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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34-4:정종소(성종때부임)
작성자장병창 @ 2011.04.23 06:32:30
  예천고을원(34-4) : 정종소(성종 때 부임) : 삼포무역을 금지시킨 예천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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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종소(鄭從韶) : 본관(本貫) 연일(延日), 자(字) 사정(司貞), 호(號) 정헌(靖軒), 1447년(세종29)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올랐으나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端宗)의 복위(復位)을 꾀하려다가 실패하여 처형되었던 사건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하며 학문에 전념하니 김종직(金宗直)은 오천(鳥川)의 정선생(鄭先生)이라 불렀다 한다./ ▣항렬 : 延日(迎日,烏川)鄭氏 지주사공파 11대손 생원공파 1대손/ ▣벼슬 :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좌승지(左承旨)/ 號 는 정헌(靖軒). 1547년(세종 29) 文科重試에서 成三問, 朴彭年, 李塏, 柳誠源 등과 同榜及第하여 吏曹佐郞, 의성, 영주, 예천, 함양 등의 고을 守令을 지내면서 善政을 배풀고 成均館 歷詮郞을 거쳐 成均館 司成(종3품)으로 계시다가 병자년(丙子年)의 변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당시 ?畢齋 金宗直이 항상 烏川 鄭先生으로 推尊하였으며 端宗을 도운 遺臣으로 忠南 鷄龍山 東鶴寺 肅慕殿에 配享되어 있음. 그의 증손(曾孫) 세아(世雅 : 유량의 아들)는 임진왜란 때 아들 의번(宜藩)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영천(永川)의 적을 격퇴시킨 후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을 사직하고 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 등과 더불어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 양성에 진력했으며, 그의 아들 의번(宜藩)은 경주(慶州)에서 적과 대전하다가 적에게 포위당해 위기에 빠진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혈전 중 장렬하게 전사하여 영조(英祖) 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한편 용(容)의 아들 대임(大任)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伏兵)으로 적을 대파하고 돌격대장이 되어 울산 태화진(太和津)에서 역전의 무공을 세웠으나 전장에서 순절했으며, 몽주의 9세손 근(謹)의 아들 유성(維城)이 1627년(인조 5)에 등과(登科)하여 현종(顯宗) 즉위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고, 청빈(淸貧)하기로 명망이 높았다./ 墓所 : 永川市 北安面 元堂. 曾祖 判書公 묘원. 墓所 아래 元堂齋가 있음./ 12世 종소(從韶) : 通訓大夫 成均館 司成(종3품), 官職 : 世宗때 文科重試에서 成三問, 朴彭年, 李塏, 柳誠源 등과 同榜及第(1447년)하여 吏曹佐郞, 의성, 영주, 예천, 함양 등의 고을 守令을 지내면서 善政을 배풀고 成均館 歷詮郞을 거쳐 成均館 司成(종3품)으로 계시다가 端宗이 遜位되자 落鄕. 당시 ?畢齋 金宗直이 항상 烏川 鄭先生으로 推尊하였으며 端宗을 도운 遺臣으로 忠南 鷄龍山 東鶴寺 肅慕殿에 配享되어 있음. 配位 : 淑人 平山 尹氏로 參判 統의 따님, 墓所 : 永川市 北安面 元堂. 曾祖 判書公 묘원. 墓所 아래 元堂齋가 있음. 墓祀日 : 陽曆 4月 둘째 日曜日./

  <국조 문과 방목> : 정종소(鄭從韶) 세종(世宗)29년(1447년), 식년시(式年試) 병과7(丙科7), > 가족사항 부(父) 정회형(鄭淮衡), 조부(祖父) 정정(鄭井), 자(子) 정이교(鄭以僑), > 이력 및 기타 전력(前歷) 유학(幼學), 관직(官職) 사성(司成)/ 정종소(鄭從韶) 세종(世宗)29년(1447년), 중시(重試) 을과3(乙科3)/ > 이력 및 기타 특별시(特別試) 정묘1447식년시방$(丁卯1447式年試榜$), 전력(前歷)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부(父) 정문예(鄭文裔)/ 文裔 (生員公) : 1402年(近世朝鮮 太宗 2年)에 生員하여 靈山儒學敎導를 지냄. 配位 : 永川 李氏로 司直 玄實의 따님이며 判書 釋之의 손녀, 墓所 : 永川 嗚山里 三歸洞(영천시 오미동 삼귀). 墓所 아래 三歸齋가 있음. 墓祀日 : 陰曆 10月 17日/ 전촌에서 대전동(영천시)으로 이거. 子·孫 兩代에 8及第가 났음. 배(配) 숙인(淑人) 평산윤씨(平山尹氏)로 참판(參判) 통(統)의 따님,// 자(子) 정이휘(鄭以揮) : 牧使 ····> 16世 景禧(····>21世 道平)/ 以揮 (牧使公) : 官職 : 通訓大夫 持平, 直提學, 楊洲牧使, 配位 : 淑人 昌寧 吳氏로 生 二子一女. 繼配는 淑人 春川 朴氏로 孝佃의 따님이며 縣監 農의 孫女. 墓所 : 永川市 嗚尾洞 三歸(祖 生員公 墓所 階下, 配位 두분은 合?). 墓所 아래 三歸齋가 있음. 墓祀日 : 陰曆 10月 17日/ 자(子) 정이교(鄭以僑) : 校理(정5품) ····> 16世 堯臣(····>20世 ?)/ 以僑(校理公, ?~1498년 12월 15일), 字는 子美이며 號는 晩翠堂. 1468년에 進士, 1470년에 別試文科하여 吏曹佐郞을 하시다가 1486년에 重試文科하여 通政大夫 司憲府掌令(정4품), 歷銓郞, 翰林, 弘文館校理 등 역임. 戊午士禍로 함경남도 함흥으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돌아가셨으며, 配位는 淑夫人 安東權氏로 司直 致遜의 따님이며 繼配는 淑夫人 和順崔氏로 節制使 漢伯의 따님이다. 묘소는 경북 김천시 봉산면 태화동 太和山에 계배 묘소와 같이 있으나 안동권씨 묘소는 실전. 주세거지 : 金山(金泉)<육군대장 昇和 門>./ 자(子) 정이심(鄭以諶) : 持平(정5품) ····> 16世 復好(····>21世 起明)/ 以諶(持平公) : 字는 虞鄕이며 號는 魯山으로 1486년 仲兄(以僑)과 함께 重試文科하여 司憲府持平을 하셨으며 배위 묘소 등은 실전이다. 주세거지 : 선산./ 녀(女) 권흠조(權欽祖)//

  제(弟) 정귀소(鄭歸韶) : 通訓大夫 司憲府 監察(정6품) ····> 16世 得賢/ 歸韶 (1424년 2월 ~1487년 8월 19일), 字는 振玉이며 通訓大夫 司憲府監察을 지내셨다. 배위는 原州元氏로 司正 華의 따님이며 묘소는 영천시 오미동 삼귀 考묘右上. 주세거지 : 花山./ 제(弟) 정지소(鄭至韶) : 進士, 文科, 成均館 學諭(9품) ····> 無男/ 至韶 : 進士, 文科, 成均館 學諭/ 제(弟) 정치소(鄭致韶) 관(官) 진사(進士) 임오(壬午)에 문과(文科) 예조(禮曹)좌랑(佐郞) ?년 2월 24일졸/ 정치소(鄭致韶) 12世/

  정치소(鄭致韶) : 進士, 文科, 禮曹佐郞(정6품) ····> 16世 胤 <復齋公(湛)門>/ 致韶 (佐郞公) 進士, 文科, 禮曹佐郞을 지내셨고 배위는 仁同張氏이며 묘소는 영천시 청통면 망지동에 있다. 아랫대로는 復齋公(湛:義禁府都事, 壬辰亂倡義)이 있다. 주세거지 : 도천.(daum 2010)

  정종소(鄭從韶) : 본 연일(延日)/ 영주 문화유적 > 누대/ 제민루(濟民樓) : 영주시 가흥1동 서천(西川)가의 언덕위에 있다. 본래 구성산 남쪽 기슭에 있었는데 1433년(세종 15)에 군수 반저(潘渚)가 창건하였으며 1467년(세종 13)에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보수하였고 1588년(선조 21)에 향인(鄕人)의 합력(合力)으로 개축하니 향서당(鄕序堂)과 상접(相接)하였다. 1598년(선조 31)에 군수 이윤상(李允商)이 의국(醫局) 3칸을 설치하고 약제(藥劑)를 취급하다가 다시 의약소(醫藥所)로 개칭(改稱)하고 제약구민(劑藥救民)하다가 폐지(廢止)되었다. 1608년(선조 41)에 군수 이대진(李大震)이 또 루의 북쪽에 의국을 재건(再建)하고 의료업무를 실시하여 제민사업을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루는 점지(点地)가 창활(敞豁)하며 우편(右便)에는 장강(長江)이 흐르고 앞으로는 광야(廣野)를 두어 여름이 되면 바람이 청량(淸凉)하고 십리장제(十里長堤)에 녹음(綠陰)이 장관을 이루어 그 경관(景觀)이 뛰어나 유영(遺詠)하기 좋은 곳임으로 선비들이 모여 음풍영월(吟風詠月)을 즐기기도 하고 경로소(敬老所)를 두어 애친경장(愛親敬長)의 미풍을 계몽(啓蒙)하던 곳이다. 창건후 오랜 풍상(風霜)을 겪어 여러차례 보수(補修)를 하였으나 노후(老朽)로 퇴락이 심하던 중 1961년의 홍수(洪水)로 붕괴(崩壞)되고 말았다. 사림에서는 오백년을 전래(傳來)한 유물(遺物)을 없엘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支配)적 이었으나 복구자금 문제로 좌절(挫折) 상태였던 중 당시 영주향교 전교(典敎) 김창룡(金昌龍)의 특별한 배려로 교토(교토)를 매각하여 충당키로 합의하여 1965년에 현재의 위치에 이건하였는데 경관(景觀)이 전에 비하여 아름답고 단청(丹靑)이 빛나는 명루(名樓)의 위용(偉容)이 언덕위에 높이 솟아 영주의 새로운 명소(名所)로 부상(浮上)되었다. 여름이면 피서(避暑)하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봄, 가을엔 각종 모임이 자주 개최되고 있다. 본루를 이전 복구하는데는 군수 최진태의 후원도 많았고 유지(有志) 김태두 유사(有司) 전하욱 권오성 제공(諸公)의 노력 또한 컸다. 감천(甘泉) 문헌(文獻)의 기가 있고 지평(地平) 김진하의 이건기와 선성(宣聖) 김회진(金晦鎭) 진성(眞城) 이가원(李家源)의 이건기 및 안동(安東) 권태춘의 이건 상량문(上樑文)이 있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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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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