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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80-3:황여일(1601.10.22임명,동년12부임-1603이임)
작성자장병창 @ 2012.11.17 06:29:33

   예천고을원(80-3) : 황여일(1601.10.22임명, 동년12부임-1603이임) : '조천록'을 저술한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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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여일 [記事] : 광해군일기 115권/ 광해군 9년( 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5월 30일 계사 6번째 기사/ 왜가 수호를 요청해 회답사를 보내고 천조에 주문한 자문의 내용/ 【대마도(對馬島)의 왜(倭) 귤지정(橘智正)이 관백(關白)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수호(修好)를 요청하고 또 사신을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오윤겸(吳允謙) 등을 회답사로 보내었으며, 인하여 천조(天朝)에 주문(奏聞)하였다. 그 자문(咨文)은 다음과 같다.】 ꡒ조선국왕은 왜정(倭情)에 관계된 일로 삼가 주문합니다. 올 정월 22일에 경상도 관찰사 성진선(成晉善)이 치계하기를 ꡐ동래진 병마첨절제사(東萊鎭兵馬僉節制使) 황여일(黃汝一)이 정문(呈文)을 보내었는데, 그 대략에 「대마도왜(對馬島倭) 귤지정이 일본국왕(日本國王) 원수충(源秀忠)의 차견(差遣)을 인하여 장차 서계(書契)를 싸가지고 배를 타고 나올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정문을 갖추어 모두 아룁니다.ꡑ고 하였습니다. 이 치계를 받고서 원수충의 서계가 도착하였기에 펼쳐보니, 거기에 쓰기를 ꡐ일본 국왕 원수충은 조선 국왕 전하께 글을 올립니다. 해마다 대마 도주 평의성(平義成)에게 명하여 귀국의 사신을 맞이하여 오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다른 일이 아니라 두 나라 사이의 인호(?好)가 도탑고 인의(仁義)가 중함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평의성이 고하기를 「조선의 신사(信使)가 바다를 건너서 다시금 인호의 도타움과 인의의 중함을 보게 되었으니, 몹시 다행스럽고도 다행스럽다.」고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다 대마 도주 평의성의 서신 안에 있을 것입니다.ꡑ고 하였습니다. 또 대마 도주 평의성이 예조에 글을 보내었습니다. 평의성은 바로 평의지(平義智)의 아들로 본명이 정광(貞光)이라고 하는 자입니다. 그 서계(書契)에 쓰기를 ꡐ신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고 우리 전하께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해마다 저희 대마도에 조서를 내려주신 것을 생각하시어, 예전에는 잘못 되었고 지금은 올바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으소서. 그러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되도록 속히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신사를 맞이해 오기 위하여 귤지정을 차견하여 대기하게 하는 외에 다른 일은 없습니다. 나머지 사항은 귤지정이 모두 말할 것입니다.ꡑ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글을 받고서 의정부가 장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ꡐ전부터 대마 도주 평의지 등이 와서 성의를 보이면서 서계를 바쳤습니다. 그러면서 매번 가강(家康)의 지시를 받고서 통호(通好)하기를 요청한다고 말하였는데, 전후로 간절하게 요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자 해조 및 변방의 신하들이 번번이 「해상(海上)의 크고 작은 일들을 으레 날마다 중국 조정에 보고하여 왔는바, 이번의 이 신사에 대한 한 조항은 더욱더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핑계로 늦추어 온 지 이미 몇해가 지났습니다. 이번에 원수충이 가강의 뒤를 이어 그의 여세를 빙자해서, 반드시 우리 나라의 사신을 맞아오고자 하여, 이 일을 전적으로 대마도에 책임지웠습니다. 평의성은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는 아이로서 대마 도주의 직임을 승급받았는바, 오로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서 일본에서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대개 만력(萬曆) 을묘년947) 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정성을 보이고 귤지정이 와서 간청함이 더욱더 간절합니다. 그리고 왜인들이 각자 말하기를 「대판(大坡)에 근거를 둔 평수뢰(平秀賴)가 역모의 뜻을 품어 일본 전역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전하께서 이를 말미암아서 서쪽으로 토벌을 나가 일본 전역을 태산(泰山)같은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조선은 일본과 잘 지내고 있는데 어찌 신사를 차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신사가 만약 오지 않으면 대마도가 끝내 화를 당할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의홍(義弘)과 장정(長政)이 때를 틈타 동요하여서 우리 섬을 빼앗아 점거한다면 귀국에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고, 또 「본도의 존망은 신사가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일본에서 만약 신사에 대한 일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보고해 온 바를 근거하고 정적(情迹)으로 참작해 볼 때, 지금 만약 한결같이 물리치면서 끝까지 거절하는 뜻을 보이면, 저들은 어쩔 방도가 없어서 반드시 점점 더 원한을 품을 것이니, 이는 참으로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지난 만력 30년948) 에 대마도 왜가 재차 포로로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면서 와서 말하기를 「가강(家康)이 화친을 빨리 성사시키라고 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절차를 갖추어서 중국 조정에 보고하고 예부와 병부 및 경략군문(經略軍門)에 자문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인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왜인들의 사정에 익숙한 자인 전계신(全繼信) 등을 차임하여 앞서서 본도(本島)에 들여보내어 저들의 사정을 엿보게 하였습니다. 또 만력 32년에는 대마도에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에 대해 말하였는데 오랫동안 분명하게 통보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가강이 화를 내어서 각 주(州)로 하여금 군장을 꾸리게 해 장차 출동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또 포로로 잡혀갔던 자인 김광(金光)이 구두로 보고하기를 「가강이 이미 삼위(三衛)의 왜장(倭將)을 확정하고 군사를 출동시켜 나오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받고는 진강유부(鎭江遊府)에 자문을 보내어 전보(轉報)해 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어 생각해보니 섬오랑캐의 실정을 탐지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에 승인(僧人) 송운(松雲)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귤지정과 함께 일본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사정을 상세하게 탐지하게 하였습니다. 또 만력 34년에는 가강이 서신을 보내고 또 사신을 보내었습니다. 저들의 속사정이야 비록 헤아릴 수 없지만 이미 그의 편지가 왔으니 회답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여우길(呂祐吉) 등을 차임해 보내어서 가강에게 회답하였습니다. 현재의 입장에서는 전항(前項)의 사례에 의거해서 별도로 원역(員役)을 차임해 일본 사신과 함께 일본으로 들여보내어, 원수충이 포로로 잡아갔던 사람들을 보내준 데 대해 보답해 주고 이어 그들의 사정을 기찰하는 한편, 중국 조정에 주문하여 상응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갖추어 아룁니다.ꡑ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장계를 받고 신이 지난 만력 42년 11월에 의정부가 장계한 것을 조사해보니, 거기에 ꡐ경상도 관찰사 장만(張晩)이 정문(呈文)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마도 왜인 귤지정이 배를 타고 부산항(釜山港)에 도착해서 서계(書契)를 바쳤는데, 그 서계 안에 『대마도 태수 평의지는 삼가 예조에 아룁니다. 이번에 귀국에서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하는 일로 귤지정을 파견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성사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본도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걱정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조선과 일본간의 일에 있습니다. 일이 만약 성사되지 못할 경우 끝내 본도의 화가 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정문을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받고는 해진관사(海鎭官司)로 하여금 본왜(本倭)에게 칙유하고, 이어 해조로 하여금 의리에 입각하여 회답 서신을 보내게 하는 외에, 진강유부(鎭江遊府)에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ꡑ고 하였습니다. 또 만력 43년 9월에 경상도 관찰사 권반(權盼)이 치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ꡐ대마도 왜(對馬島倭)가 도주 평정광(平貞光)이 예조에 바치는 서계를 싸가지고 왔는데, 그 안에 「이번에 귤지정을 파견한 것은 다른 일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귤지정과 함께 우리 전하를 만나보니, 변치 않고 신사를 보내주기를 청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신사가 만약 나오지 않을 경우, 저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는 바,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끝내는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귀국에서는 단지 신사만을 보내 주시어 저에게 덕을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받고 이어 역관(譯官)을 시켜서 귤지정과 문답하게 하였습니다. 역관이 「이번의 이 서계 안에서 말한 바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귤지정이 답하기를 「가강이 국내의 분란을 평정하고 원수충이 국사를 전담하면서 귀국과 통호(通好)하여 신사를 맞이해 와서 그 덕을 볼 계획을 하였다. 도주는 아비의 직책을 승습받았으므로 가강의 뜻을 그대로 떠맡은 것이다. 내가 이번에 나온 것은 오로지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하러 온 것이다. 귀국에서 만약 허락하지 않으면 나로서는 그대로 돌아가기가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역관이 다시 힐문하기를 「본국의 기무(機務)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일체를 중국 조정에 보고하고 있다. 이것은 실로 너희 섬에서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니, 귤지정이 답하기를 「평의지(平義智)는 이미 죽었고 평정광(平貞光)은 나이가 어리다. 전에는 평의지가 양쪽 사이에서 잘 주선하여서 스스로 미봉한 것이 많았다. 현재의 상황은 지난날과 달라서 귀국에서 반드시 잘 참작해서 조처해 주어야만 뒷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갖추어 아룁니다.ꡑ 하였습니다. 이상의 보고에 근거하여 귤지정이 가강을 빙자하여 한 말을 조사해 보니, 말뜻이 몹시 교활하여 자못 공갈하는 듯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에 그 사이의 정적이 몹시 불측하다는 등의 내용으로 진강유부에게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 또 경상도 관찰사 성진선(成晉善)이 치계하기를 ꡐ동래진 병마첨절제사 황여일(黃汝一)이 대마도에서 쇄환한 우리 나라의 포로인 신경난(辛景鸞) 등을 풀어보낸 연유에 대해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ꡑ고 하였습니다. 이에 근거해서 의정부의 여러 배신(陪臣)들이 회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심문하였는데, 본인이 공초(供招)하기를 ꡐ일명 신경란(辛景鸞)이라 하고 나이는 40세이며, 경상도 양산군(梁山郡) 사람이다. 〈 만력 25년949) 에 어곡리(魚谷里)에 있다가 왜적을 갑자기 만나서 그대로 잡혀갔다. 일본국 오사포(五沙浦)의 주왜(主倭)인 평수라(平秀羅)의 진중(陣中)에 잡혀갔다가 1년간 있은 뒤 장기(長崎) 등지로 도망쳐서 살았다. 그러다가 마침 귤지정이 본국으로 오는 행차를 만나서 그를 따라 돌아왔다.ꡑ고 하였습니다.〉 이어 일본의 정세에 대해 물어보니, 신경란이 말하기를 ꡐ내가 일본에 있을 때 들은 사실입니다. 평수뢰(平秀賴)가 총애하는 장수의 이름이 편동시정(片桐市正)이라고 하는데 가강이 몰래 그와 결탁해서 평수뢰를 독살하고자 모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발각되어서 편동시정은 그의 형제 세 사람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가강에게 귀의해서는 큰 군사를 끌어모아서 평수뢰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가강측이 패배하여서 정병(精兵) 3만 명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전멸당하였습니다. 이에 가강은 힘이 부족해서 항복을 하고는 손가락을 잘라서 부처께 맹세하고 하늘에 사죄하였으며, 맹세하는 글을 지어 배반하지 않는다는 뜻을 표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66주를 모두 들어 수뢰에게 바치고 식읍(食邑)을 보전하고 모자(母子)의 생명을 보전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에 평수뢰가 그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가강은 문득 한 가지 계책을 내어 평수뢰에게 고하기를 「내가 늙어서 잘못 헤아리고 이번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하였다. 지금 비록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앞으로 무슨 얼굴로 사람들을 보겠는가. 만약 대판(大坡)의 성곽을 대략 무너뜨려서 마치 내가 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린 것처럼 꾸민다면 내가 사람들에게 핑계를 대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성이 무너진 곳은 내가 그날 즉시 공사를 벌려 수축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평수뢰가 승리한 기분에 도취되어 그가 말한 바를 믿고서 본성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는 가강이 평수뢰의 외숙(外叔)임을 인연하여 그대로 풀어주어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다음해 3월에 수뢰가 한 여자를 가강에게 보내어서 축성하는 역사를 무슨 이유로 지연시키는가에 대해 캐물으니, 가강이 거짓으로 응답하기를 「내가 듣기에 수뢰가 이미 스스로 성참(城塹)을 다 수축하고서 다시 싸우고자 한다는데, 과연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답하기를 「그 말은 헛된 말이다. 대판의 성참은 아직까지 수축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가강이 말하기를 「내가 전에 맹약한 것이 참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현재 평수뢰가 싸우고자 하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응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일검(一劍)으로 사생(死生)을 결판짓겠다.」고 하고는, 이어 여러 곳의 군사를 불러모았는데, 먼저 헛말을 퍼뜨려서 아무아무 고을 아무아무 장수는 8월에 군사를 이끌고 모이기 바란다고 두루 고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비밀 장소에서 심복의 여러 장수들을 모이도록 하고, 군사를 일으킬 기일을 앞당겨서, 4월에 군사들을 통합하고 5월 1일에 수뢰와 전쟁을 벌렸습니다. 그 뒤 2일․3일․4일․5일․6일에 잇달아서 크게 싸웠습니다. 마침 평수뢰의 성 안에 간첩이 있어 안에서 호응하여서 먼저 화약을 쌓아둔 곳에 가서 그 곳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신호를 삼았습니다. 이에 평수뢰가 드디어 패하여서 그의 휘하 장수들과 함께 모두 자살하였습니다. 이러한 때 대마 도주 평정광(平貞光)이 마침 일본에 갔다가 그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가강이 일본을 평정하고는 조선의 신사를 맞아오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평정광을 대마도로 돌려보내고 또 귤지정을 불러서 조선에 신사를 힘껏 요청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보건대 본국에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 중에 일본에 머물러 있는 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자가 몹시 많은데, 모두들 말하기를 「신사가 들어오면 우리들이 살아서 돌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ꡑ고 하였습니다. 또 부산에 왕래하는 관역(官譯)들이 물은 데 대해 각 왜인들이 말한 일본 내의 사정도 역시 신경란이 공초한 것과 대략 같았다고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또 만력 44년 3월에 경상도 관찰사 성진선이 치계한 데 의거해 보건대, 거기에 ꡐ동래진 병마첨절제사 황여일(黃汝一)이 정문을 보내었는데, 거기에 「대마도왜 귤지정이 항구에 도착해서 역학(譯學) 형언길(邢彦吉)을 마주 대하여 말하기를 『일본국에서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하면서 본대마도에다 모든 책임을 맡겼다. 그런데 귀국에서 허락하지 않고 있으므로 도주가 몹시 걱정하고 있다. 귀국에서 만약 한결같이 굳게 거절한다면 나 역시 돌아가서 그대로 일본에 보고하겠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사유를 갖추어 아룁니다.ꡑ 하였습니다. 이상의 치계에 근거해서 시행하던 사이에, 또 11월에 대마도에서 차임해 보낸 귤지정이 서계를 싸가지고서 왔는데, 그 서계에 ꡐ평의성은 삼가 예조에 글을 올립니다. 저는 여름이 끝나갈 때 강호(江戶)에서 물러나와 늦가을인 9월에 본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 귤지정을 차임해 보내는 것입니다. 다음해 봄에 신사를 차임해 보내주신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겠습니까. 삼가 정문을 갖추어 아룁니다.ꡑ고 하였습니다. 이에 변방의 신하로 하여금 전과 같이 유시하도록 보내는 한편 절차를 갖추어서 진강유부(鎭江遊府)에 보고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대마 도주가 예조에 서계(書契)를 보내었는데, 그 안에 말하기를 ꡐ지금 빠른 배를 태워 귤지정을 다시금 차임해 보내면서 이처럼 급급해 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대개 본도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서 선조(先祖)의 유훈(遺訓)을 준수하면서 번리(藩籬)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버님이 불행스럽게도 명이 짧아서 죽었는데, 저는 지금 나이가 어려서 아마도 우리 전하께서 보전해 주기를 도모하지 않을 듯합니다. 지금 지난해에 신사가 나온 영광을 잊지 못하여서 전부터 강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조(貴曹)에서는 비단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책하는 뜻을 보이기까지 하면서 「일이 상례(常例)가 아니어서 아마도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울 듯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세한 내용이 만약 우리 전하에게 전달된다면 반드시 주위에서 헐뜯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전례를 생각하건대, 귀국에서 송운대사(松雲大師)를 보냈었는데 이로부터 두 나라 사이가 평안하였습니다. 또 기유년950) 에는 일본 국왕의 사신이 바다를 건너갔었는데 지금 8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뒤로 귀국에서는 이와 같이 보답하는 예가 없으니, 이것은 예의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지금 신사를 보내주기를 청하는 것은 인의(仁義)의 예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사세를 굽어살피시어 특별히 신사를 보내도록 허락하여 포로들을 쇄환해 가 생령(生靈)들을 안정시키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 역시 양쪽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이렇게 급함을 알리는 것은 저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다시금 덕음(德音)을 내려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ꡑ고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해서 전례대로 출발시켰는데, 그 뒤에 또 부호군 정신도(鄭信道)가 아뢰었습니다. 그 대략에 ꡐ저의 친척인 전이생(全以生)과 박괘동(朴卦同) 등이 일찍이 왜적에 포로가 되어 잡혀갔었는데, 지난번에 대마도 왜인 편을 통하여 글을 보내 왔습니다. 거기에 쓰여 있기를 「저희들은 고향을 떠나고 부모와 헤어진 채 지금까지 죽지 않고 있으면서 날마다 고국에서 좋은 소식이 있기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제가 살마주(薩摩州)에 가서 보니, 그 주에는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 총 3만 7백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총(鳥銃)과 창검을 쓰는 재주를 잘 익혔으며, 모두 본국으로 쇄환되어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갖추어 아룁니다.ꡑ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해서 지금 전의 사항들에 대해서 이미 정부에서 상의해 확정지워 모두 아뢰었습니다. 신이 삼가 상세히 따져보건대, 지난해에 가강이 소방(小邦)에 먼저 성의를 보일 때 일찍이 말하기를 ꡐ풍신 수길이 귀국을 침범할 때 나는 관동(關東) 지방에 있어서 나의 군사는 한 사람도 바다를 건너 귀국으로 간 자가 없었다.ꡑ고 하고, 또 말하기를 ꡐ나는 풍신 수길이 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한다.ꡑ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이미 포로로 잡아간 남녀들을 쇄환하였고, 계속해서 선왕(先王)들의 묘(墓)를 파헤친 도적들을 잡아보내면서 성의를 보였습니다. 지난번에 소방에서는 이상의 사실들에 대해 천조에다 사유를 갖추어 주문하였으며, 이어 원역(員役)을 차임해 보내었습니다. 얼마 전에 가강이 대판을 병탄하고 수충(秀忠)이 여러 섬들을 평정하여 형세를 키우고 점차 강성해져 스스로 소방의 원수를 죽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년 사이에 신사를 청하는 사신이 날마다 오고 있는데, 대개 그의 본심은 신사의 위세를 빌려 과시하고자 하는 것인 듯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의 교활한 정상은 아마도 헤아리기 어려울 듯합니다. 다만 일에는 법도대로 할 것과 임시방편으로 할 것이 있고, 때에는 편리할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는 법으로, 전에 원역(員役)들을 차임해 보낸 전례에 의거해서 그 편에 보답해 주어 기미(羈?)하는 뜻을 보이고, 겸하여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쇄환해 오고, 이어 다시금 저들의 실정을 탐지하고자 하는 바,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이를 위하여 다시금 정부의 배신들을 신칙해서 좋은 쪽으로 별도로 시행하는 외에, 왜정(倭情)의 사리에 관계되는 것이기에 삼가 사유를 갖추어 주문합니다. 삼가 상주합니다.ꡓ/ 【영인본】 32 책 593 면/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어문학-문학(文學) / *역사-전사(前史) / *호구-이동(移動)/ [註 947]을묘년 : 1615 광해군 7년. ☞ / [註 948]만력 30년 : 1602 선조 35년. ☞ / [註 949]만력 25년 : 1597 선조 30년. ☞ / [註 950]기유년 : 1609 광해군 원년. ☞(www.history.go.kr 2007)

 

  황여일 : <울진군지>/ 제2장 시(詩) 제1절 시(詩)/ 6. 정(亭) 2) 월송정(越松亭)/ 해월 황여일 시 / 海月 黃汝一 詩/ 해객이 뗏목을 타고 월송정을 찾아오니 // 청룡등 가운데에 부용봉이 어렸구나 靑蛇袖裏映芙蓉/ 동으로 푸른 바다 은거울 펴놓은 듯 東臨碧海開銀鏡/ 북으로 신령한 산 옥봉을 들었구나 北見靈驚擧玉峯/ 옛 고을에 사람 드물어 학이 된 정영위가 울었고 古廓人稀曾弔鶴/ 모래톱에 늙은 솔은 모두 용이 된고로 平沙松老盡成龍/ 둘레가 꽉 찼으니 준마로도 지나기 어려움을 알겠구나 定知周滿難通駿// 그 누가 신라의 화랑 술랑을 홀로 여기에 머물게 하였는고 //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획책을 본떠서 模擬淸都煩帝畵/ 영경을 뚫어 열어 신봉을 시험하였는지 鑿開靈境試神鋒/ 겨울 나무 가지에 눈이 쌓여 까마귀도 자고 가기 어렵고 枝寒帶雪鴉難宿/ 깨끗한 모래사장에 서리마져 펴놓았으니 개미도 집을 짓지 못하네 沙淨鋪霜蟻不封/ 푸른 산색은 하늘에 닿아 구름 위로 뾰족 뾰족하고 黛色參千雲矗矗/ 서늘한 그늘은 땅을 깔아 녹음이 겹겹하다 淸陰滿地綠重重/ 바람이 불어와서 부는 퉁소 소리도 도우고 風來助亮吹簫響/ 달빛이 비추어 아릿다움을 더하니 눈내린 모습일세 月照增姸咀雪容/ 평읍을 하고 마고선녀가 봉도에 내려오니 平揖麻姑下蓬島// 멀리서 화조가 손님을 맞아 번거롭구나 // 정에 함께 오르니 땀이 흐르고 바야흐로 안계가 열리니 同登汗漫方恢眼/ 동해를 다 들여 마시어 가슴이 가득하네 盡吸滄溟始滿胸/ 칠성의 선유는 몽접1)을 빙자했고 七聖玄遊憑夢蝶/ 삼한의 중생을 보기엔 벌통 속의 벌떼인양 하여라 三韓群動視衙蜂/ 고요한 산수의 경치 선경 같은 속에서 천일을 보내니 烟霞物外消千日/ 인간 세상에서는 몇몇 해나 지났던고 風雨人間閱幾冬/ 봉가를 타고 올 때는 산이 적적했고 鳳駕來時山寂寂// 표륜2)을 타고 간 후에는 물이 넘실넘실 흐르더라 // 옥경동자는 어디에서 단약을 짓는고 玉童何處調丹軟/ 쇠솥 쓰던 당시에는 석농에다 구웠다는데 金鼎當時煮石濃/ 경장3) 빚어 한번 취해서 황홀한 기분이 되어 欲和瓊漿分一醉// 난새를 타고 돌아갔다 다시 또 와서 만나고 싶다 // 생전에 이 곳을 남겨 두고 간 것을 후회하여 前身應悔留玆地/ 북해 창오4)를 찾아 다니는 부질없음이여 /(daum 2010)

 

  황여일 : <울진군지>/ 제2장 시(詩) 제1절 시(詩)/ 9. 사원(寺院) 2) 수진사(修眞寺)/ 황여일 시 / 黃汝一 詩// 눈 덮인 산사에 오랜만에 돌아와도 頭白匡山愧晩歸/ 죽림은 옛날같이 사립짝 둘렀네 竹林依舊護仙扉/ 전일의 사정이야 속상한 말이지만 傷心欲說平時事/ 어찌 이 일을 주승의 잘못이겠소 奈此居僧一半非(daum 2010)

 

  황여일 : 남명학파(南冥學派) 관련(關聯) 인명록(人名錄)/ 이상필(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편찬, 제공(2005년 4월)/ 황여일 1556-1622 회원 해월헌 평해 평해 한강문인1585문과 해월집/ 黃汝一 1556-1622 會元 海月軒 平海 平海 寒岡門人1585文科 海月集(daum 2010)

 

  황여일 : 퇴계문인/ 김성일(金誠一, 鶴峯, 安東 金溪, 1538~1593) ▼ 본관(本貫) 의성(義城)/ → 이개립(李介立, 1546~1625, 省吾堂, 榮州 葛川, 醴泉 出生) 본관(本貫) 경주(慶州)/ → 황여일(黃汝一, 海月, 平海 沙洞, 1556~1622, 醴泉郡守) 본관(本貫) 평해(平海)/ → 김용(金涌, 雲川, 安東 川前, 1557~1620 醴泉郡守) 본관(本貫) 의성(義城)(daum 2010)

 

  황여일 :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황여일(黃汝一)/ #경상도(慶尙道)  평해(平海)/ *명계서원(明溪書院)/ 효종갑오건(孝宗甲午建)./ 제향. 황응청(호대해 현감 본평해). 황여일(호해월 참판 본평해)./ 祭享. 黃應淸(號大海 縣監 本平海). 黃汝一(號海月 參判 本平海).(daum 2010)

 

  황여일 : 평해황씨/ 매월헌(梅月軒) 황여일(黃汝一)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權慄)장군의 종사관이 되어 공을 세우고 참판에 이르렀다.(daum 2010)

 

  황여일(黃汝一) : (1556~1622) 본(本) 평해(平海) 자(字) 회원(會元) 호(號) 해월헌(海月軒) 海月集(daum 2010)

 

  황여일(黃汝一) : 본 평해(平海)/ ※ 포은선생문집(圃隱先生文集) (古 151.49 정35&#52289;)/ 鄭夢周 (1337∼1392) : 字 達可, 號 圃隱, 本貫 延日./ 木板本(重刊).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大正6(1917)./ 9卷3冊 : 年譜, 遺墨, 肖像 ; 26.1x19cm./ 四周雙邊. 半匡 ; 19.1x16cm.有界.10行19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이 책은 대략 9종이 간행본이 있다... ⑤영천 초각본(永川 初刻本) : 선조 17년(1584)에 유성룡이 왕명을 받아 교정하여 다시 편찬, 이듬해에 완성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그 판본이 타버렸기 때문에 선조 47년에 영천군수 황여일(黃汝一)이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여러 선비들의 협조를 얻어 영천 초각본을 대본으로 하여 다시 개간한 것이다.../ 刊記 ; 丁巳(1917)重刊./ 詩集重刊序 ; 崇禎己亥(1659)...宋時烈./ 詩卷序 ; 正統三年(1438)...權採, 萬曆乙酉(1585)...盧守愼, 永樂己丑(1409)...卞季良./ 肖像末 ; 萬曆丁未(1606)./ 重刊跋 ; 崇禎己元後四丙寅(1866)...柳厚祚./ 詩跋 ; 正統四年(1439)...宗誠./ 文集跋 ; 柳成龍./ 詩集跋 ; 萬曆丁未(1606)...曺好益.(daum 2010)

 

  황여일(黃汝一) : 본 평해(平海)/ 영주 문화유적 > 정각/ 풍월정(風月亭)/ 영풍군 장수면 갈산리 신동에 있으며 현감(縣監) 주윤숙(朱允淑)의 건립이다. 감사(監司) 배삼익(裵三益) 부사(府使) 황여일(黃汝一)의 시가 있으나 지금은 없다.(daum 2010)

 

  황여일 : 이개립(李介立)/ ...않았다. 1596년 산은현감(山隱縣監)에 임명되고, 다음해 정유재란 때 체찰사종사관(體察使從事官) 황여일(黃汝一)의 천거로 향병대장(鄕兵大將)이 되었으나 병마절도사 김경서(金景瑞)가 의병을 자기 휘하에 속하게 하지 않은 데에.../ http://www.shinjongwoo.co.kr(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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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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