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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38-1) : 박한주(1)(1497.3.6 이임) : 조선 연산군 때의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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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주(朴漢柱, ?-1504)는 1497년(연산군 3) 3월 6일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자는 천지(天支), 호는 우졸자(迂拙子), 본관은 밀양, 문의훈도 돈인(敦仁)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다.
유학으로서 1483년(성종 14) 식년 생원시에 2등 22위로 합격, 동년 식년 진사시에 2등 18위로 합격, 1485년(성종 16) 별시 문과에 갑과 2위로 아원 급제하였다.
한성부 참군으로서 서울 왕십리에서 발견된 여자 시체 사건에 대해 왕과 의논하였고(1488.5.20), 사간원 정언(1491.2.22), 창녕 현감으로서 청렴하다는 경상도 관찰사의 보고(1493.12.15)를 받은 왕에 의해 한 자리 올림을 받았다(1493.12.24). 그 후 헌납을 거쳐 예천군수로 부임하여, “정사는 잘 되고, 다스림은 태평하였으며, 군청 관리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잘 따랐다.”라고 하였다. <연려실기술>에, “연산군이 박한주를 예천 군수에서 불러서 1497년(연산군 3)에 간관을 맡겼다”라고 하였다.
헌납(197.3.6)으로서 경연과 순변사에 대한 일들을 왕에게 아뢰었고(1497.3.9), 간관의 직임 등에 대해 아뢰었다(1497.3.13). 1497년(연산군 3) 3월 22일 왕에게 아뢰기를, “비원 안에서 말을 달리며, 공을 치고 용봉장막을 쳐놓고 잔치하고 노래하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하십니까?” 하니, 왕이 성내어 국문하려 하자, 부제학 이승건을 비롯하여 사헌부 홍문관에서 말렸으나(1497.3.23, 1497.2.23), 모두 왕이 따르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이 전개되는 데도 보경당 돌 쌓는 일의 볼가함을 아뢰었다. 그러다가 결국 갑자사화 때 사형 당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1.11.8)
박한주(朴漢柱) : 1497년(연산군 3) 3월 6일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1459(세조 5)-1504(연산군 10), 자는 천지(天支), 호는 우졸자(迂拙子, 迂拙齋), 본관은 밀양, 문의훈도(文義訓導) 돈인(敦仁)의 아들, 김종직의 제자이다. 유학(幼學)으로서 1483년(성종 14) 식년 생원시에 2등 22위로 합격, 동년 식년 진사시에 2등 18위로 합격, 1485년(성종 16)에 별시 문과에 갑과 2위로 아원 급제하고, 정언(正言), 헌납(1497)을 거쳐 예천 군수로 부임하여 선정하여, 정사는 잘 되고 다스림은 태평하였으며, 군의 관리는 두려워하고 백성은 잘 따랐다. 모두 그를 공경하고 복종하였다. <연려실기술>에, "연산군이 박한주를 예천 군수에서 불러서 1497년(연산군 3)에 간관(諫官)을 맡겼다."라고 하였다. 연산군이 그가 정사를 잘 한다고 하여 간관을 맡겼더니, 1497년(연산군 3) 3월 22일 왕에게 아뢰기를, "비원(秘苑) 안에서 말을 달리며 공을 치고 용봉장막(龍鳳帳幕)을 쳐 놓고 잔치하고 노래하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하십니까?" 라고 하니 왕이 성내어, "용봉장막은 그것이 네 물건이냐?"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그것은 다 백성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백성의 장막이라 하여도 옳습니다. 어찌 왕의 사물(私物)입니까" 라고 하며 직간하고, 노사신(盧思愼), 임사홍(任士洪)을 탄핵하다가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 하여 벽동(碧潼)으로 장류(杖流)되었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사림파로 몰리어 귀양소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참형되었다. 형장에서는 얼굴 색이 변치 않고 평시와 다름이 없었다. 중종반정(1506)으로 신원(伸寃)되어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대구의 남강(南岡)서원과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 264번지에 있는 차산(車山)서원, 풍각면 흑석리 380번지의 석강(石岡)서원, 함안의 덕암(德岩)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우졸재집(迂拙齋集)>이 있다.(燕山君日記 第22卷 第28卷 第30 卷 第37卷 第53卷, 中宗實錄 第1卷, 昭代紀年, 燃藜室記述 第6卷 燕山條古事本末 戊午黨籍, 新增東國輿地勝覽 密陽都護府, 同 醴泉郡, 文化遺蹟總覽, 原色世界大百科事典 13卷 297쪽, 海東雜錄 1卷, 海東野言 2卷, 花山逸稿, 國朝人物志, 朝鮮名臣錄, 歷代名人筆跡 1983, 歷代淸白吏像 189-191쪽)
박한주(朴漢柱) : 예천 군수이다. 1459(세조 5)~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 자는 천지(天支), 호는 우졸재(迂拙齋), 돈인(敦仁)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하고, 1485년 문과별시(文科別試)에 급제하였다.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에 제수된 뒤 한성부 참군․사헌부 감찰․사간원 정언․성균관 전적 등을 지내고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자진해서 창녕 현감으로 나왔다. 이 때 백성들을 지성으로 보살피고 교화시켜 임금이 비단과 교서(敎書)로서 포상, 가자(加資)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종부시 주부를 거쳐 1497년(연산군 3)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이 때 연산군의 실덕(失德)을 직간(直諫)하였고 또 임사홍(任士弘) 등의 간악함을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연산군의 횡포가 점차 심해지자 외직을 청하여 평해 군수․예천 군수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門徒)로 붕당을 지어 국정을 비방한다는 죄명으로 장(杖) 80대에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 1500년 평안도로 이배되었는데, 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처형 당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고, 1517년 김정(金淨)․조광조(趙光祖) 등의 계(啓)에 의하여 도승지 겸 예문관직제학이 추증되었다.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 함안 덕암서원(德巖書院), 대구 남강서원(南岡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우졸재집》이 있다.(趙駿河(韓國學中央硏究院))
박한주 [記事] : 한국문집총간(014_134b) 허백정집(虛白亭集, 1843)에 실린 허백당 홍귀달(洪貴達)의 예천군수(1497) 박한주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虛白先生續集卷之一/ 詩/ 送醴泉郡守朴侯天支漢柱 赴任。 朴侯。弘治十年丁巳。自司諫院獻納。遷刑曹正郞。由刑曹出爲平海郡守。未之任。移授本郡。/ 氣?風流作丈夫。文名經術更鴻儒。郞官出守如君少。獻納輸忠似此無。平海山川應?望。醴泉民物正?呼。專城滿目皆朝選。課績恩私竟孰殊。”이다.(www.minchu.or.kr 2006)
박한주 [記事] : 한국문집총간(015_018d) 대봉집(大峯集, 1787)에 실린 양희지(楊熙止)의 예천군수(1497 離任) 박한주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大峯先生文集卷之一/ 詩/ 送朴天支 漢柱 赴任醴泉/ 祖席高開漢水流。鄕音學士出南州。襄陽耆舊今猶在。講道應除簿領愁。 權嚮之兄弟。居醴泉。”이다.(www.minchu.or.kr 2006)
박한주 [記事] : 한국문집총간(014_134b) 허백정집(虛白亭集, 1843)에 실린 허백당 홍귀달(洪貴達)의 예천군수(1497 離任) 박한주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虛白先生續集卷之一/ 詩/ 送醴泉郡守朴侯天支漢柱 赴任。 朴侯。弘治十年丁巳。自司諫院獻納。遷刑曹正郞。由刑曹出爲平海郡守。未之任。移授本郡。/ 氣?風流作丈夫。文名經術更鴻儒。郞官出守如君少。獻納輸忠似此無。平海山川應?望。醴泉民物正?呼。專城滿目皆朝選。課績恩私竟孰殊。”이다.(www.minchu.or.kr 2006)
박한주 [記事] : 한국문집총간(015_018d) 대봉집(大峯集, 1787)에 실린 양희지(楊熙止)의 예천군수(1497 離任) 박한주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大峯先生文集卷之一/ 詩/ 送朴天支 漢柱 赴任醴泉/ 祖席高開漢水流。鄕音學士出南州。襄陽耆舊今猶在。講道應除簿領愁。 權嚮之兄弟。居醴泉。"이다.(www.minchu.or.kr 2006)
박한주 [記事] : 한국문집총간(018_190b) 이평사집(李評事集, 1631)에 실린 이목(李穆)의 예천군수(1497 離任) 박한주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李評事集附錄/ [附錄]/ 戊午黨籍此亦取於睡軒集。而間有誤書及添入處。故以小註別之。/ 朴漢柱字天?。密陽人。自號迂拙子。游學?畢齋門下。成廟乙巳。登第。歷正言,獻納。言事截直。出爲醴泉郡守。戊午。杖流碧潼。甲子。被殺。中廟初。命贈都承旨。“이다.(www.minchu.or.kr 2006)
박한주 [記事] : 한국문집총간(091_132c) 학사집(鶴沙集, 1776)에 실린 학사 김응조(金應祖)의 예천군수(1497 離任) 우졸재 박한주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迂拙齋朴先生閭表銘/ ...定省之暇。專以興學校明敎化爲先務。邑民感化。多以善行旌閭。逮守醴泉。郡中翕然相戒勅。未幾。戊午士禍起。坐?...”이다.(www.minchu.or.kr 2006)
박한주 [記事] : 고전국역총서(1996 刊) 점필재집(?畢齋集)에 실린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기사로, 그 내용은, “점필재집 문집 부록/ [문인록(門人錄)] / 문인록을 첨부함[附門人錄] / 박한주(朴漢柱)의 자는 천지(天支)이고 밀양인(密陽人)이며, 자호는 우졸자(迂拙子)인데,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였다. 성종 을사년에 과거 급제하여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역임하면서 국사를 말하는 것이 직절(直截)하였고, 나가서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 무오년 사화 때 벽동(碧潼)으로 장류(杖流)되었다가 갑자년 사화 때 피살되었다. 중종 초기에 명하여 도승지를 추증하였다.”이다.(www.minchu.or.kr 2006)
박한주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1 刊) 해동야언(海東野言)에 실린 허봉(許?)의 예천군수(1497 離任) 박한주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무오당적 (戊午黨籍)/ ... 헌납을 지냈다. 말과 일이 확연하고 강직하였다. 일찍이 예천(醴泉) 군수가 되었다가 무오사화로 벽...”이다.(www.minchu.or.kr 2006)
박한주 [記事] : 한국문집총간총목차 015집 대봉집(大峯集)에 실린 양희지(楊熙止)의 예천군수(1497 이임) 박한주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 18 次臨鏡堂韻二首 18 送朴天支漢柱赴任醴泉 19 金君諒諶安子珍琛金仲容宗...”이다.(www.minchu.or.kr 2006)
[성종실록] : 1488년(성종 19) 5월 20일에 왕이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박한주와 함께 왕십리에서 발견된 여자 시체 사건의 추국에 대해 논의하였다. 1491년(성종 22) 2월 22일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1493년(성종 24) 12월 15일에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치계(馳啓)하기를, "창녕현감(昌寧縣監) 박한주는 청렴하고 신중하여 공무(公務)에 봉사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여서 왕이 한 자급(資級, 1493.12.24) 올려 주었다.
[연산군일기] : 1497년(연산군 3) 3월 6일에 헌납(獻納)이 되었는데, 경연과 순변사 보내는 일 등을 아뢰었고(1497.3.9), 간관의 칙임 등에 대해 아뢰었다(1497.3.13). 1497년(연산군 3) 3월 22일 직간하다가 왕이 국문하려 하자, 부제학 이승건 등이 국문하는 것이 불가함을 간하였고(1497.3.23), 사헌부에서도 국문하지 말 것을 청하였고(1497.2.23), 홍문관에서 간하였으나(1497.3.23) 모두 왕이 따르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이 전개되는데도 헌납 박한주는 보경당(寶敬堂) 계석 쌓는 일의 불가함을 아뢰었다. 1498년(연산군 4) 7월 17일에 김일손(金馹孫)이 밝힌 김종직(金宗直) 제자들의 명단을 말하기를, "박한주는 경상도 유생으로서 수업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동년 7월 26일에 윤필상이 사초사건의 관련자 박한주 등은 붕당을 지었으니 곤장 80대를 때려 먼 지방으로 부처해야 합니다." 하니, 왕이 아뢴 바에 의해 처치하라고 하였다. 동년 7월 26일에 윤필상이 서계하기를, "박한주는 벽동(碧潼)으로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왕이 쫓았다. 동년 7월 27일에는 왕이 중외에 사령을 반포하기를, "박한주는 곤장 80대를 때려 먼 지방으로 부처함과 동시에 내친 사람은 봉수군(烽燧軍)이나 정로한(庭爐干)의 역을 배정하였다." 라고 하였다. 1500년(연산군 6) 5월 7일에는 박한주를 낙안(樂安)으로 이배(移配)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5월 1일에 왕이 전교하기를, "박한주는 능지하고, 아들은 장 100대를 때려 아주 먼 지방에 종이 되게 하라." 라고 하였다. 동년 5월 12일에 왕이 박한주를 국문케 하고, 능지시켰다(甲子士禍의 斬刑). 1506년(중종 1) 10월 2일 왕이 전교하기를, "박한주 등은 언사(言事)로 중죄를 입었으니, 그 아들을 녹용하라." 라고 하였다(中宗反正의 伸寃).
[저서] : 문집으로 <우졸재선생실기(迂拙齋先生實記)>(奎 15474, 2卷 1冊(75張), 筆寫本(後寫), 30.2x21.2cm)가 있는데, 권수(卷首)에 정종로(鄭宗魯)의 서문(序文)이 있다. 권별 수록 내용은, 권1에 연보(年譜), 부(賦) 3수(居東賦, 慶會樓賦, 三都賦), 차자(箚子) 2수(請黜任士洪等箚子 等), 기(記) 2수(廢絃毖記, 安全記), 투증(投贈 : 金宗直의 贈金朴兩秀才, 朴壽春의 車山感舊, 趙任道의 次菊潭車山感舊韻 等 朴漢柱에 보내는 詩 6首), 권2는 부록으로 행장(行狀), 여표비명병서(閭表碑銘幷序) 3수, 언행척록(言行척錄), 제선생묘문(祭先生墓文), 예림서원(禮林書院)과 남강서원(南岡書院) 및 덕암서원(德巖書院)의 봉안문(奉安文), 예림서원 이건(移建) 때의 고유문(告喩文), 무오당적(戊午黨籍), 부무오화록(附戊午禍錄), 무오사화(李世英 日記, 題戊午士禍錄後, 柳子光傳, 甲子禍錄, 戊午黨人伸雪疏, 交遊門人錄, 南岡書院 請額疏, 箚子 等)이다. '청출임사홍등차자'의 내용은 선왕(先王)의 장례에 불교식의 행사를 중지하고 유교식으로 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무오당적'에는 피화 내용 별로 각 사람의 인적 사항, 성격, 사제 관계, 피화의 내용과 관련된 사실 등이 개별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오사화'(이세영 찬)는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치란(治亂)과 관련 인사들의 사제 관계, 처벌 내용이 수록되었다. '교유문인록'에는 조광조(趙光祖), 유호인(兪好仁), 김준손(金駿孫), 박형달(朴亨達), 최산두(崔山斗), 유성춘(柳成春), 유희춘(柳希春), 박언계(朴彦桂), 주박(周博) 등의 인적 사항, 학문, 사제 관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중심으로 한 성종, 연산군, 중종 때의 정치적 상황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이다.(인터넷 야후 2001)
박한주 [記事] : 학사집 (鶴沙集) 11권 6책 중 卷7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閭表 / 迂拙齋朴先生閭表銘(幷序) 2/ 朴漢柱(1549˜1504)의 옛 터에 閭表를 세울 때의 글이다. 1459년(세조 5) 密陽府 豊角縣 車山里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漢柱이고, 자는 天支, 호는 迂拙齋라고 하였다. 어려서 高克敬에게 수업하였고 자라서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5년(성종 16) 별시 문과에 합격하였다. 正言․獻納을 역임하고 연산군이 失德하니 나아가 간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점필재의 문도로 연좌되어 碧潼에 유배되었다가 1500년(연산군 6) 樂安에 移配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5월 15일 명이 다하였다. 친구와 결별할 때 안색이 평일과 같았으나 낮에 어두워지고 매운 바람과 번개가 치고 큰 비가 쏟아 붓는 듯 하였다. 부고가 집에 다달아 처음 殯所를 설치하니 벼락과 비가 다시 일었다. 부인 安氏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따라 죽으니 附葬하였다. 하늘의 해가 다시 밝아지니 선생에게 承政院 都承旨를 증직하고 자손을 錄用하라는 명이 있었다. 지난 해 선생을 禮林書院에 附享하였다. 불행히 후사가 없어 車山의 옛 집이 폐허가 되었다. 士人 朴瑠․李而柱가 그 집에 돌을 세워 표시하려고 李慶美를 영천의 나에게 보내어 글을 청했는데 내가 일찌기 邑宰를 지냈기 때문이었다. [예천군수(1497.3.6 이임)를 지냈다.](www.koreastudy.or.kr 2007)
박한주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60_0130/ 여지도서 / 慶尙道 / 大丘 / 壇廟 / 社稷壇 在府西七里坪山 文廟 在鄕校 城隍壇 在府南二里連龜山 ?祭壇 在府北八里砧山 新增硏經書院 在府北二十里退溪 李滉主享寒崗 鄭迷 愚伏 鄭經世配享 孝廟庚子 賜額院下有溪東 全慶昌 梅巖 李叔樑別廟 表忠祠 在府北二十里高麗太師壯節公 申崇謙死節之所立祠左相 金樂 承旨 申吉元配享 顯廟壬子 賜額 洛濱書院 在府西四十里朴彭年 成三問 兪應孚 河緯地 李塏 柳誠源六臣?享 蕭廟甲戌 賜額講堂揭 肅廟御禦詩 伊江書院 在府西三十里樂齋 徐思遠入享 龜巖書院 在府西三里制處使 徐沈 四佳 徐居正 涵齋 徐? 藥峯 徐??享 南崗書院 在府南六十里?拙齋 朴漢柱 菊潭 朴壽春?享 靑湖書院 在府東南十五里慕堂 孫處訥主享門人沙月堂 柳時藩配享 尙德祠 在府東二里逸休 李?入享 百源祠 在府北四十里全歸堂 徐時立獨享 德洞祠 在府西二十里/ <하권0327-2>/ 月谷 禹拜善入享(www.history.go.kr 2007)
박한주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060_0250/ 여지도서 / 慶尙道 / 大丘 / 人物 / ...賜南山古驛基邑人感其澤享于龜巖書院 李榮 永川人器度宏遠勇略過人遂事弓馬登武科官至兵曹參判累拜北兵使仁威?行胡人信服 敎書褒諭曰卿以淸簡自持以國事自任予甚嘉之特 賜衣服 朴漢柱 密陽人文科愛業於?畢齋 金宗直博學講義燕山時疏論失德守正不撓戊午史獄起杖配碧潼甲子獄再起被執臨刑神色不變 中廟靖國雪被罪諸賢 命贈都承旨號?拙齊享于南崗書院 徐思遠 達城人制處使 沈之後淵源 退溪從遊寒崗以學行薦官至正郞壬辰倭亂倡義於八公山且募得米太三百斛輸送淸道五禮山城以補軍餉丙申 除淸安縣監戎事之暇修茸學校大興文敎邑人不忘其澤立龜峯書院享之號樂齋 全慶昌 玉山人以學行見稱於世公嘗以四十八字自警曰衣冠嚴整謂之外修行誼純潔謂之內修內外俱修何人不求衣冠不整謂之外惰行誼不潔謂之內惰內外俱情何人不唾所著家憲家令行於世 嘉靖癸酉文科官至持平後 贈弘文館應校號溪東別享于硏經下廟...(www.history.go.kr 2007)
박한주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110_0270/ 여지도서 / 慶尙道 / 醴泉 / 名宦 / 高麗 趙云仡本朝全伯英 金謙 安省 李惠 嘗知甫州有詩名 李伯謙 尹起畎 金仁民 鄭從韶舊增朴漢柱 政擧治平吏畏民服 新增兪㯙 有峴山墮淚碑(www.history.go.kr 2007)
박한주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280_0130/ 여지도서 / 慶尙道 / 密陽 / 壇廟 / 社稷壇 在府西五里烏禮村 文廟 在鄕校 城隍祠 在推火山世傅府吏 孫兢訓佐高麗太祖有功追贈三重大匡司徒封廣理君卽祠神也 顯宗朝甲寅移設南林中今移東門內○丙子之亂府使 李必達提府兵赴戰雙嶺行至忠州 達川夢見魁傑一丈夫自稱孫兢訓曰主將非材全軍無祿吾亦莫施神功寧?我府兵不使全沒必達覺而異之果於雙嶺敗?南道士卒?爛殆盡惟必達所帶密兵咸得生還人以爲孫將軍陰功 ?壇 在府北五里 新增禮林書院 舊在瑩原洞單享?畢齋 金宗直後移院運禮以?拙齋 朴漢柱處士/ <하권0502-2>/ 申季誠兩賢配享請于朝 賜額禮林後又移院于鈒浦 三江祠 敎導 閔九齡 九韶 九淵 九疇 九敍五兄弟竝享 忠孝祠 忠臣 贈判書 孫仁甲 贈都承旨 盧蓋邦孝子孫若海 申東 竝入享(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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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