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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68-1:곽율(1591 부임)
작성자장병창 @ 2012.04.07 06:45:03

   예천고을원(68-1) : 곽율(1591 부임) : 임란에 전사한 예천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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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율(郭율) : 1591년(선조 24)에 부임한 예천 군수이다. 1531(중종 26)-1597(선조 30), 현풍 사람, 자는 태정(泰靜), 호는 예곡(禮谷), 본관은 현풍, 참봉 지인(之仁)의 아들, 익ㆍ숙의 동생, 장의 형, 연일당(燕日堂) 곽지운(郭之雲)ㆍ남명(南溟) 조식(曺植)ㆍ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제자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자질이 뛰어나 스스로 외전을 탐구하고 경전을 송습(誦習)하여 판서 정사중(鄭思中)은 그의 인품에 감탄하여 조카 사위로 삼았다.

  부모 슬하(具慶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558년(명종 13) 식년 생원시에 3등 61위로 합격, 1572년(선조 5)에 성균관의 천거로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로 처음 벼슬하기 시작하여 김천도 찰방(金泉道察訪, 1573)과 송라도 찰방(松羅道察訪), 내섬시 직장 등을 거쳐 1586년(선조 19) 학행으로 사포시 별제(司圃寺別提)로 특진하고, 홍산 현감(鴻山縣監)이 되어 지성으로써 백성들을 다스렸다.

  이에 관찰사 이성중(李誠中), 어사 유대진(유大進)의 포계(褒啓)로 특히 옷감을 하사받았고, 군자감 판관을 거쳐 다시 1591년(선조 24)에 예천 군수에 오르고, 이듬해인 1592년(선조 25)에 초계 군수(草溪郡守)일 때 임란을 당하여 왜군을 방어한 공이 컸다.

  즉 1592년(선조 25) 6월 1일 전(前)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했는데, 곽율 등과 향병(鄕兵)을 모집하였다.

  동년 6월 28일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기를, "현풍에 사는 전 군수 곽율 등과 더불어 향병을 모집하니, 따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동년 7월 6일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김성일의 서장에 전 군수 곽율이 향병을 불러 모았는데, 승서(陞敍) 하소서." 하니, 왕이 따랐다.

  동년 8월 1일에 왕이 교서하기를, "곽율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무리를 규합했다 하니, 경상도의 충성과 의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았다 하겠다." 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예빈시 부정으로 특진되었으나 초계 군내의 유생 정유명(鄭惟明) 등의 유임 상소로 초계 군수에 재임되어 왜군을 방어 강우(江右) 지역 방어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학문을 즐겼고 순결하고 정직하여 가는 곳마다 임지마다 학풍을 일으켰고, 풍속을 순화하는데 힘썼다.

  정유재란(1597) 때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과 함께 호남의 목구멍이라던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호상(胡床)에 걸터앉아서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무저항으로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 이상(履常), 이후(履厚)도 그 아버지를 안고 적을 꾸짖다가 죽음을 당했고, 딸 이문호(李文虎)의 아내도 남편이 포로가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일문삼강(一門三綱)>의 가문으로 일컬어져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세워 표창하였다.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예곡문집>이 있는데, 1책, 목판본이다. 1800년(정조 24)에 후손 곽진규(郭鎭奎)가 흩어져 있던 유고들을 모아 한문으로 발간한 것이다. 책머리에는 이가환(李家煥), 정종로(鄭宗魯)가 쓴 서문(序文) 및 세계도(世系圖), 책 끝에는 이원조(李源祚)가 쓴 발문(跋文)과 유묵(遺墨)이 실려 있다.

  권상(卷上)에 시(詩) 1수, 서(書) 8편, 유문(諭文) 2편, 발(跋) 1편, 잡저(雜著) 2편이 있고, 부록인 권하(卷下)에는 증여시(贈與詩) 2수, 서(書) 3편, 제문(祭文), 행장(行狀), 묘지명(墓誌銘), 만사(輓詞), 묘갈명(墓碣銘), 봉안문(奉安文), 축문(祝文) 각 1편, 보유(補遺) 등이 수록되어 있다.

  보유에는 이로(李魯)가 지은 <포산지(苞山志)>, <용사일기(龍蛇日記)> 등에서 뽑아 모은 곽율의 행적에 관한 글이 수록되었다. 임진왜란을 연구하는데 참고 자료가 된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94년에 13세손 군수 곽경열 등이 교장 이호응의 국역으로 출판하였다.(東儒師友錄, 司馬榜目, 宣祖實錄, 인터넷 Alta vista 2001, 인터넷 야후 2001, 두산세계대백과사전, 韓國의 族譜, 國史大事典, Lycos 2001, 인터넷 anyroot 2001, 인터넷 hakane 2001, 每日新聞 1994.4.13)

 

  곽율 [記事] : 한국문집총간 외재집(畏齋集, 1744)에 실린 이후경(李厚慶)의 예천군수(1591 赴任) 예곡 곽율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有明朝鮮國通訓大夫。禮賓寺副正禮谷先生郭公行狀。/ ...六月。秩滿。陞授軍資監判官。縣民立石頌德焉。就職月餘。除醴泉郡守。下車之初。先致誠於學校書院。勸課儒仕。...”이다.(www.minchu.or.kr 2006)

 

  곽율 [記事] : 한국문집총간(128_468a) 갈암집(葛庵集, 1909)에 실린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예천군수(1591 赴任) 예곡 곽율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通訓大夫禮賓寺副正禮谷郭公墓碣銘/ ...。觀察使上其功狀。御史褒其政爲諸郡最。於是賜表裏以嘉之。秩滿。陞授軍資監判官。俄出爲醴泉郡守。其爲治一如...”이다.(www.minchu.or.kr 2006)

 

  곽율 [記事] : 한국문집총간(211_112a) 약산만고(藥山漫稿, 1924)에 실린 오광운(吳光運)의 예천군수(1591 赴任) 곽율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禮谷郭公墓誌銘/ ...。敦崇儒敎。水旱而民不死。觀察使,御史。一辭褒之最諸郡。 賜表裏。陞軍資監判官。俄出爲醴泉郡守。其治如鴻。...”이다.(www.minchu.or.kr 2006)

 

곽율 : 예천 군수(1591-1592)이다. 1531(중종 26)-1593(선조 26), 자는 태정(泰靜), 호는 예곡(禮谷), 본관은 현풍, 참봉 지인(之仁)의 아들, 익ㆍ숙의 동생, 장의 형, 조식(曺植)ㆍ정구(鄭逑)ㆍ이중호(李仲虎)ㆍ곽지운(燕日堂郭之雲)의 제자, 부모 슬하(具慶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558년(명종 13) 식년 생원시에 3등 61위로 합격하였다. 1572년(선조 5)에 성균관(成均館)의 천거로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로 처음 벼슬하기 시작하여 김천도 찰방(金泉道察訪), 내섬시 직장(內贍寺直長), 송라도 찰방(松羅道察訪) 등을 거쳐 1586년(선조 19) 학행(學行)으로 사포서 별제로 특진되었다. 이어 홍산 현감, 군자감 판관을 거쳐 1591년에 예천 군수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초계 군수에서 예빈시 부정으로 특진되었으나 군내의 유생 정유(鄭惟) 등의 유임 상소로 초계 군수에 재임되어 왜군을 방어, 강우(江右) 지역 방어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학문을 즐겨 임지마다 학풍을 일으켰고, 풍속을 순화하는 데 힘썼다. 63세에 타계하니, 현풍(玄風)의 도동서원 별사(道東書院別祠)에 제향(祭享)되었다(司馬榜目, 야후! 百科事典). [인터넷] : 임진왜란(1592) 때 초계(草溪) 군수로 있으면서 왜군 방어를 잘하여 예빈시 부정으로 특진되었으나 군내의 유생들이 유임시켜 달라는 상소로 초계 군수에 재임되어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이 “팔도 고을이 초계만 같다면야...“ 하고 개탄했을 만큼 선정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김면(金沔)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 막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1597) 때는 안음(安陰) 현감으로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과 함께 호남의 목구멍이라는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호상(胡床)에 걸터앉아서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는 무저항으로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 이상(履常), 이후(履厚)도 그 아버지를 안고 적을 꾸짖다가 죽음을 당했고, 딸 이문호(李文虎)의 아내도 남편이 포로가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일문삼강(一門三綱)‘의 가문으로 일컬어져 나라에서 정려를 세워 표창하였다.(my.dreamwiz.com 2003)

 

  곽율(郭율) : 예천 군수이다. 1531(중종 26)~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태정(泰靜), 호는 예곡(禮谷), 아버지는 참봉 지인(之仁),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72년 성균관의 천거로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노모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원하여 김천 찰방으로 전직되었다가, 내섬시 직장․송라 찰방을 역임하고 1585년 학행으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특진되었다. 이어 홍산 현감․군자감 판관을 거쳐 예천 군수로 있던 중 파직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 의해 초계군(草溪郡)의 임시 수령으로 기용되어 왜군과 싸웠으며 곧 예빈시 부정으로 전직 명령이 내렸으나, 유생 정유명(鄭惟明) 등의 유임 상소에 의해 초계 군수로 유임되어 강우(江右) 지역의 보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학문을 즐겼고 사람됨이 순정하여 가는 곳마다 학풍을 일으켰으며, 찰방으로 있을 때에는 풍속을 순화하였다.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에 제향되었다.(宣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東儒師友錄, 淸選考, 金鎔坤(韓國學中央硏究院))

 

  곽율 : 예천 군수이다. 예곡선생문집(禮谷先生文集)은 곽율(郭(走+日) ; 1531~1593)의 시문집이다. 곽율의 자는 태정(泰靜), 호는 예곡(禮谷),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이 책은 1800년(정조 24) 후손 진규(鎭奎)가 편집․간행하였다. 유문에는 임진왜란 중에 저자가 관장(官長)으로 있던 초계군(草溪郡)의 변덕수(卞德壽)라는 자가 곽재우(郭再祐)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관내 의병장 이대기(李大期)․전치원(全致遠)에게 우선 국난극복을 위하여 중지를 모으고 그를 설득하라는 내용의 「여초계내외면 의장설학이대기탁계전치원(與草溪內外面義將雪壑李大期濯溪全致遠)」과, 초유사(招諭使)를 대신하여 현풍(玄風)의 유지들에게 국난에 적극 대처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대초유사유현풍임사제인(代招諭使諭玄風任司諸人)」이 있다. 서(書)의「여초유사성일김학봉(與招諭使誠一金鶴峯)」과 잡저의 「팔계일기(八溪日記)」․「견문록(見聞錄)」 등은 당시 초계를 중심으로 한 영남지방의 임진왜란사 연구에 참고자료가 된다. 부록의 보유에는 이로(李魯)의『용사일기(龍蛇日記)』․『포산지(苞山志)』등에서 채록한 저자의 행적에 관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곽율은 155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2년 성균관의 천거로 조지서(造紙署) 별제(別提)에 초임, 김천도(金泉道) 찰방(訪), 내섬시(內贍寺) 직장(直長), 송라도(松羅道) 찰방 등을 지냈다. 1586년 사포(司圃)로 특진되고, 홍산 현감(鴻山縣監), 예천 군수(醴泉郡守) 등을 지냈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초계 군수(草溪郡守)에서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으로 특진되었으나 도내 유생 정유명(鄭惟明)등의 만류하는 상소로 초계 군수에 유임, 왜군을 방어했다. (http://www.koreastudy.or.kr 2005)

 

  곽율 [記事] :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 병진 4번째 기사/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치계하였다. ꡒ신은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한데 특별히 천지같은 재생(再生)의 은혜를 입어 형벌을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초유(招諭)의 책임을 맡겨주시니, 신은 명을 받고 감격하여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리면서 이 왜적들과 함께 살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지난달 29일에 직산(稷山)에서 남쪽으로 달려가 이달 5일에 공주(公州)에 도착하였는데, 대가가 서쪽으로 행행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비록 도보로라도 호종의 대열에 끼어 말굴레 밑에서 죽고자 하였으나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신은 의리로 보아 차마 물러나 앉아 있을 수 없어 빈주먹으로라도 김수(金?)를 따라 싸움터에서 죽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초유의 명을 받았으니 마음대로 임무를 저버릴 수 없어 백성들을 혈성(血誠)으로 개유(開諭)하고 충의(忠義)로써 격려하면 작은 힘이나마 얻어 나라를 위하는 신의 마음을 바칠 수 있겠기에, 잠시 죽음을 참고서 구차스럽게 모진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본도(本道)에 함락되어 패전한 뒤에 무너져 사방으로 흩어진 자들이 도망한 군사나 패전한 병졸만이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대소 인원들이 모두 산속으로 들어가 새나 짐승처럼 숨어 있으니 아무리 되풀이해서 알아듣도록 설득해도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일에는 고령(高靈)에 사는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 합천(陜川)에 사는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그의 동지인 현풍(玄風)에 사는

  전 군수(郡守) 곽율(郭?), 전 좌랑 박성(朴惺), 유학(幼學) 권양(權瀁) 등과 더불어 향병(鄕兵)을 모집하니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인홍은 정예병(精銳兵)이 거의 수백 명이며 창군(槍軍)은 수천 명이나 되는데 고을의 가장(假將) 손인갑(孫仁甲)을 추대하여 장수로 삼아 왜적을 방어할 계책울 세우고 있고, 삼가(三嘉)에 사는 훈련 봉사(訓鍊奉事) 윤탁(尹鐸), 전 봉사(奉事) 노흠(盧欽)도 의병(義兵)을 일으켜 서로 응원하려고 합니다. 김면은 스스로 장수가 되어 바야흐로 병사들을 모집하는데, 적병들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니 왜적들이 패전하여 달아나므로 10여 리를 추격하여 거의 대첩(大捷)을 거두려는 찰나에 복병(伏兵)이 갑자기 나타나니 우리 군사가 놀라 무너져 퇴각하였습니다. 순찰사가 전 현령 조종도(趙宗道)로 하여금 소모관(召募官)을 삼으니 제법 많은 인민을 불러모아 여러 일들을 수습하였습니다. 또 의령(宜寧)에 사는 고 목사(牧使) 곽월(郭越)의 아들인 유생(儒生) 곽재우(郭再祐)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위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켜 초계(草溪)의 빈 성(城)으로 들어가 병장기(兵仗器)와 군량을 취득하니, 이때 동현(同縣)에 사는 정대성(鄭大成)이란 자가 무리를 모아 도적질을 하였으므로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은 재우까지 도적으로 의심하여 감사(監司)와 병사(兵使)에게 급히 통보하였습니다. 이에 감사와 병사가 마침내 명령을 내려 대성을 사로잡아 참수하니, 재우의 병사도 흩어졌습니다.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이 그는 도적이 아니라고 말하자 감사(監司) 김수(金?)는 전현룡의 말을 믿지 않고 신으로 하여금 초유하도록 하기에 신이 즉시 공첩(公貼)을 보내어 재우를 부르니 며칠 뒤에 단성현(丹城縣)으로 신을 찾아 왔습니다. 그 사람은 비록 담력(膽力)과 용맹은 있으나 심원한 계책이 없으며 또 당치도 않게 큰 소리만 잘 칩니다. 패주한 수령(守令)이나 변장(邊將) 등의 소식을 들으면 꼭 참수(斬首)하라고 하여 심지어는 감사와 병사에 대해서도 불손한 말을 많이 하니 그를 비방하는 말이 비등하여 미친 도적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이런 사람을 잘 다루어 쓰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기에, 즉시 동현(同縣)으로 보내 돌격장(突擊將)으로 칭호하여 그로 하여금 왜적들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였더니 재우는 그 아비가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에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 철릭(帖裏)을 입고서, 지금 장사(將士)들을 거느리고 의령현의 경내 및 낙동강 가를 마구 누비면서 왜적을 보면 그 수를 불문하고 반드시 말을 달려 돌격하니, 화살에 맞는 적이 많아서 그를 보면 바로 퇴각하여 달아나 감히 대항하지 못합니다. 왜적에게 사로 잡혔던 사람이 돌아와 ꡐ왜적들이 「이 지방에는 홍의 장군(紅衣將軍)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고 했다.ꡑ 합니다. 그러므로 의령 한 고을 사람들이 그에 힘입어 조금 편안해졌습니다. 신은 비록 그의 거친 것을 의심합니다마는 격려하고 권장하여 힘을 다하도록 하여 서서히 그의 하는 바를 살피겠습니다.../ ☞(www.history.go.kr 2007)

 

  곽율 [記事] :선조실록 28권/ 선조 25년( 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7월 6일 계해 6번째 기사/ 비변사가 첨사 김원룡과 훈도 강욱의 징계와 곽율의 승서를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ꡒ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사대부가 군부(君父)의 위급을 무시한 채, 달려와 구하려는 뜻이 없습니다. 대가(大駕)가 이곳에 온 지 벌써 오래되었는데, 인산 첨사(麟山僉使) 김원룡(金元龍)과 본주(本州)의 훈도(訓導) 강욱(康昱)은 모두 경내(境內)의 관원이면서도 와서 현신하지 않으니 그 죄가 큽니다. 김원룡은 본주에 충군(充軍)시키고 강욱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을 징계시키소서. 김성일(金誠一)의 서장(書狀)에 전 군수 곽율(郭?)과 유학(幼學) 권양(權瀁)이 향병(鄕兵)을 불러 모았는데 의거(義擧)를 일으킬 만하다고 하니, 곽율은 승서(陞敍)하고 권양은 관직을 제수하여 권장하소서.ꡓ하니, 상이 따랐다./ 【영인본】 21 책 514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곽율 [記事]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1일 기축 34번째 기사/ 전 장령 정인홍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인홍은 평소 시골의 선비와 주민들로부터 외경의 대상이었다. 좌랑 김면(金沔), 전 현감 박성(朴惺), 유생 곽준(郭?)․곽율(郭?) 등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했는데, 전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얻어 중군(中軍)을 삼았다. 인갑은 무용(武勇)이 절륜했는데 군진(軍陣)을 달리하면서도 인홍의 명령을 받았다. 인갑이 먼저 무계(茂溪)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군량을 태우고 돌아왔다. 중국 조정에서 호군(?軍)726) 할 비용으로 은(銀) 2만 냥을 내렸다. 당시 요동 사람이 유언 비어를 퍼뜨리면서 전하기를 ꡐ조선이 왜국과 함께 반역하여 거짓으로 가짜 왕을 삼아 인도하여 온다.ꡑ고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먼저 임세록(林世祿) 등을 파견하여 평양에 와서 탐지하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상이 평양을 떠남에 미쳐 연달아 요진(遼鎭)에 자문을 보내 비빈(妃嬪)․자녀․배신(陪臣)을 이끌고 내부(內附)하기를 청하니, 요동 순무 어사 학걸(?杰)이 주본(奏本)을 올리기를, ꡒ총병 동양정(?養正)의 품보(稟報)를 받았습니다. 조선이 대국(大國)이라고 일컬으면서 대대로 동번국(東藩國) 노릇을 하여 왔는데 한 번 왜적의 침입을 받자 소식만 듣고서 도망쳤습니다. 혹시라도 그 나라가 사직을 보전하지 못하고 갑자기 달려올 경우, 수신(守臣)의 입장에서 거절하자니 그들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어 속국의 신뢰하는 마음을 잃게 될 것이고, 받아들이자니 사체가 가볍지 않아 신자(臣子)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왜노(倭奴)들은 간사한 꾀가 비상하여 중국 사람도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가 많습니다. 만약 간사한 생각을 품고 마구 들어온다면 해를 끼치는 것이 보통이 아닐텐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ꡓ하였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복제(覆題)하기를, ꡒ해진(該鎭)에서 사람을 차출하여 조선으로 보내서 조정의 지극한 뜻을 선유(宣諭)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조선이 도망해 오면 나라를 회복할 기약이 없게 되어 왜적이 마침내 조선을 점거하게 될 것이고, 굳게 지키면 구원병도 기대할 수 있어 왜적이 자연 패하여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들 지역의 요해처에서 머물며 천병(天兵)의 구원을 기다리게 하소서. 그리고 본국에 유시하여 배신(陪臣)들을 많이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불러모아 옛 강토를 회복할 계책를 삼아 패몰(敗沒)하지 않도록 하고 만일 해국(該國)이 위급해서 도망해 오기를 청한다면 전적으로 거절하기는 어려우니 마땅히 칙령(勅令)을 내려 받아들이되 인원이 1백 명을 초과하지 않도록 하소서.ꡓ하였는데, 황지(皇旨)를 받드니, 황지에, ꡒ왜적이 조선을 함몰(陷沒)시켜 국왕이 도피하였으니, 짐(朕)은 매우 측은하게 여긴다. 구원병을 일단 파견하고 사람을 차견하여 그 나라 대신들에게 선유(宣諭)하되,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수호하고 각처의 병마(兵馬)를 속히 결집하여 성지(城池)를 굳게 지키며 요해처에 웅거하여 힘껏 회복을 도모하도록 하라. 어떻게 앉아서 망하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ꡓ하였다. 성지(聖旨)가 특별히 내렸는데도 요진(遼鎭)에서는 여전히 의심이 풀리지 않아 송국신(宋國臣)을 보내 국왕의 진위(眞僞)를 실제로 알아보게 하였다. 국신이 돌아가 확실히 진짜 임금이고 가짜 임금이 아니라고 보고하자 요진에서 비로소 믿게 되었다. 중국 조정의 의논 역시 구구했는데 석성(石星)은 구원하기로 결심하였다. 우리 나라의 사신 신점(申點)이 당시 회동관(會同館)에 있었는데, 석성이 뜰로 불러서 요동에서 변고를 보고한 문서를 꺼내어 보여주자 신점이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며 아침저녁으로 찾아가 병부(兵部)에 정문(呈文)하여 먼저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유몽정(柳夢鼎)도 그 뒤를 이어 도착했는데 통곡을 하며 병부에 호소하여 구원병을 속히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석성이 그 뜻에 감동하여 모두에게 답서를 보내 위유(慰諭)하면서 그들을 신포서(申包胥)에 비유727) 하였다. 석성의 뜻이 더욱 굳어져 병부가 주청하여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니 상이 용만관(龍灣館)에서 맞이하여 보았다. 응양이 왜의 서신을 요구하여 증험하려 하자, 이항복이 지난 신묘년728) 에 통신사(通信使)가 가지고 온 왜의 서신을 미리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꺼내어 보였다. 그 중에는 이미 자문(咨文)과 주문(奏文)으로 보냈던 내용도 들어 있었는데, 황응양이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ꡒ조선이 상국(上國)을 대신하여 침략을 당하였는데도 의로운 소문은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나쁜 이름만 뒤집어 썼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ꡓ하고는, 드디어 돌아가 병부에 보고하니, 석성이 크게 기뻐하여 조선을 구원하는 의논이 결정되었다./ 【영인본】 25 책 620 면/ 【분류】 *군사-전쟁(戰爭) / *군사-특수군(特殊軍)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인물(人物) / *왕실-행행(行幸)/ [註 726]호군(?軍) :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 ☞ / [註 727]신포서(申包胥)에 비유 : 오(吳)나라가 초(楚)나라를 침략하자 초나라 신하 신포서(申包胥)가 진(秦)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러 가 뜰에서 7일 동안 울었더니 진나라에서 그의 충성심에 감동되어 출병했던 고사. 《사기(史記)》 권66 오자서 열전(伍子胥列傳). ☞ / [註 728]신묘년 : 1591 선조 24년. ☞(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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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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