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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61-2:이광준(1563이후 부임-1571이전 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2.02.08 15:04:48

   예천고을원(61-2) : 이광준(1563이후 부임-1571이전 이임) : 예천향교 대성전 대들보에 글씨를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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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준 [記事] : 한국사료 총서/ 매원일기 / 梅園日記 八 / 丁巳 / 三月  / 十九日  / 食後柳元直持酒來見, 向晩注叔及子瞻同行, 到金溪 子瞻携入其家, 頓點心, 到周/ <상 313>/ 以老親?疾久不愈下針灸艾 / 泛舟遊於江上 / 村見?屬切親, 而暫見李光浚, 到烏川歷拜生員叔侍, 持酒强勸, 到家已?黑矣, 聞老親, 昨者體候不平, 寒熱往來, 有似??, 今日雖向歇云, 而憂悶不已.(www.history.go.kr 2007)

 

  이광준 [記事] : 명종실록 14권/ 명종 8년( 1553 계축 / 명 가정(嘉靖) 32년) 5월 15일 경신 1번째 기사/ 사헌부 내관 임계종을 형문하지 말고 후에 추고하게 하다/ 사헌부 내관 임계종(林繼宗)을 형신한 공사(公事)【임계종(林繼宗)이 자전(慈殿)의 뜻을 받들어 군위(軍威) 지방의 월영사(月影寺)에 불놓을 곳을 살피다가 품관(品官) 이광준(李光俊)의 선조 분묘가 있는 것을 보고도 그곳에 불을 놓아 분묘를 다 태우니 이광준의 아우가 허둥지둥 불을 끄자 임계종은 도리어 외람되고 무례하다고 하며 끌어다 결박을 하여 가두고 뇌물을 바치게 한 뒤에 또 죄를 결단하여 곤장을 쳤다. 그리하여 이광준이 그 원통함을 와서 호소하므로 헌부가 신문(訊問)하였으나 임계종이 그 죄를 자복(自服)하지 않으므로 다시 형신할 것을 청하였다.】를 정원에 내리며 일렀다. ꡒ우선 형신은 멈추고 군위 고을의 빙문(憑問)에 관한 회답을 받은 뒤에 다시 추고하라.ꡓ/ 사신은 논한다. 엄시(?寺)의 환란은 예전부터 있었으니, 크게는 군부(君父)를 폐립(廢立)하고 작게는 권병(權柄)을 절롱(竊弄)하였다. 이것은 오로지 인주가 지나치게 믿고 부렸기 때문이니 당나라의 멸망이 어찌 충분한 경계가 되지 않겠는가. 임계종은 임금의 명을 받들고는 자기의 사욕을 채웠는데 심지어 남의 분묘에 불까지 놓아서 무고한 이들에게 잔학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원망을 사는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지금 안으로는 환시(宦侍)가 악행을 저지르고 밖으로는 중이 횡포를 부려 백성의 피해가 극도에 달했다. 《서경(書經)》에 ꡐ백성은 오직 국가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하여야 국가가 편안하다.ꡑ 하였고, 또 ꡐ하늘은 우리 백성을 통해서 살피고 하늘은 우리 백성을 통해서 듣는다.ꡑ 하였으니, 이토록 백성들이 곤궁하고도 그 국가가 편안했던 적은 없었다./ 【영인본】 20 책 133 면/ 【분류】 *왕실-궁관(宮官) / *사법-재판(裁判) / *역사-사학(史學) / *사상-불교(佛敎)(www.history.go.kr 2007)

 

  이광준 [記事] :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1573 계유 / 명 만력(萬曆) 1년) 3월 14일 갑오 1번째 기사/ 하동 백성이 왜구에게 잡혀갔는데 보고하지 않은 현감 이광준 등을 추고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ꡒ하동(河東)에 사는 백성 9명이 적왜(賊倭)에게 잡혀간 것을 숨기고 아뢰지 않았으니, 현감(縣監) 이광준(李光俊), 우후(虞候) 정승복(鄭承復)은 나추(拿推)하고 수사(水使) 정걸(丁傑)은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소서.ꡓ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영인본】 21 책 258 면/ 【분류】 *외교-왜(倭) / *사법-탄핵(彈劾)(www.history.go.kr 2007)

 

  이광준 [記事] : 선조실록 31권/ 선조 25년( 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0월 6일 임진 7번째 기사/ 이해수․정창연․이곽․백유함․이상의․우준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해수(李海壽)를 대사간에, 정창연(鄭昌衍)을 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에, 이곽(李?)을 우부승지에, 백유함(白惟咸)을 세자 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이상의(李尙毅)를 세자 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에, 우준민(禹俊民)을 세자 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유몽인(柳夢寅)을 세자 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에, 이수일(李守一)을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이기빈(李箕賓)을 이천 부사(利川府使)에, 조경록(趙景祿)을 원주 목사(原州牧使)에 제수하고, 강릉 부사(江陵府使) 이광준(李光俊)을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을 통정 대부에 가자했다./ 【영인본】 21 책 551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7)

 

  이광준 [記事] : 선조실록 158권/ 선조 36년( 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1월 7일 갑자 2번째 기사/ 기자헌․서성․송언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기자헌(奇自獻)을【겉으로는 매우 순진해 보이지만 속은 신명(神明)스러워 세정(世情)에 대한 통찰력(通察力)이 있었다.】 이조 판서로, 서성(徐?)을 병조 판서로, 송언신(宋言愼)을 형조 판서로, 허성(許筬)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이거(李?)를 동지중추부사로, 이광준(李光俊)을 형조 참의로, 이선복(李善復)을 사헌부 지평으로, 소광진(蘇光震)을 사간원 정언으로 삼았다./ 【영인본】 24 책 439 면/ 【분류】 *인사(人事)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7)

 

  이광준 [記事] : 영천이씨 관찰사(諱광준)의 漢詩와 예천의 전설/ 글쓴이: 溪巖/ 2008.05.09 23:52/ http://cafe.daum.net/younglee.co/ 학봉일고(鶴峯逸稿) 제2권 / 나의 벗들 손을 잡고 남정에 가서(南亭携我友)/ 마주 보며 시냇가에 둘러앉았네(鼎坐碧溪濱)/ 삼년 만에 본 얼굴들 머리 하얀데(白髮三年面)/ 창파 건너 만리 먼 길 가는 나라네(滄波萬里人)//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 만났다(相逢如有約)/ 이별을 고하자니 맘 상하는데(告別却傷神)/ 다리 가의 수양버들 부산스러워(多事橋邊柳)/ 수심 지은 이마 역시 찌푸려지네(愁眉亦爲嚬)// [(예천의전설)명나라장수의 무례함을 혼내준 대성전의 대들보] : 예천향교는 흑응산 동쪽 송대 언덕에 있는 조선시대 공립학교로 초창년대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656년 군수 심유행, 1658년 군수 이휘조 등이 수 차례 중건한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건물로 보이며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동소문으로 공자 5성과 국내 8현을 비롯한 23성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정유년에 명나라 마귀(麻貴)라는 장수가 왜군을 토벌하기 위해 예천 고을에 주둔하려고 하니, 많은 군대를 수용할 만한 큰 건물이 없어 공자 위패를 모셔 놓은 향교의 대성전(大成殿)에 장졸들을 데리고 들어오려 하였다. 아무리 명나라 군사가 우리나라를 도와 준다고는 하나 그 당시 유림들은 자기네의 생명보다 더 떠받들어 모시는 공자님의 위패가 있는 대성전에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며, 마 장군(麻將軍)에게 몇 번이나 만류하면서 다른 장소로 정하자고 간청하였으나 무인(武人)인 마귀에게 대성전이 금기의 장소로 통할 까닭이 없었다. 유림들은 부득이 대성전 안에 모신 공자님의 위패를 위시한 모든 위패들을 정산서원(鼎山書院)으로 옮기었다. 이때 마 장군은 휘하에 많은 장졸을 거느리고, 위세 당당히 앞장서서 대성전 안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앉자마자, 갑자기 대성전 안에 있는 몇 아름이 넘는 굵고 큰 대들보가 벼락치는 소리를 내면서 뒤틀려 돌아갔다. 대들보의 뒤틀리는 소리에 그렇게도 거드럭거리던 마 장군은 혼비백산하여 단걸음에 대성전을 뛰쳐나와 달아나고 말았다. 대성전 대들보가 너무 굵고 커서 평소엔 그 안쪽을 볼 수 없었으나, 뒤틀어지는 바람에  그 안쪽을 살펴보니 군수 이광준(郡守 李光俊)이라고 쓴 글자 다섯 자가 보였다고 한다. 마 장군이 달아난 후 대들보는 안쪽으로 되돌아가서 차츰 제자리에 놓여지게 되면서 뒤틀어질 때 보였던 글씨도 그 후로는 보이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때 뒤틀려졌던 흔적이 대들보에 남아있다고 한다.(예천군청)(daum 2008)

 

  이광준 : 관찰사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2.가족 이야기/ 2009.03.31/ 관찰사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2.가족 이야기 조 : 이세헌(李世憲) 생부 : 이여해(李汝諧) 모 : 일선(一善) 김씨 김형손(金亨孫)의 딸 형제 : 이광언(李光?), 이광양(李光良) 집안이력 이광준의 본관은 영천이다. 그의 .../ http://cafe.daum.net/yclee/ 영천이씨대종여로(daum 2010)

 

   이광준 : 관찰사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1.생애 이야기| ▩―···永川李氏(역사자료)/ [溪巖]환암공파[영양군25세]/ 2009.03.31 20:09/ http://cafe.daum.net/yclee/ 성명 : 이광준(李光俊), 1531년 1609년, 본관 : 영천(永川), 자 : 준계(俊季), 호 : 학동(鶴洞),   출생지 : 의성(義城), 출신지 : 의성(義城), 분묘지 : 의성(義城) 하현(霞峴), 입사경로 : 1562년 별시 병과 급제, 내관직 :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 형조 참의(刑曹參議), 외관직 : 청송부사(靑松府使), 강릉부사(江陵府使), 중화부사(中和府使), 충주목사(忠州牧使),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증직 및 기타 : 가선대부 예조참판겸 동지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 禮曹參判兼 同知義禁府 春秋館 成均館事 五衛都摠府 副摠管)/ @왜적을 물리치다 : 이광준은 임진년(1592) 봄에 강릉부사(江陵府使)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왜구가 득실거리는 통에 여러 고을이 와해되었다. 공은 힘을 가다듬고 군대를 다스려 반드시 지켜낼 계책을 세웠는데, 적장 길성(吉成)이 격문을 전하여 돌렸다. 그리하여 격문을 가진 자가 강릉부로 오자, 공은 즉시 목을 베게 하고는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산을 점거하였는데, 적병이 갑자기 몰려와 종일토록 힘을 다해 싸워 적을 무수히 목 베고 사로잡았다. 행재소(行在所)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가상하게 여겨 공을 포상하고 품계를 올려 주었으나, 뒤이어 본도의 순찰사가 공의 강직함을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장계를 올려 파직되었다./ @뛰어난 목민관 : 임진왜란 당시 해서(海西)의 중화군(中和郡)은 적이 쳐들어오던 초기에 사사로이 서로 단결하여 왜적을 매우 강력하게 토벌하니, 이 때문에 난리에 피해를 입은 것이 더욱 혹독하였다. 조정에서는 충의(忠義)를 칭찬하고 특별히 부(府)로 승격시킨 다음 부사를 선임하도록 명하였는데, 이광준이 부의(副擬)로 제수되었다. 이광준이 부임하니 온 경내가 잿더미가 되어 창고에는 한 말의 곡식도 없었으며 명나라 원군이 길에 이어져 군량을 공급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아울러 흉년과 질병이 유행하여 굶어 죽은 시신이 널려 있었다. 그는 궤주(潰走)하여 흩어진 관리와 백성들을 날짜를 정하여 즉시 모이게 하니, 감히 조금도 늦은 자가 없었다. 이광준은 마침내 자신의 옷과 음식을 줄이고 밤낮으로 돌아다니면서 부상당한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굶주린 자들을 구휼하였다. 또 둔전(屯田)을 크게 설치하고 농기구들을 마련해주었으며, 병사들을 조련하고 군기(軍器)를 수리하였으며, 학교를 중건하고 공청(公?)을 다시 세워 일이 모두 각기 조리가 있으니, 온 경내가 공을 부모처럼 떠받들고  마음을 다하여 명령을 따랐다. 몇 년이 안 되어 도망했던 자들이 모두 돌아와서 백성과 물건이 번성했으며 황무지를 모두 개간하여 창고가 충실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번 장려를 입어 특별히 비단의 겉감과 안감을 하사받았으며, 임기가 끝나자 또 3년을 유임(留任)하였다. 부(府)의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워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였으며, 그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송덕비아래에 모여 곡하고 제물을 올렸다.

 

  @강직한 성품 : 이광준은 강직하고 방정하여 권세가에게 굴하지 않았다. 젊어서 참판(參判)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급제하여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심의겸이 이조 전랑으로 정권을 잡고 힘써 그를 추천하여 장차 청요직에 앉히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분을 끊고 왕래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하급관료로 주현(州縣)을 다스렸다. 고을을 다스릴 때 백성을 편리하게 하였고, 아전들을 단속하였으며 호족들을 제압하여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자자하였다.(daum 2010)

 

  이광준 : 빙계서원 복향식 및 학동 이광준(李光俊) 선조님/ 추가배향 고유행사 (06.06.21)/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산73-1번지/ 1556년(명종 11)에 회당(悔堂) 신원록(申元祿)이 창건하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봉향하였다. 창건 시에는 의성읍 장천(현 남대천 상류)에 위치하여 선조9년(1576년) 장천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선조 33년 학동 이광준(李光俊)이 춘산면 빙계리로 이전 후 晦齋 이언적(李彦迪)·西厓 류성룡(柳成龍) 鶴峯 김성일(金誠一)·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위패를 모셨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 2002년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착공한 복원공사가 마무리되어 지역유림의 뜻을 모아 이건의 공적을 기려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을 추가 배향함으로써 6현을 봉향하고 있다. (2006년 6월 21일)/ ○사업비:18억 6천만 원/ ○사업규모:건물9동, 주차장, 기타./ ○주요건물:사당, 강당, 문루, 삼문, 고직사, 서재, 화장실, 협문(daum 2010)

 

  이광준 : 永川李氏 선조님 문헌소개 2 : 학동일고: 이광준(李光俊)| ▩―···永川李氏(문서자료)/ [유장]행암공파[영양군24세]/ 2008.12.27 22:10/ http://cafe.daum.net/ 서명  학동일고 (鶴洞逸稿) : 저자 성명 이광준 (李光俊), 자 준수 (俊秀), 호 학동 (鶴洞), 판사항 木活字本, 간년 1959/ 권수 2/  광곽   四周單邊, 半葉匡郭 : 15×22, 有界, 10行20字, 註雙行/ 판심   上下向花紋魚尾, 上下白口/ 책크기   20×30cm/ 사부분류   별집류/ 학동일고』조선 중기의 문신, 이광준(李光俊 ; 1531∼1609)의 시문집이다. 이광준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준수(俊秀), 호는 학동(鶴洞). 성균관생원 세헌(世憲)의 손자이며, 여해(汝諧)의 아들이다. 성균관의 유생으로 1561년(명종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典籍), 형조좌랑(刑曹佐郞)·정랑(正郞)을 거쳐 하동현감(河東縣監), 창령현감(昌寧縣鑑)으로 나아갔다. 이어 다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내자시정(內資寺正)을 거쳐, 1592년 문무겸비라 하여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아갔다. 이 때 왜구가 대거 침입하여 여러 읍이 무너지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쳤다. 이 공으로 통정(通政)으로 승진하고, 1599년 충주목사(忠州牧使), 1603년(선조 36) 형조참의를 거쳐 강원도관찰사(江原都觀察使)를 역임했다. 그 뒤 모든 벼슬을 사직하고 구봉령(具鳳齡)과 더불어 덕의(德義)를 강론하며 지냈다.(daum 2010)

 

  이광준 : 학범정사 - 학동 이광준(鶴洞 李光俊) 공을 위해 세운 건물/ 2007.08.07/ 경북 의성군 금성면 산운1리 474/ 학록정사는 영천이씨 산운 입향조<山雲 入鄕祖>인 학동 이광준<鶴洞 李光俊> 공을 위해 세운 건물이며 공<公>은 창녕현감 예천군수를 지냈으며 1603년에는 강원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를 지냈다./ http://nexruby.tistory.com/ Ruby Tour 여행(daum 2010)

 

  이광준 : 의성 소우당(素宇堂)/ 2009.10.29/ 수정계곡 아래 검은 구름이 감도는 것이 보여 마을이름을 산운이라 하였다. 영천이씨의 입향조는 학동 이광준(李光俊)이며, 조선 명종 때부터 영천이씨가 산운리에 거주하게 되었다. 옛부터 산운, 수정을 茶上, 茶中, 茶下로 불렀다고 하나 .../ http://blog.naver.com/hanpig2000/ hanpig2000님의 블로그(daum 2010)

 

  이광준 : 영천이씨(永川李氏) 의성의 산운(山雲)마을/ 2009.11.16/ 영천이씨 집성촌으로 자리잡게 됐다는 것. 그때 입향조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던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이후 의성에서 대감마을로 불리면서 양반촌으로 이름을 알린다. 2대째인 이민성(李民宬)은 참의를 지냈는데 중국에서.../ http://blog.daum.net/jeon1954/ 여름과가을사이(daum 2010)

 

  이광준 : 의성 산운마을 점우당(漸于堂)/ 2009.03.31/ 연간에 영천이씨(永川李氏)가 처음 입향하였다고 전하며, 그 입향조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 1531~1609)이라 한다. 점우당은 현 소유주인 이병직의 증조부인 죽파(竹坡) 이장섭(李章燮)이 1900.../ http://blog.daum.net/kelim/ ▒☞ 계림의 국토박물관 순례 ☜▒(daum 2010)

 

  이광준(李光俊) [專門資料] : 발행처 한국국학진흥원/ 발행일 2009-01-23/ 자료소개  조선 중기의 문신, 이광준(李光俊 ; 1531∼1609)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준계(俊季), 호는 학동(鶴洞). 성균관생원 세헌(世憲)의 손자이며, 여해(汝諧)의 아들이다. 성균관의 유생으로 1561년(명종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典籍), 형조좌랑(刑曹佐郞)·정랑(正郞)을 거쳐 하동현감(河東縣監), 창령현감(昌寧縣鑑)으로 나아갔다. 이어 다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내자시정(內資寺正)을 거쳐, 1592년 문무겸비라 하여 강릉부...(daum 2010)

 

  이광준(李光俊) [專門資料] : 발행처 한국국학진흥원/ 발행일 2009-01-23/ 자료소개 : 조선 중기의 문신, 성균관생원. 1562년(명종17,壬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내자시정(內資寺正)을 거쳐 강릉부사가 되었으나,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행재(行在)에 갔다가 얼마 뒤에 충주목사가 됨. 1603년 형조참의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시고, 그 뒤에는 벼슬에 뜻이 없어 구봉령(具鳳齡)과 덕의(德義)를 강론하며 지냄. 1609년 죽음.(daum 2010)

 

  이광준(李光俊) [專門資料] : 점우당(漸宇堂)/ 금성면 산운마을은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이 입향한 후 400년을 넘게 영천이씨가 대를 이어 거주하는 곳이다. 점우당(漸于堂)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다. 말끔하게 정돈된 잔디마당과.../ 한국국학진흥원  | 2009.01.23(daum 2010)

 

  이광준(李光俊) : [시험관련 사항] : 왕/년도 : 명종(明宗) 17년, 과거시험연도 : 1562 임술, 시험명 : 별시(別試), 등위 : 병과15(丙科15)/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이광준(李光俊), 자 : 준계(俊季), 호 : 학동(鶴洞), 본관(本貫) : 영천(永川),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이력 및 기타 사항] : 전력(前歷) : 유학(幼學), 관직(官職) : 강원/감사(江原/監司)/ [가족사항] : 자(子) : 이민성(李民宬), 부(父) : 이여해(李汝諧), 조부(祖父) : 이세헌(李世憲), 처부(妻父) : 신권(申權)(daum 2010)

 

  이광준(李光俊) : 본관(本貫) 영천(永川), 시대(時代) (1531, 중종20-1609, 광해군 1), 자(字) 준계(俊季), 호(號) 학동(鶴洞)/ 이력(履歷) 영남문집 학동일고(鶴洞逸稿) 이광준(李光俊) : 부(父) 여해(汝諧) 거(居) 의성(義城), 2권1책, 행장(行狀) ; 김응조(金應祖) 찬(撰). 공(公)은 1531년(중종26) 출생, 별시(別試)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성균관학(成均館學).전적(典籍), 형조(刑曹)의 좌(佐)·정랑(正郞)을 거쳐 하동현감(河東顯監),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나아갔다. 이어 다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내자사정(內資寺正)을 거쳐 1592년 문무겸비(文武兼備)라 하여 조의(朝議)로 특선(特選)되어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아갔다. 이때 왜구(倭寇)가 대학(大學)침입(侵入)하여 열파(列파)이 와해(瓦解)됨에 창의(倡義)하여 왜적(倭賊)을 패주(敗走)시킴으로써, 통정(通政)으로 포상(褒賞) 증질(增秩)되었다. 이후 1593년 왜적(倭賊)으로 회신(灰燼)된 중화(中和)부사(府使)로 특선(特選)되었고, 1599년에는 충주목사(忠州牧使), 1603년에 강원관찰사(江原觀察使)를 엮임하였다.(daum 2010)

 

  이광준(李光俊) : 1531년(중종26,辛卯)∼1609년(광해군1,己酉).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준계(俊季), 호는 학동(鶴洞). 성균관생원 휘 세헌(世憲) 할아버지의 손자이시며, 처부(妻父) 휘 신권(申權), 부 휘 여해(汝諧) 할아버지의 아들이시다. 성균관의 유생으로  1562년(명종17,壬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내자시정(內資寺正)을 거쳐 강릉부사가 되셨으나,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행재(行在)에 가셨다가 얼마 뒤에 충주목사가 되셨다. 1603년(선조36,癸卯) 형조참의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시고, 그 뒤에는 벼슬에 뜻이 없어 구봉령(具鳳齡)과 덕의(德義)를 강론하며 지내셨다. 【참고문헌】宣祖實錄, 國朝榜目, 星湖文集(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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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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