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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79-4:이춘영(1600-1601.10.17)
작성자장병창 @ 2012.09.29 06:27:06

   예천고을원(79-4) : 이춘영(1600-1601.10.17) : '채소재집' 3권을 저술한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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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9년(선조22년)에 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나 己丑獄死로 이어졌다. 이때 松江이 委官이 되어 그 옥사의 범위를 지나치게 확대하고 또 가혹하게 다스렸다. 정여립은 고변이 있자 鎭安 竹島로 피신하였다가 자결하였다. 정여립이 자결하자 동인들은 서인들의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역모라는 혐의를 해명할 길이 없어져 동인 측의 피해자가 많을 것을 예측했다고 한다. 許捲洙, <朝鮮後期 南人과 西人의 學問的 對立>, 法人文化社, 1993, 16쪽.

 

  體素는 1590년(선조23년) 28세의 나이로 增廣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인 1591년(선조24년) 1월 檢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관직에 나아간 지 불과 3개월도 지나지 못하여 ‘爲人이 浮薄하여 재상집에 출입하고 있으니 파직시키’라는 탄핵을 당하였다. 이는 그가 당시 西人의 영수로 지목되었던 牛溪의 문인이었으며, 또한 松江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반대파인 동인에 의해 이러한 평가를 받았으리라 보여진다. 결국 1591년 6월 송강이 李山海의 음모에 빠져 建儲問題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 江界로 귀양 갈 때, 그도 연루되어 三水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기축옥사 때 세력이 실추되었던 동인들은 이것을 再起의 기회로 삼았고, 서인의 영수였던 송강과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서인계 인물들이 함께 파직 당하거나 귀양을 떠남으로 사실상 서인은 몰락의 길에 들게 되었다. 그해 8월 체소는 송강이 圍籬安置되어 있는 강계로 찾아갔다. 송강은 圍籬가 처마와의 거리가 멀지 않은데다가 서너 길이나 높이 솟아 있어 햇빛과 달빛이 들지 않고, 8월인데도 불구하고 얼음을 밟고 찾아가야 할 만큼 춥고 외진 곳에 유배되어 있었다. 체소가 찾아갔을 때 지붕의 서까래가 땅에 닿아서 머리를 숙이고 몸을 구부리고서야 겨우 방에 들어갔으며, 먹는 것은 오직 귀리[瞿麥]뿐이었다고 한다. 成渾, <牛溪集> 續集 卷5 <答安習之敏學-辛卯9月>, <韓國文集叢刊> 28冊 217쪽.

 

  체소 자신도 귀양와 있는 몸이었지만 이러한 스승의 처지에 더 마음 아파했던 것으로 보인다. 1592(선조25년)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유배지에서 풀려난 그는 藝文館 檢閱, 承政院 注書, 戶曹 佐郞을 차례로 제수받았다. 또 글을 잘 한다는 명성이 있어 抄啓 製述文官이 되어 중국으로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1592년 8월부터 1593(선조26년)년 11월까지의 1여 년은 그의 정계생활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兩湖에 내려가서 공무를 빙자하여 폐단을 일으킨다는 혐의로 비변사의 탄핵을 당하였고, 1595년(선조 28년)에는 중국인과 사사로이 결탁하여 흔단을 일으켰다는 혐의를 받아 탄핵 당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그해 6월, 앞의 일로 곤장 90대를 맞고 2년 반의 징역에 처하며 職牒을 다 빼앗기는 벌을 받아 함경남도 定平으로 두 번째 귀양을 가기에 이른다.  1600(선조33년)년 體素는 예천군수로 부임하였는데, 부임한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都體察使 李德馨(1561~1613)이 그를 비롯한 지방수령 6명의 파직을 청하였다. ‘이춘영은 自奉이 간소하지 않고 호령이 거칠다’고 하면서 민생의 괴로움과 편안함이 모두 수령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데, 政令이 어긋나고 거리낌없이 멋대로 하여 백성들에게 깊이 원망을 산 사람은 처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 40세 되던 1602년(선조 35년) 知製敎에 선임되어 이듬해 명종실록의 보수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간원이 실록 편찬관의 선발과 충군 공신에 대한 포상을 줄일 것을 요청하면서, 이춘영이 비록 글을 잘한다는 명성은 있으나 淸論에 버림받은 지 오래되었으므로, 지제교에 선임된 것에 대하여 退去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는 매우 직설적인 사람으로 누군가 잘못을 하면 면전에서 질책하여 용서가 없었다. 象村은 그가 능력을 다하지 못하고 꺾인 것이 이러한 성격에 기인한 것 “…公性易直?亮, 放逸不拘檢, 面斥人過, 至顔?心悸不饒也. 挫?敲?, 淪沒不振, 盖坐是也.…”(申欽, <體素集> <體素集序>, <韓國文集叢刊> 66冊 346쪽.)이라 하였는데, 위의 사건들은 그러한 평을 뒷받침하는 일련의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體素가 그렇게 불행한 일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는 당시 첨예하게 대립되던 西人과 東人의 당쟁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서인의 영수였던 우계와 송강 사이에서 학문을 익히고 정치생활을 하였던 그였기에 반대파의 시야에서 항상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송강이 조정에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때와 그가 몰락했을 때의 체소의 위치를 살펴보면 그러한 상황을 더욱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불리한 외부적인 요인에도 불구하고 시인으로서, 작가로서의 체소는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인정받고 있었다. 송강의 죽음으로 서인이 몰락한 상황에서도 그가 글을 잘한다는 이름이 있어 지제교에 선임되어 명종실록의 보수에 참여한 것은 그 객관적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체소는 1606년 12월 27일 淸州의 田舍에서 일생을 마감하고, 이듬해 維楊의 선산에 묻혔다. “…丙午仲冬二十七日, 歿于淸州之田舍, 年四十有四. 明年春, 歸葬于維楊之先?.…” (李安訥, <東岳集> 卷22 <夢故宗簿寺李僉正實之>, <韓國文集叢刊> 78冊 435쪽.)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體素齋 李春英은 대외적으로는 7년의 긴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대내적으로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핵을 당하고 유배를 가는 등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정치생활의 不遇와는 상관없이 문장가로서의 體素는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2. 交遊와 文學性向 :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그의 인생의 방향이 어떻게 결정되느냐는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한 것도 아들이 받게 될 주위의 영향을 생각해서였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환경을 이루는 요소 또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이다. 옛 어른들이 바른 사람과의 바른 사귐을 중요시했던 것도 이런 이유라 할 수 있다. 체소는 성품이 강직하여 남들에게 허교를 잘 하지 않고 시속과 어울리지 않았는데, 그런 만큼 그의 사귐도 엄정하였다. 허균은 그의 안목이 높아 세상에서 그에게 허여를 받는 이가 드물었는데, 유독 자신과 권필과 이안눌을 칭찬했다고 하였다. “足下眼空一世, 無少許可, 而獨稱吾三人, 幸卑之無甚高論.…” (許筠, <惺所覆?稿> 卷21 ‘與李實之 丁未年 6月’, <韓國文集叢刊> 74冊 311쪽.) 이 세 사람은 당대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와 현실의 부조리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비판하였던 깨어있는 지식인임을 볼 때 체소의 사귐이 어떠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문집을 보면 교유했던 사람이 약 100여명 정도 등장한다. 이중에서 체소의 문학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몇 명만 간단히 언급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이러한 문학적 교유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문학성향을 살펴 볼 것이다. 思庵 朴淳(1523~1589)은 서인계 인물 중 하나로, 조정이 동·서로 붕당을 이룰 때 이들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던 사람이다. 이 시기 그는 우계·율곡과 뜻을 같이 하였는데, ‘淳은 곧 渾이고 渾은 곳 珥이어서 이 세 사람은 얼굴은 다르나 마음은 하나’ 裵晟熹, <思庵 朴淳의 詩文學>,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한문교육학과 석사학위논문, 1992, 6쪽. 라고까지 일컬어졌다. 그는 청렴과 절의로 한평생을 살았고, 시문에 있어서도 문장의 彫琢이나 繪繡등을 배격하고 무기교의 자연스런 詩作을 높이 평가하였다. 裵晟熹, 위의 논문, 1992, 2쪽.

 

  체소는 이러한 사암의 사람됨과 시적 재능을 사랑하였는데, 그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있었다. 노년에 산림에 은거하며 안빈낙도하는 사암의 일생에 존경을 표하면서, 그와 함께 시를 짓고 자연을 읊조리며 세상적인 부귀나 명예에 가치를 두지 않고 高遠한 정신세계를 함께 누릴 수 있어 다행이라 하였다. 이는 그가 사암에게 보낸 시에서 공자의 제자인 曾點이 다른 제자들이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포부를 피력했던 것과는 달리 정신적인 수양에 가치를 두고 이야기했던 부분 “點 爾何如? 鼓瑟希, ?爾舍瑟而作, 對曰, 異乎三子者之撰. 子曰 何傷乎, 亦各言其志也. 曰 莫春者, 春服 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夫子 ?然嘆曰 吾與點也.” (<論語><先進>)을 인용한 것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先生勳業在黃扉, 晩歲林泉返釣磯. … 舞雩風月詠言歸.” (李春英, <體素集> 上 7言律詩 ‘上思菴相公’, <韓國文集叢刊> 66冊 376쪽.) 특히 사암은 조선의 시풍을 學宋風에서 學唐風으로 이끈 선구자라 할 수 있는데, 최경창·백광훈·이달의 삼당시인이 그로 인하여 배출되었다. 뒤에 언급될 석주 권필이나 동악 이안눌은 삼당시인의 뒤를 이어 학당풍을 선도했던 발군의 시인이었다. 체소는 석주나 동악과도 깊은 교유를 나누었을 뿐 아니라, 이 두 사람은 허균과 더불어 체소가 허여한 세 사람임을 주지할 때, 그 역시 상당부분 학당의 영향아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집에 나타난 그의 시들을 살펴보아도, 情感을 중시한 것이라든지, 白話體의 시어를 구사한 것이라든지, 같은 단어를 반복하여 음률 적인 기교를 나타내려 한 것 등에서 唐詩의 기풍을 엿볼 수 있다. 古玉 鄭?(1533~1603)은 온양 정씨로 어려서부터 가정적, 사회적으로 많은 환난을 겪었다. 부친인 鄭順朋은 1519년에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그때부터 등용이 억제되었고, 1545년에는 을사사화로 인해 부친과 형 鄭?이 갈등하여, 결국 정렴은 세속을 버리고 은둔하였다. 그로 인해 정작은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현실에서 겪는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은거생활을 하게 된다. 孫燦植, <朝鮮朝 道家의 詩文學 硏究>, 국학자료원, 1995, 139쪽. 정작은 젊어서부터 술을 좋아하여 酒仙으로 일컬어 졌다. 또한 시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어 聲調가 청원했으며 詩律에 노련하였다. 孫燦植, <朝鮮朝 道家의 詩文學 硏究>, 국학자료원, 1995, 144쪽.  그러나 현실에서 겪은 환난은 그를 도가사상에 심취하게 하여 16,7세기 遊仙詩 작가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러한 古玉의 성향은 체소와도 비슷하여 체소의 신선사상 또한 많은 부분 고옥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고옥을 ‘酒仙’이라 부르고, ‘기린을 부리고자 옥편을 휘두른다’ “五十年來作酒仙, … 要?麒麟捧玉鞭.”(李春英, ?體素集? 上 7言絶句 ?贈古玉鄭丈三首?, <韓國文集叢刊> 66冊 368쪽.)고 하면서 그의 호방한 기상을 평하였다. 또한 날이 갈수록 그의 詩才는 기이해져 간다 “玄城佳麗聞來久, 古玉公詩老更奇.…”(李春英,<體素集> 中 7言律詩 ‘次古玉丈’, <韓國文集叢刊> 66冊 392~393쪽.)고 하고, 그의 문장이 萬人의 앞에 선다며 “…文章要在萬人先, 無功鄕裏已逃跡, ?飯濁?堪送年“(李春英, <體素集> 中 7言律詩 ‘古玉丈呼韻’, <韓國文集叢刊> 66冊 393쪽.) 크게 평가하고 있다. 순탄치 못했던 관로 생활과 현실에서 겪는 불행, 그리고 詩와 술을 사랑하고 선계를 심히 동경하였던 고옥의 인생행로는 체소와 무척 비슷하다. 이는 체소가 그를 마음으로부터 흠모하고 높이 평가하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牛溪 成渾(1535~1598)은 17세 때 체소의 외조부인 휴암 백인걸에게 나아가 <書經>을 배웠는데, 휴암은 성혼의 부친인 成守琛, 숙부 成守琮과 함께 靜庵 趙光祖의 문인이었다. 이는 정암의 학문이 성수침·성수종·휴암 등을 거쳐 우계에게 전해졌음을 의미한다. 朴均燮, <牛溪成渾의 敎育思想 硏究>,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20쪽. 체소는 9세에 우계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우계는 그의 재주와 기특한 氣가 남들보다 뛰어나 그를 특히 아꼈다고 한다. 체소의 외조부가 휴암이고 그의 스승인 우계 또한 휴암의 문인이므로 정암으로부터 이어지는 道學이 우계를 거쳐 자연스럽게 체소에게도 이어졌을 것이다. 우계는 건저문제에 연루되어 三水로 귀양가는 체소의 영락을 무척 마음 아파하면서, 몸을 잘 보존하여 살아서 다시 보기를 당부하였다. “久謂君有此事, 不意我及見之, 唯願生還, 拜于北堂前而已, 又願平心素位, 喫緊辛苦, 以爲己任 勿以憂惱生疾也. 常以世人取禍甚於吾者持以自柳, 則亦可以少寬矣. 今作一書永訣, 相見唯在, 九原不宣.”(成渾, <牛溪集> 卷5 ‘與李實之書 辛卯七月’, <韓國文集叢刊> 43冊 132쪽.)

 

  松江 鄭澈(1536~1593)은 사람됨이 소탈하고 자처하지를 않으며 구속받기를 싫어하고 詩酒를 좋아하였다. 이런 점들은 체소와도 비슷한 면모로 그는 정치적 선배로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송강을 흠모하였던 것 같다. 이는 송강이 동인들로부터 조정 내부에 파당을 만들어 나라 일을 그르치려는 무리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高陽으로 그를 찾아간 것이라든지, 건저문제가 발생했을 때 체소 자신도 삼수에 귀양가 있는 처지면서 江界로 송강을 찾아가 그의 비참한 생활을 보고 마음 아파했던 것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송강 또한 자신과 辛苦를 같이 한 체소를 늘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체소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당시의 후배들이 그를 늘 만나보고 싶어했던 것이라든지, 재주를 지녔음에도 쓰이지 못하고 귀양살이를 한 것들을 술회하면서 세상이 그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擧世區區一識荊, 仍敎後輩喚先生. 天心正悔?州謫, 高見曾分楚水萍. 酒席興濃時跌宕, 名途意倦少經營. 無人解得剛?在, 錯刀黎渦却有情.”(鄭澈, <松江集> 續集 卷1 ‘次韻贈李員外實之二首’, <韓國文集叢刊> 46冊 192쪽.) 이어서 체소의 불우한 삶을 ‘난초가 가시밭 가운데서 고난을 당하는 것과 같다’ “幽蘭身世寄叢荊…”(鄭澈, <松江集> 續集 卷1 ‘又用前韻’, <韓國文集叢刊> 46冊 192쪽.)고 하며 체소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

 

  象村 申欽(1566~1628)은 체소와 가장 깊은 교유를 나누었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象村이 처음 체소를 만난 것은 그의 나이 15세 때였다. “…余舞象之年, 僑居西郭外, 有秀才羸?蹇衛挾策, ???余門者, 起視之非素際也. 迎而坐詢其名, 卽公也.…”(申欽, <體素集> ‘體素集序’, <韓國文集叢刊> 66冊 345쪽.) 당시에 체소는 이미 당대의 문인들 사이에서 文才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가 지은 <體素集>의 서문을 보면, 외직으로 시골에 내려가 있던 체소가 가끔 서울에 올라오게 되면 늘 말머리를 상촌의 집으로 돌려 그에게 찾아와 서로 손잡고 즐기면서 한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했고, 慷慨한 마음으로 시를 읊조리며 더러는 호탕한 얘기에 해학까지 곁들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公處田廬, 時入城市, 馬首輒指余所, 炊黍買苦, 握手?歡, 揚?一世, ?慨悲吟, 豪辭錯出, 雜以調諧…” (申欽, <體素集>, ‘體素集序’, <韓國文集叢刊> 66冊 346쪽.) 이는 두 사람 사이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도 서로 이해하고 알아줄 만큼 막역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체소가 외지에 있으면서 봄나물을 상촌에게 보낸 것 “浮世悠悠蟻慕?, 故人情況豈徒然. 稀鹽淡醋陽坡菜, 絶勝何家食萬錢.” (申欽, <象村集> 卷19 ‘謝李實之送新蔬二首’, <韓國文集叢刊> 71冊 486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체소는 성격이 簡易하고 주위의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 호방한 사람이었는데, 봄에 난 새 나물을 보낼 만큼 세심한 마음 씀씀이를 보였다는 것은, 그가 상촌을 진심으로 믿고 마음으로부터 벗으로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상촌은 또한 체소가 多讀으로 인하여 온축된 것이 많아 문장을 짓는 데 아무 거리낌없이 일사천리로 지으며, 그가 입으로 내는 모든 것들은 외울 만하고 노래 할만한 것들이며, 점점 대가가 되어가고 있었다고 평하였다. “咀嚼左馬莊列下逮韓蘇馳騁數千載, 必極其所如 往而後已. 陸海之藏富於?頓而氣之積也. 衍??敷, 譬如逢春之木, 生色自悅而其榮則?, 有本之瀾, 一瀉千里而其匯則淵, 達而爲通衢長術, 嵬而爲?娑靈光, 其在嶺海之?, 風呻雨?, 醉罵眼?, 無非可誦而可歌也. ??乎大家矣.”(申欽, <體素集>, ‘體素集序’, <韓國文集叢刊> 66冊 345쪽.) 그리하여 만일 그가 조금만 더 살았어도 그의 시가 신비의 경지에 이르러 시의 화신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假公以年則其有不神而化之也乎…”(申欽, <體素集> ‘體素集序’, <韓國文集叢刊> 66冊 346쪽.) 체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였다. 또한 체소가 한갓 외직인 예천군수로 부임해 갈 때에는 높은 재주를 가지고도 크게 쓰이지 못하는 체소의 처지를 안타까이 여기면서 그를 낮은 가지에 깃든 날개 부러진 봉황에 비유하였다. “…鸞鳳卑棲羽??…”(申欽, <象村集> 卷13 ‘送體素赴醴泉郡三首’, <韓國文集叢刊> 71冊 422쪽.) 그가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挽詞를 지어 하늘조차 그의 재주를 시기하여 이에 멈추었다하면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토로하였다. “高才天亦忌, 君故止於斯. 江海風霜?, 關山道路危. 持杯無舊面, 開?有新詩. 畢竟同歸盡, 孤懷淚自垂.” (申欽, <象村集> 卷10 ‘挽體素’, <韓國文集叢刊> 71冊 389쪽.) 상촌은 체소보다 23년을 더 살았지만,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였다. “幽愁無賴倚東風, 又見南階芍藥紅. 人世百年能幾在, 舊遊長憶夢魂中.” (申欽, <象村集> 卷19 ‘見李實之詩集 有西遊故事 ?仰十六年 實之已作故人 追次其韻以寓感’, <韓國文集叢刊> 71冊 489쪽.)

 

  蛟山 許筠(1569~1618)은 체소가 허여했던 세 사람 중 하나로, 그 또한 체소와 깊은 교유를 나누었다. 체소와 교유를 나눈 사람 중에 蛟山은 유일한 동인이라 할 수 있는데, 체소와는 晩年까지 글로 교유 하였다. “…不?締交以文字, 晩歲常數過從, 悉其爲人, 特惜其文章罕有其比倫…”(許筠, <惺所覆?稿> 卷15 ‘李實之?辭 幷引’, <韓國文集叢刊> 74冊 263쪽.)  <惺所覆?稿>에 실린 체소와 관련된 글들을 보면, 교산이 체소가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당대에 체소와 깊은 교유를 나누었던 다른 문인들의 글에서도 이러한 안타까움에 대한 부분이 공통적으로 드러나지만, 교산의 경우는 특히나 원통히 여긴다고 까지 표현하며, 체소의 영혼이 있다면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잘 알 것이라 하였다. “…人爲君怒, 我爲君寃, 魂若有知, 必?斯言. 嗚呼哀哉,…”(許筠, <惺所覆?稿> 卷15 ‘李實之? 幷引’, <韓國文集叢刊> 74冊 263쪽.) 또한 체소의 시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안연지·李太白과 비등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를 붕새로, 세상에서 알아주지 못하는 당대의 집정자들을 뱁새로 비유하며 그의 문장은 대대로 이어질 것이라 하였다. “多病顔光祿, 高歌李謫仙. … 一世雖名拙, 千秋可代與. 笑地籬底?, 焉識有搏鵬.” (許筠, <惺所覆?稿> 卷2 ‘贈李實之 春英’, <韓國文集叢刊> 74冊 137쪽.) 교산이 1595년에 체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체소는 그가 문장을 지음에 허세가 있다고 지적하였고 “足下眼空一世, 無少許可而獨稱吾三人, 幸卑之無甚高論. 以僕爲?也, 以石洲爲枯也, 以子敏滯也, 此三病何以?之, 足下今之和扁也. 須以良方治之, 至幸.”(許筠, <惺所覆?稿> 卷21 ‘與李實之 丁未年 6月’, <韓國文集叢刊> 74冊 311쪽.), 그는 체소가 거칠고 필요 없는 부분을 조금 베어내면 순수한 문장의 대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한 부분이 보인다. “足下旣己?吾病, 誠對證良藥也. 喜幸幸, 雖然足下亦有病, 吾欲針之, ?虛心以受否, 人患才少 子患才多, ?割愛而去其蕪冗則純然大雅也. 此言深惜兄而發, 毋自諱疾忌醫, 令二竪上膏之, 上可也.”(許筠, <惺所覆?稿> 卷21 ‘與李實之 丁未7月’, <韓國文集叢刊> 74冊 311쪽.) 이처럼 교산이 비록 6살이나 연하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진심 어린 선의의 충고도 마다하지 않는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서로 막역한 사이로 지냈는데도 불구하고 <체소집>에는 그에게 보내는 글이 단 한편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체소가 그에게 보낸 글이 없어서가 아니라, 潛谷 金堉이 1638년에 처음 <체소집>을 간행하면서 당시에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교산과 관련된 글을 의도적으로 삭제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러한 경향은 교산과 교유했던 대부분의 문인들의 문집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石洲 權?(1569~1612)도 체소가 허여한 세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천재적인 재질에다가 저항적인 기질을 타고났는데, 세상에서 쓰이지 못하여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울분과 갈등 속에서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쓰여진 그의 시에는 자아가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 許捲洙, <權? 漢詩 硏究>,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문학전공 석사학위논문, 1982, 15쪽. 石洲의 이러한 면모는 또한 체소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석주와 체소는 역대의 비평가들에게 거의 항상 나란히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두 사람이 서로 마음으로 가까이하였고, 인생행로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시적 재능에 있어서도 늘 앞뒤를 다투었기 때문이다. 체소는 석주를 푸른 바다를 따르는 큰고래라 비유하고, 방어나 꿩처럼 보잘 것 없는 세상의 집정자들이 큰고래인 그를 죽인다고 표현하면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도 세상에 쓰이지 못하는 그의 현실을 마음 아파하였다. “文人從古喜相輕, 每度逢君意更傾. ?項雉膏俱?細, 早從滄海斬長鯨.”(李春英, <體素集> 上 7言絶句 ‘贈權汝章’, <韓國文集叢刊> 66冊 368쪽.) 석주 역시 ‘詩才 때문에 그대는 근심거리가 많구려’ “…詩才子患多…”(權?, <石洲集> 卷3 ‘醉賦示李實之’, <韓國文集叢刊> 75冊 379쪽.)라 표현하면서 체소의 시적 재능을 인정하였다. 그는 ‘君不見對酒走筆’과 같은 작품에서 사암과 송강, 그리고 建儲問題 때 함께 축출되었던 체소와 車天輅 등 네 사람의 불우에 대한 안타까움과 집권층에 대한 분노를 노래하였다. 鄭珉, <목릉문단과 석주 권필>, 태학사, 1999, 148~149쪽. 위에 언급된 고옥이나 교산 등은 석주와 더불어 방외인적 문학경향을 나타내는 문인들이다. 이들은 체제의 밖에 살면서 현실과 부합되지 못하고, 냉소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던 사람들이다. 높은 재주를 가지고도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불우한 생을 살았던 이들의 인생행로는 체소의 그것과도 비슷하다. 즉 체소의 시에 나타나는 이러한 방외인적 성향은 위에 언급된 이러한 문인들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東岳 李安訥(1571~1637) 역시 체소가 허여한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는 李荇의 증손으로 李植의 從叔이다. 18세에 進士試에 수석 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과거 볼 생각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하였다. 동년배인 석주와 선배인 尹根壽·李好閔 등과 교우를 맺었는데, 이러한 모임을 東岳詩壇이라고 하였다. 동악 역시 높은 재주를 가지고도 불우한 삶을 산 체소의 생애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특히 건저문제에 연루되어 체소가 삼수로 귀양을 갔을 때 그의 불행에 대하여, “문장이 있는 사람은 命이 薄하다 문장이 있는 사람은 命이 薄하다 : 당나라 두보의 ‘天末懷李白’ 시에 “문장은 명이 통달하는 것을 미워하고 도깨비는 사람 지나가는 것을 기뻐한다[文章憎命達 ?魅喜人過]”하였다. 하니, 夫子도 늘그막에 궁하게 되었네” “…文章多薄命, 夫子老窮鄕…”(李安訥, <東岳集> 卷1 ‘酬寄李正郞實之’, <韓國文集叢刊> 78冊 13쪽.)라 표현하였다. 이는 세상에 대한 포부와 재능을 가지고도 쓰이지 못하는 체소의 불우를 孔子에 비견하여 그의 시적 재능을 크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동악의 체소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훗날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석주의 아들과 체소의 아들이 江都로 그를 찾아갔을 때, ‘흐르는 물과 높은 산을 다시는 탈 수 없네’ “…藝文檢閱李僉正, 司憲持平權敎官. 天下奇才止於此, 世間行路何其難. 陽春白雪爲誰唱, 流水高山不復彈. 晧首今逢兩家子, 一樽江海秋雲寒.…”(李安訥, <小華詩評> <韓國歷代詩話類編>, 亞細亞文化社 1988. 292쪽.)라 하면서 석주와 체소가 자신의 ‘知音’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체소 역시 이안눌의 사람됨이 청백하고 총명하여 가까이 하고자 하였다. 역시 그가 삼수로 귀양갈 적에 이안눌에게 부쳐 보낸 시 “驛亭離別後, 淸晤夢中頻. 我逐隨陽鳥, 君爲入幕人. 路長書未寄, 詩老興逾新. 塞北風沙盛, 荷衣莫染塵.”(李春英, <體素集> 上 5言律詩 ‘寄子敏’, <韓國文集叢刊> 66冊 355쪽.)를 보면, 동악을 ‘내 장막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라 표현하면서 그를 마음으로부터 허여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車天輅(1556~1615), 柳夢寅(1559~1623), 李?光(1563~1628), 李廷龜(1564~1635), 金尙憲(1570~1652), 鄭允穆(1571~1626) 등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과 교유한 것이 문집에 나타난다. 체소가 깊이 교유한 대부분의 문인들은 서인계 일색으로 그들은 당쟁에서 패배한 집단이었다. 교산만 유일하게 동인이었으나, 그 또한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방외로 떠돌던 인물이었다. 이들이 살았던 조선 중기, 특히 선조 년간은 동·서 양당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7년간의 긴 임진왜란을 겪는 등 안팎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청·장년기를 보내었던 젊은 문인들은 현실과 정치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되었고, 이러한 것들은 문학을 통하여 강한 현실인식으로 표출되었다. 석주의 시에 사회시가 유난히 많이 나타나는 것이나, 허균이 <홍길동전> 같은 소설을 지어 현실을 풍자했던 것이 그러한 예라 할 수 있다. 체소의 시에도 이러한 현실인식을 표출한 것이 다수 보이는데, 이 역시 당시의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정치에서 패배한 서인으로 살면서 현실에서 겪는 갈등은 해소하고자 유선시를 창작하였으나, 그 안에서조차 강한 현실인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상에서 논의했던 체소의 교유관계와 문학성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체소가 스승으로 모셨던 사람들은 당대에 문장과 학문이 크게 이루어졌고, 또한 인품과 절개가 뛰어나 시속과 어울리지 않으므로 따르고 존경하는 이들이 많았던 인물들이다. 그들의 이러한 점은 또한 체소가 본받고 닮아가고자 했던 부분들이었다. 또 그와 당대에 교유를 나누었던 대부분의 문인들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거나, 순탄치 못한 벼슬생활을 하였거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불우한 인생은 모순 투성이의 현실을 직시하고, 뛰어난 문장력을 바탕으로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게 하였다. 또한 그들은 豪放한 기상으로 詩와 술을 사랑하고, 문학으로 인생을 논하였던 시대의 지식인들이었다. 체소의 문학성향은 그가 생존했던 시대 상황과 그의 인생행로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어느 하나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이에 체소의 문학성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중기에 정점을 이루었던 學唐風의 시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현실에 부합하지 못하고 겉으로 떠돌며, 古玉이나 蛟山·石洲와 같은 방외인적 문학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셋째, 당쟁과 전쟁 등 혼란한 시대에 따른 현실인식의 표출을 보여준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문학성향이 시에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구체적인 작품을 들어 살펴 볼 것이다.

 

  Ⅲ. 詩世界 : 체소는 당대에 글 잘하기로 이름난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그 자신도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또한 글을 보는 안목이 높아 그에게 許與를 받는 사람이 드물었다. 당시에 그와 깊은 교유를 나누었던 象村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시를 지음에 순탄하고 넉넉했으며[平鋪富贍] 蘇長公[蘇軾]을 끔찍이도 좋아하여 성취된 바가 걸출하였는데, 詩보다는 文이 우수하였다. 근래 문필에 종사하는 사람 치고 그의 작품을 보고 눈을 휘둥그래 뜨고 멀찌감치 물러나지 않는 이가 없는데, 남긴 문집은 겨우 3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爲詩平鋪富贍, 酷好蘇長公所就傑然, 文優於詩. 近來操?者, 莫不?然退舍, 遺文僅三卷藏于家.” (申欽, <象村集> 卷52 ‘晴窓軟談’, <韓國文集叢刊> 72冊 348쪽.) 그는 詩를 지음에 순탄하고 넉넉했으며[平鋪富贍] 성취된 바가 걸출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좌씨>·<사마천>·<장자>·<열자> 등을 여러 번 꼼꼼히 되풀이해서 읽었고, 韓愈·蘇軾에 이르기까지 두루 읽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읽으면 꼭 완전히 섭렵한 이후에야 그쳤다. “…咀嚼左馬莊列下逮韓蘇馳騁數千載, 必極其所如往而後已.…” (申欽, <體素集> ‘體素集序’, <韓國文集叢刊> 66冊 345쪽.)  그가 책 읽는 것을 너무 좋아하여 石洲는 그를 “書淫” “…君不見體素李翰林, 半世黃券爲書淫.…” (權?, <石洲集> 卷2 ‘君不見對酒走筆’, <韓國文集叢刊> 75冊 25쪽.)이라 불렀다. 상촌은 또 體素가 시보다 文이 우수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허균은 그의 詩가 杜甫·韓愈·蘇軾을 본받아서 浩瀚하고 뛰어나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고 “…詩法杜韓蘇三家, 浩瀚琸?, 以自成一家.…” (許筠, <惺所覆?稿> 卷15 ‘李實之? 幷引’, <韓國文集叢刊> 74冊 263쪽.), 또 李白과 견주어 높이 평가하였다. “多病顔光祿, 高歌李謫仙.…”(許筠, <惺所覆?稿> 卷2 ‘贈李實之 春英’, <韓國文集叢刊> 74冊 137쪽.)  <體素集>을 살펴보아도 詩가 文보다 數的으로도 월등히 많음을 알 수 있는데, 上·中·下 3卷에 5언 절구 4題 10首, 7언 절구 95題 243首, 5언 율시 76題 101首, 7언 율시 207題 372首, 5언 배율 7題 7首, 7언 배율 4題 4首, 5언 고시 28題 49首, 7언 고시 38題 40首, 賦 4편, 詞 1편 辭 2편, 記 9편, 字說 1편, 事實 1편, 書 6편 跋 1편, 序 9편, 神道碑銘 1편, 祭文 1편, 訟 1편, 文 2편, 祈雨文 1편, 挽 1편, 敎書 1편이 실려 있어 운문이 산문보다 수적으로도 월등히 많다. 이는 그가 文보다는 詩를 짓는 것에 더 치중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체소 자신도 시를 짓는데 자부하여, 당시의 공론이 그의 시가 석주의 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시는 多讀에 기인하여 온축 된 것이 많으므로 날로 발전하여 석주보다 나아질 것이라 자신하였다. “…詩如權汝章不易得, 但汝章坐不讀書, 日退, 吾多積薄發, 日進. …” (鄭弘溟, <體素集> ‘體素集跋’, <韓國文集叢刊> 66冊 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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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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