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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34-1:정종소(성종때부임)
작성자장병창 @ 2011.04.02 06:49:17
  예천고을원(34-1) : 정종소(성종 때 부임) : 삼포무역을 금지시킨 예천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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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종소(鄭從韶)는 조선 성종 때 부임한 예천 군수이다. 자는 사정(司貞), 호는 오천(烏川), 본관은 연일, 1447년(세종 29)에 식년 문과에 병과 7위로 급제하였다.

  성균관 학록(1447), 사간원 좌헌납(1459.7.18), 한성 소윤을 거쳐, 사헌부 장령(1462.4.16)으로서 암행어사가 되어 관리들을 규찰하기 위해 강원도로 갔다. 영주고을 원으로서 그곳에 작은 누각인 소루를 세웠고, 세조 때 의성고을 원으로서 정치 업적이 저명하였고, 영덕고을 원으로서 정치를 잘 했고, 동래고을 원도 지냈다.

  다시 중앙 관서로 돌아가 봉상시 부정으로서 왕명으로 삼포로 가서 죄를 지은 상인 이길생과 통사 김치중을 처형하고 삼포무역을 금지시켰다(1469.3.9). 그 후 교리를 거쳐 예천 군수, 성균관 사성을 지냈고, 숙묘전에 배향되었다.

  정종소가 예천고을 원을 할 무렵인 1478년(성종 9) 6월 10일 예천군과 용궁현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예조에서 왕에게 청하기를, “향과 축문을 내려 경상도의 도사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1479년(성종 10) 11월 8일 형조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용궁 사람인 사섬시의 종 계동이 자기 아내를 괴롭힌 장교 계성을 칼로 찔러 죽게 하였으니, 사형에 처하소서” 하니, 왕이 사형은 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1481년(성종 12) 1월 16일 의금부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역적에 연좌된 아이들은 그 친척이 보호하여 주고 있는데, 이제 나이가 찬 자는 고을의 관로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난신 장익지의 아들 말동을 예천군청의 노예로 삼았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10.25)


  정종소(鄭從韶) : 조선 성종 때 부임한 예천 군수이다. 자는 사정(司貞), 호는 오천(烏川),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1447년(세종 29)에 식년 문과에 병과 7위로 급제하였다. 교리(校理)에 임명된 후 예천 군수를 거쳐 사성(司成)에 이르렀다. 영주(榮州)의 원으로서 소루(小樓)를 천순(天順, 1457-1464)년 간에 세웠고, 세조 때 의성의 원으로서 정치 업적이 저명하였다. 영덕(盈德)의 골원으로서 정치를 잘 했으며, 동래(東萊)의 원도 하였다. 1460년(세조 6) 경상도 경력(經歷)을 지냈고, 사후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되었다. [세종실록] : 1448년(세종 30) 10월 24일 왕이 삼관의 천전법(遷轉法)에 대해 의논할 때, 그가 아뢰기를, "정묘년(1447)에 성균관 학록(成均館學錄)이었던 신(臣)이 이 과거에 참여하여 장차 자급(資級)을 더하려고 하오나 천전하는 예(例)에 구애되어 그 벼슬에 그대로 머물고 옮기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세조실록] : 1459년(세조 5) 7월 18일 사간원 좌헌납(左獻納)이 되었다. 왕이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政事)를 볼 때(1460.6.27) 사예(司藝)로서 윤대(輪對)하였고, 그 후 한성 소윤(漢城少尹)을 하다가 1462년(세조 8) 4월 16일에 겸 사헌부 장령(兼司憲府掌令)이 되었다. 그 이튿날 왕이 각 도에 사목(事目)을 주어 분순어사(分巡御史)를 파견하여 관리들을 규찰케 할 때 정종소는 강원도로 갔다. [예종실록] : 그 후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일 때인 1469년(예종 1) 3월 9일 왕이 그에게 명령하여, 삼포(三浦) 등지에서 금을 받고 물건을 적게 준 상인 이길생(李吉生), 통사 김치중(通事金致中)을 처참토록 하고, 삼포 무역을 금하였다. [성종실록] : 1471년(성종 2) 1월 14일에도 왕을 윤대(輪對)한 적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영천군편(榮川郡篇) 누정조의 ''''소루(小樓)'''' 주(註)에 "천순(天順, 1457-1464) 중에 군수 정종소가 세웠다."라고 한다. [著書] : <오천선생금석록(烏川先生金石錄)>(72張, 26cm)이 있는데, 영천(永川) 모산헌(慕汕軒)에서 1984년에 출판하였고, 경북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인터넷 야후 2001)

  정종소(鄭從韶) : 조선 성종 때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하였다. 자는 사정(司貞), 호는 오천(烏川), 본관은 연일(延日), 1447년(세종 29)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교리(校理)를 제수받은 후 예천 군수를 거쳐 사성(司成)에 이르렀다. 영주(榮州)의 원으로서 소루(小樓)를 천순(天順, 1457-1464)년 간에 세웠고, 영덕(盈德)의 골원으로서 정치를 잘 했으며, 동래(東萊)의 원도 하였다.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되었다.

  정종소 [記事] : 한국문집총간(010_072a) 보한재집(保閑齋集, 1645)에 실린 신숙주(申叔舟)의 예천군수(성종 때) 정종소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保閑齋集卷第八/ 五言四韻/ 寄贈醴川守鄭同年 從韶/ 故人爲親老。嶺表宰絃歌。超遞關山遠。蒼茫風雪多。靑雲浮宦海。白日逐年蛇。未退愁流急。空嗟?已華。/ 保閑齋集卷第八”이다.(www.minchu.or.kr 2006)

  정종소 [記事] : 한국문집총간(010_072a) 보한재집(保閑齋集, 1645)에 실린 신숙주(申叔舟)의 예천군수(성종 때) 정종소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保閑齋集卷第八/ 五言四韻/ 寄贈醴川守鄭同年 從韶/ 故人爲親老。嶺表宰絃歌。超遞關山遠。蒼茫風雪多。靑雲浮宦海。白日逐年蛇。未退愁流急。空嗟?已華。/ 保閑齋集卷第八”이다.(www.minchu.or.kr 2006)

  정종소 : 예천 군수이다. 오천금석록(烏川金石錄)은 정종소(鄭從韶 ; 세종조~성종조)의 시문집이다. 정종소의 자는 가정(可貞), 호는 정헌(靖軒),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아버지는 문예(文裔)며,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1447년(세종 29) 봄에 문과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록(成均館學錄)이 되고 같은해 가을에 또 문과 중시(重試)에서 을과 1인으로 급제하니 성삼문, 박팽년, 이개, 류성원(柳誠源)과 동방(同榜)으로 지기의 도교가 두터웠다. 이어 성균관과 집현전의 여러 직을 역임하고 이조 좌랑을 거쳐서 친로(親老)로 인하여 향인의 외직(外職)을 청해서 의성 현령에 재임 중 병자옥사를 듣고 병을 칭해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후에 조정에서 사간원 좌헌납(司諫院左獻納) 등 여러 번의 제서(除書)가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가 만년에 김종직의 권유로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나가 후에 예천 군수와 안동진관 병마첨절사, 함양 군수(咸陽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입조하여 봉상시 부정(奉常寺副正)으로 경연(經筵)에 나가서 성종에게 경사(經史)를 강하였고 전라도 진휼사(全羅道賑恤使),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와서 성균관 사성으로 끝을 맺었다. 절의가 아니었다면 능히 경상(卿相)에 오를 문장과 덕행을 겸비한 사람으로 유림에서 상계(上啓)하여 숙모전(肅慕殿) 서무(西撫)에 배향되었다. (www.koreastudy.or.kr 2005)

  정종소 [記事] : 영훈정/ 관련인물ㆍ유물/ 정종소의 일생 / 정종소는 자는 가정, 본관은 오천이다. 생원 영산유학교도 정문예의 장남으로 영천시 대전동에서 태어났다. 대전 이보흠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447년 봄 식년 문과의 병과에 급제하고, 그해 가을 중시전에서 을과에 급제하니, 성삼문․이개․박팽년․유성원 등과 을과 동방이다. 성균관 학유로부터 학록․학정박사 전적을 거쳐 이조 좌랑을 지냈다. 의성 군수․사헌부 집의․한성소윤․사헌부 장령 등 여러 내외 직책을 내렸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 후 영천 군수로 있을 때 향약을 제정하여 남정을 지어 기문했다. 점필재 김종직이 공경해서 항상 오천 정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예천 군수․안동진관첨절제사․함양 군수를 역임하고, 경연관봉상사정 사성으로 관직을 끝마쳤다.(www.koreastudy.or.kr 2007)

  정종소 [記事] : 학사집(鶴沙集) 11권 6책 중 卷5에 실린 기록이다. / 記/ 迎薰亭重建記 23/ 宣德年間에 수령 鄭從韶가 짓고 퇴계가 명명한 정자의 위치를 설명하고 무너진 정자를 1643년(인조 21) 수령 申?이 다시 중건한 내력을 적었다. [정종소는 예천군수(1472이후 부임)를 지냈다.](www.koreastudy.or.kr 2007)

  정종소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醴泉 / 名宦 / 高麗 趙云仡本朝全伯英 金謙 安省 李惠 嘗知甫州有詩名 李伯謙 尹起畎 金仁民 鄭從韶舊增朴漢柱 政擧治平吏畏民服 新增兪㯙 有峴山墮淚碑(www.history.go.kr 2007)

  정종소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榮川 / 樓亭 / 字民樓 在客館北宣德丁未知郡 權詳所建今廢 濟民樓 在龜山南宣德癸丑知郡 潘渚建乃醫學樓也敎授官文獻爲記 小樓 在客館南天順中郡守 鄭從韶建舊增金宗直記邑于竹嶺之陽榮爲第二其山川明秀其邑居爽塏其民俗儉易往往製錦于是者類多君子人而其表表在人耳目惟河浩亭?鄭公習仁 崔公元傳三人而已今守烏川鄭先生亦其齊驅者也以親故辭臺府出爲是郡凡所施設似若有縣譜諄諄以奉上煦煦以愛民侃侃以嫉邪用有?之資化易治之民譬如?丁之以無厚入有間夫焉有?格之患哉不期年而政通人和暇日登字民樓?然曰郡爲使華賓客踰嶺往來之衝有使華必有賓佐每當畏景窓?蒸?思欲濯淸風/ <하권0402-2>/ 而去??使華則是樓在焉賓佐何居斯無奈一欠乎遂環視觀宇於東南隅得?舍一區乃拓而新之稍崇其柱傍繞以檻其下闕隙地爲池種魚數斗池中有島植以苦竹八九科間以新花蘭芷被其岸芙蓉冒其波方塗?之始余過而登焉蒼松伍伍籬落閑閑綠疇黃?如繡相錯暎帶尊俎以至桑耘者不得休于蔭牒訴者無患阻于障有助於勸督剖決之政爲不少於是執爵而慶於主人曰世之守令懶者爲人所持不克自振雖官府頹頓撑扶以了歲月而莫敢一搖手强者矜其智巧輕用民力?以承稟營繕不休至使千室如被榜?先生之爲則不然出於餘力卽舊而新因闇而廓一毫不以勞於民費於帑雖在郡朝亦不自知有是役也而過客得避?濕無憂於救?玆其所謂仁人之擧也哉噫踵先生而至有所作爲者動以先生爲法則庶乎爲賢守令矣○前人詩班馬登臨强自寬殘春心緖卽憂端墻頭把酒看紅??角鉤簾納碧?長嘯可堪勞遠別浪遊聊欲盡環觀烏川物色供詩科?得吟?賭一閑○令廢 舊增雙淸堂 在客館東郡守 / <하권0402-3>/ 金世勳所建堂之南北皆有蓮池新增文純公 李滉詩大葉盤盤小葉田紅粧明媚擁蒼烟微風?蓋時時動急雨跳珠箇箇圓晦父欣逢數君子濂翁愛說濯淸漣憑?盡日追餘賞陟覺襟懷已灑然○金尙憲詩昨夜凉風襲桂堂敗荷千柄倒回塘幾家黃葉秋容老一壁靑燈旅枕凉幽興未尋潘岳賦淸談先據庚公床多君美政能消劇坐嘯蘇州燕寢香 新增迎薰亭 在郡南三里郡守 鄭從韶?初名南亭文純公 李滉名以迎薰手書揭額 同樂亭 在郡衛前郡守 洪柱世?前有方池池中種蓮又有三島 龜鶴亭 在郡西三里西龜臺下參判 金?所?東對東龜南?鶴?下臨龜川泉石絶勝柳成龍詩繞郭沿溪細逕?官橋村樹巧歲遮苔侵古石玄衣濕峀列晴?彩翼斜異地逢場眞不偶幽居占勝?堪誇主人高節如淸獻龜鶴相隨老一涯○李?光詩曲曲池臺面面山一亭形勝盡圖看泥塗曳尾龜同樂月露棲身鶴共閑秋滿菊花霜後逕夜深漁火雨中灣何時杖?尋眞隱壑霧溪風入醉顔○李植詩卽今林壑小神仙曾是 天門蓍蔡賢山/ <하권0402-4>/ 勢沖虛遙拱檻巖形坼兆逈臨川投身綠水?藏六飮露瑤池歲閱千安得陪公遊賞地共龜呼吸鶴??(www.history.go.kr 2007)

  정종소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榮川 / 古蹟 / 善谷縣 金富軾云本高句麗 賈谷縣 新羅景德王改名屬奈靈郡今未詳 無信塔 郡有塔名曰無信恭愍朝鄭習仁爲知郡曰異哉惡木不息盜泉不飮惡其名也烏有巍然其形爲一邑所瞻視而以無信表之者命刻日夷之用其?修賓館辛旽聞而怒繫鷄林獄移繫典法欲置死地廷臣憐之營救得免廢爲庶人 市肆基 新羅王駐?于玆久而乃返市肆之基在今郡西二里 ?已郡 新羅炤智王幸此郡郡人波路有女碧花年十六美而艶其父盛?之置轝中?以色?獻之王以爲饌物開視卽美女也其後累微行至其第幸之路經古?郡宿於一老?家問曰國人以王爲何如主?曰衆以爲聖人妾獨疑之竊聞王幸?已女累微服而來夫龍變魚服爲漁者所制今王以萬乘之尊不自愼重此而爲聖孰非聖乎王聞之大慙潛逆其女置/ <하권0403-2>/ 於宮中 伐只部曲 在郡東十五里 馬駒部曲 在郡北六十里 龍山部曲 在郡西二十里以上三部曲今屬順興府 林只刀部曲 在郡東十五里 省乙良部曲 在郡東十五里 烏等部曲 在郡北三十里 楡水部曲 在郡北三十里 沓谷部曲 在郡北三十里以上三部曲今屬順興府 泥谷部曲 奈小里部曲 鄭從韶爲郡時作郡誌云泥谷卽今?田里則在郡西二十五里奈小里卽今沙奈里則在郡東一里然二部曲古今稱號不同未知何所考而爲是說 舊增藏軍谷 在郡東八里諺傳高麗太祖統合時吾川人不服藏兵于此擊敗之(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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