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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68-2:곽율(1591 부임)
작성자장병창 @ 2012.04.14 06:46:46

   예천고을원(68-2) : 곽율(1591 부임) : 임란에 전사한 예천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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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율 [記事]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1일 무자 7번째 기사/ 상이 유생 양산숙을 공조 좌랑에 임명하고 호남․영남에 유시하는 교서 2통을 내리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유생 곽현(郭玄)․양산숙(梁山璹)을 보내어 바닷길을 따라 관서(關西)에 들어가 행조(行朝)에 일을 아뢰었다. 양산숙이 또 상소하여 계책을 올리니, 상이 자주 인견(引見)하여 위유하며 공조 좌랑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호민(李好閔)으로 하여금 교서(敎書) 2통(通)을 짓게 하여 양산숙에게 부쳐 보냈다. 하나는 호남에 유시하는 것으로 그 대략에, ꡒ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다시 남쪽을 바라보며 구원을 기대하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절도사 최원(崔遠)과 함께 수원(水原)으로 진주(進駐)했다 한다. 부덕(不德)한 내가 어떻게 이토록까지 사람들이 사력을 다하게 할 수 있었는가. 이제 양산숙 등을 보내어 돌아가서 알리게 하니 그대들은 내가 알리는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 내가 비록 인애(仁愛)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정치에 실수한 것이 많았다 하더라도 본래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어여삐여기는 것으로 뜻을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궁중이 엄밀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조그마한 이익까지도 거둬들이고 형옥(刑獄)이 중도를 상실하여 원통한 기운이 화기를 손상케 하였으며, 왕자(王子)가 이익을 독점하여 소민(小民)들이 생업을 잃게 하였으니, 백성들이 나를 허물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이제 유사(有司)로 하여금 모두 혁파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무릇 이러한 유(類)를 내가 어찌 역시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겠는가.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도 나의 잘못이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아무리 뉘우친들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 사민(士民)들은 내가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다스리려는 것을 허락하기 바란다.ꡓ하고, 또 이르기를, ꡒ나라의 운명이 험난하여 내가 이제 올 데까지 다 왔으니 용만(龍灣)의 한 모퉁이에서 앞으로 어디로 가겠는가. 인정이 극도로 곤궁해지면 회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서늘한 가을 기운이 조금 움직이는데 변방은 벌써 추워진다. 저 장강(長江)을 보니 역시 동쪽으로 흐르는데, 돌아가려는 한 생각이 흐르는 강물처럼 왕성하다.ꡓ하고, 또 이르기를, ꡒ하늘이 이성(李晟)734) 을 탄생시키니 성궐(城闕)을 회복할 기약이 있었고, 날마다 장소(張所)735) 를 기다리니 원릉(園陵)에 흠이 없음을 아뢰었다. 가뭄에 비를 바라듯 하는 마음에 속히 부응하여 나의 어려운 고생살이를 면하게 하라.ꡓ하였다. 하나는 영남의 사민(士民)에게 유시하는 것으로 호남에 보내는 것과 같았는데 끝부분에 이르기를, ꡒ지난번에 듣건대 우감사(右監司) 김수(金?)는 용인에서 패하여 퇴각하였고 좌감사 김성일(金誠一)은 진주(晋州)에서 용사를 모집한다 하였다. 좌병사 이각(李珏)이 참수(斬首)당했으므로 박진(朴晋)이 충용하다 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쇠약하므로 양사준(梁士俊)으로 대신하게 하고, 변응성(邊應星)을 좌도 수사로 삼았는데, 모두 각기 본도로 돌아가 힘써 주선하여 경영하는지 모르겠다.【양사준과 변응성은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본도의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의 진주 등 약간의 고을이 아직 보존되고 있으니, 이것은 그래도 1성(成)736) 이나 1여(旅)737) 보다는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 본도의 백성들은 성실하고 후덕하여 본래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사가 많았다. 그대들이 진정 서로 분발하고 면려한다면 틀림없이 회복시키는 근본이 되지 않는다고 못할 것이다. 듣건대 정인홍(鄭仁弘)․김면(金沔)․박성(朴惺)․곽율(郭?)․조종도(趙宗道)․곽재우(郭再祐)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무리를 규합했다 하니, 본도의 충성과 의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았다 하겠다. 더구나 곽재우는 비상한 작전으로 적을 더욱 많이 죽였는데도 그 공로를 스스로 진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더욱 기특하게 여기는 바로 그의 명성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호남에도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崔遠) 등과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바야흐로 경기(京畿)를 회복하려고 도모하면서 그의 무리인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륙(水陸)의 험한 길을 달려와 행재(行在)에 아뢰게 하였다. 내가 아뢴 내용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고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양산숙 등이 돌아가는데 이 글을 부쳐서 그로 하여금 상세히 전하게 하였으니, 내가 알리는 뜻을 잘 헤아리라. 요즈음 맑은 가을철에 태백(太白)이 바야흐로 높아 군사의 위용이 갖추어진 곳에 살기(殺氣)마저 따르니, 충성과 의리가 향하는 곳에 무슨 적인들 무찌르지 못하겠는가. 그대들은 마땅히 요해처를 제어하여 구적(寇賊)들을 초멸하도록 하라. 그리고 또한 연도에 복병을 설치하고 좌우에서 협공하여 적이 마음대로 말을 달릴 수 없게 하라. 그리하여 한 지방을 안정시켜 노약자들을 불러 모은 연후에 힘을 합하여 경성(京城)을 수복하고 와서 승여(乘輿)를 영접하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대들은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게 될 것이며, 혜택이 자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니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정인홍을 제용감 정으로, 김면을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박성을 공조 좌랑으로, 곽재우를 유곡 찰방(幽谷察訪)에 임명하여 표창하고 면려한다.ꡓ하였다.【교서(敎書)가 길이 막혀 몇 개월 만에야 도착하였는데, 사민(士民)들이 임금의 교서 내용을 듣고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영인본】 25 책 625 면/ 【분류】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왕실-국왕(國王)/ [註 734]이성(李晟) : 당 덕종(唐德宗) 때의 인물. ☞ / [註 735]장소(張所) : 송 고종(宋高宗) 때의 인물. ☞ / [註 736]1성(成) : 사방 10리의 땅. ☞ / [註 737]1여(旅) : 5백 명의 단위. ☞(www.history.go.kr 2007)

 

  곽율 : 禮谷集/ 저자: 郭율 날짜: 1811/ 분류: 고도서 > 집부(集部) > 별집류(別集類)/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곽율(醴泉郡守 1591 부임) : 팔계일기(八溪日記) [한국국학진흥원-고도서]/ ...)에 초임, 김천도(金泉道) 찰방(察訪), 내섬시(內贍寺) 직장(直長), 송라도(松羅道) 찰방 등을 지냈다. 1586년 사포(司圃)로 특진되고, 홍산현감(鴻山縣監), 예천군수(醴泉郡守) 등을 지냈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초계군수(草溪郡守)에서 예빈.../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ꡐ역사자료ꡑ이다.//

 

  곽율(醴泉郡守 1591 부임) : 예곡선생문집(禮谷先生文集) [한국국학진흥원-고도서]/ ...提)에 초임, 김천도(金泉道) 찰방(訪), 내섬시(內贍寺) 직장(直長), 송라도(松羅道) 찰방 등을 지냈다. 1586년 사포(司圃)로 특진되고, 홍산현감(鴻山縣監), 예천군수(醴泉郡守) 등을 지냈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초계군수(草溪郡守)에서 예빈.../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ꡐ역사자료ꡑ이다.//

 

  곽율(郭율) : (1531~1593) 泰靜 禮谷 玄風 玄風 率禮 禮谷先生實記/ "고령선비<예곡 곽율> 아직도 시례지가(詩禮之家)유풍 이어 임란 창의(倡義)의 고장 합천에서 '지릿재'를 넘어서면 경북 고령 쌍림면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땅이지만 예전엔 합천과 마찬가지로 창의의 고장이며, 경상우도 유맥을 이어온 고장이다. 경북 땅을 들어서 조금만 가면 길가에 '점필재김종직선생종가'가 보인다. 점필재 종가를 뒤로하고, 기자는 남명의 문인이며 임란 창의 인물인 예곡(禮谷) 곽율의 행적을 알기 위해 종택을 찾아갔다. 고령 가는 길목 '월막리(月幕里)' 라는 마을에 예곡 종택이 있었다. 현재 13대 종손 은열(殷烈)씨가 종택을 지키고 있는데, 후손들은 예곡이 세상을 떠난 후 이곳에 이주하여 지금까지 400여년을 살아왔으며, 종택 옆에 모례정(慕禮亭)을 세워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있다. 예곡 곽율은 어떤 인물인가. 선비로서 높은 학문과 임란때 초계군수로서 의병들과 많은 전공을 세운 남명의 제자이다. 예곡의 인물됨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글이 있다. ""남명선생 문하에 예곡 곽공이 있었다. 공은 일찍부터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 포산(지금의 현풍) 오현 중 한 분이 되었다. 한강, 동강 등 여러 선비들과 학문을 부지런히 닦아 깨끗한 선비로 이름이 났으며, 천거로 관직을 제수 받아 고을의 수령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최고의 치적을 나타내었으며, 임란때 안음현으로 피해 있다가 초유사인 김학봉 선생이 여러 사람의 신망에 따라 임시로 초계군수로 임명하니 곧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적과 싸우며 성을 방비하며 많은 적을 죽이고 마침내 지치고 병들어 세상을 떠났으나 왜적이 감히 강우지방을 침범하지 못한 것은 공이 힘이 지대하였다.""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종손(從孫)이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절친한 벗인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이 예곡을 두고 한 말이다. 예곡은 1531년 현풍(玄風) 솔례(率禮)에서 참봉공 지인(之仁)과 창녕조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태정(泰靜)이다. 이보다 앞서, 예곡의 고조부인 청백리 안방(安邦)이 현풍의 대니산 아래 솔례동에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예곡은 어릴 때부터 경전을 읽을 때는 글의 내용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공부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종숙(從叔) 연일당(燕日堂) 지운(之雲)이 여러 사람들에게 ""율은 장래가 촉망된다""고 칭찬하면서 소학을 가르치니 책에 있는 것을 그대로 본받아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실천하였다. 청년 시절, 산해정(山海亭)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서 제자의 예를 올리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29세때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당시 남명의 문인들인 한강 정구, 동강 김우옹, 낙천 배신 등과 도의(道義)로써 교유하기도 하였다. 명종조 요망한 승려 보우(普雨)가 조정을 어지럽히자,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이를 물리치고자 하였는데, 이때 예곡이 소수(疏首)로 추대되었다. 이 사실은 당시 유림에서의 예곡의 명망을 가늠케 해 주는 일이라 하겠다. 예곡은 43세때 천거로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라는 벼슬을 받아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 종이를 만들고 관리하는 기관의 종 6품 벼슬길에 오른 것이다. 이듬해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찰방은 역의 교통 통신과 관련한 업무와 말을 관리하며 관내 백성들에 대한 대민 업무도 수행하는 직책이다. 찰방으로 있으면서, 지역 백성들의 세금 중에서 명분이 없는 세는 절반으로 줄이고, 한 조각 물건도 사사로이는 취하지 않았으며 거둬들인 쌀이나 베 등을 절약하여 저축해 두었다가 공공의 일에 사용하기도 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56세때 홍산현감(鴻山縣監)으로 임지에 내려가 민심과 문풍을 쇄신하였으며, 61세때는 예천군수(醴泉郡守)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듬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곡은 예천군수직에서 물러나 덕유산 아래 갈천동(葛川洞)에 있었는데, 당시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사람됨을 알아보고 초계가수(草溪假守)로 임명하였다. 가수란, 전쟁중 수령이 없는 곳에 그 지역의 명망 있는 사람을 임시로 임명한 후에 그 직을 수행하게 한 것을 말한다. 임금의 정식 임명을 받을 겨를이 없어 임시로 초유사가 임명한 것이다. 초계가수로 부임한 예곡은 당시 초계 의병장인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 등과 낙동강에서 배로 침입하는 왜적을 수차에 걸쳐 토벌하였으며, 특히 의병군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전쟁 중에 고을의 수령으로서 의병들이 전투에 나가 왜적을 무찌르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였다. 예곡의 이런 모습을 본 학봉 김성일은 ""만약 모든 고을이 초계군과 같이 忠과 誠을 다한다면 백성들의 소생과 국가의 중흥을 어찌 근심하리요""하면서 칭찬을 하였다. 예곡이 초계가수로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자, 도내 유생 정유명(鄭惟明) 등이 상소하기를 ""초계는 낙동강 변의 요충지로서 적의 왕래에는 여기를 거쳐야 하는데 감히 오지 못하는 것은 곽율이 마음을 다하여 방비한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식으로 임명하여 그 공을 세우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예곡은 초계군수로 정식 임명되니 가수로 있은 지 3개월 만이었다. 정식 초계군수로 임명된 예곡은 의병 지원과 백성들을 보살피다 난중에 너무 과로하여 초계의 관사에서 세상을 떠니 향년 63세이다. 현재 포산(苞山. 지금의 현풍) 지방을 중심으로 학행이 뛰어난 5명의 선비를 '포산오현(苞山五賢)'이라 하여 남긴 학풍을 칭송하고 있는데, 예곡 역시 오현 중 한 분이다. 1695년 동방오현의 한 분인 한훤당 김굉필을 모신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곽승화, 배신, 원개 등과 함께 배향을 하였으니, 포산오현을 모신 것이다. 도동서원 별사 봉안문에 ""한훤당 김굉필의 높은 학덕을 이어받고 남명에게 직접 사사하여 경의의 공부로 진리를 몸에 익혔고,...........""라고 하여 예곡이 한훤당의 학덕과 남명의 경의(敬義)정신을 이어받았다고 하였다. 이후 도동서원 별사는 대원군 서원철폐때 훼철되고 1990년 현풍에 화산서원(花山書院)을 창건하여 예곡을 모시고 제향하고 있으며, 고령에는 13대 종손 은열씨, 의성군수를 지낸 경열(敬烈)씨를 비롯한 많은 후손들이 시례지가(詩禮之家)의 유풍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1997.1.31. 경남일보)" 

 

  곽율(郭율) : 1531(중종 26)∼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태정(泰靜), 호는 예곡(禮谷). 아버지는 참봉 지인(之仁).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72년 성균관의 천거로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노모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원하여 김천찰방으로 전직되었다가, 내섬시직장·송라찰방을 역임하고 1585년 학행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특진되었다. 이어 홍산현감·군자감판관을 거쳐 예천군수로 있던 중 파직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 의해 초계군(草溪郡)의 임시수령으로 기용되어 왜군과 싸웠으며 곧 예빈시부정으로 전직명령이 내렸으나, 유생 정유명(鄭惟明) 등의 유임상소에 의해 초계군수로 유임되어 강우(江右)지역의 보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학문을 즐겼고 사람됨이 순정하여 가는 곳마다 학풍을 일으켰으며, 찰방으로 있을 때에는 풍속을 순화하였다.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東儒師友錄, 淸選考. 〈金鎔坤〉/ 조부(祖父): 곽준(郭埈) 자(字) 우서(禹瑞)(daum 2010)

 

  곽율(郭율)  : 1531 ∼ 1593,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태정(泰靜), 호는 예곡(禮谷). 본관은 현풍(玄風). 연일당(燕日堂) 곽지운(郭之雲)에게서 배워, 1558년(명종 1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72년(선조 5) 성균관(成均館)의 천거로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가 되었다. 김천찰방(金泉察訪)·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 등을 거쳐, 86년 학행(學行)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로 특진되었다. 이어 홍산현감(鴻山縣監).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거쳐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있던 중 파직당하였다. 92년 임진왜란 때 초계군수(草溪郡守)에서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으로 특진되었으나 군내의 유생(儒生) 정유(鄭惟) 등의 유임상소로 초계군수에 재임되어 왜군을 방어, 강우(江右)지역 방어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학문을 즐겨 임지마다 학풍을 일으켰고, 풍속을 순화(醇化)하는 데 힘썼다.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조부(祖父) 곽지인(郭之仁) 관(官) 수의부위(修義剖葦)/ 증조(曾祖) 곽당(郭撞)/ 청백리(淸白吏) 곽안방(郭安邦)의 후(后)/  외조(外祖) 정사성(鄭思誠) 본(本) 서원(西原) 관(官) 증(贈) 승지(承旨)// 배(配) 숙부인(淑夫人) 성산전씨(星山全氏) 전영성(全永成)의 여(女)/ 관(官) 봉사(奉事)/ 조부(祖父) 전억령(全億齡) 관(官) 만호(萬戶)/ 증조(曾祖) 전환(全煥) 관(官) 참봉(參奉), 증(贈) 승지(承旨)(daum 2010)

 

  곽율 : 鶴峰先生 交遊考/ 2009.11.25/ ...), 호는 창균(蒼筠),/ 이광준(李光俊)1531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준계(俊季), 호는 학동(鶴洞)/ 곽 율(郭 율) 1531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태정(泰靜), 호는 예곡(禮谷)/ 권호문(權好文)153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중.../ http://cafe.daum.net/wondongpa/ 의성김 원동파(daum 2010)

 

  곽율 : 임진왜란시 초계의병의 단독전투/ 2009.10.28/ ...전투인 沙漠戰鬪이다. 초계 義兵將 全致遠 李大期 全雨 全霽는 沙漠에 나아가서 陣을 쳤다. 그때에 假守 郭율. 造鍊將 盧世麒. 鄭錫祚. 隨後治行奮擊將 李海龍은 낙동강동쪽에 출진하고 防禦將 卞玉希는 미령에 陣을 쳤고 左輔將.../ http://cafe.daum.net/9338373/ 초계중학교 총동창회(daum 2010)

 

  곽율 : 곽[郭]씨 자세히 알아보기/ 2009.05.09/ ...현손(玄孫)에 주(走)자(字) 항렬의 8형제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그들은 영남 일대에서는 '현곽팔주(玄郭八走)'라 알려졌다. 그 중 부사(府使)를 지낸 월(越), 현감을 지낸 준( ), 군수를 지낸 율(薺 )이 .../ http://cafe.daum.net/posan-kwak/ 포산곽씨 계공랑공파 종문 친목카페(daum 2010)

 

  곽율 : 곽(郭)씨 역사 소개 (동영상)/ 2008.12.01/ ...그의 현손(玄孫)에 주자(走字) 항렬의 8형제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그들은 영남 일대에서는 '현곽팔주(玄郭八走)'라 알려졌다. 그 중 부사(府使)를 지낸 월(越), 현감을 지낸 준( ), 군수를 지낸 율(薺 )이 .../ http://cafe.daum.net/114happy/ 건강과 신앙생활(daum 2010)

 

  곽율(郭율) [專門資料] : 발행일 2008-03-21(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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