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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26-3:안리(1455.윤6이임)
예천고을원(26-3) : 안리(1455.윤6 이임) :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예천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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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리 [記事] : 통합검색 - 멀티미디어유물관/ 유물명 서파정(西坡亭)/ 유물형태 현판/ 상세설명 서파정(西坡亭)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서파정은 인륜을 저버린 단종 폐위 사건에 분개하여 명예와 이욕을 버리고 은거한 조선조 선비 안리(安理)가 독서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던 곳이다. 안리는 호가 서파(西坡)․낙원(樂園)으로,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단종 때 예천 군수를 지냈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당시 순흥부 남쪽 용암산 아래에 터를 닦고 마을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불렀다. 해주 목사를 지낸 안종약(安從約)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동래 정씨로 봉원부원군 정양생의 딸이다.(www.koreastudy.or.kr 2007)
안리 [記事] : 통합검색 - 멀티미디어유물관/ 유물명 서파정기(西坡亭記)/ 유물형태 서판/ 상세설명 서파정(西坡亭)에 걸려있는 권상규(權相圭)가 지은 서파정기(西坡亭記)이다. 서파정의 유래와 안리(安理)의 충절, 그리고 후손들이 이것을 잘 이어받으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파정은 인륜을 저버린 단종 폐위 사건에 분개하여 명예와 이욕을 버리고 은거한 조선조 선비 안리(安理)가 독서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던 곳이다. 안리는 호가 서파(西坡)․낙원(樂園)으로,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단종 때 예천 군수를 지냈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당시 순흥부 남쪽 용암산 아래에 터를 닦고 마을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불렀다. 해주 목사를 지낸 안종약(安從約)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동래 정씨로 봉원부원군 정양생의 딸이다.(www.koreastudy.or.kr 2007)
안리(安理) [記事] : 원문자료/ 묘갈명(墓碣銘) : 정통(正統) 계유에 선생이 서원(瑞原)의 옛 집에서 출생했는데 풍채가 훌륭하고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문장과 학업을 가정에서 얻었지만 한 시대의 명사(名士)들이 추증하여 숭앙하였다. 백씨와 중씨 두 형이 찬성(贊成)과 판윤(判尹)에 올랐는데, 공은 홀로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즐기지 않고 문을 닫고 독서하면서 심오한 도리를 더듬고 깊은 학문을 쌓아가는 것에 힘썼다. 일찌기 말하기를 ꡒ우리 가문이 회헌(晦軒 安珦) 선조 이후 역대로 조정에 현달하여 형제와 자질들이 사헌부에 가득하고 온 종족이 한 사람도 천한 옷을 입은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자신을 거두어 숨길 때이다.ꡓ 하고 벼슬에 나아가기를 즐기지 아니했다. 천순(天順) 계유에 외직으로 의령현(宜寧縣)에 보직되어서 잠시 부임하였는데 흉년을 만나서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이 많으니 자신의 녹봉을 나누어서 백성에게 구휼을 베풀어 은혜와 신의가 두루 넘치자 달아나 유랑하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돌아왔다. 관찰사가 공의 치적을 조정에 보고하니 다음해인 갑술년에 예천 군수로 임명받았는데 얼마 안 되어서 단종이 왕위를 사양하니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누암산(樓巖山) 밑에 집터를 잡아 살면서 마을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하고, 산 이름을 용암산(龍巖山)이라고 고쳐 불렀다. 이는 제갈량(諸葛亮)이 와룡(臥龍)에 은거한 뜻을 취한 것이며, 헌호(軒號)를 낙원(樂園)이라고 개칭한 것은 송 나라 사마광(司馬光) 독락원(獨樂園)의 취향을 취한 것이다. 1456년(세조 1)에 사육신(死六臣)의 참화가 일어나니 시대의 사정이 갑자기 변하여 금성대군과 순흥 부사이던 이보흠(李甫欽)이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함께 처형을 당하였고, 순흥부 내의 판복을 입은 70여 가문이 일시에 전멸을 당했는데 이러한 때를 당하여 선생께서는 문을 막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스스로 깊이 몸을 숨겼다. 명공과 거경(巨卿)들이 서신을 많이 보냈지만 답서를 하지 않았고, 방백과 수령들이 항상 찾아 왔으나 만나주지 않았으며,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영월을 우러러 바라보며 항상 스스로 슬피 상심하면서 만년을 보내었다. 일찌기 말 한 필과 동자 하나를 데리고 폐부(廢府)가 된 순흥의 숙수사(宿水寺)를 왕래했는데 평리(坪里)에 이르면 회헌 선생이 독서하던 옛 터로서 세연지(洗硯池)가 있는데 거기를 지날 때마다 감모(感慕)의 시를 읊는 것을 예사로 했다. 그 시에 이르기를, ꡒ죽계수(竹溪水)의 연원이여 사수(泗水)의 물가에는, 우리 조상님 독서하면서 여기서 자라나셨네. 이리저리 거닐어 보니 감모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데, 달은 뜰의 오동과 세연지를 비추네.ꡓ 하고 읊었다. 항상 물과 달은 가득하면 넘치고 줄어든다는 경계로서 자손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고 명하고 조석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여가에는 주자서를 읽게 하였다. 이는 선조께서 주자를 존모하시던 뜻을 체득케 함이었으며 절대로 영달(榮達)의 길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서울에 사는 조카와 종손들 중에 높은 벼슬의 반열에 있는 자들이 선생께서 시골에서 담백하게 사시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좋은 음식물을 보내어 드리면 모두 그것을 물리치고 말씀하시기를 ꡒ소백산의 명아주와 콩잎국이 내 분수에 만족한대, 관청에서 내려진 고량진미(膏梁珍味)가 무슨 필요 있겠는가!ꡓ 하였다. 공이 별세한 후 서너 세대 만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서울에 있던 여러 종족과 대종가가 모두 참혹한 화를 당했으나 오직 선생의 집만 홀로 화를 면했으니 그 시대 사람들이 앞일을 아는 안식에 감복했으며 그 사실이 장릉지(莊陵誌)에 기재되어 있다./ 아! 선생은 시례(詩禮)의 가정에서 나고 고관대작의 문벌이었으나 처음부터 부귀와 영달에 그 마음을 둘로 갖지 않았으며 문을 닫고 고요하게 지내며 성리학에 몰두하여 그 당시의 명사들이 추중함에 이르렀으니 선생의 굳은 지조와 깊은 학문에 대해서는 엿보고 헤아릴 수 없는 경지인데 잠시 외직에 보직되어 두 고을의 백성들에게 사랑을 남겼을 뿐이니 어찌 충분히 쌓은 학문을 펼칠 수 있었다 하겠는가! 탱자나무 가시 숲은 이미 난새와 봉황이 깃들 곳이 아니며 산의 꿩도 또한 기색을 살피고 멀리 나는 법이다. 하루해가 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산림에 살 곳을 찾아 숨어 살면서 마침내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자취를 감췄으니 그 출처가 정당했음과 절개가 높았음은 백세토록 늠름할 것이며 신명에게 물어도 진실했으리라. 만일 지조와 학문을 근본으로 한결같은 뜻이 본래 정해져 있지 않았다면 어찌 하루아침에 거취가 이와 같이 굳고 깨끗하겠는가! 책 상자에 옛날부터 소장해오던 시문들은 중세에 화재를 겪어서 후학들이 고증할 수가 없었는데 다행스럽게 순원군(順原君)이 덕행을 나타낸 글이 있으니 또한 태상(太常)의 기술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어서 후세에 전하여도 의심이 없으리라. 황석공(黃石公)이 말하기를 ꡒ후세 사람이 진실로 공언(公言)하지 않으면 백세토록 현인이 없을 것이다.ꡓ라고 했으니, 내가 비록 글 솜씨도 시들하고 말도 가벼우나 스스로 남몰래 백세의 공언에 관련시켜 그 서문을 쓰고 이어서 명을 짓는다./ 가득함을 알아서 스스로 물러남은 탁월한 현명함이요,/ 난세의 기미를 먼저 알았음은 스스로 삼가는 독실한 뜻이다./ 사마광과 같은 독락원(獨樂園)이 있었고. 제갈량(諸葛亮)과 같은 와룡강(臥龍崗)이 있었다./ 벼슬하기 전의 의복으로 유유히 배회하여 명예의 속박에서 쉽게 벗어났다./ 세상에 나가고 몸을 숨김이 진실로 합당하니 마음과 행적이 모두 깨끗하였다./ 주자서(朱子書)에 있는 큰 가르침이 가문에 전해오는 아름다운 비결이다./ 선조를 빛내고 후손에게 남긴 것은 영세토록 검소한 의복이었다./ 계곡(桂谷)의 남향진 곳에 선생의 묘갈을 새긴 것이 있다./ 천재가 지나도록 공경의 마음 일어날 것이니 지나가는 사람들아! 반드시 본받아라./ 외예손인 장사랑(將仕郞)의 품계로 전에 혜릉 참봉(惠陵參奉)을 지낸 진성 이중철(李中轍)이 삼가 짓고, 숭록대부(崇祿大夫)의 품계로 판돈령원사(判敦寧院事)를 지낸 해평 윤용구(尹用求)가 삼가 쓰다. 공자 탄생 2484년 계유(1933) 4월 일 15대손인 교환(敎煥)이 고쳐 세우다./ 이중철(李中轍), 『효암집(曉庵集)』(www.koreastudy.or.kr 2007)
안리 [記事] : 대룡산 순흥안씨종택/ 둘러보기/ 절의를 목숨과 같이 여기는 집 : 대룡산 순흥안씨종택은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용산2리 남역마을 대룡산에 자리잡은 서파 안리(安理, 1393~?)의 옛집이다. 이 집의 첫 주인인 안리는 단종 때 예천 군수로 있다가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 안정면 용암산 아래 대룡산에 자리를 잡고 이 집을 살림집으로 건립하였다. 그 후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 왔다. 1987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집을 새롭게 건립하였다. 남역마을 초입의 도로변에 토석 담장을 돌린 넓은 일곽 전면에 헛간채와 마구간채가 있고, 그 뒤에 口자형 정침이 좌향을 달리하며 앉아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안리 [記事] : 대룡산 순흥안씨종택/ 관련인물ㆍ유물/ 단종절신 서파 안리 : 안리의 호는 서파(西坡)․낙원(樂園)이고, 목사 안종약(安從約)의 아들로 문성공 안향의 6대손이다. 어머니는 동래 정씨로 봉원부원군 정양생의 딸이다. 그는 조정에서 여러 벼슬로 불렀으나 사양해 오다가 1453년(단종 1) 의령 현감에 부임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봉록으로 기민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이듬해 예천 군수가 되었으나 얼마하지 않아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본향인 순흥부 대룡산으로 낙향했다. 그는 순흥부 남쪽 30리 누암산(樓岩山 : 용암산) 아래 자리를 잡고 마을을 이룩하여 동네 이름을 ꡐ대룡산(大龍山)ꡑ이라 하고, 아호를 낙원옹(樂園翁)이라 했다. ꡐ대룡ꡑ은 옛날 제갈공명의 ꡐ와룡(臥龍)ꡑ에서 따왔다. 아호인 낙원에서 ꡐ원(園)ꡑ은 옛날 사마광의 ꡐ독락(獨樂)ꡑ의 뜻에서 취했다. 그는 순흥의 금성대군 사건(정축지변)이 일어난 후 용암산 기슭에 더욱 깊이 숨어 그 아들들에게, ꡒ지금은 출세할 때가 아니다. 문을 닫고 글을 읽어 행실을 닦기에 힘쓰되 우선 선조께서 주자(朱子)를 사모하신 뜻을 본받으라. 혹 서울에 가서 일가를 만나더라도 영달에 관해서는 아예 말해선 안 된다. 만일 이 훈계를 어기면 아비의 뜻을 저버림이니라.ꡓ고 일렀다. 서울에 사는 집안 조카며 손자들이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안리가 시골에 묻혀 고생스럽게 지내는 것을 딱히 여겨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왔으나 ꡒ나는 소백산 나물만으로 족한데 서울의 진미는 당치도 않다.ꡓ고 뿌리쳤다. 그의 선비적 기질은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안리의 아들 안계문은 부사직을 지냈으며, 손자 안영이 연산군 때 진사, 증손 안공택이 학행으로 동학교관, 안공필이 중종 때 진사, 안공신이 진사․문과 중시로 군수를 지냈다. 안공택의 손자 안응일이 효행으로 공조 참의에 증직되고, 그 아들 안욱이 인조 때 진사․문과로 군수를 지냈다. 안공신의 손자 안경우․안경례․안경유가 나란히 무과에 급제하여 함께 벼슬에 올랐다. 안응일의 7대손 안필경이 효행이 있었으며, 안리의 후손 안종희가 시문에 능하여 문집을 남겼다.(www.koreastudy.or.kr 2007)
안리 [記事] : 대룡산 순흥안씨종택/ 공간이야기 / 순흥안씨 대룡산에 터전을 열다 / 용암산 동남쪽 기슭에 자리한 대룡산 마을은 순흥안씨와 창원황씨 두 문중이 세거해 오고 있는데, 창원황씨 입향조는 순흥안씨의 사위가 된다. 조선 태종 때 해주 목사를 지낸 안종약의 아들 서파 안리가 예천 군수로 있다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던져 버리고 물러나 순흥도호부 남쪽 용암산 아래 자리를 잡아 숲을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고 대룡산이라 이름 했다. 이 후 5백 년 동안 대룡산의 순흥안씨들은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www.koreastudy.or.kr 2007)
안리 [記事] : 서파정/ 둘러보기 / 안리의 은둔처, 서파정 / 서파정(西坡亭)은 인륜을 저버린 단종 폐위 사건에 분개하여 명예와 이욕을 버리고 은거한 조선조 선비 안리(安理)가 독서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던 곳이다. 안리는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6대손으로 단종 때 예천 군수를 지냈으며,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당시 순흥부 남쪽 용암산 아래에 터를 닦고 마을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불렀다. 대룡산 마을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의 용암산(龍巖山) 동남쪽에 평화롭게 기대어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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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리 [記事] : 통합검색 - 멀티미디어유물관/ 유물명 서파정(西坡亭)/ 유물형태 현판/ 상세설명 서파정(西坡亭)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서파정은 인륜을 저버린 단종 폐위 사건에 분개하여 명예와 이욕을 버리고 은거한 조선조 선비 안리(安理)가 독서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던 곳이다. 안리는 호가 서파(西坡)․낙원(樂園)으로,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단종 때 예천 군수를 지냈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당시 순흥부 남쪽 용암산 아래에 터를 닦고 마을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불렀다. 해주 목사를 지낸 안종약(安從約)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동래 정씨로 봉원부원군 정양생의 딸이다.(www.koreastudy.or.kr 2007)
안리 [記事] : 통합검색 - 멀티미디어유물관/ 유물명 서파정기(西坡亭記)/ 유물형태 서판/ 상세설명 서파정(西坡亭)에 걸려있는 권상규(權相圭)가 지은 서파정기(西坡亭記)이다. 서파정의 유래와 안리(安理)의 충절, 그리고 후손들이 이것을 잘 이어받으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파정은 인륜을 저버린 단종 폐위 사건에 분개하여 명예와 이욕을 버리고 은거한 조선조 선비 안리(安理)가 독서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던 곳이다. 안리는 호가 서파(西坡)․낙원(樂園)으로,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단종 때 예천 군수를 지냈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당시 순흥부 남쪽 용암산 아래에 터를 닦고 마을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불렀다. 해주 목사를 지낸 안종약(安從約)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동래 정씨로 봉원부원군 정양생의 딸이다.(www.koreastudy.or.kr 2007)
안리(安理) [記事] : 원문자료/ 묘갈명(墓碣銘) : 정통(正統) 계유에 선생이 서원(瑞原)의 옛 집에서 출생했는데 풍채가 훌륭하고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문장과 학업을 가정에서 얻었지만 한 시대의 명사(名士)들이 추증하여 숭앙하였다. 백씨와 중씨 두 형이 찬성(贊成)과 판윤(判尹)에 올랐는데, 공은 홀로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즐기지 않고 문을 닫고 독서하면서 심오한 도리를 더듬고 깊은 학문을 쌓아가는 것에 힘썼다. 일찌기 말하기를 ꡒ우리 가문이 회헌(晦軒 安珦) 선조 이후 역대로 조정에 현달하여 형제와 자질들이 사헌부에 가득하고 온 종족이 한 사람도 천한 옷을 입은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자신을 거두어 숨길 때이다.ꡓ 하고 벼슬에 나아가기를 즐기지 아니했다. 천순(天順) 계유에 외직으로 의령현(宜寧縣)에 보직되어서 잠시 부임하였는데 흉년을 만나서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이 많으니 자신의 녹봉을 나누어서 백성에게 구휼을 베풀어 은혜와 신의가 두루 넘치자 달아나 유랑하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돌아왔다. 관찰사가 공의 치적을 조정에 보고하니 다음해인 갑술년에 예천 군수로 임명받았는데 얼마 안 되어서 단종이 왕위를 사양하니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누암산(樓巖山) 밑에 집터를 잡아 살면서 마을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하고, 산 이름을 용암산(龍巖山)이라고 고쳐 불렀다. 이는 제갈량(諸葛亮)이 와룡(臥龍)에 은거한 뜻을 취한 것이며, 헌호(軒號)를 낙원(樂園)이라고 개칭한 것은 송 나라 사마광(司馬光) 독락원(獨樂園)의 취향을 취한 것이다. 1456년(세조 1)에 사육신(死六臣)의 참화가 일어나니 시대의 사정이 갑자기 변하여 금성대군과 순흥 부사이던 이보흠(李甫欽)이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함께 처형을 당하였고, 순흥부 내의 판복을 입은 70여 가문이 일시에 전멸을 당했는데 이러한 때를 당하여 선생께서는 문을 막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스스로 깊이 몸을 숨겼다. 명공과 거경(巨卿)들이 서신을 많이 보냈지만 답서를 하지 않았고, 방백과 수령들이 항상 찾아 왔으나 만나주지 않았으며,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영월을 우러러 바라보며 항상 스스로 슬피 상심하면서 만년을 보내었다. 일찌기 말 한 필과 동자 하나를 데리고 폐부(廢府)가 된 순흥의 숙수사(宿水寺)를 왕래했는데 평리(坪里)에 이르면 회헌 선생이 독서하던 옛 터로서 세연지(洗硯池)가 있는데 거기를 지날 때마다 감모(感慕)의 시를 읊는 것을 예사로 했다. 그 시에 이르기를, ꡒ죽계수(竹溪水)의 연원이여 사수(泗水)의 물가에는, 우리 조상님 독서하면서 여기서 자라나셨네. 이리저리 거닐어 보니 감모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데, 달은 뜰의 오동과 세연지를 비추네.ꡓ 하고 읊었다. 항상 물과 달은 가득하면 넘치고 줄어든다는 경계로서 자손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고 명하고 조석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여가에는 주자서를 읽게 하였다. 이는 선조께서 주자를 존모하시던 뜻을 체득케 함이었으며 절대로 영달(榮達)의 길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서울에 사는 조카와 종손들 중에 높은 벼슬의 반열에 있는 자들이 선생께서 시골에서 담백하게 사시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좋은 음식물을 보내어 드리면 모두 그것을 물리치고 말씀하시기를 ꡒ소백산의 명아주와 콩잎국이 내 분수에 만족한대, 관청에서 내려진 고량진미(膏梁珍味)가 무슨 필요 있겠는가!ꡓ 하였다. 공이 별세한 후 서너 세대 만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서울에 있던 여러 종족과 대종가가 모두 참혹한 화를 당했으나 오직 선생의 집만 홀로 화를 면했으니 그 시대 사람들이 앞일을 아는 안식에 감복했으며 그 사실이 장릉지(莊陵誌)에 기재되어 있다./ 아! 선생은 시례(詩禮)의 가정에서 나고 고관대작의 문벌이었으나 처음부터 부귀와 영달에 그 마음을 둘로 갖지 않았으며 문을 닫고 고요하게 지내며 성리학에 몰두하여 그 당시의 명사들이 추중함에 이르렀으니 선생의 굳은 지조와 깊은 학문에 대해서는 엿보고 헤아릴 수 없는 경지인데 잠시 외직에 보직되어 두 고을의 백성들에게 사랑을 남겼을 뿐이니 어찌 충분히 쌓은 학문을 펼칠 수 있었다 하겠는가! 탱자나무 가시 숲은 이미 난새와 봉황이 깃들 곳이 아니며 산의 꿩도 또한 기색을 살피고 멀리 나는 법이다. 하루해가 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산림에 살 곳을 찾아 숨어 살면서 마침내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자취를 감췄으니 그 출처가 정당했음과 절개가 높았음은 백세토록 늠름할 것이며 신명에게 물어도 진실했으리라. 만일 지조와 학문을 근본으로 한결같은 뜻이 본래 정해져 있지 않았다면 어찌 하루아침에 거취가 이와 같이 굳고 깨끗하겠는가! 책 상자에 옛날부터 소장해오던 시문들은 중세에 화재를 겪어서 후학들이 고증할 수가 없었는데 다행스럽게 순원군(順原君)이 덕행을 나타낸 글이 있으니 또한 태상(太常)의 기술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어서 후세에 전하여도 의심이 없으리라. 황석공(黃石公)이 말하기를 ꡒ후세 사람이 진실로 공언(公言)하지 않으면 백세토록 현인이 없을 것이다.ꡓ라고 했으니, 내가 비록 글 솜씨도 시들하고 말도 가벼우나 스스로 남몰래 백세의 공언에 관련시켜 그 서문을 쓰고 이어서 명을 짓는다./ 가득함을 알아서 스스로 물러남은 탁월한 현명함이요,/ 난세의 기미를 먼저 알았음은 스스로 삼가는 독실한 뜻이다./ 사마광과 같은 독락원(獨樂園)이 있었고. 제갈량(諸葛亮)과 같은 와룡강(臥龍崗)이 있었다./ 벼슬하기 전의 의복으로 유유히 배회하여 명예의 속박에서 쉽게 벗어났다./ 세상에 나가고 몸을 숨김이 진실로 합당하니 마음과 행적이 모두 깨끗하였다./ 주자서(朱子書)에 있는 큰 가르침이 가문에 전해오는 아름다운 비결이다./ 선조를 빛내고 후손에게 남긴 것은 영세토록 검소한 의복이었다./ 계곡(桂谷)의 남향진 곳에 선생의 묘갈을 새긴 것이 있다./ 천재가 지나도록 공경의 마음 일어날 것이니 지나가는 사람들아! 반드시 본받아라./ 외예손인 장사랑(將仕郞)의 품계로 전에 혜릉 참봉(惠陵參奉)을 지낸 진성 이중철(李中轍)이 삼가 짓고, 숭록대부(崇祿大夫)의 품계로 판돈령원사(判敦寧院事)를 지낸 해평 윤용구(尹用求)가 삼가 쓰다. 공자 탄생 2484년 계유(1933) 4월 일 15대손인 교환(敎煥)이 고쳐 세우다./ 이중철(李中轍), 『효암집(曉庵集)』(www.koreastudy.or.kr 2007)
안리 [記事] : 대룡산 순흥안씨종택/ 둘러보기/ 절의를 목숨과 같이 여기는 집 : 대룡산 순흥안씨종택은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용산2리 남역마을 대룡산에 자리잡은 서파 안리(安理, 1393~?)의 옛집이다. 이 집의 첫 주인인 안리는 단종 때 예천 군수로 있다가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 안정면 용암산 아래 대룡산에 자리를 잡고 이 집을 살림집으로 건립하였다. 그 후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 왔다. 1987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집을 새롭게 건립하였다. 남역마을 초입의 도로변에 토석 담장을 돌린 넓은 일곽 전면에 헛간채와 마구간채가 있고, 그 뒤에 口자형 정침이 좌향을 달리하며 앉아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안리 [記事] : 대룡산 순흥안씨종택/ 관련인물ㆍ유물/ 단종절신 서파 안리 : 안리의 호는 서파(西坡)․낙원(樂園)이고, 목사 안종약(安從約)의 아들로 문성공 안향의 6대손이다. 어머니는 동래 정씨로 봉원부원군 정양생의 딸이다. 그는 조정에서 여러 벼슬로 불렀으나 사양해 오다가 1453년(단종 1) 의령 현감에 부임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봉록으로 기민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이듬해 예천 군수가 되었으나 얼마하지 않아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본향인 순흥부 대룡산으로 낙향했다. 그는 순흥부 남쪽 30리 누암산(樓岩山 : 용암산) 아래 자리를 잡고 마을을 이룩하여 동네 이름을 ꡐ대룡산(大龍山)ꡑ이라 하고, 아호를 낙원옹(樂園翁)이라 했다. ꡐ대룡ꡑ은 옛날 제갈공명의 ꡐ와룡(臥龍)ꡑ에서 따왔다. 아호인 낙원에서 ꡐ원(園)ꡑ은 옛날 사마광의 ꡐ독락(獨樂)ꡑ의 뜻에서 취했다. 그는 순흥의 금성대군 사건(정축지변)이 일어난 후 용암산 기슭에 더욱 깊이 숨어 그 아들들에게, ꡒ지금은 출세할 때가 아니다. 문을 닫고 글을 읽어 행실을 닦기에 힘쓰되 우선 선조께서 주자(朱子)를 사모하신 뜻을 본받으라. 혹 서울에 가서 일가를 만나더라도 영달에 관해서는 아예 말해선 안 된다. 만일 이 훈계를 어기면 아비의 뜻을 저버림이니라.ꡓ고 일렀다. 서울에 사는 집안 조카며 손자들이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안리가 시골에 묻혀 고생스럽게 지내는 것을 딱히 여겨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왔으나 ꡒ나는 소백산 나물만으로 족한데 서울의 진미는 당치도 않다.ꡓ고 뿌리쳤다. 그의 선비적 기질은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안리의 아들 안계문은 부사직을 지냈으며, 손자 안영이 연산군 때 진사, 증손 안공택이 학행으로 동학교관, 안공필이 중종 때 진사, 안공신이 진사․문과 중시로 군수를 지냈다. 안공택의 손자 안응일이 효행으로 공조 참의에 증직되고, 그 아들 안욱이 인조 때 진사․문과로 군수를 지냈다. 안공신의 손자 안경우․안경례․안경유가 나란히 무과에 급제하여 함께 벼슬에 올랐다. 안응일의 7대손 안필경이 효행이 있었으며, 안리의 후손 안종희가 시문에 능하여 문집을 남겼다.(www.koreastudy.or.kr 2007)
안리 [記事] : 대룡산 순흥안씨종택/ 공간이야기 / 순흥안씨 대룡산에 터전을 열다 / 용암산 동남쪽 기슭에 자리한 대룡산 마을은 순흥안씨와 창원황씨 두 문중이 세거해 오고 있는데, 창원황씨 입향조는 순흥안씨의 사위가 된다. 조선 태종 때 해주 목사를 지낸 안종약의 아들 서파 안리가 예천 군수로 있다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던져 버리고 물러나 순흥도호부 남쪽 용암산 아래 자리를 잡아 숲을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고 대룡산이라 이름 했다. 이 후 5백 년 동안 대룡산의 순흥안씨들은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www.koreastudy.or.kr 2007)
안리 [記事] : 서파정/ 둘러보기 / 안리의 은둔처, 서파정 / 서파정(西坡亭)은 인륜을 저버린 단종 폐위 사건에 분개하여 명예와 이욕을 버리고 은거한 조선조 선비 안리(安理)가 독서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던 곳이다. 안리는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6대손으로 단종 때 예천 군수를 지냈으며,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당시 순흥부 남쪽 용암산 아래에 터를 닦고 마을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불렀다. 대룡산 마을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의 용암산(龍巖山) 동남쪽에 평화롭게 기대어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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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