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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21-2:이백겸(1416재임)
예천고을원(21-2) : 이백겸(1416 재임) : 사헌부 장령을 지낸 예천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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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겸 : 오자암(五子巖) 이업(肄業) / 沙月 李盛永/ (2006. 11. 8)/ 경남 거창읍 동변리 죽동(竹洞)마을은 순수 우리말로 ‘못질마을’이라 부르는데, 이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오자암(五子巖)’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글자 그대로 하면 ‘다섯 아들 바위’라는 뜻이다. 옛날 이말정(李末丁)이라는 선비가 서울에서 벼슬살이 하다가 퇴임하고, 이 마을로 낙향하여 다섯 개 바위가 있는 곳에 집을 짓고 다섯 아들을 그 다섯 바위 위에서 열심히 가르쳐 모두 훌륭한 사람으로 출세 시켰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다섯 바위를 ‘오자암’이라 불러 왔다는 이야기다. 이말정(李末丁)은 태조4년(1395) 남대(南臺: 사헌부) 장령(掌令: 정4품)과 지보주사(知甫州事: 보주는 경북 예천)를 지내면서 보주의 명환(名宦: 명관)으로 동국여지승람 보주군편에 올라 있는 이백겸(李伯謙)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름(末丁) 그대로 3남1녀 중 막내아들이다. 이말정(李末丁)은 후에 장인이 되었고, 태종 14년 전국이 8도로 된 후 최초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평절공(平節公) 빙우(聘于) 한옹(韓擁)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세종8년(1426) 사마시(司馬試: 생원과와 진사과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 생원과와 진사과에 급제 하면 성균관 사마에 입학할 자격을 주기 때문에 붙은 이름)에 급제하여, 학행과 덕망으로 추천되어 충청도 도사(道事: 정6품)와 판관(判官: 정6품)을 지내고, 예빈시(禮賓寺) 소윤(少尹: 副正, 종3품)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낙향한 것이다. 이말정(李末丁)이 최초 낙향한 곳은 지례현(知禮縣) 지품(知品: 현 김천시 구성면 미평리 지품)인데, 특별히 이 곳을 택하여 낙향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지만 장인 한옹이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이말정(李末丁)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장자 숙황(淑璜), 2자 숙형(淑珩), 3자 숙규(淑珪), 4자 숙기(淑琦), 5자 숙함(淑 王咸)이다. 또 거창(居昌) 모곡(矛谷)으로 이사하여 이후 장자 숙황(淑璜), 장손 원례(元禮), 증손 국권(國權), 현손 소백(小白), 5대손 응경(應慶), 6대손 성재(成材), 7세손 수곤(壽崑), 8세손 동형(東亨)까지 8대에 걸쳐 200여 년동안 이곳에서 살면서 이웃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서당집’ 이라 불리다가(오자암 옆에 지은 집이 공부하기 좋은 서당 구조라서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제5자 이숙함(李淑 王咸)이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정3품 당상관)을 지낸 후로는 ‘사성집’이라 불리면서 고가로 유지되어 오다가 지금부터 십 수년 전에 헐렸다고 한다. 지례 지품에서 거창 모곡을 이사하게 된 동기는 잘 알려지지 않으나, 지품에 큰 홍수 때문이 아닌가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거창 모곡에서 이말정(李末丁)의 아들 훈육은 ‘오자암’전설이 생겨날 만큼 혹독했던 것 같다. 그리고 결과는 대 성공적이었다. 다음도표에서 다섯 아들의 등과 현황과 그 다섯 아들이 관직에 진출하여 나라를 위하여 활약한 것을 보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첫째 숙황(淑璜)의 첫 벼슬은 용궁(龍宮) 현감이 되었습니다. 용궁 하니 용왕님이 사는 곳이 아닌가 했더니 사실은 경상도의 한 고을인데 그곳 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을 원 하면 그 고을 제일가는 벼슬살이라 동헌에 나가 높은 자리에 정좌하면 계하에 6방 관속이 좌우에 두 줄로 배열하고, 구종 별배가 시위하는 가운데 "여봐라!” 하고 호령하면 산천초목도 벌벌 떨었다 하니 참 신나는 자리인가 봐요. 우리도 한 번 가보고 싶었지만 어디 갈 수가 있어야지요. 훗날에는 중앙으로 진출해서 성균관 직강 벼슬을 했는데 진사가 되어야 입학할 수 있는 성균관에서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니 이것 또한 장한 일이지요.
오자암 이업(肄業) 결과 다섯 아들(五子)의 과거 급제는 총 13회나 되며, 그 현황을 다음과 같다.
연도(서기) 구분 성명 과거 종류와 급제
세종23년(1441) 장자 이숙황 사마시 등과
단종 1년 (1453) 4 자 이숙기 진사과 2등
단종 1년 (1453) 5 자 이숙함 생원과 장원
단종 1년 (1453) 4 자 이숙기 무과 장원
단종 2년 (1454) 5 자 이숙함 문과 식년시 2등
세조 2년 (1456) 4 자 이숙기 무과 중시 등과
세조 3년 (1457) 5 자 이숙함 문과 중시 등과
세조12년(1466) 5 자 이숙함 문과 발영시 등과
세조14년(1468) 장자 이숙황 문과 춘장시 등과
미 상 2 자 이숙형 사마시 및 문과 등과
미 상 3 자 이숙규 사마시 및 문과 등과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5자 이숙함(李淑 王咸)이 문과, 중시, 발영시 세 번 급제한 것을 사람들은 삼중(三重)이라 칭송해 왔다. 이말정의 다섯 아들이 위와 같이 27년 동안에 13회의 각종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섰는데, 장자 이숙황(李淑璜)은 사마시에는 맨 먼저 등과 했지만 장자로서 집안을 지키고, 일찍 유학에 물들어(早從儒染) 문과는 27년 후에 응시하였기 때문에 관직도 늦어졌다. 용궁현감으로 오래 동안 있었고, 장예원 사평(정6품), 홍문관 부수찬(종6품), 교리(정5품), 성균관 직강(정5품)을 지내다 지례로 낙향하여 선친의 산소를 지키며 만년을 시골에서 조용히 살았다. 지례향교 중수기문(重修記文)(첨부 #1)를 남겼고, 경북 군위 송호서원(松湖書院)에 배향되었다.
첨부 #1 이숙황(李淑璜)의 지례향교(知禮鄕校) 중건기문(重建記文) 「명룬당기(明倫堂記)」
鄒夫子有言曰設爲庠序學校以敎之皆所以明人倫也人倫明之於上小民親於下 然卽 學校者人材之所自出人倫之所自明國家之所倚重焉 可以輕視也(추부자유언왈설위상서학교이교지개소이명인륜야 인륜명지어상소민친어하 연즉 학교자인재지소자출인륜지소자명국가지소의중언 가이경시야) : 추부자(鄒夫子: 孟子, 중국 추부지방 태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상서(庠序: 지방의 작은 학교)와 학교를 세워서 가르치는 것은 모두가 인륜(人倫)을 밝히는 것이다. 위로는 인륜이 밝고, 그 아래서 백성이 이(배움)와 친하게 되어 결국 학교가 인재(人才)를 배출하는 것은 자연히 인륜을 밝히는 바가 되니 나라에서는 매우 소중한 일이다. 어찌 가벼이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惟吾東方僻在海隅舊無學校之敎前朝光廟因雙冀制科擧臨軒榮士儒風稍興自是以來內立成均外建鄕學置敎官聚生徒敎之以窮理正心相與切嗟琢磨所養人材禮樂文物彬彬可考矣(유오동방벽재해우구무학교지교전조광묘인쌍기제과거임헌영사유풍초흥자시이래내입성균외건향학치교관취생도교지이궁리정심상여절차탁마소양인재예악문물빈빈가고의) : 생각컨대 우리나라는 동방의 한쪽에 치우쳐 있어서 옛날에는 학교교육이라는 것이 없다가 고려 광종(光宗: 4대, 서기950년-975년) 때 쌍기제(雙冀制: 후주의 쌍기라는 사람에 의해 들여온 것)의 과거제도가 들어와서 임헌영사(臨軒榮士: 벼슬을 하여 영화를 누리는 선비)하는 유학(儒學)의 풍토가 초흥(稍興)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울에는 성균관(成均館)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학(鄕學)을 세워서 궁리정심(窮理正心)을 가르치고 서로간에 절차탁마(切嗟琢磨)하면서 인재를 양성하니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빈빈(彬彬)하게 되어 가히 높이 평가 할 수 있게 되었다. * 대학8조목(大學八條目):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濟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吾桑鄕小邑在三韓以知品小縣屬於甘文國統合之後移知品代此邑號稱知禮山川狹僻人物鮮少草創未遑學校未建韋布之徒惑僧舍惑舍解東移西遷未有定處(오상향소읍재삼한이지품소현속어감문국통합지후이지품대차읍호칭지례산천협벽인물선소초창미황학교미건위포지도혹승사혹사해동이서천미유정처) : 우리의 상향(桑鄕: 桑梓之鄕, 고향)은 소읍으로서 삼한시대에는 지품(知品)이라는 작은 고을로 감문국(甘文國)에 속하다가 신라에 통합된 후에는 지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지금의 읍호인 지례(知禮)로 바뀌었다. 산천이 협벽(狹僻: 협소하고 궁벽함)하고, 인물이 선소(鮮少: 드물다)하며, 초창(草創)이 미황(未遑)하고, 학교를 세우지 못하여 위포(韋布: 韋袴布皮, 가죽바지와 무명옷, 가난한 선비)의 무리들이 혹은 승사(僧舍: 절)로 혹은 사해(舍解: 집을 나와)로 동이서천(東移西遷: 사방으로 떠돌아 다님)하면서 정처없이 떠돌아다니었다. * 감문국(甘文國):삼한시대의 변한(弁韓)의 한 제후국으로 현 경북 김천시 감문면을 중심으로 세워졌던 나라이다.
歲在宣德丙午鄭侯雍符玆縣悶鄕校之無定卜之於宕舍東北隅重谷回勢可建學宮於是先構大成殿次構校房東抹樓鹵齊房鄕校之制儀略具而無敎官講廳師生雜處禮儀蔑如何(세재 선덕병오정후옹부자현민향교지무정복지어탕사동북우중곡회세가건학궁어시선구대성전차구교방동말누로제방향교지제의약구이무교관강청사생잡처예의멸여하) : 때는 선덕 병오(宣德 丙午: 세종 8년, 서기1426년)에 정옹(鄭雍) 후(侯)가 이고을 에 부임해 와서 향교(鄕校)가 없음을 민망하게 생각하고 탕사(宕舍)의 동북쪽 변두리에 터를 정하고 중곡(重谷)의 세(勢)를 피하여 학궁(學宮)을 세웠는데 먼저 대성전(大成殿)을 지은 다음 그 동쪽에 교방(校房)을 짓고, 누각을 없앤 자리에 제방(齊房)을 지어서 향교의 제의(制儀)를 대략 갖추었으나 교관의 강청이 따로 없어서 스승과 생도가 함께 섞여 있게 되어 예의를 가출수 없게 되니 이를 어찌하리오.
幸성化乙巳秋野成金秀文쉬于玆鄕弊祛化治民安物阜慨然有之於學校悶其制度之未周書糧之惑乏公務之暇乃設明倫堂數間衙前前堂後室師生區別禮儀可觀 又給田二結擧皆沃어之地也 制度之未周書己周書糧之乏絶者可補旴亦盛矣(행성화을사추야성김수문쉬우자향폐거화치민안물부개연유지어학교민기제도지미주서량지혹핍공무지가내설명륜당수간아전전당후실사생구별예의가관 우급전이결거개옥어지지야 제도지미주서기주서양지핍절자가보우역성의) : 다행이도 성화 을사년(成化 乙巳年: 성종 16년, 서기 1485년) 가을에 야성(野成) 김수문(金秀文) 후(侯)가 이 고을의 원으로 와서 모든 폐습을 떨쳐버리고, 인정(仁政)이 두루 미치게 하며, 백성을 편안케 하고, 온갖 물자가 풍성하게 하더니 개연히 학교에 뜻을 두어 서책을 제대로 갖추지 못 했거나 식량이 결핍하는 등 그 제도의 미흡함을 민망하게 여기고 공무의 여가를 내서 관아 앞에 수간의 명륜당(明倫堂)을 지어 전당(前堂) 후실(後室)로 나누어 스승과 생도를 구별하게 되니 예의가 가관이더라. 또한 급전(給田) 2결(二結: 1결은 方 33步, 2결은 方47步)을 내 놓으니 모두 다 비옥한 땅이더라. 서책을 갖추지 못한 자에게는 책을 주선해 주고 양식이 떨어진 자에게는 양식을 도울 수 있어 장차 크게 융성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니 장차 크게 융성할 수 있는 기초를 굳게 하였다.
鄭侯創之於前金侯繼之於帿繼之功豈徒所以前創也況又給田賁糧興小異養人材於萬世命人倫於無窮壽斯文比箕翼者功滿滿矣尤豈非吾鄕之大幸也哉(정후창지어전김후계지어후계지공기도소이전창야황우급전분량흥소이양인재어만세명인륜어무궁수사문비기익자공만만의우기비오향 지대행야재) : 정후(鄭侯)가 앞서 창건하고 김후(金侯)가 뒤네 계승하니 그 이은 공(功)이 어찌 앞서 창건(創建)한 공을 따르지 못하리오. 또한 급전(給田)은 양식을 넉넉하게하였으니 만세(萬世)토록 인재를 기르고 무궁(無窮)토록 인륜을 밝혀서 사문(斯文)이 기익(箕翼: 별 이름)의 두 별처럼 오래도록 수(壽) 할 수 있게 하였으니 그 공이야 말로 만만(滿滿)이로세. 이 어찌 우리 고을의 크나큰 행운이 아니리오!
歲在宬化乙酉余爲成均館金侯指我錄名升諸司馬幾又攀月桂今以襄老桂冠歸鄕則金侯謂余詳知學校之顚末囑之以記不敢叭拙辭略敍首尾不備後人之觀感云稱旨(세재성화을유여위성균관김후지아록명승제사마기우반월계금이양노계관귀향칙김후위여상지학교지전말촉지이기불감팔졸사약서수미불비후인지관감운칭지) : 성화 을유년(成化 乙酉年: 세조 11년, 서기1466년)에 내가 성균관에 있을 때 김후(金侯)가 나의 글을 가리켜 여러 사마(司馬: 성균관 유생)들 중에서 명승(名升: 명망이 높음)이라고 하더니 멀지 않아서 과거에 급제 하였다. 지금은 늙어서 계관(桂冠: 미약한 관직)으로 귀향하였더니 김후(金侯)께서 와서 내가 학교의 전말(顚末)에 대하여 자세히 안다면서 기문(記文)을 촉탁하니 감히 입벌려 졸사(拙辭)하지 못하였는데 처음과 끝(首尾)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은 직접 보고 감상(感賞)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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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겸 : 오자암(五子巖) 이업(肄業) / 沙月 李盛永/ (2006. 11. 8)/ 경남 거창읍 동변리 죽동(竹洞)마을은 순수 우리말로 ‘못질마을’이라 부르는데, 이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오자암(五子巖)’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글자 그대로 하면 ‘다섯 아들 바위’라는 뜻이다. 옛날 이말정(李末丁)이라는 선비가 서울에서 벼슬살이 하다가 퇴임하고, 이 마을로 낙향하여 다섯 개 바위가 있는 곳에 집을 짓고 다섯 아들을 그 다섯 바위 위에서 열심히 가르쳐 모두 훌륭한 사람으로 출세 시켰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다섯 바위를 ‘오자암’이라 불러 왔다는 이야기다. 이말정(李末丁)은 태조4년(1395) 남대(南臺: 사헌부) 장령(掌令: 정4품)과 지보주사(知甫州事: 보주는 경북 예천)를 지내면서 보주의 명환(名宦: 명관)으로 동국여지승람 보주군편에 올라 있는 이백겸(李伯謙)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름(末丁) 그대로 3남1녀 중 막내아들이다. 이말정(李末丁)은 후에 장인이 되었고, 태종 14년 전국이 8도로 된 후 최초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평절공(平節公) 빙우(聘于) 한옹(韓擁)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세종8년(1426) 사마시(司馬試: 생원과와 진사과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 생원과와 진사과에 급제 하면 성균관 사마에 입학할 자격을 주기 때문에 붙은 이름)에 급제하여, 학행과 덕망으로 추천되어 충청도 도사(道事: 정6품)와 판관(判官: 정6품)을 지내고, 예빈시(禮賓寺) 소윤(少尹: 副正, 종3품)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낙향한 것이다. 이말정(李末丁)이 최초 낙향한 곳은 지례현(知禮縣) 지품(知品: 현 김천시 구성면 미평리 지품)인데, 특별히 이 곳을 택하여 낙향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지만 장인 한옹이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이말정(李末丁)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장자 숙황(淑璜), 2자 숙형(淑珩), 3자 숙규(淑珪), 4자 숙기(淑琦), 5자 숙함(淑 王咸)이다. 또 거창(居昌) 모곡(矛谷)으로 이사하여 이후 장자 숙황(淑璜), 장손 원례(元禮), 증손 국권(國權), 현손 소백(小白), 5대손 응경(應慶), 6대손 성재(成材), 7세손 수곤(壽崑), 8세손 동형(東亨)까지 8대에 걸쳐 200여 년동안 이곳에서 살면서 이웃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서당집’ 이라 불리다가(오자암 옆에 지은 집이 공부하기 좋은 서당 구조라서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제5자 이숙함(李淑 王咸)이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정3품 당상관)을 지낸 후로는 ‘사성집’이라 불리면서 고가로 유지되어 오다가 지금부터 십 수년 전에 헐렸다고 한다. 지례 지품에서 거창 모곡을 이사하게 된 동기는 잘 알려지지 않으나, 지품에 큰 홍수 때문이 아닌가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거창 모곡에서 이말정(李末丁)의 아들 훈육은 ‘오자암’전설이 생겨날 만큼 혹독했던 것 같다. 그리고 결과는 대 성공적이었다. 다음도표에서 다섯 아들의 등과 현황과 그 다섯 아들이 관직에 진출하여 나라를 위하여 활약한 것을 보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첫째 숙황(淑璜)의 첫 벼슬은 용궁(龍宮) 현감이 되었습니다. 용궁 하니 용왕님이 사는 곳이 아닌가 했더니 사실은 경상도의 한 고을인데 그곳 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을 원 하면 그 고을 제일가는 벼슬살이라 동헌에 나가 높은 자리에 정좌하면 계하에 6방 관속이 좌우에 두 줄로 배열하고, 구종 별배가 시위하는 가운데 "여봐라!” 하고 호령하면 산천초목도 벌벌 떨었다 하니 참 신나는 자리인가 봐요. 우리도 한 번 가보고 싶었지만 어디 갈 수가 있어야지요. 훗날에는 중앙으로 진출해서 성균관 직강 벼슬을 했는데 진사가 되어야 입학할 수 있는 성균관에서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니 이것 또한 장한 일이지요.
오자암 이업(肄業) 결과 다섯 아들(五子)의 과거 급제는 총 13회나 되며, 그 현황을 다음과 같다.
연도(서기) 구분 성명 과거 종류와 급제
세종23년(1441) 장자 이숙황 사마시 등과
단종 1년 (1453) 4 자 이숙기 진사과 2등
단종 1년 (1453) 5 자 이숙함 생원과 장원
단종 1년 (1453) 4 자 이숙기 무과 장원
단종 2년 (1454) 5 자 이숙함 문과 식년시 2등
세조 2년 (1456) 4 자 이숙기 무과 중시 등과
세조 3년 (1457) 5 자 이숙함 문과 중시 등과
세조12년(1466) 5 자 이숙함 문과 발영시 등과
세조14년(1468) 장자 이숙황 문과 춘장시 등과
미 상 2 자 이숙형 사마시 및 문과 등과
미 상 3 자 이숙규 사마시 및 문과 등과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5자 이숙함(李淑 王咸)이 문과, 중시, 발영시 세 번 급제한 것을 사람들은 삼중(三重)이라 칭송해 왔다. 이말정의 다섯 아들이 위와 같이 27년 동안에 13회의 각종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섰는데, 장자 이숙황(李淑璜)은 사마시에는 맨 먼저 등과 했지만 장자로서 집안을 지키고, 일찍 유학에 물들어(早從儒染) 문과는 27년 후에 응시하였기 때문에 관직도 늦어졌다. 용궁현감으로 오래 동안 있었고, 장예원 사평(정6품), 홍문관 부수찬(종6품), 교리(정5품), 성균관 직강(정5품)을 지내다 지례로 낙향하여 선친의 산소를 지키며 만년을 시골에서 조용히 살았다. 지례향교 중수기문(重修記文)(첨부 #1)를 남겼고, 경북 군위 송호서원(松湖書院)에 배향되었다.
첨부 #1 이숙황(李淑璜)의 지례향교(知禮鄕校) 중건기문(重建記文) 「명룬당기(明倫堂記)」
鄒夫子有言曰設爲庠序學校以敎之皆所以明人倫也人倫明之於上小民親於下 然卽 學校者人材之所自出人倫之所自明國家之所倚重焉 可以輕視也(추부자유언왈설위상서학교이교지개소이명인륜야 인륜명지어상소민친어하 연즉 학교자인재지소자출인륜지소자명국가지소의중언 가이경시야) : 추부자(鄒夫子: 孟子, 중국 추부지방 태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상서(庠序: 지방의 작은 학교)와 학교를 세워서 가르치는 것은 모두가 인륜(人倫)을 밝히는 것이다. 위로는 인륜이 밝고, 그 아래서 백성이 이(배움)와 친하게 되어 결국 학교가 인재(人才)를 배출하는 것은 자연히 인륜을 밝히는 바가 되니 나라에서는 매우 소중한 일이다. 어찌 가벼이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惟吾東方僻在海隅舊無學校之敎前朝光廟因雙冀制科擧臨軒榮士儒風稍興自是以來內立成均外建鄕學置敎官聚生徒敎之以窮理正心相與切嗟琢磨所養人材禮樂文物彬彬可考矣(유오동방벽재해우구무학교지교전조광묘인쌍기제과거임헌영사유풍초흥자시이래내입성균외건향학치교관취생도교지이궁리정심상여절차탁마소양인재예악문물빈빈가고의) : 생각컨대 우리나라는 동방의 한쪽에 치우쳐 있어서 옛날에는 학교교육이라는 것이 없다가 고려 광종(光宗: 4대, 서기950년-975년) 때 쌍기제(雙冀制: 후주의 쌍기라는 사람에 의해 들여온 것)의 과거제도가 들어와서 임헌영사(臨軒榮士: 벼슬을 하여 영화를 누리는 선비)하는 유학(儒學)의 풍토가 초흥(稍興)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울에는 성균관(成均館)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학(鄕學)을 세워서 궁리정심(窮理正心)을 가르치고 서로간에 절차탁마(切嗟琢磨)하면서 인재를 양성하니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빈빈(彬彬)하게 되어 가히 높이 평가 할 수 있게 되었다. * 대학8조목(大學八條目):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濟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吾桑鄕小邑在三韓以知品小縣屬於甘文國統合之後移知品代此邑號稱知禮山川狹僻人物鮮少草創未遑學校未建韋布之徒惑僧舍惑舍解東移西遷未有定處(오상향소읍재삼한이지품소현속어감문국통합지후이지품대차읍호칭지례산천협벽인물선소초창미황학교미건위포지도혹승사혹사해동이서천미유정처) : 우리의 상향(桑鄕: 桑梓之鄕, 고향)은 소읍으로서 삼한시대에는 지품(知品)이라는 작은 고을로 감문국(甘文國)에 속하다가 신라에 통합된 후에는 지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지금의 읍호인 지례(知禮)로 바뀌었다. 산천이 협벽(狹僻: 협소하고 궁벽함)하고, 인물이 선소(鮮少: 드물다)하며, 초창(草創)이 미황(未遑)하고, 학교를 세우지 못하여 위포(韋布: 韋袴布皮, 가죽바지와 무명옷, 가난한 선비)의 무리들이 혹은 승사(僧舍: 절)로 혹은 사해(舍解: 집을 나와)로 동이서천(東移西遷: 사방으로 떠돌아 다님)하면서 정처없이 떠돌아다니었다. * 감문국(甘文國):삼한시대의 변한(弁韓)의 한 제후국으로 현 경북 김천시 감문면을 중심으로 세워졌던 나라이다.
歲在宣德丙午鄭侯雍符玆縣悶鄕校之無定卜之於宕舍東北隅重谷回勢可建學宮於是先構大成殿次構校房東抹樓鹵齊房鄕校之制儀略具而無敎官講廳師生雜處禮儀蔑如何(세재 선덕병오정후옹부자현민향교지무정복지어탕사동북우중곡회세가건학궁어시선구대성전차구교방동말누로제방향교지제의약구이무교관강청사생잡처예의멸여하) : 때는 선덕 병오(宣德 丙午: 세종 8년, 서기1426년)에 정옹(鄭雍) 후(侯)가 이고을 에 부임해 와서 향교(鄕校)가 없음을 민망하게 생각하고 탕사(宕舍)의 동북쪽 변두리에 터를 정하고 중곡(重谷)의 세(勢)를 피하여 학궁(學宮)을 세웠는데 먼저 대성전(大成殿)을 지은 다음 그 동쪽에 교방(校房)을 짓고, 누각을 없앤 자리에 제방(齊房)을 지어서 향교의 제의(制儀)를 대략 갖추었으나 교관의 강청이 따로 없어서 스승과 생도가 함께 섞여 있게 되어 예의를 가출수 없게 되니 이를 어찌하리오.
幸성化乙巳秋野成金秀文쉬于玆鄕弊祛化治民安物阜慨然有之於學校悶其制度之未周書糧之惑乏公務之暇乃設明倫堂數間衙前前堂後室師生區別禮儀可觀 又給田二結擧皆沃어之地也 制度之未周書己周書糧之乏絶者可補旴亦盛矣(행성화을사추야성김수문쉬우자향폐거화치민안물부개연유지어학교민기제도지미주서량지혹핍공무지가내설명륜당수간아전전당후실사생구별예의가관 우급전이결거개옥어지지야 제도지미주서기주서양지핍절자가보우역성의) : 다행이도 성화 을사년(成化 乙巳年: 성종 16년, 서기 1485년) 가을에 야성(野成) 김수문(金秀文) 후(侯)가 이 고을의 원으로 와서 모든 폐습을 떨쳐버리고, 인정(仁政)이 두루 미치게 하며, 백성을 편안케 하고, 온갖 물자가 풍성하게 하더니 개연히 학교에 뜻을 두어 서책을 제대로 갖추지 못 했거나 식량이 결핍하는 등 그 제도의 미흡함을 민망하게 여기고 공무의 여가를 내서 관아 앞에 수간의 명륜당(明倫堂)을 지어 전당(前堂) 후실(後室)로 나누어 스승과 생도를 구별하게 되니 예의가 가관이더라. 또한 급전(給田) 2결(二結: 1결은 方 33步, 2결은 方47步)을 내 놓으니 모두 다 비옥한 땅이더라. 서책을 갖추지 못한 자에게는 책을 주선해 주고 양식이 떨어진 자에게는 양식을 도울 수 있어 장차 크게 융성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니 장차 크게 융성할 수 있는 기초를 굳게 하였다.
鄭侯創之於前金侯繼之於帿繼之功豈徒所以前創也況又給田賁糧興小異養人材於萬世命人倫於無窮壽斯文比箕翼者功滿滿矣尤豈非吾鄕之大幸也哉(정후창지어전김후계지어후계지공기도소이전창야황우급전분량흥소이양인재어만세명인륜어무궁수사문비기익자공만만의우기비오향 지대행야재) : 정후(鄭侯)가 앞서 창건하고 김후(金侯)가 뒤네 계승하니 그 이은 공(功)이 어찌 앞서 창건(創建)한 공을 따르지 못하리오. 또한 급전(給田)은 양식을 넉넉하게하였으니 만세(萬世)토록 인재를 기르고 무궁(無窮)토록 인륜을 밝혀서 사문(斯文)이 기익(箕翼: 별 이름)의 두 별처럼 오래도록 수(壽) 할 수 있게 하였으니 그 공이야 말로 만만(滿滿)이로세. 이 어찌 우리 고을의 크나큰 행운이 아니리오!
歲在宬化乙酉余爲成均館金侯指我錄名升諸司馬幾又攀月桂今以襄老桂冠歸鄕則金侯謂余詳知學校之顚末囑之以記不敢叭拙辭略敍首尾不備後人之觀感云稱旨(세재성화을유여위성균관김후지아록명승제사마기우반월계금이양노계관귀향칙김후위여상지학교지전말촉지이기불감팔졸사약서수미불비후인지관감운칭지) : 성화 을유년(成化 乙酉年: 세조 11년, 서기1466년)에 내가 성균관에 있을 때 김후(金侯)가 나의 글을 가리켜 여러 사마(司馬: 성균관 유생)들 중에서 명승(名升: 명망이 높음)이라고 하더니 멀지 않아서 과거에 급제 하였다. 지금은 늙어서 계관(桂冠: 미약한 관직)으로 귀향하였더니 김후(金侯)께서 와서 내가 학교의 전말(顚末)에 대하여 자세히 안다면서 기문(記文)을 촉탁하니 감히 입벌려 졸사(拙辭)하지 못하였는데 처음과 끝(首尾)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은 직접 보고 감상(感賞)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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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