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게시판
이곳에 올려진 내용은 예천군청과는 무관하오니 이점 양지하시고, 본 게시판을 이용해 게시자가 허위 과장광고나 사기성 게시물을 올릴 수도 있으니 사용자께서는 각별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 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예천고을원(79-5) : 이춘영(1600-1601.10.17) : '채소재집' 3권을 저술한 고을 원
---
홍만종은 석주의 시를 평하면서 체소 시와 더불어 응당 우리 동방에서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하였다. “…最是石洲詩不朽, 應同體素擅吾東.…”(洪萬宗, <詩評補遺> <韓國歷代詩話類編>, 아세아문화사, 1988, 514쪽.) 이를 보면 상촌의 평가와는 달리 대부분의 문인들은 체소의 시를 높이 평가한 것을 알 수 있고, 자신도 시로 자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여러 비평가들로부터 뛰어난 시인으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체소의 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 없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생의 순서에 따라 詩世界를 ‘豪放한 氣像과 現實對應’, ‘不遇의 懷恨과 方外人的 性向’, ‘遊仙詩에 投影된 現實認識-<讀神仙傳> 53首를 中心으로’, ‘現實에 대한 諦念과 갈등의 克服’의 4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생의 전반부에서는 호방한 기상과 그에 따른 현실대응의 자세를 살펴보고, 중반부에서는 거듭되는 불행으로 인한 회한과 그러한 불행, 특히 정치적인 불행으로 인하여 가지게 된 방외인적 성향을 띠는 시들을 아울러 살펴볼 것이다. 특히 유선시는 이러한 현실에서 겪는 갈등을 해소하고자 지어진 것이므로, 그가 현실에서 겪은 좌절이 얼마나 깊으며, 그러한 좌절을 어떻게 표출하고 있는지 살펴 볼 것이다. 생의 후반부에 이르면 지금까지 가치롭게 여겼던 것들과 인생에 대해 그가 어떠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豪放한 氣像과 現實對應 : 체소는 강하고 솔직하고 작은 예법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체소집>의 발문을 썼던 淸陰 金尙憲은 그가 豪元하고 自負하여 세상에 그를 당할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또 벗들과 마주앉게 되면 술을 들고 수염을 떨치며 팔을 휘두르면서 담론을 펴는 것이 傍若無人하였다고한다. “…太史豪元自負, 世無可當意者. 方其對朋友把酒拂鬚, 抵掌談禾丸傍若無人.…”(金尙憲, <體素集> ‘體素集跋’, <韓國文集叢刊> 66冊 347쪽.) 상촌은 그가 성격이 침착하지 못하고 자유분방하고, 사람의 잘못을 말할 때 면전에서 질책하여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하여도 용서가 없었다고 하였다. 역대의 비평가들은 그의 성격이 ‘簡亢’하고 ‘自重傲人’하고, ‘?豪’ 하다고 평하고 있다. 南龍翼은 <壺谷詩話>에서 ‘簡亢’하다고 평하고 있고, 洪萬宗은 <小華詩評>에서 ‘自重傲人’하다고 평하고 있으며, 梁慶遇는 <霽湖詩話>에서 ‘?豪’하다고 평하고 있다. 한번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月沙 李廷龜가 중국에 다녀와서 지은 여러 글들을 듣고 있었다. 그때 그는 비스듬히 누워서 들으면서 들을 만 하다고 허여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봄은 대궐 밖의 나무에서 생겨나고, 해는 말 앞의 산으로 떨어지는 구나.[春生闕外樹, 日落馬前山]”라는 구절에 이르자, 비로소 일어나 앉으며 “聖徵과 가히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겠다. 모름지기 이것에 힘쓰도록 하게.”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는 그의 이러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남용익과 홍만종은 각각 <호곡시화>와 <소화시평>에 소개하고 있다. “體素性傲, 嘗於衆坐臥聽月沙燕行諸作, 一無許可. 至‘春生闕外樹, 日落馬前山.’之句, 始起坐曰 ?聖徵可與言詩, 須勉?.? 其簡亢如此.” (南龍翼, <壺谷詩話> <韓國歷代詩話類編>, 아세아문화사, 1988, 153쪽.) “李體素眼高, 少許可人. 嘗與月沙隔墻而居, 一日體素過月沙門外, 立馬, 呼聖徵, 月沙出應之. 體素遙謂曰 ‘吾今日 聞汝有 ‘春生闕外樹, 日落馬前山.’之句, 頗有步驟, 似可學詩, 汝其勉之.’ 遂着 鞭而去. 其自重傲人如此.” (洪萬宗, <小華詩評> <韓國歷代詩話類編>, 아세아문화사, 1988, 153쪽.) 또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人才의 장단을 논할 때면 매번 팔뚝을 걷어부치고, 수염을 진동시키면서 큰소리로 꾸짖으니, 비록 文人·才子가 그 옆에 가까이 있어도 감히 그와 더불어 맞서 겨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每於衆會中, 論人才長短, 奮臂獵髥, 高聲大叱, 雖文人才子, 側其旁, 皆不敢與之?頑.…” (梁慶遇, <霽湖集> 卷9 ‘霽湖詩話’, <韓國文集叢刊> 73冊 501쪽.) 이러한 성격은 시에도 그대로 드러나, 홍만종은 그가 문장을 지음에 浩汗??하다고 하고, 양경우는 滔滔不竭하다고 평하고 있다. 두 사람 다 체소의 이러한 기상이 잘 살아나는 작품으로 ‘永保亭’을 들고 있는데, 양경우는 “달이 오늘밤을 좇아 십분 가득차니, 晩潮 받아들인 호수 千頃이로다.[月從今夜十分滿 湖納晩潮千頃寬]” 의 구절이 원만하고, 의미가 넉넉하다 라고 하였고, “…體素登永保亭 有詩曰 ‘月從今夜十分滿 湖納晩潮千頃寬’ 句圓意足.…”(梁慶遇, <霽湖詩話> <韓國歷代詩話類編>, 아세아문화사, 1988, 282쪽.) 홍만종은 이 시 다섯 수 중 세 번째 수를 들어 종횡으로 끝간 데까지 다 가서, 읍취헌 박은을 따라갈 듯 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李體素春英爲文章, 浩汗??, 自成一家言. 嘗作永保亭詩四篇, 今錄其一曰 ?雉堞?紆水樹間, 金鰲頂上壓朱欄. 月終今夜十分滿, 湖納脫潮千頃寬. 酒氣全勝水氣冷, 角聲半雜江聲寒. 共君相對不須睡, 待到曉霧淸漫漫.? 極其縱橫, 步驟?翠.”(홍만종, <소화시평> <한국역대시화류편>, 아세아문화사, 1988, 153쪽.)
그 세 번째 수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성곽은 나무와 물에 에둘려 있고, 雉堞?紆水樹間/ 금빛 자라 머리 위에 붉은 난간 누르고 있네. 金鰲頂上壓朱欄/ 달은 오늘밤을 좇아 십분 가득차고, 月終今夜十分滿/ 호수는 만조를 받아들여 천 이랑이나 넓네. 湖納脫潮千頃寬/ 술기운은 냉랭한 물기운을 이기고, 酒氣全勝水氣冷/ 나팔 소리는 차가운 강물 소리와 뒤섞였네. 角聲半雜江聲寒/ 그대와 함께 마주하여 모름지기 잠들지 않고, 共君相對不須睡/ 새벽안개가 아득히 개는 것을 기다리리. 待到曉霧淸漫漫/ 李春英, <體素集> 中 7言律詩 ‘湖西水營?翠軒之詩, 膾炙人口盖百二年而余過之, 海山佳處 依然如舊而과才拙不足而鋪張之何, 强題近體五首, 續貌之作, 能無愧乎’, <韓國文集叢刊> 66冊, 400쪽. 永保亭은 충청도 보령군에 있는 정자로 수군절도사의 병영 안에 있다. 정자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워 騷人·墨客들이 많이 찾던 곳으로 일찍이 해동 江西詩派로 알려진 朴誾이 ‘永保亭’ 4수를 지어 그 승경을 기렸던 곳이다. <體素集>에는 시제가 ‘湖西水營?翠軒之詩, 膾炙人口盖百二年而余過之, 海山佳處 依然如舊而과才拙不足而鋪張之何, 强題近體五首, 續貌之作, 能無愧乎’로 되어있는데, 총 다섯 수를 지었다. 허균은 體素의 시는 朴誾의 것을 모의한 것으로 韻調가 박은에 비하여 한 단계 낮으나 호탕하고 放肆한 풍격이 있다고 평하였다. 특히 5?6구는 수사기교가 극치를 이루고 있으며, 聲色과 遠近의 대비를 통하여 실경을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시인의 오탕한 기개가 잘 드러나 있다는 평을 받는다. 閔丙秀, <韓國漢詩史>, 태학사, 1996, 324~325쪽. 또한 그는 자신의 재주에 대해서도 무척 자부한 사람이었다. 당시의 공론은 체소의 시가 석주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는데, 체소 자신도 그 부분에 대해서 일단은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석주는 책을 많이 읽지 않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퇴보하여 偏枯해질 것이나, 자신은 여러 종류의 책을 넓게 읽기 때문에 앞으로는 進步할 것이라 자신있게 말하였다. 각주 59)번 참고. 그가 月沙의 시를 쉽게 허여하지 않은 것이나, 문인들의 시를 그토록 당당하게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러한 성격 때문에 많은 좌절을 겪기도 하였으나, 반대로 현실에서 겪는 좌절을 이겨내는 데에도 큰 몫을 하였다. 유배를 가고, 탄핵을 당하고, 존경하는 스승이 몰락하는 현실에서도 언제나 꿋꿋하고 강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호방불기한 기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외적 환경에 적응하며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려는 정신세계를 나타난다. 즉 현실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태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주어진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安貧樂道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자세와, 安分과 守分을 지향하며 현실에 적응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래의 시들은 이러한 그의 삶의 태도와 처세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號 ‘體素’는 <詩品>의 ‘洗煉’시 “… 體素儲潔…”(司空圖 著 <杜黎均 輯注, ?二十四詩品譯註評釋>, 北京出版社, 1988, 94쪽.)에 나타난다. 杜黎均은 이 단어를 <莊子> ‘刻意’ 편의 “素라는 것은 잡된 것이 없다는 것이고, 純이라는 것은 그 정신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몸을 능히 純素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眞人이라고 한다[素也者, 謂其无所與雜也. 純也者, 謂其不虧其神也. 能體純素,謂之眞人].”라는 구절의 의미와 상통한다고 하였다. 司空圖 著 <杜黎均 輯注, ?二十四詩品譯註評釋>, 北京出版社, 1988, 94쪽. 또, ‘세련’ 시의 핵심이 바로 “體素儲潔” 句에 있다고 하면서, 순수함으로써 몸을 온전히 깨끗하게 하고자 했던 작자의 태도가 시의 전편에 흐른다고 하였다. 司空圖 著?杜黎均 輯注, <二十四詩品譯註評釋>, 北京出版社, 1988, 96쪽. 또, 郭紹虞는 <周易> ‘文言’의 “군자는 體仁으로써 족히 사람을 기를 수 있다[君子體仁足以長人].”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하면서, 素로써 體를 삼아야 함을 이른 것이라 하였다. 몸이 素로서 그 깨끗함을 쌓는 것이기 때문에 깨끗하고도 깨끗하여 털끝만큼도 더러움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司空圖 著 <郭紹虞 集解, ?詩品集解>, 人民文學出版社, 1998, 15쪽. 즉 그의 호에는 삶에 대한 태도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철학이 내재되어있다. 더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깨끗하고 고고하게 살고자 한 그의 정신세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라 하겠다. 또 <中庸> ‘第14章’의 구절 “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素富貴行乎富貴. 素貧賤行乎貧賤. 素夷狄行乎夷狄. 素患難行乎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 在上位不陵下, 在下位不援上, 正己而不求於人, 則無怨. 上不怨天, 下不尤人, 故君子居易以俟命, 小人行險以?幸.” <中庸> ‘第14章’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군자는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그 처한 상황을 불평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문제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反求諸己 하여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현재에 처한 위치에서 마땅히 구해야 할 것과 해야 할 일만 해야지 그 외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豪放不羈한 기상을 절제하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다음은 그의 이런 마음이 드러난 시이다.
舅氏를 가두어 놓은 것과 똑같은데, 酷似牢之舅/ 재주가 없는 것은 魏郞에 부끄럽네. 非才愧魏郞/ 일찍이 살고 죽는 것을 함께 하겠다고 했는데, 早將齊得喪/ 세상에 나가고 물러나는 것을 함께 하는 것도 즐겁네. 還喜共行藏/ 곧은 도로 임금 섬기는 것 어찌 요즘 시대의 모습이리, 直道寧時態/ 안빈낙도 또한 선비가 항상 지켜야 할 것이라네. 安貧亦士常/ 오로지 평소의 위치에 따라 행하면 되고, 惟應行素位/ 湘水에 빠져 죽은 이 湘水에 빠져 죽은 이 : 湘水는 屈原이 빠져 죽은 곳이므로 곧 굴원을 말하는 것이다./ 사모할 필요 없네. 不必慕沈湘/ 李春英, <體素集>, 上 5言律詩 ‘因北使寄上舅氏’, <韓國文集叢刊> 66冊 352쪽. 시가 지어진 시기는 三水에 귀양가 있을 때인 것 같다. 建儲問題로 같이 연루되어 慶興으로 유배를 간 외숙부 白惟咸(1546~1618)에게 보내는 시이다. 사방이 첩첩 산중으로 둘러싸인 삼수에 귀양을 와 있는 자신의 처지를 보니 외숙부 또한 이러한 처지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마치 외숙을 가두어 놓은 듯하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처한 상황이 궁벽한 곳에 유배를 와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오히려 기쁘다고 말하고 있다. 편안할 때나 빈곤할 때나 ‘恒心’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선비뿐이라고 하였으니, 비록 몸이 궁하고 어려움이 처해 있어도 安貧樂道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의 뜻은 군자는 처한 위치에 따라 행하면 된다고 말하는 7句와 더불어, 혼탁한 세상과 어울려 살 수 없어 홀로 고고히 湘水에 뛰어 들었던 굴원에게, “滄浪의 물이 맑으면 갓 끈을 씻으면 되고, 滄浪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면 된다”라던 漁父의 꼬집음과도 일맥상통하는 듯 하다. 이는 ‘상수에 빠져 죽은 굴원을 사모할 필요 없다’는 다음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를 지을 때의 상황이 유배를 와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슬픔이나 울분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선비로서 安貧하고 自足하여,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살며 분수를 지키고자 하는 삶의 자세가 더 강하게 드러나 있다.
다음의 시에는 이러한 삶의 자세와 아울러 암담한 현실에서도 희망을 찾아 위안으로 삼고자하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가 엿보인다./ 이 세상 내 평생의 벗, 海內平生友/ 행하고 은거함이 또 거의 비슷하다. 行藏又略同/ 세상인심은 향배를 알 수 없어, 世情迷向背/ 갈림길에서 동과 서로 나뉘었구나. 岐路作西東/ 천번 만번 애태울 필요 없다네! 不必腸千轉/ 때때로 술을 한번씩 마실 뿐. 時將酒一中/ 남아의 생애는 죽은 후에 정해지니, 男兒盖棺定/ 우리 도가 어찌 끝내 없어지리요. 吾道豈終窮/ 李春英, <體素集> 上 5言律詩 ‘黃思叔以詩見寄次韻’ 其一, <韓國文集叢刊> 66冊 352쪽. 牛溪의 문인인 黃愼(1560~1617)이 보낸 시에 次韻하여 지은 시다. 이 시 역시 체소가 삼수에 귀양가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첫 구절의 ‘이 세상 내 평생의 벗’이라 부르는 다정한 어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벗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다. 황신과는 같은 스승 아래에서 동문수학한 知己로, 그 역시 당쟁에 의해 희생된 인물이다. 비록 파직 당하고 귀양와 있는 슬프고 힘든 현실이지만, 이러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술 한 잔 마시고 툴툴 털어 버리는 대장부다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利益과 權力에 따라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하는 각박한 세상인심에 상처받고 고통당하지만, 자신들이 가치롭다고 여겨 끝내 지키고자 하는 道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이러한 현실에 대한 위안을 삼고 있다. 체소가 유배를 와서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부끄러운 유배가 아니라, 당쟁에 휘말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남아로서 존경하는 스승과 뜻을 같이 하는 벗과 함께 하며 이들에 대한 절의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관[道]을 지켰으니, 비록 육체는 사라지더라도 고고한 도는 끝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일에 대하여 전전긍긍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풍속을 물어보니 곳마다 다르나, 問俗他方異/ 어진 이 그리는 것은 예나 같다네. 懷賢往事同/ 고향은 蠶嶺 북쪽에 있으니, 家鄕蠶嶺北/ 지경이 압록강 동쪽을 벗어났다네. 區脫鴨江東/ 어쩌다가 터럭과 먼지 날리는 세상 속에 떨어져, 偶落毫塵裏/ 애오라지 ?가 활을 겨냥하는 앞에서 어른거리네. 聊遊??中/ 한평생의 분수는 정해진 것을 아니, 百年知分定/ 춥고 더운 것을 운수에 맡기네. 寒暑任通窮/ 李春英, <體素集> 上, 5言律詩, ‘黃思叔以詩見寄次韻’ 其二, <韓國文集叢刊> 66冊 352쪽. 풍속이 다르다 한 것과 고향이 잠령 북쪽에 있다 한 것으로 보아 체소가 고향과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삼수는 함경도의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궁벽하고 외진 유배지에서 슬픔과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련만, 체소는 오히려 이러한 불리한 상황을 역이용하여 마음 다스리는 공부를 하고 있는 듯하다. ?가 겨냥한 활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도 그 활에 맞지 않기는 어려운 것이니, 자신이 불행한 처지도 그러한 위험 가운데서 생겨난 당연한 귀결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즉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미 정해져 있는 분수대로 顯達하든 窮僻하든 운수에 맡긴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체소는 호방하고 강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닥친 현실에 대해서는 이러한 성격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지혜롭게 대응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모순 투성이의 사회에 대해 다소 냉소적이지만, 그러한 가운데 자신의 분수를 지키고자한 현실 대응 자세가 엿보인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분수에 만족하고[安分], 분수를 지키며[守分] 살고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생의 전반부에 나타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 不遇의 懷恨과 方外人的 性向 : 어떤 한 사람의 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그의 인생행로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체소는 짧은 생을 살면서 여러 번의 불행을 겪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고, 자기를 잘 알아주던 첫 부인을 먼저 떠나보내었다. 존경하는 스승인 정철의 몰락도 지켜보았고, 자신도 그와 더불어 두 번의 귀양살이를 하였다. 조정에 몸담은 10여년의 세월동안 한결같이 반대파의 탄핵을 받으며 가슴에 품었던 포부를 한번도 펼쳐 보지 못하였다. 관직생활도 순탄하지 못하여 늘 外職으로 나갔고, 유배 생활 등 타관에서 생활하는 날이 많았다. 혈기가 왕성하던 젊은 시절에는 유배지로 향하는 길에서도 슬픔이나 울분보다 포부를 펼치지 못하는 현실에 더 안타까워하고, 그래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관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러한 기회가 주어질 것이니 술 한잔 마시면서 때를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회와 현실은 변함이 없고, 어느새 살쩍엔 서리가 더해 있었다. 체소의 문집을 보면 이러한 현실에 대한 슬픔이 다수를 차지하여 전체적인 시의 분위기가 자못 무겁다. 특히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그는 늘 외직으로 떠돌며 울타리 밖에서 지내야 했다. 이러한 현실은 그의 문학에도 반영되어 이시기 지어진 대부분의 시들은 金時習·鄭?·李達·林悌·權?·許筠 등의 시처럼 방외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특히 위의 언급한 문인들 중에서 김시습을 제외한 나머지 문인들은 체소와 종적·횡적으로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고, 이들의 인생행로 또한 비슷한 경로를 따라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보아, 체소의 방외인적 성향은 당연한 귀결인지 모르겠다.
1) 不遇의 懷恨 : 체소는 44해의 짧은 생을 살면서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고,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를 잃는 가정적인 불행과, 당쟁의 여파로 겪은 2번의 귀양살이, 7년간에 걸친 왜구의 침략, 자기가 몸담은 서인의 몰락 등 개인적·사회적인 불행을 고루 겪는다. 이러한 불행들은 대부분 한창 예민한 시기였던 10대 후반에서 30대에 겪은 것들이라, 이후 그의 문학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그의 불행했던 인생이 문학에 어떻게 형상화되어 있는지 가정적인 불행과 사회적인 불행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외가에 맡겨져 자란 體素는 외조부 휴암의 상을 당했던 1579년 17세를 전후로 하여 金?의 딸과 결혼을 했던 것 같다. 비록 외조부와 외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할지라도 친혈육이라고는 여동생 하나밖에 없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체소는 부모와 가족의 사랑에 목말랐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첫 부인 김씨는 온전히 사랑을 줄 수 있는 상대였고, 이와 비례하여 그녀의 죽음은 그에게 많은 상실감과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김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체소에게 있어 그녀는 젊은 날 첫 정을 쏟은 반려자이자, 자신을 잘 알아주던 벗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기는 하였으나, 다섯 살 이전의 어린 나이여서 죽음에 대한 슬픔이나 사랑하는 이를 잃는 아픔을 진심으로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인의 죽음은 그에게 생애 최초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는 일이었으므로, 그 충격과 슬픔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의 시에는 그의 이러한 마음과 망자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다./ 창자가 끊어지고 또 끊어져, 腸斷復腸斷/ 잊고자 하는데 아직도 잊히지 않네. 欲忘還未忘/ 이제 같은 자리에서 나뉘어져야 함 알겠으니, 懸知同此路/ 이 몸에 길이 恨 뿐이라네. 身在恨俱長/ 李春英, <體素集> 上 5言絶句 ‘悼意’ 其一, <韓國文集叢刊> 66冊 350쪽./ 향기는 아직도 옷에 남아 있는데, ?澤猶在衣/ 향기로운 마음 이제는 진흙이 되었구나. 蕙心今化泥/ 베갯머리에서 들었던 듯한 말은, 如聞枕上語/ 꿈결에 들은 울음소리였던가. 錯作夢中啼/ 李春英, <體素集> 上 5言絶句 ‘悼意’ 其二, <韓國文集叢刊> 66冊 350쪽./ 총 7首 중에서 첫째 수와 두 번째 수이다. 亡者를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심정을 나타내었다. 첫째 수의 1구와 2구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진 현실을 가슴 아파 하면서 애써 잊어보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마음이 나타나있다. ‘斷腸’, ‘未忘’등의 단어를 통하여 작자의 짙은 슬픔을 확인할 수 있다. 3구와 4구로 넘어가면 저승과 이승의 갈림길에 놓여져 서로 다른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체념하며 한스러워 하고 있다. 두 번째 수에서는 망자가 남겨놓은 유품을 차마 없애지 못하였는지, 생활주변 곳곳에서 부인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리움에 잠못 이루는 작자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3구에서는 비몽사몽간에 어렵게 잠이든 그가 다시 놀라 일어났던 일을 묘사하였다. 잠결에 어렴풋이 아내의 목소리를 들은 듯해서 잠을 깨었지만, 그것은 꿈속에도 잊지 못하여 눈물 흘리던 자신의 울음 소리였다. 체소가 부인을 얼마나 그리워하였으며, 영원한 이별에 얼마나 마음 아파하고 있는지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그는 왜 이토록 부인을 잊지 못하였던 것일까? 다음의 시를 통하여 그 이유와 부인이 체소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빼어난 얼굴이야 어디든 응당 있겠지만, 秀色猶應有/ 향기로운 마음은 만나기 쉽지 않네. 芳心豈易逢/ 평생 거문고줄 끊은 아픔 平生絶弦痛/ 어찌 종자기 혼자 뿐이겠는가 不獨丈夫鍾/ 李春英, <體素集> 上 5言絶句 /悼意/ 其六, <韓國文集叢刊> 66冊 350쪽. 김씨의 조부는 조광조와 깊은 관계를 맺고, 그와 함께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개혁을 단행했던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道學’으로 정신을 무장하여 ‘修己治人’의 정신을 강조하였던 것이 사림파의 특징이고, 특히 ?小學?을 통한 사회질서의 재확립을 강조하였음을 주지 할 때, 김씨 역시 이러한 조부와 家學의 영향을 일부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즉 김씨는 체소에게 있어 반려자만이 아니라 그의 뜻과 사상을 이해하고 믿어주는 든든한 조력자이자, 知音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3구와 4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체소는 ‘蕙心’과 ‘芳心’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면서 살아생전 부인의 인격이 어떠하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에게 있어 부인의 죽음은 평생을 통하여 만나기 어려운 ‘향기로운 마음[芳心]’을 가진 ‘知音’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슬픔과 안타까움이 더했을 것이다. 이러한 슬픔으로 인해 부인에 대한 그리움이 가중되면서, 일상에서 보이는 경물을 통하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부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짙은 구름을 보니 검은머리 같고, 濃雲疑綠?/ 새벽달을 보니 어여쁜 눈썹 생각나네. 澹月想修眉/ 고운 모습 찾을 길이 없는데, 物色還無賴/ 아침저녁으로 그리움만 쌓이네. 晨昏惱所思/ 李春英, <體素集> 上 5言絶句 ‘悼意’ 其七, <韓國文集叢刊> 66冊 350쪽. ‘짙은 구름’과 ‘새벽달’을 통하여 그리움의 시간이 낮부터 새벽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의한 사물의 변화에 따라 그리운 대상의 구체적 모습도 변화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거나, 쉽게 만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은 늘 작자의 시선이 먼 허공을 향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짙은 구름-(풍성한)검은머리’, ‘새벽 (초생)달-어여쁜 눈썹’의 연상작용으로, 가까운 데서 찾을 수 없는 사랑하는 이의 모습은 무심히 바라본 경물에 오버랩 되어 나타나 작자의 그리움을 부추기고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리 찾아도 오지 않는 님을 아침저녁으로 기다리는 작자의 애타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사회생활에서 겪은 좌절에 대한 회한을 읊은 시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590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이듬해 바로 예문관 검열에 제수 되어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던 체소는 다른 사람에 비하여 이른 나이에 정계에 진출하였을 뿐 아니라 비교적 출발이 순탄한 편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사림파 내부의 분열로 인하여 이미 동·서 양당으로 분리되어 두 정파간의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은 鄭汝立 모반사건을 계기로 한 기축옥사로 이어졌고, 정여립과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들이 대거 숙청당하여 동인은 세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때 위관을 맡은 사람이 松江이었는데, 이 일로 인하여 동인은 송강을 원수 보듯이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李山海의 음모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 동인들은 이것을 재기의 기회로 삼으려 하였고, 송강과 친분이 두터웠던 서인계 인물들도 아울러 죄를 입고 유배 보내져서, 이일을 계기로 사실상 서인은 몰락하게 된다. 체소도 이때 白惟咸·柳恭辰·車天路 등과 함께 귀양길에 올랐다. 체소는 처음에 평안도에 유배되었는데, 선조가 北道로 配所를 옮길 것을 명하여 富寧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三水로 移配되었다. 다음 시는 그가 삼수로 귀양가는 길에 지은 것으로 그때의 심정이 나타나 있다.
저녁에 銀溪驛에 머물고, 暮宿銀溪驛/ 아침에 鐵嶺關에 올랐네. 朝登鐵嶺關/ 부모님 생각에 귀밑털 희어지고, 思親雙?白/ 임금님 그리움에 寸心이 붉다. 戀闕寸心丹/ 나그네길 三水로 이어졌고, 客路連三水/ 고향은 만겹 산에 막히었네. 家鄕隔萬山/ 충효의 뜻 다 하지 못하였는데, 未應忠孝志/ 무성한 풀만이 길을 덮었네. 蕪沒半道間/ 李春英, <體素集> 上, 5言律詩 ‘鐵嶺’, <韓國文集叢刊> 66冊 351쪽. 원제는 ‘謫行’으로 ‘箕雅’와 <大東詩選>에도 선입되어 있는데, <體素集>에는 題名이 ‘鐵嶺’으로 되어 있다. 은계역은 철령으로 가는 도중의 역참으로 강원도에 속해있다. 五言이기 때문에 기운이 더욱 힘차게 살아나는 듯한 작품이다. 全篇에서 느껴지는 달리는 듯한 기상 때문에 이 작품은 더욱 돋보인다. 李丙秀, <韓國漢詩史> 태학사. 1996. 324쪽. 어제 저녁은 은계역에서 자고 아침에 철령관을 오른다 했으니 갈 길이 무척 바쁜 것을 말한다. 달리 바쁜 것이 아니라 귀양을 가느라 바쁘다. 부모와 임금에 대한 효심과 단심을 간직한 채 가기 싫은 길을 재촉하여 가자니 작자의 귀양길이 더욱 서럽다. 가슴에 품었던 뜻은 아직 다 이루지도 못했는데 몸은 죄인이 되어 귀양길로 끌려가고, 귀양지로 향하는 길도 순탄치 못하여 길가엔 덤불이 무성하다. 길가에 무성하게 자란 심상한 풀이지만, 울적하고 답답한 작자의 마음에는 마치 작자의 갈 길을 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같이 읊은 것이다. 이 시에서는 작자가 귀양을 가면서 고향과 점점 멀어지는 슬픔과 포부를 펼치지 못하는 울적한 마음을 노래했다. ‘철령’이란 시제목이나 귀양지 三水에 드러나 있듯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할 수 없기에 멀어만 가는 고향에 대한 생각이 짙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유배 가는 참담한 심정보다는 충효의 포부를 펴지 못하는 현실에 더 상심하고 있다. 첫 번째 귀양살이에서는 귀양을 떠나는 슬픔보다 충효의 포부를 펼치지 못하는데 대한 아쉬움이 더 강하게 표현되었다면, 두 번째 귀양에서는 귀양살이를 와 있는 현실자체에 큰 좌절을 느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음 시를 보자.
전쟁은 이제 거의 그칠 만한데도, 兵革?可止/ 5년이 되도록 아직도 그치지 않네. 五年猶未休/ 타향에서는 발붙이기 어려운데, 殊方難着足/ 고향을 몇 번이나 돌아보았던가? 故國幾回頭/ 해가 저물어 벌레는 겨울옷 짜기를 재촉하고, 歲暮?催織/ 긴 하늘 기러기는 근심을 몰고 오네. 天長?引愁/ 桃源은 어디에 있나? 桃源何處是/ 돌아가는 꿈 林丘에 떨어지네. 歸夢落林丘/ 바쁜 일상 속에 늙기 다하였으니, 盡於忙裏老/ 누가 죽음 전에 휴식을 취하겠는가? 誰向死前休/ 세월의 맛은 닭의 갈비와 같고, 歲味?徒肋/ 이름 날리는 곳에서는 자라 머리 움츠리듯 하네. 名場鼈縮斗/ 곰곰히 지난날 생각해 보니, 悠悠懷往事/ 분명히 한가한 근심만 품고 있었네. 歷歷抱閑愁/ 예나 지금이나 끝내 무엇을 얻겠는가? 今古終何得/ 진실로 한 언덕에 사는 담비와 같도다. 眞同?一丘/ 李春英, <體素集> 上 5言律詩 ‘次端川韻 二首’, <韓國文集叢刊> 66冊 353쪽. 그는 벼슬살이를 하는 5년 동안 여러 번의 탄핵을 당하였고, 반대파의 비방은 끊이지 않았으며, 두 번이나 유배를 당하기도 하고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을 겪었다. 전쟁 중에는 존경하는 스승인 松江의 죽음도 맞이하였다. 비록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겪은 일들이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는 많은 것을 잃고, 상처받게 하였던 큰 사건들이었다. 1595년 함경도 定平으로 귀양을 간 그는 1597년까지 정평에 있었다. 외진 귀양지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한 걱정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계에 몸담은 5년 동안 두 번의 귀양살이를 하고 거듭 탄핵을 당하면서 인생 자체에 깊은 허무를 느끼게 되었다. 인생은 닭갈비처럼 아무 가치가 없고,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되면 시기하는 자들의 시샘을 받게 되니,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눈치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펼치고자 하는 포부를 가슴에 가득 품고 있었으나, 그것 또한 한가한 근심에 불과했었다고 자조하며, 마지막 구절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사는 형편이 변함이 없다는 탄식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인생에 대한 허무와 갈등은 ‘桃源’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신선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표출되고 있다. 즉 ‘桃源’은 현실의 갈등을 극복하고 작자가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도달점이자 이상향이다. 문집을 보면 정평에서의 귀양살이 이후 유독 신선에 관한 시가 많이 나타난다. “유선시의 커다란 두 가지 주제가 세상과 만나지 못한 근심의 詠懷와 선계에 노니는 즐거움” 鄭珉, <韓國道敎思想의 理解>, ‘16,7세기 遊仙詩의 자료개관과 출현동인’,아세아문화사, 101쪽 참조. 임을 볼 때, 이는 체소가 그만큼 현실에서 큰 좌절을 겪고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다음의 시에는 그의 이러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