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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65-2:유덕수(1575 부임-1577 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2.03.17 06:46:41

   예천고을원(65-2) : 유덕수(1575 부임-1577 이임) : 정산서원의 터를 닦은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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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덕수 : [[우리고을이야기]] 「砥柱中流碑」-<1>| ─ 晩濃 칼럼/ 文繡軒(가원)/ 2009.02.13 22:59/ http://cafe.daum.net/ 만농의 우리고을이야기「砥柱中流碑」-<1>/ 冶隱 吉再 선생을 追慕하기 위해 墓所 앞 洛東江 변 吳太洞에 仁同縣監 柳雲龍이 砥柱中流碑를 새워 동생인 西厓 柳成龍에게 碑文을 撰토록/ 이택용, lee7997@hanmail.net/ 등록일: 2008-11-08 오후 3:06:24/ ▲ 砥柱中流碑文을 쓴 西厓 柳成龍의 글씨와 오태동 낙동강변에 있는 경북유형문화재 제167호 砥柱中流碑/ 중국의 명필 楊晴川이 쓴 ‘砥柱中流’ 4자를 새기고 경상도관찰사 李山甫와 선산부사 柳德粹가 동참하여 세움/ 지주중류비/ 西厓 柳成龍/ 풍산후(豊山侯) 유운룡(柳雲龍)이 인동(仁同)을 다스린 지 3년에 길자<吉子, 길재(吉再)>의 무덤을 크게 수리하였다. 그 무덤의 좌측에는 높은 언덕이 있고, 앞에는 흐르는 낙동강을 굽어보며 뒤로는 오봉(烏峰, 금오산)을 의지하였으니, 넓은 들판은 뻗쳐 있고 안개 낀 모래밭은 아득하다.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여 점도 치고 계획을 세워 그 위에 서원을 짓고 사당을 세워 선생의 제사를 받들었다. 경상 감사 이산보(李山甫) 공과 선산 부사(善山府使) 사문 유덕수(柳德粹)가 이 일을 함께 찬동하여 설계하고 경영하여 그 넉넉지 못한 것을 도와주니, 일이 쉽게 이루어져 몇 달이 안 가서 준공을 보았다. 이때 그 앞에 비석을 세우고 중국사람 양청천(楊晴川)이 쓴 ‘지주중류(砥柱中流)’라는 4자의 큰 글씨를 새기게 하였다. 이 일이 끝난 뒤에 후(侯, 유운룡)가 그의 아우 성룡(成龍)에게 명하여, “내가 이것으로 선생의 절개를 밝혀서 후세의 교훈으로 삼으려는데 너는 그 뒤에다가 기록을 하라.” 고 말하였다. 성룡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지주(砥柱)의 뜻을 물으니, 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독(四瀆) 가운데서도 오직 황하가 제일 크다. 만일 그 물이 넘쳐흘러서 온 천하를 뒤덮으면 곤륜산(崑崙山)을 무너뜨리고 여량(呂梁)을 뚫고 용문(龍門)을 넘어 이수(伊水)ㆍ낙수(洛水)를 삼켜 양(梁) 나라와 송(宋) 나라의 들판을 휩쓸 것이다. 거센 물결이 진동하면 해와 별도 어두워지고 언덕과 골짜기가 뒤바뀌어 호호탕탕하게 가없이 넘쳐흐르니, 높은 산과 큰 언덕은 모두 물에 휩싸여 감히 높고 큰 체를 못하고 모든 만물이 일제히 휩쓸려 버린다. 그런데 여기에 한 돌이 우뚝하게 홀로 특출하게 빼어나서 거세게 용솟음치는 물결이 부딪쳐도 그 꺾고 무너뜨릴 만한 기세를 막아 내고, 모래와 돌이 삼키려 해도 그 견고한 것을 움직이지 못하며 큰 물결이 빠지게 하려 해도 그 높은 것을 덮지 못하니, 우뚝하게 높은 그 기상은 만고를 지나도 하루 같았다. 그래서 ‘지주’라 이름하였다. 대개 사물이 진실로 그러함이 있으면 사람도 마땅히 그러함이 있다. 나는 일찍이 옛날의 충신열사들이 변천하는 세파 속에서도 우뚝 솟아 그 뜻을 변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음을 보았다. 나라가 망하고 시정(市井)과 조정이 바뀌자 정직한 사람과 간사한 사람이 한데 어울리고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뒤섞인다. 그래서 앞에는 벼슬의 유혹이 있고 뒤에는 처벌의 두려움이 따르니, 사람들의 마음은 구차하게 면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세상의 도리는 벼슬하는 것만을 귀한 것으로 생각한다.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은 벼슬길에 매달리고 하류층에 있는 사람들은 초야에서 허덕이게 되니, 이러한 시대의 도도한 조류에서는 홀로 뛰어나기란 어렵다. 여기에 어떤 절개 있는 선비가 우뚝 떨치고 일어나 죽음으로써 올바른 도리를 지키며 그 한 몸으로 우주의 삼강과 오상의 무거운 책임을 졌다. 부귀도 그를 현혹시키지 못하고 빈천도 그를 움직이지 못하며 위엄과 무력이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니, 정의와 충절은 당대에 빛나고 그 교화와 명성은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이것으로 저것을 비유하면 그 누가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길 선생은 고려 말기에 벼슬을 하여 장차 망할 것을 미리 알고 구름 덮인 숲으로 은거하여 몸을 보전하였다.  성인이 나와 만물이 우러러보고 일월이 빛을 내고 산천이 모양을 고칠 때가 되어서는 전날 왕씨(王氏)의 문에 의지해 먹고 살던 자들은 분주하게 날뛰면서 뒤질까 걱정하였지만, 선생은 정색하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의리를 주창하며 자취를 감추어 문을 닫고 들어앉아 죽기로 맹세하고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 충성이 빛나는도다. 대개 천하의 큰 어려움을 당해서 천하의 큰 절개를 세우고 천하의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여 오직 금오산 한 구역에서 왕씨의 연호를 수십 년 동안 지켰으니, 아, 장하다. 그것이 참으로 지주(砥柱)였으니, 여기에서 그 뜻을 취하였다. 성룡이 말하기를, “선생의 절개는 높고 형님의 비유는 당연합니다. <한주 이진상 기념 사업회 이사 이택용>(daum 2010)

 

  정산서원(鼎山書院) : 위치 : 예천군 예천읍 생천리/ 예천군 유일의 사액서원/ 건축 : 1612년(광해군 4) 창건, 1677년(숙종 3) 사액, 1869년(고종 6) 훼철,/ 1934년 갑술년 낙동강 大홍수로 대부분의 건물 유실/ 배향인물 :  이황(李滉), 조목(趙穆)/ 배향일: 不享/ ▶ 해설 : 鼎山書院은 醴泉邑 生川洞 書院마을(中書里)에 所在하며, 사액서원으로 지금은 터만 남았다. 宣祖 9년 丙子(1576)에 郡守 柳德粹가 鄕內 儒生들의 建議를 받아들여 開基를 하였으나 完工치 못하고 이듬해인 宣祖 10년 丁丑(1577)에 郡守 安鳳이 完工했다고 鼎山書院記에 적고 있다. 이 때 서원건립에 中核的인 역할을 한 사람은 生員 林熙이다. 그 후 퇴계 이황과 月川 趙穆을 奉享하는 尊道祠를 광해군 4년 壬子(1612)에 세워 서원의 규모를 갖추었으며 肅宗 3년 丁巳(1677)에 사액이 내려졌다. 서원철폐령으로 두 선생의 위패는 묻었고 건물만 남았다가 1934년 甲戌洪水 때 대개 붕괴 또는 流失되었고 御書閣만이 남아 있었는데 이것마저 근년에 倒壞되었고 位土는 1987년 현재까지 남아서 鄕校가 관리하며 林生員의 時祭를 모신다. 규모는 明敎堂, 東·西齋, 永歸亭, 二樂樓와 御書閣, 尊道祠 등 7棟이 있다.

 

  【참고 1】정산서원의 터를 닦은 고을 원 柳德粹(?-1591)는 1575년(선조 8)에 부임, 1577년(선조 10)에 이임한 예천군수이다... 예천고을 원일 때인 1577년(선조 10) 봄에 예천읍 생천리의 정산서원 새터를 잡아 터를 닦고, 이 해에 물러났다... 이재 조우인이 유덕수 예천고을 원이 터를 닦은 정산서원을 세우기 위하여 서애 유성룡에게 편지를 올렸는데,... 『예천신문 2002년 12월 5일, 예천고을 원 조목, 장병창 논설위원』//【참고 2】정산서원을 완공한 고을 원 安鳳(1528-?)은 1577년(선조 10) 봄에 부임한 예천군수이다... 1577년에 예천군수로 부임하여 전임 군수 유덕수의 계획대로 힘써서 정산서원을 세웠다... 안봉이 완공한 정산서원은 예천읍 생천리 서원마을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1576년(선조 9) 군수 유덕수가 군내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터를 닦았으나 완공치 못하고 이듬해 군수 안봉이 완공했다고 <鼎山書院記>에 적고 있다...『예천신문 2002년 12월 5일, 예천고을 원 조목, 장병창 논설위원』 ...출처 :진성이씨 후손들이여!/ 글쓴이 : 松河22李翰邦(daum 2010)

 

  유덕수 : 문집명 서애집 (西厓集) (18)/ 2007.10.19/ 사당을 세운 류운룡의 부탁을 받고 지은 비문. 류운룡이 仁同 군수를 지내면서 감사 李山甫와 선산부사 柳德粹의 도움을 받아 준공하고 중국사람 陽晴川의 글씨로 ‘砥柱中流’ 4자를 새기고 류성룡에게 비문을 부탁한 것. 길재의.../ http://cafe.daum.net/ryukh/ 류경회(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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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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