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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72-1) : 정대임(1593 부임-1593.11.5이후 이임) : 임란 공으로 부임한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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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임(鄭大任, 1553~1594)은 1593년(선조 26)에 정사신 군수 후임으로 부임하여 같은해 11월 5일 이후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영천 출신,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대(昌臺), 본관은 연일, 습명(襲明)의 후손, 용(容)의 아들이다. 성격이 간결 신중하고 강직하여 절개가 굳었다.
영천에서 살다가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사촌형 세아와 더불어 의병을 모아 의병장이 되어 당지산에서 복병으로 왜적을 대파, 이어 영천에서 전공을 세웠고, 경주, 밀양, 양산 등지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공으로 비안 현감을 거쳐 훈련원 첨정을 지냈다.
예천고을 원으로 부임하여 용궁, 비안에 머물고 있는 왜군을 추격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자못 많았고, 또 병사가 박진을 따라가서 경주, 울산에 있는 적군을 쳐부수었다.
그 후 경상도 우후로 옮겨갔다. 돌격장으로 울산 태화진에서 적을 칠 때는 몸에 수십 곳에 상처를 입고도 종일 지휘하여 적을 격파하였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왜군과 싸우다가 함창의 당교 근처에서 발병, 고향으로 돌아가 작고했다.
1600년 선무원종공신에 추록되었고, 1604년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영천시 과전동 100번지에 있는 창대서원에 제향되었고, 이 서원 경내에 `정대임 유허비'가 있다.
문집인 「창대 정공 실기」는 후손 윤섭이 1889년(고종 6)에 편집 간행하였다. 또한 그의 행장이 「훈지양선생문집」(15540) 27~30권 행장편에 수록되어 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523號, 2002-08-29 18:54:13)
정대임(鄭大任) : 1593년(선조 26)에 부임하여 같은해 11월 5일 이후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1553(명종 8)-1594(선조 27), 영천 출신,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대(昌臺), 본관은 연일(延日), 습명(襲明)의 후손, 용(容)의 아들이다. 성격이 간결 신중하고 강직하여 절개가 굳었다. 영천에서 살다가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종형 세아(世雅)와 더불어 의병을 모아 의병장이 되는 한편 달아난 영천 군수 김윤국(金潤國)을 설득시켜 귀임하게 한 후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伏兵)으로 왜적을 대파(大破), 이어 영주(永州)에서 전공(戰功)을 세웠고, 경주, 밀양, 양산 등지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공으로 비안 현감(比安縣監)을 거쳐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을 지냈다. 예천 군수(醴泉郡守)에 부임하여 용궁(龍宮), 비안(比安)에 머물고 있는 적군(敵軍)을 추격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자못 많았고, 또 병사 박진(兵使朴晋)을 따라가서 경주, 울산에 있는 적군을 쳐부수었고, 1593년(선조 26)에 이임하였다. 그 후 경상도 우후(虞侯)로 옮겨갔다. 돌격장(突擊將)으로 울산 태화진(蔚山泰和津)에서 역전(逆戰)할 때는 몸에 수십 곳에 상처를 입고도 종일 지휘하여 적을 파하였다. 1594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왜군(倭軍)과 싸우다가 당교(唐橋) 근처에서 발병, 향리로 돌아와 사망했다. 1600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되었고, 1604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영천시 과전동(永川市果田洞) 100번지에 있는 창대서원(昌臺書院)에 제향되었고, 이 서원 경내에 <정대임 유허비(鄭大任遺墟碑)>가 있다. 문집 <창대정공실기(昌臺鄭公實記, 古上 991.1 정 222?정, 奎 5105)>는 후손 윤섭(允燮)이 1869년(고종 6)에 편집 간행했다. 이 책은 책머리에 호조참판 이헌경(李獻慶)과 호조참의 이휘재(李彙載)의 서문 및 목록, 끝에 홍문관부응교 이돈우(李敦禹)와 공충도도사(公忠道都事) 유주목(柳疇睦)의 발문이 들어있다. 권1에 연보(年譜), 권2에 가장(家狀, 孫 以?撰), 행장(行狀 : 鄭萬陽撰), 권3에 묘갈명 병서(墓碣銘幷序 : 李象靖撰), 묘지명 병서(柳厚祚撰), 묘표(墓表 : 李晩慤撰), 유사(遺事), 권4에 창대서원 봉안문(昌臺書院奉安文), 상향축문(常享祝文), 전(傳 : 睦萬中撰), 장계(狀啓) 6편(朴晋 2篇, 金誠一 1篇, 權應銖 2篇, 權慄 1篇), 권5에 제현기술(諸賢記述) 30여 편(宣廟中興誌, 海東野史, 西厓柳文忠公懲琵錄 等), 상언초(上言草)가 있다. 임진왜란 중의 영천 의병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정대임의 행장을 기록한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행 통훈대부 예천군수 정공 행장(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醴泉郡守 鄭公行狀)'이 <훈지양선생문집(塤지兩先生文集)>(奎 15540) 27-30권 행장편(行狀篇)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정만양(鄭萬陽, ?-1730), 정규양(鄭葵陽) 형제의 시문집으로, 30권 목록 합 16책, 도(圖), 목판본, 32.4x20.8cm,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은 21.9x15.7cm, 10행(行) 22자(字), 판심(版心)은 상하 화문 어미(上下花紋魚尾)이다.(인터넷 empas 2001)
[선조실록] : 1592년(선조 25) 8월 1일 별장(別將) 권응수(權應銖)가 의병장 정대임(鄭大任) 등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다가 영천(永川)의 박연(朴淵)에서 적병을 만나 격파하고 그들의 병기와 재물을 가두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상으로 권응수는 방어사가 되었으며, 정대임은 예천 군수가 되었다. 1593년(선조 26) 11월 5일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각자의 의견을 말하라 하니, 유성룡(柳成龍)은 아뢰기를, "영천(永川)에서 세운 공은 덮어둘 수가 없습니다. 정대임(鄭大任)도 성심으로 적을 쳐서 그 공이 권응수(權應銖)와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정대임은 어떤 사람인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그 위인을 보건대, 장수가 될만 했습니다. 스스로 하는 말이, '나는 글을 모르므로 목민관(牧民官)은 될 수 없다. 장수로 정하여 내려보내어 일대(一隊)를 담당해 준다면 적들을 칠 수 있다.' 고 하였는데, 그의 뜻이 가상했습니다. 그리고 영천에서의 공을 모두 권응수에게 돌리고 자신의 공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무슨 관직에 있는가?" 하였다. 아뢰기를, "예천 군수로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소원대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 라고 하였다. 1594년(선조 27)에 무과에 급제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國朝人物考, 인터넷 야후 2001)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 영남의 의병] : 본관은 영일, 1592년에 의병을 일으켜서 적군을 토벌하였는데, 용궁(龍宮)ㆍ비안(比安)에 머물고 있던 적군을 추격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숫자가 매우 많았고, 또 병사(兵使) 박진(朴晋)을 수행하여 경주ㆍ울산에 있던 적군을 쳐부수었다. 1593년에 그 공으로 예천 군수에 임명되었고, 뒤에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정대임(鄭大任) : 1553(명종 8)-1594(선조 27), 1593년(선조 26)에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하여 그 해에 이임(離任),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대(昌臺), 본관은 연일(延日), 성격이 간결 신중하고 강직하여 절개가 굳었다. 영천에서 살다가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伏兵)으로 적을 대파(大破), 이어 영주(永州)에서 전공(戰功)을 세웠다. 전공으로 비안 현감(比安縣監)을 거쳐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을 지냈다. 예천 군수(醴泉郡守)에 부임하여 용궁(龍宮), 비안(比安)에 머물고 있는 적군(敵軍)을 추격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자못 많았고, 또 병사(兵使) 박진(朴晋)을 따라가서 경주 울산에 있는 적군을 쳐부수었고, 1593년(선조 26)에 이임하였다. 그 후 경상도 우후(虞侯)로 옮겨갔다. 돌격장(突擊將)으로 울산 태화진(蔚山泰和津)에서 역전(逆戰)할 때는 몸에 수십 곳에 상처를 입고도 종일 지휘하여 적을 파하였다. 1594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왜군(倭軍)과 싸우다 전사(戰死)했다.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영천시 과전동(永川市果田洞) 100번지에 있는 창대서원(昌臺書院)에 제향되었고, 이 서원 경내에 <정대임 유허비(鄭大任遺墟碑)>가 있다.
정대임(鄭大任) : 예천 군수이다. 1553(명종 8)~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대(昌臺), 영천 출신, 아버지는 용(容)이며, 어머니는 증참판 김응생(金應生)의 딸이다. 증조부 윤식(允湜)에게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으로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 7월에 영천전투에 참가,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의병대장 권응수(權應洙)의 휘하에 들어가 중총(中摠)의 직책을 맡고 활약하였다. 그 뒤 영천에서 신령으로 이동하는 적군을 권응수와 함께 요격, 박연(朴淵)에서 대승하고 영천 수복에 공을 세웠다. 용궁․비안의 전투에서도 다수의 적을 참획(斬獲)하고 병사 박진(朴晉)과 함께 경주탈환전에 용명을 떨쳤다. 이듬해 태화강(太和江)의 적군을 공격, 종일 역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린 공으로 1593년 비안 현감․훈련원 첨정․예천 군수․경상좌도병마우후를 역임하였다. 1594년 무과에 급제, 승품(陞品)되기도 전에 적군과 싸우다가 죽었다. 그 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창대서원(昌臺書院)에 제향되었으며, 공산회맹(公山會盟) 때 창화한 시 한 수가 전한다.(宣祖實錄, 燃藜室記述, 嶺南人物考, 永川邑誌, 昌臺鄭公實記, 金錫禧(韓國學中央硏究院))
정대임 : 예천 군수이다. 창대정공실기(昌臺鄭公實紀)는 정대임(鄭大任 ; 1553~1594)의 실기이다. 정대임의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대(昌臺),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이 책은 1869년(고종 6)에 후손 윤섭(允燮)이 수집․간행했다. 문집에 실린 단 한 편의 시만 실렸는데, 왜적의 침입에 대한 분노와 의병을 모아 토벌하겠다는 각오 등이 다각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임진왜란 중의 영천의병 관계를 정확하고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어 전쟁사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정대임의 아버지는 용(容)이며, 영천(永川) 출신이다. 임진왜란 때 종형인 세아(世雅)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대파, 영천, 경주, 밀양, 양산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593년 전공으로 예천 군수가 되었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왜적과 싸우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1600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등에 추록됐으며 1604년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영천의 창대서원(昌臺書院)에 제향되었다.(http://www.koreastudy.or.kr 2005)
정대임 [記事] : 한국문집총간(227_427a) 대산집(大山集)에 실린 대산 이상정(李象靖)의 예천군수(1593-1593) 정대임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贈戶曹參判鄭公墓碣銘/ ...又爲蔚山之戰。節度使權公應銖列聞于朝。遂進階中訓。守醴泉郡。郡當兵?之後。重以?札。公焦心盡慮。給軍餉應...”이다.(www.minchu.or.kr 2006)
정대임 [記事] : 한국문집총간(234_380c) 간옹집(艮翁集)에 실린 이헌경(李獻慶)의 예천군수(1593-1593) 정대임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南窓鄭公行狀/ ...。典工判書。始居永川。子孫仍家焉。是生諱光厚。仕我朝亦典工判。五代祖諱大任。當壬辰島夷亂。倡義立功。授醴泉..."이다.(www.minchu.or.kr 2006)
정대임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6 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실린 연려실 이긍익(李肯翊)의 예천군수(1593-1593)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영남(嶺南) 의병(義兵)/ ○ 병사 박진(朴晋)이 즉시 장계를 올려서 응수는 통정에 올랐고 《기재》에는, ꡒ절충조방장(折衝助防將)으로 발탁되었다.ꡓ고 하였다. 대임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으며 조성 등에게는 차등있게 상으로 관직을 주었다. ○ 응수는, 자는 중평(仲平)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갑신년에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병사에 이르렀으며, 선무공신 2등으로 두 번째이다. 에 녹훈되어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고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 정대임은, 본관이 영일(迎日)이다.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서 적군을 토벌하였고, 계사년에 공으로 예천 군수에 임명되었다. 용궁(龍宮)ㆍ비안(比安)에 머물고 있던 적군을 추격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숫자가 매우 많았고, 또 병사 박진을 수행하여 경주ㆍ울산에 있던 적군을 쳐부수었다. 뒤에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이다.(www.minchu.or.kr 2006)
정대임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6 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실린 연려실 이긍익(李肯翊)의 예천군수(1593-1593) 정대임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광해조(光海朝)의 상신(相臣)/ ... 이수일(李守一) 및 의병자 정대임(鄭大任) 등은 모두 안동과 예천 등지에 모이는 한편 효순이 이수... ”이다.(www.minchu.or.kr 2006)
정대임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1 刊)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실린 신경(申炅)의 예천군수(1593-1593) 정대임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재조번방지 2(再造藩邦志 二)/ ...을 얻었다. 사실이 알려지자 박진을 가선대부, 권응수(權應銖)는 통정대부로, 정대임(鄭大任)은 예천... ”이다.(www.minchu.or.kr 2006)
정대임 [記事] : 여지도서 / 補遺篇 (慶尙道) / 永川郡誌 / 人物 / ...鄭大任 高麗名 臣襲明十五世孫沌雅?整端重寡黙多大節少許許壬辰之亂奮不顧身倡義討賊設伏唐旨山下敎/ <하권0937-1>/ 賊無數又拏邑城屯倭巖兵四門外因風縱火賊沒數爛死一倭不返左道得全實賴一?之功也癸巳除醴泉郡守追擊龍當比安倭斬獲亦多冬與兵使 朴晉● 慶州太和之賊馳突合戰之除矢丸碎甲●不退避終日力戰以成大功左道一路之賊一時潰散無再北之患甲午登武科未及陞品而卒於軍中大任自變亂之後奮義忘身遇賊輒戰其盡忠立功爲一道之第一每以政愾自勵不以勳名爲心獻●之際讓功於邑宰金閏國前後事蹟載其時兵使 朴晉書啓中首相 柳成龍 徵毖錄贈戶曹參判...(www.history.go.kr 2007)
정대임 [記事] :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1일 무자 10번째기사/ 별장 권응수가 적을 격파하고 성을 회복하다/ 별장 권응수(權應銖)가 영천(永川)의 적을 격파하고 그 성을 회복하였다./ 당시 왜적 1천여 명이 영천성에 주둔하여 안동(安東)에 주둔한 적과 서로 응하여 일로(一路)를 형성하고 있었다. 영천의 사민(士民)이 여러 곳에 주둔한 의병과 연결하여 공격하기 위해 박진(朴晋)에게 원조를 요청하자, 박진이 별장인 주부 권응수를 보내어 거느리고 진군하여 공격하게 하였다. 권응수가 의병장 정대임(鄭大任)․정세아(鄭世雅)․조성(曺誠)․신해(申海) 등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다가 영천의 박연(朴淵)에서 적병을 만나 격파하고 그들의 병기와 재물을 거두었다. 이에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아 별장 정천뢰(鄭天賚) 등과 함께 진군하여 영천성에 이르니 적이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권응수가 군사를 합쳐 포위하고 성문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권응수가 큰 도끼를 가지고 먼저 들어가 적을 찍어 넘기니 여러 군사들이 용약하여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였다. 적병이 패하여 관아의 창고로 들어가자 관군이 불을 질러 창고를 태우니 적이 모두 불에 타서 죽었고, 도망쳐 나온 자도 우리 군사에게 차단되어 거의 모두 죽었으며, 탈출한 자는 겨우 수십 명이고 머리를 벤 것이 수백 급(級)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성을 수복하여 아군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안동 이하에 주둔한 적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尙州)로 향하였으므로 경상좌도의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권응수는 용맹스러운 장수로 과감히 싸우는 것은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상으로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방어사가 되었으며, 정대임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 정세아는 병력이 가장 많았으나 군사들을 권응수에게 붙이고 행진(行陣)에 있지 않았으므로 상을 받지 못하였으며, 나머지는 차등있게 상직(賞職)이 주어졌다./ 【영인본】 25 책 626 면/ 【분류】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7)
정대임 [記事] : 선조실록 44권/ 선조 26년( 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1월 5일 을묘 1번째기사/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각자의 의견을 말하게 하다/ 사시(巳時)에 상이 편전(便殿)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ꡒ경들은 각각 의견을 말하라.ꡓ 하였다. 심충겸(沈忠謙)이 아뢰기를, ꡒ요사이 국세를 살피건대, 점점 위급하고 절박해져 마치 오랜 병이 더욱 위중해져 원기가 시든 것과 같아서 아찔할 정도의 약을 투여하지 않는다면 날로 점점 여위어 마침내는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대신이 이미 내려가 있으니 급히 이런 뜻으로 송 경략(宋經略)에게 통고, 합세해서 진격하여 한번 사전(死戰)을 결행하게 해야 합니다. 양호(兩湖)의 물력(物力)이 한번의 싸움은 그래도 지탱할 수 있지만 오래 대치할 경우는 사세가 지탱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ꡓ 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중국이 이미 강화(講和)하기로 하였는데 총병(總兵)이 어찌 진격하려 하겠는가. 반드시 중국 조정에 상달하고 또 경략과 제독이 마음을 돌리게 한 다음에야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ꡓ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ꡒ앞서 총병의 말을 들어보건대 진격하려는 뜻이 있는 듯했고, 또 석 상서(石尙書)가 송 경략에게 보낸 글을 보건대 ꡐ형편에 따라 일을 해 가라.ꡑ는 말이 있었으니, 이런 뜻으로 좌상(左相)에게 하서(下書)하여 총병과 더불어 비밀히 의정(議定)하여 진격을 상의하게 함이 합당하겠습니다.ꡓ 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박진(朴晉)은 아뢰기를, ꡒ청하 현감(淸河縣監) 정응성(鄭應星)과 흥해 군수(興海郡守) 최보신(崔輔臣)은 시종 굳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농사짓고 수확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으니 그들의 공이 적지 않습니다만 상직(賞職)이 얼마인지 모르겠습니다. 연일 현감(延日縣監) 홍창세(洪昌世)는 이수일(李守一)과 군공(軍功)이 서로 비등한데 이수일은 이미 당상으로 승진했지만 홍창세는 아직 상을 받지 못했으니 억울한 것 같습니다. 양산 군수(梁山郡守) 변몽룡(邊夢龍)은 직접 자신이 돌격하여 수급(首級)을 일곱이나 베었고 군관을 나누어 보내어 용당(龍堂)에 있는 적선(賊船)을 모두 분탕(焚蕩)했습니다. 공이 변몽룡만 못한 사람이 도리어 그의 위에 있으니 억울해 하는 뜻이 있을 듯합니다.ꡓ 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공이 큰데 상이 작았거나 혹 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경이 모두 말해 보라.ꡓ 하였다. 박진이 아뢰기를, ꡒ경주(慶州) 최문병(崔文炳)은 자인현(慈仁縣)을 지키면서 국곡(國穀)을 수호, 4월에서 8월까지 버티고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청송 부사(靑松府使) 정신(鄭愼)은 한인보(韓仁溥)와 함께 힘을 다해 성을 지키면서 군량을 많이 도왔고, 의성 현령(義城縣令) 이여온(李汝溫)도 군량을 잘 조달하였으니, 그 공이 가상합니다.ꡓ 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권응수(權應銖)는 경의 부하(部下)에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장수가 될 만한가?ꡓ 하였다. 박진이 아뢰기를, ꡒ처사가 전도되고 군졸을 아끼지 않습니다.ꡓ 하고,
성룡은 아뢰기를, ꡒ주살(誅殺)이 지나치기 때문에 인심이 붙좇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천(永川)에서 세운 공은 덮어둘 수가 없습니다. 정대임(鄭大任)도 성심으로 적을 쳐서 그 공이 권응수와 다름이 없습니다.ꡓ 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정대임은 어떤 사람인가?ꡓ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ꡒ신이 그 위인을 보건대 장수가 될 만했습니다. 스스로 하는 말이 ꡐ나는 글을 모르므로 목민관(牧民官)은 될 수 없다. 장수로 정하여 내려보내어 일대(一隊)를 담당하게 해준다면 적들을 칠 수 있다.ꡑ고 하였는데, 그의 뜻이 가상했습니다. 그리고 영천에서의 공을 모두 권응수에게 돌리고 자신의 공은 말하지 않았습니다.ꡓ 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무슨 관직에 있는가?ꡓ 하였다. 아뢰기를, ꡒ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있습니다.ꡓ 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소원대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ꡓ 하였다. 박진이 아뢰기를, ꡒ정기룡(鄭起龍)은 접전할 때 말에서 내려 적을 베고는 말을 탔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조경(趙儆)이 적에게 살해될 뻔했다가 기룡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습니다.ꡓ 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옛적에는 항오(行伍) 가운데에서 발탁하여 등용하기도 했었다. 정기룡과 같은 사람을 판관(判官)에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ꡓ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ꡒ기룡은 젊고 재략(才略)이 있는가 하면 또 목민(牧民)에도 능합니다. 중국 장수를 접대할 적에도 성의를 다하여 친히 풀을 베어 오기까지 했습니다. 상주(尙州) 사람들이 모두 하는 말이 ꡐ판관(判官)을 목사(牧使)로 올리면 다시 판관은 낼 필요가 없다.ꡑ고 했으니, 이만한 사람은 요사이 보기 드뭅니다.ꡓ 하고, 박진은 아뢰기를, ꡒ상인(常人)으로 말한다면 울산(蔚山)의 백정(白丁) 장오석(張五石)과 사노(私奴) 김선진(金善進) 등이 모두 역전(力戰)한 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ꡓ 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이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관직을 제수해야 용동(聳動)된다.ꡓ 하였다. 박진이 아뢰기를, ꡒ경주(慶州)의 이극복(李克福), 정로위(定虜衛) 최봉천(崔奉天), 흥해(興海)의 이돈(李敦)․박응성(朴應聖) 등은 변란이 처음 발생했을 적에 도(道)에 주장(主將)이 없었으므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역전하여 공이 있었는데 모두 적에게 살해되었습니다.ꡓ 하니, 상이 주서(注書)에게 자세히 성명을 써놓게 했다. 심충겸이 아뢰기를, ꡒ우리 나라의 법령은 금방 세웠다가 바로 금방 폐지하는 것이 미안하게 생각될 듯도 합니다만 서인(庶人)들이 착모(着帽)하게 한 것은 인정이 모두들 편리하지 못하게 여깁니다. 성상의 뜻은 한결같이 중국 제도대로 하시려는 것이기는 합니다마는, 중국 군사라고 가칭(假稱)하면서 중로에서 작적(作賊)할 폐단이 있기도 합니다. 의주(義州)에서는 복색이 혼잡하여 간사한 짓을 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ꡓ 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내 생각에는 서인들이 소모(小帽)를 쓰고 금군(禁軍)은 전립(氈笠)을 쓰면 싸움하기가 편할 듯하였으며, 서리(書吏)들은 《대전(大典)》에 의하면 각각 써야 할 것이 있으므로 사람마다 모두 죽기(竹機)를 지니고 다니다가 비를 만나면 즉각 쓰면 되리라 여겼었다. 중국 장수들이 보고서 매양 조소(嘲笑)한다니, 고치는 것이 뭐가 해롭겠는가.ꡓ 하였다. 아룀을 끝내고 차례대로 물러갔다./ 【영인본】 22 책 119 면/ 【분류】 *의생활-관복(官服)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www.history.go.kr 2007)
정대임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30_0030_0110/ 여지도서 / 補遺篇 (慶尙道) / 永川郡誌 / 城池 / 邑城 萬曆辛卯新築壬辰倭寇屯據本郡義兵將進士鄭世雅及生員曹希益前縣令郭懷瑾等呈書于招諭使 金誠一以爲義兵爲諸守將沮抑散漫難集願奉節制誠一溫辭慰諭仍言訓鍊奉事 權應銖盡心招集屢却賊兵其令爲義兵大將諸義將令受指揮於是應銖益自奮勵與鄭世雅 鄭湛 鄭大任等乘西北風縱火城中掩擊大破之賊燒死殆盡自是新寧義兵義城 安東等屯聚之賊皆聞風奔潰左道郡邑之得保永川一戰之功也兵戈後頹廢不修今遺址?存(www.history.go.kr 2007)
정대임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30_0030_0190/ 여지도서 / 補遺篇 (慶尙道) / 永川郡誌 / 學校 / 文廟 在郡北二里 臨?書院 在郡北阿川里 文忠公 圃隱 鄭夢周享祀之所嘉靖癸丑建于浮來山下 賜額萬曆壬辰?于倭變壬寅移建道一洞事 聞復 賜顧臨?書院崇禎壬午配享文康公 張顯光乾隆丙午追配忠定公 皇甫仁創建鄕人金應生 盧遂 鄭允良移建鄕人朴點 金就礪 李喜白 鄭湛 李孝男 孫宇男 鄭四震事載本院考?錄 道岑書院 在郡南毛沙洞五芝山下贈參判 曹好益享祀之所 顯廟戊午 賜額 立巖書院 在郡北究里內 文康公 張顯光享祀之所守庵 鄭四震 東峯 權克立 愚軒 鄭四象 綸庵 孫宇男追配守庵本孫以三賢追享後位次不正辛卯夏奉退位版權享於元堂里私第 松谷書院 在郡/ <하권0927-3>/ 西北習里 泰齋 柳方善 忠莊公 李甫欽 警齋 郭珣 孝節公 李賢輔 領議政 沈之源 左參贊 尹鳳五合享 威襄公祠 在郡西二里威褒公 李順蒙享祀所 道溪祠 在郡南比召谷蘆溪 朴仁老享祀之所 龍溪書院 在郡北究里內騎龍山下生六臣靖簡公 李孟專 貞忠公 趙旅 貞簡公 元昊 靖肅公 成聯壽 淸簡公 金時習 文淸公 南孝溫合享之所 英廟戊寅營建院宇正宗癸卯俱蒙爵謚合集自營門?行 滄洲書院 在郡南蒼水里 忠貞公 曹尙治享祀之所 當?癸未忘機堂 曹漢輔 文忠公 曹漢英 屛崖 曹善長追享 昌臺書院 在郡北鳴山里 贈參判 鄭大任 南? 鄭梯享祀所 古川書院 在郡北還歸里贈刑曹正郞 金大海 贈漢城府判官 金演 贈戶曹正郞 崔仁濟贈工曹正郞 鄭碩男贈漢城府判官 李榮根 贈漢城府判官 李之? 贈儀賓府都事 李日將 贈漢城府判官 李得龍 贈漢城府判官 李得麟 贈儀賓府都事 孫應晛享祀之所 世德祠 在郡北還歸里 剛義公 鄭世雅 栢巖 鄭宜藩享/ <하권0927-4>/ 祀所 城南書院 在郡西山底里 甁窩 李衡祥享祀之所 周公箕子孔子顔子朱子?象奉安于本院 北溪影堂 在郡北鳴山里 承旨 鄭幹?享之所 蘇溪祠 在郡西北習里 文元公 田祖生享祀所松江田普新野田榮霽唐村田興霽從享(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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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