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게시판

이곳에 올려진 내용은 예천군청과는 무관하오니 이점 양지하시고, 본 게시판을 이용해 게시자가 허위 과장광고나 사기성 게시물을 올릴 수도 있으니 사용자께서는 각별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 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제목고을원26-5:안리(1455.윤6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0.11.27 06:12:22
  예천고을원(26-5) : 안리(1455.윤6 이임) :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예천고을 원

---

  안리(安理) : 생애이야기 | 안병록 | 2009.11.26 14:06/ http://cafe.daum.net/ 안리(安理) 생애이야기/ 성명 : 안리(安理) , 1393년(태조 1)년 ~/ 본관 : 순흥( 順興 )/ 호 : 서파(西坡)/ 출생지 : 파주(坡州)의 옛 집/ 출신지 : 순흥((順興)/ 분묘지 : 순흥 남쪽 대룡산(大龍山) 계곡(桂谷) / 외관직 : 의령 현감(宜寧縣監), 예천 군수(醴泉郡守)/ 독서와 학문을 벗 삼아 지내다/ 서파 안리는 1393년(태조 1) 파주의 옛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풍채가 훌륭하고 도량이 크고 깊었다고 한다. 또한 가정에서 배운 문장과 학업은 당대의 명사들이 하나같이 숭상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찬성(贊成)과 판윤(判尹)에 오른 큰 형과 작은 형과는 달리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안리의 이러한 마음가짐은 “우리 가문은 회헌 이후 역대로 조정에 현달하여 형제와 자질들이 사헌부에 가득하고 온 가문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천한 옷을 입은 사람이 없으니 지금이 바로 자신을 거두어 숨길 때이다.” 라는 말에도 잘 드러난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대신 문을 닫고 독서에 열중하면서 심오한 도리를 되새기고 깊은 학문을 쌓는 것에 만족했다./ 짧은 관직 생활 속의 뛰어난 치적 : 이렇듯 조정의 일을 즐기지 않았던 그였기에 그리 오랜 관직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타고난 곧은 품성과 뛰어난 능력은 숨길 수 없는 법, 비록 두 번의 짧은 관직 생활이었지만 그는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의령현(宜寧縣)에 잠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마침 흉년이 들어 백성들 가운데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이 많아지자 안리는 자신의 녹봉을 나누어서 백성들을 구휼하였고, 이에 달아나 유랑하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돌아왔다고 한다. 이 일은 관찰사를 통해 조정에 알려졌고 그 다음해 안리는 예천 군수로 임명을 받았다./ 고향에 은둔하여 단종을 그리워하다 : 그가 예천 군수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사양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사실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안리는 결국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누암산(樓巖山) 밑에 집터를 잡고 살면서 학문에만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을 이름을 대룡산, 산 이름을 용암산(龍巖山)이라고 고쳐 불렀는데 이는 제갈량(諸葛亮)이 와룡(臥龍)에 은거한 뜻을 취한 것이라 한다. 한편 호를 낙원(樂園)이라고 개칭하기도 했는데 이는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의 독락원(獨樂園) 취향을 취한 것이라 한다. 이렇듯 그는 말년을 고향에서 은거를 하며 보냈다. 특히 사육신의 참화 이후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이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고 연이어 순흥부 내의 판복을 입은 70여 가문이 일시에 전멸을 당하자, 안리는 문을 막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더욱 더 깊이 몸을 숨겼다. 그는 명공과 거경(巨卿)들의 서신에도 답서를 하지 않았고, 방백과 수령들의 방문에도 응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영월을 우러러 바라보며 항상 슬퍼하고 상심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서울에 사는 현달한 반열에 있는 조카와 종손들이 그를 걱정하여 좋은 음식물이라도 보내려 하면 “소백산의 명아주와 콩잎국이 내 분수에 만족한데 관청에서 내려진 고량진미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라며 단호하게 물리쳤으니, 그의 검약과 지조 또한 알만하다. 이렇게 은거 생활을 하며 단종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던 안리는 자신의 고향에서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는 순흥부의 남쪽 대룡산의 계곡 언덕에 있다.

  세조 왕위 찬탈 후 은둔을 한 안리 : 안리(1393~?)는 고려 대유학자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5대손으로 해주 목사를 지냈다. 안종약(安從約)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동래정씨로 봉원부원군 정양생의 딸이고, 파주에서 태어났다. 안리의 호는 서파(西坡)·낙원(樂園)이다. 준수한 용모에 기량이 출중하고, 학문적 소양이 뛰어난데다 문장 실력 또한 훌륭하여 당시 유명인사들이 그를 따르고 받들었다 한다. 그의 맏형 안구(安玖)는 직제학(直提學)이었고, 중형 안경(安璟)은 한성 부윤을 지냈으나, 안리는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사람들은 무엇이나 가득히 차는 것을 경계했는데, 우리 집안은 회헌(晦軒 : 문성공 안향) 선조 이래로 고관대작이 무리를 이루었으니, 이는 실로 가득 찬 상태라 하겠다. 그러니 내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마땅히 삼가야 하리라.” 그리고는 두문불출하며 학문에 침잠했다. 그의 학문이 깊고 덕망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조정에서 여러 번 불러 벼슬을 내리고자 했으나 늘 사양하고 나가지 않다가 1453년(단종 1)에야 외직으로 의령 현감에 부임했다. 그가 의령 현감으로 재직할 때 그 지방에 심한 흉년이 들어 고을 백성들이 굶주림에 지쳐 사방으로 흩어져 고을을 등지고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봉록을 나누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니, 흩어졌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다시 모여들었다. 감사(監司)는 이러한 그의 행적을 조정에 보고했고, 이를 가상히 여긴 조정은 이듬해 안리를 예천 군수로 승진 발령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단종 임금이 왕위를 빼앗기고 물러나자, 안리는 단호하게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고향인 순흥부 남쪽 30리 누암산(樓岩山) 아래 터전을 잡았다. 그는 그 산자락에 숲을 개척하고 그 아래에 마을을 이루었으니, 그로부터 동네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했다. 그 산 이름은 용암산(龍巖山)으로 바뀌게 되었다. 산 이름을 용암산이라 한 것은 옛날 중국의 제갈공명이 ‘와룡(臥龍)’이라 했던 뜻을 취한 것이라고도 하고, 『주역』의 ‘잠룡물용(潛龍勿用 : 물속에 잠겨있는 용은 함부로 쓰지 말라)’에서 취했다고도 한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성삼문 등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형벌을 받고, 또한 순흥에 귀양 와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운동을 추진하다가 실패하여 순흥의 사대부 가문들이 모조리 도륙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안리는 용암산 기슭에 깊숙이 숨어 그 아들들에게 당부하였다. “지금은 출세할 때가 아니니, 우리 선조께서 주자(朱子)를 사모하신 뜻을 본받아 문을 닫아걸고 글을 읽으며 수양하여 행실을 반듯하게 하기에 힘쓰도록 하라. 혹 서울에 가서 일가를 만나더라도 영달에 관해서는 아예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 훈계를 어기면 아비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이는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에 나가 뜻을 세우기도 어렵거니와 자칫하면 일순간에 멸문지화를 당하는 난세를 피하여 조용히 자기 수양에 힘쓸 것을 당부한 지혜였다. 한 때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이 서찰을 보내왔으나, 그는 일체 답을 하지도 않았으며, 고을의 감사나 수령이 찾아와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에 사는 집안 조카며 손자들이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그가 시골에 묻혀 고생하며 지내는 것을 딱하게 여겨 철마다 맛있는 음식을 보내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소백산에서 나는 나물만으로도 분수에 족하니 서울의 진기하고 맛있는 음식은 어울리지 않는다.” 안리가 죽은 뒤 몇 해 지나지 않아 다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하여 죄 없는 선비들이 많이 화를 입었는데, 그의 후손들은 그의 명을 받들어 그다지 큰 피해가 없었다.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고 한다.한국국학진흥원-유교유적] http://www.ugyo.net/(daum 2010)

  안리(安理) : 학문이야기 | 안병록 | 2009.11.26 14:10/ http://cafe.daum.net/ 안리(安理) 학문이야기/ 학파 : 퇴계 학파/ 안향을 흠모하다/ 안리의 6대조가 안향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집안은 본디 성리학에 정통한 가문이었다. 그 역시 문장과 학업을 모두 가정에서 배웠다. 그러면서 자연히 회헌 안향에 대한 흠모의 감정도 깊어진 듯하다. 말년에 고향에서 은거 생활을 할 적에 말 1필과 동자 1명을 데리고 순흥의 숙수사(宿水寺)를 왕래하곤 하던 그는, 회헌 안향이 독서를 하던 세연지(洗硯池)를 지날 때 마다 흠모의 시를 읊었다고 한다. “죽계수(竹溪水)의 연원이여, 사수(泗水)의 물가에는 우리 조상님 독서하면서 여기서 자라나셨네. 이리저리 거닐어 보니 감모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데 달은 뜰의 오동과 세연지를 비추네.”/ 자손들에게 안향의 가르침을 전하다 : 이렇듯 안향을 흠모하였던 안리는 그의 가르침을 자손들에게도 고스란히 물려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항상 물과 달은 가득하면 넘치고 줄어든다.’는 경계로써 자손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는 부모를 봉양하고 남는 시간에는 주자서를 읽게 하였다. 이는 안향이 주자를 존모하던 뜻을 체득케 함이었으며 또한 자손들이 영달의 길에 얽매이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한국국학진흥원-유교유적] http://www.ugyo.net/(daum 2010)

  안리 : 영주 순흥 대룡산(大龍山) 안정면 용산리마을-安理(서파공파)| 순흥(順興)/ 바른정보(안정의)/ 2008.11.27 17:55/ http://cafe.daum.net/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 마을 순흥안씨 서파공파 안리(安理) 정착지/ 종택 / 서파정(西坡亭)/ 죽림사(竹林祠) / 서파안선생휘리약사비(西坡安先生諱理略史碑)/ 만지정(萬枝亭) : 영풍군 안정면 용산동에 있으며 안재건이 관리한다. 집의(執義) 안욱(安頊)의 건립으로 단곡(丹谷) 곽진(郭진)의 기가 있다.(daum 2010)

  안리 : 살림꾼 90 hit/ subject 안정면 대룡산 순흥 안(順興 安)씨 - 端宗 폐위되자 군수 安理가 은퇴, 터전 열어 -/ 용암산(龍岩山) 동남쪽 기슭에 자리한 대룡산 마을은 순흥 安씨와 창원 황(黃)씨 두 문중이 世居해 오는데, 安씨의 문헌에 의하면, 조선 太宗때 해주목사(海州牧使)를 지낸 안종약(安從約 : 安珦의 5대손)의 아들 이(理 : 호는 西坡)가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있다가, 端宗임금이 왕위를 빼앗기자, 분연히 벼슬을 던지고 물러와 순흥부(府) 남쪽 용암산 아래 자리잡아, 숲을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고 「대룡산」이라 이름했다고 전한다. (安應昌<鳳林大君의 스승>이 지은 安理의 행장<行將>/ 5백 년을 세거해 오는 대룡산의 순흥 安씨에서는 터전을 열은 이(理)의 아들 계문(季文)이 부사직(副司直), 손자 영(瑛)은 연산군 때 進士, 증손 공택(公擇)이 학행으로 동학교관(東學敎官), 공필(公弼)이 中宗때 進士, 공신(公信)이 進士, 文科 중시(重試)로 군수를 지냈으며, 공택의 손자 응일(應一)이 孝行으로 공조참의(工曺參議)에 증직되고, 그 아들 욱(頊)이 仁祖때 進士, 文科로 군수를 지냈다. 공신(公信)의 손자 경우(景祐), 경례(景禮), 경유(景?)가 나란히 武科에 급제하여 함께 벼슬에 올랐으며, 응일의 7대손 필경(必烱)이 효행이 독실했고, 理의 후손 종희(宗熙)가 詩文에 능하여 문집(文集)을 남겼다.

  [유적(遺跡)] : 1) 용연사(龍淵祠) : 대룡산에 있다. 안부(安孚 : 珦의 아버지. 고려 版圖判書지냄)이하 6位를 제향(祭享). (高宗초에 훼철됨)/ 2) 서파정(西坡亭) : 대룡산에 있다. 안리(安理)가 독서, 강학(講學)하던 처소로, 후손이 개축하다. 채산(蔡山) 권상규(權相圭)가 기문(記文)을 짓다./ 3) 만지정(萬枝亭) : 대룡산에 있다. 군수 안욱(安頊)이 독서하던 처소로, 후손이 옮겨 세우다. 文成公 향(珦)의 영정을 봉안, 곽구(郭玖)가 기문(記文)을 지었다./ 4) 우우정(友于亭) : 매담(梅潭) 안공신(安公信)이 독서하던 처소로 지금 용산리 어약(魚躍)에 있다. 옛터에 友于亭 舊址碑가 있다. 작성일: 2004-04-19 15:57:31( daum 2010)

  안리 [專門資料] : 西坡 安理 墓碑/ 자료유형 한국학자료/ 발행일2008-03-24(daum 2010)

  안리 [專門資料] : 西坡 安理 墓碑/ 발행일2007-01-09(daum 2010)


  안리(安理) : 발행일 2008-03-21/ 자료소개 본관 :순흥( 順興 ), 출신지 :순흥((順興), 분묘지 :순흥 남쪽 대룡산(大龍山) 계곡(桂谷), 주요 관직 :의령 현감(宜寧縣監), 예천 군수(醴泉郡守)/ 생애 일화 : 서파 안리는 1393년(태조 1) 파주의 옛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풍채가 훌륭하고 도량이 크고 깊었다고 한다. 또한 가정에서 배운 문장과 학업은 당대의 명사들이 하나같이 숭상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찬성(贊成)과 판윤(判尹)에 오른 큰 형과 작은 형과는 달리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안리의 이러한 마음가짐은 “우리 가문은 회헌 이후 역대로 조정에 현달하여 형제와 자질들이 사헌부에 가득하고 온 가문...(daum 2010)

  안리 [專門資料] : 서파정(西坡亭) (영남유교문화유물)/ 발행일 2007-01-03/ 자료소개 서파정(西坡亭)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서파정은 인륜을 저버린 단종 폐위 사건에 분개하여 명예와 이욕을 버리고 은거한 조선조 선비 안리(安理)가 독서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던 곳이다. 안리는 호가 서파(西坡)·낙원(樂園)으로,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단종 때 예천군수를 지냈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당시 순흥부 남쪽 용암산 아래에 터를 닦고 마을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불렀다. 해주 목사를 지낸 안종약(安從約)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동래정씨로 봉원부원군 정양생의 딸이다.(daum 2010)

  안리 [專門資料] : 서파정기(西坡亭記) (영남유교문화유물)/ 발행일 2007-01-03/ 자료소개 서파정(西坡亭)에 걸려있는 권상규(權相圭)가 지은 서파정기(西坡亭記)이다. 서파정의 유래와 안리(安理)의 충절, 그리고 후손들이 이것을 잘 이어받으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파정은 인륜을 저버린 단종 폐위 사건에 분개하여 명예와 이욕을 버리고 은거한 조선조 선비 안리(安理)가 독서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던 곳이다. 안리는 호가 서파(西坡)·낙원(樂園)으로,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단종 때 예천군수를 지냈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당시 순흥부 남쪽 용암산 아래에 터를 닦고 마을 이...(daum 2010)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페이지만족도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성에 만족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