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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61-1) : 이광준(1563이후 부임-1571이전 이임) : 예천향교 대성전 대들보에 글씨를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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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준(李光俊, 1531~1609)은 1563년(명종 18) 이후 이원 군수의 후임으로 부임, 1571년(선조 4) 이전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군위 사람, 자는 준수(俊秀), 호는 학동(鶴洞), 본관은 영천, 우암 세헌(世憲)의 손자, 참봉 여해(汝諧)의 아들, 광언(생원)의 형, 남․완․거의 아버지, 예천군수 정사신의 장인이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1562년(명종 17)에 별시 문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하여 창녕 현감, 예천 군수를 거쳐 내자시 정을 지냈다. 임진왜란(1592) 때 강릉 부사로 나아가 싸운 공이 있어 중화로 옮겼는데, 군민들이 그의 선정비를 세웠다.
그 후 충주 목사, 형조 참의 등을 역임하고, 1603년(선조 30)에 강원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예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여헌 장현광이 찬한 `실기'가 있고, 군위 오양서원과 의성 학록정사에 제향되었다.
「예천군읍지」들에 의하면, ꡒ정유재란(1597) 중에 중국의 마귀 장군이 향교의 거룩함을 모르고, 향교의 대성전에 머물고자 하므로, 위패를 모두 정산서원으로 옮기고, 대성전을 비워 주니, 마귀가 대성전 안에 들어섰는데, 이때 대성전의 들보가 번득여 뒤집히면서 그 들보에 군수 이광준이 쓴 글씨가 뚜렷이 나타나고 먼지가 자욱하더니, 마귀가 잘못을 깨닫고 뜰 아래로 내려서자, 들보는 제자리를 잡아 다시 전과 같이 되었으나, 그 글씨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ꡓ라고 했다. 이를, `성전 번량 사건'이라고 한다.
또, 「양양기구록」에 의하면, ꡒ왜장 우희다수가가 알성하려 하자, 대성전의 대들보가 움직였다ꡓ라고도 하였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512號, 2002-06-06 07:59:06)
이광준(李光俊) : 명종 때 부임한 예천 군수이다. 1531(중종 26)-1609(광해군 1), 군위읍 내량리 출생, 자는 준수(俊秀), 호는 학동(鶴洞), 본관은 영천, 우암(牛岩) 세헌(世憲)의 손자, 참봉 여해(汝諧)의 아들, 광언(光彦, 1525生, 字彦秀, 生員)의 형, 남ㆍ완ㆍ거(擧)의 아버지, 예천군수 정사신(鄭士信)의 장인, 의성군 산운리 입향조이다.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다가 1562년(명종 17)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 5위로 급제하여 박사, 전적, 형조 좌랑, 하동 현감, 창녕 현감, 형조 정랑, 임천 군수, 예천 군수(醴泉郡守)를 거쳐, 청송 부사, 성균관 사성,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봄에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임명되어 한 달도 못된 4월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열읍에 격문을 돌려 모병하여 계략을 세웠고, 적장 길성이 쳐들어왔을 때 그 향도인 왜차가 양양 관노와 짜고 집으로 스며들었을 때는 그의 부인이 수하를 시켜 목을 베었고, 그는 동분서주 적을 막는 등 군공(軍功)이 있어 통정대부에 승품되어 중화(中和) 군수로 옮겨 흩어진 난민을 구휼하고 부로 승격케 하고, 1594년(선조 27) 봄부터는 둔전을 펴 주민들이 즐겨 농사에 종사, 벼 수천 석을 거두도록 하여 이재민을 안주시겼는데, 군민(郡民)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명 나라 원병이 간혹 지나친 점 있어도 그는 동요치 않고 바르게 나가 도리어 그내들을 감복시켰다. 그 후 충주 목사(忠州牧使), 형조 참의(刑曹參議) 등을 역임하고, 1603년(선조 30)에 강원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가 되었다.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여헌 장현광(旅軒張顯光)이 찬(撰)한 실기(實記) 한 권이 있고, 군위(軍威) 오양서원(梧陽書院)에 제향되었다. <예천군읍지(醴泉郡邑誌)>들에 의하면, "정유재란(1597) 중에 중국의 마귀(麻貴)가 무장(武將)이므로 향교의 거룩함을 모르고, 향교의 대성전(大成殿)에 머물고자 하므로, 위패(位牌)를 모두 정산서원(鼎山書院)으로 옮기고, 대성전을 비워 주니, 마귀가 대성전 안에 들어섰는데, 이 때 대성전의 들보가 번득여 뒤집히면서 그 들보에 군수 이광준이 쓴 글씨가 뚜렷이 나타나고 먼지가 자욱하더니, 마귀가 잘못을 깨닫고 뜰 아래로 내려서자, 들보는 제자리를 잡아 다시 전과 같이 되었으나, 그 글씨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를 성전번량사건(聖澱飜樑事件)이라고 한다." 라고 했다. 또, <양양기구록(襄陽耆舊錄)>에 의하면, "왜추(倭酋)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가 알성(謁聖)하려 하자, 대성전의 대들보가 움직였다" 라고도 했다. 이광준의 둘째 아들 완(1586生, 字執卿)은 1610년(광해군 2) 식년 생원시에 2등 18위로 합격하였다.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입향조로서 산운리 금학산 아래 소시랑으로 옮겨 살면서 학동이라 자호하였다. 묘는 봉양면 심평동에 있고, 금성면 산운리 474번지에 그를 위해 세운 학록정사(鶴麓精舍, 地方有形文化財 第242號, 1989.5.29 指定, 正面 5칸, 側面 2칸, 木造瓦家 5棟)가 있는데, 문회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인터넷 my.netian 2001, 인터넷 ktd 2001)
이광준(李光俊) : 1531(중종 26)-1609(광해군 1), 명종 때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 자는 준수(俊秀), 호는 학동(鶴洞), 본관은 영천, 우암(牛岩) 세헌(世憲)의 손자,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다가 1562년(명종 17)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천 군수(醴泉郡守)를 거쳐,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지냈다. 임진왜란(1592) 때 강릉 부사(江陵府使)으로 임명되어 군공(軍功)이 있어 중화(中和)로 옮겼는데, 선정비(善政碑)를 군민(郡民)들이 세웠다. 그 후 충주 목사(忠州牧使), 형조 참의(刑曹參議) 등을 역임하고, 1603년(선조 30)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다.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여헌 장현광(旅軒張顯光)이 찬(撰)한 실기(實記)가 있고, 군위(軍威) 오양서원(梧陽書院)에 제향되었다. <예천군읍지(醴泉郡邑誌)>들에 의하면, "임진왜란(1592) 중에 중국의 마귀(麻貴)가 무장(武將)이므로 향교의 거룩함을 모르고, 향교의 대성전(大成殿)에 머물고자 하므로, 위패(位牌)를 모두 정산서원(鼎山書院)으로 옮기고, 대성전을 비워 주니, 마귀가 대성전 안에 들어섰는데, 이 때 대성전의 들보가 번득여 뒤집히면서 그 들보에 군수 이광준이 쓴 글씨가 뚜렷이 나타나고 먼지가 자욱하더니, 마귀가 잘못을 깨닫고 뜰 아래로 내려서자, 들보는 제자리를 잡아 다시 전과 같이 되었으나, 그 글씨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했다. 또, <양양기구록(襄陽耆舊錄)>에 의하면, "왜추(倭酋)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가 알성(謁聖)하려 하자, 대성전의 대들보가 움직였다" 라고도 했다.
이광준(永川李氏 監司公派 - 鶴洞先生 逸稿 飜譯 發刊) [記事] : 의성 큰 종중(宗中)의 하나이며 금성면 산운(山雲) 마을에 집성촌을 이룬 영천 이씨의 입향 시조인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1531~1609)의 문집「학동선생 일고」가 번역 발간됐다. 영천이씨 감사공파종회(종회장 이경식)는 의성고을 입향 450주년 기념사업으로 후세들이 조상의 깊은 뜻과 발자취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선조의 문집 국역 사업을 시작했는데, 첫 사업으로 완역 발간하게 된 것이다. 학동 선생은 1531년(조선 중종 26년) 군위 양곡(소보면)에서 수고당(守古堂) 여해(汝諧)의 5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혼인 후, 비봉산 자락에 터를 잡고 학문에 정진해 1562년(명종17년) 문과 별시에 급제했다. 성균관 학유, 안동․경주 교수, 성균관 박사․전적, 하동․창녕 현감, 형조 좌랑․정랑, 임천․예천 군수, 청송․강릉․중화 부사, 충주 목사, 형조 참의, 강원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를 지냈고, 노후에는 향리에서 후세 교육에 전념했다. 선생은 강릉 부사 시절, 임진왜란을 맞아 왜장 풍길성(豊吉成)을 대파해 동해안을 지켜냈으며, 1600년에는 장천서원이 병화로 퇴폐되어 빙산사 옛터로 중창 이건하고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합향, 빙계서원으로 개호했다. 슬하에 4남 1녀 중 두 아들(경정, 자암)이 대과에 급제하고 손․현손과 후손들이 나라의 인재로 뒤를 이어 교남 땅 큰 문중으로 성장해 영천이씨 감사공파의 파조(派祖)가 됐다. 산운 학록정사에 불천위로 제향됐으며, 묘소는 하현(霞峴)(봉양 신평리). 학동, 경정, 자암 3부자와 당대의 문장가 최립(崔?), 명필 한석봉(韓石峰)이 함께 금강산을 순행한 후 최립이 글을 짓고, 석봉이 쓴 '유금강산기'는 이정(李霆)이 대(竹)를 그리고, 이호민(李好閔), 이익(李瀷)이 발문을 보태 문․서․화 3절이 조화를 이룬 책을 만들었는데, 이를 '해동3절첩'이라 이른다. 선생 사후 당대의 문장, 문중과 교유한 글을 모아 7권 5책의 <학동일고문집>을 이뤘는데, 수정사 산방에 귀히 보관해오다 산방의 화재로 소실되어 애석한 일이다. 이번 문집은 그 후 남아있는 글을 모아 발간한 2권 1책을 번역한 것이다.(이대권 義城新聞 2005-08-01)
[선조실록] : 1573년(선조 6) 3월 14일 하동(河東) 현감을 이임하였고, 그 후 내자시 정을 거쳤다. 1592년(선조 25) 10월 6일에 강릉 부사로서 통정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1599년(선조 32) 4월 8일에 조부총(祖副摠)의 접반사 부호군을 이임하였고, 1599년(선조 32) 5월 25일에 충주 목사로 제수되었다. 1601년(선조 34) 3월 22일에 홍문관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홍문관에는 <사전춘추(四傳春秋)>가 산질(散秩)이 되어 전질(全秩)이 없습니다. 삼가 들으니, 전 목사 이광준의 집에 전질이 있다고 합니다. 경상도 감사에게 속히 알려 올려 보내도록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603년(선조 36) 1월 7일에 형조 참의에 제수되고, 동년에 강원도 관찰사에 올랐다.(司馬榜目, 文科榜目, 義城誌輯錄 1994, 慶北道文化財圖錄 1995)
[저서] : <학동선생문집(鶴洞先生文集 一)>(KDC 810.829, DDC 895.7 20판)이 있는데, 한국문집편찬위원회에서 편집하여 서울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1997년에 간행한 <한국역대문집총서> 2396권에 <유헌선생문집(幽軒先生文集)>(申吉暉), <간호선생문집(艮湖先生文集)>(崔攸之)과 합철되어 517쪽, 영인본(影印本), 23cm이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경북대, 경상대, 계명대(중앙), 부경대, 성균관대(서울), 신라대, 영남대, 원광대, 전남대, 충북대, 한양대(서울)이다.(keris 2001)
이광준 [記事] : 한국문집총간(039_050d) 백담집(栢潭集, 1670)에 실린 백담 구봉령(具鳳齡)의 예천군수(명종-선조 년간) 이광준(字 俊秀)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栢潭先生文集卷之三/ 五言律詩/ 竹嶺??臺。別主守裵汝友醴泉守李俊秀。/ 溪仙曾賞處。此地會吾君。碧岫一輪月。靑天幾片雲。古今人事改。離合路岐分。莫厭樽前醉。明朝別恨紛。臺是退溪先生所號”이다.(www.minchu.or.kr 2006)
이광준 [記事] : 한국문집총간(060_422b) 여헌집(旅軒集)에 실린 여헌 장현광(張顯光)의 예천군수(명종-선조 년간) 학동 이광준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觀察使鶴洞李公墓誌銘/ ...登壬戌文科。由成均學諭。例陞至典籍。歷刑曹佐郞正郞,河東昌寧縣監,林川醴泉郡守。時兩親俱在巍齡。公克致專...”이다.(www.minchu.or.kr 2006)
이광준 [記事] : 한국문집총간(082_096c) 자암집(紫巖集, 1741)에 실린 이민환(李民?)의 예천군수(명종-선조 년간) 학동 이광준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先考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鶴洞府君墓誌。/ ...。授成均館權知學諭慶州安東敎授。陞學錄學正博士典籍。拜刑曹佐郞,河東昌寧縣監,刑曹正郞,林川醴泉郡守。壬午...”이다.(www.minchu.or.kr 2006)
이광준 [記事] : 한국문집총간(200_137a) 성호전집(星湖全集, 1922)에 실린 신유한(申維翰)의 예천군수(명종-선조 년간) 학동 이광준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觀察使鶴洞李公行狀/ ...安東二府。歷學錄,學正,博士陞典籍。由刑曹佐郞出監河東,昌寧 二縣。復由刑曹正郞出守林川,醴泉二郡。公素...”이다.(www.minchu.or.kr 2006)
이광준 [記事] : 고전국역총서(1996 刊) 여헌집(旅軒集)에 실린 여헌 장현광(張顯光)의 예천군수(명종-선조 년간) 이광준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여헌선생속집 제8권/ 비(碑) 갈(碣) 지명(誌銘)/ 관찰사 학동(鶴洞) 이공(李公) 묘지명(墓誌銘)/ 공의 아드님인 전 군수(郡守) 민환(民?)이 공의 행장을 받들고 와서 묘지명을 요구하니, 나는 늙어 정신이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군수는 더욱 굳이 간청하였다. 이에 마지못하여 마침내 행장을 근거하여 요약하는 바이다./ 공은 성이 이씨(李氏)이고 관향이 영천(永川)이며 휘가 광준(光俊)이고 자가 준수(俊秀)이다. 선조에 휘 휘(暉)가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에 하란적(哈丹賊)을 토벌하여 공을 세워 별장(別將)에 제수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여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으며, 그 아드님인 영견(永堅)은 전공 판서(典工判書)였으니, 곧 공의 9대와 8대조이다. 몇 대 후에 영천으로부터 군위현(軍威縣) 서촌(西村)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증조의 휘는 종림(宗林)인데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되고, 조고의 휘는 세헌(世憲)인데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추증되고, 선고의 휘는 여해(汝諧)인데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으니, 3대가 추증된 것은 모두 공이 귀한 때문이었다. 선비(先?)는 일선 김씨(一善金氏)이니, 곧 판사(判事)인 휘 성미(成美)의 후손이고 휘 형손(亨孫)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 26) 7월 기미일에 출생하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뜻이 돈독하고 학문에 힘썼다. 임술년(1562, 명종 17)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로 있다가 준례에 따라 전적(典籍)으로 승진하고 형조(刑曹)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 하동(河東)과 창녕(昌寧)의 현감(縣監), 임천(林川)과 예천(醴泉)의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이 때에 양친께서 모두 고령(高齡)이셨는데, 공은 전성(專城)의 봉양을 지극히 하였다./ 만력(萬曆) 임오년(1582, 선조 15)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고 갑신년(1584, 선조 17)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다. 복을 마치자 청송 부사(靑松府使)에 제수되었으며,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과 내자시 정(內資寺正), 강릉(江陵)과 중화(中和)의 부사(府使),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와 충주 목사(忠州牧使), 형조 참의(刑曹參議)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내니, 이는 공의 이력(履歷)이다./ 기유년(1609, 광해군 1) 7월 아무 날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79세였다. 조정에서는 예조(禮曹)의 관원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하였으며, 다음해 정월에 의성(義城)의 서쪽 하현(霞峴)에 있는 태좌 진향(兌坐震向)의 언덕에 장례하였다./ 공은 천성이 강직(剛直)하고 방정(方正)하여 몸을 바르게 다스리니, 성균관에 있을 적에 많은 선비들이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에는 법을 지켜 강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강릉 부사(江陵府使)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왜구(倭寇)가 득실거리는 통에 여러 고을이 와해되었다./ 공은 힘을 가다듬고 군대를 다스려 반드시 지켜낼 계책을 세웠는데, 적장(賊將) 길성(吉成)이 격문(檄文)을 전하여 돌렸다. 그리하여 격문을 가진 자가 강릉부로 오자, 공은 즉시 목을 베게 하고는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산을 점거하였는데, 적병이 갑자기 몰려와 종일토록 힘을 다해 싸워 적을 무수히 목 베고 사로잡았다. 행재소(行在所)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가상하게 여겨 공을 포상(褒賞)하고 품계를 올려 주었으나, 뒤이어 본도(本道)의 순찰사(巡察使)가 공의 강직함을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장계(狀啓)를 올려 파직되었다. 이에 공은 곧바로 행재소로 달려갔다./ 이 때에 해서(海西)의 중화군(中和郡)은 적이 쳐들어오던 초기에 사사로이 서로 단결하여 왜적을 매우 강력하게 토벌하니, 이 때문에 난리에 피해를 입은 것이 더욱 혹독하였다. 조정에서는 충의(忠義)를 칭찬하고 특별히 부(府)로 승격시킨 다음 인하여 부사(府使)를 선임(選任)하도록 명하였는데, 공이 부의(副擬)로 제수되었다./ 공이 부임하니, 온 경내가 잿더미가 되어 창고에는 한 말의 곡식도 없었으며 명(明) 나라 원군(援軍)이 길에 이어져 군량을 공급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아울러 흉년과 질병이 유행하여 굶어 죽은 시신이 널려 있었다. 공이 궤주(潰走)하여 흩어진 관리와 백성들을 날짜를 정하여 즉시 모이게 하니, 감히 조금도 뉘늦은 자가 없었다./ 공은 마침내 자신의 옷과 음식을 줄이고 밤낮으로 주선하여 부상당한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굶주린 자들을 구휼하였다. 또 둔전(屯田)을 크게 설치하고 농기구들을 마련하여 주었으며, 병사들을 조련하고 군기(軍器)를 수리하였으며, 학교(學校)를 중건(重建)하고 공청(公廳)을 다시 세워 일이 모두 각기 조리가 있으니, 온 경내가 공을 부모처럼 떠받들고 마음을 다하여 명령을 따랐다./ 몇 년이 안 되어 도망했던 자들이 모두 돌아와서 백성과 물건이 번성하였으며 황무지를 모두 개간하여 창고가 충실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번 임금의 장려(獎勵)를 입어 특별히 비단의 겉감과 안감을 하사받았으며, 임기가 차자 또 3년을 더 유임(留任)하였다. 부(府)의 백성들은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였으며, 공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송덕비 아래에서 모여 곡(哭)하고 제물(祭物)을 올렸다./ 공은 관찰사의 임기가 차서 돌아온 뒤로부터 몇 십 년을 한가로이 놀며 여생을 보내었다. 비록 고령(高齡)이었으나 오히려 강녕(康寧)하여 노쇠한 기색이 없었으며, 두 아들이 조정에 벼슬하면서 자주 와서 근친(覲親)하고 조석으로 모셔 온화하고 유순하니, 보는 자들이 영화로 여기고 감탄하였다./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고려(高麗) 때 태사(太師)를 지내고 시호가 장절공(壯節公)인 휘 숭겸(崇謙)의 후손이며, 증조인 윤완(允完)은 현령(縣令)이고, 조고인 종보(宗輔)는 봉사(奉事)이고, 선고인 권(權)은 선무랑(宣務郞)이다. 부인은 집안을 다스림에 엄하면서도 법도가 있어서 여러 아들들을 교훈할 적에 한결같이 의로운 방법으로 지도하니, 향리(鄕里)의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부인은 가정(嘉靖) 기축년(1529, 중종 24)에 출생하여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 22)에 별세하니, 향년이 61세였다. 공의 묘소에 합장(合葬)하였으며,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인 민횡(民宖)은 승사랑(承仕郞)이고, 차남인 민성(民宬)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승지(左承旨)이고, 그 다음인 민환(民?)은 문과에 급제하여 전 군수(郡守)이며, 딸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결사(判決事)가 된 정사신(鄭士信)에게 출가하였다./ 승사랑은 부장(部將) 주명신(周命新)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선비인 김광악(金光岳)에게 출가하였다. 승지는 처음에 선비인 권문연(權文淵)의 딸에게 장가들고 뒤에는 찰방(察訪) 남이인(南以仁)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모두 소생(所生)이 없으므로 아우의 아들인 정기(廷機)를 길러 양자로 삼았다. 민환은 처음에 생원(生員) 이산악(李山岳)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 별세하였고 뒤에는 군수(郡守) 홍귀상(洪龜祥)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4녀를 낳았으니, 장남 정상(廷相)은 생원(生員)이고, 다음은 정숙(廷?)․정기(廷機)․정재(廷材)․정빈(廷彬)인데 모두 유학(儒學)을 공부하였으며, 장녀는 선비 이심(李?)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찰방 박공구(朴?衢), 진사 신홍망(申弘望), 선비 송세빈(宋世彬)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판결사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억(億)은 일찍 죽었고, 차남 식(?)은 진사이며, 장녀는 세마(洗馬) 유단(柳단)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선비 김시침(金時?)에게 출가하였다. 증손(曾孫)의 아들과 딸은 모두 약간 명이다./ 공은 강직(剛直)하고 밝고 단정하고 후중(厚重)하며 지식과 도량과 일을 주관하는 재주가 있어서 단지 백 리(百里) 정도만 다스릴 재주가 아니나 지위는 덕(德)에 걸맞지 못하였다. 그러나 장수를 누리고 복을 받은 것이 세상에서 견줄 사람이 드무니, 하늘이 공에게 복을 내림은 또한 후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시골 마을에서 일어나 / 起自鄕村/ 일찍 붉은 궁문(宮門)에 올랐으니 / 早?朱門/ 높이 발탁되었다고 이를 만하며 / 可謂擢也/ 여덟 번 고을을 맡아 / 八?專城/ 다스림에 반드시 명성이 있었으니 / 治必有聲/ 공적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 可謂績也/ 옷과 관을 옥으로 꾸미고 / 玉飾衣冠/ 방면의 벼슬을 맡았으니 / 方面任官/ 어찌 영달함이 아니겠는가 / 豈非達乎/ 녹이 후손들에게 미치고 / 祿及庭英/ 낳아 준 부모에게 추증을 하였으니 / 贈賁所生/ 어찌 빛남이 아니겠는가 / 豈非赫乎/ 세 아들이 항렬을 이루고 / 三胤成行/ 둘째아들과 셋째아들이 현양하니 / 仲季顯揚/ 경사가 발한 것이며 / 慶之發也/ 고령의 수를 누리고 / 壽享高齡/ 세상이 평화로울 때에 별세하였으니 / 終待時平/ 복이 더한 것이다 / 福之益也/ 내외의 손자가 있어 / 內外有孫/ 후손이 면면히 이어가리니 / 宜綿後昆/ 향화를 올림이 / 香火之陳/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 寧有熄哉/ [주D-001]전성(專城)의 봉양 : 한 성, 곧 한 고을을 모두 바쳐 봉양하는 것으로, 고을살이하면서 부모를 봉양함을 이른다./ [주D-002]부의(副擬) : 관직의 후보에 두 번째로 추천됨을 이른다. 옛날 이조(吏曹)에서 적임자를 세 사람 뽑아 올려 임금의 비점(批點)을 받았는데, 첫 번째로 주의(注擬)된 사람을 수망(首望)이라 하고 그 다음으로 주의된 사람을 부의라 하였다.” 이다.(www.minchu.or.kr 2006)
이광준 [記事] : 한국문집총간총목차 039집 백담집(柏潭集)에 실린 백담 구봉령(具鳳齡)의 명종 선조 년간의 예천군수 이광준(字 俊秀)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 50 送鶴駕僧遊楓岳 50 竹嶺??臺 別主守裴汝友 醴泉守李俊秀 50 次裴汝友金城東軒韻 5...”이다.(www.minchu.or.kr 2006)
이광준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140_0260/ 여지도서 / 慶尙道 / 義城 / 人物 / ...新增金光粹 高麗 上洛公 方慶後號松隱中弘治辛酉進士天性恬?風儀端?嘗遊太學見時象不佳卽辭歸未幾士林禍作自是謝絶擧業作十箴以自警平生口不道營産事取古人嘉言善行諷詠不輟婢?亦習聞而能傳之享藏待院祠 申元祿 高麗孝子祐後號悔堂從遊曹植 周世鵬門性至孝甫十歲父病登山採藥及喪廬墓終制事母務得歡心及歿又廬墓哀毁成疾而卒 國恤以素餐終三年周世鵬卒心喪三年 朝命旌閭 贈參議享藏待院祠 李光俊 號鶴洞登嘉靖壬戌文科除江陵府使倭寇充斥領兵出戰斬獲甚多事 聞增秩官至觀察使 文康公 張顯光題其墓曰篤志力學律已以正居官守法不畏强禦云 贈參判 李民宬 光俊子號敬亭登萬曆丁酉文科選湖堂光海朝在玉署箚論造?廢 母后之罪爲爾瞻所逐廢?十年癸亥 改玉奉使 皇都辨誣而歸華人敬其文學稱先生而不名官至左承旨享藏待院祠 李民? 民宬弟號紫巖登萬曆庚子文科入翰苑戊午深河/ <하권0417-4>/ 之役以從事官赴兵敗欲自裁爲虜所枸繫囚柵中十七月矢死不屈臥起常持本 國印信馬牌辛酉我 國刷還?夷虜感而出送癸亥 改玉被 知遇超遷至參...(www.history.go.kr 2007)
이광준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五 / 壬寅萬曆三十年上 / 四月 / 二十九日 庚申 / 李光俊拜驪州 李崑玉拜禮正 權協拜承旨 金順命拜司諫 鄭好仁拜金山 宋榮祚拜尼山 李瑩拜奉常正 丁好善拜注書 柳思規拜判決事 李晟拜造紙別提 韓致謙拜刑佐 李志完拜修撰 趙正立拜副應敎 李汝機拜奉常主簿 李舜民拜禮佐 安大進 申熟拜典籍 張晩拜奏請使 李用淳拜軍器判官○府啓奉常正 許昕人望素輕請遞○院啓驪州牧使 權恂年老?緩請遞金山郡守 禹拜善非徒發身...(www.history.go.kr 2007)
이광준 [記事] : 한국사료 총서/ 매원일기 / 梅園日記 三 / 丁未 / 五月 / 十九日 / 曉發, 往吊柳相于河回, 金士悅丈及李叔明在喪側矣, 又見柳?兄及柳原直, 途見李光俊父子․徐?, 將往花府, 中途日暮, 宿于奴家.(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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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