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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26-1:안리(1455.윤6이임)
예천고을원(26-1) : 안리(1455.윤6 이임) :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예천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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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리(安理, 1393-?)는 단종 때 부임하여 1455년(단종 3) 윤 6월에 이임한 지예천군사(知醴泉郡事, 現 醴泉郡守)이다.
호는 서파(西坡) 또는 낙원(樂園), 본관은 순흥, 향(珦)의 후손, 형조전서 원의 손자, 판서 종약(從約)의 넷째 아들, 참찬 구의 셋째 동생, 보문면 순흥 안씨의 조상이다.
음사로 의령 현감이 되어 선정을 하여 예천고을 원으로 영전하여 재임하던 중 단종이 물러날 때(1455.윤6)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태가 뜻대로 되지 않아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영주시 안정면 용산리)에서 독서와 산보를 즐기면서 외부 세계와는 일체 연락을 끊고 지내다가 작고하였다.
후손은 보문면을 비롯하여 예천군 일원에 대대로 살고 있다. 또, 순흥, 봉화, 강원도 등지에도 살고 있다. 묘는 대룡산 계곡 자좌에 있다. 셋째 아들 용양위부사 안계문은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후에 문중에서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 446번지에 안리를 위한 별묘를 세우고 부인과 함께 신주를 모셨다.
안리가 예천고을 원으로 있을 무렵인 1454년(단종 2)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예천군에 781호, 3,800명, 용궁현에 396호, 2,125명, 다인현에 311호, 1,427명, 은풍현이 75호, 300명이었다.
그리고 간전 면적은 예천군이 7,298결, 용궁현이 4,191결이고, 역은 창락도 역승 소속으로 유동역(감천), 통명역(예천읍)이 있고, 유곡도 역승 소속으로 수산역(풍양), 용궁신역(대은리), 지보역(지보리)이 있고, 도기소로는 예천군 금당곡(용문)과 용궁현 양정리(풍양)에 있는데, 모두 하품 생산이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1.8.30)
안리(安理) : 조선 단종 때 부임, 1455년(단종 3) 윤 6월에 이임한 지예천군사(知醴泉郡事, 現 醴泉郡守)이다. 1393(태조 2)-?, 보문면 순흥 안씨의 선조, 순흥 안씨 서파공파(西坡公派) 파조, 호는 서파(西坡)ㆍ낙원(樂園), 본관은 순흥, 향(珦)의 후손, 형조전서 원의 손자, 판서 종약(從約)의 4자, 참찬 구(玖)의 셋째 동생이다. 음사로 의령(宜寧) 현감이 되어 선정을 하여 지예천군사로 영전하여 재임하던 중 단종이 물러날 때(1455.윤6)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태가 여의치 못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영주시 안정면 용산리)에서 독서와 주유(周遊)를 즐기면서 외부 세계와는 일체 연락을 끊고 지내다가 작고하였다. 후손들은 보문면을 비롯하여 군 일원에 세거하고 있고, 순흥, 봉화, 강원도 등지에도 살고 있다. 묘는 대룡산 계곡 자좌(大龍山桂谷子坐)에 있다. 셋째 아들 용양위 부사 계문(季文)은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그 후 문중에서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 446번지 대룡산에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이 서파정과 안씨별묘(安氏別廟)를 세우고 부인과 함께 신주를 모셨다. 또한 종택도 그곳에 있다.(인터넷 한미르 2001, 인터넷 netian 2001, user.chollian.net 2002)
안리(安理) : 조선 단종 때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 보문면 순흥 안씨 입향조, 호는 서파(西坡), 본관은 순흥, 향(珦)의 후손, 음사로 의령(宜寧) 현감이 되어 선정을 하여 예천 군수로 영전하여 재임하던 중 단종이 물러날 때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태가 여의치 못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예천군에 눌러 살았다. 그의 후손이 보문면을 비롯하여 군 일원에 세거하고 있다. 그 후 문중에서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 446번지에 별묘(別廟)를 세우고 부인과 함께 신주를 모셨다.
안리 [記事] : <효암문집[曉庵文集, 1963]>에 실린 이중철[李中轍]의 예천군수 안리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通訓大夫醴泉郡事 西坡先生安公墓碣銘[幷序]/ 晦軒夫子。倡道東方。嘉惠後學。仁深而德厚。源遠而流長。 子孫至六七世而金玉滿朝。卿相布列。有若 西坡先生諱 理以。晦軒之孫。獨以盛滿爲戒。胎?名利歸梓鄕。時則 端廟遜矣。獨抱幽貞超然自靖。其義與六臣不甚相遠。其 後孫 克?祖訓。世世業儒。不求聞達?爵之典。不及於 泉壤俎豆之儀。亦毁於一時。則今於四百年之後。何能想 傷其潛光隱德之萬一哉後孫 宗熙 敎煥 敎德等。方營改 碣訪余。囑以顯刻詩。自顧廢蟄絶筆久矣。而均是爲先竊 有所感於心者。謹按而敍之。安氏系出 順興。文成公 晦軒 夫子爲六世祖。五世祖諱于器。順平君。文順公。號屋子。高 祖諱 牧。順興君 文淑公。號 謙齋。曾祖諱 元崇 順成君。文惠公。祖諱?。刑曹典書謚景質。考諱宗約。海州牧使贈吏曹判書。?貞夫人 東萊鄭氏。蓬原府原君 良度公諱良女。 癸酉。先生生于 瑞原舊第。風儀俊偉字量宏深。伯仲兩兄 俱登貴顯。獨不樂仕進。杜門讀書。以探?蘊奧爲務。嘗曰 吾家自先正以。後歷顯于朝。昆弟子姪充滿臺府。此正 ?藏之時也。外補 宜寧。?勉赴任。歲値凶荒。民多散亡。刻 捧設賑。恩信普洽流逋四歸。道伯以治績褒聞于朝。翌 年甲戌。移拜醴泉。未幾莊陵遜位。投?歸鄕。卜居樓巖 山下。命其理曰 大龍山。改山名曰龍巖。改軒號曰 樂園。丁丑。六臣禍起。錦城大君被誅。先生杜門謝客。瞻望 寧越。恒 自悲傷。歿後數歲。己卯禍作。京中諸族俱被慘酷。惟先生 家獨免。時人服其前知之鑑。墓在順興府大龍山桂谷子 坐原。純廟壬午。以士林公議?享于 龍淵祠。配淑人 慶州李氏。鷄川君 從直女 月城君之秀五世孫。墓?先生。兆 後育五男。伯文 叔文俱無後。季文蔭副司直。贈兵判。興文 佐郞。益文 司果。判書三男 瑛進士。玎 忠順衛。瑠 佐郞。二男 熙 別坐。燾 司果。二男 ? 同樞。信 判官。餘不盡錄於乎。先 生生長於詩禮之庭。簪纓之族。初不以富貴利達?其心。 閉門守靜。?潛性理。其操守之堅學問之深有不可窺測 矣。暫試外補遺愛兩邑。豈足以展其所蘊哉。枳棘之林已 非鸞鳳所棲。山陽之雉可以色擧矣。不俟終日棲山?晦。 其出處之正志節之高。足以凜百世質神明矣。黃石公有 言曰。後人苟不明百世無賢人。不?雖筆萎言輕。竊自附 於百世之公言。係之以銘曰 知滿而退。明哲之卓。自靖而隱。秉執之確。行藏允合。心跡 俱潔。桂谷之陽。有?其石。千載起敬。過者必式。"이다.(www.koreastudy.or.kr 2006)
안리 [記事] : <효암문집[曉庵文集, 1963]>에 실린 이중철[李中轍]의 기사로, 그 내용은, “曉庵文集目錄/ 卷之十二/ 墓碣銘/ 通訓大夫醴泉/ 郡事/ 西坡先生安公墓碣銘[幷序]”이다.(www.koreastudy.or.kr 2006)
안리 [記事] : 효암집(曉庵集) 16권 8책 중 卷11에 실린 내용이다. 墓碣銘 / 通訓大夫醴泉郡事西坡先生安公墓碣銘(幷序)/ 예천군사 安理의 묘갈명이다. 호는 西坡, 본관은 順興이다.(http://www.koreastudy.or.kr 2007)
안리(安理) [記事] : 생애이야기/ 성명 : 안리(安理)(1393년(태조 1) ~?)/ 본관 : 순흥(順興)/ 출생지 : 파주(坡州)의 옛 집/ 출신지 : 순흥((順興)/ 분묘지 : 순흥 남쪽 대룡산(大龍山) 계곡(桂谷)/ 외관직 : 의령 현감(宜寧縣監), 예천 군수(醴泉郡守)/ 독서와 학문을 벗 삼아 지내다 : 서파 안리는 1393년(태조 1) 파주의 옛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풍채가 훌륭하고 도량이 크고 깊었다고 한다. 또한 가정에서 배운 문장과 학업은 당대의 명사들이 하나같이 숭상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찬성(贊成)과 판윤(判尹)에 오른 큰 형과 작은 형과는 달리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안리의 이러한 마음가짐은 ꡒ우리 가문은 회헌 이후 역대로 조정에 현달하여 형제와 자질들이 사헌부에 가득하고 온 가문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천한 옷을 입은 사람이 없으니 지금이 바로 자신을 거두어 숨길 때이다.ꡓ 라는 말에도 잘 드러난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대신 문을 닫고 독서에 열중하면서 심오한 도리를 되새기고 깊은 학문을 쌓는 것에 만족했다./ 짧은 관직 생활 속의 뛰어난 치적 : 이렇듯 조정의 일을 즐기지 않았던 그였기에 그리 오랜 관직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타고난 곧은 품성과 뛰어난 능력은 숨길 수 없는 법, 비록 두 번의 짧은 관직 생활이었지만 그는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의령현(宜寧縣)에 잠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마침 흉년이 들어 백성들 가운데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이 많아지자 안리는 자신의 녹봉을 나누어서 백성들을 구휼하였고, 이에 달아나 유랑하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돌아왔다고 한다. 이 일은 관찰사를 통해 조정에 알려졌고 그 다음해 안리는 예천 군수로 임명을 받았다./ 고향에 은둔하여 단종을 그리워하다 : 그가 예천 군수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사양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사실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안리는 결국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누암산(樓巖山) 밑에 집터를 잡고 살면서 학문에만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을 이름을 대룡산, 산 이름을 용암산(龍巖山)이라고 고쳐 불렀는데 이는 제갈량(諸葛亮)이 와룡(臥龍)에 은거한 뜻을 취한 것이라 한다. 한편 호를 낙원(樂園)이라고 개칭하기도 했는데 이는 송 나라 사마광(司馬光)의 독락원(獨樂園) 취향을 취한 것이라 한다. 이렇듯 그는 말년을 고향에서 은거를 하며 보냈다. 특히 사육신의 참화 이후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이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고 연이어 순흥부 내의 판복을 입은 70여 가문이 일시에 전멸을 당하자, 안리는 문을 막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더욱 더 깊이 몸을 숨겼다. 그는 명공과 거경(巨卿)들의 서신에도 답서를 하지 않았고, 방백과 수령들의 방문에도 응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영월을 우러러 바라보며 항상 슬퍼하고 상심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서울에 사는 현달한 반열에 있는 조카와 종손들이 그를 걱정하여 좋은 음식물이라도 보내려 하면 ꡒ소백산의 명아주와 콩잎국이 내 분수에 만족한데 관청에서 내려진 고량진미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ꡓ 라며 단호하게 물리쳤으니, 그의 검약과 지조 또한 알만하다. 이렇게 은거 생활을 하며 단종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던 안리는 자신의 고향에서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는 순흥부의 남쪽 대룡산의 계곡 언덕에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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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리(安理, 1393-?)는 단종 때 부임하여 1455년(단종 3) 윤 6월에 이임한 지예천군사(知醴泉郡事, 現 醴泉郡守)이다.
호는 서파(西坡) 또는 낙원(樂園), 본관은 순흥, 향(珦)의 후손, 형조전서 원의 손자, 판서 종약(從約)의 넷째 아들, 참찬 구의 셋째 동생, 보문면 순흥 안씨의 조상이다.
음사로 의령 현감이 되어 선정을 하여 예천고을 원으로 영전하여 재임하던 중 단종이 물러날 때(1455.윤6)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태가 뜻대로 되지 않아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영주시 안정면 용산리)에서 독서와 산보를 즐기면서 외부 세계와는 일체 연락을 끊고 지내다가 작고하였다.
후손은 보문면을 비롯하여 예천군 일원에 대대로 살고 있다. 또, 순흥, 봉화, 강원도 등지에도 살고 있다. 묘는 대룡산 계곡 자좌에 있다. 셋째 아들 용양위부사 안계문은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후에 문중에서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 446번지에 안리를 위한 별묘를 세우고 부인과 함께 신주를 모셨다.
안리가 예천고을 원으로 있을 무렵인 1454년(단종 2)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예천군에 781호, 3,800명, 용궁현에 396호, 2,125명, 다인현에 311호, 1,427명, 은풍현이 75호, 300명이었다.
그리고 간전 면적은 예천군이 7,298결, 용궁현이 4,191결이고, 역은 창락도 역승 소속으로 유동역(감천), 통명역(예천읍)이 있고, 유곡도 역승 소속으로 수산역(풍양), 용궁신역(대은리), 지보역(지보리)이 있고, 도기소로는 예천군 금당곡(용문)과 용궁현 양정리(풍양)에 있는데, 모두 하품 생산이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1.8.30)
안리(安理) : 조선 단종 때 부임, 1455년(단종 3) 윤 6월에 이임한 지예천군사(知醴泉郡事, 現 醴泉郡守)이다. 1393(태조 2)-?, 보문면 순흥 안씨의 선조, 순흥 안씨 서파공파(西坡公派) 파조, 호는 서파(西坡)ㆍ낙원(樂園), 본관은 순흥, 향(珦)의 후손, 형조전서 원의 손자, 판서 종약(從約)의 4자, 참찬 구(玖)의 셋째 동생이다. 음사로 의령(宜寧) 현감이 되어 선정을 하여 지예천군사로 영전하여 재임하던 중 단종이 물러날 때(1455.윤6)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태가 여의치 못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영주시 안정면 용산리)에서 독서와 주유(周遊)를 즐기면서 외부 세계와는 일체 연락을 끊고 지내다가 작고하였다. 후손들은 보문면을 비롯하여 군 일원에 세거하고 있고, 순흥, 봉화, 강원도 등지에도 살고 있다. 묘는 대룡산 계곡 자좌(大龍山桂谷子坐)에 있다. 셋째 아들 용양위 부사 계문(季文)은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그 후 문중에서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 446번지 대룡산에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이 서파정과 안씨별묘(安氏別廟)를 세우고 부인과 함께 신주를 모셨다. 또한 종택도 그곳에 있다.(인터넷 한미르 2001, 인터넷 netian 2001, user.chollian.net 2002)
안리(安理) : 조선 단종 때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 보문면 순흥 안씨 입향조, 호는 서파(西坡), 본관은 순흥, 향(珦)의 후손, 음사로 의령(宜寧) 현감이 되어 선정을 하여 예천 군수로 영전하여 재임하던 중 단종이 물러날 때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태가 여의치 못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예천군에 눌러 살았다. 그의 후손이 보문면을 비롯하여 군 일원에 세거하고 있다. 그 후 문중에서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 446번지에 별묘(別廟)를 세우고 부인과 함께 신주를 모셨다.
안리 [記事] : <효암문집[曉庵文集, 1963]>에 실린 이중철[李中轍]의 예천군수 안리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通訓大夫醴泉郡事 西坡先生安公墓碣銘[幷序]/ 晦軒夫子。倡道東方。嘉惠後學。仁深而德厚。源遠而流長。 子孫至六七世而金玉滿朝。卿相布列。有若 西坡先生諱 理以。晦軒之孫。獨以盛滿爲戒。胎?名利歸梓鄕。時則 端廟遜矣。獨抱幽貞超然自靖。其義與六臣不甚相遠。其 後孫 克?祖訓。世世業儒。不求聞達?爵之典。不及於 泉壤俎豆之儀。亦毁於一時。則今於四百年之後。何能想 傷其潛光隱德之萬一哉後孫 宗熙 敎煥 敎德等。方營改 碣訪余。囑以顯刻詩。自顧廢蟄絶筆久矣。而均是爲先竊 有所感於心者。謹按而敍之。安氏系出 順興。文成公 晦軒 夫子爲六世祖。五世祖諱于器。順平君。文順公。號屋子。高 祖諱 牧。順興君 文淑公。號 謙齋。曾祖諱 元崇 順成君。文惠公。祖諱?。刑曹典書謚景質。考諱宗約。海州牧使贈吏曹判書。?貞夫人 東萊鄭氏。蓬原府原君 良度公諱良女。 癸酉。先生生于 瑞原舊第。風儀俊偉字量宏深。伯仲兩兄 俱登貴顯。獨不樂仕進。杜門讀書。以探?蘊奧爲務。嘗曰 吾家自先正以。後歷顯于朝。昆弟子姪充滿臺府。此正 ?藏之時也。外補 宜寧。?勉赴任。歲値凶荒。民多散亡。刻 捧設賑。恩信普洽流逋四歸。道伯以治績褒聞于朝。翌 年甲戌。移拜醴泉。未幾莊陵遜位。投?歸鄕。卜居樓巖 山下。命其理曰 大龍山。改山名曰龍巖。改軒號曰 樂園。丁丑。六臣禍起。錦城大君被誅。先生杜門謝客。瞻望 寧越。恒 自悲傷。歿後數歲。己卯禍作。京中諸族俱被慘酷。惟先生 家獨免。時人服其前知之鑑。墓在順興府大龍山桂谷子 坐原。純廟壬午。以士林公議?享于 龍淵祠。配淑人 慶州李氏。鷄川君 從直女 月城君之秀五世孫。墓?先生。兆 後育五男。伯文 叔文俱無後。季文蔭副司直。贈兵判。興文 佐郞。益文 司果。判書三男 瑛進士。玎 忠順衛。瑠 佐郞。二男 熙 別坐。燾 司果。二男 ? 同樞。信 判官。餘不盡錄於乎。先 生生長於詩禮之庭。簪纓之族。初不以富貴利達?其心。 閉門守靜。?潛性理。其操守之堅學問之深有不可窺測 矣。暫試外補遺愛兩邑。豈足以展其所蘊哉。枳棘之林已 非鸞鳳所棲。山陽之雉可以色擧矣。不俟終日棲山?晦。 其出處之正志節之高。足以凜百世質神明矣。黃石公有 言曰。後人苟不明百世無賢人。不?雖筆萎言輕。竊自附 於百世之公言。係之以銘曰 知滿而退。明哲之卓。自靖而隱。秉執之確。行藏允合。心跡 俱潔。桂谷之陽。有?其石。千載起敬。過者必式。"이다.(www.koreastudy.or.kr 2006)
안리 [記事] : <효암문집[曉庵文集, 1963]>에 실린 이중철[李中轍]의 기사로, 그 내용은, “曉庵文集目錄/ 卷之十二/ 墓碣銘/ 通訓大夫醴泉/ 郡事/ 西坡先生安公墓碣銘[幷序]”이다.(www.koreastudy.or.kr 2006)
안리 [記事] : 효암집(曉庵集) 16권 8책 중 卷11에 실린 내용이다. 墓碣銘 / 通訓大夫醴泉郡事西坡先生安公墓碣銘(幷序)/ 예천군사 安理의 묘갈명이다. 호는 西坡, 본관은 順興이다.(http://www.koreastudy.or.kr 2007)
안리(安理) [記事] : 생애이야기/ 성명 : 안리(安理)(1393년(태조 1) ~?)/ 본관 : 순흥(順興)/ 출생지 : 파주(坡州)의 옛 집/ 출신지 : 순흥((順興)/ 분묘지 : 순흥 남쪽 대룡산(大龍山) 계곡(桂谷)/ 외관직 : 의령 현감(宜寧縣監), 예천 군수(醴泉郡守)/ 독서와 학문을 벗 삼아 지내다 : 서파 안리는 1393년(태조 1) 파주의 옛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풍채가 훌륭하고 도량이 크고 깊었다고 한다. 또한 가정에서 배운 문장과 학업은 당대의 명사들이 하나같이 숭상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찬성(贊成)과 판윤(判尹)에 오른 큰 형과 작은 형과는 달리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안리의 이러한 마음가짐은 ꡒ우리 가문은 회헌 이후 역대로 조정에 현달하여 형제와 자질들이 사헌부에 가득하고 온 가문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천한 옷을 입은 사람이 없으니 지금이 바로 자신을 거두어 숨길 때이다.ꡓ 라는 말에도 잘 드러난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대신 문을 닫고 독서에 열중하면서 심오한 도리를 되새기고 깊은 학문을 쌓는 것에 만족했다./ 짧은 관직 생활 속의 뛰어난 치적 : 이렇듯 조정의 일을 즐기지 않았던 그였기에 그리 오랜 관직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타고난 곧은 품성과 뛰어난 능력은 숨길 수 없는 법, 비록 두 번의 짧은 관직 생활이었지만 그는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의령현(宜寧縣)에 잠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마침 흉년이 들어 백성들 가운데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이 많아지자 안리는 자신의 녹봉을 나누어서 백성들을 구휼하였고, 이에 달아나 유랑하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돌아왔다고 한다. 이 일은 관찰사를 통해 조정에 알려졌고 그 다음해 안리는 예천 군수로 임명을 받았다./ 고향에 은둔하여 단종을 그리워하다 : 그가 예천 군수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사양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사실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안리는 결국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누암산(樓巖山) 밑에 집터를 잡고 살면서 학문에만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을 이름을 대룡산, 산 이름을 용암산(龍巖山)이라고 고쳐 불렀는데 이는 제갈량(諸葛亮)이 와룡(臥龍)에 은거한 뜻을 취한 것이라 한다. 한편 호를 낙원(樂園)이라고 개칭하기도 했는데 이는 송 나라 사마광(司馬光)의 독락원(獨樂園) 취향을 취한 것이라 한다. 이렇듯 그는 말년을 고향에서 은거를 하며 보냈다. 특히 사육신의 참화 이후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이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고 연이어 순흥부 내의 판복을 입은 70여 가문이 일시에 전멸을 당하자, 안리는 문을 막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더욱 더 깊이 몸을 숨겼다. 그는 명공과 거경(巨卿)들의 서신에도 답서를 하지 않았고, 방백과 수령들의 방문에도 응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영월을 우러러 바라보며 항상 슬퍼하고 상심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서울에 사는 현달한 반열에 있는 조카와 종손들이 그를 걱정하여 좋은 음식물이라도 보내려 하면 ꡒ소백산의 명아주와 콩잎국이 내 분수에 만족한데 관청에서 내려진 고량진미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ꡓ 라며 단호하게 물리쳤으니, 그의 검약과 지조 또한 알만하다. 이렇게 은거 생활을 하며 단종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던 안리는 자신의 고향에서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는 순흥부의 남쪽 대룡산의 계곡 언덕에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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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