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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21-1:이백겸(1416재임)
예천고을원(21-1) : 이백겸(1416 재임) : 사헌부 장령을 지낸 예천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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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겸(李伯謙)은 이혜 고을 원 후임으로 부임한 지예천군사(知醴泉郡事, 現 醴泉郡守)이다. 그는 일찍이 1408년(태종 8) 11월 7일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동년 12월 11일에 순금사에 갇힌 적이 있었다.
이백겸이 예천고을 원을 할 무렵인 1416년 8월 10일에 이조에서 소리가 비슷한 각 고을의 이름을 고치도록 임금에게 청하니, 이에 보성은 예전 이름 그대로 진보라 하고, 보천은 예전 이름 그대로 예천이라 하고, 보령은 보은이라 하였다. 그리고 다인현(현 의성군 다인면과 예천군 풍양면 일부)과 안인현(현 문경시 산북면 일부와 동로면)은 계속 예천군의 속현으로 두었다.
1417년(태종 17)에는 보문사가 교종의 소속이 되었고, 1418년(태종 18)에는 반유가 예천읍 고평리에 정려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년) 12월 23일에 상왕 태종이 안수산의 직첩을 거두고 자원에 따라 예천에 귀양을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1419년(세종 1) 5월 12일 왕이 권만을 경상도 도체찰사로 삼았는데, 그 때에 권만이 어머니의 상으로 유천면 성평리 덕달 뒷들에 와서 있었다. 상중이지만 역마로 벼슬자리에 불렀다. 동년 8월에는 은풍(상하리면) 사람 신상이 경상도 도관찰축척사(現 道知事)로 부임하였고, 동년 11월 19일에는 용궁현에 사는 개인 종 막금이 고의로 살인하여 참형을 받았다.
1421년(세종 3) 2월 5일에는 용궁과 예천에 지진이 일어났고, 동년 11월 20일에는 예천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1422년(세종 4) 2월 5일에 용궁과 예천에 지진이 일어났고, 동년 6월 28일에는 예천에 황충이라는 벌레의 피해가 일어났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7.5)
이백겸(李伯謙) : 1408년(태종 8) 11월 7일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동년 12월 11일에 장령을 이임하였다.(太宗實錄, 東國輿地勝覽)
이백겸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忠淸道 / 淸州 / 人物 / ...夫斬之卒年三十及葬道路莫不哀哭 李? 初名載以文章著名官至守司空參知政事 鄭? 詳見平壤名宦 郭預 高宗朝擢第一人及第官至監察大夫爲人平淡?直雖至貴顯如布衣時善屬文書法瘦勁成一家體其在翰院每雨中跣足持傘獨至龍 池賞蓮後人高其風致多詠其事云 韓康 高宗朝登第歷國子大司成翰林學士忠烈朝知密直司事俄拜贊成事又加中贊致仕王召康條陳可行時事康請修宗廟備樂器以嚴時祀止遊田之樂節肥甘之奉於祈寒感暑置醬粥以賑飢渴諡文忠 李伯謙 公升四世孫忠烈朝登第累陞選部典書出牧濟海二州以最聞 韓? 康之孫忠宣時拜代言忠肅時授選部典書知密直司事從主入元時瀋王??王位?以奇謀脫王子禍功在一等封上黨府院君賜宣力佐理功臣拜忠贊諡思肅配享忠惠廟庭 鄭? ?之孫登第官至贊成事性溫良和雅臨事不撓 鄭? ?之孫年十八登第忠惠朝官至左司議大夫詩詞簡古筆跡亦妙有雪谷集...(www.history.go.kr 2007)
이백겸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黃海道 / 海州 / 人物 / ...革世祿奴婢法公詣中書力爭歷事四朝爲國元老朝野倚重謚忠憲 崔椿命 沖之後性寬和有節操高宗時爲玆州府使官至樞密院副使 崔洪胤 登第官至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提學謚景文開司馬試四主禮開所持皆聞人多至卿相世稱王筍門生 崔? 登第官至中書侍郞平章事謚文簡 吳延寵 登第累遷起居郞後出知全州召拜樞院睿宗伐女眞延寵爲尹瓘副破女眞拓地築九城後官至中書侍郞平章事謚文襄 吳? 初名漢卿元宗時登第歷踐華要官至僉議贊成事謚文溫號快庵學問精博雖無著績然寬簡無華有長者風 鄭惟産 登第以禮部尙書翰林學士典文衡始立糊名取士之法官至門下平章事 金漢忠 宣宗朝爲守安西都護府 李伯謙 忠宣朝牧使以最聞 趙暾 爲牧使 金興祖 爲牧使 崔永濡 以牧使卒于官州人葬于州之北置守墳人禁樵牧書卒日於板掛州司壁上每當其日及節日祀之 本朝鄭易 登第官至議政府贊成謚貞度子忠...(www.history.go.kr 2007)
이백겸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醴泉 / 名宦 / 高麗 趙云仡本朝全伯英 金謙 安省 李惠 嘗知甫州有詩名 李伯謙 尹起견 金仁民 鄭從韶舊增朴漢柱 政擧治平吏畏民服 新增兪㯙 有峴山墮淚碑(www.history.go.kr 2007)
이백겸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補遺篇 (全羅道) / 完山誌卷下 / 名宦 / 高麗/ ...高宗朝爲副使州俗男年十五以上歲貢豆一斛衙吏歲貢馬一匹副使 判官分受之之錫到州日卽?之政淸如水民懷其德州人曰前有世封後有之錫 崔瑞 忠烈朝爲牧使 李伯謙 忠肅朝濟州賊魁使用金成等嘯聚胸徒逐星主王子以叛欲討之難其人賊?咸曰若得李伯謙 李英來無吾豈敢叛乎乃遣伯謙英招撫之未幾賊平伯謙嘗爲牧使故民之愛畏如此 田祿生 忠惠朝登第補濟州司錄 李元恒 爲牧使 尹時遇 恭愍五年以贊成事爲都巡問使 林熙載 恭愍六年爲安撫使 朴允靑 恭愍十八年爲牧使 曹益淸 爲安撫使 成俊德 恭愍時星主高福壽叛請隷于元王以俊德爲牧使以鎭之 林樸 恭愍朝爲宣撫使至州謂其萬戶曰達達牧子喜反側宜盡心撫綏又謂星主王子曰居輩服事歷代歷代之待君輩亦甚厚宜各一心勿與牧子扇變於是星主王子及軍民皆俯伏曰敢不唯命相謂曰王官皆如林宣撫我輩何至叛乎 李夏生 恭愍王朝爲安撫使 本朝崔海山 詳弘化閣記 吳湜 詳旌義沿...(www.history.go.kr 2007)
이백겸 [記事] :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 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11월 7일 신해 2번째 기사/ 맹사성을 대사헌으로 하는 등 헌부의 관리를 새로 임명하다/ 박은(朴?)으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맹사성(孟思誠)으로 대사헌(大司憲)을, 이계공(李季拱)으로 집의(執義)를, 이백겸(李伯謙)으로 장령(掌令)을, 이안공(李安恭)으로 지평(持平)을, 윤보로(尹普老)로 의흥사 대호군(義興司大護軍)을, 임첨년(任添年)으로 인녕부 좌사윤(仁寧府左司尹)을, 여귀진(呂貴眞)으로 충좌사 중령호군(忠佐司中領護軍)을, 이문명(李文命)으로 공안부 판관(恭安府判官)을, 권영균(權永均)으로 중군 사정(中軍司正)을, 최득비(崔得?)로 중군 부사정(中軍副司正)을 삼았다. 윤보로는 임형(林瑩)의 말을 고한 것을 상준 것이었다./ 【영인본】 1 책 461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이백겸 [記事] :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 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12월 11일 갑신 1번째 기사/ 맹사성 및 대간들을 극형에 처하라고 판부하니, 대신들이 반대하는 청을 올리다/ 집의(執義) 이계공(李季拱)․장령(掌令) 이백겸(李伯謙)․헌납(獻納) 정주(鄭?)․문수성(文守成)을 순금사에 가두었다. 이천우(李天祐) 등이 맹사성(孟思誠) 등의 옥사(獄辭)를 갖추어 아뢰니, 판부(判付)하기를, ꡒ맹사성․서선․박안신․이안유와 맹귀미를 모두 극형에 처하라.ꡓ 하고, 또 백관(百官)이 시가(市街)에 모여 형의 집행을 감독하라고 명하고, 또 중관(中官)을 보내어 독촉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이 아뢰기를, ꡒ사성(思誠)이 수범(首犯)․종범(從犯)을 분간하자고 한 말은 곧 목인해(睦仁海)와 진원귀(陳原貴)를 가리킨 것이고, 또 직책이 언관(言官)에 있어 국가를 위한 것뿐이니,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이 대륙(大戮)에 좌죄(坐罪)됨이 어찌 가하겠습니까?ꡓ 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ꡒ경(卿)은 대신(大臣)이니 마땅히 초연(超然)하여 사(私)가 없어야 할 것인데, 어째서 남의 지도(指導)를 받고 이런 말을 하는가?ꡓ 하니, 숙번이 대답하기를, ꡒ신이 젊어서부터 전하를 따랐으니, 전하께서 신의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신은 지도를 받은 일도 없고, 두려워하는 것도 없습니다.ꡓ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ꡒ경이 마땅히 이 대사(大事)를 처리하라.ꡓ 하니, 숙번이 대답하기를, ꡒ전하께서 일찍이 신 등에게 이르시기를, ꡐ모진 매 밑에 무엇을 구(求)하여 얻지 못하랴?ꡑ 하셨습니다. 사성(思誠)이 심한 고문을 받고 그 고통을 참지 못하여 ꡐ모약왕실(謀弱王室)ꡑ이란 초사(招辭)에 승복(承服)한 것입니다. 지금 이것으로 극형을 가하는 것이 가합니까?ꡓ 하였다.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황희(黃喜)를 책하기를, ꡒ작지 않은 재상(宰相)이 이와 같은 말을 아뢰는데 어찌 제지하지 않았는가?ꡓ 하였다. 숙번이 순금사 사직(巡禁司司直) 김이공(金理恭)에게 이르기를, ꡒ임금이 말을 하여 스스로 옳게 여기면, 경대부(卿大夫)가 감히 그 그른 것을 바로 잡지 못하는 것은 예전 사람이 경계(警戒)한 바이다. 남 판서(南判書)․박 참지(朴參知)는 모두 도리를 아는 재상인데, 어째서 다시 아뢰지 않고 모두 뜻에만 아첨하여 이 옥사(獄事)를 이루는가? 그대도 또한 사류(士流)인데 어째서 이같이 하느냐?ꡓ 하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ꡒ주상께서 만일 이 사람들을 반드시 사형하려고 하신다면, 신은 머리를 깎고 도망하겠다.ꡓ 하였다.
권근(權近)이 또한 병든 몸으로 여(輿)를 타고 달려와 고하니, 이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좌정승(左政丞) 성석린(成石璘)․영삼군사(領三軍事) 조영무(趙英茂) 등이 대궐 뜰에 나와, 하윤이 아뢰기를, ꡒ사성(思誠)은 모반(謀叛)한 것도 아니며, 무고(誣告)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공사(公事)에 실수한 것으로 극형을 당하면 어찌 정리(情理)에 맞겠습니까?ꡓ 하고, 성석린은 아뢰기를, ꡒ죄 없는 사람을 죽이느니보다는, 차라리 법을 굽혀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好生之德]으로 민심을 흡족시키는 것이 신들의 소원입니다.ꡓ 하고, 조영무는 아뢰기를, ꡒ신이 사성(思誠)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며, 소사(所司)를 구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전하(殿下)의 덕(德)을 돕고자 하는 것뿐입니다.ꡓ 하였다. 임금이 하윤을 책하기를, ꡒ경이 나더러 잘못이라고 하는 것인가? 공사(公事)를 어찌 실수할 수 있는가?ꡓ 하니, 하윤이 대답하기를, ꡒ예전에 인군(人君)이 형벌(刑罰)을 결단(決斷)하려면 반드시 삼복주(三復奏)․오복주(五復奏)를 기다렸습니다. 옛날에 한 선제(漢宣帝)가 양운(楊?)을 죽였는데, 식자(識者)들이, 위상(魏相)과 병길(丙吉)이 정승(政丞)으로 있고, 우정국(于定國)이 정위(廷尉)로 있으면서 이를 간(諫)하여 저지하지 못한 것을 기롱(譏弄)하였습니다.ꡓ하고, 드디어 통곡하며 말하기를, ꡒ신이 동방(東方)에 오늘날의 임금이 있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ꡓ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ꡒ내가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경들이 아는 바이다.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사성(思誠)의 죄는 죽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경들이 이렇게까지 간(諫)하니, 내가 우선 생각해 보겠다.ꡓ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ꡒ각사(各司)가 이미 시가(市街)에 모였으니, 만일 일찍 유윤(兪允)하지 않으시면 구제하지 못할 것입니다.ꡓ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ꡒ사체(事體)가 지극히 중(重)하고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가볍게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인주(人主)가 혼자서만 국가를 다스릴 수 없고, 경들도 어찌 나를 불의(不義)에 빠뜨리고자 하겠는가? 경들의 말을 따르겠다. 경들도 왕실(王室)이 약해지지 않도록 도모하라.ꡓ 하니, 하윤 등이 모두 울며 사례하고 물러갔다. 우정승(右政丞) 이무(李茂)만은 맹귀미(孟歸美)의 장인(丈人)이기 때문에 감히 정부(政府)의 청(請)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영인본】 1 책 468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정론(政論) / *변란(變亂)(www.history.go.kr 2007)
이백겸(金泉墓地 紀行) [記事] :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말정(李末丁)/ 가을걷이가 한창인 늦은 가을,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화순최씨 부인과 먼저 간 아내를 기리며 자신의 호를 따 건립했다는 아름다운 정자 방초정이 있는 구성면 상원리 원터를 찾았다. 이 마을은 감천과 하원천이 합수되는 안쪽에 자리하여 멀리서 보면 연꽃이 물위에 떠있는 형세라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길지로 전하며 대대로 연안이씨(延安李氏) 부사공파(府使公派) 정양공(靖襄公) 후손들이 집성을 형성하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방초정에서 마을 안길을 따라가다가 오른편 조산골로 접어들면 연성부원군의 위패를 모신 재실 영모재(永慕齋)가 4백년의 풍상 속에서도 꼿꼿이 서있다. 보기 드문 대추나무 기둥으로 세월을 괸 영모재의 담장을 따라 돌면 수 백 년에 걸쳐 효심(孝心)으로 닦였음직한 오솔길을 오르니 지례고을 연안이씨 입향조(入鄕祖)가 되시는 연성부원군 이말정과 장남이신 직강공(直講公) 이숙황(李淑璜)을 비롯한 후손들의 묘소가 조산골 전역에 모셔져 있다. 매봉산 조산골은 예부터 “금비녀가 떨어진 형국”이라 하여 금채낙지처(金釵落地處)로 불리며 조선 8대 명당으로 알려져 왔는데 부원군의 묘소는 응봉산을 배산(背山)으로 하여 청룡과 백호가 반듯하게 섰고 임수(臨水)에 해당하는 감천과 그 너머로 안산(案山)인 문필봉(文筆峯)이 받치고 있는 전형적인 명당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명당의 정점에 자리한 부원군의 묘소가 통상의 관례를 깨고 가장 아래에 위치한 역장(逆葬)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부원군의 16대손인 이현돈(74세)씨는 할아버지가 귀여운 손자들을 무동(舞童) 태우고 있는 격이니 전혀 어색할 것이 없다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또 부원군의 묘소를 배위(配位)인 곡산한씨의 묘소 뒤로 들여 고상비하(考上비下)로 한 것도 특이했다. 부원군 이말정은 연안이씨로 장령(掌令)과 보주지사(甫州知事)를 역임한 증(贈) 병조판서 이백겸(李伯謙)과 온양방씨 사이에 1395년(태조4) 서울에서 태어났다. 1426년(세종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이래 출중한 학문과 높은 덕이 널리 알려져 종5품의 충청도 도사(都事)와 판관(判官), 종3품의 예빈시소윤(禮賓侍少尹)을 역임하다 지례현 지품(知品.지례면 미평리)으로 낙향해 학문에 전념했다. 당시 연고가 없던 김천지방으로의 이주는 스승이자 장인으로 경상도관찰사와 좌찬성을 역임한 곡산한씨 한옹(韓擁)이 지례와 양천동 하로마을에 우거(寓居)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몇 년 후 감천의 범람으로 가옥과 전답이 침수되자 식솔을 거느리고 거창군 모곡(茅谷.거창군 월천면 서변리)으로 이거했다가 다시 지품으로 돌아와 1461년(세조7) 67세를 일기로 졸했다. 부원군은 사후 넷째 자제분인 정양공(靖襄公) 이숙기(李淑琦)가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녹훈(錄勳)되면서 연성부원군에 봉해짐과 동시에 종1품의 좌찬성이 증직되었으며 평정(平靜)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부원군은 정경부인 곡산한씨와의 사이에 5남1녀를 두었는데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해 오자암(五子岩)이란 명성을 얻었다.
장남 숙황(淑璜)은 성균관 직강(直講), 차남 숙형(淑珩)은 감찰(監察), 삼남 숙규(淑珪)는 현령(縣令), 사남 정양공 숙기(淑琦)는 형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역임하며 불천위(不遷位)사당에 배향되었고 오남 문장공(文狀公) 숙함은 이조참판과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부원군은 자제들을 훌륭히 훈육해 나라의 동량으로 삼았고 문중의 중시조를 배출해 가문을 크게 번성시켜 후손 중에서 8명의 판서(判書)와 12명의 목사(牧使)를 배출하며 이 고장을 대표하는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부원군과 곡산한씨의 묘터와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하는데 1446년(세종28) 곡산한씨가 졸하자 마을을 지나가던 한 스님이 터를 정해주며 땅속에서 석함(石函)이 나오더라도 절대 열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것. 이를 대소롭지 않게 여긴 인부가 석함을 열자 벌 두 마리가 날아 나왔는데 이에 스님이 “이 터에서의 발복(發福)이 3년 후로 미루어지겠지만 분명 후손 중에 큰 인물이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후부터 다섯 아들이 차례로 과거에 급제하며 후손들이 번성했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金泉新聞 2009-11-12 오전 1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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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겸(李伯謙)은 이혜 고을 원 후임으로 부임한 지예천군사(知醴泉郡事, 現 醴泉郡守)이다. 그는 일찍이 1408년(태종 8) 11월 7일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동년 12월 11일에 순금사에 갇힌 적이 있었다.
이백겸이 예천고을 원을 할 무렵인 1416년 8월 10일에 이조에서 소리가 비슷한 각 고을의 이름을 고치도록 임금에게 청하니, 이에 보성은 예전 이름 그대로 진보라 하고, 보천은 예전 이름 그대로 예천이라 하고, 보령은 보은이라 하였다. 그리고 다인현(현 의성군 다인면과 예천군 풍양면 일부)과 안인현(현 문경시 산북면 일부와 동로면)은 계속 예천군의 속현으로 두었다.
1417년(태종 17)에는 보문사가 교종의 소속이 되었고, 1418년(태종 18)에는 반유가 예천읍 고평리에 정려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년) 12월 23일에 상왕 태종이 안수산의 직첩을 거두고 자원에 따라 예천에 귀양을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1419년(세종 1) 5월 12일 왕이 권만을 경상도 도체찰사로 삼았는데, 그 때에 권만이 어머니의 상으로 유천면 성평리 덕달 뒷들에 와서 있었다. 상중이지만 역마로 벼슬자리에 불렀다. 동년 8월에는 은풍(상하리면) 사람 신상이 경상도 도관찰축척사(現 道知事)로 부임하였고, 동년 11월 19일에는 용궁현에 사는 개인 종 막금이 고의로 살인하여 참형을 받았다.
1421년(세종 3) 2월 5일에는 용궁과 예천에 지진이 일어났고, 동년 11월 20일에는 예천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1422년(세종 4) 2월 5일에 용궁과 예천에 지진이 일어났고, 동년 6월 28일에는 예천에 황충이라는 벌레의 피해가 일어났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7.5)
이백겸(李伯謙) : 1408년(태종 8) 11월 7일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동년 12월 11일에 장령을 이임하였다.(太宗實錄, 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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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겸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黃海道 / 海州 / 人物 / ...革世祿奴婢法公詣中書力爭歷事四朝爲國元老朝野倚重謚忠憲 崔椿命 沖之後性寬和有節操高宗時爲玆州府使官至樞密院副使 崔洪胤 登第官至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提學謚景文開司馬試四主禮開所持皆聞人多至卿相世稱王筍門生 崔? 登第官至中書侍郞平章事謚文簡 吳延寵 登第累遷起居郞後出知全州召拜樞院睿宗伐女眞延寵爲尹瓘副破女眞拓地築九城後官至中書侍郞平章事謚文襄 吳? 初名漢卿元宗時登第歷踐華要官至僉議贊成事謚文溫號快庵學問精博雖無著績然寬簡無華有長者風 鄭惟産 登第以禮部尙書翰林學士典文衡始立糊名取士之法官至門下平章事 金漢忠 宣宗朝爲守安西都護府 李伯謙 忠宣朝牧使以最聞 趙暾 爲牧使 金興祖 爲牧使 崔永濡 以牧使卒于官州人葬于州之北置守墳人禁樵牧書卒日於板掛州司壁上每當其日及節日祀之 本朝鄭易 登第官至議政府贊成謚貞度子忠...(www.history.go.kr 2007)
이백겸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醴泉 / 名宦 / 高麗 趙云仡本朝全伯英 金謙 安省 李惠 嘗知甫州有詩名 李伯謙 尹起견 金仁民 鄭從韶舊增朴漢柱 政擧治平吏畏民服 新增兪㯙 有峴山墮淚碑(www.history.go.kr 2007)
이백겸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補遺篇 (全羅道) / 完山誌卷下 / 名宦 / 高麗/ ...高宗朝爲副使州俗男年十五以上歲貢豆一斛衙吏歲貢馬一匹副使 判官分受之之錫到州日卽?之政淸如水民懷其德州人曰前有世封後有之錫 崔瑞 忠烈朝爲牧使 李伯謙 忠肅朝濟州賊魁使用金成等嘯聚胸徒逐星主王子以叛欲討之難其人賊?咸曰若得李伯謙 李英來無吾豈敢叛乎乃遣伯謙英招撫之未幾賊平伯謙嘗爲牧使故民之愛畏如此 田祿生 忠惠朝登第補濟州司錄 李元恒 爲牧使 尹時遇 恭愍五年以贊成事爲都巡問使 林熙載 恭愍六年爲安撫使 朴允靑 恭愍十八年爲牧使 曹益淸 爲安撫使 成俊德 恭愍時星主高福壽叛請隷于元王以俊德爲牧使以鎭之 林樸 恭愍朝爲宣撫使至州謂其萬戶曰達達牧子喜反側宜盡心撫綏又謂星主王子曰居輩服事歷代歷代之待君輩亦甚厚宜各一心勿與牧子扇變於是星主王子及軍民皆俯伏曰敢不唯命相謂曰王官皆如林宣撫我輩何至叛乎 李夏生 恭愍王朝爲安撫使 本朝崔海山 詳弘化閣記 吳湜 詳旌義沿...(www.history.go.kr 2007)
이백겸 [記事] :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 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11월 7일 신해 2번째 기사/ 맹사성을 대사헌으로 하는 등 헌부의 관리를 새로 임명하다/ 박은(朴?)으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맹사성(孟思誠)으로 대사헌(大司憲)을, 이계공(李季拱)으로 집의(執義)를, 이백겸(李伯謙)으로 장령(掌令)을, 이안공(李安恭)으로 지평(持平)을, 윤보로(尹普老)로 의흥사 대호군(義興司大護軍)을, 임첨년(任添年)으로 인녕부 좌사윤(仁寧府左司尹)을, 여귀진(呂貴眞)으로 충좌사 중령호군(忠佐司中領護軍)을, 이문명(李文命)으로 공안부 판관(恭安府判官)을, 권영균(權永均)으로 중군 사정(中軍司正)을, 최득비(崔得?)로 중군 부사정(中軍副司正)을 삼았다. 윤보로는 임형(林瑩)의 말을 고한 것을 상준 것이었다./ 【영인본】 1 책 461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이백겸 [記事] :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 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12월 11일 갑신 1번째 기사/ 맹사성 및 대간들을 극형에 처하라고 판부하니, 대신들이 반대하는 청을 올리다/ 집의(執義) 이계공(李季拱)․장령(掌令) 이백겸(李伯謙)․헌납(獻納) 정주(鄭?)․문수성(文守成)을 순금사에 가두었다. 이천우(李天祐) 등이 맹사성(孟思誠) 등의 옥사(獄辭)를 갖추어 아뢰니, 판부(判付)하기를, ꡒ맹사성․서선․박안신․이안유와 맹귀미를 모두 극형에 처하라.ꡓ 하고, 또 백관(百官)이 시가(市街)에 모여 형의 집행을 감독하라고 명하고, 또 중관(中官)을 보내어 독촉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이 아뢰기를, ꡒ사성(思誠)이 수범(首犯)․종범(從犯)을 분간하자고 한 말은 곧 목인해(睦仁海)와 진원귀(陳原貴)를 가리킨 것이고, 또 직책이 언관(言官)에 있어 국가를 위한 것뿐이니,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이 대륙(大戮)에 좌죄(坐罪)됨이 어찌 가하겠습니까?ꡓ 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ꡒ경(卿)은 대신(大臣)이니 마땅히 초연(超然)하여 사(私)가 없어야 할 것인데, 어째서 남의 지도(指導)를 받고 이런 말을 하는가?ꡓ 하니, 숙번이 대답하기를, ꡒ신이 젊어서부터 전하를 따랐으니, 전하께서 신의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신은 지도를 받은 일도 없고, 두려워하는 것도 없습니다.ꡓ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ꡒ경이 마땅히 이 대사(大事)를 처리하라.ꡓ 하니, 숙번이 대답하기를, ꡒ전하께서 일찍이 신 등에게 이르시기를, ꡐ모진 매 밑에 무엇을 구(求)하여 얻지 못하랴?ꡑ 하셨습니다. 사성(思誠)이 심한 고문을 받고 그 고통을 참지 못하여 ꡐ모약왕실(謀弱王室)ꡑ이란 초사(招辭)에 승복(承服)한 것입니다. 지금 이것으로 극형을 가하는 것이 가합니까?ꡓ 하였다.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황희(黃喜)를 책하기를, ꡒ작지 않은 재상(宰相)이 이와 같은 말을 아뢰는데 어찌 제지하지 않았는가?ꡓ 하였다. 숙번이 순금사 사직(巡禁司司直) 김이공(金理恭)에게 이르기를, ꡒ임금이 말을 하여 스스로 옳게 여기면, 경대부(卿大夫)가 감히 그 그른 것을 바로 잡지 못하는 것은 예전 사람이 경계(警戒)한 바이다. 남 판서(南判書)․박 참지(朴參知)는 모두 도리를 아는 재상인데, 어째서 다시 아뢰지 않고 모두 뜻에만 아첨하여 이 옥사(獄事)를 이루는가? 그대도 또한 사류(士流)인데 어째서 이같이 하느냐?ꡓ 하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ꡒ주상께서 만일 이 사람들을 반드시 사형하려고 하신다면, 신은 머리를 깎고 도망하겠다.ꡓ 하였다.
권근(權近)이 또한 병든 몸으로 여(輿)를 타고 달려와 고하니, 이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좌정승(左政丞) 성석린(成石璘)․영삼군사(領三軍事) 조영무(趙英茂) 등이 대궐 뜰에 나와, 하윤이 아뢰기를, ꡒ사성(思誠)은 모반(謀叛)한 것도 아니며, 무고(誣告)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공사(公事)에 실수한 것으로 극형을 당하면 어찌 정리(情理)에 맞겠습니까?ꡓ 하고, 성석린은 아뢰기를, ꡒ죄 없는 사람을 죽이느니보다는, 차라리 법을 굽혀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好生之德]으로 민심을 흡족시키는 것이 신들의 소원입니다.ꡓ 하고, 조영무는 아뢰기를, ꡒ신이 사성(思誠)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며, 소사(所司)를 구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전하(殿下)의 덕(德)을 돕고자 하는 것뿐입니다.ꡓ 하였다. 임금이 하윤을 책하기를, ꡒ경이 나더러 잘못이라고 하는 것인가? 공사(公事)를 어찌 실수할 수 있는가?ꡓ 하니, 하윤이 대답하기를, ꡒ예전에 인군(人君)이 형벌(刑罰)을 결단(決斷)하려면 반드시 삼복주(三復奏)․오복주(五復奏)를 기다렸습니다. 옛날에 한 선제(漢宣帝)가 양운(楊?)을 죽였는데, 식자(識者)들이, 위상(魏相)과 병길(丙吉)이 정승(政丞)으로 있고, 우정국(于定國)이 정위(廷尉)로 있으면서 이를 간(諫)하여 저지하지 못한 것을 기롱(譏弄)하였습니다.ꡓ하고, 드디어 통곡하며 말하기를, ꡒ신이 동방(東方)에 오늘날의 임금이 있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ꡓ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ꡒ내가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경들이 아는 바이다.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사성(思誠)의 죄는 죽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경들이 이렇게까지 간(諫)하니, 내가 우선 생각해 보겠다.ꡓ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ꡒ각사(各司)가 이미 시가(市街)에 모였으니, 만일 일찍 유윤(兪允)하지 않으시면 구제하지 못할 것입니다.ꡓ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ꡒ사체(事體)가 지극히 중(重)하고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가볍게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인주(人主)가 혼자서만 국가를 다스릴 수 없고, 경들도 어찌 나를 불의(不義)에 빠뜨리고자 하겠는가? 경들의 말을 따르겠다. 경들도 왕실(王室)이 약해지지 않도록 도모하라.ꡓ 하니, 하윤 등이 모두 울며 사례하고 물러갔다. 우정승(右政丞) 이무(李茂)만은 맹귀미(孟歸美)의 장인(丈人)이기 때문에 감히 정부(政府)의 청(請)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영인본】 1 책 468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정론(政論) / *변란(變亂)(www.history.go.kr 2007)
이백겸(金泉墓地 紀行) [記事] :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말정(李末丁)/ 가을걷이가 한창인 늦은 가을,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화순최씨 부인과 먼저 간 아내를 기리며 자신의 호를 따 건립했다는 아름다운 정자 방초정이 있는 구성면 상원리 원터를 찾았다. 이 마을은 감천과 하원천이 합수되는 안쪽에 자리하여 멀리서 보면 연꽃이 물위에 떠있는 형세라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길지로 전하며 대대로 연안이씨(延安李氏) 부사공파(府使公派) 정양공(靖襄公) 후손들이 집성을 형성하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방초정에서 마을 안길을 따라가다가 오른편 조산골로 접어들면 연성부원군의 위패를 모신 재실 영모재(永慕齋)가 4백년의 풍상 속에서도 꼿꼿이 서있다. 보기 드문 대추나무 기둥으로 세월을 괸 영모재의 담장을 따라 돌면 수 백 년에 걸쳐 효심(孝心)으로 닦였음직한 오솔길을 오르니 지례고을 연안이씨 입향조(入鄕祖)가 되시는 연성부원군 이말정과 장남이신 직강공(直講公) 이숙황(李淑璜)을 비롯한 후손들의 묘소가 조산골 전역에 모셔져 있다. 매봉산 조산골은 예부터 “금비녀가 떨어진 형국”이라 하여 금채낙지처(金釵落地處)로 불리며 조선 8대 명당으로 알려져 왔는데 부원군의 묘소는 응봉산을 배산(背山)으로 하여 청룡과 백호가 반듯하게 섰고 임수(臨水)에 해당하는 감천과 그 너머로 안산(案山)인 문필봉(文筆峯)이 받치고 있는 전형적인 명당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명당의 정점에 자리한 부원군의 묘소가 통상의 관례를 깨고 가장 아래에 위치한 역장(逆葬)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부원군의 16대손인 이현돈(74세)씨는 할아버지가 귀여운 손자들을 무동(舞童) 태우고 있는 격이니 전혀 어색할 것이 없다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또 부원군의 묘소를 배위(配位)인 곡산한씨의 묘소 뒤로 들여 고상비하(考上비下)로 한 것도 특이했다. 부원군 이말정은 연안이씨로 장령(掌令)과 보주지사(甫州知事)를 역임한 증(贈) 병조판서 이백겸(李伯謙)과 온양방씨 사이에 1395년(태조4) 서울에서 태어났다. 1426년(세종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이래 출중한 학문과 높은 덕이 널리 알려져 종5품의 충청도 도사(都事)와 판관(判官), 종3품의 예빈시소윤(禮賓侍少尹)을 역임하다 지례현 지품(知品.지례면 미평리)으로 낙향해 학문에 전념했다. 당시 연고가 없던 김천지방으로의 이주는 스승이자 장인으로 경상도관찰사와 좌찬성을 역임한 곡산한씨 한옹(韓擁)이 지례와 양천동 하로마을에 우거(寓居)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몇 년 후 감천의 범람으로 가옥과 전답이 침수되자 식솔을 거느리고 거창군 모곡(茅谷.거창군 월천면 서변리)으로 이거했다가 다시 지품으로 돌아와 1461년(세조7) 67세를 일기로 졸했다. 부원군은 사후 넷째 자제분인 정양공(靖襄公) 이숙기(李淑琦)가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녹훈(錄勳)되면서 연성부원군에 봉해짐과 동시에 종1품의 좌찬성이 증직되었으며 평정(平靜)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부원군은 정경부인 곡산한씨와의 사이에 5남1녀를 두었는데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해 오자암(五子岩)이란 명성을 얻었다.
장남 숙황(淑璜)은 성균관 직강(直講), 차남 숙형(淑珩)은 감찰(監察), 삼남 숙규(淑珪)는 현령(縣令), 사남 정양공 숙기(淑琦)는 형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역임하며 불천위(不遷位)사당에 배향되었고 오남 문장공(文狀公) 숙함은 이조참판과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부원군은 자제들을 훌륭히 훈육해 나라의 동량으로 삼았고 문중의 중시조를 배출해 가문을 크게 번성시켜 후손 중에서 8명의 판서(判書)와 12명의 목사(牧使)를 배출하며 이 고장을 대표하는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부원군과 곡산한씨의 묘터와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하는데 1446년(세종28) 곡산한씨가 졸하자 마을을 지나가던 한 스님이 터를 정해주며 땅속에서 석함(石函)이 나오더라도 절대 열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것. 이를 대소롭지 않게 여긴 인부가 석함을 열자 벌 두 마리가 날아 나왔는데 이에 스님이 “이 터에서의 발복(發福)이 3년 후로 미루어지겠지만 분명 후손 중에 큰 인물이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후부터 다섯 아들이 차례로 과거에 급제하며 후손들이 번성했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金泉新聞 2009-11-12 오전 1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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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