 것이도다. 오직 덕의 빛남이며 공의 빛남이도다. 유유히 즐기고 수양하여 백년을 향수하리라 하였더니, 어찌하여 하루 저녁에 길이 떠나시었나이까. 아아, 슬프다. 신의(宸?)를 보니 있는 듯하더니, 궁검(弓劍)을 남기시니 어찌하여 따라가리요. 이성(二聖)을 뵈오려고 생각하시었음이나, 신하들의 감상은 많도다. 아아, 슬프다. 저 많고 많은 사람들은 모두 죽으면 없어지는도다. 오직 신성(神聖)이 끼친 공열은 천지와 같이 민멸(泯滅)하지 않으리라. 아아, 슬프도다.ꡑ고 하였습니다.ꡓ하였다./ 【영인본】 2 책 361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 / *외교-왜(倭)(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1월 7일 병오 1번째 기사/ 김점․허지․김자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점을 호조 판서로, 허지를 형조 판서로, 김자지를 대사헌으로, 신상을 이조 참판으로, 하연을 예조 참판으로, 김겸(金謙)을 좌군 총제(左軍摠制)로, 최운(崔雲)을 우군 총제(右軍摠制)로, 곽존중(郭存中)을 겸 지병조사(兼知兵曹事)로 삼았다./ 【영인본】 2 책 36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2월 3일 신축 2번째 기사/ 두 임금이 신경 등지에서 사냥을 구경하고 약왕원 앞 들판에 머무르다/ 두 임금이 신경(新京) 등지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낮참에 약왕원(藥王院) 앞 들판에서 머물렀는데, 개성 유후(開城留後) 김겸(金謙)이 와서 뵈었다./ 【영인본】 2 책 373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2월 18일 병진 1번째 기사/ 이숙묘․원순 등이 하직하니 물품을 하사하다/ 이숙묘․원순 등이 하직하니, 상왕이 각각 옷 한 벌씩을 주고, 임금이 위로 하기를, ꡒ경 등은 일을 처리함에 매우 주밀하여, 상왕을 모시고 무사히 군사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었다.ꡓ하고, 각기 옷 한 벌씩을 내려 주었다. 낮참에 개성(開城) 정릉동(靖陵洞)에 머물렀는데, 조치․김겸 등이 와서 내알하였다. 저녁에 황교(黃橋)에서 머물렀다./ 【영인본】 2 책 374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3월 16일 갑신 2번째 기사/ 공안부를 인녕부에 통합하고, 이발․황녹․조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공안부(恭安府)390) 를 폐지하여 인녕부에 통합하고, 소윤(少尹)을 더 두었다. 이발(李潑)로 대사헌을 삼고, 황녹(黃祿)․조치(曹致)를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조비형(曹備衡)을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로, 이숙묘를 동지총제에, 최사강(崔士康)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신개(申槪)를 경상도 관찰사에, 조계생(曹啓生)을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하고, 김겸(金謙)․박영(朴齡)은 자헌(資獻)으로 올려 주고, 황보인(黃甫仁)을 좌헌납(左獻納)에, 김효정(金孝貞)을 우헌납(右獻納)에, 허척(許倜)을 사헌부 지평에, 권시(權?)를 좌정언(左正言), 조극관(趙克寬)을 우정언(右正言)에 임명하였다./ 【영인본】 2 책 376 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註 390]공안부(恭安府) : 관청 이름. 태종이 정종 2년에 양위 받은 뒤에, 정종의 생활을 위하여 세운 것이고, 인녕부(仁寧府)는 정종의 왕후를 위하여 세운 것임. ☞(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14권/ 세종 3년( 1421 신축 / 명 영락(永樂) 19년) 12월 7일 병신 2번째 기사/ 박은으로 하여금 금천 부원군을 삼고, 이원을 좌의정, 정탁을 우의정에 제수하다/ 박은으로 하여금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을 삼고, 이원(李原)으로 좌의정을 삼고, 정탁(鄭擢)으로 우의정을 삼고, 이종무로 장천 부원군(長川府院君)을 삼고, 조연으로 한평 부원군(漢平府院君)을 삼고, 조견(朝?)으로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을 삼고, 한검(韓?)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치사(致仕)하게 하고, 맹사성(孟思誠)으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삼고, 박자청으로 판우군 도총제부사를 삼고, 허지로 이조 판서를 삼고, 이발(李潑)로 형조 판서를 삼고, 이담(李湛)으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삼고, 김겸(金謙)과 조비형(曹備衡)으로 우군 도총제를 삼고, 오승(吳陞)으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삼고, 우홍강(禹洪康)으로 유후사 유후(留後司留後)를 삼고, 안수산(安壽山)으로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삼고, 성엄으로 호조 참판을 삼고, 서선(徐選)으로 형조 참판을 삼고, 성억(成抑)으로 인수부 윤(仁壽府尹)을 삼고, 문효종(文孝宗)으로 좌군 총제를 삼고, 이수(李隨)와 이종선(李種善)으로 좌군 동지총제를 삼고, 문귀(文貴)와 조정(趙定)으로 우군 동지총제를 삼고, 탁신(卓愼)으로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삼고, 최관(崔關)으로 이조 참의를 삼고, 허해(許?)로 호조 참의를 삼고, 이점(李漸)으로 공조 참의를 삼고, 심도원(沈道源)으로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를 삼고, 신정리(申丁理)로 사헌부 장령을 삼고, 신계삼(辛繼參)으로 사헌부 지평을 삼고, 최흥효(崔興孝)로 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을 삼고, 최부(崔府)․최사강(崔士康)․유장(柳暲)으로 경기․경상․황해도의 도관찰사를 삼고, 윤득홍(尹得洪)으로 경기 수군 도안무 처치사를 삼고, 유현(兪顯)으로 판남양도회부사(判南陽都會府事)를 삼았다. 이보다 먼저 박은이 병이 위중하니, 두 임금께서 김익정(金益精)을 보내어 이원에게 묻기를, ꡒ좌의정이 병이 위중하니, 누가 이를 대신 할 만한가.ꡓ라고 하니, 이원이 찬성 조연을 천거하였다. 태상왕이 이르기를, ꡒ의정(議政)은 그대와 더불어 옳다 그르다 하여 서로 도우는데, 조연의 사람된 품은, 종일토록 모시고 앉아 있으면서 한 마디 말도 옳다 그르다 하는 일이 없다. 청성 부원군 정탁은 공신이며, 또 들어서 아는 것이 많으니, 박은을 대신할 만하다.ꡓ라고 하였다. 김익정이 대답하기를, ꡒ정탁은 재리(財利)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 재상의 직책에는 마땅하지 못합니다.ꡓ하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ꡒ정탁은 공이 높고, 나이가 많으니, 이 임무에 있으면 어찌 근신(勤愼)하지 않겠는가.ꡓ라고 하면서, 마침내 정탁을 재상으로 임용하였다. 박자청은 미천한 신분에서 일어나 오로지 영선(營繕)을 감독한 일로써, 벼슬이 1품까지 이르렀다. 윤득홍은 수군에서 발탁되어, 수전(水戰)에 익숙하여 여러 번 해구(海寇)를 물리쳤으므로, 갑자기 승진하여 이에 이르렀다./ 【영인본】 2 책 46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외교-왜(倭) / *건설-건축(建築) / *건설-토목(土木)(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12월 13일 병신 1번째 기사/ 이순몽․정진․오승․정초 등을 제수하다/ 이순몽(李順蒙)으로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삼고, 정진(鄭津)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오승(吳陞)을 개성부 유후(開城府留後)로, 정초(鄭招)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하연(河演)을 병조 참판으로, 황상(黃象)을 공조 참판으로, 조완(趙琬)을 우군 총제(右軍摠制)로, 조후(趙侯)를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로, 이천(李?)을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유장(柳璋)을 경창부 윤(慶昌府尹)으로, 최관(崔關)을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최부(崔府)를 인수부 윤(仁壽府尹)으로, 조서로(趙瑞老)를 승정원 지신사(承政院知申事)로, 조종생(趙從生)을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김자(金?)를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 성억(成抑)을 전라도 도관찰사로, 신개(申槪)를 황해도 도관찰사로, 이맹균(李孟畇)을 경기도 도관찰사로, 황자후(黃子厚)를 충청도 도관찰사로, 김겸(金謙)을 평안도 도관찰사로, 심보(沈寶)를 충청도 도절제사로, 송희미(宋希美)를 전라도 수군 도안무 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로, 배소(裵素)를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으로 삼았다./ 【영인본】 2 책 51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12월 19일 임인 2번째 기사/ 성달생․김겸․최사강․오식․심도원․박관 등을 제수하다/ 성달생(成達生)으로 평안도 도관찰사를 삼고, 김겸(金謙)을 경상도 도관찰사로, 최사강(崔士康)을 중군 동지총제로, 오식(吳湜)을 좌군 총제(左軍摠制)로, 심도원(沈道源)을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로, 박관(朴冠)을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로 삼았다./ 【영인본】 2 책 51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12월 25일 무신 2번째 기사/ 성달생 등이 배사하니 약품을 하사하다/ 성달생(成達生)․황자후(黃子厚)․김겸(金謙)이 임금에게 배사(拜辭)하니, 약품(藥品)을 내려 주었다./ 【영인본】 2 책 51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왕실-사급(賜給)(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22권/ 세종 5년( 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12월 11일 무오 2번째 기사/ 이지․김겸․안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지(李枝)로 영돈녕부사를 삼고, 김겸(金謙)으로 지돈녕부사를 삼고, 안순(安純)으로 의정부 참찬을 삼고, 신개(申槪)로 형조 참판을 삼고, 이지강(李之剛)으로 호조 판서를 삼고, 이맹균(李孟畇)으로 동지총제를 삼고, 이명덕(李明德)으로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삼고, 이만간(李萬幹)으로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을 삼았다./ 【영인본】 2 책 56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25권/ 세종 6년( 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9월 27일 기해 1번째 기사/ 종묘에 강무 행하는 것을 고하고 거가가 떠나다/ 강무(講武)를 행할 것을 고(告)하는 제사를 종묘에 지내고, 이날 거가(車駕)가 떠나서 양주(楊州) 녹양평(綠楊平)에서 낮참으로 머물렀는데, 경기 감사 김겸(金謙)과 경력 배환(裵桓)과 양주 부사 이승직(李繩直)이 조복을 갖추고 맞아서 알현하고, 감사가 술 50병을 올렸으므로, 시위하는 신하들과 장군 절제사(掌軍節制使)에게 나누어 하사하였는데, 미천한 자에게까지 몫이 돌아갔다. 여러 도에서 강무할 때의 진상(進上)은 정지시키라고 명하니, 지신사 곽존중이 아뢰기를, ꡒ각도의 진상이 이미 왔으므로 정지시키지 못하옵니다.ꡓ하였다. 저녁에 풍천(楓川)에 머무르니, 경상도 감사 이숙묘(李叔畝)․전라도 감사 이발(李潑)․충청도 감사 김익정(金益精)․병마 절제사 조정(趙定)․함길도 감사 정초(鄭招)․도절제사 하경복(河敬復)․황해도 감사 성엄(成?)이 사람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고, 김겸(金謙)도 또한 방물을 바치었다. 대언사(代言司)에 명하여 각도에서 진상할 말[馬]에게 소용되는 제구(諸具)는 거가를 따르는 대소 신료(臣僚)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영인본】 2 책 625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재정-진상(進上)(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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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겸(金謙, 1375-1425)은 1393년(태조 2) 11월 6일 이후에 부임하여 1400년(정종 2) 8월 4일에 이전에 이임한 지보주사(知甫州事, 現 醴泉郡守)이다. 자는 익보(益甫), 호는 만송(晩松), 시호는 평원(平原), 본관은 상산(慶州에서 分籍), 월성군 수(需)의 후손, 정종 왕비 순덕대비의 당질, 1396년(태조 5)에 식년 문과에 진사과 6위로 급제하여 군기시 직장에 제수되어 갑옷을 잘 수송하였다는 공으로 차례를 뛰어넘어 교서감 승에 승진하였고, 그 후 지보주사, 우사간대부, 형조 전서(1402), 개성 유후(1405), 한성부 윤에 승진하였다.
우군 총제(1406), 해풍도 감사, 공안부 윤을 거쳐 중군 총제(1408)로서 봉명사신이 되어 명 나라에 사은사로 북경에 갔고, 첨지의정부사, 전주 윤, 개성 유후, 경상도 도관찰출척사(1422), 지돈령 부사(1423), 경기도 감사, 중국 황제 성조가 죽으매 진향사가 되어 향을 드렸고, 돌아와서 유후 재임 중 개성에서 죽었다. 향년 51세였다.
김겸은 자질과 성품이 너그럽고 부드럽고, 근신하고 중후하여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영예가 있었다. 김겸이 대호군으로 있을 때인 1407년(태종 7) 6월 21일 궁중에서 기우제를 행하였는데, 이 때 김겸이 왕에게 아뢰기를, “제가 전에 보주(예천)고을 원으로 있을 때 소동파의 시에 대한 해석 중에 비를 비는 법이 실려 있으므로 제가 그 법에 따라 시험해서 과연 비를 얻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왕이 이 말을 듣고, 이날 김겸을 관연루 아래에서 제사를 지낼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김겸이 예천고을 원으로 있을 때 예천향교를 예천읍 대심리 작은하무실에서 백전리 261-4번지 현 위치로 옮겼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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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겸(金謙) : 1393년(태조 2) 11월 6일 이후에 부임하여 1400년(정종 2) 8월 4일 이전에 이임한 지보주사(現 醴泉郡守)이다. 예천향교(醴泉鄕校)를 예천읍 대심리 작은하무실에서 백전리 261-4번지 현 위치로 옮겼다. 1375(우왕 1)-1425(세종 7), 자는 익보(益甫), 호는 만송(晩松), 시호는 평후(平厚), 본관은 경주, 월성군 수(月城君需)의 아들, 정종 왕비 순덕대비(順德大妃, 定安王后)의 당질(堂侄)이다. 1396년(태조 5)에 식년 문과에 진사과 6위로 급제하여 군기 직장(軍器直長)에 제수되고, 1398년(태조 7) 가을에 직숙 군기시(直宿軍器寺)가 되어 갑주(甲冑)를 잘 수송하였다는 공으로 차례를 뛰어넘어 봉훈 교서감 승(奉訓校書監丞)에 승진하였고, 벼슬을 여러 번 옮겨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에 이르렀고, 1402년(태종 2)에 차례를 뛰어넘어 형조 전서에 임명되었으며, 1405년(태종 5) 여름에 개성 부유후(開城副留後), 한성부 윤(漢城府尹)에 승진하였다. 1406년(태종 6)에는 동지우군총제(同知右軍摠制), 겨울에는 해풍도 감사(海豊道監司), 1407년(태종 7) 겨울에 공안부 윤(恭安府尹), 1408년(태종 8)에 중군 총제(中軍摠制)로서 봉명사신(奉命使臣)이 되어 명(明) 나라에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갔고, 겨울에는 다시 한성부 윤, 1413년(태종 13) 겨울에 중국 조정에 들어가 진하(進賀)하였으며 1414년(태종 14)에 돌아와 복명하고, 첨지의정부사, 1418년(태종 18) 겨울에 자헌대부에 승진, 나가서 전주 윤(全州尹)이 되었으며, 1420년(세종 2) 봄에는 또 개성 유후에 제배되고, 1422년(세종 4) 12월에 경상도 도관찰출척사(慶尙道都觀察黜陟使)가 되어 1423년(세종 5) 12월까지 재임하였다. 1423년(세종 5) 겨울 지돈령 부사(知敦寧府事), 경기도 감사, 1425년(세종 7) 여름에 중국 황제 성조(成祖)가 죽으매 봉명사신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향을 진헌하였고, 돌아와서 유후로 재임 중 개성에서 죽었다. 향년 51세였다. 사람됨이 자질과 성품이 너그럽고 부드럽고, 근신하고 중후(重厚)하여 이르는 곳마다 성예(聲譽)가 있었다. 사위 윤사(尹思, 居서울, 字子能, 本漆原)는 1447년(세종 29) 식년 생원시에 3등 81위로 합격하였다.
김겸(金謙) : 1375(우왕 1)-1425(세종 7), 조선 태종 때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 자는 익보(益甫), 호는 만송(晩松), 시호(諡號)는 평원(平原), 본관은 상산(商山, 慶州에서 分積), 수(需)의 13세손, 정신(鼎臣)의 장자, 정종왕비 (定宗王妃)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당질(堂姪), 윤사(尹思, 字子能, 生員)의 장인이다. 1396년(태조 5)에 진사시에 합격, 동년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고 군기시 직장(軍器寺直長), 교서감 승(校書監丞), 1402년(태종 2) 형조 전서(刑曹典書)를 거쳐 개성부 유후(開城府留後), 한성 부윤(漢城府尹), 공안 부윤(恭安府尹)이 되었다가, 중군 총제(中軍摠制) 때 명(明) 나라에 사은사(謝恩使, 1408)로 다녀와서 다시 한성 부윤(漢城府尹)이 되고, 1418년(태종 18)에 지보주사(知甫州事)로서 예천향교(醴泉鄕校)를 예천읍 대심리 작은하무실에서 백전리 261-4번지 현 위치로 옮겼다. 1420년(세종 2)에 개성 유후(開城留侯), 1422년(세종 4) 12월에 경상도 도관찰출척사(慶尙道都觀察黜陟使, 1422.12)로 부임하여 1923년(세종 5) 12월까지 재임하였다.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1423), 그리고 경기도 관찰사(觀察使) 등을 역임하고, 1425년(세종 7) 명 나라 성조(成祖)가 죽자 진향사(進香使)로 또 명 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개성 유후(開城留侯)가 되어 재임 중 타계했다.(慶尙道先生案, 司馬榜目)
[太祖實錄] : 1407년(태종 7) 6월 21일 궁중에서 열린 석척 기우(祈雨) 때, 순금사 대호군(巡禁司大護軍)으로서 왕에게 아뢰기를, "전에 보주 수령으로 있을 때 소동파의 시를 보니, ''''독 가운데 석척이 참으로 우습다''''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그 주(註)에 비를 비는 법이 갖추 실려 있으므로 제가 그 법에 따라 시험해서 과연 비를 얻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곧 관연루 아래에서 시험할 것을 왕이 명령하였다. 동년 8월 26일 제1차의 왕자의 난 때, 정안군(後 太宗)의 명에 따라 군기 직장으로서 무기고를 열고 갑옷과 창을 내어 화통군(火통軍) 100여 명에게 주었다.
[太宗實錄] : 1401년(태종 1) 5월 8일에 경연(經筵)에서 시독관 간의(侍讀官諫議)로서 왕과 정사(政事)를 논의하였다. 1402년(태종 2) 11월 29일에는 형조 전서(刑曹典書)로서 왕명에 의해 박만(朴蔓) 등을 국문하였고, 동년 12월 27일에는 병조 전서(兵曹典書)로 옮겼다. 1407년(태종 7) 6월 21일 궁중에서 열린 석척 기우(祈雨) 때, 순금사대호군(巡禁司大護軍)으로서 관연루 아래에서 왕명에 의해 기우제를 지냈다. 1408년(태종 8) 4월 20일에는 공안부 윤(恭安府尹)으로서 명 나라 서울로 가서 사은(謝恩)하였고, 1413년(태종 13) 10월 17일에는 한성부 윤으로서 정조사(正朝使)로 명 나라 서울에 갔다. 그 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1414.4.3)가 되었다.
[世宗實錄] : 전주부 윤(全州府尹, 1418.11.4)이 되었고, 인덕궁 상(仁德宮喪)이 있자 전주부윤 겸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 1419.10.7)가 되었다. 1419년(세종 1) 12월 27일에는 돈체사(頓遞使)로서 대행 상왕의 재궁(梓宮)을 발인하였고, 좌군총제(左軍摠制, 1420.1.7)가 되었다. 개성 유후(開城留後) 때는 약왕원(藥王院) 앞 들판에서 두 임금을 뵈었고(1420.2.3), 개성 정능동(靖陵洞)에서 왕을 내알(1420.2.18)하였다. 자헌대부(資獻大夫)로 승품(1420.3.16)되었고, 우군 도총제(1421.12.7), 평안도 도관찰사(1422.12.13), 경상도 도관찰사(1422.12.19)가 되었고, 1422년(세종 4) 12월 25일에는 왕을 배사(拜辭)하여, 약품(藥品)을 하사받았다. 지돈녕 부사(1423.12.11)를 거쳐, 경기도 감사 때는 왕이 종묘(宗廟)에 강무(講武)를 행하자 알현(1424.9.27)하였고, 왕이 동교(東郊)에서 머물 때 겹옷 한 벌을 하사(1424.10.5)받았고, 왕께 건의하여 경기도에 내년 공물을 면제 또는 반감하여 민생을 구휼(1424.11.20)케 하기도 하였다. 1425년(세종 7) 7월 5일에는 제용감 제조(濟用監提調)로서 왕에게 참최복(斬衰服)을 바쳤고, 동년 7월 16일에는 진향사 지돈녕(進香使知敦寧)으로 북경으로 가서 이듬해 10월 27일에 돌아왔다. 유후사 유후(留後司留後, 1425.10.24)로 임명되었다.
김겸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110_0270/ 여지도서 / 慶尙道 / 醴泉 / 名宦 / 高麗 趙云?本朝全伯英 金謙 安省 李惠 嘗知甫州有詩名 李伯謙 尹起? 金仁民 鄭從韶舊增朴漢柱 政擧治平吏畏民服 新增兪? 有峴山?淚碑(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比安 / 題詠 / 官居今冷落 金謙詩云云古瓦綠苔封 四山松翠近?楹 李永肩詩云云階下寒塘徹底淸 雙溪合抱玉灣回 徐居正詩云公館依然島嶼開馬渡翠橋鼇背過鳥飛蒼壁盡中來 新增 觀察使 金慕齋安國詩膠庠設敎更無他賢聖千言意不多小學功夫休間斷要須切琢又磋磨○觀察使 柳西崖成龍詩山有扶蘇濕有龍美人相憶倚高墉寥雲?黑迷歸雁落日蒼?下遠松老去都無浮世戀談來尙露舊時鋒還慙按節虛宣化薄俗寧論比屋封○金三淵昌翕詩牛刀游刃有恢張運筏靑?水路長象取雷天宏棟宇處宜??妙軒房 朝廷牌閣尊千歲營府牙旗納五方過客欲?張老頌已聞新燕語雕樑右客舍題詠/ <하권0705-2>/ 金三淵昌翕詩南遊萬勝倦投揚又爲屛山借龍光午峀排張華嶽??川包絡洛江長?亭水烏窺官席潘滌風花赴客觴但使二難頻此會不愁剪敗到松篁右屛山亭題詠(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5월 8일 병신 2번째 기사/ 경연에서 정사를 논의하다. 편전에서의 사관 입시 문제가 거론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동지사(同知事) 이첨(李詹)이 《대학연의(大學衍義)》의 탕지반명장(湯之盤銘章)을 진강(進講)하고, 참찬관(參贊官) 승지(承旨) 박신(朴信)․시강관(侍講官) 조용(趙庸)․시독관(侍讀官) 간의(諫議) 김겸(金謙)․사농 경(司農卿) 김과(金科) 등이 참여하여 서로 논난(論難)하였는데, 임금의 강론이 매우 정(精)하였다. 강(講)이 파(罷)하매 주찬(酒饌)을 베풀었다. 사관 민인생(閔麟生)이 아뢰기를, ꡒ지금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강론(講論)하심이 매우 정(精)하고, 온화한 말씀이 친밀하시니, 원컨대 전하께서 비록 편전(便殿)에 앉아 정사를 들으실 때라도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입시(入侍)하여 아름다운 말[嘉言]을 기록하게 하소서.ꡓ하니, 임금이 김겸에게 일러 다시 사관(史官)의 말을 들어보라 하였다. 이첨․박신․조용․김과가 모두 아뢰기를, ꡒ경연에 입시하는 것은 가하지마는, 어찌하여 정사를 듣는 때에 들어오려고 합니까? 신 등도 역시 전조(前朝) 신씨(辛氏)의 사관이었는데, 두렵고 위축되어 감히 뵙지 못하였습니다.ꡓ하였다. 인생이 아뢰기를, ꡒ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은 것입니다. 어찌 감히 전조(前朝)로써 오늘에 비교할 수 있습니까?ꡓ하고, 김겸이 아뢰기를, ꡒ신이 본사(本司)와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다시 아뢰겠습니다.ꡓ하였다./ 【영인본】 1 책 204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역사-편사(編史) / *역사-전사(前史)(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402 임오 / 명 건문(建文) 4년) 11월 29일 무신 1번째 기사/ 도순문사 박만․도진무 박문숭 등을 순위부에 가두고, 국문케 하다/ 박만(朴蔓)․박문숭(朴文崇)․허형(許衡)․박관(朴貫)․황길지(黃吉至)를 순위부(巡衛府)에 가두고,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에 명하여 잡치(雜治)하게 하였다. 만(蔓)은 도순문사(都巡問使)이고, 문숭(文崇)은 도진무(都鎭撫)이고, 형(衡)은 경력(經歷)이고, 관(貫)은 정주 목사(定州牧使)이고, 길지(吉至)는 지의주사(知宜州事)인데, 이때에 와서 예궐(詣闕)하였으므로 술을 내려 주었다. 대사헌(大司憲) 박신(朴信)․좌사간(左司諫) 조용(趙庸)․형조 전서(刑曹典書) 김겸(金謙)에게 명하여 순위부에 교좌(交坐)하여 국문(鞫問)하게 하고,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을 시켜 명령하였다. ꡒ박만․허형 등은 싸우지 않을 때에 도망하여 왔으니, 어찌 죄가 있겠는가? 형장(刑杖)을 가하지 말라. 박관은 일찍이 체임(遞任)되었는데도 오지 않고, 안변(安邊)에 이르러 지체하여 있었다. 또 영흥 소윤(永興少尹) 김권(金?)과 더불어 일을 꾀하고도 그 연고를 바른대로 말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형문(刑問)을 가하라.ꡓ/ 【영인본】 1 책 252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변란(變亂)(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402 임오 / 명 건문(建文) 4년) 12월 20일 기사 2번째 기사/ 우사간 권담이 박만에게 가벼운 죄를 적용한 위관 조영무 등을 논핵하다/ 우사간(右司諫) 권담(權湛) 등이 위관(委官) 조영무(趙英茂)․순위부 만호(巡衛府萬戶) 최유경(崔有慶)․윤저(尹?), 대사헌(大司憲) 박신(朴信)․형조 전서(刑曹典書) 김겸(金謙)․좌사간(左司諫) 조용(趙庸)을 논핵(論劾)하였으니, 경(輕)한 율(律)을 적용하여 박만(朴蔓)을 장류(杖流)에 처하였기 때문이었다./ 【영인본】 1 책 253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변란(變亂)(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402 임오 / 명 건문(建文) 4년) 12월 27일 병자 1번째 기사/ 우정승 이무 등을 중군 도총제 등으로 겸직을 제수하다/ 우정승 이무(李茂)․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조영무(趙英茂)로 모두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겸하게 하고,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영안군(寧安君) 양우(良祐)․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이저(李佇)로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를 겸하게 하고,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이거이(李居易)․완천군(完川君) 이숙(李淑)․사평부 좌사(司平府左使) 이빈(李彬)으로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를 겸하게 하고, 김겸(金謙)으로 병조 전서(兵曹典書)를, 조용(趙庸)으로 형조 전서(刑曹典書)를 삼았다./ 【영인본】 1 책 254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1407 정해 / 명 영락(永樂) 5년) 6월 21일 계묘 2번째 기사/ 궁중에서 시험삼아 석척 기우를 행하다. 행사 모습을 소개/ 궁중(宮中)에서 석척 기우(??祈雨)998) 를 행하였다. 순금사 대호군(巡禁司大護軍) 김겸(金謙)이 말하기를, ꡒ전에 보주(甫州) 수령(守令)으로 있을 때 소동파(蘇東坡)의 시(詩)를 보니, ꡐ독 가운데 석척이 참으로 우습다.ꡑ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그 주(註)에 비를 비는 법이 갖추 실려 있으므로, 겸(謙)이 그 법에 따라 시험해서 과연 비를 얻었습니다.ꡓ하였는데, 임금이 이 말을 듣고, 이날 김겸(金謙)을 불러 물어보고 곧 광연루 아래에서 시험할 것을 명하였다. 그 법은 뜰에다 물을 가득 넣은 두 개의 독[甕]을 놓고, 석척(??)을 잡아다 독 가운데 넣고 자리[席]을 베풀고 분향(焚香)하며, 남자 아이 20인을 시켜 푸른옷을 입고 버들가지[柳枝]를 가지고 빌기를, ꡒ석척(??)아! 석척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며 비를 주룩주룩 오게 하면 너를 놓아 보내겠다.ꡓ고 하는 것이었다. 이틀 동안이나 빌었으나 비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동자(童子)들을 놓아 보내고 각각 쌀 1석씩을 주었다./ 【영인본】 1 책 399 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註 998]석척 기우(??祈雨) : 도마뱀[??]이 용(龍)과 비슷하다 하여 이를 잡아 병에 넣고 기우(祈雨)하는 것. ☞(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 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4월 20일 무술 1번째 기사/ 파평군 윤곤과 공안부 윤 김겸을 사은사로 경사에 보내다/ 파평군(坡平君) 윤곤(尹坤)․공안부 윤(恭安府尹) 김겸(金謙)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으니, 사은(謝恩)하기 위함이었다./ 【영인본】 1 책 437 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1409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5월 6일 정축 2번째 기사/ 사신 윤봉이 모친의 장사에 후하게 부의하고 그 형제들을 벼슬시키다/ 봉어(奉御) 윤봉(尹鳳)이 돌아갔다. 윤봉은 풍해도(?海道) 서흥현(瑞興縣) 사람인데, 어미가 죽어 해[年]가 지나도록 장사하지 못하였으므로, 윤봉이 먼저 가서 그 어미를 장사지내고 돌아오고자 하니,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모화루(慕華樓)에서 전송하고, 한성 윤(漢城尹) 김겸(金謙)으로 반송사(伴送使)를 삼고, 풍해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그 어미를 후하게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윤봉이 그 여러 형제들에게 벼슬을 주도록 청하니, 모두 서반(西班)의 사직(司直)․사정(司正)을 제수하고, 각각 전 자급(資給)에서 한 급(給)을 더하였는데, 모두 10여 인이었다./ 【영인본】 1 책 488 면/ 【분류】 *외교-명(明)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 1412 임진 / 명 영락(永樂) 10년) 10월 23일 을해 3번째 기사/ 박만․임순례를 외방에 자원 안치하고 자손을 영원히 서용치 말게 하다/ 명하여 박만(朴蔓)․임순례(任純禮)를 외방에 자원 안치(自願安置)2310) 하고, 자손은 영구히 서용(敍用)하지 말도록 하니, 대간이 여러 번 청하기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명(命)이 있었다. 대간에서 또 상소(上疏)하였다. ꡒ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최유경(崔有慶)이 순군 만호(巡軍萬戶)가 되고,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신(朴信), 전 한성 윤(前漢城尹) 김겸(金謙), 판공주목사(判公州牧事) 권담(權湛) 등이 대간이 되었을 때, 형조에서 박만의 사죄(死罪)를 천조군마율(擅調軍馬律)2311) 로 논하였으니, 몽롱하게 신문(申聞)한 죄를 다스리소서.ꡓ명하여 거론(擧論)하지 말게 하였다./ 【영인본】 1 책 652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정론-간쟁(諫諍) / *변란(變亂)/ [註 2310]자원 안치(自願安置) : 죄인을 적소(謫所)에서 풀어 자기가 원하는 곳에 안치(安置)하던 제도. ☞ / [註 2311]천조군마율(擅調軍馬律) : 군마를 함부로 조발한 형률. ☞(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1413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10월 17일 계해 1번째 기사/ 신정을 하례하고자 형조 판서 최용소․한성부 윤 김겸을 명나라에 보내다/ 형조 판서 최용소(崔龍蘇)․한성부 윤 김겸(金謙)을 보내어, 경사(京師)2753) 에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하게 하였다./ 【영인본】 1 책 691 면/ 【분류】 *외교-명(明)/ [註 2753]경사(京師) : 명나라 서울. ☞(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1414 갑오 / 명 영락(永樂) 12년) 4월 3일 병오 2번째 기사/ 김구덕을 한성부 윤으로 김겸을 참지의정부사로 임명하다/ 김구덕(金九德)을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삼고, 김겸(金謙)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삼았다./ 【영인본】 2 책 10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2권/ 세종 즉위년( 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11월 4일 경술 3번째 기사/ 노귀산․하자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노귀산(盧龜山)으로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를 삼고, 하자종(河自宗)과 탁신(卓愼)으로 공안부 윤(恭安府尹)을 삼고, 강회중(姜淮仲)과 한옹(韓雍)으로 인수부 윤(仁壽府尹)을 삼고, 홍여방(洪汝方)으로 예조 참판을 삼고, 성엄(成?)으로 형조 참판을 삼고, 김익정(金益精)으로 좌대언(左代言)을 삼고, 이수(李隨)로 우대언(右代言)을 삼고, 윤회(尹淮)로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삼고, 최사강(崔士康)으로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삼고, 유영(柳穎)으로 동부대언(同副代言)을 삼고, 이유(李愉)로 함길도 도관찰사(都觀察使)를 삼고, 김겸(金謙)으로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삼고, 정상(鄭尙)으로 판충주목사(判忠州牧事)를 삼았다. 하자종은 하연의 아버지이다./ 【영인본】 2 책 27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5권/ 세종 1년( 1419 기해 / 명 영락(永樂) 17년) 10월 7일 무인 2번째 기사/ 전주 부윤 김겸이 멋대로 관직을 떠나 분상하다. 그를 국장 도감 제조로 삼다/ 전주 부윤 김겸(金謙)이 제멋대로 관직을 떠나 인덕궁(仁德宮) 상(喪)에 분상(奔喪)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ꡒ예(禮)인즉 그릇되나, 의(義)인즉 옳다.ꡓ고 하고, 국장 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를 하라고 명하였다./ 【영인본】 2 책 340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1419 기해 / 명 영락(永樂) 17년) 12월 27일 정유 2번째 기사/ 대행 상왕의 재궁이 발인하다/ 대행 상왕의 재궁이 발인하게 되는데, 상왕이 흰 옷과 검정 띠[帶]의 차림으로 인덕궁에 나아가 견전(遣奠)을 올리고 봉사하기를 의식에 따라 하였다.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청천 부원군(靑川府院君) 정탁(鄭擢)․예조 참판 김자지(金自知) 등에게 명하여 재궁을 모시어 가게 하고, 또 돈체사(頓遞使) 김겸(金謙)과 총호사(摠護使) 정진(鄭津)․예장 도감 제조(禮葬都監提調) 최이(崔?) 등에게 명하기를, ꡒ재궁이 임진(臨津)을 건널 때에 각별히 노력하라.ꡓ하였다. 백관들이 모화루(慕華樓)에서 노제(路祭)를 베풀고, 공신들도 또한 노제를 준비하였었으며, 각사에 한 명씩 재궁을 받들고 능소에까지 갔다./ 【영인본】 2 책 360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1월 3일 임인 4번째 기사/ 순효 대왕의 지문과 애책문/ 순효 대왕(順孝大王)을 후릉(厚陵)에 장사하였다. 지문(誌文)에 말하기를, ꡒ영락 17년 세차 기해년 가을 9월 26일 무진에 온인 공용 순효 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이 돌아가시매 성덕 신공(聖德神功) 상왕 전하 및 주상 전하께서 애통함이 지극히 간절하여 상을 입음에 예를 극진히 하고, 임금이 군신을 거느려 존호(尊號)를 받들어 올리었다. 그 이듬해 경자년 정월 초3일 임인에 예로써 송경(松京) 해풍군(海?郡) 안정 왕후(安定王后)의 능에 합장하니, 이것은 유명(遺命)에 의한 것이다. 대왕은 우리 태조 강헌 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온인 공근(溫仁恭謹)하며, 용맹과 지략이 범인에 뛰어났다. 고려에 벼슬하여 여러 번 승진하여 장상(將相)에 이르렀다. 일찍이 태조를 따라 출정(出征)하여 공을 세웠다. 경오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예산(禮山)에서 왜적을 잡아 승리를 거두었다. 임신년 가을 7월에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영안군(永安君)에 책봉되었고,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가 편치 못하였을 때, 권신(權臣)이 음모를 꾸며 난리를 꾸미고자 하거늘, 우리 상왕이 기미를 밝게 보아 그를 죽여 버리고 태조께 청하여, 대왕을 세자(世子)로 책봉하였다. 9월 정축일에 태조의 내선(內禪)을 받아 임금이 되었다가, 경진년 봄 3월에 위를 이을 아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 상왕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그 해 가을에 몸이 편하지 못하여 우리 상왕에게 왕위를 전하니, 상왕이 인문 공예(仁文恭睿)라는 존호를 올리었다. 상왕은 애경(愛敬)으로 효도를 다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대왕의 춘추는 63세요, 왕위에 있은 지 3년이고, 한가히 있어 몸을 조리하기는 20년이었으니, 이것이 평생 애(哀)․영(榮)의 대략이다. 비(妃)는 김씨이니, 증 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이다. 성품이 투기(妬忌)하지 않고 모시는 비첩에까지도 예로써 대우하였으므로, 우리 상왕이 순덕(順德) 왕대비라는 존호를 올렸다. 후에 정안 왕후(定安王后)로 추증(追贈)하였다. 아들은 없고, 궁첩에 아들이 15인이고, 딸이 10인이 있다. 이원생(李元生)은 의평군(義平君)에 봉하였고, 다음은 이무생(李茂生)이요, 다음은 어리니, 지씨(池氏)가 낳았다. 이군생(李群生)은 순평군(順平君)에 봉하였고, 다음은 이의생(李義生)이요, 다음 셋은 모두 어리다. 딸은 전주 부윤(全州府尹) 김겸(金謙)의 아들 김세민(金世敏)에게 출가하였으니, 숙신 옹주(淑愼翁主)로 봉하였고, 다음은 모두 어리니, 기씨(奇氏)가 낳았다. 그 나머지 남녀는 다 어리다. 의평은 금주 감무(衿州監務) 최치숭(崔致崇)의 딸에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으니, 모두 어리다. 순평은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설존(薛存)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영락 18년 경자 정월 일 삼가 기록한다.ꡓ라고 하였다. 애책문(哀冊文)에는 말하기를, ꡒ영락 17년 세차 기해 9월 계묘 삭(朔) 26일 무진에 인문 공예 상왕이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다. 인덕궁(仁德宮)을 빈소(殯所)로 하고, 시호를 온인 공용 순효 대왕이라고 올렸다. 이듬해 경자년 정월 경자 삭 초3일 임인에 이르러 후릉(厚陵)에 장사하였으니, 예(禮)로써 하였다. 빈전(殯殿)에 새벽이 되어 영이(靈?)가 떠나려 할 때, 달은 명정(銘旌)에 비치고, 슬픈 바람은 상엿줄[縞?]에 불도다. 사왕(嗣王) 신(臣) 아무는 삼가 발인 전[祖儀]을 받들어 잠깐 시간을 늦추자니, 신선의 거동을 더위잡기 어려우니 섭섭하고, 임금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이에 글하는 신하[詞臣]를 명하여 성실하신 덕을 찬송하옵니다. 그 글에 말하기를, ꡐ아아, 성하신 태조 일찍이 큰 업을 창조하였도다. 우리 선후(先后)에 미쳐서 밝게 계승하였도다. 효우(孝友)는 천성[因心]이요, 학문도 돈독하였도다. 세자[潛邸]로 있을 때에도 도움이 넓고 많았도다. 저 왜적을 굴복시키니, 백성이 창을 버리었도다. 영성(盈成)함을 성하게 응하여 은혜가 동식물에 미치도다. 중병으로 인하여 정사를 보실 수 없게 되매, 덕있는 이에게 위를 사양하고 일찍 나랏일에서 떠났도다. 오직 상성(上聖)이 명을 받아 왕위에 나아갔도다. 거의 20년 동안에 다스린 도가 화흡[熙洽]하도다. 문명(文明)에 이르러 역수[歷服]를 계승하였도다. 진실로 오늘에 이르게 됨이 모두 열어 준 것이도다. 오직 덕의 빛남이며 공의 빛남이도다. 유유히 즐기고 수양하여 백년을 향수하리라 하였더니, 어찌하여 하루 저녁에 길이 떠나시었나이까. 아아, 슬프다. 신의(宸?)를 보니 있는 듯하더니, 궁검(弓劍)을 남기시니 어찌하여 따라가리요. 이성(二聖)을 뵈오려고 생각하시었음이나, 신하들의 감상은 많도다. 아아, 슬프다. 저 많고 많은 사람들은 모두 죽으면 없어지는도다. 오직 신성(神聖)이 끼친 공열은 천지와 같이 민멸(泯滅)하지 않으리라. 아아, 슬프도다.ꡑ고 하였습니다.ꡓ하였다./ 【영인본】 2 책 361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 / *외교-왜(倭)(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1월 7일 병오 1번째 기사/ 김점․허지․김자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점을 호조 판서로, 허지를 형조 판서로, 김자지를 대사헌으로, 신상을 이조 참판으로, 하연을 예조 참판으로, 김겸(金謙)을 좌군 총제(左軍摠制)로, 최운(崔雲)을 우군 총제(右軍摠制)로, 곽존중(郭存中)을 겸 지병조사(兼知兵曹事)로 삼았다./ 【영인본】 2 책 36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2월 3일 신축 2번째 기사/ 두 임금이 신경 등지에서 사냥을 구경하고 약왕원 앞 들판에 머무르다/ 두 임금이 신경(新京) 등지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낮참에 약왕원(藥王院) 앞 들판에서 머물렀는데, 개성 유후(開城留後) 김겸(金謙)이 와서 뵈었다./ 【영인본】 2 책 373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2월 18일 병진 1번째 기사/ 이숙묘․원순 등이 하직하니 물품을 하사하다/ 이숙묘․원순 등이 하직하니, 상왕이 각각 옷 한 벌씩을 주고, 임금이 위로 하기를, ꡒ경 등은 일을 처리함에 매우 주밀하여, 상왕을 모시고 무사히 군사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었다.ꡓ하고, 각기 옷 한 벌씩을 내려 주었다. 낮참에 개성(開城) 정릉동(靖陵洞)에 머물렀는데, 조치․김겸 등이 와서 내알하였다. 저녁에 황교(黃橋)에서 머물렀다./ 【영인본】 2 책 374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3월 16일 갑신 2번째 기사/ 공안부를 인녕부에 통합하고, 이발․황녹․조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공안부(恭安府)390) 를 폐지하여 인녕부에 통합하고, 소윤(少尹)을 더 두었다. 이발(李潑)로 대사헌을 삼고, 황녹(黃祿)․조치(曹致)를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조비형(曹備衡)을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로, 이숙묘를 동지총제에, 최사강(崔士康)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신개(申槪)를 경상도 관찰사에, 조계생(曹啓生)을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하고, 김겸(金謙)․박영(朴齡)은 자헌(資獻)으로 올려 주고, 황보인(黃甫仁)을 좌헌납(左獻納)에, 김효정(金孝貞)을 우헌납(右獻納)에, 허척(許倜)을 사헌부 지평에, 권시(權?)를 좌정언(左正言), 조극관(趙克寬)을 우정언(右正言)에 임명하였다./ 【영인본】 2 책 376 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註 390]공안부(恭安府) : 관청 이름. 태종이 정종 2년에 양위 받은 뒤에, 정종의 생활을 위하여 세운 것이고, 인녕부(仁寧府)는 정종의 왕후를 위하여 세운 것임. ☞(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14권/ 세종 3년( 1421 신축 / 명 영락(永樂) 19년) 12월 7일 병신 2번째 기사/ 박은으로 하여금 금천 부원군을 삼고, 이원을 좌의정, 정탁을 우의정에 제수하다/ 박은으로 하여금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을 삼고, 이원(李原)으로 좌의정을 삼고, 정탁(鄭擢)으로 우의정을 삼고, 이종무로 장천 부원군(長川府院君)을 삼고, 조연으로 한평 부원군(漢平府院君)을 삼고, 조견(朝?)으로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을 삼고, 한검(韓?)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치사(致仕)하게 하고, 맹사성(孟思誠)으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삼고, 박자청으로 판우군 도총제부사를 삼고, 허지로 이조 판서를 삼고, 이발(李潑)로 형조 판서를 삼고, 이담(李湛)으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삼고, 김겸(金謙)과 조비형(曹備衡)으로 우군 도총제를 삼고, 오승(吳陞)으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삼고, 우홍강(禹洪康)으로 유후사 유후(留後司留後)를 삼고, 안수산(安壽山)으로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삼고, 성엄으로 호조 참판을 삼고, 서선(徐選)으로 형조 참판을 삼고, 성억(成抑)으로 인수부 윤(仁壽府尹)을 삼고, 문효종(文孝宗)으로 좌군 총제를 삼고, 이수(李隨)와 이종선(李種善)으로 좌군 동지총제를 삼고, 문귀(文貴)와 조정(趙定)으로 우군 동지총제를 삼고, 탁신(卓愼)으로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삼고, 최관(崔關)으로 이조 참의를 삼고, 허해(許?)로 호조 참의를 삼고, 이점(李漸)으로 공조 참의를 삼고, 심도원(沈道源)으로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를 삼고, 신정리(申丁理)로 사헌부 장령을 삼고, 신계삼(辛繼參)으로 사헌부 지평을 삼고, 최흥효(崔興孝)로 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을 삼고, 최부(崔府)․최사강(崔士康)․유장(柳暲)으로 경기․경상․황해도의 도관찰사를 삼고, 윤득홍(尹得洪)으로 경기 수군 도안무 처치사를 삼고, 유현(兪顯)으로 판남양도회부사(判南陽都會府事)를 삼았다. 이보다 먼저 박은이 병이 위중하니, 두 임금께서 김익정(金益精)을 보내어 이원에게 묻기를, ꡒ좌의정이 병이 위중하니, 누가 이를 대신 할 만한가.ꡓ라고 하니, 이원이 찬성 조연을 천거하였다. 태상왕이 이르기를, ꡒ의정(議政)은 그대와 더불어 옳다 그르다 하여 서로 도우는데, 조연의 사람된 품은, 종일토록 모시고 앉아 있으면서 한 마디 말도 옳다 그르다 하는 일이 없다. 청성 부원군 정탁은 공신이며, 또 들어서 아는 것이 많으니, 박은을 대신할 만하다.ꡓ라고 하였다. 김익정이 대답하기를, ꡒ정탁은 재리(財利)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 재상의 직책에는 마땅하지 못합니다.ꡓ하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ꡒ정탁은 공이 높고, 나이가 많으니, 이 임무에 있으면 어찌 근신(勤愼)하지 않겠는가.ꡓ라고 하면서, 마침내 정탁을 재상으로 임용하였다. 박자청은 미천한 신분에서 일어나 오로지 영선(營繕)을 감독한 일로써, 벼슬이 1품까지 이르렀다. 윤득홍은 수군에서 발탁되어, 수전(水戰)에 익숙하여 여러 번 해구(海寇)를 물리쳤으므로, 갑자기 승진하여 이에 이르렀다./ 【영인본】 2 책 46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외교-왜(倭) / *건설-건축(建築) / *건설-토목(土木)(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12월 13일 병신 1번째 기사/ 이순몽․정진․오승․정초 등을 제수하다/ 이순몽(李順蒙)으로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삼고, 정진(鄭津)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오승(吳陞)을 개성부 유후(開城府留後)로, 정초(鄭招)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하연(河演)을 병조 참판으로, 황상(黃象)을 공조 참판으로, 조완(趙琬)을 우군 총제(右軍摠制)로, 조후(趙侯)를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로, 이천(李?)을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유장(柳璋)을 경창부 윤(慶昌府尹)으로, 최관(崔關)을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최부(崔府)를 인수부 윤(仁壽府尹)으로, 조서로(趙瑞老)를 승정원 지신사(承政院知申事)로, 조종생(趙從生)을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김자(金?)를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 성억(成抑)을 전라도 도관찰사로, 신개(申槪)를 황해도 도관찰사로, 이맹균(李孟畇)을 경기도 도관찰사로, 황자후(黃子厚)를 충청도 도관찰사로, 김겸(金謙)을 평안도 도관찰사로, 심보(沈寶)를 충청도 도절제사로, 송희미(宋希美)를 전라도 수군 도안무 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로, 배소(裵素)를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으로 삼았다./ 【영인본】 2 책 51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12월 19일 임인 2번째 기사/ 성달생․김겸․최사강․오식․심도원․박관 등을 제수하다/ 성달생(成達生)으로 평안도 도관찰사를 삼고, 김겸(金謙)을 경상도 도관찰사로, 최사강(崔士康)을 중군 동지총제로, 오식(吳湜)을 좌군 총제(左軍摠制)로, 심도원(沈道源)을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로, 박관(朴冠)을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로 삼았다./ 【영인본】 2 책 51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12월 25일 무신 2번째 기사/ 성달생 등이 배사하니 약품을 하사하다/ 성달생(成達生)․황자후(黃子厚)․김겸(金謙)이 임금에게 배사(拜辭)하니, 약품(藥品)을 내려 주었다./ 【영인본】 2 책 51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왕실-사급(賜給)(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22권/ 세종 5년( 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12월 11일 무오 2번째 기사/ 이지․김겸․안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지(李枝)로 영돈녕부사를 삼고, 김겸(金謙)으로 지돈녕부사를 삼고, 안순(安純)으로 의정부 참찬을 삼고, 신개(申槪)로 형조 참판을 삼고, 이지강(李之剛)으로 호조 판서를 삼고, 이맹균(李孟畇)으로 동지총제를 삼고, 이명덕(李明德)으로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삼고, 이만간(李萬幹)으로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을 삼았다./ 【영인본】 2 책 56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겸 [記事] : 세종실록 25권/ 세종 6년( 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9월 27일 기해 1번째 기사/ 종묘에 강무 행하는 것을 고하고 거가가 떠나다/ 강무(講武)를 행할 것을 고(告)하는 제사를 종묘에 지내고, 이날 거가(車駕)가 떠나서 양주(楊州) 녹양평(綠楊平)에서 낮참으로 머물렀는데, 경기 감사 김겸(金謙)과 경력 배환(裵桓)과 양주 부사 이승직(李繩直)이 조복을 갖추고 맞아서 알현하고, 감사가 술 50병을 올렸으므로, 시위하는 신하들과 장군 절제사(掌軍節制使)에게 나누어 하사하였는데, 미천한 자에게까지 몫이 돌아갔다. 여러 도에서 강무할 때의 진상(進上)은 정지시키라고 명하니, 지신사 곽존중이 아뢰기를, ꡒ각도의 진상이 이미 왔으므로 정지시키지 못하옵니다.ꡓ하였다. 저녁에 풍천(楓川)에 머무르니, 경상도 감사 이숙묘(李叔畝)․전라도 감사 이발(李潑)․충청도 감사 김익정(金益精)․병마 절제사 조정(趙定)․함길도 감사 정초(鄭招)․도절제사 하경복(河敬復)․황해도 감사 성엄(成?)이 사람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고, 김겸(金謙)도 또한 방물을 바치었다. 대언사(代言司)에 명하여 각도에서 진상할 말[馬]에게 소용되는 제구(諸具)는 거가를 따르는 대소 신료(臣僚)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영인본】 2 책 625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재정-진상(進上)(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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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