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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79-1) : 이춘영(1600-1601.10.17) : '채소재집' 3권을 저술한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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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영(李春英, 1563~1606)은 1600년(선조 33)에 노경임 군수 후임으로 부임하여 1601년(선조 34) 10월 17일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서울 사람, 자는 실지(實之), 호는 체소재(體素齋), 본관은 전주, 의령감 윤조(胤祖)의 아들, 시재․시해․시매의 아버지이다.
편모 슬하에서 유학으로서 1582년(선조 16) 식년 진사시에 3등 54위로 합격,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병과 23위로 급제하였다. 1590년 12월 24일에 의정부에서 실시한 예문관 검열 시험에 합격하여 이듬해 1월 5일에 검열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6일에 이임하였다.
그 후 예문관 검열(1592년 8월 28일), 승정원 주서(1592년 9월 1일), 예문관 대교(1592년 9월 4일)에 제수되었다. 1592년 9월 5일에는 왕자가 포로로 잡힌 사실 여부와 함경도의 적세에 대하여 임금에게 보고하였고, 같은 해 11월 7일에 호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1593년 2월 23일에 소모관을 이임하였고, 1600년 3월 14일에는 정의 현감을 이임하였다. 1601년 10월 17일에는 예천 군수를 이임하였고, 공조 정랑을 거쳐 1604년 7월 20일에 지제교를 이임하였다.
그 후 벼슬이 종부시 첨정에 이르렀으나, 평소에 성품이 호탕하고 시나 문장이 격렬해서 출세에 지장을 받았다. 저서는 「체소재집」 3권이 있다.
둘째 아들 시해는 편모슬하에서 유학으로서 1630년(인조 8)에 식년 생원시에 1등 1위로 합격, 같은 해 별시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하여 이조 참판을 지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534號 2002.11.21)
이춘영(李春英) : 1600년(선조 33)에 부임, 1601년(선조 34) 10월 17일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1563(명종 18)-1606(선조 39), 서울 사람, 자는 실지(實之), 호는 체소재(體素齋), 본관은 전주(종실 출신), 의령 감(義寧監) 윤조(胤祖)의 아들, 시재(時材)ㆍ시해(時楷)ㆍ시매(時매)의 아버지이다. 편모 슬하(慈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582년(선조 15) 식년 진사시에 3등 54위로 합격,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 23위로 급제, 한림(翰林)을 거쳐 1600년(선조 33)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한 후 벼슬이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 지제교(知製敎)에 이르렀다. 시문(詩文)에 능했으나 인물이 소호방일(疎豪放逸)하여 시사(詩詞) 역시 격렬 강개(激烈慷慨)한 표현이 많다. 그는 이러한 인품과 시사 때문에 당시 사람의 배척을 받아 뜻을 펴지 못했다. 저서는 <체소재집(體素齋集)> 3권이 있다. 둘째 아들 시해(1600生, 字子範)는 편모 슬하(慈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630년(인조 8) 식년 생원시에 1등 1위로 합격, 1630년(인조 8) 별시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하여 이조 참판을 지냈다.(司馬榜目, 文科榜目, 宣祖實錄 1595.6.13)
이춘영(李春英) : 1563(명종 18)-1606(선조 39), 1600년(선조 33)에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하여 1601년(선조 34)에 이임하였다. 자는 실지(實之), 호는 체소재(體素齋), 본관은 전주, 1590년(선조 23) 문과(文科)에 급제, 1600년(선조 33)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한 후 벼슬이 첨정(僉正)에 이르렀고, 시문(詩文)에 능했으나 성품이 호탕 방종하고 시사가 또한 격렬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아 출세에 지장이 컸다. 저서는 <체소재집(體素齋集)> 3권이 있다.
이춘영(李春英) : 예천 군수이다. 1563(명종 18)~1606(선조 39), 조선 중기의 문신․문장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실지(實之), 호는 체소재(體素齋), 윤조(胤祖)의 아들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검열이 제수되었으나 정철(鄭澈)이 파직 당할 때 연루되어 삼수(三水)로 귀양갔다. 1592년에 풀려나 다시 검열과 호조 좌랑을 거쳐 임진왜란이 격심하여지자 소모관(召募官)으로 충청․전라도를 순행하였고, 이어 초계제술문관(抄啓製述文官)이 되어 중국에 구원을 청하는 주문(奏文)을 초하였다. 1601년 예천 군수를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또, 임진왜란 때 타버린 선대의 실록을 보수할 때 공조정랑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참여하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해동사부 海東辭賦》에 그의 작품이 실려 전한다. 좌찬성이 추증되었다. 저서로는《체소집》 3권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宣祖實錄, 體素集, 牛溪集, 金在烈(韓國學中央硏究院))
이춘영(예천 군수로 부임하는 체소재 이춘영(李春英) 의 호. 자는 실지(實之) , 본관은 전주(全州) 이고 성혼(成渾) 의 문인이다 를 전송하다[送體素赴醴泉郡] 3수) [古文獻] : 제작자 : 신흠/ 날짜 : 2005년 02월 07일/ 원문형태 : DOC/ 출처 : 민족문화추진회(國家知識情報統合檢索시스템 2005)
[선조실록] : 1590년(선조 23) 12월 24일에 의정부가 예문관 검열(翰林)을 취재(取才)하였는데, 이춘영은 <강목(綱目)>에서 약(略)을 받았고, 1591년(선조 24) 1월 5일에 검열에 제수되어 동년 3월 6일에 이임하였다가 다시 예문관 검열(1592.8.28)을 거쳐 승정원 주서(1592.9.1), 예문관 대교(1592.9.4)에 제수되었다. 1592년(선조 25) 9월 5일에는 기사관으로서 왕자가 포로로 잡힌 사실 여부와 함경도의 적세에 대하여 왕에게 보고하였고, 동년 11월 7일에는 호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1593년(선조 26) 2월 23일에는 소모관(召募官)을 이임하였고, 동년 11월 2일에는 승문원이 왕에게 아뢰기를, "글 잘하는 사람이 함께 의논하여 사명을 중하게 하소서." 라고 청하니, 왕이 따랐는데, 초계(抄啓)한 제술문관(製述文官) 중에 이춘영이 있었다. 1600년(선조 33) 3월 14일에는 정의 현감(旌義縣監)을 이임하였고, 1601년(선조 34) 10월 17일 예천 군수를 이임하였고, 1604년(선조 37) 7월 20일 공조 정랑을 이임하였다. 그 후 벼슬이 첨정에 이르렀다.
[저서] : 시문집으로 <체소집(體素集)>(奎5880, 3卷 3冊, 木版本, 26x20cm, 四周雙邊, 半郭은 21.2x15.7cm, 有界, 10行 20字, 註雙行, 版心은 上下 黑魚尾)이 있는데, 이 책은 그의 사후 이시촌(李時村)이 유고의 교정을 신흠(申欽)에게 부탁하여 1626년 가을에 서문을 썼고, 다시 22년 후인 1647년에 김상헌(金尙憲), 같은 해에 정홍명(鄭弘溟)이 각각 발문을 쓴 것으로 보아 대개 1647년(인조 25)에 간행한 것 같다. 권상(卷上)에 오언절구(五言絶句) 10수, 오언율시(五言律詩) 95수, 칠언절구(七言絶句) 242수, 칠언율시(七言律詩) 169수, 권중(卷中)에 칠언율시(七言律詩) 187수, 오언배율(五言排律) 7수, 칠언배율(七言排律) 4수, 오언고시(五言古詩) 47수, 칠언고시(七言古詩) 39수, 권하(卷下)에 사(詞) 3수, 부(賦) 4수(紀行賦, 泣罹鋒賦, 鳳凰來儀賦, 次弔箕子基辭), 잡저(雜著) 30여 편(逆旅齋記, 泰來軒記, 戰勝亭記, 倦休堂記, 亡友李子瞻事實, 答梁秀才榥書, 答與方伯書, 題黃公望所藏畵帖後, 擬孫會宗與楊子幼書, 琴頌, 連枝慶壽筵詩序, 送朴說之朝京序幷詩, 送張好古序幷詩, 代人祭三賢文, 逐망량文 等)이 있고, 보유(補遺)로 칠언절구(七言絶句) 3수, 오언율시(五言律詩) 6수, 칠언율시(七言律詩) 16수가 있다. 칠언절구, 칠언율시, 오언율시의 순위로 칠언시를 즐겨 읊은 것 같다. 시(詩)는 격조(格調)가 강개(慷慨)하다(인터넷 야후 2001). 또 한 저서로, <체소집>이 있는데, ① 3권 3책, 목판본(木版本), 30.6x19.8cm,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은 21.2x15.4cm, 10행(行) 20자(字), 주쌍행(註雙行), 판심(版心)은 내향 흑 어미(內向黑尾尾)이다. 서문(序文)은 1626년에 신흠(申欽)이 썼고, 이시촌(李時村)이 편집하여 발행하였다. 목차는 책천(冊天)에 서문, 본문 상(本文上), 책지(冊地)에 목차, 본문 중(本文中), 책인(冊人)에 목차, 본문 하(下)이다. 국립중앙도서관 고전운영실에 소장(청구기호 한古朝46-가1668)되어 있다. ② (45) 554 쪽, 영인판(影印版), 27cm, 서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92년에 발행한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影印標點韓國文集叢刊)> 66권에 <지봉집(芝峰集)>(李수光) 등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문학실에 소장(청구기호 810.819-민959ᄒᄀ-66=2)되어 있다.
이춘영 [記事] : 한국문집총간 창랑집(滄浪集, 1682)에 실린 성문준(成文濬)의 예천군수(1600-1601) 이춘영(字 實之)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滄浪先生詩集卷之一/ 詩/ 寄贈李實之。李時爲醴泉宰。/ 寥落終南歲晏時。酒泉老守苦相思。?年交道違麗澤。淸世周行失羽儀。洛浦松雲怡醉眼。白岑梅雪爽詩脾。文章剩得江山助。珪組何心換一麾。”이다.(www.minchu.or.kr 2006)
이춘영 [記事] : 한국문집총간 체소집(體素集)에 실린 채소재 이춘영(李春英)의 예천군수(1600-1601) 때의 본인의 기사로, 그 내용은, “體素集上/ 七言絶句/ 望遠樓二絶 在醴泉/ 麥浪搖空漲北疇。庭槐經雨葉初稠。眞成傲吏仍中隱。終日看山不下樓。/ 風光?困睡厭厭。日午楊花正撲簾。紅紫一時都淨盡。煖黃初入麥纖纖。”이다.(www.minchu.or.kr 2006)
이춘영 [記事] : 한국문집총간 상촌고(象村稿, 1629)에 실린 신흠(申欽)의 예천군수(1600-1601) 채소재 이춘영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象村稿卷之十三/ 七言律詩 一百一十首/ 送體素赴醴泉郡三首/ 誦子文章覺有神。向來豪語動驚人。男兒本作千年調。世事休嗟百態新。天外夢魂迷去路。峽中秋色逗征輪。遙知至喜堂成日。遮莫聲名滿海濱。/ 二/ 風塵何事久低徊。鸞鳳卑棲羽??。濁世固應輕放達。高才那復免嫌猜。琴堂晝靜桁楊臥。?戶秋登??堆。此去知君饒筆力。靑山閑傍謝公臺。/ 三/ 憶曾東掖?同聯。珥筆多時捧御筵。自幸??還倚玉。那知糠秕復居前。風塵滿眼悲繁?。離合傷心送暮年。??舊遊今歷落。閉門誰與慰幽?。”이다.(www.minchu.or.kr 2006)
이춘영 [記事] : 한국문집총간 체소집(體素集)에 실린 예천군수 체소재 이춘영(李春英)의 기사로, 그 내용은, “偶題/ 偶題 不飮黃封酒。空來此醴泉。還同峴首客。欲釣?頭?。水已鴨頭綠。花將女頰姸。園林何處好。一醉習池邊。”이다.(www.minchu.or.kr 2006)
이춘영 [記事] : 고전국역총서(1990 刊) 상촌집(象村集)에 실린 상촌 신흠(申欽)이 예천군수(1600-1601) 이춘영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상촌선생집 제13권/ 시(詩)○칠언율시(七言律詩) 110수/ 예천 군수로 부임하는 체소재 이춘영(李春英)의 호. 자는 실지(實之),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성혼(成渾)의 문인이다를 전송하다[送體素赴醴泉郡] 3수// 그대 문장 읊으면 신명이 절로 나니 / 誦子文章覺有神/ 호건한 말 언제나 사람들을 놀래었네 / 向來豪語動驚人/ 천년 계획 남아는 본디 설계하나니 / 男兒本作千年調/ 온갖 변화 세상사 한탄할 것 없다네 / 世事休嗟百態新/ 하늘 가 꿈속의 넋 앞길이 아련하고 / 天外夢魂迷至路/ 산골짝의 가을빛에 가는 수레 머무른다 / 峽中秋色逗征輪/ 알괘라 장차 지희당 이뤄지는 그날에는 / 遙知至喜堂成日/ 그야 물론 명성이 해변에 자자하리 / 遮莫聲名滿海濱// 이(二)/ 풍진 속에 어인 일로 오랫동안 서성대나 / 風塵何事久低徊/ 낮은 가지 깃든 봉황 날개가 부러졌네 / 鸞鳳卑棲羽??/ 탁한 세상 사실 응당 호방하기 십상이니 / 濁世固應輕放達/ 높은 재주 어찌 다시 남의 질투 면할건가 / 高才那復免嫌猜/ 고요한 낮 금당에 잡다한 문서 끊기고 / 琴堂晝靜文書絶/ 풍년든 가을 농가에 볏단이 쌓이리라 / ?戶秋登??堆/ 이제 가면 그대는 필력이 불어나서 / 此去知君饒筆力/ 청산이라 사공대에 한가로이 노닐거네 / 靑山閑傍謝公臺// 삼(三)/ 생각하면 동액에서 함께 나란히 벼슬해 / 憶曾東掖?同聯/ 붓대 잡고 오랫동안 임금 자리 받들었지 / 珥筆多時捧御筵/ 갈대로 옥나무 의지 다행으로 여겼는데 / 自幸??還倚玉/ 쭉정이가 앞에 설 줄 그 어찌 알았으리 / 那知糖秕復居前/ 눈에 가득 풍진 속에 하얀머리 서글프고 / 風塵滿眼悲繁?/ 마음 상한 이별 속에 늘그막을 살아가네 / 離合傷心送暮年/ 애달퍼라 옛 친구들 이제 모두 사라지니 / ??舊遊今歷落/ 문을 닫고 어느 뉘와 깊은 시름 달래볼꼬 / 閉門誰與慰幽?// [주D-001]지희당 …… 그날 : 지희당은 송 인종(宋仁宗) 때 상서(尙書) 우부낭중(虞部郞中) 주공(周公)이란 사람이 이릉현(夷陵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 세운 정자로, 오늘날의 호북성(湖北省) 의창현(宜昌縣) 남쪽 형강(荊江)의 강가에 있었다 한다. 이릉현은 서촉(西蜀)의 험난하기로 이름난 삼협(三峽)을 따라 흘러오던 강물이 비로소 잔잔해지는 곳으로서 서촉에서 뱃길로 그곳에 당도하는 뱃사공들은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을 서로 축하하였다 하는데, 주공이 강가에 정자를 지어 지극히 기쁘다는 뜻인 지희(至喜)로 이름을 붙이고 뱃사람들이 쉬었다가 가는 장소로 삼았다 한다. 곧 지방 수령으로서 치적(治績)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 《歐陽文忠公集 卷三十九 峽州至喜亭記》/ [주D-002]금당 : 《呂氏春秋 察賢》의 ꡒ복자천(子賤)이 선보(單父)를 다스릴 때 거문고만 타고 있고 몸이 마루를 내려가지 않았으나 선보가 다스려졌다.ꡓ 에서 나온 말로, 수령을 칭송할 때 그의 관아를 가리킨다./ [주D-003]사공대 : 진(晉) 나라 때의 시인 사안(謝安)이 젊었을 때 살던 곳으로, 강소(江蘇) 강녕현(江寧縣) 북쪽에 있는 사공돈(謝公墩)이란 산 이름을 말한 듯하다. 곧 시인 묵객이 살고 있는 산을 말한다./ [주D-004]동액 : 당 나라 때 왕명의 출납과 국가의 문서를 관장하던 문하성(門下省)의 별칭으로, 우리 나라의 승정원을 뜻한다./ [주D-005]갈대로 옥나무 의지 : 《世說新語 容止》의 ꡒ위 명제(魏明帝)가 왕후의 동생 모증(毛曾)에게 하후현(夏侯玄)과 함께 앉게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갈대가 옥나무에 기대어 있다고 말하였다.ꡓ에서 나온 것으로 못난 사람이 뛰어난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6]쭉정이가 …… 알았으리 : 쭉정이는 상촌 자신에게 비유한 것으로, 형편없는 자기가 뛰어난 동료 이춘영보다 벼슬이 한발 더 앞서간다는 것이다.”이다.
이춘영 [記事] : 한국문집총간총목차 064집 창랑집(滄浪集)에 실린 성문준(成文濬)의 예천군수(1600-1601) 이춘영(字 實之)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21 洛河屯田 次車天輅韻 21 寄贈李實之 李時爲醴泉宰 21 還小鏡于宋仁?英? 因有?贈 仁...”이다.(www.minchu.or.kr 2006)
이춘영 [記事] : 한국문집총간총목차 071집 상촌고(象村稿 Ⅰ)에 실린 상촌 신흠(申欽)의 예천군수(1600-1601) 채소재 이춘영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21 謝芝峯來訪 422 休告詠懷三首 422 送體素赴醴泉郡三首 422 賀至 422 ...”이다.(www.minchu.or.kr 2006)
이춘영(宣祖 142卷 34年 10月 17日(辛巳) 001 / 慶尙 等 道 都體察使 李德馨이 醴泉郡守 李春英 等 6人의 罷職을 請하다) [實錄] : 날짜 : 1601년 10월 17일(음력)/ 경상 등 도의 도체찰사 이덕형이 치계하기를,ꡒ지금 민생의 괴로움과 편안함이 모두 수령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정령(政令)이 어긋나고 거리낌없이 멋대로 하여 백성들에게 깊이 원망을 산 사람은 처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천 군수(醴泉郡守) 이춘영(李春永)은 자봉(自奉)이 간소하지 않고 호령이 거칠며, 옥천 군수(沃川郡守) 한전(韓詮)은 백성을 무마하는 데 마음을 쓰지 않고 가렴(苛?)만 일삼으며, 순창 군수(淳昌郡守) 권황(權愰)은 하리에게 정사를 맡겨 민폐가 날로 심하며, 옥과 현감(玉果縣監) 송정기(宋廷琦)는 탐학스럽고 방자하여 금령(禁令)을 무시하였으며, 영암 군수(靈巖郡守) 구덕령(具德齡)은 성품이 본디 패려한 데다가 처사가 방자하며, 보성 군수(寶城郡守) 손경지(孫景祉)는 시설(施設)이 번거로와 민폐가 많으니 모두 파출시키소서. 그 대임은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가려서 차송하여 자주 체직시키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ꡓ하였는데, 이조에 계하하였다./【원전】 24집 303면/【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탄핵(彈劾)/ 정보제공기관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제공기관 : 국사편찬위원회(www.knowledge.go.kr 2006)
이춘영(醴泉 郡守로 赴任하는 體素齋 李春英)을 전송하다) [詩] : 저편자 : 신흠(申欽)/ 상촌선생집 제13권/ 시(詩)○칠언율시(七言律詩) 110수/ 예천 군수로 부임하는 체소재 이춘영(李春英)의 호. 자는 실지(實之),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성혼(成渾)의 문인이다를 전송하다[送體素赴醴泉郡] 3수// 그대 문장 읊으면 신명이 절로 나니 / 誦子文章覺有神/ 호건한 말 언제나 사람들을 놀래었네 / 向來豪語動驚人/ 천년 계획 남아는 본디 설계하나니 / 男兒本作千年調/ 온갖 변화 세상사 한탄할 것 없다네 / 世事休嗟百態新/ 하늘 가 꿈속의 넋 앞길이 아련하고 / 天外夢魂迷至路/ 산골짝의 가을빛에 가는 수레 머무른다 / 峽中秋色逗征輪/ 알괘라 장차 지희당 이뤄지는 그날에는 / 遙知至喜堂成日/ 그야 물론 명성이 해변에 자자하리 / 遮莫聲名滿海濱/ 이(二)/ 풍진 속에 어인 일로 오랫동안 서성대나 / 風塵何事久低徊/ 낮은 가지 깃든 봉황 날개가 부러졌네 / 鸞鳳卑棲羽??/ 탁한 세상 사실 응당 호방하기 십상이니 / 濁世固應輕放達/ 높은 재주 어찌 다시 남의 질투 면할건가 / 高才那復免嫌猜/ 고요한 낮 금당에 잡다한 문서 끊기고 / 琴堂晝靜文書絶/ 풍년든 가을 농가에 볏단이 쌓이리라 / ?戶秋登??堆/ 이제 가면 그대는 필력이 불어나서 / 此去知君饒筆力/ 청산이라 사공대에 한가로이 노닐거네 / 靑山閑傍謝公臺/ 삼(三)/ 생각하면 동액에서 함께 나란히 벼슬해 / 憶曾東掖?同聯/ 붓대 잡고 오랫동안 임금 자리 받들었지 / 珥筆多時捧御筵/ 갈대로 옥나무 의지 다행으로 여겼는데 / 自幸??還倚玉/ 쭉정이가 앞에 설 줄 그 어찌 알았으리 / 那知糖秕復居前/ 눈에 가득 풍진 속에 하얀머리 서글프고 / 風塵滿眼悲繁?/ 마음 상한 이별 속에 늘그막을 살아가네 / 離合傷心送暮年/ 애달퍼라 옛 친구들 이제 모두 사라지니 / ??舊遊今歷落/ 문을 닫고 어느 뉘와 깊은 시름 달래볼꼬 / 閉門誰與慰幽?/ [주D-001]지희당 …… 그날 : 지희당은 송 인종(宋仁宗) 때 상서(尙書) 우부낭중(虞部郞中) 주공(周公)이란 사람이 이릉현(夷陵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 세운 정자로, 오늘날의 호북성(湖北省) 의창현(宜昌縣) 남쪽 형강(荊江)의 강가에 있었다 한다. 이릉현은 서촉(西蜀)의 험난하기로 이름난 삼협(三峽)을 따라 흘러오던 강물이 비로소 잔잔해지는 곳으로서 서촉에서 뱃길로 그곳에 당도하는 뱃사공들은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을 서로 축하하였다 하는데, 주공이 강가에 정자를 지어 지극히 기쁘다는 뜻인 지희(至喜)로 이름을 붙이고 뱃사람들이 쉬었다가 가는 장소로 삼았다 한다. 곧 지방 수령으로서 치적(治績)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 《歐陽文忠公集 卷三十九 峽州至喜亭記》/ [주D-002]금당 : 《呂氏春秋 察賢》의 ꡒ복자천(子賤)이 선보(單父)를 다스릴 때 거문고만 타고 있고 몸이 마루를 내려가지 않았으나 선보가 다스려졌다.ꡓ 에서 나온 말로, 수령을 칭송할 때 그의 관아를 가리킨다./ [주D-003]사공대 : 진(晉) 나라 때의 시인 사안(謝安)이 젊었을 때 살던 곳으로, 강소(江蘇) 강녕현(江寧縣) 북쪽에 있는 사공돈(謝公墩)이란 산 이름을 말한 듯하다. 곧 시인 묵객이 살고 있는 산을 말한다./
[주D-004]동액 : 당 나라 때 왕명의 출납과 국가의 문서를 관장하던 문하성(門下省)의 별칭으로, 우리 나라의 승정원을 뜻한다./ [주D-005]갈대로 옥나무 의지 : 《世說新語 容止》의 ꡒ위 명제(魏明帝)가 왕후의 동생 모증(毛曾)에게 하후현(夏侯玄)과 함께 앉게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갈대가 옥나무에 기대어 있다고 말하였다.ꡓ에서 나온 것으로 못난 사람이 뛰어난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6]쭉정이가 …… 알았으리 : 쭉정이는 상촌 자신에게 비유한 것으로, 형편없는 자기가 뛰어난 동료 이춘영보다 벼슬이 한발 더 앞서간다는 것이다./ 정보제공기관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제공기관 : 민족문화추진회(www.knowledge.go.kr 2006)
이춘영 [記事] : 선조실록 142권/ 선조 34년( 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10월 17일 신사 1번째 기사/ 경상 등 도 도체찰사 이덕형이 예천 군수 이춘영 등 6인의 파직을 청하다/ 경상 등 도의 도체찰사 이덕형이 치계하기를, ꡒ지금 민생의 괴로움과 편안함이 모두 수령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정령(政令)이 어긋나고 거리낌없이 멋대로 하여 백성들에게 깊이 원망을 산 사람은 처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천 군수(醴泉郡守) 이춘영(李春永)은 자봉(自奉)이 간소하지 않고 호령이 거칠며, 옥천 군수(沃川郡守) 한전(韓詮)은 백성을 무마하는 데 마음을 쓰지 않고 가렴(苛?)만 일삼으며, 순창 군수(淳昌郡守) 권황(權愰)은 하리에게 정사를 맡겨 민폐가 날로 심하며, 옥과 현감(玉果縣監) 송정기(宋廷琦)는 탐학스럽고 방자하여 금령(禁令)을 무시하였으며, 영암 군수(靈巖郡守) 구덕령(具德齡)은 성품이 본디 패려한 데다가 처사가 방자하며, 보성 군수(寶城郡守) 손경지(孫景祉)는 시설(施設)이 번거로와 민폐가 많으니 모두 파출시키소서. 그 대임은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가려서 차송하여 자주 체직시키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ꡓ 하였는데, 이조에 계하하였다./ 【영인본】 24 책 303 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탄핵(彈劾)(www.history.go.kr 2007)
이춘영 [記事] : 한국사료 총서/ 동사략 / 紀年東史約卷之十七 朝鮮茅亭李源益 編 / 本朝紀 / 十九年 / ...罷領孰寧 鄭澈職, 以傳旨榜示朝堂, / 先是, 兩司先論檢閱 李春英出入鄭澈之門, 吏曺正郞 柳拱辰趨附濁亂之事請罪之, 以試上意, 上皆允從, 乃合啓言, 澈擅弄朝綱, 廣植私黨, 與宋翰弼兄弟結爲心腹, 接置鄕家, 丁巖壽等拿來, 時密令淹留中路, 不卽就訊, 使臺諫論執韋布上章同列大臣, 視如仇敵, 外若親厚內實?嫉, 縱酒荒色蕩毁名檢天威咫尺, 私招銓郞, 指揮注擬, 欲引外任之同志者, 則陰嗾言官以微罪彈論曲拓進用之路, 請罷職, 白惟咸締結鄭澈主張時議亦罷識, 竝允, 從敎, 曰古者罷黜大臣榜于朝堂, 布諭天下所以昭示罪狀於國人也, 今鄭澈罷職傳旨依故事, 榜示朝堂, 承旨 李恒福只奉傳旨, 臺諫以沮格/ <17권01_0758-1>/ 不行, 劾罷之, ○時, 黨禍將作, 澈爲禍首朝士, 有人望者一切陷入設爲三等, 恒福亦在其中, 而適有救者獲免焉,...(www.history.go.kr 2007)
이춘영 [記事] : 한국사료 총서/ 동사략 / 紀年東史約卷之十九 朝鮮茅亭李源益 編 / 本朝紀 / 明神宗萬曆二十二年 / 宣祖 二十七年, ...鴻山土賊宋儒眞伏誅, 遣指揮使 李春英, 偕倭首小西飛入遼東 / 小西飛持關白表, 入天朝, 天朝疑之, 又沈惟敬?還, 而晉州又陷納款之意不誠, 留小西飛於遼東久不報, ...(www.history.go.kr 2007)
이춘영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七 / 甲辰下 / 七月 / 二十日 己巳 / 院啓實錄郞廳非曾經侍從者令該曹一一汰去何如又啓曰代述 王言其選至重自古必擇/ <035_0566>/ 詞章名望兼備者授之所謂三字華銜良以此也而工曹正郞 李春英雖有能文之名爲淸議所棄者久矣今被知製敎之選請汰去又啓曰捕盜大將及訓鍊兼都正俱是武宰之極選而金應瑞拔自卑微前所履歷多有過濫之?請遞又啓曰闕軍充定軍政之急務曾因經筵官所啓未充定守令隨現罷職旣有事目則爲藩臣者所當恪謹奉行而全羅監司 張晩狀啓敢以經筵官所奏謂非 祖宗朝舊例多費辭說以其尤甚一邑只請罷職而其餘兩邑姑施他罰云其擅自指揮之罪不可不懲請推又啓曰目今/ 兵火之餘田野太半抛荒功臣應給之物各別改磨鍊施行何如(www.history.go.kr 2007)
이춘영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七 / 甲辰下 / 閏九月 / 初十日 丁亥 / 李廷臣拜廣州 李惟弘拜竹山 李惟義拜白川 柳命男拜泰仁 權述拜月串 李德沂拜木川 趙應文拜司成 李?拜直講 韓汝?拜勳都 洪昌世拜永川 李自海拜典籍 沈?拜監察 尹應瑞拜摠歷 李春榮拜摠都 朴俊拜長湍 沈宗?拜翊衛○院啓都摠都事 安瑞國以衰老蔭官不合侍衛之職禁府都事 / <035_0589>/ 李挺時爲人?鄙不合王府郞官請竝罷○李麒壽來見(www.history.go.kr 2007)
이춘영 [記事] : 선조실록 24권/ 선조 23년( 1590 경인 / 명 만력(萬曆) 18년) 12월 24일 임진 2번째 기사/ 의정부가 한림을 취재하고 결과를 보고하다/ 의정부가 한림(翰林)1374) 을 취재(取才)하였는데, 조존성(趙存性)은 《좌전(左傳)》에서 약(略)을 받고, 김상용(金尙容)은 《강목(綱目)》에서 약을 받고, 이춘영(李春英)도 《강목》에서 약을 받고, 조희보(趙希輔)는 《좌전》에서 약을 받았다./ 【영인본】 21 책 474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註 1374]한림(翰林) : 예문관 검열의 별칭. ☞(www.history.go.kr 2007)
이춘영 [記事] : 선조실록 25권/ 선조 24년( 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1월 5일 임인 1번째 기사/ 유희선․이춘영․이유의․최황․이헌국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사가 있었다. 유희선(柳希先)을 장흥 부사(長興府使)에, 이춘영(李春英)을 검열에, 이유의(李由義)를 전라 좌수사에, 최황(崔滉)을 부총관(副摠管)에, 이헌국(李憲國)을 대사간에 제수하였다./ 【영인본】 21 책 47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이춘영 [記事] : 선조실록 25권/ 선조 24년( 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윤3월 6일 신미 1번째 기사/ 헌부가 거칠고 용렬한 이조 정랑 유공진과 경망스런 검열 이춘영의 파직을 청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ꡒ이조 정랑 유공진(柳拱辰)은 인물이 거칠고 용렬하며 검열 이춘영(李春英)은 인물이 경망스러워 재상의 집을 드나들었으니 아울러 파직시키소서.ꡓ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영인본】 21 책 478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www.history.go.kr 2007)
이춘영 [記事] : 선조실록 25권/ 선조 24년( 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6월 23일 병진 1번째 기사/ 양사가 정철 등이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탁란시켰다며 찬배를 청하다/ 양사가 합계(合啓)하기를, ꡒ전 영돈녕 정철 및 백유함․유공진․전 검열 이춘영 등은 서로 붕당을 만들어 조정의 정사를 탁란시켰으며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모함하려고 호남(湖南)의 유생들을 꾀었습니다. 그리하여 명경(名卿)․사대부 등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붙여 섬멸하려고 하였으니, 모두 멀리 찬배시키소서.ꡓ하니, 윤허하였다. 정철은 전에 대신을 역임했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다가 이튿날 윤허하였다. 유함은 경성(鏡城)에, 춘영은 부령(富寧)에, 공진은 희천(熙川)에 유배했다. 유함과 춘영은 처음엔 평안도에 유배했었는데 상(上)이 북도(北道)로 배소를 옮길 것을 명했다. 정철은 진주(晉州)로 유배했다. 뒤에 유함은 경흥(慶興)으로 옮기고 공진은 경원(慶源)으로 옮기고 춘영은 삼수(三水)로 옮기고 정철은 강계(江界)로 옮겼다./ 【영인본】 21 책 480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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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