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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31-1:정종주(1467.3.10이임)
예천고을원(31-1) : 정종주(1467.3.10 이임) : 풍양면 청곡리 포내 출신의 예천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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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주(鄭宗周)는 1467년(세조 13) 3월 10일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풍양면 청곡리 포내 출신, 자는 자문(子文), 본관은 동래, 응교 승원의 현손, 귀령의 손자, 수찬 옹(1391-1424)의 아들이다.
1450년(문종 1) 추장 문과에 정과 20위로 급제하였다. 1455년(세조 1) 12월 27일 좌랑으로서 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사헌부 지평(1458.7.14)에 임명되었다. 1460년(세종 6) 10월 16일에 병조 좌랑으로서 왕이 중궁과 세자와 더불어 부벽루에 나아가서 무과 시험을 친히 치룰 때 참고관이 되었다.
1461년(세조 7) 3월 10일에는 경차관으로서 황해도로 나가서 해주 감사와 해주 목사를 탄핵하여 모두 다른 도에 옮겨 살게 하였고, 그 후 참교를 거쳐 예천 군수로 부임하여 다스리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1467.3.10)되었다.
그 후 1475년(성종 6) 2월 14일 사령장을 돌려 받았다. 묘는 지보면 마산리 마산 묘장동 축좌에 있다.
정종주가 풍양면에 살게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그의 선조 정승원(1344-1390)이 고려 우왕 때의 잦은 정변을 피해 벼슬(예문응교 지제고)을 버리고 개성을 떠나 용궁현 구담에 숨어살았는데, 정승원의 손자 정귀령(결성 현감)이 풍양면 청곡리 포내의 뜰 앞에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고, 그 옆에 여덟 기둥의 정자를 지어 스스로 호를 삼수정이라고 하였다.
중종 때 증손자 정광필이 영의정이 되어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10.5)
정종주(鄭宗周) : 1467년(세조 13) 3월 10일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풍양면 청곡리 포내(浦內) 출신, 자는 자문(子文), 본관은 동래, 응교 승원(承遠)의 현손, 수찬 옹(雍)의 아들이다. 1450년(문종 1) 추장(秋場) 문과에 정과(丁科) 20위로 급제, 1455년(세조 1) 12월 27일 좌랑(佐郞)으로서 원종공신에 녹훈하였고, 사헌부 지평(1458.7.14)에 제수되었다. 1460년(세종 6) 10월 16일에 병조 좌랑으로서 왕이 부벽루(浮碧樓)에 나아가서 무과(武科)의 사후(射侯)를 친시(親試)할 때 참고관(參考官)이 되었고, 1461년(세조 7) 3월 10일 황해도 경차관(敬差官)으로서 해주 갑사 김영남(海州甲士金永南), 목사 허종항(牧使許從恒) 등을 벌로써 모두 타도에 옮겨 살 것을 형조에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 참교(參校)를 거쳐 1467년(세조 13) 3월 10일에 예천 군수를 이임하였다. 묘는 지보면 마산리 마산 묘장동 축좌(馬山卯莊洞丑에 있다.(成宗實錄 1475.2.14, 文科榜目, 族譜, 竺山勝覽 1934)
정종주 [記事] : 한국문집총간총목차 010집 사가집(四佳集 Ⅰ)에 실린 서거정(徐居正)의 풍양면 청곡리 포내 출신인 예천군수(1467 이임) 정종주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二首 447 尹淡? 寄蘭竹?簇二幅 448 聞鄭醴泉 宗周下世 痛悼有作 448 尹參贊向 出...”이다.(www.minchu.or.kr 2006)
정종주 [記事] : 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 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3월 10일 을해 2번째기사/ 비위가 있는 진잠 현감․연산 현감․익산 군수 등을 파직하다/ 진잠 현감(鎭岑縣監) 강의(康懿)는 옥사(獄事)를 지체하였고, 연산 현감(連山縣監) 이연(李涓)은 검시(檢屍)를 부실(不實)하게 하였고, 익산 군수(益山郡守) 임호연(任浩然)은 능화지(綾花紙)를 사용하여 벽(壁)을 발랐고, 예천 군수(醴泉郡守) 정종주(鄭宗周)는 백성들에게 횡렴(橫斂)하였으므로 모두 파직(罷職)시켰다./ 【영인본】 8 책 64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정종주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630_0060/ 여지도서 / 慶尙道 / 比安 / 形勝 / 雙溪帶繞疊?屛廻 鄭宗周詩雙溪羅帶繞疊?錦屛廻(www.history.go.kr 2007)
정종주 [記事] :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12월 27일 무진 3번째 기사/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 의정부에 전지(傳旨)하기를, ꡒ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성원위(星原尉) 이정녕(李正寧)․좌찬성(左贊成) 권제(權?)․...현감(縣監) 임숙(任淑)․김호인(金好仁), 좌랑(佐郞) 정종주(鄭宗周)․부교리(副校理) 정효항(鄭孝恒)․겸박사(兼博士) 임효검(林孝儉)․정자(正字) 조지(趙祉)․권지 정자(權知正字) 구치동(丘致?)․지사(知事) 최사유(崔士柔)․부교리 조안정(趙安貞)․박사(博士) 허적(許迪)․권지 정자(權知正字) 이극기(李克基)․저작(著作) 윤효손(尹孝孫), ...행 사용(行司勇) 박막동(朴莫同), 종 박용(朴龍)은 2등에 녹(錄)한다... 【영인본】 7 책 102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변란(變亂)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註 662]동어허리(童於虛里) :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의 이복 동생. ☞ / [註 663]대위(大位) : 임금의 자리. ☞ / [註 664]잠저(潛邸) : 임금이 되기 전의 집. ☞ / [註 665]발섭(跋涉) : 산을 넘고 물을 건넘. ☞ / [註 666]1자급(資級) : 조선조 때 벼슬에 따른 품위(品位)의 등급. 정(正)․종(從)․각 품(品)마다 상(上)․하(下) 두 자급이 있었으므로 총 36자급이 있었음. ☞ / [註 667]유죄(宥罪) : 죄를 지으면 그 죄를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는 것. ☞ / [註 668]산관(散官) : 자급(資級)만 받고 보직(補職)을 받지 못한 관리를 말함. ☞ / [註 669]통정 대부(通政大夫) : 정3품. ☞ / [註 670]생질(甥姪) : 조카. ☞(www.history.go.kr 2007)
정종주 [記事] : 세조실록 13권/ 세조 4년( 1458 무인 / 명 천순(天順) 2년) 7월 14일 기해 2번째 기사/ 김세민․안숭효․조효문․노숙동․어효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세민(金世敏)을 중추원 사(中樞院使)로, 안숭효(安崇孝)를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조효문(曹孝門)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노숙동(盧叔仝)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어효첨(魚孝瞻)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이윤손(李允孫)을 경창부 윤(慶昌府尹) 겸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로, 곽연성(郭連城)을 인순부 윤(仁順府尹)으로, 민건(閔騫)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극감(李克堪)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승소(李承召)를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이인(李茵)․강순(康純)․이변(李邊)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구신충(具信忠)을 사헌 집의(司憲執義)로, 정종주(鄭宗周)를 사헌 지평(司憲持平)으로, 양정(楊汀)을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삼았다./ 【영인본】 7 책 28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정종주 [記事] : 세조실록 22권/ 세조 6년( 1460 경진 / 명 천순(天順) 4년) 10월 16일 무오 3번째 기사/ 중궁과 세자와 더불어 부벽루에 나아가다/ ...임금이 중궁(中宮)과 세자(世子)와 더불어 부벽루(浮碧樓)에 나아가서 병조 판서(兵曹判書) 한명회(漢明澮)․이조 판서(吏曹判書) 구치관(具致寬)․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질(金?)․참의(參議) 구신충(具信忠)을 참시관(參試官)으로 삼고, 병조 정랑(兵曹正郞) 임효검(林效儉)․정종주(鄭宗周), 좌랑(佐郞) 이극증(李克增)․신환(申煥)을 참고관(參考官)으로 삼아 무거(武擧)의 사후(射侯)하는 것을 친시(親試)하였다. 도관찰사(都觀察使) 조효문(曹孝門)․도절제사(都節制使) 황석생(黃石生) 등이 연탁(宴卓)을 올리었다. 임금이 현판(懸板)의 제영(題詠)에 고려(高麗) 의종(毅宗)의 시(詩)가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어제(御製)하기를, ꡒ광대한 강의 흐름 어찌 다하랴! 근원이 있는 것은 모두 이렇다. 당당한 큰 업을 어디서 시작하랴! 아득하고 어둑하여 천지(天地)가 없다. 외람되이 요도(瑤圖)를 쥐어 화란(禍亂)을 평정한 것이 어찌 나의 공이랴. 온전히 여러 사람의 지혜를 씀에 힘입었다. 눈을 달리매 천산(千山)이 한 지경을 이루었으니, 고금의 호걸(豪傑)이 두가지 이치가 없다. 군사를 훈련하고 방면을 살피고 백성의 폐단을 찾으니, 팔조(八條) 교민(敎民)이 어찌 전대에만 아름다우랴!ꡓ하였다. 대가(大駕)를 따르는 재추(宰樞)에게 이를 화답(和答)하기를 명하고, 또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게 하니, 기록하기를, ꡒ경진년4700) 초겨울 초하룻날 임금이 서쪽 땅에 순행(巡幸)하여 백성의 질고(疾苦)를 살피고, 사마(士馬)를 정돈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니 평양은 구도(舊都)4701) 라 이르고, 명하여 평안(平安)․황해(黃海) 두 도의 선비를 모아 책문(策問)을 발하여 문사(文士)에게 두 도의 시무(時務)로써 묻고, 대가(大駕)를 명하여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강에 임하여 무사(武士)가 사후(射侯)하는 것을 보아 등제(等第)를 정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조효문(曹孝門)이 헌수(獻壽)하기를 절하여 청하니, 호종(扈從)하는 군신(群臣)에게 모두 차례로 잔[爵]을 올릴 것을 명하였다. 술이 행하여지자 붓을 가져오라 명하여 시를 지으니, 군신들이 앉은 자리에서 화답(和答)하여 올리었다. 조효문이 판(板)위에 달기를 청하니 허락하고, 신숙주를 돌아보며, ꡐ네가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라.ꡑ 하였다. 신이 엎드려 보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신무(神武)하시어 난(難)을 평정하고, 문(文)으로 태평을 이루게 했는데도 오히려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사방(四方)을 순시(巡視)하였습니다. 군사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휼(救恤)하며, 언로(言路)를 열고 현준(賢俊)을 구하되 미치지 못할까 급급하셨습니다. 이에 또 등람(登覽)하여 하상(遐想)하며 높이 천고(千古)를 회상하여 물건에 붙여 감회를 일으키어 시(詩) 밖에 애연(?然)합니다. 천파(天?)가 휘황하게 비치어 만세의 광휘(光輝)를 남기었으니, 참으로 기주(箕疇)와 아름다움을 함께 한 것이며, 그것은 서토(西土) 사람의 천일(千一)의 다행이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이르면 어찌 백성의 질고를 살피고 사마(士馬)를 정돈하는 데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신(臣) 신숙주는 배수(拜手) 계수(稽首)하고 삼가 기록합니다.ꡓ하였다./ 【영인본】 7 책 427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어문학-문학(文學) / *과학-지학(地學)/ [註 4697]향시(鄕試) : 각도(各道)에서 그 도 안의 유생(儒生)에게 보이던 초시(初試)를 말함. ☞ / [註 4698]전시(殿試) : 임금이 친히 보이는 과거 시험. 과거의 마지막 시험으로서 여기에서 장원(壯元)과 갑․을․병과로 나누어 33인을 시취(試取)하였음. ☞ / [註 4699]전조(前朝) : 고려. ☞ / [註 4700]경진년 : 1460 세조 4년. ☞ / [註 4701]구도(舊都) : 옛서울. ☞(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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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주(鄭宗周)는 1467년(세조 13) 3월 10일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풍양면 청곡리 포내 출신, 자는 자문(子文), 본관은 동래, 응교 승원의 현손, 귀령의 손자, 수찬 옹(1391-1424)의 아들이다.
1450년(문종 1) 추장 문과에 정과 20위로 급제하였다. 1455년(세조 1) 12월 27일 좌랑으로서 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사헌부 지평(1458.7.14)에 임명되었다. 1460년(세종 6) 10월 16일에 병조 좌랑으로서 왕이 중궁과 세자와 더불어 부벽루에 나아가서 무과 시험을 친히 치룰 때 참고관이 되었다.
1461년(세조 7) 3월 10일에는 경차관으로서 황해도로 나가서 해주 감사와 해주 목사를 탄핵하여 모두 다른 도에 옮겨 살게 하였고, 그 후 참교를 거쳐 예천 군수로 부임하여 다스리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1467.3.10)되었다.
그 후 1475년(성종 6) 2월 14일 사령장을 돌려 받았다. 묘는 지보면 마산리 마산 묘장동 축좌에 있다.
정종주가 풍양면에 살게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그의 선조 정승원(1344-1390)이 고려 우왕 때의 잦은 정변을 피해 벼슬(예문응교 지제고)을 버리고 개성을 떠나 용궁현 구담에 숨어살았는데, 정승원의 손자 정귀령(결성 현감)이 풍양면 청곡리 포내의 뜰 앞에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고, 그 옆에 여덟 기둥의 정자를 지어 스스로 호를 삼수정이라고 하였다.
중종 때 증손자 정광필이 영의정이 되어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10.5)
정종주(鄭宗周) : 1467년(세조 13) 3월 10일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풍양면 청곡리 포내(浦內) 출신, 자는 자문(子文), 본관은 동래, 응교 승원(承遠)의 현손, 수찬 옹(雍)의 아들이다. 1450년(문종 1) 추장(秋場) 문과에 정과(丁科) 20위로 급제, 1455년(세조 1) 12월 27일 좌랑(佐郞)으로서 원종공신에 녹훈하였고, 사헌부 지평(1458.7.14)에 제수되었다. 1460년(세종 6) 10월 16일에 병조 좌랑으로서 왕이 부벽루(浮碧樓)에 나아가서 무과(武科)의 사후(射侯)를 친시(親試)할 때 참고관(參考官)이 되었고, 1461년(세조 7) 3월 10일 황해도 경차관(敬差官)으로서 해주 갑사 김영남(海州甲士金永南), 목사 허종항(牧使許從恒) 등을 벌로써 모두 타도에 옮겨 살 것을 형조에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 참교(參校)를 거쳐 1467년(세조 13) 3월 10일에 예천 군수를 이임하였다. 묘는 지보면 마산리 마산 묘장동 축좌(馬山卯莊洞丑에 있다.(成宗實錄 1475.2.14, 文科榜目, 族譜, 竺山勝覽 1934)
정종주 [記事] : 한국문집총간총목차 010집 사가집(四佳集 Ⅰ)에 실린 서거정(徐居正)의 풍양면 청곡리 포내 출신인 예천군수(1467 이임) 정종주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二首 447 尹淡? 寄蘭竹?簇二幅 448 聞鄭醴泉 宗周下世 痛悼有作 448 尹參贊向 出...”이다.(www.minchu.or.kr 2006)
정종주 [記事] : 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 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3월 10일 을해 2번째기사/ 비위가 있는 진잠 현감․연산 현감․익산 군수 등을 파직하다/ 진잠 현감(鎭岑縣監) 강의(康懿)는 옥사(獄事)를 지체하였고, 연산 현감(連山縣監) 이연(李涓)은 검시(檢屍)를 부실(不實)하게 하였고, 익산 군수(益山郡守) 임호연(任浩然)은 능화지(綾花紙)를 사용하여 벽(壁)을 발랐고, 예천 군수(醴泉郡守) 정종주(鄭宗周)는 백성들에게 횡렴(橫斂)하였으므로 모두 파직(罷職)시켰다./ 【영인본】 8 책 64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정종주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630_0060/ 여지도서 / 慶尙道 / 比安 / 形勝 / 雙溪帶繞疊?屛廻 鄭宗周詩雙溪羅帶繞疊?錦屛廻(www.history.go.kr 2007)
정종주 [記事] :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12월 27일 무진 3번째 기사/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 의정부에 전지(傳旨)하기를, ꡒ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성원위(星原尉) 이정녕(李正寧)․좌찬성(左贊成) 권제(權?)․...현감(縣監) 임숙(任淑)․김호인(金好仁), 좌랑(佐郞) 정종주(鄭宗周)․부교리(副校理) 정효항(鄭孝恒)․겸박사(兼博士) 임효검(林孝儉)․정자(正字) 조지(趙祉)․권지 정자(權知正字) 구치동(丘致?)․지사(知事) 최사유(崔士柔)․부교리 조안정(趙安貞)․박사(博士) 허적(許迪)․권지 정자(權知正字) 이극기(李克基)․저작(著作) 윤효손(尹孝孫), ...행 사용(行司勇) 박막동(朴莫同), 종 박용(朴龍)은 2등에 녹(錄)한다... 【영인본】 7 책 102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변란(變亂)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註 662]동어허리(童於虛里) :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의 이복 동생. ☞ / [註 663]대위(大位) : 임금의 자리. ☞ / [註 664]잠저(潛邸) : 임금이 되기 전의 집. ☞ / [註 665]발섭(跋涉) : 산을 넘고 물을 건넘. ☞ / [註 666]1자급(資級) : 조선조 때 벼슬에 따른 품위(品位)의 등급. 정(正)․종(從)․각 품(品)마다 상(上)․하(下) 두 자급이 있었으므로 총 36자급이 있었음. ☞ / [註 667]유죄(宥罪) : 죄를 지으면 그 죄를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는 것. ☞ / [註 668]산관(散官) : 자급(資級)만 받고 보직(補職)을 받지 못한 관리를 말함. ☞ / [註 669]통정 대부(通政大夫) : 정3품. ☞ / [註 670]생질(甥姪) : 조카. ☞(www.history.go.kr 2007)
정종주 [記事] : 세조실록 13권/ 세조 4년( 1458 무인 / 명 천순(天順) 2년) 7월 14일 기해 2번째 기사/ 김세민․안숭효․조효문․노숙동․어효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세민(金世敏)을 중추원 사(中樞院使)로, 안숭효(安崇孝)를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조효문(曹孝門)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노숙동(盧叔仝)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어효첨(魚孝瞻)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이윤손(李允孫)을 경창부 윤(慶昌府尹) 겸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로, 곽연성(郭連城)을 인순부 윤(仁順府尹)으로, 민건(閔騫)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극감(李克堪)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승소(李承召)를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이인(李茵)․강순(康純)․이변(李邊)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구신충(具信忠)을 사헌 집의(司憲執義)로, 정종주(鄭宗周)를 사헌 지평(司憲持平)으로, 양정(楊汀)을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삼았다./ 【영인본】 7 책 28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정종주 [記事] : 세조실록 22권/ 세조 6년( 1460 경진 / 명 천순(天順) 4년) 10월 16일 무오 3번째 기사/ 중궁과 세자와 더불어 부벽루에 나아가다/ ...임금이 중궁(中宮)과 세자(世子)와 더불어 부벽루(浮碧樓)에 나아가서 병조 판서(兵曹判書) 한명회(漢明澮)․이조 판서(吏曹判書) 구치관(具致寬)․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질(金?)․참의(參議) 구신충(具信忠)을 참시관(參試官)으로 삼고, 병조 정랑(兵曹正郞) 임효검(林效儉)․정종주(鄭宗周), 좌랑(佐郞) 이극증(李克增)․신환(申煥)을 참고관(參考官)으로 삼아 무거(武擧)의 사후(射侯)하는 것을 친시(親試)하였다. 도관찰사(都觀察使) 조효문(曹孝門)․도절제사(都節制使) 황석생(黃石生) 등이 연탁(宴卓)을 올리었다. 임금이 현판(懸板)의 제영(題詠)에 고려(高麗) 의종(毅宗)의 시(詩)가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어제(御製)하기를, ꡒ광대한 강의 흐름 어찌 다하랴! 근원이 있는 것은 모두 이렇다. 당당한 큰 업을 어디서 시작하랴! 아득하고 어둑하여 천지(天地)가 없다. 외람되이 요도(瑤圖)를 쥐어 화란(禍亂)을 평정한 것이 어찌 나의 공이랴. 온전히 여러 사람의 지혜를 씀에 힘입었다. 눈을 달리매 천산(千山)이 한 지경을 이루었으니, 고금의 호걸(豪傑)이 두가지 이치가 없다. 군사를 훈련하고 방면을 살피고 백성의 폐단을 찾으니, 팔조(八條) 교민(敎民)이 어찌 전대에만 아름다우랴!ꡓ하였다. 대가(大駕)를 따르는 재추(宰樞)에게 이를 화답(和答)하기를 명하고, 또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게 하니, 기록하기를, ꡒ경진년4700) 초겨울 초하룻날 임금이 서쪽 땅에 순행(巡幸)하여 백성의 질고(疾苦)를 살피고, 사마(士馬)를 정돈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니 평양은 구도(舊都)4701) 라 이르고, 명하여 평안(平安)․황해(黃海) 두 도의 선비를 모아 책문(策問)을 발하여 문사(文士)에게 두 도의 시무(時務)로써 묻고, 대가(大駕)를 명하여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강에 임하여 무사(武士)가 사후(射侯)하는 것을 보아 등제(等第)를 정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조효문(曹孝門)이 헌수(獻壽)하기를 절하여 청하니, 호종(扈從)하는 군신(群臣)에게 모두 차례로 잔[爵]을 올릴 것을 명하였다. 술이 행하여지자 붓을 가져오라 명하여 시를 지으니, 군신들이 앉은 자리에서 화답(和答)하여 올리었다. 조효문이 판(板)위에 달기를 청하니 허락하고, 신숙주를 돌아보며, ꡐ네가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라.ꡑ 하였다. 신이 엎드려 보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신무(神武)하시어 난(難)을 평정하고, 문(文)으로 태평을 이루게 했는데도 오히려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사방(四方)을 순시(巡視)하였습니다. 군사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휼(救恤)하며, 언로(言路)를 열고 현준(賢俊)을 구하되 미치지 못할까 급급하셨습니다. 이에 또 등람(登覽)하여 하상(遐想)하며 높이 천고(千古)를 회상하여 물건에 붙여 감회를 일으키어 시(詩) 밖에 애연(?然)합니다. 천파(天?)가 휘황하게 비치어 만세의 광휘(光輝)를 남기었으니, 참으로 기주(箕疇)와 아름다움을 함께 한 것이며, 그것은 서토(西土) 사람의 천일(千一)의 다행이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이르면 어찌 백성의 질고를 살피고 사마(士馬)를 정돈하는 데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신(臣) 신숙주는 배수(拜手) 계수(稽首)하고 삼가 기록합니다.ꡓ하였다./ 【영인본】 7 책 427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어문학-문학(文學) / *과학-지학(地學)/ [註 4697]향시(鄕試) : 각도(各道)에서 그 도 안의 유생(儒生)에게 보이던 초시(初試)를 말함. ☞ / [註 4698]전시(殿試) : 임금이 친히 보이는 과거 시험. 과거의 마지막 시험으로서 여기에서 장원(壯元)과 갑․을․병과로 나누어 33인을 시취(試取)하였음. ☞ / [註 4699]전조(前朝) : 고려. ☞ / [註 4700]경진년 : 1460 세조 4년. ☞ / [註 4701]구도(舊都) : 옛서울. ☞(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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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