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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20:이혜(1413이후부임-1416이전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0.09.03 07:26:33
  예천고을원(20) : 이혜(1413이후 부임-1416이전 이임) : 보천군 때의 예천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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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李惠)는 보천군(甫川郡, 1413-1416) 때에 부임한 지보천군사(知甫川郡事, 現 醴泉郡守)이다.

  호는 단할(丹할), 본관은 고성이다. <동국여지승람>(1485)에서 기록하기를, “이혜는 지보천군사로서 시로 명망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작은 몸집에 이가 성글었다. 그래서 춘정 변계량이 시로써 이르기를, “단할한 새 늙은이, 응당 한 광주리에 꽉 차리니, 어찌 옛 친구들의 구경거리가 아닌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혜가 예천고을 원을 할 무렵에 예천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 즉, 1413년(태종 13) 10월 전국을 8도로 정하고, 각 도ㆍ군ㆍ현의 칭호를 고칠 때 군ㆍ현에 ‘주(州)’로 부르는 곳은 ‘산(山)ㆍ천(川)’ 2자 중 하나로 대신하라고 함에 따라 보주를 보천군으로 고치고, 지보주사를 지보천군사로 고쳤다. 그리고 용궁군을 용궁현으로 고쳐 감무 대신 현감을 두어 경상도 소속이 되었다.

  1414년(태종 14) 1월 13일에는 홍씨를 혜선옹주로 삼았는데, 홍씨는 원래 보천(예천)의 기생 가희아였는데, 처음에 노래와 춤을 잘 하였기 때문에 왕의 사랑을 받았다. 동년 4월 22일에는 예천에 우박이 내려 삼과 보리를 상하게 하였고, 동년 7월 8일에는 헌납 김이상이 예천으로 귀양을 왔었고, 동년 10월 14일에는 예천 사람 김을수가 허망한 꽤를 써서 후한 상을 받으려다 문초를 받았다.

  1416년(태종 16) 4월 17일에는 예천 등에 지진이 일어났고, 동년 6월 28일에는 용궁 사람 말응걸이 벼락을 맞았고, 동년 8월 10일에는 이조에서 소리가 서로 비슷한 각 고을의 칭호를 고치도록 청하니. 보천군을 예천군이라고 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6.28)

  재령 이씨 김포파의 파조(날짜 2001-12-29 13:23:40) : 이혜(李惠)는 보천군(甫川郡, 1413~1416) 때의 지보천군사(知甫川郡事, 現 醴泉郡守)이다. 호는 단활재(丹豁齋), 본관은 재령, 고려 말 중랑장 일상의 맏아들, 사숙재 강희맹의 외조부이다. 후손들이 김포 대곳면 대명리와 양촌면 구래리, 그리고 상주에 살고 있다. 「용재총화」에 ꡒ그의 저서로 「단활집」이 있었다ꡓ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강맹경의 어머니인 재령 이씨의 묘비문에 ꡒ지보주사 이혜의 딸“이라고 하였다. 김종직의 저서인 「청구풍아」에 한 수의 시가 전해질 뿐이고, 춘정 변계량이 고향(용문면)으로 내려가는 권맹손(1390년~1456년) 편에 예천고을 원 이혜에게 보낸 시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ꡒ권선달(權孟孫)이 아득한 남쪽 길을 떠나는데, 양양(醴泉)에서 말안장을 풀 줄로 알았다네. 단활(李惠)의 새로운 시 상자에 가득히 찼을 테니, 인편 통해 친구(李惠)에게 보여줘도 괜찮겠지ꡓ라고 하였다.


  이혜는 시경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사람을 보는 관상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가 딸의 결혼을 앞두고 부인이 거절하였을 적에, ꡒ우덕(사위)은 반드시 정승 자손을 둘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ꡓ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과연 이혜의 예견대로 우덕의 맏아들인 강맹경(1410년~1461년)이 세조 때 영의정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혜는 조선이 개국되던 1392년 강회백(1357년~1402년)과 함께 진주로 은거하면서 서로 사돈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손자인 강맹경의 신도비에 ꡒ외조부인 지보주사 이혜의 묘는 진주 반성 택기동에 있다ꡓ라고 하였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486號)

  이혜(李惠) : 보천군(甫川郡, 1413-1416) 때에 부임한 지보천군사(知甫川郡事, 現 醴泉郡守)이다. 호는 단활(短豁) 또는 단활재(丹豁齋), 본관은 재령, 시조 상장군 소봉(小鳳)의 장손자, 고려 말 중랑장(中郞將) 일상(日祥)의 맏아들, 김포파(金浦派, 문헌공파)의 파조이다. 후손들이 김포 대곳면 대명리와 양촌면 구래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 "지보천(醴泉郡守)으로서 시로 명망이 있었다(嘗知甫川 有詩名)"라고 하였다. 작은 몸집에 이가 성글었다. 그래서 춘정 변계량(春亭卞季良)이 시로써 이르기를, "단활한 새 늙은이, 응당 한 광주리에 꽉 차리니, 어찌 옛 친구들의 구경거리가 아닐 것인가."라고 하였다. 단신(短身)의 이혜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즈음 진주 진성의 택지동으로 은거하였고, 태종 때 지보주사를 지내고, 한시(漢詩)를 많이 읊었다고 하며, <단활집(短豁集)>이란 문집이 있었다고 한다. 성현의 <용재총화(용齋叢話)> 제8권 역대 문장가ㆍ저술편에, "<단활집> 한 질은 이혜가 지은 것인데, 신체적 특징을 들어 호를 단활이라 불렀다."라고 기록되었으나 그 문집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지보주사를 마친 후 택지동에서 여생을 마쳤고 묘소가 이곳 진성에 있다. 그러나 후손은 그 후 경기도 양평의 국수리에 정착했으나 임진왜란의 수난을 겪으니, 바다와 가까운 김포의 대명리로 피난하여 이곳에 정착하였고, 일부는 경북 상주로 이거하였다.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문경공 강맹경(姜孟卿)의 어머니인 정경대부인 재령 이씨의 묘비문에, "지보주사 휘혜지녀 증왕부휘소봉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 왕부 휘일상 좌우위보승 중랑장(知甫州事諱惠之女曾王父諱小鳳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 王父諱日祥 左右衛保勝中郞將)"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묘비는 진주시 진성면 증촌리 반야촌의 반야재(盤野齋) 바로 옆에 있는데, 1465년(성화 11)에 세운 것이다. <진양지(晋陽誌)>의 인물편에, "시문과 예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안타깝게도 지은 시는 오직 한 수 밖에 전하지 않고, 그 시는 김종직이 저술한 <청구풍아(靑丘風雅)>에 실려있는 ''''제마천사사친당도(題馬天使思親堂圖)''''이다. 그 내용은, "사친당 그림을 그릴 수도 있지만은(思親堂可畵), 효자의 깊은 마음 묘사하기 어렵구나(孝子意難摹), 귤을 품은 효성으로 하곡 땅을 연모하며(懷橘戀河曲), 뗏목 타고 바다 한 귀퉁이 오셨네(乘사窮海隅), 가을 바람은 날아가는 기러기에 불어대고(秋風吹去雁), 지는 해는 자애로운 까마귀를 비추거늘(斜日照慈烏), 주머니 속 다른 물건 하나도 없고(囊底無長物), 오직 한 폭의 그림만 간직했다네(唯藏一軸圖)"이다. 이 시의 ''''마 천사''''는 1403년(태종 3) 8월 10일에 조서(詔書)와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온 중국 사신인 급사중(給事中)이다. 그가 명 나라로 돌아갈 때인 다음 달 12일에 사친당 시축에 대한 설명이 <태종실록>(1집 277면)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원래 낙양 사람인 마인(馬麟)은 편모 슬하였는데, 1393년에 등과하여 급사중이 된 이래로 근친(覲親)하지 못한 지가 십여 년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를 생각하는 정을 이기지 못하여 사친당 그림을 그려서 항상 벽에 걸어놓고 있었는데, 이번에 사명을 받들고 절역(絶域)에 와서, 그림과 격리되어 어머님을 경모하지 못하는 유자(遊子)의 마음을 시로 위로해 달라는 청을 하였다. 이에 태종이 응봉사(應奉司)에 명하여 대소 문신으로 하여금 시를 지어 주게 한 후 서보통(西普通)에서 사신을 전송할 때에 사친당 시축을 그에게 선물하였다"라고 하였다. 당시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은 그와 가까운 문우(文友)이고 <춘정집>에 그의 모습이 비추어 지고 있다. 그의 선물(자용석)과 시고를 받고 답한 춘정 선생의 칠언시(七言詩) 2수가 있는데 1442년(세종 24)에 초간한 <춘정집> 권4(동국대 중앙도서관 소장)에 실려있다. 그리고 1998년에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그 삭거 부분을 발굴하여 <국역 춘정집>(송수경 譯)을 간행한 바, 그 책에 실린 시를 살펴보기로 하자. "보주사 이혜 이침석견혜 차전소자저시고일질 이시답지 2수(甫州事李惠 以寢席見惠 且傳所自著詩藁一秩 以詩答之 二首)// 보내주신 시고도 정말로 청아한데(寄來詩藁진淸姸), 거기다 두터운 선물까지 보냈구려(況復仍將厚황傳), 읊조리자 저절로 황견의 글귀 같았고(吟翫自同黃絹字), 누구도 안 써본 자용석에 잠들었지(寢興誰憶紫茸氈), 해 저무는 양양(醴泉) 땅 온 하늘에 눈날리니(歲暮襄陽雪滿天), 노새 올라 채직을 세우고 시 읊겠지(想應驢背竪吟鞭), 그 누가 선생처럼 이은을 하겠는가(先生吏隱誰能似), 사람들이 전신은 호연이라 얘기하지(人道前身是浩然)" 변계량은 이혜의 시가 맑고 아름다우며 절묘하다고 하였다. 또 낮은 지위에 숨어있으면서(吏隱)도 당 나라 때의 맹호연(孟浩然)에 비유된다고 하였다. 시 구절 중 ''''황견''''은 절묘라는 뜻이다. 이혜가 예천 군수를 역임하면서 시를 많이 읊으면서 산 내용이 <춘정집>의 또다른 시에 엿보인다. "권선달맹손행 기보주이사군혜(權先達孟孫行寄甫州李使君惠)// 권 선달(권맹손)이 아득한 남쪽 길을 떠나는데(權生南去路漫漫), 양양(醴泉)에서 말 안장을 풀 줄로 알았다네(知尙襄陽사馬鞍), 단활(이혜)의 새로운 시 상자에 가득히 찼을 테니(短豁新詩應滿협), 인편 통해 친구에게 보여줘도 괜찮겠지(何妨寄與故人看)" 변계량이 지은 이 시는 권맹손(용문면 출신)이 가는 길에 예천 군수 이혜에게 부친 것인데, 단활이라는 그의 호와 지방의 수령을 뜻하는 사군(使君)의 두 단어가 표현되었고, 가는 곳을 양양(醴泉)이라 가리켰다. 권맹손(1390-1456)이 예천에 간 시기를 고찰해 보자. 선달이란 문과에 급제한(1408) 후 벼슬길에 오르기 전(1408-1816)에 부른 통칭인데, 권맹손이 과거에 급제하고, 고향으로 갔던 시기(1408-1416)에 변계량은 권맹손 인편에 예천군수 이혜에게 이상의 시를 부친 것이다. <예천군읍지>에 조선초의 환적은 전백영, 김겸, 안성, 이혜, 이백겸, 윤기견 순으로 기록되어 있고, <왕조실록>에는 1400년(정종 2) 8월에 안성이 보주사로 발령받은 후 1404년(태종 4) 1월에 우사간대부 직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외의 실록 기록은 1407년(태종 7)에 "김겸이 전에 보주 수령으로 있을 때" 1412년(태종 12)에 "보주 전 현령 이영주"이라 적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상고한 결과 이혜가 1403년에는 문신으로 개성에 있은 후 1404년(태종 4) 이후부터 1416년(태종 16) 사이에 지보주사를 역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혜는 시경(詩經)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사람을 보는 관상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가 딸의 결혼을 앞두고 부인이 거절하였을 적에, "우덕은 반드시 정승 자손을 둘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것은 창녕공 강우덕(姜友德, 1385-1439)의 유사(遺事)인데, 과연 보주사(甫州事, 現 醴泉郡守)의 예견대로 창녕공의 장자인 문경공 강맹경(姜孟卿, 1410 -1461)은 원훈대신(元勳大臣)으로서 세조 때 영의정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혜는 조선이 개국되던 1392년에 강회백(姜淮伯, 1357-1402)과 함께 진양(晋陽)으로 은거하면서 서로 사돈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손자인 강맹경의 신도비 음기에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이, "외조부인 보주사 이혜의 묘는 진주 반성 택기동(班城宅其洞 : 班東山里 宅只洞)에 있다"라고 기록하였다.(야후 2001, 인터넷 hanmir 2001)

  이혜(李惠) : 선초의 예천 군수(醴泉郡守), 호는 단할(短할), 본관은 고성(固城), 일찌기 지보주사(知甫州事, 醴泉郡守)를 지냈고, 시(詩)로 유명하였다. 작은 몸집에 이가 성글었다. 그래서 춘정 변계량(春亭卞季良)이 시로써 이르기를, "단할한 새 늙은이, 응당 한 광주리에 꽉 차리니, 어찌 옛 친구들의 구경거리가 아닐 것인가." 라고 하였다.

  이혜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醴泉 / 名宦 / 高麗 趙云?本朝全伯英 金謙 安省 李惠 嘗知甫州有詩名 李伯謙 尹起? 金仁民 鄭從韶舊增朴漢柱 政擧治平吏畏民服 新增兪? 有峴山?淚碑(www.history.go.kr 2007)

  이혜(보주부사 1413이후-1416이전) : 보주사(甫州使)이혜(李惠)가 침석(寢席)을 선물하고 또 자신이 저술한 시고(詩藁) 한 질을 보냈기에 시로 답례하다. [고전번역서-춘정집(春亭集)]/ 변계량 저 | 한국고전번역원/ 보주(甫州)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 역사자료이다.//

  이혜(秋夕膳物을 보내며) [記事] :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상례인데, ...변계량(卞季良)은 “이혜(李惠)가 침석(寢席)과 자신이 저술한 시고(詩藁) 한 질을 보냈기에 시로 답례하다.” 하며 시를 남긴다. “보내 주신 시고도 정말로 청아한데 / 거기다 두터운 선물까지 보냈구려 / 읊조리자 저절로 황견 글귀 같았고 / 누구도 안 써 본 자용석(紫茸氈)에 잠들었지.” 벼루 종이뿐 아니라 생선 돌냄비 침석 등을 선물한 시절에 그 선물의 답례로 시 한 편을 지어 보낸 옛사람들의 고아한 풍광이 그려진다. 이번 추석엔 서민들이 살기 어려워 쌀 같은 생필품을 선물로 선호한다는 얘기가 들려오는데, 안타깝거니와 그에 대한 답례로 시 한 편을 써 보내는 것은 요즘 문화와 정서로는 아무래도 좀 그렇지?(이광식 江原道民日報 2008년 09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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