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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47-2:조치우(1519.10.10 이전 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1.10.15 07:16:10

   예천고을원(47-2) :조치우(1519.10.10이전 이임) : 청백리에 녹선된 예천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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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치우 [記事] : 연산군일기 7권/ 연산군 1년( 1495 을묘 / 명 홍치(弘治) 8년) 7월 17일 무술 3번째 기사/ 예문관 봉교 기저 등이 삼공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노사신을 처단하기를 상소하다/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기저(奇?)와 권달수(權達手)․대교(待敎) 신징(申澄)과 강덕유(姜德裕)․검열(檢閱) 강징(姜徵)과 고세창(高世昌)과 조치우(曺致虞) 등이 상소하기를, ꡒ엎드려 아뢰옵니다. 임금과 신하의 사이는 사람의 한 몸과 같아서, 임금은 우두머리라면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은 팔․다리․가슴․등이요, 대간․시종은 귀와 눈이요, 내외 여러 유사(有司)는 근기(筋肌)․지절(支節)․혈맥인 것입니다. 사람의 몸이 맥박 하나만 좋지 않으면 병이 되고, 임금의 나라가 관리 하나만 잘못 등용하면 나라가 병드는데, 하물며 삼공(三公)임에리까. 삼공이란 만기(萬機)를 돕고 백관들을 거느려서, 한 나라의 우러러 바라보는 바요 모든 관원의 사표가 되는 것인데, 불행히 음흉하고 간사한 소인이 그 지위에 앉게 되면 백관(百官)이 해체되는 동시에 국사의 쇠란(衰亂)이 따를 것이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께서 대위(大位)를 계승하여 참신한 뜻으로 나라 다스리기를 계획하여, 백관과 여러 유사가 각기 자기 직책에 충실한데, 여러 대의 조정을 섬긴 간신이 오히려 수상(首相)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면, 마치 사람의 가슴과 등이 병을 받으면 근기(筋肌)와 지절(支節)이 이에 따라서 해체되는 것과 같으니, 그 사람의 망함을 당장에 볼 수 있습니다. 영의정(領議政) 노사신(盧思愼)은 본시 하나의 음험하고 간사한 소인으로 4대의 조정을 내리 섬겨 국가의 대신이 되었는데, 전하께서 즉위하시게 되매 권세를 농간해서 제 마음대로 휘두를 계획을 하여 조종(祖宗) 만세의 기업(基業)을 그르치고자 하니, 이는 종묘사직의 죄인이므로, 무릇 관에 있는 자라면 누구나 다 논할 수 있는데, 어찌 자기 직책을 벗어남을 혐의로 삼아서 되겠습니까. 옛날 이임보(李林甫)가 임금의 이목을 가리고 권세를 독차지하려고 장마(仗馬)를 지적하면서 여러 간관을 공갈하였지만, 일찍이 조정에 분명히 말하기를 사신(思愼)처럼 하지는 않았으니, 이는 오히려 거리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족히 당(唐)나라의 천하를 어지럽게 할 수 있었는데, 이제 사신은 정원(政院)에서 승지(承旨)가 좌우에 있고 사관(史官)이 앞에 있는데도 곧 나라 망칠 말로써 조금도 두려워하고 꺼리는 기색이 없이 조정의 좌상에 드러내 말하였으니, 이는 조정을 업신여기고 사관도 업신여긴 것이므로 그 화가 임보(林甫)의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무릇 소인이 그 임금에게 영합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술책으로써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신이 일찍이 불경(佛經)을 해석하여 부처에게 아부해서 다행히 광묘(光廟)의 지우(知遇)를 입게 되었고,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는 재(齋)를 지내는 일을 찬성하였는데 전하께서 따르셨으니, 이는 이단(異端)의 술법으로써 전하를 영합한 것이며, 시종(侍從)의 간언한 말을 듣지 마시라고 권하였는데 전하께서 따르셨으니, 이는 가리우는 술책으로써 전하를 영합한 것입니다. 사신이 이미 이 두 가지 술책으로써 전하에게 시험하였는데, 영합하였으므로 자기 딴은 뜻을 얻은 양 묘당(廟堂)의 위에서 의기양양해 하는데, 홀로 대간이 자기의 일을 문득 논하였으므로 해치려고 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상교(上敎)를 받고서 위의 의사에 영합하여 대답하기를 ꡐ지당하십니다.ꡑ 하고, ꡐ기뻐서 치하하기에 겨를이 없습니다.ꡑ고 하였으니, 이는 또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술법으로써 전하를 영합한 것이므로 그 화가 어찌 두렵지 않습니까. 신들이 또 듣자오니, 사신이 대간으로부터 자기를 국문하기를 청하는 것을 보고는 감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ꡐ어떻게 나를 국문하겠느냐? 국문을 한다면 나로서도 할 말이 있다.ꡑ고 하니, 사신이 이미 나라 망칠 말로써 전하께 아유하였는데, 다시 또 무슨 말을 꾸며 대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간․시종의 논란을 들었다면 마땅히 형구 앞에 엎드려 대죄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도리어 잘못을 꾸며대며 고칠 줄을 모르고, 거짓을 굳혀서 부끄러워함이 없으며, 나도 할 말이 있다 하였으니, 신하로서 불경 무례함이 이보다 클 수 없는데, 도리어 간쟁(諫諍)하는 선비를 무례 불경하다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총명 성지(聰明聖智)가 다른 임금보다 뛰어나시고, 또 대간관 시종이 조석으로 논쟁하고 있으니, 어찌 사신의 음사와 간흉을 모르시겠습니까만, 다만 대신이기 때문에 우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말하기를 ꡐ혹시 어쩔지 모른다면 오히려 희망이라도 있거니와, 이미 그 간사함을 알고도 제거하지 못한다면, 악(惡)을 알아보는 것만으로 귀한 것은 아니다.ꡑ 하였으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이미 사신의 간사함을 알고 계시니, 빨리 법에 처치하여 조정에 보여 주소서. 처단해야 할 일을 처단하지 않으시면 마침내 사신에게 그르침을 받게 될까 두렵습니다. 예로부터 명왕(明王) 명후(明后)라 칭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능히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는데 있으며, 임금의 직책도 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군자와 소인은 하나가 자라면 하나는 사그러지는 관계이므로 함께 처하고서는 다투지 않는 일이 없는데, 다투게 되면 군자는 이기지 못하고 소인이 항상 이기는 것입니다. 지금 대간과 시종이 여러 달을 두고 궐문 앞에 엎드려 있어도 아직 윤허하심을 입지 못하오니, 어찌 직을 사퇴하고 물러나는 것이 편안하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만, 선왕께서 발탁하여 전하에게 물려주신 것이기에 위는 선왕의 남다른 은혜를 잊지 못하고, 또 전하를 도울 자가 없음을 차마 볼 수 없어 분을 참고 반열에 나아가 전하께서 깨달으심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비태(否泰) 소장(消長)의 도를 관찰하고 국가 안위의 기틀을 유념하시어 힘써 공론에 따르시고 의심 마시어 간인을 버리시면 보다 다행한 일은 없습니다. 신들이 모두 보잘것없는 자격으로 사국(史局)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으므로, 전대의 사적(史籍)을 살펴보니, 그 사이에는 군자와 소인이 많지 않은 바 아니며, 소인으로 임금을 우롱하는 그 술법도 역시 많았지만, 사신처럼 기탄없는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신들이 더욱 통분히 여기는 까닭이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부디 유념해 주소서.ꡓ하였다./ 【영인본】 13 책 13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윤리-강상(綱常) / *역사-고사(故事)(www.history.go.kr 2007)

 

  조치우 [記事] : 연산군일기 7권/ 연산군 1년( 1495 을묘 / 명 홍치(弘治) 8년) 7월 18일 기해 2번째 기사/ 예문관 봉교 기저 등이 노사신의 간사함을 밝히고 죄를 내리기를 바라다/ 예문관 봉교(藝文官奉敎) 기저(奇?)와 권달수(權達手)․대교(待敎) 신징(申澄)과 강덕유(姜德裕)․검열(檢閱) 강징(姜徵)과 고세창(高世昌)과 조치우(曺致虞) 등이 상소하기를, ꡒ신들이 듣자오니, ꡐ한 마디 말이 나라를 일으킬 수도 있고, 한 마디 말이 나라를 망칠 수도 있다.ꡑ 하였고, 또 이르기를 ꡐ나라는 한 사람으로써 흥하기도 하고, 한 사람으로써 망하기도 한다.ꡑ 하였습니다. 대개 국가의 흥하고 망하는 것이 한 사람의 어질고 간사함과 한 마디 말의 잘하고 잘못하는 데 달렸으니, 어찌 깊이 두렵지 아니하오리까. 이는 만세를 두고 임금으로서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노사신(慮思愼)은 심술이 간사하고 학술이 바르지 못하여, 일찍이 불경(佛經)을 읽어 세묘(世廟)에게 벼슬을 구하고 심지어 석공(釋孔)549) 이란 말까지 써서, 우리 유림의 타매(唾罵)를 받았으며, 성종께서 모든 인재를 등용하시던 때에는 평소의 간사한 행동을 모조리 숨기고 겉으로 진솔(眞率)함을 내보이고, 의논도 간혹 바르게 나왔으니, 이는 다 안녹산(安祿山)이 치직(癡直)한 척하고, 왕안석(王安石)이 소박함을 내보이는 수단으로서 임금을 속여 총애를 굳히는 술책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있어서는 그가 선왕의 중한 부탁을 받았으니, 평일에 성종을 섬기던 도로써 전하를 섬겨야 가한데, 성종이 승하(昇遐)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마음을 모두 바꾸어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권세를 독차지하려는 술책을 못할 짓 없이 발휘한 것이니, 신들은 이 한 사람이 족히 나라를 망칠 만하다고 여깁니다.

 

  국가가 대간을 설치하여, 무릇 사직의 휴척(休戚)과 민생의 이해를 그 곳에 집중시켜 그들로 하여금 전부 말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 그 책임이 중한 것입니다. 간관(諫官)이 할 말을 다하게 되면 다스려지고, 할 말을 다 못하게 되면 어지러워지는 것은 떳떳한 이치입니다. 이제 천안(天顔)에 범접하여 대궐 뜰에서 논쟁을 벌이면, 숨김없이 곧은 말을 하여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을, 사신은 도리어 이기기에만 힘쓴다 하고, 간관의 목을 매어 옥에 가두어 대각(臺閣)이 전부 비게 되니, 온 나라가 놀라워하는데, 사신은 도리어 기뻐서 치하한다 하며, 영합하고 찬성하되 오히려 부족될까 걱정하니, 비록 저 진(秦)나라 이사(李斯)의 자수(恣?)550) 를 권하고 간쟁(諫諍)을 끊어버리라는 말과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의 ꡐ사람들의 말은 걱정할 것이 못된다.ꡑ는 말도 반드시 이처럼 참혹하지 못할 것이므로 신들은 이 한 사람이 족히 나라를 망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대간․시종이 사신의 말을 듣고서 서로 놀라며 나라 망칠 말이라 하옵는데, 전하께서는 염두에 두지 않으시니, 웬일입니까. 만약 삼사(三思)를 하시어 자세히 풀이해 보시면, 어찌 이 말이 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만약 아시면서도 버리지 않으신다면, 이는 악(惡)한 줄을 알고도 능히 버리지 못하는 것이니, 악한 자를 미워하는 성의가 지극하지 못한 것이며, 만약 몰라서 버리지 못하신다면, 전하께서 이미 사신의 술책에 빠지신 것이 아닙니까./

 

  사신이 스스로 생각할 적에 전하께서 명성(明聖)하시고 조정에는 바른 말하는 선비가 많고, 자신은 또 이미 늙어서 그 간사한 술책을 부리게 되지 못할 것이 걱정되므로, 전하께 퍅간(愎諫)551) 한다고 교사하여 대간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한 뒤에 그 간흉을 함부로 내부리려는 것이니, 그 음험하고 참독하여 국가에 화를 끼치는 것을 이루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면, 선왕의 업을 계승하여 능히 장구한 치안을 도모하기가 역시 어렵지 않겠습니까. 어찌 하나의 사신을 아끼시고 공론의 소재를 따르지 아니하십니까? 사신을 아깝게 여기실 줄만 아시고 유독 선왕의 업을 생각하지 아니하십니까? 전하의 오늘날 첫 정사는 바로 국가 안위(安危)의 기틀이요, 정사(正邪)가 사라지고 자라나는 즈음이오니, 비록 대신(大臣)이 주공(周公)․소공(召公) 같더라도, 나라를 위하여 장구한 계획을 하자면, 심려를 다하여 깨우쳐 이끌되 오히려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능히 책임을 감당해 내지 못할까 근심되는 것인데, 하물며 사신 같은 간흉이 수상(首相)의 지위을 차지하여 위로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아래로 말하는 자의 입을 막음에리까. 바라옵건대, 쾌히 그 죄를 다스리어 조정에 함께 서지 못하게 하여 주시면, 종묘사직의 다행이겠습니다.ꡓ하니, 듣지 않으매, 대간이 글을 올려 사직하니, 복직을 명하였다./ 【영인본】 13 책 14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윤리-강상(綱常) / *역사-고사(故事) / *인사-임면(任免)/ [註 549]석공(釋孔) : 석가 공자의 합칭. ☞ / [註 550]자수(恣?) : 자수(恣?)는 교만하고 방종하다는 뜻임. 《사기(史記)》 백이전(伯夷傳)에 폭려 자수(暴?恣?)라는 구절이 있음. ☞ / [註 551]퍅간(愎諫) : 임금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간언(諫言)을 듣지 않는다는 말임. 《좌전(左傳)》 소공(昭公) 4년에 ꡒ넘쳐서 퍅간(愎諫)을 하니, 10년을 넘지 못할 것이다.ꡓ 하였음. ☞(www.history.go.kr 2007)

 

  조치우 [記事] : 연산군일기 28권/ 연산군 3년( 1497 정사 / 명 홍치(弘治) 10년) 12월 21일 기축 1번째 기사/ 원자의 탄생으로 신승선 등 여러 신하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실록청(實錄廳) 총재관(摠裁官) 신승선(愼承善)․어세겸(魚世謙)에게는 안장을 갖춘 말 한 필과 표리(表裏) 한 벌과 비단 한 필을 하사하고, 당상(堂上) 이극돈(李克墩)․유순(柳洵)․홍귀달(洪貴達)․윤효손(尹孝孫)․안침(安琛)․허침(許琛)․조익정(趙益貞)․이육(李陸)․신종호(申從濩)에게는 안장 갖춘 말 한 필과 표리 한 벌을 하사하고, 노공필(盧公弼)․김제신(金悌臣)에게는 아마 한 필을 하사하고, 낭청(郞廳) 표연말(表沿沫)․김수동(金壽童)․이승건(李承健)․이거(李?)․이균(李均)․권주(權柱)에게는 아마(兒馬) 한 필과 향표리(鄕表裏) 한 벌을 하사하고, 이달선(李達善)․남세담(南世聃)․이수공(李守恭)․강경서(姜景敍)․김전(金詮)․이세영(李世英)․허집(許?)․이계복(李繼福)․이유청(李惟淸)․이의무(李宜茂)․손번(孫蕃)․남궁찬(南宮璨)․이과(李顆)․손주(孫澍)․임유겸(任由謙)․이의손(李懿孫)․장순손(張順孫)․김삼준(金三俊)․정광필(鄭光弼)․정승조(鄭承祖)․성중엄(成重淹)․강덕유(姜德裕)․정희량(鄭希良)․권오기(權五紀)․이유령(李幼寧)․이전(李?)․김천령(金千齡)․신세련(辛世璉)․송흠(宋欽)․조치우(趙致虞)․권균(權均)․기저(奇?)․신징(申澄)․권달수(權達手)․이희순(李希舜)에게는 각각 한 자급을 더하고, 양희지(楊熙止)․최부(崔溥)․신공제(申供濟)․남곤(南袞)․한세환(韓世桓)․성희철(成希哲)․권민수(權敏手)․이관(李寬)․강징(姜?)․이목(李穆)․이자(李滋)․유희저(柳希渚)에게는 향표리 한 벌을 하사하고, 본 건을 아뢴 승지(承旨) 김응기(金應箕)․강귀손(姜龜孫)․이인형(李仁亨)․신수근(愼守勤)․정광세(鄭光世)에게는 아마 한 필을 내려주고, 《세조실록(世祖實錄)》의 예에 의해 출사(出仕)한 날짜의 구근(久近)에 따라 논상(論賞)에 차등을 두었다./ 【영인본】 13 책 301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www.history.go.kr 2007)

 

  조치우 [記事] : 연산군일기 30권/ 연산군 4년( 1498 무오 / 명 홍치(弘治) 11년) 7월 25일 기미 9번째 기사/ 이집․이승건․성세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집(李?)을 이조 참판으로, 양희지(楊稀枝)2036) 를 충청도 관찰사로, 이승건(李承健)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성세명(成世明)을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정미수(鄭眉壽)를 우승지(右承旨)로, 홍식(洪湜)을 좌부승지(左副承旨)로, 김영정(金永貞)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이세영(李世英)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김계행(金係行)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권주(權柱)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윤희손(尹喜孫)을 직제학(直提學)으로, 이일건(李日健)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안윤덕(安潤德)을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으로, 김숙정(金淑貞)․이세인(李世仁)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권세형(權世衡)․정인인(鄭麟仁)을 지평(持平)으로, 최세걸(崔世傑)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조치우(曺致虞)․권홍(權弘)을 정언(正言)으로, 권달수(權達手)를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유자광(柳子光)을 겸 도총부 도총관(兼都摠府都摠官)으로 삼았다./ 【영인본】 13 책 32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조치우 [記事] : 연산군일기 31권/ 연산군 4년( 1498 무오 / 명 홍치(弘治) 11년) 8월 23일 병술 2번째 기사/ 왕이 농사 구경할 때 예의가 없는 수행원들을 탄핵하지 아니했다 하여 대간들을 힐책하다/ 〈왕은〉 농사 구경을 하던 날 어가(御駕)를 수행했던 대간(臺諫) 정인인(鄭麟仁)․조치우(曺致虞)를 불러 묻기를, ꡒ농사 구경할 적에 내가 마침 돌아보니 수가(隨駕)한 인원들이 말 위에서 반찬(盤饌)을 봉공(奉供)하고 있었다. 임금을 모시어 감히 이러하니 이는 윗사람을 능멸하는 풍습이다. 너희들이 탄핵하지 아니하니 그 과실 역시 큰 것이다.ꡓ하였다./ 【영인본】 13 책 329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농업-권농(勸農) / *사법-탄핵(彈劾)(www.history.go.kr 2007)

 

  조치우 : 청백리 조치우(曺致虞)선생 <정우당[淨友堂]>/ 2009.09.16/ 현재의 공직자상으로 참고할 만한 이조시대의 청백리 曺致虞 선생의 엀 옛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학문이 깊고 덕망이 있고 행실이 올발라야 했다 올바른 사람이 정치를 해야만 온 국민이 그를 따라 애국애족 하는 사람으로.../ http://cafe.daum.net/changjomilyang/ 昌寧曺氏 密陽 宗親會(daum 2010)

 

  조치우 : 조선 중종 연간의 청백리였던 정우당(淨友堂) 조치우(曺致虞) 선생에게 중종이 내린 옥비/ 2009.11.22/ 조선 중종 연간의 청백리였던 정우당(淨友堂) 조치우(曺致虞) 선생에게 중종이 내린 옥비이다. 정우당은 조선 중종 때 대구 부사, 예천 군수 등을 지냈는데 재임하는 동안 청령결백하고 선정을 베푼 목민의 치적이 뛰어난 청백리로.../ http://cafe.daum.net/changjomilyang/ 昌寧曺氏 密陽 宗親會(daum 2010)

 

  조치우 : 청백리<조선조>/ 2010.01.04/ ...開城) 형 참(刑 參) 권 빈(權 ?) 안동(安東) 전 적(典 籍) 김 무(金 ?) 안동(安東) 공 판(工 判) 조치우(曺致虞) 창녕(昌寧) 사옹정(司饔正) 오세한(吳世翰) 나주(羅州) 병 사(兵 使) 송 흠(宋 欽) 신평(新平) 판중추(判中樞.../ http://cafe.daum.net/jung1781/ 동래정씨 대구경북화수회(daum 2010)

 

  조치우 : 씨족사(氏族史)/ 2009.08.16/ 영안북도 병마절도사(永安北道兵馬節度使)와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자는 문위(文偉)이다. 조치우(曺致虞1459―1529)는 대구부사(大邱府使)와 사옹원정(司饔院正)을 역임하였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소학(小學)》 1부(.../ http://cafe.daum.net/changnyoungjo/ 창녕조씨부산청년회(daum 2010)

 

  조치우 : 현재의 공직자상으로 참고할 만한 이조시대의 청백리 曺致虞 선생의 엀/ 글쓴이 : allround/ 날짜 : 08-11-13 14:29/ 조회 : 2014/ 청백리 조치우(曺致虞)선생/ 옛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학문이 깊고 덕망이 있고 행실이 올발라야 했다 올바른 사람이 정치를 해야만 온 국민이 그를 따라 애국애족하는 사람으로 이끌어져 간다. 우리 고장을 빛낸 여러 사람 가운데 조치우 선생처럼 바르고  효행이  두터운 사람도 드물 것이다. 선생의 자는 순경(舜卿),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고려말엽 좌정승 하성부원군 조익청(夏城府院君曺益淸)의 후손으로 고조는 조신충(曺信忠 :강계도 좌익 병마사), 증조는 조상명(曺尙明 : 덕원부사), 조부는 조경무(曺敬武 : 사직), 아버지는 조말손(曺末孫 : 영암군수)이다. 1459년(세조 5년) 영천시 영천읍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자라남에 따라 효행이 지극하여 향내에 소문나더니 1494년(성종 2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연이어 그해 별시 문과에 합격되어 예문관  한림(藝文館翰林)으로  벼슬길에 올라 1498년(연산군84년)에는 정언(正言) 그 다음해에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의  학정으로 나라 안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나라의 질서가 바로잡혀 갈 때 선생같이 어진 선비를 그냥 두지 않았다. 다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내섬사정(內贍寺正), 예천군수(醴泉郡守) 등을 거쳤다. 대구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나라에서는 청백리(淸白吏)로 뽑았다. 백성을 다스리는 본보기로 삼았고, 뒤에 주민들은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또 효행이 지극한 소문을 들은 임금은 옥비(玉碑) 두 좌와 소학(小學)을 하사하였다. 그 후 선생은 사옹원정(司壅院正)이란 벼슬에 나갔으나 선생의 55세 때인 1513년(중종 8년)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키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극진히 어머니를 섬겼으나 선생이 70세 되던 1529년(중종 4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연이어 선생 또한 71세에 돌아갔다. 이에 임금님이 하사한 옥비 한 좌는 묘소(현 대창면 대제못안)에 세워졌고, 또 다른 한 좌는 창원 북지개동(昌原北芝介洞)에 있는 그의 아내 창원박씨(昌原朴氏) 묘소에 세워져 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 '한 집안의 기초가 튼튼해야 그 집은 번영하는 법' 선생같이 효성 있었기에 집안이 번창하였고, 효성 있어야 충신열사를 낳는 것처럼 그의 증손 5형제 중 조광익(曺光益, 호 취원당(聚遠堂))은 효자로써 정려가 세워졌고, 조희익(曺希益)은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영천복성에 크게 활약하였고, 조호익(曺好益, 호 지산…芝山)은 도덕 문장이 당대의 우두머리가 되어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고 그 후손 또한 저명한 인물이 속출되어 영천, 진주, 밀양, 창원 등지에서 거주하고 명문의 기반을 굳히게 된다. 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느냐? 오로지 선생의 청백한 음덕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공부하는 후세 사람에게 남긴 한 수가 있다.  "사람의 도리를 다 하려면 마음을 가라 앉혀 책을 잘 읽어 그 뜻을 이해해야 하고 문학은 반드시 오래 오래 공부한 뒤에야 통한다 시경을 말 하는 선비(학문을 닦는 사람)에게 부탁하노니 의당 남보다 백배의 공(고력)을 더할 것이니라." [참고문헌] 한국인명대사전, 정우당실기/  記錄者 : 太師公 曺繼龍 始祖할배 43대 孫  曺仁太(daum 2010)

 

  조치우 : 유후재 및 옥비 (遺厚齋 및 玉碑) 문화재자료 제101호/ 소유자 : 창녕조씨 청백리공파문중/ 이 건물은 조선 성종 떄 문신이며 학자로 청백리에 녹선된 조치우(曺致虞)(1459-1529) 선생의 묘하재사이며, 선생이 대구부사 재임시 선정을 베풀어 나라에서 하사한 옥비이다. 선생의 호는.../ http://kr.blog.yahoo.com(daum 2010)

 

  조치우 : 五峯書院(오봉서원)/ ...숭유문)이라 현판하였다. [五峯書院(오봉서원) 현판] [五峯書院(오봉서원)] 오봉서원에 봉향된 淨友堂(정우당) 曺致虞(조치우, 1457∼1529)는 고려 후기 정승을 지낸 夏城府院君(하성부원군) 益淸(익청)의 오대손으로 경북 영천에서 .../ http://blog.joins.com(daum 2010)

 

  조치우 : 遺厚齋(유후재) 및 玉碑(옥비)/ ...대재리 210-1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1호 [遺厚齋(유후재)] 조선 성종 때 문신이며 학자로 청백리에 녹선된 曺致虞(조치우, 1459~1529) 선생의 묘하재사이다. [유후재와 송청서당] 이 건물은 이치우 선생의 묘하 재사이기도 하며 이름은...(daum 2010)

 

  조치우 [專門資料] : 曺舜卿。承點馬之命。過見避所。 曺致虞/ 저자 이우(李?)/ 발행처 한국고전번역원/ 발행일 2007-02-12(daum 2010)

 

  조치우(曺致虞) [專門資料] : (순경(舜卿))/ 발행일2009-04-06/ 관직 :군수|검열|사옹원정|성균관전적|춘추관기사관|정언|대구부사|예천군수/ 관련서적 :≪성종실록≫|≪소학≫(daum 2010)

 

  조치우(曺致虞) [專門資料] : (순경(舜卿))/ 발행일2007-01-10(daum 2010)

 

  조치우(曺致虞) [專門資料] : 창녕조씨 지산종택 [소지 29(상언초)] 저자 미상/ 발행일 2009-04-03/ 자료소개 :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 본관 昌寧)의 증조부이며 사헌부(司憲府掌令)을 역임한 조치우(曺致虞 : 본관 昌寧)의 청백리 행적을 기리는 비문을 조정에서 하사해 공의 행적이 후세에 길이 전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한 [(청백리정우당조공청향상언초살(淸白吏淨友堂曺公請享上言草)]이다.(daum 2010)

 

  조치우 :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 e-Book/ 최효식 지음 |  국학자료원 |  2006.05.29/ 책본문 : ..., 경주 서천싸움에서 순절한 李得麟의 동생 화왕산등고록 등재曺以臨, 청백이 曺致虞의 현손 손무원공신 군자감 판관尹從善, 中衛將 尹聘의 아들 선무원공신 군자감 봉사參奉 金希路.../ 192페이지(daum 2010)

 

  조치우 : 임진왜란기 영남의병연구/ e-Book/ 최효식 지음 |  국학자료원 |  2006.05.29/ 책본문 : ..., 경주 서천싸움에서 순절한 李得麟의 동생 화왕산등고록 등재 曺以臨, 청백리 曺致虞의 현손 손무원공신 군자감 판관 尹從善, 中衛將 尹聘의 아들 선무원공신 군자감 봉사 參奉 金希路.../ 220페이지(daum 2010)

 

  조치우 : 유후재 및 옥비(遺厚齋및玉碑)/ 2009.12.09/ ....-1) 이 건물은 조선(朝鮮) 성종(成宗)때 문신(文臣)이며 학자(學者)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된 조치우(曺致虞)선생의 묘하(墓下) 재사(齋舍)와 선생이 대구부사(大丘府使) 재임시(在任時) 선정(善政)을 베풀어 나라에서 하사(下賜).../ http://blog.daum.net/bosar/ 내일의 어제(daum 2010)

 

  조치우 : 어사옥비/ 2009.02.27/ .있는 「어사옥비」는 경남 문화재 자료 제166호로 청백리로 녹선(錄選)된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정우당 조치우(曺致虞) 선생의 부인에게 하사된 옥비이다. 정우당은 조선 중종 때 대구 부사, 예천 군수 등을 지냈는데 재임기간 동안 청령결백하고.../ http://blog.daum.net/win690/ 역사와야생화(daum 2010)

 

  조치우 : 유후재 및 옥비 (遺厚齋 및 玉碑)/ 문화재자료 제101호/ 2009.06.15/ ...-1번지 소유자 : 창녕조씨 청백리공파문중/ 이 건물은 조선 성종 떄 문신이며 학자로 청백리에 녹선된 조치우(曺致虞)(1459-1529) 선생의 묘하재사이며, 선생이 대구부사 재임시 선정을 베풀어 나라에서 하사한 옥비이다. 선생의 호는 정우당.../ http://kr.blog.yahoo.com(daum 2010)

 

  조치우 : 五峯書院(오봉서원)/ 2009.05.19/ ...숭유문)이라 현판하였다. [五峯書院(오봉서원) 현판] [五峯書院(오봉서원)] 오봉서원에 봉향된 淨友堂(정우당) 曺致虞(조치우, 1457∼1529)는 고려 후기 정승을 지낸 夏城府院君(하성부원군) 益淸(익청)의 오대손으로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http://blog.naver.com/ 박태선(초아)의 시와 산문의 세계(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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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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