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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79-3:이춘영(1600-1601.10.17)
작성자장병창 @ 2012.09.22 06:22:54

   예천고을원(79-3) : 이춘영(1600-1601.10.17) : '채소재집' 3권을 저술한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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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춘영(李春英) : 정랑(正郞) 이실지(李實之)를 곡하다 이름은 이춘영(李春英)(이춘영(李春英)은 1563 ~ 1606.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실지(實之)이며 호는 체소재(體素齋)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선조 때 예천 군수(醴泉郡守)를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체소집(體素集)》이 있다.)이다./ 서명: 淸陰集/ 저자: 김상헌(金尙憲)/ 분류: 고전국역서 > 문학 > 문집류(文集類)/ 제공: 한국고전번역원/ 청음집 제5권/ 칠언율시(七言律詩) 231수(二百三十一首)/ 정랑(正郞) 이실지(李實之)를 곡하다 이름은 이춘영(李春英)이다.// 한 시대의 높은 명성 나이 젊어 드날리어 / 一代聲華擅妙年/ 한원에서 잠필했고 경연에서 모시었네 / 翰垣簪筆侍經筵/ 우뚝했던 예형 어찌 세속의 일 따랐으랴 / ?衡卓?寧隨俗/ 술에 빠진 완적은 또 자기 자신 자부했네 / 阮藉沈冥不受憐/ 말세에서 공명 낮아 벼슬 겨우 삼 품이고 / 末路功名三品底/ 명 궁하니 맺은 교분 몇 명이나 온전했나 / 窮途交契幾人全/ 처자식들 의탁할 곳 없어 마음 상하는데 / 傷心孤寡終無託/ 문장만은 남아 있어 세상 가득 전하누나 / 只有文章滿世傳// [주C-001]이춘영(李春英) : 1563 ~ 1606.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실지(實之)이며 호는 체소재(體素齋)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선조 때 예천 군수(醴泉郡守)를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체소집(體素集)》이 있다./ [주D-001]한원(翰垣)에서 …… 모시었네 : 한원은 예문관의 별칭이고, 잠필(簪筆)은 사관(史官)이나 시종신(侍從臣)으로 활약하는 것으로, 예문관 검열이나 승정원 주서 등 사관을 잠필지신(簪筆之臣)이라고 한다. 이춘영은 1590년(선조 23)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검열에 제수되었다가 정철(鄭澈)이 파직당할 때 연루되어 삼수(三水)로 귀양 갔으며, 다시 그다음 해에 풀려나 검열이 되었다./ [주D-002]예형(?衡) : 후한(後漢)의 평원(平原) 사람으로, 자가 정평(正平)이다. 젊었을 때부터 재주가 있고 언변이 좋아 명사로 이름이 나 나이 차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공융(孔融)과 친구로 사귀었다. 이에 공융에 의해 조조(曹操)에게 천거되었으나, 지나치게 강직하고 오만한 성품으로 인해 조조를 면전에서 모욕하였다. 조조는 그의 모욕을 받고는 차마 자기 손으로 죽이지 못한 채 유표(劉表)에게 보냈으며, 유표 역시 그를 감당치 못해 다시 강하 태수(江夏太守) 황조(黃祖)에게 보냈는데, 끝내는 황조를 깔보며 모욕을 가하다가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後漢書 卷110下 ?衡列傳》/ [주D-003]완적(阮籍) : 진(晉)나라 때의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는 사종(嗣宗)이다. 시를 잘 지었고 노장(老莊) 사상을 좋아하였으며 술과 거문고를 즐기면서 속세의 관습을 백안시(白眼視)하였다.//

 

  이춘영(호 체소재, 醴泉郡守 1600-1601.10.17) : 예천 군수로 부임하는 체소재를 전송하다[送體素赴醴泉郡] [고전번역서-상촌집(象村集)]/ 신흠 저 | 한국고전번역원/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ꡐ역사자료ꡑ이다.// 寄贈李實之。李時爲醴泉宰。 [한국문집총간-창랑집(滄浪集)]/ 성문준 저 | 한국고전번역원/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ꡐ역사자료ꡑ이다.// 送體素赴醴泉郡三首 [한국문집총간-상촌고(象村稿)]/ 신흠 저 | 한국고전번역원/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ꡐ역사자료ꡑ이다.//

 

  이춘영(李春英) :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선조(宣祖) 23년, 과거시험연도 : 1590 경인, 시험명 : 증광시(增廣試), 등위 : 병과24(丙科24)/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이춘영(李春英), 자 : 실지(實之), 호 : 체소(體素), 본관(本貫) : 완산(完山)/ [이력 및 기타 사항] 소과 : 1582(임오) 진사시, 전력(前歷) : 승의랑(承議郞), 관직(官職) : 첨정(僉正)/ [가족사항] : 자(子) : 이시해(李時楷), 부(父) : 의령감 이윤조(義寧監 李胤祖), 조부(祖父) : 복흥령 이미수(復興令 李眉壽), 증조부(曾祖父) : 도성수 이천정(陶城守 李千丁), 외조부(外祖父) : 백인걸(白仁傑), 처부(妻父) : 김비,노덕원(金?,盧德元)(daum 2010)

 

  이춘영 : 遊千佛山時三日有霰 -體素齋 李春英/ Date : 2009-09-09 16:05:24/ | 遊千佛山時三日有霰 -體素齋 李春英// 飛瀑何年識 懸崖自古張/ 泉源接?漢 山勢近龍荒/ 盡日看跳雪 非時怪下霜/ 不言奇絶地 乃在?陰鄕// 비폭은 어느 해에 알았던가/ 현애도 예로부터 펼쳐져 있구나/ 샘물은 창공으로부터 이어지고/ 산세는 큰 용처럼 가까이 있네/ 하루 종일 눈을 밟았고/ 때 아닌 시절에 괴이하게 서리 내렸다/ 기이하고 절묘한 곳에서/ 그윽한 마을이 있음을 말하고 싶지 않네(daum 2010)

 

  이춘영 : 次 可晦韻//李春英/ 2008.08.31/ ☆次 可晦韻//李春英☆// 가회운을 화답함// 靑春三十八年回 서른여덟 청춘 봄은 가고 봄은 왔오/ 每送春歸輒杷杯 오고 가는 봄을 술잔 안에 띄었으니/ 當日只言行樂好 이렇게 노니는중 젊음마저 가버리고/ 不知春興老俱來.../ http://blog.daum.net/gasongm/ 可松의 庭院(daum 2010)

 

  이춘영 : 體素集(체소집) / 春英(이춘영)(1563-1606)/ 명재윤증연구소 소장자료/ 2009.11.09/ 體素集(체소집) / 李春英(이춘영)(1563-1606). 木板本. [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 [仁祖 25(1647)]. 1冊(全3卷3冊) : 四周單邊 半郭 21.4 x 15.5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內向黑魚尾 ; 26.0 x 20.0 cm. 원집 3권, 보유(補遺.../ http://blog.naver.com/wolf3322/ 명재연구소(daum 2010)

 

  이춘영 : 수원白氏의 기원/ 2009.09.19/... 이러한 사실을 인걸의 딸이 그의 시아버지에게 고해 바쳐 유양을 미워하게 되었다. 또 의령군의 아들 이춘영(李春英)도 유양 부자를 원수같이 여기다가 유양이 정여립의 모반 사건에 연좌되자 무근한 사실을 날조 하여 네 아들과 함께 .../ http://blog.daum.net/hlb100/ 잃어버린 세월..(daum 2010)

 

  이춘영 : 來庵門人에 관한 考察 1/ 2009.02.14/ 鄭澈, 洪聖民, 李海壽, 張雲翼, 黃廷彧, 黃爀, 尹斗壽, 柳根, 李山甫, 李洽, 任鉉, 金權, 黃愼, 具면, 柳拱辰, 李春英, 白惟咸, 尹根壽, 朴漸, 趙憲, 宋象賢 1591 선조 24 신묘 辛卯南北 北人: 李山海, 李爾瞻, 洪汝諄 南人: 柳成龍, 禹性傳.../ http://blog.daum.net/1family/ 정가네 ( cheong familly )(daum 2010)

 

  이춘영 :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 e-Book/ 정재서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  2007.11.15/ 책본문 : ...주요 작가로는 무려 99수의 유선시를 지은 허초희(許楚姬, 1563-1589)를 비롯 이춘영(李春英, 1563-1606)·이수광(李앍光, 1563-1628)·허균(許筠, 1569-1618)·정두경(鄭斗卿, 1597.../ 162페이지(daum 2010)

 

  이춘영 : 임진왜란 해전사/ e-Book/ 이민웅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8.07.24/ 책본문 : ...총간 56)李廷?,『四留齋集』(奎5285, 총간 51)/ 李廷馨,『知退堂集』(奎4383, 총간 58)/ 李春英,『體素集』(奎5880, 총간 66)/ 李恒福,『白沙集』(藏書閣4-6043, 총간 62)/ 李好閔,『五峯集.../ 376페이지(daum 2010)

 

  이춘영 : 초기 한문소설의 작품세계/ e-Book/ 문범두 지음 |  국학자료원 |  2006.09.13/ 책본문 : ...틈바구니에서 配所로 전전했던 스승 松江 鄭澈의 무상한 정치이력이며, 車天輅 李春英과 같은 교우들의 정치적 불우 등이 대표적 사례였다. 그가 비슷한 정치적 불우를 겪었던 .../ 266페이지(daum 2010)

 

  이춘영 : 낙원? 천사?/ e-Book/ 윤흥길 지음 |  민음사 |  2007.07.25/ 책본문 : ...들불 놓는 이 재미를 누가 당하리 그대 읽어보아라 내가 부르는 산을 태우는 이 노래를/ 李春英(1563~1606)의『體素集』가운데「燒山行」의 일부작가의 말/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작가의.../ 103페이지(daum 2010)

 

  이춘영 : 백씨의 관향 (白氏의 貫鄕)/ 2009.12.23/ ...사실을 인걸의 딸이 그의 시아버지에게 고해 바쳐 유양을 미워하게 되었다. 또 의령군의 아들 이춘영(李春英)도 유양 부자를 원수같이 여기다가 유양이 정여립의 모반 사건에 연좌되자 무근한 사실을 날조 하여 네 아들과 함께.../ http://cafe.daum.net/baeks21/ 수원백씨 송정종친회(daum 2010)

 

  이춘영 : re:[漢詩] 아침에도 그립고 저녁에도 그리워 /이정의 산수도/ 2009.01.31/ ...시문을 배웠고, 허균(許筠)을 비롯하여 심우영(沈友英)·이경준(李耕俊) 등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춘영(李春英)·신흠(申欽)과도 교유했다. 가난하여 남에게 기식(寄食)하며 지냈으나 성격이 고매하고 의리가 강했으며 좋은 산수를.../ http://cafe.daum.net/hmpark/ 시를 훔치는 밤(daum 2010)

 

  이춘영 : 동거공 이영문(東渠公諱榮門)/ 2009.03.03/ ...이영문은 남을 헐뜯지 않았고, 구차스럽게 남과 야합할 줄도 몰랐다. 공적인 일로 당시 예천군수 이춘영(李春英, 1600-1601)을 자주 만난 일은 있었지만 사적인 일로는 한 번도 군청을 찾아가지 않았다. 더욱이 늙어서는 광해군의.../ http://cafe.daum.net/bradlee/ 경주이씨 상서공파 대종회(daum 2010)

 

  이춘영 : 이춘영의 漢詩 硏究(김은아)| 학위 논문/ 이정희/ 2004.03.25 00:23/  http://cafe.daum.net/gsnustudy/T3ws/6/ SUMMARY/ A Study on Lee Chun-young's Poetry/ Kim, Eun-a/ Major in Korean Literature in Chinese Education/ Graduate of School of Education/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Chin ju, Korea/ Supervised by professor Yun, Ho-jin/ Chesojae Lee Chun-young(體素齊 李春英: 1563∼1606) was a writer who was / active during King Sunjo(宣祖) called Moklung Prosper Period(穆陵盛世). He / was Hyuam Beak In-gul(休庵 白仁傑: 1497∼1579)'s grandson and also Ugei / Sung Hon(牛溪 成渾: 1535∼1598) and Songgang Jung Chul(松江 鄭澈: 1536∼/ 1593)'s pupil./ In the middle age of Josun(朝鮮) Dynasty when he was alive, there were a / domestic problem and an oversea problem. The first was radical party strife / between East Party(東人) and West Party(西人), and the second was seven-year / war since Japanese Invasion(壬辰倭亂) outbreak. So to speak, it was a period of / convulsion. However, in spite of these problem, this period became that of the / most developed literature in terms of Chinese classical literature history, thanks / to great literature mood./ At that time, Lee Chun-young(李春英) was one of West Party(西人) which / was led by Jung Chul(鄭澈), and then he was with ruin of West Party(西人). / Especially, during the East Party(東人) in power, he was/ always impeached, exiled and gone to local government post. He had got the / great talent but was not employed./ However, he also had the extraordinary talent in terms of literature an poetry. / When it comes to poetry talent, he was regarded as one of the best writers by / major critics in the times. Indeed, he was the best rival of Sukju Kwon Pil(石洲 / 權 ) well-known as the best poet in terms of poetry./ There were about 800 poems in his anthology. I classified his poems into 4 / major and characteristic groups, and contemplated them in this thesis. Firstly, I / contemplated his poems in respect of actual confrontation; how did Lee / Chun-young(李春英), that loved poetry and alcohol, and had large-minded spirit, / meet his miserable reality? Secondly, I contemplated how he expressed his / unhappy life as a person who experienced both domestic and social unhappiness. / Especially, I studied such poems as had aspect of an alien in his literature, / because of external unhappiness. Thirdly, there were several Yusun Poems(遊仙/ 詩) which we could feel from other writers' as well in his anthology. I studied /「Doksinsunjun] 53 Poems(讀神仙傳 53首) as a main stream among them. / Through the 53 Poems, I could feel as if he had wanted to sublimate his / miserable and profound life by yearning a beautiful fairyland(神仙界), after / reading various ancient events about in Immortals in Taoism(神仙).

 

  In terms of / the number of the Poems, 「Doksinsunjun] 53 Poems(讀神仙傳 53首) had the / most Yusun Poems(遊仙詩) than any other's Yusun Poems(遊仙詩) except Heo, / Nan-seol-heon(許蘭雪軒)'s「Yusunsa(遊仙詞)」.At fourth, I concentrated on the / self-reflection in the end of his life. In the poems of this period, I could find / that he was interested in cultivating his inner mind rather than changing his / external life./ Even if he was not employed at that time, his talent was much better than any / other's, he also was proud of his talent over poetry. Especially, his poetry was / large-minded, rich and splendid just like his character, so his poetry have been on / critics' lips until coming ages. In spite of the talent, nowadays he has been regarded as / just a writer among Moklung Literature Group(穆陵文壇) in Korean Chinese Classical / Literature History, and just one of Yusun Poet Group(遊仙詩 作家群)./ I think he is worthy of such eval!uation and status as are similar to them of / Kwon Pil(權 ), Heo Gyun(許均), Lee An-nul(李安訥) and Sin Hum(申欽) and / so on who had a lot of acquaintances with him. As we could find in his talent, / he is an inevitable person of most important writers in Moklung Literature / Group(穆陵文壇)./

 

  첨부 : 이춘영.hwp (171kb)/ 碩士學位論文/ 이춘영의 漢詩 硏究/ A Study on Lee Chun-young's Poetry/ 慶尙大學校 敎育大學院/ 漢文敎育專攻/ 金은아/ 2002年  6月/ 이춘영의 漢詩 硏究/ A Study on Lee Chun-young's Poetry/ 指導敎授  尹浩鎭/ 이 論文을 敎育學 碩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慶尙大學校 敎育大學院/ 漢文敎育專攻/ 金은아/ 2002年  6月/ 김은아의 敎育學 碩士學位論文을 認准함./ 目次/ 英文要約      ⅰ/ Ⅰ. 序論   1/ 1. 硏究目的        1/ 2. 硏究方法  2/ Ⅱ. 生涯와 文學性向  5/ 1. 時代背景과 生涯   5/ 2. 交遊와 文學性向 10/ Ⅲ. 詩世界  20/ 1. 豪放한 氣像과 現實對應   22/ 2. 不遇의 懷恨과 方外人的 性向   28/ 1) 不遇의 懷恨     29/ 2) 方外人的 性向   36/ 3. 遊仙詩에 投影된 現實認識-讀神仙傳 53首를 中心으로-  44/ 4. 現實에 대한 諦念과 葛藤의 克服   64/ Ⅳ. 諸家의 評과 文學史的 位置   69/ Ⅴ. 結論    73/ 《參考文獻》       76/Ⅰ. 序論/ 1. 硏究目的/ 16·7세기 조선조는 내외적으로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내적으로는 東·西 분당에 의한 당쟁이 극심해지고, 외적으로는 7년간의 임진왜란을 겪는 등 內憂外患으로 나라의 안팎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혼란에도 불구하고 穆陵盛世로 일컬어지는 선조 대는 한국 한문학사에서 가장 찬란한 꽃을 피웠던 시기이다. 이 시기 시문학 사조는 고려 중엽이래 계속되어 온 宋詩風에서 唐詩風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산문문학에서는 東皐 崔笠을 위시한 八文章家, 象村 申欽·月沙 李廷龜·谿谷 張維·澤堂 李植등 四大家와 孤竹 崔慶昌·玉峯 白光勳·蓀谷 이달 등 三唐詩人이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二才라 일컬어지는 東岳 李安訥과 石洲 權? 등 여러 시인이 대거 출현하여 어느 시기보다도 文運이 융성한 시기였다. 體素齋 李春英(1563~1606)은 사림파의 거두인 休庵 白仁傑(1497~1579)의 외손으로 牛溪 成渾(1535~1598)과 松江 鄭澈(1536~1593)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시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특히 권필·이안눌·신흠·허균 등과 깊이 교유했으며, 직접 詩酒를 나누고 어깨를 나란히 하였던 사람이다. 더구나 당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던 권필과는 시적 재능에 있어서 늘 앞뒤를 다투었기 때문에 비평가들에 의해서도 거의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그의 시적 재능에 대해서는 許筠·洪萬宗·李?光·南龍翼·梁慶遇·任璟 등 조선의 비중 있는 비평가들이 다같이 인정하고 있는데, 대체로 盛唐을 본받아서 연원이 깊고, 意境이 뛰어나며, 정감 있고, 호방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또한 申欽과 金尙憲·鄭弘溟·金堉 등이 쓴 <體素集>의 서문과 발문에서도 그가 시인으로서 매우 뛰어난 사람임을 언급한 평들이 보인다. 이러한 평에 대해서는 제Ⅲ장의 詩世界와 제Ⅳ장의 諸家의 評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이러한 제가의 문학적 평가와 그가 남긴 <體素集>의 유작들을 통해 볼 때, 그는 목릉문단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한시 작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한국 한문학사에서 그를 언급하는 경우는 권필이나 허균과 교유한 문인들 중 한 명이거나, 16,7세기 遊仙詩 작가군의 한 명, 또는 목릉문단의 희미한 인물로 조금씩 거론될 뿐이다. 이러한 언급들이 보이는 논문이나 저서로는 閔丙秀의 <韓國漢詩史>(태학사, 1996.)와, 李家源의 <朝鮮文學史>(태학사, 1997.), 鄭珉의 <16,7세기 遊仙詩의 자료 개관과 출현동인>(<韓國 道敎思想의 理解>, 아세아문화사, 1990.) 등이 있다. 따라서 아직 그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춘영이란 인물에 주목하여, 작가론적 검토와 아울러 그의 詩世界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문장으로 높이 평가된 경우도 있으나, 그의 문학의 중심은 한시에 있다. 따라서 이춘영의 시세계를 조명하여 그의 문학적 특질을 밝히고 아울러 한국 한문학사상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자리매김해 보는 일은 우리 문학사를 풍부하게 하는데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2. 硏究方法 : <體素集>은 1638년에 潛谷 金堉(1580~1658)이 湖西 觀察使로 나가 있을 때 그의 시문을 뽑아 한 권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최초로 간행된 문집이다. “…崇禎戊寅, 出按湖西, 抄選爲一冊.…”(金堉, <潛谷遺稿> 卷9 <體素集跋>, <韓國文集叢刊> 86冊 179쪽)  그로부터 10년 뒤 그의 둘째 아들 李時楷(1600~1657)가 호남 관찰사가 되어 유고를 모두 모아 3권으로 간행했으며, 1년 뒤 셋째 아들 李時?(1603~1667)가 다시 호남 관찰사가 되어 잘못되거나 틀린 것을 바로 잡아 완전한 책으로 만들어졌다. “…後十年, 公之仲子時楷爲湖南伯, 盡取遺稿而刻之, 分爲上中下三卷, 期年而其季時?又按此路, 正其訛謬而成之, 於是乎爲全書, 無欠缺焉.…”(金堉, ?潛谷遺稿? 卷9 ?體素集跋? ?韓國文集叢刊? 86冊 179쪽) 현존하는 <體素集> 3卷에는 5언 절구 4題 10首, 7언 절구 95題 243首, 5언 율시 76題 101首, 7언 율시 207題 372首, 5언 배율 7題 7首, 7언 배율 4題 4首, 5언 고시 28題 49首, 7언 고시 38題 40首, 賦 4편, 詞 1편 辭 2편이 실려 있고, 산문은 記 9편, 字說 1편, 事實 1편, 書 6편 跋 1편, 序 9편, 神道碑銘 1편, 祭文 1편, 訟 1편, 文 2편, 祈雨文 1편, 挽 1편, 敎書 1편이 실려 있다. 산문에 비해 시가 월등히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데, 특히 5언 율시, 7언 율시, 7언 절구의 비중이 매우 크다. 이를 보면 그가 문장가라기 보다는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춘영의 시세계를 구체적으로 조명하는데 목적을 두고,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Ⅱ장에서는 時代狀況과 生涯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그와 교유했던 인물들 중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대표적 인물들을 살펴볼 것이다.  Ⅲ장에서는 그의 시세계를 네 가지로 특징지어 고찰할 것이다. 첫째, 역대의 비평가들 및 그와 깊은 교유를 나누었던 많은 문인들의 글에서 확인되는 그의 호방하고 씩씩한 기상과, 현실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현실대응 자세에 관하여 살펴 볼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그가 귀양지에 있을 때 지은 시들에 자세히 나타나므로 이 시기 지어진 시들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둘째, 가정적인 불행과 사회적인 불행을 고루 겪었던 그의 인생행로에 초점을 맞추어, 먼저 가정적인 불행을 읊은 시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사회적인 불행, 특히 정치생활에서 겪은 불행을 중심으로 살펴 볼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불행은 그를 체제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떠돌게 하였는데, 이 시기 지어진 시들을 살펴보아 그의 방외인적 성향도 아울러 고찰해 보고자 한다. 셋째, 현실에서 겪는 갈등과 울분은 그의 관심을 현실 아닌 이상세계로 돌리게 하였는데, 이러한 관심은 유선시 창작으로 표출되었다. 문집에 나타나는 다수의 유선시 가운데 ?독신선전? 53수가 분량 면이나 내용 면에서 월등하므로 이를 중심으로 고찰해 보아, 그가 유선시의 창작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살펴 볼 것이다.

 

  넷째, 험난한 인생을 겪은 작자가 생의 후반부에 이르면 어떠한 사상을 가지게 되는지, 이시기에 지어진 시들을 통하여 살펴 볼 것이다. 시의 분류는 생의 시간적 순서로 나누어 보았다. 이러한 순서는 문집에 나타난 詩題를 바탕으로 하였는데, 같은 체제 안에서는 연대별로 분류해 놓은 듯했다. 이는 시제에 나타나는 地名등을 통하여 확인하였다. Ⅳ장에서는 이상에서 검토한 내용을 바탕으로 제가의 평을 참조하여, 그가 한국 한문학사상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影印, 간행한 <韓國文集叢刊> 66책의 <體素集>을 底本으로 하였다.

 

  Ⅱ. 生涯와 文學性向/ 1. 時代背景과 生涯/ 이른바 穆陵盛世라 불리는 宣祖 연간은 조선왕조의 건국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체제 확립과 문물의 창조·정비 등이 크게 한 단락 지어지고, 바야흐로 또 다른 변화와 발전을 위한 움직임들이 다방면에 걸쳐 제기된 시기다. 정치적으로는 지방에 묻혀 후진을 양성하면서 道學으로 사상적 무장을 한 사림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훈구·척신 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문학적으로도 전에 없이 성황을 이루어 새로운 文風의 개척과 함께 활발한 문학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사림 세력의 형성 및 집권 이후의 동향과 관련하여 우리 역사는 엄청난 격변의 소용돌이를 겪는다. 크게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난 사화는 신흥 사림 세력에 대해 기존의 훈구·척신 세력이 대대적으로 정치적 반격을 가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조 후기까지 지속된 당쟁은 선조 이후 집권 세력을 형성한 사림 내부에서 政論과 입지가 서로 다른 정파간의 대립과 분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정치적 동향은 박영주, <정철 평전>(중앙M&B, 1999년) 9쪽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집권자들의 대립과 분열 속에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결국 7년간의 대란 앞에서도 속수무책으로 어떤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말았다. 한국 한문학사에서 이 시기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 한 극점을 이루고 있다.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體素齋 李春英은 이러한 시대를 살다간 인물이다. 그의 호는 體素이고, 字는 實之이며 본관은 全州이다.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된 곳이 없다. 여느 문인에게 흔히 보이는 年譜나 行狀도 남아있지 않다. 단지 <朝鮮王朝實錄>과 <朝鮮文科榜目>, <司馬榜目> 및 동 시대를 살았던 여러 문인들의 글 속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대략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증조부는 戊山君 李千丁으로 陶成副守를 지냈다. 그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永善君 李龜壽, 둘째 아들은 永川君 李眉壽, 셋째 아들은 扶安正 李碩壽이다. 이 중 둘째아들 이미수가 體素의 祖父이다. 그의 부친 李胤祖에 대해서는 실록에도 별 다른 기록이 없다. 단지 義寧監을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李胤祖는 白仁傑(1497~1579)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 1여를 낳았는데, 그 사위는 趙大宏이다. “…義寧監 一男一女, 男李春英僉正, ?趙大宏.…”(宋時烈, <文敬公 白仁傑神道碑>, <休庵 白仁傑의 生涯와 思想>, 휴암사상연구논총, 1997, 28쪽.)

 

  이로 보건대 體素의 선대에는 그다지 글을 잘한다거나 문장에 뛰어난 사람은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문장에 남다른 재주를 보인 것은 일찍 부모님을 잃고 외가에 맡겨져 자라면서 “…早孤托於坡門…”(<聽松牛溪集> 年譜補遺 卷5 <師友錄>, 亞世亞文化社, 1979, 508쪽.)  당시 碩學이었던 외조부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외조부 白仁傑은 趙光祖(1482~1519)의 문인으로 宋麟壽(1487~1547)·柳希春(1513~1577)·李珥(1536~1584)·成渾(1535~1598) 등 당대의 사림계 인물들과 널리 교유했는데, 특히 율곡·우계와는 절친하였다. 그러므로 體素가 牛溪의 문인이 된 것도 외조부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외가에서 성장하였는데, 9세에 우계에게 나아가 배웠다. “…九歲受業, 英才奇氣超拔群類, 先生奇愛之.…”(<聽松牛溪集> 年譜補遺 卷5 <師友錄>, 亞細亞文化社, 1979, 508쪽) 體素는 처음에 淸風金氏 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김씨는 일찍 죽고 말았다. “…初爲我伯姑夫, 姑早歿, 觀察公兄弟, 皆繼室出…”(金堉, <潛谷遺稿> 卷9 <體素集跋>, <韓國文集叢刊> 86冊 179쪽.) 金氏의 祖父는 중종 때의 문신인 沙西 金湜(1482~1520)으로, 1519년 조광조·金淨(1486~1520) 등 사림파의 건의로 실시된 賢良科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당시 현량과의 천거 명목에는 성품·기국·재능·학식·행실·행적·생활태도 또는 현실대응의식 등의 일곱 가지가 있었는데, 급제자 28명 가운데 유일하게 이 7개 항목 모두에서 완벽한 평가를 받았다. 또한 당시 사림의 영수로 숭앙받던 조광조와 학문적·인간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연결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훈구세력 제거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조광조와 함께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개혁정치를 단행하기도 하였던 인물이다. 沙西는 휴암의 스승이었는데, 휴암의 나이 23세에 ‘大司成 김식에게서 강학하였다’. “講學于金大司成湜”(<實記> 卷2 附錄 <年譜> 23歲條)는 기록이 보인다. 吳錫源에 의하면 휴암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沙西와 靜庵이라고 하였다. 吳錫源, <休庵의 敎育思想>,<休庵 白仁傑의 生涯와 思想>, 휴암사상연구논총, 1997, 227쪽. 그렇다면 체소가 沙西의 손녀와 결혼을 한 것도 이러한 師承 관계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체소는 청풍김씨와의 사이에 큰아들 時材(?~?)를 얻었고, 나중에 다시 盧德元의 딸에게 장가들어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時楷(1600~1657), 둘째가 時?(1603~1667)이다. 이 삼형제는 宋時烈이 지은 휴암의 신도비에 外孫 중 뛰어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큰아들 이시재는 僉知를 지냈다는 기록 “…子孫多不能盡錄而其外裔之顯者, 令趙鎰?佐郞??僉正成??僉知稷, 李時材…參判李時楷時?…”(宋時烈, ?文敬公白仁傑神道碑?, <休庵 白仁傑의 生涯와 思想>, 휴암사상연구논총, 1997, 28쪽) 이 보이기는 하나 그 외의 자세한 것은 찾을 수 없다.

 

  이시해는 號가 南谷·松崖이고 字가 子範이다. 1630년(인조8년) 생원이 되고, 그해 別試文科에 乙科로 급제, 正言이 되었다. 1634년 관작을 빼앗기고 북변에 귀양갔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평에 이어 교리를 지냈다. 1636년 문학이 되어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를 호종하고, 1638년 보덕에 오르고 응교·집의·동부승지·우승지를 거쳐 1647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1650년(효종1) 좌승지로서 춘추관수찬관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대사헌·대사간?同知經筵事 등을 거쳐 1657년 이조참판이 되고,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시매는 호가 六隱齋이고 字는 子和로 1629년(인조7년) 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29년 정언을 거쳐 1635년 부수찬·검토관·수찬·부교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36년에는 鄭致和 등과 같이 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헌납·부응교·응교·사간 등 삼사의 요직을 담당하였다. 1585년(선조18년) 체소의 나이 23세 때 송강이 東人들로부터 조정 내부에 파당을 만들어 나라 일을 그르치려는 무리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었다. 이에 그들의 공박과 사간원 및 사헌부의 논핵을 받고 그와 가까이 지내던 주변 인물들과 함께 벼슬에서 물러났다. 처음에 高陽을 중심으로 한 近畿 지방에서 생활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가까이 에서 계속 비방의 소리가 들려오자 결국 창평으로 낙향하였다. 이때에 체소는 외숙 백유함과 함께 송강을 찾아갔었던 듯하다. <鄭松江寓居高陽塋下村舍 朴公景進漸 李公善吉玄培及季舅皆會 飮酒呼韻 時李公將赴黃岡 而季舅新歸自湖南>이라는 시를 통하여 알 수 있다.(李春英, ?體素集? 上, 五言律詩, ?韓國文集叢刊? 66冊 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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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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