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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26-4:안리(1455.윤6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0.11.18 06:45:53
  예천고을원(26-4) : 안리(1455.윤6 이임) :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예천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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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리 [記事] : 서파정/ 관련인물ㆍ유물/ 세조 왕위 찬탈 후 은둔을 한 안리 / 안리(1393~?)는 고려 대유학자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6대손으로 해주 목사를 지냈다. 안종약(安從約)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동래정씨로 봉원부원군 정양생의 딸이고, 파주에서 태어났다. 안리의 호는 서파(西坡)․낙원(樂園)이다. 준수한 용모에 기량이 출중하고, 학문적 소양이 뛰어난 데다 문장 실력 또한 훌륭하여 당시 유명 인사들이 그를 따르고 받들었다 한다. 그의 맏형 안구(安玖)는 직제학(直提學)이었고, 중형 안경(安璟)은 한성 부윤을 지냈으나, 안리는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ꡒ옛날 사람들은 무엇이나 가득히 차는 것을 경계했는데, 우리 집안은 회헌(晦軒 : 문성공 안향) 선조 이래로 고관대작이 무리를 이루었으니, 이는 실로 가득 찬 상태라 하겠다. 그러니 내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마땅히 삼가야 하리라.ꡓ 그리고는 두문불출하며 학문에 침잠했다. 그의 학문이 깊고 덕망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조정에서 여러 번 불러 벼슬을 내리고자 했으나 늘 사양하고 나가지 않다가 1453년(단종 1)에야 외직으로 의령 현감에 부임했다. 그가 의령 현감으로 재직할 때 그 지방에 심한 흉년이 들어 고을 백성들이 굶주림에 지쳐 사방으로 흩어져 고을을 등지고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봉록을 나누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니, 흩어졌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다시 모여들었다. 감사(監司)는 이러한 그의 행적을 조정에 보고했고, 이를 가상히 여긴 조정은 이듬해 안리를 예천 군수로 승진 발령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단종 임금이 왕위를 빼앗기고 물러나자, 안리는 단호하게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고향인 순흥부 남쪽 30리 누암산(樓岩山) 아래 터전을 잡았다. 그는 그 산자락에 숲을 개척하고 그 아래에 마을을 이루었으니, 그로부터 동네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했으다. 그 산 이름은 용암산(龍巖山)으로 바뀌게 되었다. 산 이름을 용암산이라 한 것은 옛날 중국의 제갈공명이 ꡐ와룡(臥龍)ꡑ이라 했던 뜻을 취한 것이라고도 하고, 『주역』의 ꡐ잠룡물용(潛龍勿用 : 물속에 잠겨있는 용은 함부로 쓰지 말라)ꡑ에서 취했다고도 한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성삼문 등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형벌을 받고, 또한 순흥에 귀양 와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운동을 추진하다가 실패하여 순흥의 사대부 가문들이 모조리 도륙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안리는 용암산 기슭에 깊숙이 숨어 그 아들들에게 당부하였다. 지금은 출세할 때가 아니니, 우리 선조께서 주자(朱子)를 사모하신 뜻을 본받아 문을 닫아걸고 글을 읽으며 수양하여 행실을 반듯하게 하기에 힘쓰도록 하라. 혹 서울에 가서 일가를 만나더라도 영달에 관해서는 아예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 훈계를 어기면 아비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ꡓ

  이는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에 나가 뜻을 세우기도 어렵거니와 자칫하면 일순간에 멸문지화를 당하는 난세를 피하여 조용히 자기 수양에 힘쓸 것을 당부한 지혜였다. 한때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이 서찰을 보내왔으나, 그는 일체 답을 하지도 않았으며, 고을의 감사나 수령이 찾아와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에 사는 집안 조카며 손자들이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그가 시골에 묻혀 고생하며 지내는 것을 딱하게 여겨 철마다 맛있는 음식을 보내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ꡒ나는 소백산에서 나는 나물만으로도 분수에 족하니 서울의 진기하고 맛있는 음식은 어울리지 않는다.ꡓ 안리가 죽은 뒤 몇 해 지나지 않아 다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하여 죄 없는 선비들이 많이 화를 입었는데, 그의 후손들은 그의 명을 받들어 그다지 큰 피해가 없었다.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고 한다.(www.koreastudy.or.kr 2007)

  안리 [記事] : 세조실록 15권/ 세조 5년( 1459 기묘 / 명 천순(天順) 3년) 2월 13일 병인 2번째 기사/ 날마다 백관을 접할 수 없는 것을 염려하다/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는데, 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계양군(桂陽君) 이증(李?)․익현군(翼峴君) 이관(李?)․의창군(義昌君) 이공(李?)․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홍달손(洪達孫)․승지(承旨)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사재감 정(司宰監正) 한치인(韓致仁)․선공감 정(繕工監正) 안리(安理)․판관(判官) 이부(李扶)․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 유효진(柳孝眞)․판관(判官) 진자강(晉自康)이 윤대(輪對)하니, 임금이 한치인(韓致仁) 등에게 이르기를, ꡒ내가 항상 날마다 백관(百官)들을 접(接)할 수 없는 것을 염려하는데, 대신들은 매양 상참(常參)이나 조계(朝啓)나 관사(觀射)하는 날에 접하게 되나, 소신(小臣)들은 직질(職秩)이 낮고 유(類)가 많기 때문에 사람마다 접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마음에는 대신(大臣)이나 소신(小臣)이나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금일 너희 소신(小臣)은 장차 후일에는 대신(大臣)이 될 자이다. 내가 한 집에서 한 나라를 만들었으므로 인정(人情) 세태(世態)를 자세하게 일찍부터 알고 있다. 대체로 인신(人臣)이 임금 앞에 있게 되면 두려워 미혹(迷惑)해지고 겁내어 몸을 움츠리니, 능히 본래 품은 생각을 다 말하지 못하는데, 너희들은 마땅히 뜻을 다하고 몸을 펴서 숨김없이 모조리 다 말하라. 나도 마땅히 이를 채납(採納)하겠으며, 말이 비록 맞지 않더라도 또한 죄주지 않겠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ꡐ유사(有司)를 먼저 하고, 작은 허물은 용서하고, 어진 인재(人才)를 천거하라.ꡑ 하였고, 또 말하기를, ꡐ모르고 저지른 허물을 용서하는 데는 큰 것이 없으나 일부러 저지른 죄를 벌하는 데는 작은 것이 없다.ꡑ 하였으니, 고의로 죄를 범하는 사람은 징계하지 아니할 수가 없지만, 작은 허물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마땅히 용서할 것이다. 너희들이 동료(同遼)에게 전(轉)하여 알리라.ꡓ하고 또 도승지(都承旨) 조석문(曹錫文)에게 이르기를, ꡒ나의 이 말을 백관(百官)들에게 효유(曉諭)하라.ꡓ하였다./ 【영인본】 7 책 313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왕실-행행(行幸) / *정론-정론(政論)(www.history.go.kr 2007)

  안리 : 通訓大夫醴泉郡事西坡先生安公墓碣銘[幷序]/ 상위서지: 曉庵文集 十 > 曉庵文集卷之十二 > 墓碣銘/ 분류: 고도서 > 집부(集部) > 별집류(別集類)/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효암문집 (曉庵文集)/ 通訓大夫醴泉郡事西坡先生安公墓碣銘[幷序] ( 通訓大夫醴泉郡事西坡先生安公墓碣銘[幷序] )// 晦軒夫子。倡道東方。嘉惠後學。仁深而德厚。源遠而流長。子孫至六七世而金玉滿朝。卿相布列。有若西坡先生諱理以。晦軒之孫。獨以盛滿爲戒。胎?名利歸梓鄕。時則端廟遜矣。獨抱幽貞超然自靖。其義與六臣不甚相遠。其後孫克?祖訓。世世業儒。不求聞達?爵之典。不及於泉壤俎豆之儀。亦毁於一時。則今於四百年之後。何能想傷其潛光隱德之萬一哉後孫宗熙敎煥敎德等。方營改/ ▣ 004/ 碣訪余。囑以顯刻詩。自顧廢蟄絶筆久矣。而均是爲先竊有所感於心者。謹按而敍之。安氏系出順興。文成公晦軒夫子爲六世祖。五世祖諱于器。順平君。文順公。號屋子。高祖諱牧。順興君。文淑公。號謙齋。曾祖諱元崇、順成君。文惠公。祖諱?。刑曹典書謚景質。考諱宗約。海州牧使贈吏曹判書。?貞夫人東萊鄭氏。蓬原府原君良度公諱良女。癸酉。先生生于瑞原舊第。風儀俊偉字量宏深。伯仲兩兄俱登貴顯。獨不樂仕進。杜門讀書。以探?蘊奧爲務。嘗曰吾家自先正以。後歷顯于朝。昆弟子姪充滿臺府。此正?藏之時也。外補宜寧。?勉赴任。歲値凶荒。民多散亡。刻/ ▣ 005/ 捧設賑。恩信普洽流逋四歸。道伯以治績褒聞于朝。翌年甲戌。移拜醴泉。未幾莊陵遜位。投?歸鄕。卜居樓巖山下。命其理曰大龍山。改山名曰龍巖。改軒號曰樂園。丁丑。六臣禍起。錦城大君被誅。先生杜門謝客。瞻望寧越。恒自悲傷。歿後數歲。己卯禍作。京中諸族俱被慘酷。惟先生家獨免。時人服其前知之鑑。墓在順興府大龍山桂谷子坐原。純廟壬午。以士林公議?享于龍淵祠。配淑人慶州李氏。鷄川君從直女月城君之秀五世孫。墓?先生。兆後育五男。伯文叔文俱無後。季文蔭副司直。贈兵判。興文佐郞。益文司果。判書三男瑛進士。玎忠順衛。瑠佐郞。二/ ▣ 006/ 男熙別坐。燾司果。二男?同樞。信判官。餘不盡錄於乎。先生生長於詩禮之庭。簪纓之族。初不以富貴利達?其心。閉門守靜。?潛性理。其操守之堅學問之深有不可窺測矣。暫試外補遺愛兩邑。豈足以展其所蘊哉。枳棘之林已非鸞鳳所棲。山陽之雉可以色擧矣。不俟終日棲山?晦。其出處之正志節之高。足以凜百世質神明矣。黃石公有言曰。後人苟不明百世無賢人。不?雖筆萎言輕。竊自附於百世之公言。係之以銘曰知滿而退。明哲之卓。自靖而隱。秉執之確。行藏允合。心跡俱潔。桂谷之陽。有?其石。千載起敬。過者必式。//

  안리(醴泉郡守 1453이후-1455.윤6이전) : 안리(安理) 출생 [한국국학진흥원-유교연표]/ ...寧縣監)에 부임했다. 당시 흉년이 들었는데 안리가 봉록을 던져 굶주림을 구제하니 흩어졌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감사(監司)가 그 치적을 조정에 알려 이듬해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승진되었으나 얼마 후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버리고 물러.../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ꡐ역사자료ꡑ이다.//

  안리(醴泉郡守 1453이후-1455.윤6이전) : 안리 (安理) | 생애이야기 / 독서와 학문을 벗 삼아 지내다|짧은 관직 생활 속의 뛰어난 치적|고향에 은둔하여 단종을 그리워하다 / 안리安理순흥 順興 )...서파 안리는 1393년(태조 1) 파주의 옛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풍채가 훌.../ 예천 관련 내용이 수록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역사체험관 - 인물이다.// 서파정 | 원문자료 / 서파정기|죽림사중수기 / ...령스런 곳이다. 지난 날 서파(西坡) 선생 안공(安公)이 예천(醴泉) 군수를 사임하고 산 아래에 은거하며, .../ 예천 관련 내용이 수록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역사체험관 - 유적이다.//

안리(安理) : 구분: 영남유학인물자료/ 날짜: 1393년(태조 1)-/ 분류: 인물 > 영남유학인물자료/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안리/安理/ 호 서파/西坡/ 년도 1393년(태조 1)//


  안리(安理) : 가족이야기 | 안병록 | 2009.11.26 14:08/ http://cafe.daum.net/ 안리(安理) 가족이야기/ 조 : 안원(安瑗), 생부 : 안종약(安從約), 모 : 동래정씨(東萊鄭氏) 정양생(鄭良生)의 딸, 형제 : 안구(安玖) 등/ 많은 유학자와 명신을 배출한 순흥안씨 : 순흥안씨는 고려 시대 이래로 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한 이름 있는 가문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조선 성리학의 종조로 추앙받는 회헌(晦軒) 안향(安珦)을 들 수 있는데, 그가 바로 서파 안리의 6대조이다. 안리의 5대조인 죽옥자(竹玉子) 안우기(安于器)는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으며, 문순공(文順公)의 시호를 받았다. 고조인 겸재(謙齋) 안목(安牧)은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지고, 문숙공(文淑公)의 시호를 받았다. 증조인 안원숭(安元崇)은 순성군(順城君)에 봉해지고, 문혜공(文惠公)의 시호를 받았다. 안리의 조부 안원은 형조 전서(刑曹典書)를 지냈는데 공민왕의 뜻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외지에 유배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안리의 아버지 안종약은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지냈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한편 어머니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양도공(良度公)의 시호를 받은 동래정씨 정양생의 딸이다./ 유복한 일가를 이룬 안리 : 안리의 부인은 경주이씨 계천군 이종직의 딸이며, 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의 5대 손녀이다. 그녀는 모두 5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안타깝게도 장남 안백문(安伯文)과 2남 안숙문(安叔文)은 모두 후사를 두지 못했다. 3남 안계문(安季文)은 음사로 부사직을 지냈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었으며, 4남 안흥문(安興文)은 좌랑(佐郞)의 벼슬을 했으며, 5남 안익문(安益文)은 사과(司果)를 지냈다. 이들이 또한 장성하여 자식을 낳으니 그 후손은 일일이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로 번창하였다./ 문중 이야기 : - 순흥안씨 대룡산에 터전을 열다 : 용암산 동남쪽 기슭에 자리한 대룡산 마을은 순흥안씨와 창원황씨 두 문중이 세거해 오고 있는데, 창원황씨 입향조는 순흥안씨의 사위가 된다. 조선 태종 때 해주 목사를 지낸 안종약의 아들 서파 안리가 예천 군수로 있다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던져 버리고 물러나 순흥도호부 남쪽 용암산 아래 자리를 잡아 숲을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고 대룡산이라 이름 했다. 이 후 5백 년 동안 대룡산의 순흥안씨들은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관련인물 : - 단종절신 서파 안리 :안리의 호는 서파(西坡)·낙원(樂園)이고, 목사 안종약(安從約)의 아들로 문성공 안향의 6대손이다. 어머니는 동래정씨로 봉원부원군 정양생의 딸이다. 그는 조정에서 여러 벼슬로 불렀으나 사양해 오다가 1453년(단종 1) 의령 현감에 부임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봉록으로 기민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이듬해 예천 군수가 되었으나 얼마하지 않아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본향인 순흥부 대룡산으로 낙향했다. 그는 순흥부 남쪽 30리 누암산(樓岩山 : 용암산) 아래 자리를 잡고 마을을 이룩하여 동네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하고, 아호를 낙원옹(樂園翁)이라 했다. ‘대룡’은 옛날 제갈공명의 ‘와룡(臥龍)’에서 따왔다. 아호인 낙원에서 ‘원(園)’은 옛날 사마광의 ‘독락(獨樂)’의 뜻에서 취했다. 그는 순흥의 금성대군 사건(정축지변)이 일어난 후 용암산 기슭에 더욱 깊이 숨어 그 아들들에게, “지금은 출세할 때가 아니다. 문을 닫고 글을 읽어 행실을 닦기에 힘쓰되 우선 선조께서 주자(朱子)를 사모하신 뜻을 본받으라. 혹 서울에 가서 일가를 만나더라도 영달에 관해서는 아예 말해선 안 된다. 만일 이 훈계를 어기면 아비의 뜻을 저버림이니라.”고 일렀다. 서울에 사는 집안 조카며 손자들이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안리가 시골에 묻혀 고생스럽게 지내는 것을 딱히 여겨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왔으나 “나는 소백산 나물만으로 족한데 서울의 진미는 당치도 않다.”고 뿌리쳤다. 그의 선비적 기질은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안리의 아들 안계문은 부사직을 지냈으며, 손자 안영이 연산군 때 진사, 증손 안공택이 학행으로 동학교관, 안공필이 중종 때 진사, 안공신이 진사·문과 중시로 군수를 지냈다. 안공택의 손자 안응일이 효행으로 공조 참의에 증직되고, 그 아들 안욱이 인조 때 진사·문과로 군수를 지냈다. 안공신의 손자 안경우·안경례·안경유가 나란히 무과에 급제하여 함께 벼슬에 올랐다. 안응일의 7대손 안필경이 효행이 있었으며, 안리의 후손 안종희가 시문에 능하여 문집을 남겼다. 한국국학진흥원-유교유적] http://www.ugyo.net/(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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