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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80-2:황여일(1601.10.22임명,동년12부임-1603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2.11.10 06:31:21

   예천고을원(80-2) : 황여일(1601.10.22임명, 동년12부임-1603이임) : '조천록'을 저술한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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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여일 [記事] : 선조실록 55권/ 선조 27년( 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9월 14일 기축 6번째 기사/ 비변사가 정예병 확보, 경주와 의령간의 군사 공백 문제, 군량미 등에 대하여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ꡒ도원수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지금 내려가려 합니다. 무릇 조정에서 분부한 일이 전후로 한두 가지가 아닌데 아직 거행했는지 여부를 모르겠으니 원수(元帥)로 하여금 급속히 고찰하여 시행했는지 안했는지를 개록(開錄)하여 계문하게 하소서. 또 각 고을에서 군사를 뽑는 일이 두서(頭緖)가 없어서, 건장한 군사는 혹 사고를 핑계하여 방수(防戍)를 면제받는 경우가 많으며 지치고 잔약하여 쓸모없는 병사만 날마다 징발하므로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여 흩어지는 자가 잇달읍니다. 공문을 보내 최촉(催促)하므로 일족(一族)과 인보(隣保)가 함께 그 해독을 입어 민간이 소요스럽건만 군중(軍中)에는 수백 명의 정예병도 없으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전에 각 고을로 하여금 정예병을 가려 뽑아 전쟁터에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양식을 마련하여 군량을 충당하게 하라는 뜻으로 행회(行會)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어떻게 거행되는지 모르겠으니 이 일을 다시 신칙하소서. 또 경주(慶州)와 의령(宜寧)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형세상 서로 연접할 수 없는 데다 중간 수백 리는 씻은 듯이 공허합니다. 적이 만약 적은 군사로 경주와 의령에게 출몰하여 아군(我軍)을 견재하고 다른 군사로써 공허한 지역으로 나와 곧장 내지(內地)로 공격해온다면 금하여 막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말하자니 한심스럽습니다. 들으니 정희현(鄭希賢)이 혼자 밀양에 있다는데 희현은 의지할 만한 장수가 못 되고 거느리고 있는 군사 또한 극히 적으니 어떻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들으니 희현은 밀양(密陽) 등지의 군사 2백여 명을 모집하였었는데 중간에 양식이 모자라 흩어졌다가 지금 또 양식 수십 석(石)을 얻었으므로 흩어진 군졸이 다시 모인다고 합니다. 참으로 양식을 얻을 수 있다면 군사가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대저 경상도는 인민들이 흩어져 3년 동안 다시 수습할 길이 없어 짐승과 새처럼 놀라고 흩어져 굶어죽은 자를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왕왕 적중에 들어가 의지해 살고 있는데도 장관(將官)이나 수령들은 초개같이 여겨 가거나 오거나 내버려둡니다. 이는 참으로 적을 위해 백성을 몰아다 주는 것이니 어떻게 이미 떠나버린 인심을 돌려서 수복하는 계책을 도모하겠습니까. 지금의 장수된 자들은 팔짱만 끼고 무사(無事)한 지역에서 그럭저럭 지내다가, 조정에서 그들을 시켜 싸우고 지키게 하면 반드시 ꡐ군사가 없는데 장차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ꡑ하고, 적을 만나면 ꡐ중과부적(衆寡不敵)이다.ꡑ하며, 싸우다 물러나다 하다가 이 몇마디 말로 죄를 면하고 책임만 때우려고 듭니다. 만약 평소에 기율이 엄명하였다면 이들이 어찌 형벌(刑罰)을 모면하겠습니까. 경상 우도의 조금 완전한 곳은 금년의 관곡(官穀)을 거두어들일 때에 명년의 종자(種子)와 농량(農糧)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를 군량으로 다 바치게 하고, 만약 민간에 조금이라도 곡식을 저축한 사람이 있다면 지성으로 효유하되 관작을 아끼지 말고 잗단 곡식이라도 거두어 모을 것이며, 둔전(屯田)의 소출과 사찰(寺刹)의 위전(位田), 상번 군사(上番軍士)의 번가미(番價米), 공천(公賤)의 작미(作米), 금년의 전세(田稅)를 일일이 거두어 모아 군량으로 삼으소서. 또 각지의 살 곳을 잃은 백성들을 다방면으로 무휼하여 안접(安接)하게 하소서. 상주 목사(尙州牧師) 정기룡(鄭起龍)을 당상으로 올려 토포사(討捕使)로 칭호하는 것은 비단 토적(土賊) 때문만은 아닙니다. 대개 직로(直路)가 공허하기 때문에 기룡으로 하여금 이를 인하여 군병을 모집하여 위급한 일에 대비하게 하려는 것이니, 이 뜻을 다시 원수로 하여금 십분 신칙하게 하소서.ꡓ하니, 상이 따랐다./ 【영인본】 22 책 347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사법-치안(治安) / *군사-병참(兵站)(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선조실록 59권/ 선조 28년( 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1월 26일 기해 3번째 기사/ 사간원이 심우승․조발․박기백의 파직 등을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ꡒ춘천 부사(春川府使) 심우승(沈友勝)은 품질이 높은 문관으로서 몸가짐이 근신치 못하여 본 고을의 멀지 않은 땅에 스스로 농사를 짓고 백성을 안집(安集)시키는 일에는 정신을 쓰지 않으니, 온 경내가 원망하고 괴로워합니다. 하루도 관직에 둘 수 없으니, 파직시키고 대신할 사람을 각별히 골라 보내소서. 함평 현감(咸平縣監) 조발(趙撥)은 사람됨이 조망(躁妄)하여 자목(字牧)의 일은 보살피지 않고 날마다 침탈을 일삼으므로 온 경내가 탄식하니, 파직시키소서. 선산 부사(善山府使) 박기백(朴己百)은 인물이 용렬하여 이렇다할 재주가 없으므로 패잔을 소생시키는 책임을 이런 사람에게 부여해서는 안 되니 체차시키고, 그 대신 비변사가 아뢴 말에 의하여 문관이나 무관 중에서 각별히 골라서 보내소서. 선산 부사를 차출할 때는 별도로 비변사의 천계(薦啓)가 없었는데 이조가 박기백을 단망(單望)으로 주의(注擬)하였으니, 지극히 잘못입니다. 당상과 색낭청을 추고하소서. 적과 대치하고 있는 이때에 원수(元帥)의 막좌(幕佐)는 하루도 물러가 있을 수 없는데, 종사관(從事官) 황여일(黃汝一)과 최상중(崔尙重) 등을 도원수가 일시에 귀가하도록 허락하여 원문(轅門)의 일이 매우 허술해졌습니다. 도원수 권율(權慄)을 추고하고, 종사관 황여일과 최상중도 아울러 추고하소서.ꡓ하니, 상이 따랐다./ 【영인본】 22 책 425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선조실록 98권/ 선조 31년( 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3월 26일 신해 2번째 기사/ 이헌국․홍경신․황여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헌국(李憲國)을 겸지의금(兼知義禁)으로, 홍경신(洪慶臣)을 응교로, 황여일(黃汝一)을 사서로, 이병(李?)을 승지로, 조정립(趙正立)을 보덕으로 성이문(成以文)을 사간으로, 송일(宋馹)을 장령으로, 김용(金涌)을 사성으로 삼았다./ 【영인본】 23 책 40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선조실록 104권/ 선조 31년( 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9월 6일 무자 7번째 기사/ 송순․이상의․나급․황여일․김의원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송순(宋諄)을 우부승지로, 이상의(李尙毅)․나급(羅級)을 보덕(輔德)으로, 황여일(黃汝一)을 장령으로, 김의원(金義元)을 홍문관 교리로 삼았다./ 【영인본】 23 책 491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宣祖實錄 105卷/ 宣祖 31年( 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7日 己未 2번째 기사/ 장령 황여일이 체직을 요청하다/ ○掌令黃汝一【善屬文, 爲人愚而多氣。】啓曰: ꡒ無狀小臣, 伏在鄕曲, 不意本職之命, 遽及夢寐之外, 驚惶隕越, 無地自容。 臣性本愚庸, 動觸人謗。 且臣面有腫患, 至於一月之後, 今始來謝, 臣之淹命之罪大矣。 請命遞斥。ꡓ 答曰: ꡒ勿辭。ꡓ 退待物論。/ 【영인본】 23 책 518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선조실록 105권/ 선조 31년( 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0월 7일 기미 4번째 기사/ 사헌부가 유성룡을 파직하자고 건의하다/ 사헌부가 유성룡을 파직시키자는 일로 잇따라 아뢰고, 또 아뢰기를, ꡒ장령 황여일(黃汝一)이 인혐(引嫌)하고 물러갔습니다. 자기가 겸퇴하여 인구(引咎)한 말은 논할 것이 못 되고, 질병이 발생한 것 또한 사람으로서 면하기 어려운 것이며, 영남의 먼 길에서 지체된 것은 형편상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경솔히 언관(言官)을 체직시킬 수 없으니 출사케 하소서.ꡓ하니, 유성룡의 파직은 윤허하지 않고, 황여일의 출사는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영인본】 23 책 518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선조실록 105권/ 선조 31년( 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0월 21일 계유 1번째 기사/ 우의정 이항복과 공조 참판 이정구, 사예 황여일이 연경에 가다/ 진주사(陳奏使)인 우의정 이항복과 부사(副使)인 공조 참판 이정구와 서장관(書狀官)인 사예(司藝) 황여일(黃汝一)이 연경(燕京)으로 갔다./ 【영인본】 23 책 522 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선조실록 113권/ 선조 32년( 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5월 25일 임신 9번째 기사/ 유근․정광직․민몽룡 등을 관직에 제수하다/ 유근(柳根)을【젊어서 문장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권간(權奸)에게 아부하여 청화직(淸華職)을 역임하였으므로 식자들이 타기하며 더럽게 여겼다.】 지충추부사로, 정광적(鄭光績)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민몽룡(閔夢龍)을 예조 참의로, 김신국(金藎國)을 시강원 보덕으로, 경섬(慶暹)을 사헌부 장령으로, 윤휘(尹暉)를【윤두수(尹斗壽)의 아들이다. 권세를 빙자하여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이런 자로 동궁을 돕고 인도하게 하니, 사람을 제대로 썼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시강원 필선으로, 황여일(黃汝一)을 장악원 정으로, 신설(申渫)을 성균관 사예로, 이필형(李必亨)을 이조 정랑으로, 강첨(姜籤)을 병조 정랑으로, 이계록(李繼祿)을 형조 정랑으로, 남탁(南晫)을 예조 좌랑으로, 산율(申慄)을【젊어서 문명(文名)이 없었다. 그래서 과거에 급제했을 때 사람들이 혹 남이 지어준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병조 좌랑으로, 이광준(李光俊)을 충주 목사로, 권희(權憘)를 강화 부사로, 박석명(朴錫命)을 선산 부사로, 황치경(黃致敬)을 철산 군수(鐵山郡守)로, 최희(崔禧)를 고성 군수(高城郡守)로, 신암(申?)을 양천 현령(陽川縣令)으로, 이정생(李挺生)을 제주 판관으로, 이경린(李景麟)을 여주 목사로, 허균(許筠)을【행실도 수치도 없는 사람이다. 오직 문장의 재주가 있어 세상에 용납되었는데 식자들은 더불어 한 조정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황해 도사로, 구대우(具大祐)를 예산 현감(禮山縣監)으로, 이집(李?)을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삼았다./ 【영인본】 23 책 624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선조실록 142권/ 선조 34년( 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10월 22일 병술 2번째 기사/ 구사맹․심희수․황진․성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구사맹(具思孟)을 의정부 좌찬성으로, 심희수(沈喜壽)를 행 이조 판서로, 황진(黃璡)을【용렬하다.】 형조 판서로, 성영(成泳)을 지중추부사로, 황신(黃愼)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경준(李慶濬)을 경상우도 수사 겸통제사로, 최상중(崔尙重)을【사람됨이 논사(論思)의 직에는 합당치 않다.】 홍문관 교리로, 홍명원(洪命元)을 홍문관 수찬으로, 홍준(洪遵)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한경갑(韓景甲)을 호조 정랑으로, 이구징(李久澄)을【너무도 용렬하여 전일 시종이 되었을 때도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호조 좌랑으로, 이사경(李士慶)을 병조 좌랑으로, 허잠(許潛)을【수령이 되어서 거짓으로 꾸며 청백하다는 이름을 샀다. 그러나 탐학한 사람과는 다르다.】 중화 부사(中和府使)로, 김진선(金振先)을 영암 군수(靈巖郡守)로, 김극성(金克惺)을 보성 군수(寶城郡守)로, 황여일(黃汝一)을 예천 군수(醴川郡守)로, 김덕함(金德?)을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강주(姜?)를 보령 현감(保寧縣監)으로, 윤열(尹說)을 전라도 병사로, 이정신(李廷臣)을 나주 목사로,【정신은 전일 광주 목사로 있을 적에 선정(善政)을 했으므로 전주 목사로 승진되었다. 그런데 전주에 와서는 방사하고 탐학하여 명예가 광주에 있을 때보다 크게 떨어졌다.】 심극명(沈克明)을 남원 부사로, 이경유(李慶裕)를 단천 군수(端川郡守)로, 이시언(李時言)을 지중추부사로 삼았다./ 【영인본】 24 책 30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선조실록 199권/ 선조 39년( 1606 병오 / 명 만력(萬曆) 34년) 5월 15일 임오 7번째 기사/ 성영․홍식․이선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성영(成泳)을 행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식(洪湜)을 이조 참판으로, 이선복(李善復)을 부제학으로, 송석경(宋錫慶)을 보덕으로, 조존세(趙存世)를 사예로, 윤인(尹?)을 예조 정랑으로, 최동식(崔東式)을 직강으로, 박안현(朴顔賢)을 정언으로, 안홍망(安弘望)을 호조 좌랑으로, 금업(琴?)을 예조 좌랑으로, 최응허(崔應虛)를 병조 좌랑으로, 권설(權渫)을 형조 좌랑으로, 황여일(黃汝一)을 성균관 전적으로, 송극인(宋克?)을 예문관 봉교로, 임장(任章)을 예문관 대교로, 이현(李俔)을 예문관 대교로, 최강(崔堈)을 경상 수사(慶尙水使)로, 이수(李燧)를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신충일(申忠一)을 덕원 부사(德原府使)로, 원지(元?)를 삭주 부사(朔州府使)로, 이충선(李忠善)을 보성 군수(寶城郡守)로, 윤광계(尹光啓)를 평안 도사(平安都事)로 삼았다./ 【영인본】 25 책 19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광해군일기 46권/ 광해군 3년( 1611 신해 / 명 만력(萬曆) 39년) 10월 12일 무인 3번째 기사/ 박홍도․조명욱․유활․박정길․황여일․남이흥․구인후․전식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홍도(朴弘道)를 정언으로, 조명욱(曺明勖)을【명욱은 유영경의 당파로 연좌되어 폐척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유씨를 통해서 점차 현용(顯用)되었다.】 수찬으로, 유활(柳活)을 사서로, 박정길(朴鼎吉)을 부수찬으로, 〈 황여일(黃汝一)을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남이흥(南以興)을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구인후(具仁?)를 갑산 부사(甲山府使)로, 전식(全湜)을 울산 판관(蔚山判官)으로〉 삼았다./ 【영인본】 31 책 65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광해군일기 46권/ 광해군 3년( 1611 신해 / 명 만력(萬曆) 39년) 10월 18일 갑신 2번째 기사/ 사간원이 함경도 감시 시관의 파직과 길주 목사 황여일의 체차를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ꡒ〈 함경도에서 감시(監試) 출방(出榜) 때, 입격한 시권(試券)을 등급도 안 매기고 밤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거두어서 적어넣었는데, 참방(參榜)한 거자(擧子)들의 시권이 그나마 쓴 사람도 있고 안 쓴 사람도 있었습니다. 절차가 뒤죽박죽이 되어, 보고 듣는 이들이 놀라워합니다. 당시의 시관을 모두 파직하소서.〉 길주(吉州)는 북문의 거진(巨鎭)으로 임무가 막중한 곳입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목사 황여일(黃汝一)은 성격이 본래 느슨하고, 지난 이력을 보아도 별로 일컬을 만한 재주가 없습니다. 관방(關防)의 중요한 곳을 이런 사람의 손에 맡겨둘 수 없으니, 체차시키고 이미 수여한 상가(賞加)도 아울러 개정하소서.ꡓ하니 답하기를, ꡒ황여일은 체찰사가 천거했는데, 우선 그대로 보내어 그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윤허하지 않는다.ꡓ하였다./ 【영인본】 31 책 657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광해군일기 46권/ 광해군 3년( 1611 신해 / 명 만력(萬曆) 39년) 10월 19일 을유 4번째 기사/ 사간원이 길주 목사 황여일을 체차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 사간원이 길주 목사 황여일을 체차하는 일에 대하여 아뢰자, 답하기를, ꡒ이미 하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ꡓ하였다./ 【영인본】 31 책 658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광해군일기 46권/ 광해군 3년( 1611 신해 / 명 만력(萬曆) 39년) 10월 20일 병술 4번째 기사/ 사간원이 길주 목사 황여일을 체차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 사간원이 길주 목사 황여일을 체차시킬 것을 아뢰었는데,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영인본】 31 책 658 면/ 【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인사(人事)(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광해군일기 46권/ 광해군 3년( 1611 신해 / 명 만력(萬曆) 39년) 10월 21일 정해 5번째 기사/ 사간원이 경연을 다시 열 것과 길주 목사 황여일을 체차할 것을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ꡒ임금이 덕을 닦고 못 닦음은 진실로 경연에 달린 일입니다. 근래에 비록 대례가 거듭되어 연일 경연을 열지 못했으나, 이어한 뒤에 진풍정이 있기까지는 빈 날이 있습니다. 시사(視事)를 오래 비우는 것은 지극히 미안한 일인데, 더구나 접때는 겨울 천둥이 경계하기까지 하였으니, 두려워하고 수성(修省)하는 도리가 더욱 신하들을 인접함에 있습니다. 정원에서 규례에 따라 취품(取稟)하게 하소서. 그리고 길주 목사 황여일을 체차하소서.ꡓ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영인본】 31 책 658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인사(人事)(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광해군일기 126권/ 광해군 10년( 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4월 18일 정미 17번째 기사/ 예조에서 왜인이 보낸 서계의 일로 아뢰다/ 예조의 계목에, ꡒ경상 감사 윤훤(尹暄)과 동래 부사(東萊府使) 황여일(黃汝一)이 올려 보낸 왜인의 서계(書啓)를 보건대, 대마 도주(對馬島主)의 아들이 그 아비가 죽은 뒤에 도주로 올라섰으면 전에 받은 도서(圖書)를 환수하여야 마땅할 듯한 데도 그냥 가지고 파견했으니 지극히 간교합니다. 이번에 접대한 뒤로는 이를 예로 삼지 말도록 할 일을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고, 승문원으로 하여금 말을 잘 만들어 답서를 보내게 해야 하겠습니다.ꡓ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영인본】 33 책 46 면/ 【분류】 *외교-왜(倭)(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記事] : 인조실록 21권/ 인조 7년( 1629 기사 / 명 숭정(崇禎) 2년) 12월 9일 기미 1번째 기사/ 호조가 전후의 동래 부사들이 공무목(公貿木)을 축낸 숫자가 많았음을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ꡒ전후의 동래 부사(東萊府使)들이 공무목을 축낸 숫자가 매우 많습니다. 이는 장오(贓汚)에 관계되는 일이니 유사(攸司)를 시켜 처리하게 한 뒤에 법률을 적용하여 추징해야 할 것입니다. 그중 문서에 불명확하게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서 8백여 동(同)의 많은 숫자가 각각 그 당시의 부사 이름 밑에 쓰여져 있는데, 곧 황여일(黃汝一) 8백 4동 44필(匹), 윤민일(尹民逸) 12동 22필, 윤굉(尹宖) 1동 44필입니다. 그런데 황여일․윤굉은 벌써 죽었으므로 구문(究問)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문서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모두 죄를 씻어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본도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도록 하였던 것은 그 실상을 알아보라고 한 의도였는데 사계(査啓)한 것조차 불명확하니 본조에서 어디에 근거하여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본도로 하여금 명백하게 조사하여 계문토록 하소서.ꡓ하니, 상이 따랐다./ 【영인본】 34 책 358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외교-왜(倭) / *무역(貿易) / *농업-임업(林業)(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 吟示醴泉歸侍高堂[海月罷醴泉郡守。歸侍親堂。日以宴。]/ 상위서지: 大海先生集 > 大海先生文集卷之一 > 詩/ 분류: 고도서 > 집부(集部) > 별집류(別集類)/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대해선생문집 (大海先生文集)/ 吟示醴泉歸侍高堂[海月罷醴泉郡守。歸侍親堂。日以宴。] ( 吟示醴泉歸侍高堂[海月罷醴泉郡守。歸侍親堂。日以宴。] )// 遠?今日過庭隅。小酌梅亭盡日娛。洞友苦期端午酒。老夫幸得不時需。//

 

  황여일(黃汝一) : 본관(本貫) 평해(平海), 시대(時代) (1556(명종 11)∼1622), 이력(履歷) : 조선의 문신.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헌(海月軒)·매월헌(梅月軒), 응경(應徑)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났고, 1576년(선조 9)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8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우고, 1594년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거쳐 1598년 진주사(陳秦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서장(書狀)을 가지고 명나라에 다녀왔고, 1611년(광해군 3) 길주 목사(吉州牧使)가 되었다. 1617년 동래진 병마첨절제사(東萊鎭兵馬僉節制使)를 지낸 후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평해(平海)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daum 2010)

 

  황여일(黃汝一) : 평해황 인명록/ 황여일(汝一) : 1556~?, 조선의 문관,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헌(海月軒), 선조 9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85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청환직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권율의 휘하에서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우고 2등공신이 되었으며 1594년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1598년 진주사의서 장관으로서 명나라에 건너가 문명을 떨쳤고 광해군 3년 길주(吉州)목사가 되었다. 그 후 동래진병마첨절제사를 지내고 참판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조천록(朝天錄)' 과 해월집 등이 있으며 평해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었다.(daum 2010)

 

  황여일 : 해월헌(海月軒)/ 문화재지정 : 문화재자료 제 161호 (1985. 8. 5)/ 수량 : 3동/ 소재지 :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433/ 소유자 : 황의석/ <문화재 안내> : 선조 51년(1588)에 건립하여 헌종 13년(1847)에 중수하였고,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1556. 10.21∼1623.4.2)의 별구(別構)였다고 하며, 기성면 사동리 산정에 있었으나 후손이 현 위치에 이축하였다 한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측면의 앞쪽 1칸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돌렸으며 지면에서 떨어져 지었다. 해월헌에는 선생의 유품으로 보이는 각대, 물통, 화살, 숟가락, 제기, 청동등잔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녹각(鹿角) 3점 등의 유물과 교지(敎旨) 수십 점이 있으며, 천군기(天君記) 등의 서적이 남아 있다. 특히 한석봉의 글씨라고 하는 병풍 1점이 있는데 낙관이 없으므로 확인할 길은 없다. 해월헌 전면에는 해월헌기(海月軒記), 제해월헌(題海月軒), 용청강운(龍淸江韻)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황여일의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海月), 본관은 평해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났고, 선조 9년(1576) 사마시를 거쳐 1585년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우고 1594년 형조정랑을 거쳐 1598년 명나라에 비변사(정사 이항복, 부사 이정구, 서장관 황여일)로 갔을 때 마테오리치의 감수를 받아 손수 제작한 세계지도는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조천록(朝天錄)을 지었으며, 1623년 4월 2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라에서 가선대부·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성균관사·홍문과제학·예문관제학·세자좌부빈객 등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온정면 금천리 속칭 양곡(暘谷)의 오패산 중턱에 있다.(daum 2010)

 

  황여일 : 사동골댁집/ 기성면(箕城面) 사동리에 소재한 황의석(黃義錫)씨 집은 그 집의 택호(宅號)가 "골댁"이므로 '사동골댁집'이라고 하는데 이 집터는 풍수(風水)들이 강릉(江陵) 이남에서는 제일 좋은 집터라고들 한다. 지금부터 약 400 수십년 전 세종대왕(世宗大王) 때 정선군수(旌善郡守)를 지낸 권조(權組)라는 사람이 평해(平海)에 입향하여 이 집터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후 중종(中宗)때 그 사위가 되는 이명유(李命裕)라는 사람이 홍천군수(洪川郡守)로 있다가 중종사화(中宗士禍)에 몰리어 벼슬을 잃고 돌아오니 권씨(權氏)말이 "이 집터를 사위에게 물려줘서야 영원히 이름난 터(基)로서 가치가 유지된다고 하니 자네에게 물려주네" 하면서 이명유(李命裕)에게 물려주었다. 이명유는 그 뒤 사위인 정담(鄭湛) 군수의 부친인 정창국(鄭昌國)에게 물려주니 정창국은 판결사 황응징(黃應澄)(해월 황여일 선생의 부친)에게 물려주었으나 황 판결사는 딸이 없어 사위에게 물려주지 못하고 대대로 황씨(黃氏) 종손이 살아왔는데 지금의 해월헌(海月軒)의 안채(主舍)가 바로 이 집터이며 문화재 자료로 보호하고 있다.(daum 2010)

 

  황여일 : <울진군지> 제1장 인물 제1절 유현(儒賢)/ 황여일(黃汝一)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해월(海月)이며 본관은 평해다. 공은 용모가 빼어나고 재질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었고, 어려서부터 가훈을 이어받아 세속에 초연하였으며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도학과 의리를 숭상하고 학문을 즐겨하니 문장이 넓어 아는 것이 많았다. 또 조정에서 임금을 섬기는데 명분과 절개로 충실하게 복무하였다. 공이 13세 때 경전과 사기를 해득하여 향시에 장원급제하였고, 1584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거쳐 호당(湖當)에서 경전을 강의하고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 이조(吏曹)와 병조정랑(兵曹正郞)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냈으며 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공은 한강(寒岡) 정구(鄭逑),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약포(藥圃) 정탁(鄭琢) 선생 등으로부터 성리학(性理學)의 학통을 이어받은 분으로 1583년에 조정에서 문묘배향(文廟配享)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오현(五賢)의 배향을 적극 주장하였고, 1598년에는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명나라 무변진주사(誣辯陳奏使)로 가서 문명(文明)을 떨쳤다.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宣祖)를 호종하였고, 권율(權慄) 장군과 함께 행주대첩(幸州大捷)과 진주성싸움에서 공을 세워 1607년 7월 선무원종이등훈(宣武原從二等勳)을 받았다. 공(公)이 집안에서 후진에게 학문을 장려할 때에는 덕행을 앞세우니 많은 선비가 나왔으며 또한 평해향중의 눈을 뜨게 하여 세칭 해월선생이라 하였다. 그리고 1622년에 영민하니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봉안하고 제향하였다. 저서로는 조천록(朝天錄), 주자절요주석(朱子節要註釋)이 있고 문헌으로 선조실록·광해군일기와 유집(遺集) 7권이 있으며 유물로는 만국곤여지도(萬國坤輿地圖)가 있다.(daum 2010)

 

  황여일 : <울진군지>/ 제1장 인물  제11절 과제(科第)/ 2. 조선시대 1) 문과(文科)1) (1)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등재된 사람/ 황여일(黃汝一) : 1576년(선조 9)에 진사(進士)며, 1585년(선조 18)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의(參議)다.(daum 2010)

 

  황여일 : 해월(海月) 황여일의 별구(別構)로서 각대, 제기, 천동장, 녹각 등의 유물과 교지(敎旨)와 같은 선생의 유품이 남아있다. 문화재명 ; 해월헌(海月軒), 소재지 : 기성면 사동리 433 (문화재자료 제 161호)(daum 2010)

 

  황여일 :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海月先生文集 (古枕 810.819 황64큁)/ 黃汝一 (1556∼1622) ; 字 會元, 號 海月軒, 本貫 平海./ 木板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英祖52(1776)跋./ 零本1冊(全14卷7冊) ; 30x19.7cm./ 四周雙邊. 半匡 ; 19.6x15.4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조선 중기의 문신인 황여일의 시문집이다. 황여일은 응징(應澄)의 아들이며 평해(平海) 사람이다. 선생은 1576(선조 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5년 문과에 급제 후 한원(翰院)에 뽑혀 검열, 대교(待敎), 봉교를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공을 세우고 1597년 승문원교리, 이듬해 사서, 장령, 필선, 사예를 역임,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정응태(丁應泰)의 무고(誣告)를 변명하고 1606년 영천군수(永川郡守)가 되었다. 1607년 선무원종훈으로 공신권(功臣券)을 하사 받고 1611(광해군 3)년 길주목사(吉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1716년 동래부사(東萊府使), 1618년 공조참의로 환조(還朝)하여 1620년 경상관찰사로 대신(大臣)이 추천했으나 반대파의 저지로 이루지 못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평해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봉향되었다. 이 문집은 1776(영조 52)년 후손 상하(尙夏)외 이형복(李亨福) 등이 간행하였다./ 【枕澗亭文庫】에는 零本 1책이 수장되어 있다./ 卷之 7. 疏 ; 上請從祀五賢文廟, 辭權元師從事, 辭侍講院司書./ 狀啓 ; 在北靑狀啓./ 敎 ; 慶林君金命元敎./ 箋 ; 謝 賜半?箋, 賀 王世子領 天朝欽賜冕服箋./ 表 ; 擬宋淮南巡撫使范仲淹進太平民所食烏昧草./ 頌 ; 駐??淵頌./ 記 ; 朴谷, 後朴谷, 重修圃隱鄭先生碑閣./ 序 ; 平海黃氏族譜, 永陽先生案, 櫓金將軍(應河)詩./跋 ; 書林白湖元生夢遊錄, 南?同舟契軸序, 南秀才(孝慤)九老契帖./ 卷之 8. 雜著 ; 遊內迎山錄, 不移說, 召募咸鏡道義兵文, 花樹會文, 殿策題./ 祭文 ; 祭從弟景元(慶), 祭從弟渾元(有一)再祥, 祭鶴峯金先生, 祭張公(希道), 祭朴大丘(弘長), 祭尹君聘, 祭叔父大海先生, 祭藥圃鄭先生, 祭朴大庵, 祭碧雲主人, 祭朱孝子(景顔), 臨河鄕社鶴峯金先生奉安文, 祭主屹山, 祭?弗山, 祭伽倻津, 祭笠巖, 祭祈雨, 敬殿慰安祝文(daum 2010)

 

  황여일 : <국조 문과 방목>/ 황여일(黃汝一) More Info./ 선조(宣祖)18년(1585년), 별시(別試) 을과1(乙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56년, 병진, 자(字) 회원(會元), 호(號) 해월(海月), 본관(本貫) 평해(平海)/ > 가족사항 부(父)   황응징(黃應澄), 조부(祖父) 황연(黃璉), 증조부(曾祖父) 황세충(黃世忠), 처부(妻父) 김수일(金守一), 자(子) 황중윤(黃中允)/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76(병자) 진사시,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官職) 부사(府使), 한림(翰林)(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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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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