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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72-3:정대임(1593 부임-1593.11.5이후 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2.06.09 06:43:34

  예천고을원(72-3) : 정대임(1593 부임-1593.11.5이후 이임) : 임란 공으로 부임한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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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대임 : 人物/ 상위서지: 여지도서(輿地圖書) > 補遺篇 (慶尙道) > 永川郡誌/ 저자: 미상/ 분류: 고도서 > 사부(史部) > 지리류(地理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 총서/ 人物/ ...鄭大任 高麗名 臣襲明十五世孫沌雅?整端重寡黙多大節少許許壬辰之亂奮不顧身倡義討賊設伏唐旨山下敎/ <하권0937-1>/ 賊無數又拏邑城屯倭巖兵四門外因風縱火賊沒數爛死一倭不返左道得全實賴一?之功也癸巳除醴泉郡守追擊龍當比安倭斬獲亦多冬與兵使...//

 

  정대임(鄭大任) : 醴泉郡守贈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鄭公墓表/ 상위서지: 愼庵集 禮 > 愼庵文集卷之九 > 墓表/ 분류: 고도서 > 집부(集部) > 별집류(別集類)/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신암문집 (愼庵文集)/ 醴泉郡守贈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鄭公墓表 ( 醴泉郡守贈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鄭公墓表 )// ▣ 086/ 昔穆陵之世,長蛇起陸,食我封彊,?輿播越,八路幾?,惟時嶺之士大夫,群起赴難,拔距??,賊不能支,終成復國之績,在永川,則鄭公大任其首也,公初,從族兄湖?世雅遊,及聞難,卽仗劒馳見曰,君父在草莽,豈吾輩偸活時耶,遂草檄,聚義士,得數十百人,主?金潤國,棄城逃,遣人責之使還,節度使朴晉, 檄公隷麾下,或以爲辱,公笑曰,苟可以滅賊,寧辭屈耶,遂分兵設伏,遇敵輒?殺,又?其酋,奪其牛馬器仗,軍勢大振,時賊據本郡,四出剽掠,公謀於湖?,請傍邑諸義軍,以爲援,權公應銖朴公毅長,皆來會,/ ▣ 087/ 金潤國,亦涕泣乞效,遂與定約束,四面鼓?,撒灰縱火, 賊大亂遁走,乘而?之,其溺水蹈火相躪藉,死者無?,賊在安東以北者,首尾隔斷,退屯于尙州,餘黨散洛比安龍宮之間,公率輕脫進擊,斬獲甚衆,比安缺守,道臣啓請,公權署縣事,癸巳夏,以突擊前鋒,赴蔚山,與賊遇,身被數十創,猶殊死戰,賊遂退,節度使權應銖,列聞于朝,進階中訓,守醴泉郡,冬佐節度幕,甲午春,登武科,時賊爲天兵所逐,至鳥嶺,觀察使韓孝純,欲襲擊之,公不可,以兵扼其要,截其往來,賊夜遁,公積勞成疾,?還第,旣病??,皆殲賊?羞語/ ▣ 088/也,六月八日,遂終,距其生癸丑,爲四十二,某月日從葬于王龜洞先兆向午之原,訃聞特贈兵曹參議, 己酉,錄宣武原從功,加贈戶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嗚呼,世敎衰,士大夫知利,而不知義,知私其身, 而不知殉其國,雖職事所在,一遇變故,亦且回互顧望,至或棄而去之,如雉免逃者,多矣,如公者,名不在簡書,位不登執?,無慶賞,以誘於前,無刑法以驅其後,而乃奮起,草茅激,勸忠義,抗百途方張之寇,屹一路保障之勢,其兵謀師律夫,豈平日所事,而德義之勇,忠信之甲,有非老將宿?所能及者,是果無所本,/ ▣ 089/ 而然哉,公素有至行,痛不得終養,每遇節日,就先墓, 號哭三周,祭訖,閱日不御酒肉,稍長,自奮好學,尤喜朱子書,與湖?公講辨質難,大抵皆?節砥行之事也,故其臨難,首事奮義,效忠一戰,而復永川,再戰而定龍宮比安,三戰而掃?蔚山之賊,以成國家中興之基,?假之以年,仗鉞專?,其功業之盛,又?出於權都師李忠武諸公之下哉,?乎,朴晉金潤國,皆竊以爲己功,及晉自劾追啓,而?贈之典,亦未足以酬其萬一,觀公我自殉國,何勞之有之語,顧無事於爲公憾焉,而又何以强千古英雄之氣哉,公之先/ ▣ 090/ 迎日人,在麗,有諱襲明,以直諫,?死,中世,入我朝, 有工曹判書諱光厚,寔公七世祖也,曾祖以淑,祖允淡,考容,皆不仕,?金氏,贈參判應生之女,配貞夫人,鷄林金氏,參奉乾之女,生三男,長良弼,主簿,次良輔良佑,良弼一男,元頀,女適閔恬李琛朴昌宇生員, 良輔四男,以頀是頀之頀,惟頀女適朴明復李廷蘭曹士佶黃克復楊時春,良佑二男,就頀進頀,女適閔?黃鋌朴元揆,內外曾玄孫男女,百餘人,八世孫允燮,與余善,日以公實記,來示余,請所以表公墓者,晩慤曾讀塤?所爲狀,及大山李先生所撰碣銘,竊有/ ▣ 091/ 所景慕者,久之,今以托名爲榮,不敢以不文辭,//

 

  정대임(鄭大任) : 영남(嶺南) 의병(義兵)/ 서명: 燃藜室記述/ 저자: 이긍익(李肯翊)/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제공: 한국고전번역원/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 9월에 영천에 있던 적군이 봉고어사(封庫御史)라고 자칭하면서 신녕을 향하여 오는데, 안동(安東) 의병장 권응수가 정대임(鄭大任)ㆍ정세아(鄭世雅)ㆍ조성(曺珹)ㆍ신해(申海) 등과 함께 박연(朴淵)에서 만나 죽인 적들이 매우 많았다. 이때 영천 백성들이 그 고을에 주둔하고서 웅거한 적군을 무찌르려고 응수 등에게 구원을 청하여 왔으므로 응수 등이 함께 진군하여 추평(楸坪)에서 군사의 위엄을 보이니, 적들이 성문을 닫고 나오지 못하는데도 군사들은 적군을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응수는 담략과 용맹이 있어 곧장 군사 몇 사람을 베어 죽이고 뛰쳐 나가 군사들의 앞장을 섰다. 모든 군사들이 합세하여 성을 포위하고서 성문을 부수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진격하니 적군은 관사로 도망갔다. 바람을 따라서 불을 지르니 거의 다 타죽고 혹 물에 빠져 죽기도 하였다. 수백여 명을 죽였으므로 시체 썩는 냄새가 길에 가득하여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기재(寄齋)》에는, “응수가 군사 천여 명을 모집하여 한 사람당 섶 한 묶음씩을 들고서 밤에 영천을 공격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안동 이하 여러 곳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尙州)로 향해 갔으므로 좌도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 병사 박진(朴晉)이 즉시 장계를 올려서 응수는 통정에 올랐고 《기재》에는, “절충조방장(折衝助防將)으로 발탁되었다.”고 하였다. 대임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으며 조성 등에게는 차등 있게 상으로 관직을 주었다./ ○ 정대임은, 본관이 영일(迎日)이다.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서 적군을 토벌하였고, 계사년에 공으로 예천 군수에 임명되었다. 용궁(龍宮)ㆍ비안(比安)에 머물고 있던 적군을 추격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숫자가 매우 많았고, 또 병사 박진을 수행하여 경주ㆍ울산에 있던 적군을 쳐부수었다. 뒤에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정대임(예천군수 1593.7.17-1593.11.5이후) : 징비록 본문 [징비록]/ 유성룡 저 | 을유문화사/ ...로 달아났다. 이리하여 진은 경주 성안에 들어가 만여 석의 곡식을 얻었다.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박진을 가선(嘉善)으로 올렸고, 응수는 통정 (通政)으로, 대임은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삼았다. 진천뢰란 원래는 없었던 것으로, 군기시(軍器寺)의 화포장(火砲匠.../ 징비록 > 징비록 본문 > 제 1 권 > 좌병사(左兵使) 박진(朴晋)은.../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 고전ㆍ문학자료이다.//

 

  정대임 : 의병대장 창대 정대임(義兵長 昌臺 鄭大任. 1553-1594) 장군 종택| 종택&집성촌/ archi정(鏞和) 조회 34 | 09.11.20 01:36 http://cafe.daum.net/gjyw9/InXW/68/ 의병대장 창대 정대임(義兵長 昌臺 鄭大任.1553-1594)장군 종택/ 정대임(鄭大任): 1553(명종8)~1594년(선조27) 자(字)는 중경(重卿), 호(號)는 창대(昌臺). 영천군 대전동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명신 습명(襲明)의 16세손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으로 적을 대파, 이어 영천(永川)에서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돌격장(突擊將)으로 울산태화진(蔚山太和津)에서 역전한 공으로 예천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왜군과 싸우다 42세 일기로 전사(戰死)했다. 후에 나라에서 통정대부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을 내리고 선무원종공신 2등에 기록되고 광해군 원년에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부사로 가증되었으며 영천시 과전동 창대서원에 봉안되었다. 출처: http://blog.daum.net/bosar/13430782(daum 2010)

 

  정대임 : 16代 昌臺 정대임(鄭大任) [1553(명종 8)∼1594(선조 27)] /생원공파| 자랑스런 선조/ archi정(鏞和)/ 2009.11.20 01:43/ http://cafe.daum.net/gjyw9/NOCo/129/ 정대임(鄭大任)에 대하여 :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대(昌臺). 영천 출신. 아버지는 용(容)이며, 어머니는 증참판 김응생(金應生)의 딸이다. 증조부 윤식(允湜)에게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으로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 7월에 영천전투에 참가, 의병 100여명을 이끌고 의병대장 권응수(權應洙)의 휘하에 들어가 중총(中摠)의 직책을 맡고 활약하였다. 그 뒤 영천에서 신령으로 이동하는 적군을 권응수와 함께 요격, 박연(朴淵)에서 대승하고 영천수복에 공을 세웠다. 용궁·비안의 전투에서도 다수의 적을 참획(斬獲)하고 병사 박진(朴晉)과 함께 경주탈환전에 용명을 떨쳤다. 이듬해 태화강(太和江)의 적군을 공격, 종일 역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린 공으로 1593년 비안현감·훈련원첨정·예천군수·경상좌도 병마우후를 역임하였다. 1594년 무과에 급제, 승품(陞品)되기도 전에 적군과 싸우다가 죽었다. 그 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창대서원(昌臺書院)에 제향되었으며, 공산회맹(公山會盟)때 창화한 시 한 수가 전한다.(daum 2010)

 

  정대임 : 위대하신 창대공의 업적!| 자랑스런 선조/ 조은샘/ 2010.01.20 16:37/ http://cafe.daum.net/gjyw9/NOCo/128/ 의병대장 창대 정대임 장군 : 공의 자(字)는 중경(重卿)이요. 호(號)는 창대(昌臺). 본은 영일정씨(迎日鄭). 명종 8년(1553) 6월 4일에 경상북도 영천.대전동 제일봉하(第一峯下)에서 태어나시니 고려의 명신 정습명(鄭襲明)의 15대손이며. 전공판서 정인언의 8대손. 공조판서 정광후의 7대손. 父 정용의 외아들로 태어나시다. 공의 나이 7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고 8세에 종조부 현감 공(명종조 진사 태자사부.봉화현감 鄭允湜)에게 글을 배울 때 현감계서 이 아이는 총명하고 생각이 넓어 후일 반듯이 대성할 것이며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킬 큰 그릇이 될 것이라 하셨다. 글공부를 열중하면서도 효도하는 마음 또한 하늘에 닿음이라. 공의 10세에 부모 양친을 여의고 3년시묘 후 학업에 열심하며 선조의 묘역을 돌보며 당대의 유명인사와 교류하고 선비의 할일을 다하고 있을 때에 임진년 4월 13일 왜구(倭寇)가 대거 쳐들어와 난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선조 25년(서기 1592년) 공의 나이 40세 때에 왜구가 부산을 함락하고 군사를 3진으로 나누어 경성으로 진격해 가니 선조대왕은 의주로 피난길에 나섰다. 이때에 왜구들은 영천을 경상좌도의 요충지라 생각하고 진격하니 군수 김윤국이 도망가고 없는지라 무혈 입성하여 수만 명의 왜적들이 둔거하여 영천을 중심하여 좌우의 왜적들과 연락하고 인근 고을에 노략질하니 백성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에 先生은 당시 선비의 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분한마음 이기지 못하여 먼저 앞으로 나서니 의병의 시작이라. 제종제 鄭大仁과 더불어 먼저 의병을 일으키니 향중의사 정녕(鄭寧). 정담(鄭湛). 정천리(鄭千里). 정사진(鄭四震). 정석남(鄭碩南). 이번(李蕃). 이득용(李得龍) 이영근(李榮根) 조희익(曺希益). 조성(曺城). 조덕기(曺德騏). 곽회근(郭懷瑾). 신준룡(辛俊龍). 김대해(金大海). 최벽남(崔壁南). 최인제(崔仁濟). 김연(金演).등 60여명이 응해서 모였고 이어 모집을 더하여 文武 용맹스런 군사 수십 수백 인을 얻으니 군중에서 정대임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선생은 정대인을 시켜 기룡산에 둔거하고 있는 족형 정세아에게 알리고 논의케 한 바 형왈 찬성하며 기뻐하였다. 의병대장 정대임(鄭大任) 차장 조성(曺城). 조덕기(曺德騏). 이설(李?). 김호(金浩). 정담(鄭湛)으로 각 중임을 맏고 목숨 걸고 왜적 물리칠 것을 각오하였다. 장군은 먼저 정천리와 이번을 시켜 묘각사에 숨어있는 군수 김윤국을  찼아가 영천성을 복성하자 하니 김윤국은 의병들의 용맹을 보고 크게 부끄러워하며 장군의 뒤를 따라 산을 나왔다. 장군은 5월초에 대동(大洞)의 적을 처음 무찌르고 7월에는 당지산(영천과 금호사이의 산)에 복병하였다가 지나가는 왜적 20명을 사살 참수 40명하고 동년 7월 14일에 박연(화산면 석촌동앞)에서 신령의병장 권응수(權應銖)  의흥의병장 홍천뢰(洪天賚)가 거느린 의진과 합세하여 40여명을 죽이고 군수물을 많이 노획하고 의흥으로 달아나는 적은 권응수. 홍천뢰 등이 의흥 소계(召溪)에서  무찌르고  하양으로 달아나는 적은 정대임 장군과 정담이 와촌(瓦村)에서 무찔으니 군의 사기가 크게 떨치고 적의 세력은 많이 쇄퇴되었다.

 

  이어서 대장 정대임은 여러 의병장을 불러놓고 논의하기를 왜적은 연거퍼 패하였으니 기세가 쇄하여 있을 것이니 이때가 바로 영천성을 회복할 때다. 때를 놓치지 말자. 성안에 포로로 잡혀있는 우리 군사와 우리 백성을  구해야 한다. 고 큰소리로 외치다.  모든 장졸들이 함성으로 충성을 다짐하니 군의 사기가 등천했다. 장군은 부하 병사들을 시켜 이웃 여러 고을에 응원 병을 청하고 7월 23일에 郡南 추평(지금의 주남들)에서 진을 벌리고 화공전법을 논할 제  영천 서북 문 쪽으로 정하고 서북 문 앞에 섶을 쌓아두고 성을 넘을 사다리를 만들어 준비할 때에 신령의병장 권응수. 신령현감 한척. 의흥의병장 홍천뢰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24일에는 하양의병장 신해(申海). 하양현감 조윤신(曺胤申). 자인의병장 최문병(崔文炳). 경산의병장 최대기(崔大期).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 등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당도하니 그 합이 3.560여명이고, 의성 감사졸(결사대) 500여명이 합세하니 그 총합이 4.000여명에 이르는 대군을 이루게 되어 장군은 여러 지원군에 노고와 충의를 치하와 감사의 말을 하고 여러 제장과 전투계획을 제정비하다. 장군은 군기를 창의정용군(倡儀精勇軍)이라 깃발을 세우고 엄한 4계 군율을 세웠다. 군율1. 싸움에 있어서 겁을 먹고 불온한 말을 하는 자는 참한다.  군율2. 싸움에 있어서 적을 보고 5보 이상 물러나는 자는 참한다. 군율3. 싸움에 있어서 마음대로 독단하여 장수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참한다. 군율4. 싸움에 있어서 대오를 벗어나는 자는 참한다. 4계 군율을 정하여 포고하고 방하니 진세는 엄숙하였다. 7월 25일 성 밖으로 출입하는 왜적을 차단하고 물(식수)길을 끊고 26일에는 장군이 영천성 남문 쪽 수 백보 떨어진 강가로 진군하니 적장 2명이 명월루(조양각)에 나와 앉고 1.000여명의  군사가 명월루 좌우에 벌려 서서 조총을 난발하며 적장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무얼 하는 놈이냐.  경성이 이미 함락되였고 팔도가 이미 무너졌는데 너희들이 어찌 우리를 당하겠느냐  어서 항복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장수의 목을 베어 깃발 아래 달 것이다’ 하고 외쳤다. 이날 마침 해가 지고 어두울 즘에 포로가 되어있던 중이 탈출하여 와서 적이 내일 싸울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해줌으로 정천리(鄭千里)는 감사졸(결사대) 500을 거느리고 마현산(지금의 향교 뒷산)에 잠복해하고 정대임 대장은 남문을. 권응수 장군은 북문을 지키기로 서로 굳게 약속하기를  “네가 지키는 문을 실수하면 내가 너를 베고 내가 지키는 문을 실수커든 너가 나를 베라 하며 장군과 장군의 약속이 나라를 구하는 충성되는 언약은 많은 장군과 병사들의 가슴과 눈시울이 뜨거웠을 것이다.

 

  26일의 밤은 깊어가고 성을 에워싸고 있는 4.000여명의 병졸들은 대장의 진격 명령을 기다리며 초긴장하고 있었다. 칠월 그뭄의 밤은 칠흑 같은 밤이었다. 마현산 마루턱 나무 위에 올라서서 영천성내의 망을 보는 파수꾼의 눈에도 성내의 동태를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저녁 무렵에 성내의 적들이 조총을 메고 왕래하는 것을 상에 보고했지마는 지금은 보고할레야 할거리가 없다. 적들은 아마도 내일 낮 일전을 치루기 위해 깊은 잠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대장군 정대임은 제장들과의 숙의가 끝내고 각자 진지로 돌아가니 본진에 혼자 앉자있을 여유없이 각 진지를  순회하며 전투준비 태세를 점검하는데 27일의 새벽이 되자  고요히 잠자던 바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군의 계획이 적중했고 정천리 장군의 활약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명령은 하달되고 아군은 일제히 성문을 깨고 진격하는데 정대임 장군은 남문을 깨고 들어가니 적이 조총을 난사하고 벌떼 같이 대항하나 장군은 몸을 돌보지 않고 말을 달려 몸소 칼을 휘둘려 적진에 뛰어드니 적의 군사 사상자 추풍낙엽과 같았다. 이 광경을 성루에서 바라보던 왜장은 성에서 뛰어내려 내닫다가 정대임 장군의 칼에 목이 떨어지니 이가 곧 유명한 왜장 법화(法化)였다. 그때 권응수 장군은 서북문을 깨고 진격하니 적의 기병1.000여명이 성중에서 뛰어나와 조총을 난발하거늘 권응수 장군은 말을 종횡으로 달리며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니 말에서 떨어져 죽은 자 부지기수였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이 크게 일거늘 정천리는 감사졸 500명을 거느리고 마현산으로부터 뛰어들어 재와 모래를 날려 적을 혼란케 하고 병사를 시켜 포로가 되어 갇혀있는 옥과 우리 백성이 감금되어 있는 곳을 뛰어 다니며 우리가 왔으니 놀라지 말아라. 우리가 불을 지를 것이니 그 혼란을 타서 뛰쳐나오라 하며 소리치고 다니게 하였다. 곧이어 정천리 장군은 화공전을 명령하자 준비된 풀섶에 불을 지르니 불꽃은 하늘을 찌르고 성내는 대낮 같으며 군사의 함성은 우뢰에 비할 수 없더라. 성중의 왜적은 갈팡질팡 남문으로 퇴각하니  남문의 대장군 군사에 쓰러진 적군이 600인이요 흐르는 피는 내(川)를 이루게 하였다.  서북으로 달아나는 적은 권응수 장군이 무찌르니 칼에 베인 자 불에 타죽은 자 밟혀죽은 자 부지기수며 우리군사의 사상자도 많았다. 왜군들의 그 위세는 간곳없고  패잔병 수십 인은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경주쪽으로 도망가고 27일 새벽부터 종일토록 혈전 끝에 영천성을 회복하였다.

 

  이 얼마나 장한 일이냐.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이냐. 영천성을 탈환한 것은 왜구들이 침범하고 전국에서 영천이 맨 처음이라. 후세 제현들은 “영천성 회복은 영남을 얻었고, 영남을 지킨 것은 나라를 구했다.” 고 말했다. (無永無嶺 無嶺無國) 정대임 장군의 영천복성 공은 병사 박진의 보고서 착오로 받지 못하니 여려 제장들의 노여움이 심했으나 장군은 그들을 말리며 “나는 오직 내 힘을 다해 적을 쳤을 따름이라” 하고 영천의 승전공은 권응수 장군에게 돌리고 스스로 공을 이루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이 충성된 마음은 오늘날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선생은 대장군다운 智.勇뿐 아니라 학문에도 탁월하였음을 공산 회맹시에 잘 나타나 있다. 과연 장군은 고려명신 정습명의 충성어린 충간의 혈을 이어받음이요. 방조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절의 집안임을 의심함이 없도다. 동년 8월초에 비안 용궁의 적을 격파하고 8월 21일에는 경주 격전에서 공을 세우고. 9월에는 자인. 밀양. 양산 등지에서 격전하였고. 선조 26년 1593년 봄 비안현감. 5월 선약장군훈련첨정의 벼슬이 내려젔고. 6월 28일 울산 태화진에서 몸에 수 십군데 상처를 입고도 종일토록 격전하였고. 7월 중훈대부. 행 예천군수. 동 윤11월 보공장군 경상좌도병마우후의 벼슬을 받았으며. 선조 27년 갑오(1594) 2월 自上勸(자상권 : 임금이 내린 과거) 武科及第(무과급제). 동 2월 나라로부터 은환도(銀環刀). 옥각대(玉角帶)를 하사받았다. 3월에 순찰사 한효순(韓孝純)과 함께 상주당교(尙州唐僑)에서 적을 대파하고 병을 얻어 몸을 가누치 못하게 되어 六月初 고향으로 돌아와 구중에 적을 설복 하는 말만 하시다가 하루는 정녕(鄭寧)을 불러 난중일기를 모두 불사르게 하시니. 이 또한 장군은 명예와 포상에 뜻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6월 8일에 42세의 일기로 끝을 맺으니, 오호 통제라  선생의 그 고귀한 인품 그 어디. 그 누구에 비하랴. 기울어져 가는 이 나라를 떠받든 기둥이시여.... 그대가 만드신 삼귀 못 안 선영하에 고히 잠드소서. 공의 配는 慶州金氏요 子는 양필(良弼) 양보(良輔) 양우(良佑)요 그 후손은 영천 녹전동에 많이 살고 있으며 충.효의 집이라 일컫는다. 동년 6월 29일 나라에서  선생의 충의를 찬양하여 특증(特贈)으로 통정대부 병조참의를 받으셨고 1605년 4월 녹선무원종공훈.2등(錄宣武原從功勳二等) 공신(功臣) 기록되고.  1609년 3월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사. 정종. 병오 1786년에 영천 향문의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의해 창대서원(昌臺書院)을 공의 고향인 영천 녹전동 창녕곡에 창건하여 선생의 위폐를 봉안하게 되다. 2008년 12월 24일 先生의 11世孫   鄭元杓 書/ 참고문헌 : 선조실록 22권. 25권. 27권. 복재.영천성복성일기. 창대실기. 영양지. 휴먼벤처 그린원home. 징비록. 李弘植 博士 韓國史大辭典(daum 2010)

 

  정대임 : 의병장 창대 정대임(義兵長 昌臺 鄭大任.1553-1594)| ◈ 자유게시판 | 08.09.07 08:26/ http://cafe.daum.net/ycsuhmoongol/9Ctp/546/ 자(字)는 중경(重卿), 호(號)는 창대(昌臺), 본관(本貫)은 오천(烏川). 영천시 대전동에서 나시었다.

 

 八公山 會盟詩(팔공산  회맹시)// 自恨吾生際不辰 誰傾滄海洗狂塵(자한오생제불신 수경창해세광진)/ 淸風代壘尊周士 落日新亭泣晉人(청풍대루존주사 낙일신정읍진인)/ 有口幸添盤上血 輸忠方許劒頭身(유구행첨반상혈 수충방허검두신)/ 二千里外?輿駐 回首西灣拭淚頻(이천리외난여주 회수서만식누빈)// 공산 회맹시창화// 한스럽도다! 때 못탄 이내 몸이여! 뉘가 저 창해를 기우려, 미친 티끌을 씻어 낼고? / 청풍이 불어오는 대루(代壘)에는 나라 위하는 선비뿐이요/ 해지는 석양의 신정(新亭)에는 기우러지는 나라를 슬퍼하는 사람뿐이다./ 입이 있기에 다행히 맹세하는 피를 머금었고, 충성을 맹세하니 칼 머리에 몸을 허락했도다 / 저 멀리 이 천리 밖에, 난여(임금님의 수레)가 머무르고 있으니/ 서쪽으로 머리를 돌려 눈물을 뿌리노라. <내고장 전통가꾸기에서. 2008.9.7. 서문골 入力>(daum 2010)

 

  정대임 : 의병대장 창대 정대임(義兵長 昌臺 鄭大任. 1553-1594) 장군 종택/ 2009.08.06/ 정대임(鄭大任) : 1553(명종8)~1594년(선조27), 자(字)는 중경(重卿), 호(號)는 창대(昌臺). 영천군 대전동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명신 습명(襲明)의 16세손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 http://blog.daum.net/bosar/ 내일의 어제(daum 2010)

 

  정대임 : 명고영정(鳴?影禎) 유형문화재 제179호/의병대장. 정대임(烏川 鄭大任)장군/ 2008.12.23/ ...베풀어 그곳의 백성들이 그린 것이라는 얘기도 함께 전해온다. 경북 영천시 녹전동 의병대장 : 정대임 (烏川 鄭大任)장군 본관 : 오천. 호 : 창대, 자 중경, 활동분야 : 군사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정용군이라는.../ http://kr.blog.yahoo.com/jkyong51/ 산이좋은사람들 (바람)(daum 2010)

 

  정대임 : 정천리 장군/ 2009.11.02/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은 도망가고 임금마저 피란길에 오르니 호수공 정세아(鄭世雅) 창대공 정대임(鄭大任) 백운재 권응수(權應銖)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의사들과 분연이 창의(倡義)하여 5월초 대동전에서 적을 크게 물리치고.../ http://blog.daum.net/wooje3657/ 우재(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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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대임 : 의병과 독립군의 차이는?/ 2008.09.13/ ...수영군관(水營軍官)이었던 권응수(權應銖)는 신녕(新寧)에서 영천군수(永川郡守) 김윤국(金潤國) 등의 관군과 합세하여 싸웠으며, 그는 정대임(鄭大任)·정세아(鄭世雅)·조성(曺誠)·신회(申誨) 등과 함께 신녕·안동 등 경상좌도 지역을...(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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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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