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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78-1) : 노경임(1599-1600) : 고평제를 쌓을 때의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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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임(盧景任, 1569~1620)은 1599년(선조 32)에 박진종 군수 후임으로 부임하여 1600년(선조 33)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선산 사람, 자는 홍중(洪仲), 호는 경암(敬菴), 본관은 안강, 성균진사 수함의 아들, 경준의 동생, 경필(생원)의 형, 여헌 장현광의 제자이다.
1591년(선조 24)에 별시 문과에 병과 12위로 급제하였다. 1594년(선조 27) 11월 18일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고, 1595년 4월 5일 사헌부 지평을 거쳐 강원도 순안어사로 나갔다. 경상도 도체찰사 종사관 겸 홍문관 교리를 거쳐 1597년 5월 15일에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그 후 외방으로 나가 있다가 1597년 12월 29일에 사간원 헌납에 올랐다.
예천 군수로 재임 중인 1599년에는 약포 정탁 대감이 예천읍 고평리에 고평제를 쌓았고, 1602년(선조 35) 11월 7일에는 공주 판관을 이임하였다. 1604년 9월 8일에 군수, 1607년 6월 12일에 영해 부사를 거쳐 성주 목사에 올랐다.
일찍이 스승 장현광의 심부름으로 정인홍의 인품을 관찰하고 돌아와 대단히 간사한 인물이라 말했던 일이 후에 정인홍에게 알려져 성주 목사로 있을 때 무고한 탄핵을 받고 파직, 이 때부터 낙동강변에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선산에서 작고했다. 저서로 「경암집」이 있다.
노경임이 예천고을 원을 할 무렵인 1599년(선조 32) 6월 24일에 「기로연시화첩」(보물 494호)이 만들어졌고, 용문사 대장전이 중수되었다. 이듬해에는 예천읍 고평리 사람인 정탁이 좌의정에 올랐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529號, 2002-10-10 17:41:55)
노경임(盧景任) : 1599년(선조 32)에 부임, 1600년(선조 33)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재임 중인 1599년에 정탁(鄭琢)이 고평제(高坪堤)를 쌓았다. 1569(선조 2)-1620(광해군 12), 선산 사람, 자는 홍중(洪仲), 호는 경암(敬菴), 본관은 안강(慶州 安康縣), 성균진사 수함(守함)의 아들, 경준(景俊)의 동생, 경필(景필, 1554生, 字懼仲, 生員)의 형,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이자방연(異姿倣然)한 바가 있고, 성인 의도(成人儀度)를 갖추었고, 아버지 송암(松菴)이 임종에, '차자필대오문, 사역하한(此子必大吾門 死亦何恨)'이라고 했다. 1591년(선조 24)에 별시 문과에 병과 12위로 급제, 예조 정랑 등 예각(藝閣)과 괴원(槐院)에서 일하였고, 순안어사(巡按御史)로 강원도에 나가 삼척부사(三陟府使) 홍인걸(洪仁傑)의 비행을 적발했다. 임란 중에는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휘하에서 창의 모병(倡義募兵)하여 크게 신임을 얻었고, 이원익이 와병하자 대신 싸워 크게 공을 세웠다. 이듬해 1593년에는 승문원 정자에서 저작, 박사로 승진했다. 그 후 1595년에는 사헌부 지평, 예조 좌랑을 지냈고, 관동순안어사(關東巡按御史)로 나가서 문란한 기풍을 다스리는데 주효(奏效)한 바 컸다. 1599년에 예천 군수, 그 후 다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고, 이에 앞서 스승 장현광(張顯光)의 심부름으로 정인홍(鄭仁弘)의 인품을 관찰하고 돌아와 대단히 간사한 인물이라 말했던 일이 후에 정인홍(鄭仁弘)에게 알려져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무고한 탄핵을 받고 파직, 이 때부터 낙동강변에 영귀당(詠歸堂)을 지어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더욱 만년에는 모로림(慕魯林)에 우거(寓居)했고, 선산에서 작고했다. 저서로 <경암집(敬菴集)>이 있다. 그는 자품(資稟)이 독후(篤厚)하였고, 기도(器度)가 굉원(宏遠)하였고, 만사에 단엄 경근(端嚴敬謹)하였다.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였고, 시문(詩文)에도 탁월한 바 있다. 특히 근사록(近思錄)을 즐겨 읽었고, 벽에 '관홍후중정대(寬弘厚重正大)' 여섯 자를 써서 자경(自警)으로 삼았다. 그는 태극설(太極說), 성리학은 물론 천문(天文)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고, 주경치지(主敬致知)에 힘썼고, 또한 역행지사(力行之士)였다. 한편 독어효우(篤於孝友)했고, 또한 이광정(李光庭)이 평하 듯 풍금표새(風襟瓢새)하고 신운동철(神韻洞澈)했다. 그는 또한 산수를 좋아하여 섭렵(涉獵)했고, 그의 충후심정(忠厚沈靜)과 상시우국지념(傷時憂國之念)은 그의 시문에 넘치고 있다.
노경임(盧景任) : 1569(선조 2)-1620(광해군 12), 1599년(선조 32)에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하여 1600년(선조 33)에 이임, 재임 중인 1599년에 정탁(鄭琢)이 고평제(高坪堤)를 쌓았다. 자는 홍중(洪仲), 호는 경암(敬菴), 본관은 안강(安康), 1591년(선조 24) 문과(文科)에 급제, 순안어사(巡按御史)로 강원도에 나가 삼척 부사(三陟府使) 홍인걸(洪仁傑)의 비행을 적발했다. 1599년(선조 32)에 예천 군수, 그 후 다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고, 체찰사 이원익(體察使李元翼)의 휘하에서 크게 신임을 얻었다. 이에 앞서 스승 장현광(張顯光)의 심부름으로 정인홍(鄭仁弘)의 인품을 관찰하고 돌아와 대단히 간사한 인물이라 말했던 일이 후에 정인홍(鄭仁弘)에게 알려져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무고한 탄핵을 받고 파직, 이 때부터 낙동강변에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선산에서 사망했다. 저서로 <경암집(敬菴集)>이 있다.
노경임 [記事] : 한국문집총간(074_010d) 경암집(敬菴集)에 실린 예천군수(1599-1600) 노경임(盧景任)의 본인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敬菴先生文集卷之一/ 詩/ 秋日登鶴駕山有感 庚子八月。自醴泉棄郡歸河上。因携書上山。/ 俯視人?六十州。山河形勝入閑愁。古今無限奇男子。幾誤紅塵空白頭。”이다.(www.minchu.or.kr 2006)
노경임 [記事] : 한국문집총간(074_027b) 경암집(敬菴集)에 실린 노경임(盧景任)의 예천군수(1599-1600) 때의 본인 기사로, 그 내용은, “敬菴先生文集卷之二/ 書/ 答天朝指揮王來徵己亥知醴泉郡時/ 歸省母病。浹旬始返。伏蒙老爺寄書。?讀再三。感涕先零。況四段吳布。一雙越椒。俱是老爺心?。尤極隕越。非老爺至誠待人。何望至此。老爺來臨小邦。累經風霜。勞,費多少精力。活我嶺外生靈。欲報恩德。粉骨難旣。下敎席子紙地。敢不竭力以副。第弊郡屢歷兵火。人民散亡。什無一二。辦出無路。伏地惶悶。俯惠布椒。固當伏受。但念老爺是天朝大官。郡守乃小邦微官。安敢偃然自尊。仰受老爺大人之賜。玆敢伏還臺下。伏乞寬恕。千萬幸甚。久闕?候。心極??。玆發一介。敬問起居。兼貢鵝毛之?。伏願老爺勿享其物。惟享賤?。”이다.(www.minchu.or.kr 2006)
노경임 [記事] : 한국문집총간(074_072a) 경암집(敬菴集)에 실린 이재(李栽)의 예천군수(1599-1600) 경암 노경임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通訓大夫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敬菴盧公行狀。/ ...見其志之所在矣。戊戌春。拜司諫院獻納。帶三字緘如故。移宗簿寺典簿。皆辭不就。明年春。除醴泉郡守。以右文興學...”이다.(www.minchu.or.kr 2006)
노경임 [記事] : 한국문집총간(091_141d) 학사집(鶴沙集, 1776)에 실린 학사 김응조(金應祖)의 예천군수(1599-1600) 경암 노경임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敬庵盧公墓碣銘/ ...爲校理。未幾南下。戊戌。拜獻納典簿。皆不就。自是十餘年間。棲遲外府。歷醴泉,?基,寧海,星州。先是。旅軒先...”이다.(www.minchu.or.kr 2006)
노경임 [記事] : 한국문집총간(049_102a) 겸암집(謙菴集, 1742)에 실린 김홍미(金弘微)의 예천군수(1599-1600) 노경임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謙菴先生年譜卷之二/ 附錄/ 行狀 金弘微/ 公姓柳氏。諱雲龍。字應見。號謙菴。世爲?山人。...公配鐵城李氏。參奉容之女。府院君原之後。生三男二女。長?。平陵察訪。娶宋惟愼女。生二男一女。長元直。娶直長安?壽女。餘幼。次?。狼川縣監。娶府使金克一女。生四男二女。皆幼。次?。娶部將裵斯立女。生一男三女。皆幼。女長適靑松府使金弘微。生三女二男。女適士人權克載。餘幼。次適醴泉郡守盧景任。生二女。皆幼。弘微處公門下幾三十年。蓋嘗託之以肝膈。諸孤謂弘微辱知最親。得公志行宦業頗悉。請有所記述。弘微義不敢辭。謹据相公所撰墓誌。而略爲序次如右。豈敢期爲秉筆者所裁。幸姑以少抒區區愴慕之?云爾。萬曆三十一年歲在癸卯秋八月。女壻通政大夫前府使金弘微。謹志。”이다.(www.minchu.or.kr 2006)
노경임 [記事] : 한국문집총간(173_357c) 밀암집(密菴集, 19세기)에 실린 이재(李栽)의 예천군수(1599-1600) 경암 노경임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弘文館校理敬菴盧公墓誌銘/ ...兼春秋知製敎。外則關東巡按御史。體府從事官。公州判官。結城縣監。醴泉,?基郡守。寧海府使。星州牧使。而公州...”이다.(www.minchu.or.kr 2006)
노경임 [記事] : 한국문집총간(173_389b) 밀암집(密菴集, 19세기)에 실린 이재(李栽)의 예천군수(1599-1600) 경암 노경임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通訓大夫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敬菴盧公行狀。/ ...諫院獻納。帶三字銜如故。移宗簿寺典簿。皆辭不就。明年春除醴泉郡守。以右文興學爲治。?任半年。風化大行。尋謝...”이다.(www.minchu.or.kr 2006)
노경임 [記事] : 한국문집총간총목차 074집 경암집(敬菴集)에 실린 예천군수(1599-1600) 경암 노경임(盧景任)의 기사로, 그 내용은, “...與柳叔正季華丁未 27 答天朝指揮王來徵己亥知醴泉郡時 27 與鄭君燮丙申 27 答鄭君燮 ...”이다.(www.minchu.or.kr 2006)
[선조실록] : 1594년(선조 27) 11월 18일에 사간원 정언을 제수받았는데, 왕과 함께 원균의 체직 등을 논의(1594.12.1)하였고, 또한 도원수의 체직을 논의(1595.1.22)하였다. 사헌부 지평(1595.4.5)을 거쳐 강원도 순안어사(巡按御史)로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왜적에게서 도망친 우리 나라 사람들을 무고하게 죽인 방백을 탄핵(1595.7.26)하니, 왕이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도체찰사의 종사관으로서 상사(上使)의 탈출한 사실과 부사는 적의 영내에 있음을 아뢰었고(1596.4.12), 1597년(선조 30) 1월 1일 영남에서 상경하여 왕을 알현하였고, 동년 1월 24일에도 도체찰사 종사관 겸 홍문관 교리로서 왕을 알현하였다. 그 후 성균관 전적(1597.5.15)을 거쳐 외방으로 나가 있었고(1597.12.29), 사간원 헌납(1597.12.29)에 올랐다. 예천 군수(1599) 재임 중인 1599년에 약포 정탁이 고평제(高坪堤)를 쌓았다. 1602년(선조 35) 11월 7일에는 공주(公州)의 신임 판관(判官)으로서 장령 조정견(趙庭堅)의 탄핵을 받았다. 그 후 풍기 군수(1604.9.8), 영해 부사(1607.6.12)를 거쳐 성주 목사에까지 벼슬이 이르렀다가 선산에 머물었다. [광해군일기] : 1617년(광해군 9) 7월 4일에는 비변사(備邊司)가 유장(儒將)으로 노경임을 천거하였고, 또 이듬해 10월 3일에도 천거하였다.
[저서] : 시문집으로 <경암선생문집(敬菴先生文集)>(奎4704, 7卷 3冊, 木版本, 30.7x19.8cm, 四周雙邊, 半郭은 21.5x15.7cm, 有界, 10行 22字, 版心은 上下花紋魚尾)이 있는데, 1784년(정조 8)에 5세손 억이 간행하였다. 제1책 권수(卷首)에 이광정(李光庭)의 서문과 목록과 권1-2가 있다. 권1에 시(詩) 75수, 장단구(長短句) 4수, 사(辭) 4편(山中辭, 冷岳辭, 歸故山辭, 最晩黃辭), 권2에 서(書, 13), 서(序, 4), 기(記, 9), 서(書)에는 '여김석윤, 최현, 김천영 제인(與金錫胤崔睍金天英諸人)'으로 '상고두곡(上高杜谷)', '여향교향소첨장(與鄕校鄕所僉丈)' 등, 잡저(雜著)에는 '시교유문(示校儒文)', '유향소문(諭鄕所文)' 등, 서(序)에는 '수본종보서(修本宗譜序)', '수외보서(修外譜序)' 등, 기(記)에는 '등냉산기(登冷山記)', '월막산수기(月幕山水記)' 등이 있다. 제2책 권3은 설(說, 28)로 '인설(人說)', '천명설(天命說)' 등, 권4도 설(14)로 '천지설(天地說)', '남북극설(南北極說)' 등, 변(辨, 5)으로 '자고변(自顧辨)', '처향변(處鄕辯)' 등, 지(識, 4)로 '선부군송암공만박용암시후지(先府君松菴公輓朴龍巖詩後識)', '주초사후지(註楚辭後識)' 등, 유사(遺事, 1)로 '선부군송암공유사(先府君松菴公遺事)', 제문(祭文, 5)으로 '제외구겸암선생문(祭外舅謙菴先生文)' 등이 있다. 제3책 권5에 부록, 권6에 속집(續集), 권7에 보유(補遺), 5세손 억의 '경암집후지(敬菴集後識)'와 이재(李栽)의 '발문'이 있다. 권5 부록에는 이재가 찬한 행장(行狀), 묘지명(墓誌銘), 김응조(金應祖)가 지은 묘갈명(墓碣銘), 장현광(張顯光)이 쓴 제문(祭文) 및 기타 인사(人士)의 제문과 만사(輓詞)가 있다. 권6 속집에는 시(詩) 34수와 서(書, 4)로 '여장후세철(與張侯世哲)' 등, 잡저(雜著, 3)로는 '존심양성설(存心養性說)', '제관동행록후(題關東行錄後)', '제노적록후(題奴賊錄後)', 유사(遺事, 1)로 '서애선생유사(西厓先生遺事)', 제문(祭文, 3)으로 '여단기우문(여壇祈雨文)' 등, 묘지(墓誌)로 '평릉도찰방유공묘지(平陵道察訪柳公墓誌)'와 제문이 있다. 권7 보유(補遺)에는 '연중주대(筵中奏對)', '향병약속문(鄕兵約束文)'이 있다. 그의 시는 농려섬세(濃麗纖細)한 속에 철리(哲理)가 깊이 들어있다 하겠고, 충후 심중(忠厚沈重)한 기풍과 탈속 초진(脫俗超塵)한 고답(高踏)한 분위기가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특히 칠절(七絶)에 뛰어났고, 문학사(文學史)에 있어서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율시(律詩)의 묘(妙)가 있다. 앞편 그는 시로써 철학과 사회 및 자기를 그리는데 장기(長技)를 보였고, 시에 사상을 잘 엮어 넣었다 하겠다. '소취음(小醉吟)', '호오음(好惡吟)', '세안음(歲晏吟)', '석일음(昔日吟)' 등은 철학시(哲學詩)의 대표작이라 하겠다. 난(亂)에 있어서도 자자구구(字字句句)가 생생하게 천지 자연과 인간 오성(悟性)의 결합을 잘 풀었다. 서(書)에서는 '여 김석윤 최현 김천영 시인(與金錫胤崔睍金天英詩人)'에서 쇠미(衰微)한 학풍의 진작을 역설하고 있어 그의 학문 정신을 잘 알리고 있다. '여최계승(與崔季昇)' '답최계승(答崔季昇)'에서는 붕우지도(朋友之道) 및 군자지도(君子之道)를 심각하게 논하고 있다. '설(說)'은 주로 그의 철학 사상을 알리는 저술로 그의 '주경이립기본, 궁리이치기지(主敬以立其本 窮理以致其知)'의 주장을 잘 풀은 것이다. 특히 설(說)의 문장에 어록체(語錄體)가 보인다. 또한 설(권4)에서는 천지 자연 등에 관한 설이 많이 보인다. '변(辨)'은 철학과 문장 즉 '문질(文質)이 빈빈(彬彬)하게' 엮어진 명문(名文)이고, 특히 '자고변(自顧辨)' 등은 자기의 성격, 생활을 그린 것으로 그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유사'로서 '선 부군 송암공 유사'도 그의 아버지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속집에 있는 시로 '상시'(傷時, 七絶)는 충군 애국(忠君愛國)하는 열성과 정허(靜虛)한 노심(老心)을 그린 걸작이고, '경암우음(敬菴偶吟)'은 그의 사상, 행동의 지침인 주경(主敬)을 테마로 한 시이다. <경암집(敬菴集)>의 편간(編刊)에 대해서는 서발(序跋)로 대략 다음과 같음을 알 수 있다. 1729년(영조 5) 10월 하완(下浣)에 쓴 이재(李栽 ; 字 幼材, 號 密菴)의 발문에 대략 "공의 죽은 후 백여 년이 되었으나 유문(遺文)이 나오지 못했거늘, 증손(曾孫)이 수습하고 성편(成編)하여 자기에게 교감고정(校勘考訂) 및 편찬을 맡기어, <경암집> 몇 권을 꾸민다." 라고 했다. 이는 또한 1784년 7월에 그의 5세손 억이 '경암집 후지(敬菴集後識)'에서 왕고(王考)께서 갈성(竭誠) 수집 편질(編帙)하여 밀옹(密翁)에게 감교(勘校)를 전담시켰다." 함과 일치한다. 이상으로 그 수습 편집은 이미 1729년 이재가 그의 4세손을 도와 이룩했음을 알겠다. 또, 저서인 <경암집(敬菴集)>(KDC 810.829)은 서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91년에 출판하였는데, <성소복부고(惺所覆부稿)>(許筠), <벽오유고(碧梧遺稿)>(李時發)와 합철되어 536쪽, 26cm이고,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강원대, 경북대, 계명대(중앙), 성균관대(서울), 숙명여대, 안동대, 연세대(서울중앙), 울산대(중앙), 충남대, 한국기술교대이다. 또 <경암선생문집(敬菴先生文集)>(DDC 895.7, 20판)은 한국역대문집편찬위원회에 편집하여 서울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1998년에 출판하였는데, 381쪽, 영인본(影印本), 23cm이고,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부산외대, 성균관대(서울), 전남대이다. 또 그의 저서인 <역설(易說)>(KDC 141, 4판)은 <주역건곤봉설(周易乾坤封說)>(朴知誡, 1573-1635)과 합철되어 서울 한미문화사(韓美文化社)에서 1998년에 출판하였는데, 498쪽, 23cm이고,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강원대, 서강대, 성균관대(서울), 단국대(서울), 전북대(중앙)이다.(인터넷 야후 2001)
노경임(盧景任) : 1569(선조 2, 기사) ~ 1620(광해군 12, 경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강(安康). 자는 홍중(弘仲). 호는 경암(敬菴). 선산(善山) 출생. 진사 수함(守?)의 자. 처부(妻父)는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 장현광(張顯光)의 문인. 1591년(선조 2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순안어사(巡按御史)로 강원도(江原道)에 내려가 삼척부사(三陟府使) 홍인걸(洪仁傑)의 비행을 적발ㆍ처결하였다. 그 후 다시 지평(持平)을 거쳐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고,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 밑에서 신임을 얻었다. 이에 앞서 정인홍(鄭仁弘)의 인품에 관하여 간사한 인물이라고 장현광(張顯光)에게 보고한 사실이 뒤에 알려져,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뒤로는 향리 선산의 낙동강변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ㆍ光海君日記ㆍ國朝人物考(www.koreastudy.or.kr 2007)
노경임 [記事] : 안동하회마을/ 간행년 : 1996/ 저자 : 서수용/ 발행처 : 안동문화원/ 3. 누대(樓臺)와 정사(精舍)/ 5) 만송정(晩松亭) : 겸암 선생의 정자로 지금은 손수 심은 소나무 숲만 남아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83년 4월 청명일에 14대손 우천(友川) 류단하(柳端夏) 옹의 기문이 적힌 『만송정비(萬松亭碑)』가 16대 종손 류상붕(柳相鵬) 씨 명의로 세워져 있다... 지금 만송정은 한 기(基)의 비석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에 정자가 있었는지 아니면 소나무를 심고 그곳을 정자로 삼았는지 알 길이 없다. 필자 역시 한편의 시 외에는 정자와 관련된 아무런 자료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실재 여부에 대해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겸암 선생의 둘째 사위인 경암(敬菴) 노경임(盧景任:선조2, 1569~광해군12, 1620, 예천군수(1599-1600))의 문집에서 「하상송정기(河上松亭記)」를 발견하여 정자가 실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겸암 노종부 선산 김씨를 통해서 ꡐ정자터ꡑ가 구전해 오고 있다는 사실도 들을 수 있었다. 경암은 안강(安康) 노씨(盧氏)의 대표적 인물로 1591년(선조24) 문과에 급제하여 성주 목사 등 직을 지낸 사람이다. 22살 때 경암에게 시집간 숙부인(淑夫人) 류씨는 2남 4녀를 잘 키운 뒤 52세에 세상을 떠난 남편보다 30년 뒤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경암은 어려서는 여헌 장현광에게 배웠고 성장해서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성리학에 침잠했다. 서애 선생은 임종 때에 셋째 아들 수암 류진을 보고 ꡒ내가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중후(重厚)하고 침정(沈靜)함이 이같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너희들은 그를 스승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ꡓ라 했다 한다. 훗날 수암은 경암(敬菴)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쌓았다./ 하상송정기(河上松亭記)/ 송정(松亭)이란 나[敬菴 盧景任]의 장인 겸암공(謙菴公, 柳雲龍)께서 지어서 머물러 계셨던 정자다. 그러나 공께서 세상을 떠난 뒤에는 창틀이 부숴지고 다니시던 길은 잡초로 뒤덮히고 말았다. 내가 고향[善山]으로부터 처가인 하회(河回)로 와 비로소 이 정자를 수리해 거문고와 책을 옮기고 그 안에서 글을 읽으며 나의 취미를 붙였다. 정자 앞으로는 파란 물결이 둘러 있고 뒤로는 푸른 봉우리들이 솟아 있으며, 길게 드리운 모래밭이 아득히 보이고 묵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펼쳐졌다. 또한 푸른 부용대 절벽과 밥 짓는 연기가 창문에 어려 춘하추동 아침 저녁으로의 흥취란 그 변화가 다함이 없었다. 꽃이 피면 봄이 되고 잎이 지면 가을이요, 여름의 짓푸른 잎새며 겨울의 하얗게 내려덮힌 눈. 해가 뜨면 숲에 어린 아침 이슬이 걷히고 구름이 몰려와 정자가 어둑해지기도 한다.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한낮이면 보던 책을 덮고 가만히 그 소리를 듣는데 솔바람 소리가 참으로 소슬하여 유연히 자연의 참맛을 느끼게도 된다. 또한 달이 두둥실 떠오른 깊은 밤, 발(簾)을 걷고서 바라보면 달무리가 은은하여 훌쩍 티끌 세상을 떠난 듯 하기도 하다. 정자의 경치는 더할나위 없다 할 것이다. 아! 만고를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자연인데 그 사이에 오가는 사람들은 꿈과도 같기에 그 즐거움과 슬픔을 또한 이곳에서 삭힐지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 또한 괴로움일 것이다. 공께서 이 정자를 지은 것도 반드시 그 사이에 뜻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십년도 못되어서 장인께서 돌아가시니 알 수 없는 것은 사람의 일이라. 이렇게까지 되고 말았다. 어찌 슬프지 않는가. 이에 그 느낌을 적어 기문을 삼는다. 『경암집』(www.koreastudy.or.kr 2007)
노경임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190_0290/ 여지도서 / 慶尙道 / 善山 / 人物 / ...康復誠 惟善之子受學於蘇齋 盧守愼中進士被薦除 王子師傅官至知中樞府事 金宗武 就文之子官至察訪壬辰之亂過家不入直祗巡邊使 李鎰陣及軍敗下馬整衣冠呼其僕授一?曰我卽死於國矣汝持此告家人力戰而死事 聞旌閭享于尙州忠烈祠 盧景任 登文科官至校理 崔晛 受業/ <하권0457-3>/ 於文穆公 鄭逑之門登文科文詞才望見推一時歷翰玉拜大成官至監司 朴敬祉 松堂 英之玄孫登武科又擢重試壯元拜摠戎事平時不設寢具常有朔野枕戈之志官至左尹...(www.history.go.kr 2007)
노경임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0_0110_0340_0260/ 여지도서 / 慶尙道 / 寧海 / 名宦 / 高麗 金守雌 以母老乞郡出爲禮州防禦使 尹華傑 忠宣王時貶爲知府 李混 爲府使取海中浮?製爲舞鼓至今傳樂府 禹倬 爲司錄民惑八鈐神奉祀甚瀆倬至卽碎而沈于海涇祀遂絶 金乙寶 爲萬戶 朴文富 爲兵馬使 新增李壽俊 兵火之餘召聚流逋振業蘇殘 鄭經世 以本道監司左授本府官至吏判 盧景任 廉簡爲治弊去民安特 賜表裏(www.history.go.kr 2007)
노경임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a_025_0020_0010_0040/ 용호한록 / 龍湖閒錄二 / 第六冊 / 三一八, 東國文獻門生篇 / 張旅軒從遊․鄭經世 愚伏 文莊 ․郭再佑 忘憂堂 ․徐思遠 樂齋 。 張旅軒門人 寒崗淵源 ․許穆 眉? 文貞 ․金應祖 鶴沙 ?判 ․金湜 沙西 文毅 ․柳袗 修庵 持平 ․鄭四震 守庵 洗馬 ․趙任道 澗松 持平 ․盧亨弼 雲堤 師傅 ․申悅道 懶齋 掌令 ․金慶長 龜庵 ․李▣(?+宙) 學稼 ․鄭克後 雙峯 師傅 ․張乃範 克明堂 ․權濤 東溪 ?議 ․盧景任 敬庵 校理 ․金烋 敬窩 ․張慶遇 晩悔堂 ?奉 ․李道長 應敎 ․趙尙禹 時庵 ․呂爾載 判書 ․金? 浴潭 ․申佑德 直正 ․呂爾載 提學 ․蔡? 栢浦 佐郞 ․朴吉應 ?判 ․李民? 紫巖 ?判 ․金瀁 陽灘 ․張泉 南坡 ?奉 ․許厚 觀雪 南臺 ․盧亨運 素庵 ․申達道 修撰 ․柳□ 人皆石山 ․安應昌․洪履一 府使 ․姜大遂 大諫 ․金光繼 敎官 ․姜弘重 府使 ․徐?仁 文岩 ․鮮于浹 遯齋 ․鄭四象 愚軒 ․李善述 縣監 ․李道昌 別座 ․李廷機 慢翁 牧使 ․呂孝曾 府使 ․韓夢參 釣隱 ․李廷相 蓴湖 郡守 ․金厦樑 灘翁 持平 ․張以兪 芥翁 ․申起漢 縣監 ․李之英 記注官 ․申楫 司果 ․金友益 正郞 ․權益? 琴谷 ․李惟泰 草廬 ․李? ?奉 ․鄭四勿․金益精․柳時稷․申泳道․孟世衡․具致用․成? 府使 ․鄭好仁․崔晛 忍齋 監司 ․朴敏修․任景尹․裵尙龍 藤庵 。 趙重峰門人 栗谷淵源 , 尹?光․閔昱․朴廷虎․金節․全忠男․朴士振․全承業․金善復 以上, 皆錦山戰亡 ․卜應吉 錦山戰亡 ․申慶一 錦山戰亡 ․徐應時 錦山戰亡 ․尹汝翼 錦山戰亡 ․金聲遠 錦山戰亡 ․朴渾 錦山戰亡 ․趙敬男 錦山戰亡 ․高明遠 錦山戰亡 ․姜夢祖 錦山戰亡 ․金? 五者翁 ․朴事三 安靜 ․趙完基 先生子 ․李宗彦․李宗喆․梁千會․朴允明․朴景修․崔重龍․崔虎 文伯戰亡 ․許尙徵․金武哲․梁山璹。(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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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