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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81-5) : 이형욱(1603-1603.7.13) : 좌의정 정탁 대접 소홀로 파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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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욱 [記事] : 선조실록 86권/ 선조 30년( 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3월 12일 임인 2번째 기사/ 이대명의 일에 관해 특진관 김명원과 논의하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서 《주역(周易)》 관괘(觀卦)의 육사(六四)부터 계구(戒懼)까지 강하였다. 특진관(特進官) 김명원(金命元)이 아뢰기를, ꡒ신이 형장(刑長)3713) 으로서 수인(囚人)을 신문하였는데 포수(砲手) 이대명(李大鳴)이란 자는 금부의 수인 조한(趙漢)의 사간(事干)으로서 이미 승복을 하고 지금 다시 상언(上言)하여 신구(申救)하였으므로 앞뒤의 말이 다르다 하여 갇혔습니다. 신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ꡐ겨울철에 옷이 엷어 얼어 죽게 되었으니 어찌 자복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원래부터 그가 애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의 은혜를 졌으니 신리(伸理)하지 않을 수 없었다.ꡑ라고 답하였습니다. 두 차례의 형신을 가하였는데 지금 형신을 가한다면 죽을까 염려됩니다. 죽을 죄가 아닌데 형장(刑杖)밑에서 죽는다면 원통하고 억울할 것 같으므로 감히 진달합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조한이 살인(殺人)한 것이 시장(尸帳)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대명이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수상하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호응원(胡應元)에게 군문(軍門)의 수첩(手帖)이 자주 전달되고 있으니 필시 군문과 친한 자일 것이다. 도감(都監)이 후대하는 것이 좋겠다. 내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상장(上將)으로 대우 되지는 않으나 군문의 기밀을 모두 알고 있으니 심상한 당보(塘報)3714) 는 아닌 것 같다.ꡓ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ꡒ듣건대 절친하기 때문에 세세한 일까지 탐문한다고 합니다. 사람됨이 경박한 듯 한데도 오래 머문 지방에 피해를 끼치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제 이덕형(李德馨)을 보고서 《주역》과 《소미통감(少微通鑑)》을 구해 달라고 하더랍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그는 선비인가?ꡓ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ꡒ문필(文筆)이 있다는 것은 대략 알겠으나 선비인지는 모르겠습니다.ꡓ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오억령(吳億齡)이【성품이 조용하고 자상하며 단아하고 신중하여 시론(時論)에 간여하지 않았다. 경인년에 간철(奸澈)3715) 이 오억령으로 하여금 어명(御命)을 받들어 영남(嶺南)에 선유(宣諭)하게 한 것은 그 의도가 오억령으로 하여금 역모(逆謀)한다고 최영경(崔永慶)을 끌어넣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오억령이 시키는대로 봉행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대언(代言)3716) 이 온아(溫雅)하니 상께서도 그를 상당히 중히 여겼다.】 아뢰기를, ꡒ호응원의 사람됨은 자세히 모르지만 군문과 절친하다 하니 모든 일을 의지할 만합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기관(機關)이 매인 일을 사실 대로 보고하지 않는다면 말못할 지경이 될 것이다.ꡓ하였다. 김명원이 아뢰기를, ꡒ듣건대 그가 주홍(朱紅)을 구한다고 하는데 무엇에 쓰려는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우리 나라의 주홍이 품질이 좋은가?ꡓ하였다. 지사(知事) 윤근수(尹根壽)가 아뢰기를, ꡒ홍(紅)에 있어서 중국 것은 기름을 넣어 인주(印朱)로 사용하는 것인데 색깔이 누렇고 종이에 번지니 우리 나라의 아교로 배합한 것만 못합니다. 그리고 평조신(平調信)이 ꡐ추격해 오는 청정(淸正)의 군사의 수가 매우 많다.ꡑ고 하니 침범할 계획임을 알 만합니다. 듣건대 원균(元均)도 한산(閑山)으로 돌아가려 한다고 합니다. 근자에 적선(賊船) 2백 척이 좌․우도에 분산 정박하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듣건대 절영도(絶影島)에 머물러 있는 왜적이 없기 때문에 원균 등이 장차 진주(進住)하려 한다 합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절영도가 부산과 가까운데 주사(舟師)가 주둔하였다가 양면(兩面)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되면 어쩌겠는가?ꡓ하였다. 김명원이 아뢰기를, ꡒ무장선(無藏船)3717) 이 정박할 만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 오래 머물러 있을수 없습니다. 또 적선은 풍세(風勢)를 타고 나오고 우리는 풍세를 거슬러 적을 맞아야 하니 아무리 만전(萬全)의 형세가 있다 하더라도 적을 막기가 어려울 것입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중국군이 오기는 할 것인데 군량 조달이 계속되지 않으면 철수해 돌아가기 쉬울 것같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ꡓ하였다. 김명원이 아뢰기를, ꡒ1만 명을 접제(接濟)할 양곡의 마련도 매우 어렵습니다.ꡓ하고, 윤근수는 아뢰기를, ꡒ군대를 모으는 일로 외방이 소요(騷擾)하여 경농(耕農)을 폐하고 있으니, 신의 생각에는 하삼도(下三道)에 과거(科擧)를 설시(設施)하여 인재를 널리 뽑아서 초시(初試)에 합격(合格)한 자를 군대에 입속시키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ꡓ하고, 김명원은 아뢰기를, ꡒ아무리 과거를 보인다 하더라도 빠지고 가지 않는 데야 어쩌겠습니까?ꡓ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형욱(李馨郁), 검토관(檢討官) 신설(申渫)이 아뢰기를, ꡒ황정욱(黃廷彧)의 죄악에 대하여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하는 것을 상께서 통촉(洞燭)하지 못하시는 바가 아닌데도 윤허하지 않으시므로 많은 사람들의 분개가 더욱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적이 바야흐로 경역(境域)을 위협하고 있는데 도리어 적의 편을 든 자를 용서하시니 인심이 어찌 복종하겠습니까?ꡓ하고, 이어 이형욱이 다시 아뢰기를, ꡒ현재 국세(國勢)가 위급하니 군신 상하가 일심 협력해야 합니다. 상께서도 복수(復讐)와 힐융(詰戎)3718) 의 도를 극진히 하셔야 마땅한데, 근래에는 매양 겸손과 퇴탁(退托)으로 전교하셨습니다. 며칠 전의 비답(批答)에도 ꡐ나는 물러나야한다.ꡑ는 말씀이 계셨으니, 내셔서는 안 되는 이 말씀에 내외의 신민(臣民)이 누가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상께서는 모름지기 조종(祖宗)께서 부탁하신 중임(重任)과 신민이 앙대(仰戴)하는 정성을 살피시어 밤낮으로 극려(剋勵)하시어 구물(舊物)을 회복하신다면 일국이 인심을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ꡓ하고, 신설이 아뢰기를, ꡒ신들이 상차(上箚)하였으나 논한 말이 뜻과 통하지 않았으므로 이어 옳지 않으신 전교가 계셨으니, 원근의 인정이 누가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재차 상차하고자 하였으나 자주 입시할 수 있으므로 직접 상달하는 바입니다.ꡓ하고, 오억령이 아뢰기를, ꡒ중국 군대를 내보내는 황은(皇恩)에 대해 속히 사은을 해야할텐데 신이 멀리 있으니 갑자기 오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양향(糧餉)을 청하는 문제는 사은사(謝恩使)를 보낸 뒤에 이어 사신을 보내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또 유영길(柳永吉)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 하니, 별도로 다른 사람을 차출하는 것도 괜찮겠습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이조에 물어서 의논하여 처리하라.ꡓ하였다. 오억령이 아뢰기를, ꡒ자문(咨文)의 내용을 보건대 요동(遼東)․절강(浙江)의 군사 각각 3천 명이 먼저 나오는데 대병(大兵)이 나오기 전에는 심유경(沈惟敬)의 조즙(調?)3719) 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대병이 쉽게 나오지 않을 것 같으니 이 군사만으로는 왜적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청정의 생각이 어떠한 지는 송운(松雲)을 기다리지 않아도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해오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니, 적병이 모이기 전에 속히 대병을 요청하여 우리 군사와 협공(夾攻)해서 왜적을 무찌르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군문(軍門)에 보내는 이자(移咨)에도 이런 뜻을 기입(記入)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ꡓ하니, 상이 묻기를, ꡒ여러 사람의 생각은 어떠한가?ꡓ하자, 김명원이 아뢰기를, ꡒ듣건대 요동․절강의 군사를 대장이 거느리고 온다 하니,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ꡓ하고, 윤근수는 아뢰기를, ꡒ병부(兵部)의 자문에 함부로 전쟁하지 말라고 경계한 말이 있으니 대장이 어찌 진격하려 하겠습니까? 그들의 진격을 요청하려면 주문(奏聞)이 아니고서는 안 될 것입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주문은 번잡한 듯하니 듣건 안 듣던 간에 이자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ꡓ하고, 이어 이르기를, ꡒ양향(糧餉)을 은(銀)으로 줄 뿐 양곡으로 줄 의사는 없던가?ꡓ하니, 윤근수가 아뢰기를, ꡒ전일에 왔던 장관(將官)들도 모두 채가(菜價)의 은을 가지고 왔으나 숨겨둔 채 내놓지 않았으며, 중국 사신이 올 때에도 역시 은을 주어 우리 나라의 양향을 먹지 않게 하였으나 모두 사용(私用)으로 쓰고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양포정(楊布政)은 은을 가지고 온다면 내어 놓을 것 같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절색은자(折色銀子)를 병부(兵部)에서 우리 나라에 주려는 것인가?ꡓ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ꡒ병부에서는 반드시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그렇다면 미안하다. 그러나 이 문제를 가지고 스스로 병부에 변명할 것은 없다. 그런데 양포정(楊布政)은 어떠한 사람인가?ꡓ하니, 오억령이 아뢰기를, ꡒ왕래하는 사람들에게 들으니 모두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ꡓ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ꡒ신이 중국 조정에 들어갔을 적에 군문(軍門) 밖에서 바라만 보았고 서로 만나 담화(談話)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은 송 경략(宋經略)의 《동정기사(東征記事)》의 서문을 보니 그 글이 《문선(文選)》처럼 매우 좋았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양포정이 전쟁을 독려하기 위하여 남방(南方)으로 내려갈 것인가?ꡓ하니, 윤근수가 아뢰기를, ꡒ역관(譯官)의 말에 의하면 그가 대구(大丘)로 내려가고자 한다고 합니다.ꡓ하였다. 신설이 아뢰기를, ꡒ예조가 알성(謁聖)에 작헌례(酌獻禮)로 할 것을 입계하였는데, 왕세자로 하여금 대행(代行)토록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러나 동궁(東宮)께서는 아직 입학(入學)하지 않으셨으니 대행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환도(還都)하신 뒤에 알성하지 않는 것도 사리에 마땅하지 않고, 또 대제(大祭)가 임박하였습니다. 국가의 대사(大事)가 사전(祀典)에 있는데 아직도 면복(冕服)이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예(禮)에 의복(衣服)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감히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면복을 중국에서 무역(貿易)해 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에도 무역해 온 적이 있었습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면복을 무역할 수는 없다.ꡓ하였다. 오억령이 아뢰기를, ꡒ백성들의 원망이 매우 드높으니 그들의 곤급(困急)을 극력 구제하여야 됩니다. 국가가 부지(扶持)되는 것은 오직 인심을 굳게 맺는 데 달려있습니다. 전쟁이 여러 해 계속되어 요역(?役)이 과중한데, 지난번 세 책사(冊使)가 왔을 적에 지대(支待)와 공궤(供饋)를 모두 백성들에게서 취하여 닭 한 마리의 값이 쌀 다섯 말에 이르기까지 하였으니 다른 것도 알 만합니다. 게다가 성을 쌓기 위하여 군사를 뽑는 일로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없으니 농사일을 폐할 뿐만 아니라 유리(流離)하게 되어 심지어 거가 세족(巨家世族)들까지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령(不逞)한 수령(守令)이 간혹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자가 있어 침학이 매우 심하니, 외적(外賊)이 움직이기 전에 방본(邦本)3720) 이 먼저 동요될 것입니다. 근래 선유(宣諭)하는 교서가 외방(外方)으로 나아갔으나 한 장의 휴지(休紙)가 되었을 뿐이므로 저 백성들이 조정의 뜻을 알 수 없으니, 저들로 하여금 실질적인 혜택을 입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속히 어사(御史)를 보내어 필마(匹馬)로 내려가서 민간을 출입하며 그들의 질고(疾苦)를 물어 제거할 것은 제거하게 하여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에서 측은해 하는 뜻을 조금이나마 알게 해야 합니다.ꡓ하고, 신설이 아뢰기를, ꡒ암행 어사(暗行御史)는 한두 수령만을 잡을 뿐, 일도(一道)의 인심을 화합(和合)시킬 수 없으니, 특별히 어찰(御札)을 내리시어 덕음(德音)을 선포하게 하는 것이 가합니다.ꡓ하고, 이형욱이 아뢰기를, ꡒ친민(親民)의 관원으로는 수령만한 것이 없으니 그 선택을 신중히 하고 출척(黜陟)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이자(移咨)에 대한 말을 속히 비변사와 상의하라.ꡓ하였다./ 【영인본】 23 책 176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출판(出版) / *정론-간쟁(諫諍) / *재정-역(役) / *식생활(食生活) / *인물(人物)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금융(金融) /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군사(軍事) / *인사-선발(選拔)/ [註 3713]형장(刑長) : 형조의 장관. ☞ / [註 3714]당보(塘報) : 공문서(公文書)의 전송(傳送)을 맡은 사람. ☞ / [註 3715]간철(奸澈) : 정철(鄭澈)을 이름. ☞ / [註 3716]대언(代言) : 임금의 말을 대신 하는 것. ☞ / [註 3717]무장선(無藏船) : 짐을 싣지 않은 배. ☞ / [註 3718]힐융(詰戎) : 군사를 다스림. ☞ / [註 3719]조즙(調?) : 조발(調發)․ 즙병(?兵). ☞ / [註 3720]방본(邦本) : 백성. ☞(www.history.go.kr 2007)
이형욱 [記事] : 선조실록 86권/ 선조 30년( 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3월 15일 을사 3번째 기사/ 홍문관 응교 윤돈 등이 황정욱의 일을 아뢰다/ 홍문관 응교(應敎) 윤돈(尹暾), 부교리 이형욱(李馨郁), 수찬(修撰) 신설(申渫), 부수찬 정혹(鄭?) 등이 전에 아뢰었던 황정욱(黃廷彧)을 방면하라는 명을 속히 거둘 것으로 상차(上箚)하니, 답하였다. ꡒ그는 원훈 구신(元勳舊臣)이다. 죄가 없지는 않으나 실정이 아닌 죄명(罪名)을 씌워 이매(?魅)의 고장과 극리(棘籬)속에서 죽게 하고자 하니 너무 심하다 하겠다.ꡓ/ 【영인본】 23 책 179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정론-간쟁(諫諍)(www.history.go.kr 2007)
이형욱 [記事] : 선조실록 87권/ 선조 30년( 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4월 30일 경인 2번째 기사/ 사간 한준겸의 체차와 대사간 이하의 출사를 명하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신(臣) 윤담무(尹覃茂), 전한(典翰) 신 윤돈(尹暾), 부교리(副校理) 신 이형욱(李馨郁) 등이 아뢰기를, ꡒ삼가 아뢰건대 간관(諫官)이 모여 앉아 일을 논의하고자 할 적에 다른 관직을 겸대(兼帶)하라는 명이 있더라도 아직 본직에 있다면 그대로 함께 논의를 마치는 것이 진실로 무방합니다. 이미 의논이 결정되었다면 형편상 중지할 수 없는만큼 겸대한 것의 긴헐(緊歇)에 따라 와서 아뢰게 하는 것도 안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로 말한다면 사은 숙배하기 전에 대궐에 나아가는 것은 방편이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들은 바에 따라 논열(論列)하는 것은 언관(言官)의 책임인 것으로 사실과 어긋나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그르다고 하지 않는 것은 대간(臺諫)을 중하게 여겨서일 뿐만이 아니고 할 말을 다하게 하고자 해서입니다. 홍봉응은 이미 스스로 계하 단자(啓下單子)를 지운 죄가 있으니 ꡐ계(啓)ꡑ자를 위조한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데, 대관이 그의 용심이 무상한 것만을 들어 논하였으니 지적하여 진술한 것에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말을 구사하는 사이의 하찮은 일일 뿐입니다. 어찌 이것으로써 언관을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죄는 무거운데도 가볍게 논한다면 물의(物議)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일을 논함에 있어서는 조만(早晩)이 있는 법이므로 더욱 이것을 가지고 경솔히 언관을 체직해서는 안됩니다. 사간 한준겸(韓浚謙)을 체차하고 대사간 이하와 대사헌 노직(盧稷) 이하에게는 모두 출사(出仕)를 명하소서. 처분을 기다립니다.ꡓ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말하였다./ 【영인본】 23 책 212 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사법-재판(裁判) / *정론-간쟁(諫諍)(www.history.go.kr 2007)
이형욱 [記事] : 선조실록 87권/ 선조 30년( 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4월 30일 경인 6번째 기사/ 홍문관 부제학 윤담무 등이 대간의 간언을 배척한 왕의 태도를 경계하다/ 홍문관 부제학 윤담무(尹覃茂), 전한(典翰) 윤돈(尹暾), 부교리 신설(申渫)․이형욱(李馨郁) 등이 아뢰었다. ꡒ삼가 아뢰건대 어제 대간에게 답하신 전교를 보고 서로 의아하고 괴이쩍어하면서도 전하께서 말을 구사하는 즈음에 우연히 발언하신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정원이 아뢴 일에 내리신 성비(聖批)가 더욱 준엄한 것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그 일이 실로 범연한 일이 아님을 알고, 신들은 머리를 모으고 경황하여 미안함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국가가 대간을 설치한 것은 일에 따라 논하고 아는대로 말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하고자 함에서인 것입니다. 그 사이에 듣고 본 것이 자세하지 않고 사설(辭說)이 적당함을 잃은 데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용납하여 받아들이고 깊은 질책을 가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목(耳目)의 기탁(寄託)을 존중하고 충간(忠諫)의 길을 열자는 것입니다. 만약 한 마디 말이 맞지 않았다 하여 바로 허언이라고 지척하고 망령되다고 지척한다면 어찌 대간을 경시하여 언로(言路)를 막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임금의 도량은 잘 포용하는 것이 귀중하므로 범인이 진언(進言)하더라도 오히려 용납하여야 되는데, 더구나 말을 다할 책무를 주고서 도리어 그 말을 배척해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 언로를 넓히고 대간을 존경한 것이 지극하지 않다 할 수 없는데, 이같은 거조는 지난날에서 찾아보아도 진실로 본 적이 없습니다. 성명(聖明)의 세대에서 못 보았을 뿐 아니라 예전의 제왕에게서 상고하여 보더라도 또한 어디에 언관이 논열한 것을 허망하다며 물리친 적이 있습니까. 아, 국세가 위태로워 걱정이 조석에 박두하였으므로 시무(時務) 가운데 말할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비록 마음을 비우고 간언을 받아들이더라도 오히려 곧은 말의 논열을 듣기 어려울까 두려운데 더구나 따라서 준엄한 말로 물리쳐 말을 다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이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성세(盛世)의 복이겠습니까. 신들은 다함께 무상(無狀)한 몸으로 경악(經幄)을 더럽히고 있으면서 이미 티끌만큼도 성덕(聖德)을 보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내린 전교는 실로 국가의 흥망이 달려 있기 때문에 감히 침묵을 지킬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바입니다. 처분을 기다립니다.ꡓ/ 【영인본】 23 책 212 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치안(治安) / *정론(政論)(www.history.go.kr 2007)
이형욱 [記事] : 선조실록 88권/ 선조 30년( 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5월 29일 기미 1번째 기사/ 《주역》을 진강하고 김응남이 서계초를 올리고 군량․축성 문제 등을 의논하다/ 상이 아침에 별전으로 나아갔다. 영사(領事) 김응남(金應南), 지사(知事) 윤근수(尹根壽),【책 보기를 몹시 좋아하여 늙어도 더욱 도타왔으니 뜻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사람됨이 경솔하여 재상의 풍도가 없었다.】 특진관(特進官) 신점(申點)․강신(姜紳), 참찬관(參贊官) 이호민(李好閔), 집의(執義) 한준겸(韓浚謙),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 시독관(侍讀官) 이형욱(李馨郁), 검토관(檢討官) 정혹(鄭?), 기사관(記事官) 박승업(朴承業)․이지완(李志完)․정홍익(鄭弘翼)이 입시하였다. 상이 전날 강한 것을 다 읽자, 형욱이 《주역》의 ꡐ상(象)에 이르기를, 뇌전이 서합이니[象曰雷電??]ꡑ에서부터 ꡐ도리어 독을 입는다.[反毒之]ꡑ라는 부분까지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초효(初爻)에는 ꡐ발을 멸한다.[滅趾]ꡑ 하고, 육이효(六二爻)에는 ꡐ코를 멸한다.[滅鼻]ꡑ라 하고, 육삼효(六三爻)에는 ꡐ석육(?肉)ꡑ이라 한 것은 무엇인가?ꡓ하자, 응남이 아뢰기를, ꡒ발(趾)이 아래에 있기 때문에 초효에 비유한 것입니다.ꡓ하고, 정혹이 아뢰기를, ꡒꡐ코를 멸한다.ꡑ는 것은 깊이 들어간 뜻을 취한 것입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ꡐ발을 멸한다.ꡑ는 것은 발꿈치를 벤 것을 이르는가?ꡓ하자, 정혹이 아뢰기를, ꡒ발을 벤 것이 아니라, 발이 묻히는 것입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지(趾)는 발꿈치인가, 발가락인가?ꡓ하자, 형욱이 아뢰기를, ꡒ《운회(韻會)》에는 발[?]이라 하였고, 세속에서는 발뒤꿈치[?]라 하고 있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족쇄를 채워 발[趾]이 묻힌 것인가?ꡓ하자, 정혹이 아뢰기를, ꡒ그렇습니다.ꡓ하고, 호민이 아뢰기를, ꡒ견고하게 채운 것을 뜻합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육이(六二)는 유약한데, 형벌을 내리는 사람이 되어 양강(陽剛)한 사람을 다스리는 격이다.ꡓ하자, 호민이 아뢰기를, ꡒ유약함으로 강함을 다스리는 것은 어려울 듯하나, 중정(中正)하기 때문에 능히 다스리는 것입니다.ꡓ하고, 정혹이 아뢰기를, ꡒ유약함으로 강함을 다스리기 때문에 코를 멸함[沒鼻]에 이른 뒤에야 되는 것입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ꡒ이른 바 ꡐ코가 멸함에 이른다.ꡑ는 것은 유약함으로 강함을 다스리기 때문에 비록 다스린다 하여도 끝내는 코를 잃는 액운이 있단 말인가, 아니면 강한 자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깊이 다스리라는 뜻인가?ꡓ하자, 정혹이 아뢰기를, ꡒ뒤에 말씀하신 것이 옳습니다. 앞에 하신 말씀은 본의(本義)의 뜻이고, 뒤에 하신 말씀은 정전(程傳)의 뜻입니다.ꡓ하고, 호민이 아뢰기를, ꡒꡐ독을 만난다.[遇毒]ꡑ란 말이 있으니, 이는 모두 형벌을 내리는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이괘(離卦)를 혹은 이(離)로 쓰기도 하고 혹은 단지 이(?)로 쓰기도 하는데 같은 글자인가?ꡓ하자, 호민이 아뢰기를, ꡒ이(?)는 불[火]의 형태를 취하였고, 이(離)는 의리(義理)까지 함께 취하였는데, 그 실상은 같습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불이 이(?)에 속하는데, 문자가 생겨난 뒤에 이(?)로 쓴 것이다. 어찌 ꡐ걸렸다ꡑ는 뜻이 있겠는가.ꡓ하자, 호민이 아뢰기를, ꡒ이괘(離卦)에 ꡐ해와 달이 하늘에 걸렸다.ꡑ란 말이 있는데, 이 뜻을 쓴 것입니다.ꡓ하고, 응남이 아뢰기를, ꡒ불이란 겉은 밝고 안은 어두운데, 꿩[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곁에 추(?)를 덧붙인 것입니다.ꡓ하였다. 준겸이 나아가 아뢰기를, ꡒ전에 아뢴 허잠의 가자를 개정하도록 하소서.ꡓ하자, 상이 이르기를, ꡒ바꿀 수 없다.ꡓ하였다. 경립이 나아가 아뢰기를, ꡒ현재의 급선무는 사신 행차를 속히 통행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사신의 행차는 역로(驛路)에 달려 있습니다. 신이 전날 서로(西路)3842) 를 오가며 보니, 대로(大路)의 7개 역참(驛站)은 비록 잔파(殘破)되었다고 하지만 역말을 세울 수가 있었으며, 금교 찰방(金郊察訪)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역(驛)에서 30리나 떨어진 밖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명(使命)의 행차에는 반드시 쇄마(刷馬)를 내라고 하는 까닭에 지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만일 중국 군사들이 사용할 파발마는 민간에서 내게 하고, 사신의 행차에는 모두 역마[馹馬]를 타게 한다면 매우 편할 것입니다. 감사에게 하유하여 잘 조치하도록 하소서.ꡓ하자, 상이 이르기를, ꡒ해당 관서로 하여금 살펴서 하도록 하라.ꡓ하였다. 준겸이 또 아뢰기를, ꡒ파발마를 세우는 부역은 여러 도가 같습니다. 개성부(開城府)는 잔파된 곳으로서 6필을 세우고 있는데, 강원도만은 이 부역을 면제받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불공평함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강원도와 송경(松京)3843) 은 멀지 않으니, 강원도에도 3필을 세우도록 하여 부역을 공평하게 하소서.ꡓ하자, 상이 이르기를, ꡒ강원도에는 전혀 사는 백성이 없다. 그러나 해조로 하여금 의논해서 하도록 하라.ꡓ하였다. 경립이 또 아뢰기를, ꡒ박진(朴晉)의 사망은 중국 장수에게 구타를 당해서입니다. 죽은 뒤에 보니,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 합니다. 국가의 일로 죽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 비하여 더욱 참혹합니다. 지난번에 홍계남(洪季男)의 노모(老母)에게 음식물을 하사하도록 명하자, 중외(中外)가 모두 감격했었습니다. 박진이 홍계남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에게도 노모가 있으니 구휼하는 은전(恩典)이 내려져야 할 것입니다.ꡓ하자, 상이 이르기를, ꡒ그에게 노모가 있는가?ꡓ하니, 대답하기를, ꡒ지금 적성(積城)의 무덤 아래에 있습니다.ꡓ하였다.【임진 왜란에 여러 고을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도망쳐 숨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박진은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혼자서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대적을 막으려 하였으니, 그의 충성과 의기는 여러 장수들에 비하여 탁월한 것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ꡒ늠료(?料)를 주려고 하는가?ꡓ하자, 대답하기를, ꡒ홍계남의 예와 같이 늠료를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해사로 하여금 의논해서 하도록 하라.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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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