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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82-2) : 이충가(1603.7.13이후-1606.1.29) : 지진과 태풍을 겪은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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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가 [記事] : 선조실록 172권/ 선조 37년( 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3월 29일 기묘 2번째 기사/ 경상도 순검 어사 유간이 순검 결과를 보고하다/ 경상도 순검 어사(巡檢御史) 유간(柳澗)이 장계(狀啓)하였다. ꡒ경주 부윤(慶州府尹) 이시언(李時彦)은 몸가짐이 청렴하며 신실했고 일 처리를 간략(簡約)하게 하였는데, 더욱 군사 훈련에 유의하여 지성으로 조치하며 대비하였습니다. 안동 부사(安東府使) 홍이상(洪履祥)은 청렴하고 엄격하게 자기 몸을 단속하고 자상하게 정사를 베풀며 지성으로 무휼(撫恤)했으므로 민심이 사모하여 떠받들었고, 제대로 권장하여 제반 기술(技術)이 성취되었을 뿐더러 엄격하게 진관(鎭管)들을 단속하며 늘 계속해서 훈련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영천 군수(永川郡守) 이유홍(李惟弘)은 폐해를 끼치는 행정을 개혁하고 문교(文敎)를 장려하고 권면하는 한편 무비(武備)를 정돈하여 신칙해 가면서 엄격하게 아전들을 단속하고 인자하게 백성들을 돌보았습니다. 김해 부사(金海府使) 정기룡(鄭起龍)은 무비(武備)를 정비하고 잔약한 백성을 무휼하였으며 청빈하게 살아가면서도 신산(辛酸)한 고통을 달게 여겼습니다. 예천 군수(醴泉郡守) 이충가(李忠可)는 행정이 조리와 두서가 있어 온 지경이 편안하게 되었는데, 부임한 지 반 년 만에 온갖 폐해가 없어지고 모두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경주 판관(慶州判官) 민종경(閔宗慶)은 연소한 무부(武夫)로서 재예(才藝)가 출중한데, 본직(本職)을 맡으면서부터 훈련을 전적으로 주관하며 자신이 장관(將官)들에 솔선하여 지성으로 가르치고 훈련시켰습니다. 문경 현감(聞慶縣監) 윤호연(尹浩然)은 사람됨이 근간(勤幹)하여 조치를 잘하였는데,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가게 되자 백성들이 그의 선정(善政)을 새삼 사모하고 있습니다. 금산 첨사(金山僉使) 유승서(柳承瑞)는 돌보아 안정시키기를 부지런히 하고 수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서생포 첨사(西生浦僉使) 문희성(文希誠)은 빈 성에 와서 지키면서 정성을 다해 군사를 불러 모았을 뿐더러 청고(淸苦)하게 자신을 지켜 나가면서 번거롭지 않게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상의 사람들은 실로 가상히 여길 만하니 특별히 논상(論賞)하도록 하소서. 대구 판관(大邱判官) 조홍립(曺弘立)은 몸가짐이 근실하지 못하고 일 처리가 거칠고 야비했습니다. 안음 현감(安陰縣監) 김윤명(金允明)은 나이가 노쇠하고 성품이 졸렬하여 정사를 하리(下吏)들에게 맡겼을 뿐더러 군무(軍務)를 태만하게 방치하여 기계(器械)가 정예롭지 못했습니다. 제포 만호(薺浦萬戶) 위공준(魏公濬)은 사람됨이 거만한 데다가 외람한 짓이 많았습니다. 곡포 만호(曲浦萬戶) 장경현(張景賢)은 사람됨이 용렬하고 일 처리가 형편없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풍화(風化)에 힘써야 할 이때에 그대로 관직을 맡길 수 없으니, 모두 파출(罷黜)하도록 명하소서.ꡓ/ 【영인본】 24 책 597 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탄핵(彈劾)(www.history.go.kr 2007)
이충가 [記事] : 선조실록 195권/ 선조 39년( 1606 병오 / 명 만력(萬曆) 34년) 1월 29일 무술 1번째 기사/ 조사 접대시 채붕(彩棚)과 윤거 잡상 설치 정지, 예천 군수 이충가 탄핵 등에 관한 헌부의 상소문/ 사헌부가 아뢰기를, ꡒ조사가 나오면 반드시 채붕(彩棚)을 꾸며 영접하는 것은 곧 황명(皇命)을 공손히 맞이하자는 뜻이므로 의례상으로 보아도 당연히 설치하여야 됩니다. 때문에 이번에 윤거(輪車) 잡상(雜像)을 설치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조처인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가 변란을 겪은 뒤로 백물(百物)이 잔폐되고 군생(群生)이 곤췌하여 접대에 따른 물품 공급도 오히려 넉넉지 못할까 두려운데 장차 무슨 재력으로 이러한 공사를 벌일 수 있겠습니까. 시세를 참작하여 보아도 결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정지시키소서. 예천 군수(醴泉郡守) 이충가(李忠可)는 성품이 본시 외람되어 징렴(徵斂)이 끝이 없어서 백성들이 피해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루도 관에 있을 수 없으니 파직시키소서.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윤허한다.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라. 그것은 황명을 흠영(欽迎)하는 예전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것이므로 윤허하지 않는다.ꡓ하였다./ 【영인본】 25 책 157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외교-명(明) / *재정(財政)(www.history.go.kr 2007)
이충가 [記事] : 선조수정실록 17권/ 선조 16년( 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3월 1일 계미 1번째 기사/ 비변사 당상들에게 인재를 추천하게 하였고, 부제학 유성룡이 해직하고 귀향하다/ 상이 비변사 당상들에게 각각 인재를 추천하게 하였다. 영상 박순(朴淳)은 ꡐ성혼(成渾)은 재주와 덕행이 모두 넉넉하고, 정개청(鄭介淸)은 재주와 학식이 밝고 통달했으며, 김여물(金汝?)․최경회(崔慶會)․서익(徐益)은 문무(文武)의 재능이 있다.ꡑ고 추천했으며, 좌상 김귀영(金貴榮)은 유장(儒將) 김수(金?)와 무장 양대수(楊大樹)를 추천했으며,【양대수는 교활하고 재능이 없었다.】 정지연(鄭之衍)은 ꡐ성혼(成渾)은 재주와 학식이 탁월하고 유조인(柳祖?)은 충효의 대절(大節)이 있으며【유조인은 행실이 독실한 선비였으나 학문이 불순했다.】 성윤해(成允諧)는 은거하면서 덕을 쌓았다.ꡑ고 추천하였다. 이품(二品) 재신(宰臣) 정유길(鄭惟吉)은 윤선각(尹先覺)과【김수와 윤선각은 모두 당시에 청렴하고 고귀하다는 인망이 있었으나 재능이 없었으므로 끝내 곤기(?寄)240) 에 실패했다.】 무장 서득운(徐得運)을 추천했으며, 정종영(鄭宗榮)은 포의(布衣) 이충가(李忠可)를【용렬하고 비루한 사람이었는데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추천했다. 이이(李珥)는 ꡐ성혼은 경륜(經綸)을 맡을 만하고, 성윤해(成允諧)는 일민(逸民)으로서 재능과 학덕이 있는 자이고, 정구(鄭逑)는 영특한 재주가 있다.ꡑ고 추천했으며, 유전(柳?)․심수경(沈守慶)은 유극량(柳克良)을【개성부의 빈한하고 미천한 사람으로 무과에 급제했다. 청렴 결백하고 정직하였으며 보장(堡將)으로 있을 때부터 명성이 드러나 벼슬이 수사(水使)에 이르렀다.】 추천했다. 강섬(姜暹)은 박종남(朴宗男)과 유극량(劉克良)을 추천했으며, 이준민(李俊民)은 성윤해(成允諧)․서익(徐益)․김여물을【문무(文武)의 재능이 있으며 기개가 뛰어났으나 호탕하여 행동을 가다듬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현직(顯職)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추천했다. 곽흘(郭屹)은 유극량(劉克良)․이요(李?)․이즙(李?)․김응상(金應祥)을 추천했으며,【모두 무인으로 명성이 없었는데, 유극량만 유명하였다.】 박호원(朴好元)은 유극량․민사준(閔思俊)․박지지(朴止知)를 추천했다.【모두 무인이다.】 홍연(洪淵)은 김외천(金畏天)을【무인으로서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다.】 추천했으며, 김명원(金命元)은 윤구수(尹龜壽)․이지시(李之詩)를【무인이다.】 추천했다. 유홍(兪泓)․이전(李?)은 성혼을 추천했으며, 최원(崔遠)은 유극량을 추천했다.【이때에 시대가 태평하고 무사했으므로 문무(文武)의 신하들이 드러나게 공로를 세운 일이 없었다. 그러나 추천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 후에 명성과 걸맞지 않았는데, 오직 박순이 추천한 다섯 사람만은 명망이 쇠하지 아니하였다.】 부제학 유성룡(柳成龍)이 해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성룡은 사론(士論)이 갈라지는 것을 보고 조정에 있는 것이 내키지 아니하여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구실로 물러갔다./ 【영인본】 25 책 511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註 240]곤기(?寄) : 장수의 임무. ☞(www.history.go.kr 2007)
이충가 : 正月/ 상위서지: 죽계일기(竹溪日記) > 竹溪日記卷之八 > 雨午萬曆三十四年宣祖三十九年上/ 저자: 趙應祿/ 분류: 고도서 > 사부(史部) > 잡사류(雜史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 총서/ 竹溪日記卷之八/ 雨午萬曆三十四年宣祖三十九年上/ 正月/ 二十九日 戊戌/ 府啓醴泉郡守 李忠可性本貪濫民受其害請罷又啓曰迎詔時彩棚停止之意 十餘字缺 ○暗行御史 李廷? 沈? 成俊耈 尹孝先 李克信 朴楗 朴顔賢出去○李夢良 李思孝 金仁慶來見//
이충가 : 三月/ 상위서지: 계암일록 상(溪巖日錄 上) > 溪巖日錄 一 > 丙午/ 저자: 金?/ 분류: 고도서 > 사부(史部) > 잡사류(雜史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 총서/ 溪巖日錄 一/ 丙午/ 三月/ 一日 : 晴而風, 監司 柳永詢先塋, 在榮禮兩邑, 永詢作齊舍伐石立碑, 又爲其族作室, 前月晦前, 永詢巡上道掃墓, 所過多不法, 至榮川宴龜鶴亭, 大張妓樂, 至夜船遊, 屯軍兩岸, 列炬?百, 每人預設別炬, 遞燒之至鷄鳴不縊一柄, 光明如盡, 暗行御史 朴楗?來, 或相値而?不畏憚, 方其入醴泉也, 諸耳少儒生及武學生輩,/ <상 51>/ 軍校?辱儒生 / 民間騷擾 / 貪汚之事/ ?從壁後穴窓紙觀光, 永詢察之大恕, 杖?三人, 至禮安留連繫日, 荒於酒色, 自禮安入安東, 軍校?辱儒生, 儒生齊進呈?, 永詢立之于庭, 招軍校廳上, 將有恕色, 栢巖令公, 麾而令出, 諸人無如之何矣, ?在壬寅春, 監司 李時發入禮安, 儒生亦被辱于軍官, 列人言之, 時發亦甚爲軍官地, 而諸士爭憤, 不得已杖軍官, 今以永詢觀之, 亦可謂此善於彼矣. ○時以天使供給, 民間騷擾, 守令緣此侵漁, 人不聊生, 自上特遣御史, 嶺南則朴楗, 膺命, 而?無攬?澄淸之志, 如成汝?之不治, 而與之有分, 終得保存, 又凡守令之無狀者, 亦皆無貶, 柳永詢之恣行, 亦以此也./ 十八日 : 陰, 午後朴御史楗, 來以志家要見, 與吾有世分者也, ?見之, 御史因言右兵使 左水使下道守令及醴泉守 李忠可貪汚之事曰, 豈有甚於忠可者乎, 吾輩云, 御史所及知者, 忠可故, 以忠可爲甚, 若周行地, 悉察之, 則亦不下於忠可, 而剩有甚/ <상 52>/ 焉者, 亦豈無有哉, 盖指成汝?也, 御史亦知榮豊奉之多濫, 而自云與汝?有世分, 何以處之也.//
이충가 : 正月/ 상위서지: 매원일기(梅園日記) > 梅園日記 四 > 庚戌/ 저자: 金光繼/ 분류: 고도서 > 사부(史部) > 잡사류(雜史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 총서/ 梅園日記 四/ 庚戌/ 正月/ 二十八日/ 聞安陰爲柳慶童所訴, 土主偏聽其言, 荷校入獄者于今二十餘日, 社慰座首叔侍, 見南公顯卿氏及纘仲兄․而實, 又聞安陰嘔血獄中, 心驚不已, 與南公馳入慰之, 流血染袖, 又流于地, 見之不勝慘然, 諸人勸我, 入見土主, 喩以此意, 不得已入見, 初不肯聽, 後乃稍鮮, 見朴好禮․李言恬及金?, 李公乃前醴泉郡守 李忠可之子也, 來獄則南公已去矣, 與纘仲兄父子還家, 光岳自聞韶來矣, 南公來宿于余家, 夜話./ 二十九日 : 爲南公炊飯飼之, 以健自龍宮來, 午後蘆山來見, 與光岳會奈城叔侍于松石臺下, 做話, 日暮乃散./ <상 188>/ 往宿于雲岩聽僧話 / 行時祀//
이충가 : 이제가(李悌可)의 본관은 전의(全義)입니다/ ...전의(全義)입니다. 이제가(李悌可)는 문과 급제하여 양주목사를 지낸 이경희(李慶禧)의 셋째 아들이며, 이충가(李忠可)의 아우이며, 북병사(北兵使) 이언척(李言?)의 숙부(叔父)입니다. 이는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http://.../ http://people.aks.ac.kr(daum 2010)
이충가 : Untitled Document/ ...알 수 있다. 이 묘비는 숙종 42년(1716년)에 세운 것으로 후손인 이국휴(李國休)가 찬하였다. (7) 이충가(李忠可) 묘 ▷ 위치 안산시 신길동 뱅골마을. ▷ 구조 이 묘역에는 3기의 전의(全義) 이씨(李氏) 무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http://www.ijungho.com/ 이충가(李忠可) 묘 ▷ 위치 : 안산시 신길동 뱅골마을. ▷ 구조 : 이 묘역에는 3기의 전의(全義) 이씨(李氏) 무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충가의 묘소는 가장 동쪽에 있다. 묘소의 석물로는 묘갈·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이 있다. 봉분의 크기는 직경 4m, 높이 1m 정도이며 비신은 100×47×16cm, 기대석은 70×46×15cm이다. 상석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그 규모는 125×80×33cm이며, 향로석은 24×22×22cm이다. 상석 좌우에 망주석이 있는데 높이는 135cm이다. 전체적인 무덤의 방향은 북동`-남서향이다. ▷ 역사 및 유래 : 묘갈은 현종 10년(1669년)에 건립되었으며 전면에는 “通訓大夫行軍資監副正李公之墓淑人完山崔氏之墓”라는 기록이 있어 이충가와 부인 완산 최씨의 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daum 2010)
이충가 : 애국 3대 묘소가 정부 주택사업에 사장될 위기/ ...의 친필휘호와 은장의 하사품을 받아 세종대왕의 애국애민의 도덕정치를 실현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충가(李忠可)는 이경희의 아들로 통훈대부 군자감부정을 지낸 인물이며 임진왜란 당시 훈련도정인 동생 효가(孝可)와 제가(悌.../ http://ansansm.co.kr(daum 2010)
이충가 : 신길동 소재 전의이씨 3대 묘 향토유적 지정/ ...1562년 문과에 급제해 도승지 벼슬을 얻었고 임진왜란 당시 왜구에 대항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섰으며 그의 아들 이충가(李忠可)와 이충가의 아들 이언항(李言恒)도 임진왜란에 참여해 몸을 바친 것으로 알려졌다. 장기준 기자/ http://ansansm.co.kr(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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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