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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70-2:정사신(1592.5.7이후부임-1593.7.16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2.05.12 06:37:27

  예천고을원(70-2) : 정사신(1592.5.7이후 부임-1593.7.16 이임) : 시문에 밝은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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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사신 [記事] : 안동문화 11집/ 간행년 : 2003/ 저자 : 안동문화원/ 발행처 : 안동문화원/ 부록/ ▣ 飜譯 <梅窓先生年譜>/ ◎ 명종대왕 13년 무오년 (1558년) 팔월 십칠일 亥時에 공은 안동부 북쪽 마암리 집에서 태어나다. 공의 선조 鄭尹公은 개국초 외가 丈英公 金恂의 別業을 따라 안동으로 옮겨왔다. 부친 右尹公은 모사동에서 마암리로 이거했다./ ◉ 기미년(1559년) 2세/ ◉ 경신년(1560년) 3세/ ◉ 신유년(1561년) 4세/ ◉ 임술년(1562년) 5세/ ◉ 계해년(1563년) 6세 비로소 맏형 芝軒公에게서 수업하다. 성품이 영민하여 막 수업을 받고나서 금새 구절이 어려운 것도 해독하니, 右尹公은 그 점을 기이하게 여겼다. / ◉ 갑자년 (1564년) 7세/ ◉ 을축년 (1565년) 8세/ ◉ 병인년 (1566년) 9세 이 때, 경서의 문리와 뜻에 벌써 막힘이 없었는데, 지헌공이 한결같이 도산서당에서 수업한 것을 가르치고 지도했다. / ◉ 정묘년 (1567년) 10세 6월에 명종께서 승하하시다. / ◉ 무진년 (1568년) 11세 백담 구봉령 선생께서 공의 재주와 학문이 날마다 진척됨을 보고 우윤공에게 칭찬하고 하례하였다. / ◉ 기사년 (1569년) 12세 장로에 따라 산언덕에 올라가서 부르는 운을 따라서/ 흰 꽃잎은 오 산의 발치에 흩어졌고 雪點千山脚/ 먼 묏부리 눈 아래 펼쳐졌구나 瑤岑眼底平/ 목동은 소등타고 피리 불고 牧童牛背笛/ 바람은 살랑살랑 산성에 나부끼네 風動落山城/ 라고 읊으니, 듣는 자들이 놀라며 감탄했다. / ◉ 경오년 (1570년) 13세 지헌공에게 『주역』을 배우다. 지헌공 섬기기를 부친처럼 했는데, 일용의 미세한 일까지도 여쭙고 결정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지헌공이 먼저 <계몽도서>로 그것을 시험하자, 공은 묻는 데에 따라 곧 해독하니, 지헌공이 속으로 몹시 기이하게 여겼다. 그래서 우윤공에게 "이 아이를 집안에 깊이 감춰두되, 시장에 내보내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 신미년 (1571년) 14세/ ◉ 임신년 (1572년) 15세 공은 부모를 봉양하는 여가에 부지런히 책을 외우고 읽었다. 어느 때인가 밤중에 『오자병서』를 읽었더니 지헌공께서 "성현의 서적이 많이 있는데, 어찌 여기에 골몰하느냐?"고 나무라셨다. / ◉ 계유년 (1573년) 16세/ ◉ 갑술년 (1574년) 17세 백담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다. 백담께서 공의 배운 바를 묻고는 몹시도 칭찬하셨다. / ◉ 을해년 (1575년) 18세 가을에 진사초시에 응시하다. 공은 글재주가 조숙했다. 이에 앞서 양공회는 사부로써 한때에 이름을 날렸는데, 공이 지은 '도룡부'를 보고 감탄하고 칭찬하면서도 뽑지는 않았다. 청량산에서 독서를 하다 기행시를 썼다./ ◉ 병자년 (1576년) 19세 용산서원이 세워지다. 이는 백담 선생께서 도를 강론하셨던 곳이다. 공과 지헌공, 권회곡 춘란, 안동 고제(皐霽) 권송소 우께서 힘을 모아 창건했으므로 함께 모여 강학하였다. 3월에 우윤공 상을 당하다. 4월에 우윤공을 서현 태좌의 언덕에 장례 지내다. 지헌공이 묘 아래에 여막을 세우되, 상례 절차는 한결같이 옛법도를 따랐다. 공도 그와 동행함에 조금도 예에 벗어나지 않았다. 날마다 지헌공에게 '의례' 강의를 받았다. / ◉ 정축년 (1577년) 20세/

 

  ◉ 무인년 (1578년) 21세 5월에 상을 마치다.  동강서당에서 독서하다. / ◉ 기묘년 (1579년) 22세 부인을 맞았는데 영천 이씨로 관찰사 광준의 딸이었다./ ◉ 경진년 (1580년) 23세 학봉 김 선생을 배알하다. <중용> 9경의 뜻을 물었다. 겨울에 봉정사에서 독서하다. 『전등신화』를 읽는 자가 있었는데, 그를 내쫓았다. 그래서 글을 지어 그 허탄하고 망령된 이야기를 변론했다. / ◉ 신사년 (1581년) 24세 가을에 문과 초시에 합격하다. / ◉ 임오년 (1582년) 25세 봄에 대과에 급제하다. 그 때 율곡 이이가 과시를 주재했는데 공의 '복재금부'를 상등으로 뽑고는 "이 사람은 경학뿐만 아니라 글재주가 응당 일세에 으뜸이다." 라고 말했다. 사은례를 마치고 막 돌아오니, 백담이 "시의가 그대를 한림에 천거하려는 듯하니, 분관전에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공은 금방 급제한 자로 진출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말을 재촉하여 귀근하니, 구공께서 몹시 감탄했다. 가을에 권지ㆍ승문원 부정자에 뽑혀 보직되다. 그 때, 약포 선생이 서울 자택에 있었는데 이미 재상의 반열에 있었다. 공에게는 삼종숙부였다. 공은 신진래객으로 큰 벼슬에 있는 것을 민망히 여겨 따로 집을 마련하여 처소로 사고는 일이 있으면, 품하여 묻곤 했다./ ◉ 계미년 (1583년) 26세 왜사호송관으로서 동래에 가다. 그 때 매우 간사한 늙은 통역관이 있어 공이 장계를 올리고 국문했다. / ◉ 갑신년 (1584년) 27세 저작랑을 제수받다.  공은 입신할 처음에 염치를 힘쓰며 기절 숭상을 우선으로 했기에 벼슬아치들을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 ◉ 을유년 (1585년) 28세 박사에 오르고, 봉상시 직장으로 옮겨지다./ ◉ 병술년 (1586년) 29세 봄에 예조 좌랑을 제수 받다.  여름에 형조 좌랑으로 옮겨지다. 칠월에 백담 선생의 부고가 이르자, 임시 빈소를 차려놓고 그를 곡했다. 그래서 귀향할 소를 올리고 곡상하고는 이내 환조했다. / ◉ 정해년 (1587년) 30세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다. <미원계회도>를 짓다. 공이 이미 사간원에 들어가서 바로잡고 탄핵할 일을 당하면, 권귀나 요직을 피하지 않았다. 서애 선생이 "그대가 직분을 받드는 것을 보니, 옛날 곧은 신하의 식견이 있지만 속에 감추고 온축한 점에 있어서는 결함이 있네." 라고 했다. 약포 선생은 "참으로 내가 지닐 것은 공정함이니, 어찌 감추고 온축할 것을 들먹일 필요가 있을까?" 라고 했다. 지금 지헌공이 성균관에 있을 때, 집에 쓴 서신에 '정랑 여덟 아홉을 버리고 조정에서 정언을 제수할 때, 대궐 아래의 의논이 커서 중신으로 이미 삭탈 당한 자 팔구 명이고 파직된 자가 오륙 인이며 그 나머지는 네 명인데 그 때 윤허를 입지 못한 자는 주야로 문장을 지어 생병 앓는 것 같아, 보기에 몹시 민망했다.' 고 이른다. 계사가 난리통에 유실되었으니, 한스럽다. 병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제수되다. 겨울에 양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외직인 예안 현감으로 나가다. / ◉ 무자년 (1588년) 31세 예안현에 있다. 예안현은 집과 이십 리 떨어져 있었는데, 어버이를 모시고 곤궁한 이들을 돌보는 일 외에 일체 경영하는 바가 없었다. 매달 도산서당에 선비들을 모아 강학했다. 그 때 집을 지으려고 했는데 관리의 신분으로 사사의 것을 경영함이 미안하여 감사에게 사직하는 장계를 올렸더니, 감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집을 수축하지 못했다. 월과를 세 차례 올렸다. /

 

  ◉ 기축년 (1589년) 32세 병조 좌랑에 제수되다.  공조 좌랑에 오르다.  또 형조좌랑 겸 지제교록으로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다. <옥당계회>를 짓다. 공이 어전에 들어가 경연할 때, 은미하고 궁벽한 의미를 쪼개고 경전의 뜻을 추리하고 연혁하되, 말소리가 고아하고 맑았으며 성음이 크고 우렁찼다. 주상께서 좌우에게 "나이 어린 시골 선비가 어찌 이다지도 박통한고" 라고 하셨다. 계본을 쓰자, 주상께서 "이 사람이 박학한 것은 내 이미 알고 있으나, 필적과 획 역시 그렇구나!" 라고 하셨다. 영의정 이산해가 경연석에서 물러나와 "아무개는 참으로 시강의 재주를 지녔다" 라고 감탄했다. 첨사에 제수되다. 일시의 재상들이 역적의 옥게 연루되고 선비들이 모함을 받자, 공으로 하여금 용서를 비는 글을 써서 공론을 빌리고자 했으나, 공은 허락하지 않고 말을 몰아 귀향했다. 이로 인해서 미움을 받게 되었다. 곧 성균관 전적으로 옮겨졌다./ ◉ 경인년 (1590년) 33세 봄에 병조 좌랑에 제수되고, 예전과 같이 지제교를 겸대하였다. 주상의 형인 하원군이 어둠을 틈타 단문에 이르렀는데, 추종하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공이 문을 밀치고 들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공은 대궐로 나가 청죄하는데, 상께서 그가 법을 지켜 요동하지 않은 점을 기특히 여겨 더 묻지 않으셨다. 광국원종삼등공신으로 책록되다. 예계를 개정함에 주상께서 친히 태묘에 제를 올리자 공은 대축으로 참석하다. 명을 받들어 <반사문>을 지어 올리다. 원문은 난리에 잃었다. 사제관으로 상주에 가다. 모친의 병을 빌미로 체직을 빌어 윤허를 받다. 상께서 특명으로 말을 하사하여 귀근하게 하시니, 사람들은 특이한 경우라며 그를 영화롭게 보았다. 삼월에 환조하다. 권송소를 곡하다. 공은 몸소 염하고 빈소를 차리고 유고를 수습해서 보냈다. / ◉ 신묘년 (1591년) 34세 봄에 예조 정랑에 제수되다.  또 수찬에 제수되다.  고조 진사공 묘지를 찬하다. 저전 중봉 아래로 이거하다. 백우대 부인이 거처하던 집을 막내 동생 교수공에게 주고 여기로 이거했는데 이곳의 천석이 빼어남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겨울에 또 정언에 제수되다. 명을 받들어 환조해서 회시시원에 참여했다./ ◉ 임진년 (1592년) 35세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다. 공이 조정에서 탄핵할 때는 돌아보고 피하는 바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그것을 꺼려하여 기뻐하지 않는 자가 많았다. 4월에 귀근을 청하는 계를 올려 윤허를 받다. 그 때 왜적이 해변에 이르러 명을 치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조정에서는 전쟁이 있을 것을 알고 논의가 분분했다. 사간원에서는 날마다 외교 문서를 썼다. 그 때 지헌공은 집경전 참봉으로 동도에 있었는데 공은 모친과 형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귀근을 청하는 계를 올려 특별히 윤허를 받았다. 13일에 왜구가 지경을 범하여 동래를 함락시키자, 변방의 소식이 급히 이르렀다. 한음 이공과 오음 윤공이 계를 올려 '이 때에 시종 간원들은 귀가할 수 없게 하소서.' 라고 하자, 주상께서 곧 공에게 하명하기를, "지금은 사사로이 모친을 돌볼 수 없으니, 그대는 귀근하지 마오." 라고 하셨다. 공이 막 동문을 나서려다가 명을 받들어 입궐하여 입직하였다. 그 때에 학봉 선생이 외직으로 나가 경상우도 병사가 되었다. 주상께서 또 학봉 선생을 체포해 들이라고 하시길래, 공은 소를 써서 아뢰려다가 서신으로 약포 선생에게 질문했다. 대략 '학봉 선생을 체포하라고 하명하셨는데, 황망 중에 놀라움과 두려움을 감출 길 없습니다. 당초 장수의 임무는 이미 선비로서 감당할 것이 아니온대, 곧 잡아들이라고 하시니, 성상의 도량에 흠이 될까 두렵습니다.

 

  전쟁을 당해 장군을 바꾸는 것은 역시 조정의 임기응변을 잃는 것인데도 아무도 주상의 의중을 되돌릴 수 없으니 저는 슬픔을 금치 못합니다. 국가에서 간관을 두어 어디에 써먹겠습니까? 밤중에 엎드려 신원소를 몇 마디 초하여 상소하고자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초한 소를 봉해 올리니 고쳐서 돌려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라고 했다. 약포가 답서를 대략 '김공의 일은 어제 연석에서 풍원상공(豊原相公:유성룡)이 이미 주청을 드렸네. 주상의 의중이 풀릴 것 같으니, 오늘의 처분을 기다려서 아뢰는 것이 좋겠네.' 라고 했다. 얼마 안 있어 곧 학봉은 특별히 사면을 받았기에, 상소문을 결과적으로 올리지 못했다. 조정에서는 백관들에게 전마 한 필씩을 급히 바치라고 하명하다. 공은 혈혈단신에다 떠돌이 관료로, 오직 말 한 필뿐이었다. 그것을 전마로 바치고 공무를 볼 때는 남의 말을 빌려 탔다. 이로부터 공은 새벽에 조정에 들어가고 밤늦게 나오면서 말 한 필을 구하려 했으나, 필경 구하지 못했다. 30일 새벽에 급히 대궐로 달려가니, 어가는 이미 떠났고, 궁은 텅 비었다. 어제 어전에 참석해서 상께서 수도를 떠나신다는 의논을 이미 들었는 바, 혹자는 북으로 가셔야 된다고 했으며, 혹자는 서쪽으로 가셔야 옳다고 했다. 그래서 대신들도 역시 상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이날 새벽 급히 대궐로 달려가니 어가는 이미 떠났고, 궁과 민가는 모두 텅 비어 부득이 퇴관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미 평명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 생각건대, 자신이 시종으로 있고, 게다가 떠나지 말라고 하교 받았기에 귀근할 수는 없었다. 급기야 집안의 종 한 명을 거느리고 급히 짐을 챙겨 돈의문을 나섰다. 도보로 달려가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까지 치솟고 사람들은 도로에 꽉 메워졌는데 간신히 모화관에 도착했다. 서쪽에서 온 자 백여 명을 만나보니, 모두가 '대가는 북도를 향했다'고 했다. 이날 밤에 음산한 비는 세차게 내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걷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친한 의관 김세전을 만나 그 집에 들어가 유숙했다. 5월 초하루 아침에 어가가 이미 동파역을 떠났다고 듣다. 공은 본디 서북로에는 어두웠다. 그 길을 물어보니, 어가와는 이미 백여 리나 떨어져 있었다. 막 포복하며 길을 떠나려할 때, 김세진이 말 한 필을 빌려주고 북쪽길을 가르쳐주면서 "한쪽길은 영서 금석를 거쳐 철령을 넘게 되고, 한쪽길은 영동 통천을 거쳐 안변에 이른다."고 했다. 드디어 몇날 길을 달렸더니, 다리가 퉁퉁 부어 길가 민가에서 녹초가 된 채 쉬다가 칠팔 일이 지나서 겨우 통천에 이르렀다. 거기서 관군들이 이리저리 흩어진 것을 보고서야 어가는 서쪽으로 갔고, 북쪽으로 향한 것은 제궁의 행차임을 알아차렸다. 그 때 한강 선생이 그 고을 원이었는데 공이 주상의 하교를 아뢰고는 죽기를 각오하고 서쪽으로 달려갈 것을 말했다. 그랬더니, 선생은 "의리를 따르는 것은 지극히 옳은 일이오만 적병이 깔렸고 길로도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왜놈들에게 죽게 된다면, 이는 헛수고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잠시 길이 트이기를 기다린 뒤에 충성심을 드러냄이 옳은 듯 합니다." 하며 사람과 말을 주어 강릉으로 보냈다. 25일에 비로소 강릉에 도착하다. 그 때 장인인 학동 이공이 그 고을의 부사였는데 그 후에 질시하는 자들이 '바로 장인의 임소로 달려갔다'는 것으로 그를 무고했다. 그리고 이이첨의 무리들도 '달아났다'고 그를 무고했다. 6월에 강릉에 머물면서 이자암과 함께 관동 토병을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다. 7월에 떠돌아다니는 왜적을 단곡에서 맞아 격퇴시켰는데 목을 벤 수가 매우 많았다.

 

  9월에 병졸들을 이끌고 인제현으로 가서 강원감사 안신을 만나다. 공은 왕을 호종하려다가 뒤쳐진 사정을 상세히 아뢰고 죽기를 각오하고 호종하러 달려갈 뜻을 청했더니, 강공은 "현재 장계를 가지고 간 사람도 낮에는 매복했다가 밤에만 피난하는 터에 공이 몸을 빼서 달려가면 길에서 횡사하게 되니 경솔히 나서서는 아니 되오. 그리고 왕사란 본디 안팎이 없는 법이오. 그러니 나와 같이 공을 세워 적을 토벌해 공을 세우는 것도 좋겠지요." 라며 만류했다. 그래서 강원 감사의 격서로 임시로 양양 군수가 되다. 당시 양양 군수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강공은 공을 위해 장계를 올려 임시로 군수를 삼았다. 공은 군에 이르러 즉시 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구휼하면서 병사들을 모아 적을 토벌하니, 백성들은 그 은택을 입었으며, 병졸들도 모두 죽기를 각오하며 적을 무수히 무찔렀다. / ◉ 계사년 (1593년) 36세 봄에 삭직의 명이 내리다. 이어 강원 감사가 장계를 지어 올리고 호종에 뒤쳐진 죄를 아뢰었다. 아울러 군문에 백의종사하기를 주청했는데, 그제서야 사간원의 계에 의해 삭직되었다. 2월에 감사가 공의 전공을 장계로 올리자 주상께서 기용하라는 윤허가 계셨다. 4월에 비로서 조정에 나가게 되어 강서에 이르러 예천 군수를 제수 받다. 하명에 사례하고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부임하지 않았다.  5월에 학봉 선생 부고를 듣고 가빈소를 설치하고 곡하다.  11월에 어가가 환도하자, 공은 귀향하여 소천에 계신 대부인을 찾아뵙다.  학봉 선생의 장례에 참여하다. 의병장 金達遠(垓)의 묘를 찾아가서 제사를 올리다. 제문을 지었다./ ◉ 갑오년 (1594년) 37세 경상 도사를 제수받다. 공의 앞뒤 사람들의 비방으로 인하여 공은 상소로 사정을 아뢰고는 곧 사직했다. 전하기를, 상께서 "지금 도사 정사신의 상소문을 볼 것 같으면, 일과 형세가 그러해서 그랬던 것인만큼 사직하는 일만은 하지 말라"는 하교를 내리셨다고 한다. 그래서 부임했는데, 그 고을의 한 세도 있는 재상이 탐학하고 방종하길래 장계를 올리고 그를 축출시켜 거듭 권귀들에게 거슬림을 받았다. 학봉 선생의 <海 錄>을 참판 朴而章에게서 수습하여 본가로 봉환하다. / ◉ 을미년 (1595년) 38세 선산 부사를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다. 당시, 많은 원망이 합세하여 틈을 타고 일제히 공격해 공을 축출하기를 탄핵하는 바람에 삭직되었다. 이로부터 종적을 숨기고 집에서만 기거했다. 지헌공이 東都로부터 파리한 행색으로 떠돌다가 겨우 귀향하자, 공은 주야로 상대하되, 바깥일은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

 

  ◉ 병신년 (1596년) 39세 愚伏 鄭經世를 찾아뵙다. 며칠 동안 강학했다. 아들 億이 태어나다./ ◉ 정유년 (1597년) 40세 왜적이 다시 침입했다고 듣다. 공은 왜적의 재침 소식을 듣고 근심스럽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다. 蒼石 李埈은 공에게 의병 일으키기를 권유했다. 당시 지헌공은 이미 망우당 곽재우 휘하로 달려갔고 공은 대부인의 질환이 갑자기 더해져서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다. / ◉ 무술년 (1598년) 41세 정월에 대부인 상을 당하다. 3월에 대부인을 西峴 우윤공 묘소의 북쪽에 합장하다. 齋舍를 관리하다. / ◉ 기해년 (1599년) 42세 西川君이 와서 집안일을 묻고 의논하다. / ◉ 경자년 (1600년) 43세 3월에 모친상을 마치다. / ◉ 신축년 (1601년) 44세 당시 주상께서 政院에 하교하기를, "전날 正言 鄧士信은 지금 어디에 있느뇨?" 라고 하셨는데 공을 미워하던 자들이 공이 재등용될까 두려워서 "죄를 받아 먼 지방에 종적을 감추어 생사를 알 수가 없습니다" 라고 아뢰다.  아들 식이 태어나다.  謙菴 柳雲龍을 곡하다. 제문과 만사를 짓다. / ◉ 임인년 (1602년) 45세 金溪에 있는 서애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고 며칠 동안 『예기』를 강론하다.  12월에 서천군의 부음을 듣다. / ◉ 계묘년 (1603년) 46세 道味洞精舍를 수축하다. 정사는 의성현 남쪽에 있다. 서애 선생께서 운을 내었고 운천 김거기에 시를 달았다.  가을 廬江享禮를 행하다. 제생들과 근체시 두 수를 주고받았다.  / ◉ 갑진년 (1604년) 47세 晦谷 權春蘭ㆍ蒼石 李埈과 龍山書堂에 가서 모여 백담 선생의 문집을 교정하다.  봉암대를 서당의 남쪽 개울가에 수축하다. 벽오동을 누대의 아래에 심고 또 시내 중앙의 돌 위에 솟은 소나무를 얻었다. 옛날에 '독송정' 이라 이름한 곳인데 날마다 그 사이에서 시를 읊었다./ ◉ 을사년 (1605년) 48세 '노강서원 양호루 중수 상량문'을 쓰다. 9월에 藥圃 선생을 곡하다. 權松巢 문집을 교정하다. / ◉ 병오년 (1606년) 49세 5월에 약포 선생 장례에 참여하다. 頤齋 曺友仁이 관동으로 감에 송별하다.  '우윤공 묘지문'을 찬하다./ ◉ 정미년 (1607년) 50세 2월에 지헌공 상을 당하다. 공은 우애가 돈독하여 곡함에 의지하고 앙모할 데를 잃은 것마냥 통곡했는데 보통의 감회 이상이었다. 5월에 서애 선생을 곡하다.  서애 선생의 노환이 차도가 있음을 듣고 문안드리다. 이날 저녁에 선생께서 타계하셨다. 제문을 짓다. 가을에 환조하라는 명을 받고 직첩을 받다.  本府의 宗會에 나가다. 당시 한강 선생이 본부를 맡고 있었는데 종회를 설치했다. 공이 가세 담론했다. '종회도'를 썼고 이어서 충절을 표상했다. '동회제도시' 두 수가 있다. / ◉ 무신년 (1608년) 51세 선조께서 승하하시다. 서울로 가서 奔哭하다.  慕堂 洪履祥과 지봉 이수광이 공의 여사를 내방하다. 司僕寺 正에 제수되다. '一綱八目疏'를 올렸다. 綱은 '愼獨'을 말함인데, 조목에서 '첫째, 어진이를 기용하되, 의심하지 마시고 공정한 도를 펴십시오. 둘째, 사특을 버려 의심하지 마시고 大和를 보존하여 합하십시오. 셋째는 정직을 세워 원기를 기르십시오. 넷째는 藏案을 거듭 밝히시어 탐관오리를 혁파하십시오. 다섯째는 節用하고 백성을 사랑하십시오. 여섯째는 병사를 기르고 농사에 힘쓰십시오. 일곱째는 은혜와 신뢰를 널리 미루십시오. 여덟째는 경연에 부지런히 참석하십시오.' 였다. 상이 대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니, 공의 정성과 간곡함이 모두 갖추어 있으니, 응당 유념하고 살펴서 의논해 처리하겠소." 라고 하셨다.  司 寺 正으로 옮겨졌다. 중시 을과에 급제하여 통정ㆍ부첨지중추부사에 오르다. 그 때 西坰 柳根이 문형으로 과시를 주관함에 공이 箋으로 첫째를 뽑았다.

 

  그러나 동석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이이첨을 장원으로 뽑았다. 방을 붙이는 날, 이이첨이 공에게 "令公께선 왜 장원이 되지 못하셨고?" 라고 뻐기었다. 공은 본디 그의 위인이 비루함을 알고 있던 터에 곧 웃으며, "나는 執燭者도 없고 集句하는 사람마저 없는데 어찌 장원이 되겠소?" 하니 이이첨은 부끄럽고도 분해하며 물러갔다. 그가 공을 헐뜯고 모함한 것은 참으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安胎使로 공주에 갔다. / ◉ 광해 원년 기유년 (1609년) 52세 봄에 경성의 도적 소식을 듣고 서울로 달려가 사신들을 전별하고 위로하고 관서로 가다. '관서창수시'를 남겼다.  鶴洞 李公의 부음을 듣고 곡하다.  또 침지중추부사를 제수받다. 공이 龍灣에 있다가 朝紙에 '공은 銀臺에 적합하다'는 추천이 수십 번에 이른 것을 보고는 급히 귀향했다. '義士 金致中 閭表'를 찬하다. / ◉ 경술년 (1610년) 53세 담양 부사를 제수받다. 부임하기도 전에 또 하지사로 추천되어 연경에 갔다. '契會圖'를 지었다. 평양을 지나다가 기자묘를 배알하다. '箕子朝周封辨'을 지었다. 고죽성에 이르렀는데, 백이숙제 사당을 배알하다. 5언 배율 30수를 짓다.  북경에 이르러, 賀班朝腹辨正事로 예조에 이르러 글을 올리다. 공은 일찌기 우리나라가 천조(명)에 예를 행할 때 조복을 입지 않고 다만 검은 도포만 입고 어전의 반열에 입참하는 점을 분통하게 여겼었다. 장차 '품정의장'을 진소하려고 나아가 예조에 이르러 글을 올렸는데, 노변이 매우 단단하였다. 侍郎 翁正春이 "이백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일을 가벼이 마음대로 고치다가 물의를 초래할까 두렵소이다. 그런데 조선왕이 황제에게 아뢰어 황제의 聖旨를 받는다면, 허락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조선은 본디 예의지국으로 일컬어 왔는 바, 명 나라에서는 예로써 상대해 왔는데 어찌 허락하기에 인색하겠습니까? 지난번 만력 20년(임진년)에는 조선이 왜놈들에 의해 침략을 받아 군신들이 피난을 갔었지요? 그래서 명 나라에서는 병사와 군량미를 보내서 그 환난을 구했는데 이 조복이 무슨 대수가 되겠소? 조선왕이 명 황제에게 아뢰어 성지만 받는다면, 어찌 당장이라도 고치지 않겠습니까? 올해 사신이 조복을 입지 않더라도 내년이 되면, 마땅히 입게 될 터이니, 그네들이 이렇듯 안달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이 올린 글은 당장 朗官에게 내려 보내 또한 회자를 만들어 국왕에게 알려주겠소이다." 라고 했다. 시랑이 쓴 글의 끝에 '조선 배신이 쓸 글 역시 일리가 있습니다만 常服의 服制는 이백여 년 동안 습속이 된 지 이미 오래 된 터에 本部에서 어찌 감히 마음대로 그것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의논을 하고 王令을 거칠 것이니, 그 상소문은 청컨대 성지가 내려 획일로 처리될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행여 여러 배신들과 의논하되, 분쟁을 일으켜 조선의 체모를 손상케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라고 했다. 이에 예부에서는 이는 주상의 뜻과 관련이 된다고 여겨 쉽사리 고치는 것이 어렵다고들 했다. 그래서 비록 일이 잘 해결은 되지 않았지만 時議로는 적합했다./ ◉ 신해년 (1611년) 54세 봄에 復命하다. 공은 재물을 꺼려했다. 다만 비단 몇 필과 서책과 詩軸, 일기뿐이었다.  掌隸院 判決事를 제수 받다. 공은 권력과 세도를 범한 자를 처결하게 되었는데 두 소송 문건이 서로 엇갈렸으나, 공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는데 듣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는 참 어렵다고 말했다. 龍驤衛 副護軍으로 체직되다./ ◉ 임자년 (1612년) 55세 6월에 사위 柳 洗馬를 곡하다. /

  ◉ 계축년 (1613년) 56세 가을 밀양도호부사 겸 경상중도방어사를 제수받다.  당시 밀양은 난리를 겪은 후라서 무인들을 많이 기용했기 때문에 고을 원도 부패했었다. 그래서 조정의 논의가 크게 일어났는바 청렴한 관료를 보내어 그 폐단을 진정하고 무마하려고 했다. 이에 공이 솔선 응하여 밀양부에 이르러 곧 형벌을 덜고 폐단을 고치며 선비를 모아서 경서를 강론하니, 선비들이 모두 흥기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어진 스승을 모셨다고 했다. / ◉ 갑인년 (1614년) 57세 봄에 벼슬을 마치고 돌아오다. 이 당시, 이이첨의 무리들이 맘대로 날뛰며 방자히 굴었는데 예조랑 柳活이 기생을 태워 밀양성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공은 그를 위해 지응(支應)해 주지 않고 당일에 봉인하고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그는 이에 앙심을 품고 조정에 돌아와서 그 무리들과 이이첨 무리에 붙어서 합력하여 공을 탄핵했다. 이에 앞서 李 등이 공에게 절교를 당하고도 그 음흉한 계획대로 앙갚음하지 못해 분해하고 있던 터에 이를 이르러 입을 모아 공을 무고하게 헐뜯었다. 공은 상소를 올려 이 일을 아뢰고자 하자, 한음 이공이 時事가 크게 일어날까 염려해 극구 만류하여 올리지 않았다. / ◉ 을묘년 (1615년) 58세 이 무렵 北黨의 세력이 날로 흥성해지자, 공은 전야에 자취를 숨기고 서울로 한 자의 편지도 통하지 않고 자제들을 가르쳐 가모(家模)를 세우는 일에 힘썼다. 아우 교수공이 "세상의 도가 더러워지고 있는데 홀로 언덕에 서계심은 치욕일 뿐이지요. 어찌 작은 변이라도 일으켜 선조들에게 보은하시지 않으십니까?" 라고 격하자, 공은 개연히 말했다. "나는 시속을 따라 부앙할 순 없네. 내 천성이 그런 것이고 어찌 선군께서 ꡐ마음을 속이지 말라ꡑ(不欺心)하신 세 글자의 훈계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의가 아닌 벼슬을 해서 선조께 보은하려 든다면, 선조께서 즐겨 돌아보시겠는가?"/ ◉ 병진년 (1616년) 59세/ ◉ 정사년 (1617년) 60세 서울에서 한 친구는 애당초 이이첨에게 빌붙었던 자였는데 공에게 살려달라는 서찰을 보내왔다. 공은 그 서찰을 그대로 봉해 보내고는 한 자도 답하지 않았다. / ◉ 무오년 (1618년) 61세 겨울에 선대의 묘소를 찾아뵈었다. 여러 대의 선대 묘소가 모두 각처에 분산되어 있었으나 몸소 가서 제를 올리고 돌아왔다. 당시 한 고을 원이 이이첨과 왕래하면서 공을 뵙기를 청했으나 공은 병이 났다며 사양하고는 만나주지 않았다./ ◉ 기미년 (1619년) 62세 정월 25일 병으로 정침에서 고종하다. 공은 병이 누그러졌을 때 "간사한 무리들이 더욱 기승을 부려 조정을 전복시켰구나." 라고 하고는 분연히 일어나 앉아서 근심스런 얼굴로 "성조의 규모가 이놈들 때문에 다 허물어졌도다."라며 통탄했다. 그리고 문인들과 친자제들에게 훈계하기를 "지금은 벼슬길로 나가 이름을 세울 때가 아니므로 자신을 수양하고 행동에 조심해야 할 뿐이다." 고 했다. 또 "내게 세상에서 못 이룬 세 가지 한이 있다. 너무 일찍 벼슬길에 나가서 학문에 전념하지 못한 게 첫째 한이요, 난리의 시대를 만나 성주의 돌아봄을 입지 못한 것이 두 번째 한이요, 이대 고아로 선조들의 덕을 드날리지 못한 것이 세 번째 한이로다." 라고 했다. 그리고 두 아들에게 "언행을 조심하고 부지런히 독서하고 농사에 힘써라."고 유훈했다. 이 해 9윌에 聞韶縣 남쪽 上川坊 勝方洞 卵坐의 언덕에 장례를 지내다. / ◉ 仁祖大王 원년 계해년 (1623년) 도승지로 제배되자,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어 동료와 친구들이 안타까와 하지 않은 자 없었다. /

 

  ◉ 仁祖大王 27년 기축년 (1649년) 광국의 공으로 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으로 추증되다. / ◉ 正宗大王 20년 병진년 鶴巖里 사당에 제향되다. 학암은 곧 지헌공의 영을 모신 곳이다. 공과 湖陽 權益昌公을 함께 모셨다. [참고문헌] : 1. 漢籍 및 原典/『梅窓集』 : 鄭士信 『晦谷集』 : 權春蘭/『朝天錄』 : 鄭士信 『藥圃集』 : 鄭 琢/『芝軒集』 : 鄭士信 『謙庵集』 : 柳雲龍/『栢潭集』 : 具鳳齡 『梧峰集』 : 申之悌/『退溪集』 : 李 滉 『於于集』 : 柳夢寅/『鶴峰集』 : 金識一 『紫巖集』 : 李民?/『西厓集』 : 柳成龍 『?齋集』 : 曺友仁/ 『松巖集』 : 權好文 『三國史記』: 金富軾/『靑巖集』 : 權東輔 『松巢集』 : 權 字/『惺齋集』 : 琴蘭秀 『忍齋集』 : 權大器/『月川集』: 趙 穆 『震峰集』 : 權 宏/『勉進齋集』 : 琴應壎 『荷潭集』 : 金時讓/『惟一齋集』 : 金彦璣 『靜養堂集』 : 金允明/『車籬集』 : 金允安 『芝峰集』 : 李眸光/『敬亭集』 : 李民宬 『文峰集』 : 鄭惟一/『牧隱集』: 李 穡 『宣祖實錄』/『光海君日記』 『永嘉誌』/『安東鄕土誌』/ 2. 論著/ 『增補退溪全書』/ 『辭海』 , 『歷史分冊』 (中國古代史), 上海辭書出版社, 1984./ 『小說辭典』, 中國 業大學出版社, 1989./ 『韓國史2』, 國史編纂委員會, 1984./ 李成鎬, 『雪谷 鄭?의 詩世界에 대해』, 『竹夫李笑龍衡敎授定年紀念論文集』, 太學社, 1996./ 박용운, 『고려시대사』, 일지사, 1991./ 변태섭, 『고려정치제도사연구』, 일조각, 1984./ 金京淑, 『雪努 鄭?의 詩文學世界 硏究』, 『卷宇洪贊裕先生八?紀念論叢』, 東洋古典學會, 1994./ 李樹健, 『17, 18세기 안동지방 유림의 정치사회적 기능』,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일조각, 1995./ 李鍾虎, 『退溪學團의 讀晝論』, 『退溪學報』 第80輯, 退溪學硏究院, 1993/ 『退溪美學의 基本性格. 下』, 『安東文化』 第10輯, 안동대 안동문화 연구소. 1989./ 『16-17세기 退溪學派安東處士層의 言論活動』, 『退溪學』 第7輯, 安東大退溪學硏究所, 1995./ 『朝鮮中期安東處士層의 現實認識과 文藝認識』, 『漢文學硏究? 第10輯, 啓明漢文學會, 1995.(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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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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