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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46-2:문경동(1512-1516.10.3)
작성자장병창 @ 2011.09.10 14:13:11

   예천고을원(46-2) : 문경동(1512 부임-1516.10.3 이임) : 지보면 어신리에 정착한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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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동 [記事] : <창계선생문집[蒼溪先生文集, 1906]>에 실린 예천군수(1512-1516) 창계 문경동[文敬仝]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墓碣?[幷序]/ 通訓大夫行成均館司成文公墓碣銘拜序/ 正德十六年,歲在辛巳,六月晦日,淸風守文公病卒/ 于郡?.無嗣.子弟數人扶?以歸.公之壻宜春許公/ 某聞訃馳來,迎喪于嶺路,殯于榮川草谷之故居.是/ 年月葬于郡東未巖里石峯東向之原,從遺命也.旣/ 而公家大小喪患相仍,其外孫或處或移,事多有未/ 遑者.去年張君壽禧來謂滉曰;吾外祖下世今垂四/ 十年,而墓表不刻,責在吾輩,敢以碣銘爲請.滉甚善/ ▶ Page 178/ 其言,徵其行狀,則文牒散逸,舊人無存.凡歷官行事/ 僅得於傳聞,不能詳也.今撮其大者云.公諱敬仝,字/ 欽之/ ,安東/ 甘泉/ 人也.國初有諱曰龜,爲政丞.高祖/ 漢英,內部令.曾祖淑器/ ,寶城監務.祖孫貫安東判官,/ 連三世皆由正科.考諱續命,典涓司直長.?秦氏,江/ 順府少尹有經之女.公生於天順丁丑十月成化丙/ 午,俱中生員進士試.弘治乙卯登別擧,補成均館.去/ 館爲比安縣監.丙寅爲江原道都事,陞宗簿寺僉正,/ 兼春秋館編修官.戊辰爲梁山郡守.庚午率郡兵禦/ 倭有勞,八爲成均館司成.壬申除醴泉郡守.瓜滿閒/ ▶ Page 179/ 居數年,以親老復乞外,得守淸風郡.赴以春而卒以/ 夏,享年六十五.公爲人狀貌異衆,虛曠坦率,落托無/ 拘檢,與人處不設畦畛.放言諧謔,未嘗留意於世務./ 故人目之爲闊.於事情平生坐是,多蹇滯不顧也.善/ 屬文,尤長於詞賦.其爲擧子所至擅場,其所述作後/ 生爭傳習之.遇文人墨客輒與之吟詩,得意發興,諷/ 誦琅然,傍若無人,往往爲曲修邊幅者所笑,而一時/ 名流亦樂與爲唱酬往復焉.滉嘗及見少公家居之/ 日,公多蓄書籍,文房筆硯之屬必華好可玩,軒外列/ 植名花異卉,晨起卽杖???於其閒,還對?案終/ ▶ Page 180/ 日怡愉.客至命酒不過數巡而罷,或自引一?勸客/ 多酌.云吾不喜飮,公可自醉.蓋其眞性如此.公所著/ 滄溪詩藁二卷藏子家.配平海黃氏,考建功將軍兌/ 孫,祖訓導/ .仲夏曾祖淸道郡守/ ,銓高祖漢城府尹/ 有/ 定.生二女.長卽進士許公.次適生員張應臣.進士二/ 男.士廉進士.次士?.二女工曹參判/ 李滉/ .忠義衛/ 金/ 震.生員三男胤禧/ .順禧/ .壽禧.二女蔚珍/ 縣令/ 金士文./ 習讀李孝忠.後公歿士年,而黃氏繼逝,同塋?葬焉./ 側室亦有一女,張君與其姪?輔等諸人近居者.及/ 滉子寯雖外居,亦以其母墳同原相與護邱?,修俗./ ▶ Page 181/ 祀銘曰:/ 公抱才華,逞氣文詞.出遊場屋,??摘?.登仕之晩,/ 寔命差池.公材濩落,俗好靡合.公恥巧宦,不事緣飾./ 名動于時,位蹇于卑.枳棘頻棲,?鹽屢欺.鳧鶴俱宜,/ ?鵬奚擇.我公處世,虛舟莫觸.任眞爲樂,遑恤其他./ 無兒鄧氏,有女蔡家.累累外孫,當膺慶流.俗節來展,/ 無敢不修.石峯東麓,鬱鬱蒼松.刻之貞珉,以詔無窮.”이다.(www.koreastudy.or.kr 2006)

 

  문경동 [記事] : [구분] 조선  / [제목] 문경동묘갈(文敬同墓碣)  / [작성자] 이황(李滉) / 연대 1722년(경종2년) / 유형/재질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비지정  / 크기   높이 30cm, 너비 20cm  / 출토지   미상  / 소재지   (한국)국사편찬위원회-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2-6 / 서체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이황(李滉) / 이수인(李守仁) / 미상 / 문경동은 1457년에 태어나 1521년에 사망했다. 자는 흠지(欽之)이고, 호는 창계(滄溪)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감천(甘泉) 사람이다. 아버지는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 문속명(文續命)이고 어머니는 강순부 소윤(江順府少尹) 진유경(秦有經)의 딸 진씨(秦氏)이다. 문과 출신으로 문장에 뛰어났다. 특히 뛰어난 업적은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있을 때 삼포왜란을 만나 왜적 토벌에 공을 세운 일이다. 그로 인해 성균관 사성으로 진급했다. 성격이 허심탄회하고 인습에 구애받지 않은 데다 문장도 능해 많은 명사들과 교류했으나 관직은 별로 높이 올라가지 못하였다.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나 외예는 번성하였다. 묘갈명 또한 외예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의 대표적 학자인 이황이 지었다는 사실에서 그의 영향력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탁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20년대로 추정된다. / [날짜] 1722 / [기관명] 국립문화재연구소(www.history.go.kr 2007)

 

  문경동 [記事] : 영주금석문전집Ⅱ/ 간행년 : 1999/ 저자 : 영주문화원/ 발행처 : 영주문화원/ 通訓大夫 行成均館司成 滄溪 文敬仝 墓碑/ 成均館司成 文敬仝 墓碣銘幷序/ 正德十六年 歲在辛巳 六月晦日 淸風守文公 病卒于郡衙 無嗣 子弟數人 扶?以歸 公之壻宜春許公瓚 聞訃馳來 迎喪于嶺路 殯于榮川草谷之故居 是年月 葬于郡東末巖里石峯東向之原 從遺命也 旣而 公家大小 喪患相仍 其外孫 或處或移 事多有未遑者 去年 張君壽禧 來謂滉曰 吾外祖下世 今垂四十年 而墓表不刻 責在吾輩 敢以碣銘爲請 滉甚善其言 徵其行狀 則文牒散逸 舊人無存 凡歷官行事 僅得於傳聞 不能詳也 今撮其大者云 公諱敬仝 字欽之 安東甘泉人也 國初 有諱曰龜 爲政丞 高祖漢英 內部令 曾祖淑器 寶城監務 祖孫貫 安東判官 連三世 皆由正科 考諱續命 典涓司直長 ?秦氏 江順府少尹有經之女 公生於天順丁丑十月 成化丙午 俱中生員進士試 弘治乙卯 登別擧 補成均館 去館爲比安縣監 丙寅爲江原道都事 陞宗簿寺僉正 兼春秋館編修官 戊辰爲梁山郡守 庚午率郡 兵禦倭有勞 入爲成均館司成 壬申除醴泉郡守 爪滿 閒居數年 以親老 復乞外 得守淸風郡 赴以春 而卒以夏 享年六十五 公爲人 狀貌異衆 虛曠坦率 落托無拘檢 與人處 不設畦畛 放言諧謔 未嘗留意於世務 故人目之爲闊於事情 平生坐是 多蹇滯 不顧也 善屬文 尤長於詞賦 其爲擧子 所至擅場 其所述作 後生爭傳習之 遇文人墨客 輒與之吟詩 得意發興 諷誦琅然 傍若無人 往往爲曲修邊幅者所笑 而一時名流 亦樂與爲唱酬往復焉 滉少嘗及見公家居之日 公多蓄書籍文房筆硯之屬 必華好可玩 軒外 列植名花異卉 晨起 卽杖屢??於其間 還對?案 終日怡愉 客至命酒 不過數巡而罷 或自引一? 勸客多酌云 吾不喜飮 公可自醉 蓋其眞性如此 公所著滄溪詩藁二卷 藏于家 配平海黃氏 考建功將軍兌孫 祖訓導仲夏 曾祖淸道郡守銓 高祖漢城府尹有定 生二女 長卽進士許公 次適生員張應臣 進士二男 士廉進士 次士彦 二女 工曹參判李滉 忠義衛金震 生員三男 胤禧順禧壽禧 二女 蔚珍縣令金士文 習讀李孝忠 後公歿七年而黃氏繼逝 同塋?葬焉 側室亦惟一女 張君與其姪彦輔等諸人近居者及滉子寯雖外居 亦以其母墳同原 相與護丘壟 修俗祀 銘曰/ 公抱才華 逞氣文詞 出遊場屋 叢?摘? 登仕之晩 寔命差池 公材濩落 俗好靡合 公恥巧宦 不事緣飾 名動于時 位蹇于卑 枳棘頻栖 ?鹽屢欺 鳧鶴俱宜 鳧鵬奚擇 我公處世 虛舟莫觸 任眞爲樂 遑恤其他 無兒鄧氏 有女蔡家 累累外孫 當膺慶流 俗節來展 無敢不修 石峯東麓 鬱鬱蒼松 刻之貞珉 以詔無窮/ 眞城 李滉謹撰/ 성균관사성 문경동 묘갈명(成均館司成 文敬仝 墓碣銘) 서문을 병기함/ 정덕(正德) 신사년(1521) 6월 그믐날 청풍군수 문공이 고을 관아에서 병으로 돌아갔다.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아우 몇 명이 관을 부여잡고서 돌아왔다. 의령(宜寧)에 사는 허찬공(許瓚公)이 부고를 듣고서 달려가, 영남으로 오는 길에서 행상(行喪)을 맞이하여 영천(榮川) 초곡(草谷)에 있는 옛날 살던 집에 빈소를 차렸다. 이 해 어느 달 고을 동쪽 말암리 석봉 동향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공이 죽을 때 남긴 명을 따른 것이다./ 얼마 동안 공의 집안에 크고 작은 초상이 계속되었고, 그 외손들이 그대로 살거나 떠나기도 하였으므로, 공의 일에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었던 경우가 많았다. 지난 해 장수희(張壽禧) 군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ꡒ우리 외조부께서 돌아가신 지 지금 거의 40년이 되었지만, 묘표(墓表)를 새겨 세우지 못했으니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감히 묘갈명을 청합니다ꡓ라고 했다. 내가 그의 말을 아주 고맙게 여겨 그 행장을 찾았더니, 문적은 흩어 없어져 버렸고 옛날 사람들은 살아 있지 않아서, 벼슬한 이력이나 행적을 겨우 전해 들은 것에서 얻었으므로 상세히 적을 수가 없어 이제 그 대략을 주워 모았다./ 공의 휘(諱)는 경동(敬仝), 자(字)는 흠지(欽之), 본관은 안동 감천(甘泉)이다. 조선 초기에 휘 구(龜)가 있었는데 정승을 지냈다. 고조 한영(漢英)은 내부령(內部令)을 지냈고, 증조 숙기(淑器)는 보성(寶城) 감무(監務)를 지냈고, 조부 손관(孫貫)은 안동 판관을 지냈는데, 3대에 계속해서 모두 문과 출신이었다. 부친은 휘가 속명(續命)인데 전연사(典涓司) 직장(直長)을 지냈다. 모친은 진씨(秦氏)인데 강순부(江順府) 소윤(少尹) 유경(有經)의 따님이다./ 공은 천순(天順) 정축(1457) 10월에 태어났다. 성화(成化) 병오(1486)년에 생원 진사에 모두 합격하여, 홍치(弘治) 을묘(1495)에 별시 문과에 올라 성균관의 관직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을 떠나 비안(比安) 현감에 제수되었다. 병인(1506)에 강원도 도사가 되었다가 종부시(宗簿寺) 첨정으로 승진하여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였다. 무진(1508)에 양산 군수가 되었다가 경오(1510)에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왜적을 막아 공로가 있었다. 내직으로 들어와 성규관 사성(司成)이 되었다./ 임신(1512)에 예천군수에 제수되었고, 임기가 만료되어 몇 년 동안 한가하게 살았다. 어버이가 늙었기 때문에 다시 외직을 구하여 청풍 군수 자리를 얻어 봄에 부임했다가 여름에 죽었으니, 향년 65세였다./ 공의 사람됨은 모습이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고, 욕심이 없고 탁 트이고 솔직하고 호방하여 얽매임이 없었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경계를 긋지 않았고, 꺼리낌없이 말하고 우스갯소리를 잘하였고 일찌기 세상일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사정에 어둡다고 지목하였고, 평생동안 이 때문에 막힘이 많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문장을 잘 하였고 사부(詞賦)에 더욱 뛰어났다. 과거 보던 선비 시절에는 가는 곳마다 휩쓸었으므로, 그가 지은 글이라면 후생들이 앞을 다투어 전해 익혔고, 문인(文人) 묵객(墨客)들을 만나면 그들과 더불어 시를 읊다가 뜻에 맞거나 흥이 나면 낭랑하게 외워 곁에 사람이 없는 듯이 했다. 그래서 체면을 잘 차리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샀지만, 당시의 명사들이 즐겨 어울려 창수(唱酬)하고 글을 주고받았다./ 내가 젊은 시절에 공이 집에서 지내던 때를 본 적이 있었는데, 공은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었고, 붓․벼루 등 문방구들도 화려하고 좋은 것이라 볼 만했다. 난간 밖에는 이름나고 기이한 꽃들을 죽 늘어 심어 두고서, 새벽에 일어나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서 그 사이를 거닐었다. 돌아와서는 책상을 마주하여 하루종일 즐거워하였다. 손이 이르면 술을 차리게 하되 서너 순배 돌고서는 끝냈는데, 때로는 큰 항아리를 스스로 끌어와 손에게 권하면서 이르되, ꡒ나는 술마시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그대 스스로 취하는 게 좋겠네ꡓ라고 했으니, 그 순진한 본성이 이와 같았다. 공이 지은 창계시고(滄溪詩藁) 2권이 집안에 간직되어 있다./ 배위는 평해 황씨(平海黃氏)인데 부친은 건공장군(建功將軍) 태손(兌孫), 조부는 훈도(訓導) 중하(仲夏), 증조는 청도군수 전(銓), 고조는 한성부윤 유정(有定)이다. 두 딸을 낳았는데, 맏이는 곧 진사 허공이고, 둘째는 생원 장응신(張應臣)에게 시집갔다. 진사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사렴(士廉)은 진사이고, 그 다음은 사언(士彦)이다. 두 딸은 공조참판 이황(李滉)과 충의위 김진(金震)에게 시집갔다. 생원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윤희(胤禧), 순희(順禧), 수희(壽禧)다. 두 딸은 울진현령 김사문(金士文)과 십독(習讀) 이효충(李孝忠)이다. 공이 돌아간 지 7년 뒤에 황씨도 이어서 죽어 같은 봉분에 합장하였다. 측실에도 딸 하나가 있다. 장군(張君)이 그 조카 언보(彦輔) 등 가까이 사는 여러 사람 및 나의 아들 준(寯)과 더불어 그 산소를 수호하고 시사(時祀)를 지낸다. 준은 비록 외지에 살지만 그 어머니 산소가 같은 언덕에 있기 때문이다. 명(銘)은 이러하다./ 공은 재주 간직하고서, 문사(文詞)에 기운을 쏟았다네./ 과장(科場)에 나가 활약했을 때, 좋은 성적 손쉽게 얻었다네./ 벼슬길 말년에는 실로 운명이 순탄하지 못했다오./ 공의 재목 우람하여 속인들 기호에 맞지 않았다네./ 재주 부려 벼슬하는 건 공이 부끄러워하는 바라, 체면 차리기 일삼지 않았다네./ 명성이야 당시를 울렸지만, 벼슬은 막혀 낮았다오./ 험난한 길에 자주 들어섰고, 거친 음식도 여러 번 잇지 못했다네./ 물오리나 학에게 다 어울리고, 종달새나 붕새를 가리지 않는다네./ 아들 없는 등씨(鄧氏)요, 딸만 있는 채씨(蔡氏) 집안이라./ 외손 여러 명이 마땅히 그 혜택 받으리라./ 시속의 명절이면 와서 성묘하는 일 감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석봉(石峯)의 동쪽 기슭, 울창하도다, 소나무가./ 좋은 돌에 글을 새겨, 무궁토록 전하고져./ 진성 이황(李滉) 삼가 지음.(www.koreastudy.or.kr 2007)

 

  문경동 [記事] : 안동인물초색인/ 간행년 : 2000/ 저자 : 권오신 외/ 발행처 : 안동문화원/ 문경동(文敬仝)/ 1457년9세조 3) ~ 1521(중종 16)/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감천(甘泉). 자는 흠지(欽之). 호는 창계(滄溪). 직장(直長) 속명(續命)의 자. 1486년(성종 17)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495년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1508년(중종 3) 양산 군수(梁山郡守)를 역임하며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 때 왜구를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사성(司成)이 되었고, 1512년 예천 군수(醴泉郡守), 뒤에 청풍 군수(淸風郡守)를 거쳐 사옹원 정(司饔院正)을 역임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문집에 『창계집(滄溪集)』이 있다. 예천(醴泉) 감천(甘泉)에 살았다. ◎참고문헌 : 醴泉郡誌ㆍ榮州鄕土誌(宋誌香)(www.koreastudy.or.kr 2007)

 

  문경동 [記事] : 통합검색 - 멀티미디어유물관/ 창계집(滄溪集) :『창계집(滄溪集)』은 문경동(文敬仝, 1457-1521)의 문집으로 4권 2책이다. 문경동은 자가 흠지(欽之), 호는 창계(滄溪),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속명(續命)의 아들이며 영주(榮州)사람이다. 1495년(연산군 1)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고,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구 격퇴한 공로로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예천 군수(醴泉郡守)와 청풍 군수(淸風郡守)를 지냈다. 첫머리에는 金若鍊의 서문이 있고, 이어서 滄溪先生 世系圖와 滄溪先生 外裔錄이 실려있다. 권1-4에 賦 10수, 辭 1수, 跋文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詩가 실려있다. 시는 차운시가 많이 보인다. 賦 중 ?次枕流亭賦?는 예안현에 사는 金萬鈞이 枕流亭과 枕流亭賦를 짓고 문경동에게 화답할 것을 청하여 차운한 부이다. 여기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천지간의 이치에 대하여 읊었다. 문집 부록으로 문경동에 대한 墓碣銘이 실려있고, 문집 끝에는 權斗經의 발문이 있다. 책의 크기는 32.0×21.0cm, 연대는 丙午, 특기사항은 木板이다.(www.koreastudy.or.kr 2007)

 

  문경동 [記事] : [서명] 紀年便攷v2  / [기사명] 甘泉文  / G002+AKS-AA25_20037_002_0314  / 甘泉文敬仝 [주:燕列] / [기관명] 한국학중앙연구원(www.history.go.kr 2007)

 

  문경동 [記事] : 중종실록 15권/ 중종 7년( 1512 임신 / 명 정덕(正德) 7년) 4월 11일 을유 1번째 기사/ 동지사 윤금손 등이 문신들을 외지에 임명해서 보내는 폐단을 말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동지사(同知事) 윤금손(尹金孫)․대사간(大司諫) 경세창(慶世昌)․지평 정충량(鄭忠樑)이 오보․양문선 등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세창이 아뢰기를, ꡒ육조(六曹)에 감당할 만한 사람이 없다 하여 남행(南行)으로 주의(注擬)하였으니, 이 또한 전조(銓曹)의 잘못된 정사입니다. 전에는 외임(外任)에 제수된 문신(文臣)이 적었는데, 이제는 다 외보(外補)를 좋아합니다. 이조(吏曹)가 어버이가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고 다 보내기 때문에, 육조 낭관(郞官)에 제수할 사람이 없습니다. 백성을 돌보는 소임이 중하기는 하지만 내외(內外)의 경중(輕重)을 헤아리지는 않습니까?ꡓ 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근래에 수령을 선택하여 파견하기 때문에 흔히 문신을 보내나, 자기를 위하여 가려는 자는 과연 잘못이다. 이 뒤로 전조는 참작해서 주의하라.ꡓ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그때 풍기 군수(豊基郡守) 조계형(曺繼衡)이 조포(躁暴)하고 탐비(貪鄙)하며, 예천 군수(醴泉郡守) 문경동(文敬仝)은 인색하고 중렴(重斂)하며, 영천 군수(榮川郡守) 김세훈(金世勳)은 형을 엄하게 하고 인민을 수탈하므로, 세 고을의 백성이 가혹한 정치에 시달렸으니, 문신을 가려서 보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영인본】 14 책 567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人事)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www.history.go.kr 2007)

 

  문경동 [記事] : 중종실록 11권/ 중종 5년( 1510 경오 / 명 정덕(正德) 5년) 4월 10일 을미 4번째 기사/ 대마도 대관이 동래군에 유감이 없다 하니 동래 현령 윤인복은 왜군을 해산하라고 회답/ 대마도(對馬島)의 대관(代官) 종병부성친(宋兵部盛親)의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ꡒ조선과 일본은 입술과 이빨이 서로 맞닿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대명국(大明國)의 선지(宣旨)를 받았는데, 그 선지에 이르기를 ꡐ양국(兩國)은 다를 것이 없어 아침저녁으로 통할 수 있다.ꡑ 하였습니다. 특히 대마도는 서해(西海)의 번병(藩屛)이고 양국이 왕래하는 인후(咽喉)가 됩니다. 증조(曾祖) 때로부터 화친의 약속을 정함이 견고하였으나, 이 10년 이래로 매사가 변하였습니다. 특히 지난해 4월에 부산포(釜山浦) 영공(令公)이 내려온 이래로는 되풀이하여 신법(新法)을 세워 일본인에 대해 모순(矛盾)되는 일을 계속하여, 비록 사선(使船)을 보내더라도 소선(小船)까지 죄다 인수(人數)를 헤아려 기록하며, 혹은 상관인(上官人)이 각각 서울에 올라가지 못한 채 포(浦)에서 허무하게 돌아오고, 또 1년 중의 양미(糧米)를 그 해 안에 죄다 주지 않고서 2~3년 분을 압류(壓留)하였고, 상관인의 주자(舟子)를 구로(?勞)시켰으니, 군방장(郡房長)이 또한 간사하여 영공과 마음을 같이하여 난을 부른 것입니다. 이때문에 대마도 대주(代主) 종병부소보성친(宗兵部少輔盛親)을 대장으로 삼아 수만 병선을 타고 부산포로 건너와 영공의 부자 형제를 타살하여 목을 베어 문 앞에 달아매었고, 목을 끊어 버린 자도 한없이 많습니다. 영공의 목을 가지고 오늘 아침 배로 대마도로 건너갔습니다. 동래군(東萊郡) 영공에게는 유감이 없으므로 이 뜻을 말하려고 어제 동래군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군사가 있어 일본인을 향하여 활을 쏘기 때문에 일본인도 성루(城壘)의 문에 붙어서 활을 쏘았습니다. 유감이 없으므로 이 뜻을 서울에 아뢰니, 모든 일에 있어서 다시 선례를 알아서, 천하에 선포하는 명에 그 증상(證狀)이 보이면 병선을 즉시 물릴 것이며, 그런 뜻이 안 보이면 경탄(鯨呑)하고 잠식(蠶食)하는 일이 곧 있을 것입니다. 제포(薺浦)․염포(鹽浦)․다대포(多大浦)․가라(加羅)․이산(伊山)은 포(浦)마다 병화를 입고 배마다 불태웠으나, 동시에 동래 차사원에게는 조금도 유한이 없으므로 활을 쏘지 말라고 내가 제지하였습니다. 즉시 회답을 구하거니와 오늘이라도 정지하고자 합니다.ꡓ하였다. 동래 현령(東萊縣令) 윤인복(尹仁復)이 종성친(宗盛親)에게 회답한 글에, ꡒ이웃을 사귀는 의리는 예부터 그 도(道)가 있습니다. 국가에서는 조종조(祖宗朝)로부터 귀방(貴邦)을 위하여 대접하기를 심히 후하게 하였으며, 하사한 물품 또한 많았으니 이웃을 사귀는 도가 극진하였는데, 족하(足下)가 뜻밖에도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켜 변장(邊將)을 도살(屠殺)하고, 성 밑까지 깊이 들어와 민가에 방화하여 집을 불태워 사람들이 해를 입었습니다. 나는 변장으로서 군영(軍營)을 지키고 있으므로 대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에 군사를 거느리고 더불어 서로 싸우는 것은 변장의 직분이요, 나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혜서(惠書)를 받고서 보인 뜻을 잘 알았으니, 군사를 해산하여 진(陣)을 돌리십시오. 다만 이른 말씀은 내가 천단(擅斷)할 일이 아니어서 즉시 조정에 진달하였으므로 곧 회계(回啓)가 있을 것이니, 아직 기다리십시오.ꡓ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변장이 그 글을 아뢰니, 조정에서는 윤인복이 문장에 능함을 탄복하였는데, 일이 평정된 뒤에 비로소 인복이 지은 것이 아니라 양산 군수(梁山郡守) 문경동(文敬仝)이 지은 글임을 알았다./ 【영인본】 14 책 423 면/ 【분류】 *외교-왜(倭) / *역사-편사(編史)(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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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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