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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59) : 이창(1557이후 부임-1562이전 이임) :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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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李昌)은 1557년(명종 12) 이후에 부임하여 1562년(명종 17) 이전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자는 창지(昌之), 호는 추강(楸岡), 본관은 성주이다. 1549년(명종 4) 식년 문과에 갑과 2위로 아원 급제하여 벼슬이 승문원 정자, 한성부 참군, 사간원 정언을 거쳐 사헌부 감찰 때는 사마시의 고시관(1552)을 겸하였다.
그 후 사헌부 지평, 문의 현감을 역임했고, 이어서 합천 군수를 거쳐 예천 군수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했다.
대구 부사(1562)를 지내었고, 1572년(선조 5) 11월 29일에 군기시 정에 제수되었고, 1573년(선조 6) 6월 15일에 삼척 부사에 제수되어 1574년(선조 7) 12월에 이임하였다.
제용감 첨정(1582)으로 왕의 명령을 받들어 정릉을 찾아 위안례를 지낼 때 고유문과 위안문을 지었다. 1583년에 예빈시 부정, 봉상시 첨정을 거쳐 1584년에 군자감 정에 이르렀다.
이창이 예천고을 원을 할 무렵에 예천 사람으로서 과거에 급제한 현황은 다음과 같다. 1558년(명종 13)에 이중립이 식년 진사시에 1위로 합격하였고, 1560년에 권문해가 별시 문과에 병과 8위로 급제하였고, 1561년에 강제가 식년 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에 권대덕이 식년 문과에 병과 25위로 급제하였고, 1562년(명종 17)에 이광준이 별시 문과 병과 5위로 급제하여 예천 군수로 부임하였고, 같은 해 임응상이 별시 문과에 병과 19위로 급제하였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510號 2002-05-23 14:13:29)
이창(李昌) : 1557년(명종 12) 이후에 부임하여 1562년(명종 17) 이전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자는 창지(昌之), 호는 추강(楸岡), 본관은 성주이다. 1549년(명종 4) 식년 문과에 갑과(甲科)로 아원 급제(亞元及弟)하여 벼슬이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사헌부 감찰 때는 사마시의 고시관(1552)을 하였고, 그 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문의 현감(文義縣監)을 역임했다. 그 후 합천 군수(陜川郡守), 예천 군수(醴泉郡守)를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했다. 대구 부사(大邱府使, 1562)를 지내었고, 1572년(선조 5) 11월 29일에 군기 정(軍器正)에 제수되었고, 1573년(선조 6) 6월 15일에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어 1574년(선조 7) 12월에 이임하였다. 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 1582)으로 왕의 명령을 받들어 정릉(貞陵)을 찾아 위안례(慰安禮)를 지낼 때 고유문(告由文)과 위안문(慰安文)을 지었다. 이듬해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을 거쳐 다음해에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이창(李昌) : 1557년(명종 12) 이후에 부임하여 1562년(명종 17) 이전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1519(중종 14)-1592(선조 25), 단성현(丹城縣) 원당리(元堂里) 출생, 자는 창지(昌之), 호는 추강(楸岡), 본관은 성주, 중시조 농서군의 8세손인 부사직 계유(繼裕)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기량이 뛰어나 1546년(명종 1) 28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549년(명종 4) 식년 문과에 갑과(甲科)로 아원 급제(亞元及弟)하여 벼슬이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문의 현감(文義縣監)을 역임했다. 1551년(병종 6) 5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지극한 애도 속에 장사를 마친 후 합천 군수(陜川郡守), 예천 군수(醴泉郡守)를 지내면서 정사를 맑게 하고 송사(訟事)를 간소화하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이 그 덕을 크게 칭송하였다. 1559년(명종 14)에 부상(父喪)을 당하여는 항상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손수 묘표(墓表)를 지어서 세웠다. 1562년(명종 17)에 대구 부사, 1569년(선조 2) 양양 부사, 1573년(선종 6) 한성 서윤, 삼척 부사를 거쳐 1582년(선조 15)에 제용감 첨정을 제수받고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정릉(貞陵 : 태조비 신덕왕후의 무덤)을 찾아 위안례(慰安禮)를 드릴 때에 고유문(告由文)과 위안문을 지어 고하였다. 1583년(선조 16)에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을 거쳐 1584년에 군자감 정이 되어 힘써 그 직무를 다 하였으나, 세도가 날로 그릇됨을 보고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월명산(月明山) 선영 아래에서 여생을 보냈다. 평소 벼슬에 있을 때에도 관록(官祿)을 형제 간에 나누어 가져 사람들이 현대부(賢大夫)라 일컬었다. 참판 이교인(李敎寅)이 묘갈명, 후산(厚山) 이도복(李道復)이 행장,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묘표(墓表)를 지었다.(資料 提供 : 開浦 李甲童)
이창 [記事] : 송정선생문집(松亭先生文集)에 실린 예천군수 이창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松亭先生文集卷之六 / 墓碣誌銘 / 襄陽府使李公墓誌銘幷序/ 世之誌墓者明世系述功業錄子孫如斯而已余之銘公者不獨爲世系功名子孫而有可銘者存焉嘗觀古今人雖門?敵崔盧事業耀金石或値世變亂則得以保首領 / :: 0068 :: / 全名位葬於先?之側者盖無幾焉今我李公殆庶乎哉公諱昌字昌之始祖長庚仕高麗朝封京山府院君因授?西公四世祖諱濟佐本朝爲開國功臣▼(酉+巴)享太祖廟曾王父潤朝散大夫監結城縣王父義淳忠義衛考繼裕禦侮將軍娶泗川望族李秀華女以正德己卯二月十七日生公公之世系固著甚焉早治詩書篤意擧業丙午春登司馬己酉秋擢甲第卽拜漢城府參軍五轉而令文義縣四轉而守陜川郡皆爲養也未幾遭憂服?又守醴泉郡▼(?/小+无)滿自漢城庶尹爲副正者再皆禮賓爲監正者二軍資繕工爲府使者三大丘三陟襄陽公之功業亦 / :: 0069 :: / 隆甚焉前夫人陳氏生?定之女後夫人李氏咸安大司憲仁亨之子秀之女有男二女二男長曰某娶某郡某女次曰某娶某女女長適晉山生?河某次適士人李某俱有子女又有旁室子二男一女公之子孫亦謂盛矣嗚呼氏族著矣功業隆矣子孫盛矣人所難兼而能兼焉世已李矣時已變矣亂亦極矣人所難保而能保焉斯其可銘也已年七十四以壬辰某月日疾卒于家某月日葬于某向某原銘曰位尊伐氷壽享從心年未致仕解?投林詩酒高堂樂我天年世道雖變身名兩全一棺初盖萬事已畢友歌親哭 / :: 0070 :: / 古聞其說似君埋少政謂今日强顔斯石?形??(경상대학교 文泉閣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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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