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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84-1:김용(1606.8.16-1607.10.5)
작성자장병창 @ 2013.02.23 06:36:25

   예천고을원(84-1) :김용(1606.8.16-1607.10.5) : 정직한 마음을 가진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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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金涌, 1557~1620)은 1606년(선조 39) 8월 16일 홍치상 군수 후임으로 부임하여 1607년(선조 40) 10월 5일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안동 사람,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본관은 의성, 자여도찰방 수일(守一)의 아들, 진사 철의 형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학문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1590년(선조 23)에 증광 문과에 병과 5위로 급제, 승문원 정자를 거쳐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가 그 해 겨울에 당직청에 있다가 병으로 사임하였다.

  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 항쟁하였다. 이듬해에 한림원에 들어가 훌륭한 역사가란 칭찬을 받았다.

  겨울에 왕이 피난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봉교에서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되고 얼마 후 이조 좌랑으로 옮겼고, 정언으로서 세자시강원 사서를 겸했다가 헌납으로 승진되었고,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으로 전직되었다. 얼마 후 지평에서 이조 좌랑이 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사간, 사성, 집의, 선산 군수, 예천 군수, 상주 목사, 홍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9년(광해군 1) 태상시 정으로 편수관이 되어 「선조실록」 수찬에 참여했다.

  영의정 기자헌이 말하기를 ꡒ선조 때의 일을 명백하게 알기로는 이 사람(김용)보다 더 나은 이가 없다ꡓ라고 하였다. 태상시 정에서 병조 참의에 오르니 서반에 있은 지가 3년이었다. 여주 목사에 이르러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저서는 「운천집」이 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2-11-08 11:24:46)

 

김용(金涌) : 1606년(선조 39) 8월 16일에 부임, 1607년(선조 40) 10월 5일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1557(명종 12)-1620(광해군 12), 안동 출신,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본관은 의성,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 수일(守一)의 아들, 철(澈, 1596生, 字心源, 進士, 內資寺正 克一의 養子)의 형이다. 숙부 학봉(鶴峯) 성일(誠一)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특히 사랑을 받았다고 하고, 뒤에 월천(月川) 조목(趙穆)에게 배웠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학문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1590년(선조 23)에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 5위로 급제, 이듬해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가 그 해 겨울에 당직청(當職廳)에 있다가 천연두(天然痘) 발병(發病)으로 매우 위중하여 생기(生氣)를 잃게 되자, 왕이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위문하고, 또 이르기를, "비록 병이 들어도 천품이 두터운 자는 요사(夭死)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는데, 과연 치료가 되어 집에 갔다가 돌아오기 전에 왜구의 침략이 급하여 왕이 서도(西道)로 파천(播遷)하니, 이 때가 바로 1592년(선조 25)으로 왜적이 잇달아 삼경(三京)을 함락하여 길이 통하지 않게 되자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 항쟁하다가 다음해 가을에야 비로소 이듬해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할 수 있어서 임금을 호종했다. 다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훌륭한 사가(史家)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 때에는 명(明) 나라 신종(神宗) 황제가 요좌(遼左)의 군사를 동원하여 구원하러 와서 계속 승리하였는데, 고양(高陽)에 이르러 경기(輕騎)로 왜적을 대항하다가 크게 패하자, 이여송 제독(李如松提督)은 달아나 화를 면하였고, 드디어 연화(連和)하여 군중(軍中)에 영(令)을 내려 교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겨울에 왕이 환도(還都)하자, 봉교(奉敎)에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고 얼마 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옮겼고, 정언(正言)으로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겸했다가, 헌납(獻納)으로 승진되었고, 부수찬 겸 경연 검토관(副修撰兼經筵檢討官)으로 전직되었다. 얼마 후 지평(持平)에서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가 정랑(正郞)에 승진되니, 이에 당시의 중견이 되었다. 학사(學士) 조정립(趙正立)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처음 벼슬한 이래 청직(淸直)한 마음을 가진 이로는, 오직 정경임(鄭景任), 김도원(金道源, 金涌) 두 사람을 보았을 뿐이다." 라고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사간(司諫)에서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옮겼다가, 홍문관 집의(執義)가 되어서는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하였다. 왜적이 해상에 주둔하여 재거(再擧)를 선언하므로, 명 나라 황제는 또 남북의 관병 10여 만을 동원하여 왜구를 정벌하게 되었다. 이 때에 좌상(左相) 이원익(李元翼)이 제도 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가 되고, 그가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는데, 매사를 계획할 적마다 강력한 보좌(補佐)라는 칭찬을 받았다. 바야흐로 대병(大兵)이 이르러 군량이 시급하게 되자, 그가 교리(校理)로서 나아가 독운 어사(督運御史)가 되었는데, 이 때에 유성룡(柳成龍)이 영상(領相)의 임명을 받았다. 위난한 즈음에 죽기로써 소임을 수행하였으므로 왕도 그를 의지하고 믿어서 매우 중하게 여겼는데, 소인(小人)들이 틈을 타고 밤낮으로 온갖 계책을 써서 저해하여, 왕의 마음을 노엽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유성룡이 직위(1598)에서 물러나니, 조정에 있던 선량들이 하나하나 쫓겨가게 되었고, 그도 쫓겨나는 화를 당하여 조정에 용납될 수 없었으므로, 혹은 산직(散職)에 버려지고 혹은 외직(外職)에 전보되어, 선산 군수(善山郡守), 예천 군수(醴泉 郡守), 상주 목사(尙州牧使), 홍주 목사(洪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전란에 즈음하여 안팎이 탕진하고 치도(治道)가 크게 무너진 때였으므로 그는 가는 곳마다 백성 보호와 학교 재건과 풍속 개선에 힘을 썼지만 관직에 오래 있을 수 없었고, 오래라야 1-2년에 지나지 못했다. 홍주(洪州)에 있은 지 1년만에 어머니의 나이가 높아 부모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는데, 그 다음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니, 상중(喪中)에 하는 절차를 늙었다 하여 조금도 변동하지 않았고, 상복을 벗은 다음에는 1609년(광해군 1)에 태상시 정(太常寺正)으로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수찬(修撰)에 참여했다. 소인들이 정권을 잡은 터이므로 시비가 크게 엇갈렸다. 그 때마다 그는 얼굴빛을 엄정히 하고 하나하나 바로 잡아 나가니, 영상(領相) 기자헌(奇自獻)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조 때의 일을 명백하게 알기로는 이 사람보다 더 나은 이가 없다." 라고 하였다. 부평(富平)에 의옥사건(疑獄事件)이 있었는데, 오래도록 해결을 못하자, 본도(本道)가 계문(啓問)하였으므로, 조정에서 특별히 사람을 택하여 파견케 되었는데, 그가 명을 받고 가서 원고와 피고의 말을 듣고 사실과 허위를 조사한 다음 그 자리에서 판결을 하니, 인심이 크게 기뻐하면서, "인재(人材)로군, 인재야." 라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상시 정(太常寺正)에서 규례(規例)에 따라 1615년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의에 오르니, 서반(西班)에 있은 지가 3년이었다. 이듬해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이르러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저술과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저서는 <운천집(雲川集)>, <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 등이 있다.(미수기언 기언별집 구묘문, 韓國人의 姓譜, 司馬榜目)

 

김용(金涌) : 1557(명종 12)-1620(광해군 12), 1606년(선조 39)에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하여 1607년(선조 40)에 이임하였다. 안동 출신,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본관은 의성, 찰방(察訪) 수일(守一)의 아들, 어려서부터 재주와 학문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1590년(선조 23)에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가 그 해 겨울에 당직청(當職廳)에 있다가 천연두(天然痘) 발병(發病)으로 매우 위중하여 생기(生氣)를 잃게 되자, 왕이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위문하고, 또 이르기를, "비록 병이 들어도 천품이 두터운 자는 요사(夭死)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는데, 과연 치료가 되어 집에 갔다가 돌아오기 전에 왜구의 침략이 급하여 왕이 서도(西道)로 파천(播遷)하니, 이 때가 바로 1592년(선조 25)으로 왜적이 잇달아 삼경(三京)을 함락하여 길이 통하지 않게 되자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 항쟁하다가 다음해 가을에야 비로소 이듬해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할 수 있어서 다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훌륭한 사가(史家)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 때에는 명(明) 나라 신종(神宗) 황제가 요좌(遼左)의 군사를 동원하여 구원하러 와서 계속 승리하였는데, 고양(高陽)에 이르러 경기(輕騎)로 왜적을 대항하다가 크게 패하자,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은 달아나 화를 면하였고, 드디어 연화(連和)하여 군중(軍中)에 영(令)을 내려 교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겨울에 왕이 환도(還都)하자, 봉교(奉敎)에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고 얼마 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옮겼고, 정언(正言)으로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겸했다가, 헌납(獻納)으로 승진되었고, 부수찬겸 경연 검토관(副修撰兼經筵檢討官)으로 전직되었다. 얼마 후 지평(持平)에서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가 정랑(正郞)에 승진되니, 이에 당시의 중견이 되었다. 학사(學士) 조정립(趙正立)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처음 벼슬한 이래 청직(淸直)한 마음을 가진 이로는, 오직 정경임(鄭景任), 김도원(金道源, 金涌) 두 사람을 보았을 뿐이다." 라고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사간(司諫)에서 사성(司成)으로 옮겼다가, 집의(執義)가 되어서는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하였다. 왜적이 해상에 주둔하여 재거(再擧)를 선언하므로, 명 나라 황제는 또 남북의 관병 10여 만을 동원하여 왜구를 정벌하게 되었다. 이 때에 좌상 이원익(左相李元翼)이 제도 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가 되고, 그가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는데, 매사를 계획할 적마다 강력한 보좌(補佐)라는 칭찬을 받았다. 바야흐로 대병(大兵)이 이르러 군량이 시급하게 되자, 그가 교리(校理)로서 나아가 독운 어사(督運御史)가 되었는데, 이 때에 유성룡(柳成龍)이 영상(領相)의 임명을 받았다. 위난한 즈음에 죽기로써 소임을 수행하였으므로 왕도 그를 의지하고 믿어서 매우 중하게 여겼는데, 소인(小人)들이 틈을 타고 밤낮으로 온갖 계책을 써서 저해하여, 왕의 마음을 노엽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유성룡이 직위(1598)에서 물러나니, 조정에 있던 선량들이 하나하나 쫓겨가게 되었고, 그도 쫓겨나는 화를 당하여 조정에 용납될 수 없었으므로, 혹은 산직(散職)에 버려지고 혹은 외직(外職)에 전보되어, 선산 군수(善山郡守), 예천 군수(醴泉郡守), 상주 목사(尙州牧使), 홍주 목사(洪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전란에 즈음하여 안팎이 탕진하고 치도(治道)가 크게 무너진 때였으므로 그는 가는 곳마다 백성 보호와 학교 재건과 풍속 개선에 힘을 썼지만 관직에 오래 있을 수 없었고, 오래라야 1-2년에 지나지 못했다. 홍주(洪州)에 있은 지 1년만에 어머니의 나이가 높아 부모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는데, 그 다음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니, 상중(喪中)에 하는 절차를 늙었다 하여 조금도 변동하지 않았고, 상복을 벗은 다음에는 1609년에 태상시 정(太常寺正)으로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수찬(修撰)에 참여했다. 소인들이 정권을 잡은 터이므로 시비가 크게 엇갈렸다. 그 때마다 그는 얼굴빛을 엄정히 하고 하나하나 바로 잡아 나가니, 영상 기자헌(領相奇自獻)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조 때의 일을 명백하게 알기로는 이 사람보다 더 나은 이가 없다." 라고 하였다. 부평(富平)에 의옥사건(疑獄事件)이 있었는데, 오래도록 해결을 못하자, 본도(本道)가 계문(啓問)하였으므로, 조정에서 특별히 사람을 택하여 파견케 되었는데, 그가 명을 받고 가서 원고와 피고의 말을 듣고 사실과 허위를 조사한 다음 그 자리에서 판결을 하니, 인심이 크게 기뻐하면서, "인재(人材)로군, 인재야." 라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상시 정(太常寺正)에서 규례(規例)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니, 서반(西班)에 있은 지가 3년이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이르러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저서는 <운천집(雲川集)>이 있다(미수기언 기언별집 구묘문, 韓國人의 姓譜). [인터넷 等] : 1590년(선조 23)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정자를 거쳐 검열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했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 항쟁하다가 이듬해 행재소에 가서 이조 좌랑, 교리를 역임하고 독운 어사, 체찰사 종사관 등을 지냈다. 1598년(선조 31) 영의정 유성룡이 모함을 받아 삭직되자 함께 배척을 받아 산관(散官) 또는 선산 부사, 예천 군수 등 외직으로 전전하다가 태상시 정(1609)으로 편수관이 되어 <선조실록>의 수찬에 참여했다. 여주 목사에 이르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저서로 <운천집>이 있다.(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서울600年史, seoul600.vicitseoul.net 2003)

 

  김용(金涌) : 예천 군수이다. 1557(명종 12)~1620(광해군 12), 조선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찰방 수일(守一)의 아들이며, 김성일(金誠一)의 조카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 검열로 옮겼다가 천연두가 발병하여 사직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예문관의 검열․봉교, 성균관의 전적 등을 지냈다. 이어 정언․헌납․부수찬․지평을 거쳐 이조 정랑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제도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수행하여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교리에 재임 중 독운어사(督運御史)로 나가 군량미 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이루어져 후원하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서인에 의하여 축출되자, 탄핵을 받아 선산 부사로 체직되었다. 이 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문교에 힘썼다. 이후 계속되는 대간의 탄핵을 받으며 경직과 외직을 전전하였는데, 일시 제용감 정․필선(弼善)․집의 등 경직에 머물다가 예천 군수․상주 목사․홍주 목사 등의 외직을 지내면서 오직 보민(保民)과 흥학(興學)에 힘썼다. 1609년 봉상시 정으로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여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 참의를 지내고, 1616년에 여주 목사로 나갔는데, 이 때 나이 이미 60세였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므로 맏아들의 죽음을 구실로 향리로 돌아왔다가 4년 뒤에 죽었다. 안동 덕봉서원(德峯書院)․묵계서원(黙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운천집 雲川集》․《운천호종일기 雲川扈從日記》(보물 제484호) 등이 있다.(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張東翼(韓國學中央硏究院))

 

  김용 : 예천 군수이다. 운천선생문집(雲川先生文集)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한 김용(金涌 ; 1557~-1620)의 시문집이다. 이 문집은 1694년(숙종 20)에 간행된 것이다. 김용의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본관은 의성이다.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사퇴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 항쟁하다가 이듬해 행재소에 가서 이조 좌랑․교리를 역임하고 독운어사(督運御史)․체찰사 종사관(體察使從事官) 등을 지냈다. 1598년 영의정 류성룡이 모함을 받아 삭직되자 함께 배척을 받아 산관(散官)․선산 부사(善山府使)․예천 군수(醴泉郡守) 등 외직(外職)으로 전전하다가 1609년에 태상시 정(太常寺正)으로 편수관이 되어『선조실록』 수찬에 참여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이르러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임진왜란의 기사가 많아 임진왜란 사료로 참고가 된다. (http://www.koreastudy.or.kr 2005)

 

  김용 [記事] : 한국문집총간(059_332a) 오봉집(五峯集, 1636)에 실린 이호민(李好閔)의 예천군수(1606-1607) 김용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五峯先生集卷之一/ 詩○七言絶句/ 白雲亭八景。爲金醴泉涌賦之。/ 白雲亭裏思親夢。半夜騷騷有物搖。知是長林一?雨。却和親淚送蕭蕭。右長林微雨/ 平江霽月一般寒。月上江低接得難。誰識平江自淸淨。能留明月印團團。右平江霽月/ 昔定高堂笑語遲。每逢烽火照如期。祇今烽至親何在。獨倚蘭?淚萬絲。右藥山夕烽/ 黃昏泣送??日。到曉岐山的歷回。錯擬吾親如日至。佳城依舊白楊哀。右岐峯曉日/ 東郊田土自先曾。一一吾親手?仍。今歲年?禾稼熟。宗宮春酒及時登。右東郊稼穡/ 北遷行旅何方客。朝去?回不作遙。??王孫一歸去。年年芳草綠??。右北遷行旅/ 平生恨乏魯陽戈。夕照如飛奈爾何。惟願遙岑高不極。莫敎羲馭度山阿。右遙岑返照/ 春回別浦簇游魚。曾是王祥叩出餘。施?如今差易得。得來何處奉親居。右別浦游魚”이다.(www.minchu.or.kr 2006)

 

  김용 [記事] : 국학원전 해사록(海?錄, 1607)에 실린 경섬(慶暹)의 예천군수(1606-1607) 도원 김용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慶七松海?錄 七月大 十二日壬寅/ 해사록(海?錄) 하/ 7월/ 12일(임인)/ 맑음. 아침에 상주를 떠나 함창현(咸昌縣)에서 점심을 먹고 유곡역(幽谷驛)에서 잠시 쉬었다. 저녁에 문경현(聞慶縣)에 도착하였다. 병정관(?定官) 예천 군수(醴泉郡守) 김도원(金道源)ㆍ신임 상주 목사 김이경(金而敬) 영공 등과 모여 술자리를 벌였다가 밤이 되어 파하였다.” 이다.(www.minchu.or.kr 2006)

 

  김용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4 刊) 해사록(海?錄 下)에 실린 경섬(慶暹)의 예천군수(1616-1607) 도원 김용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 7월 큼/ 12일(임인)/ 맑음. 아침에 상주를 떠나 함창현(咸昌縣)에서 점심을 먹고 유곡역(幽谷驛)에서 잠시 쉬었다. 저녁에 문경현(聞慶縣)에 도착하였다. 병정관(?定官) 예천 군수(醴泉郡守) 김도원(金道源, 道源은 金涌의 號)ㆍ신임 상주 목사 김이경(金而敬) 영공 등과 모여 술자리를 벌였다가 밤이 되어 파하였다.” 이다.

 

  김용 [記事] : 한국문집총간(063_109a) 운천집(雲川集, 1694)에 실린 작자 미상(未詳)의 예천군수(1606-1607) 운천 김용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雲川先生年譜/ ...先生與本府伯金柏巖。合謀重建。先生及二公幹其事。三十四年丙午。先生五十歲拜司藝。未幾。出守醴泉郡。將辭朝...”이다.(www.minchu.or.kr 2006)

 

  김용 [記事] : 한국문집총간(063_118a) 운천집(雲川集, 1694)에 실린 조덕린(趙德隣)의 예천군수(1606-1607) 운천 김용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通政大夫兵曹參議,知製敎。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五衛都摠府副摠管雲川金公先生行狀。[趙德隣]/ ...余爲是州。亦如之。自今孤露。寧復可有是。因泣下云。丙午。還司藝爲醴泉守。首以興學敎育人材爲務。揀邑子之聰敏...”이다.(www.minchu.or.kr 2006)

 

  김용 [記事] : 한국문집총간(063_122c) 운천집(雲川集, 1694)에 실린 김시온(金是?)의 예천군수(1606-1607) 운천 김용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誌文[金是?]/ ...已司藝。已出牧尙州未久。?方伯遂拂衣而去。丙午。由司藝出守醴泉。旣至。以育才爲務。揀郡儒之聰敏者而月大會。...”이다.(www.minchu.or.kr 2006)

 

  김용 [記事] : 한국문집총간(063_126b) 운천집(雲川集, 1694)에 실린 용궁현감 미수 허목(許穆)의 예천군수(1606-1607) 운천 김용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碣銘[許穆]/ ...在朝良善。一一斥去。公亦被斥。不容於朝。或置散或補外。爲善山,醴泉,尙州,洪州。方師旅之際。中外板蕩。治道...”이다.(www.minchu.or.kr 2006)

 

  김용 [記事] : 한국문집총간(175_384a) 옥천집(玉川集, 1898)에 실린 조덕린(趙德?)의 예천군수(1606-1607) 운천 김용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通政大夫兵曹參議知製敎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五衛都摠府副摠管。雲川金先生行狀。/ ...向余爲是州。亦如之。自今孤露。寧復可有是。因泣下云。丙午。還司藝。爲 醴泉守。首以興學校育人材爲務。揀邑子之...”이다.(www.minchu.or.kr 2006)

 

  김용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8 刊) 미수기언(眉?記言)에 실린 미수 허목(許穆)의 예천군수(1606-1607) 김용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기언 별집(記言別集) 제17권/ 구묘문(丘墓文)/ 증(贈) 참판(參判) 김공(金公)의 묘명(墓銘)/ 공은 본래 강좌(江左)의 문소(聞韶 의성(義城))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고려 때의 태자 첨사(太子詹事) 김용비(金龍庇)라는 분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예인데, 공에게 12세조(世祖)가 된다. 공은 명 나라 가정(嘉靖) 36년(1557, 명종12) 11월 4일에 안동부 일직현 구미리에서 태어났다. 공의 휘는 용(涌), 자는 도원(道源)이고, 증조부는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된 김예범(金禮范)이고, 조부는 성균관 생원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김진(金璡)이고 부는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을 지낸 김수일(金守一)이고, 어머니는 한양 조씨(漢陽趙氏)로 사과(司果) 조효분(曺孝芬)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행실을 닦아 재주와 학문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27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34세에야 과거에 올라 승문원 권지정자에 보임되었다가, 얼마 뒤 예문관 검열로 옮겼다. 그해 겨울에 당직청에 있다가 천연두 발병으로 매우 위중하여 생기를 잃게 되자, 상이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위문하고, 또 이르기를,/ꡒ비록 병이 들어도 천품이 두터운 자는 요사(夭死)하지 않는다.ꡓ/ 하였는데, 과연 병이 나았다. 집에 갔다가 돌아오기 전에 왜구의 침략이 급하여 상이 서도(西都)로 파천하니, 이 때가 바로 선조 25년으로 공의 나이 36세였다. 왜적이 잇달아 삼경(三京)을 함락하여 길이 통하지 않게 되자 공이 향병(鄕兵)을 모집하고 모든 의병(義兵)을 모아 방어하다가, 다음해 가을에야 비로소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다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양사(良史 훌륭한 사가)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 때에는 황제(皇帝 명 신종(明神宗)을 가리킴)가 요좌(遼左)의 군사를 동원하여 구원하러 와서 계속 승리하였는데, 고양(高陽)에 이르러 날랜 말을 타고 왜적을 대항하다가 크게 패하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은 달아나 화를 면하였고, 드디어 화의(和議)를 맺어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 교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겨울에 상이 환도하자 공이 봉교(奉敎)에서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고 병조 좌랑으로 옮겼으며, 얼마 안 되어 정언(正言)으로 춘방 사서(春坊司書 세자시강원의 사서)를 겸했다가, 헌납으로 승진되었으며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으로 전직되었다. 얼마 후 지평에서 이조 좌랑이 되었다가 정랑에 승진되니, 이에 당시의 중견(重堅)이 되었다. 학사 조정립(趙正立)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ꡒ내가 서사(筮仕 처음 벼슬하는 것)한 이래 청직(淸直)한 마음을 가진 이로는, 오직 정경임(鄭景任), 김도원(金道源) 두 사람을 보았을 뿐이다.ꡓ/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사간에서 사성으로 옮겼다가, 집의가 되어서는 춘방 보덕을 겸하니, 이 때가 선조 31년으로 공의 나이 42세였다./ 왜적이 해상에 주둔하여 다시 쳐들어올 뜻을 밝히자, 명 나라 황제는 또 남북의 관병(官兵) 10여 만을 동원하여 왜구를 정벌하게 되었다. 이 때에 좌상(左相) 이원익(李元翼) 공이 제도 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가 되고 공이 종사관이 되었는데, 매사를 계획할 적마다 강력한 보좌라는 칭찬을 받았다. 대병(大兵)이 이르러 군량이 시급해지자, 공이 교리(校理)로서 나아가 독운어사(督運御史)가 되었는데, 이 때에 유성룡(柳成龍) 공이 영상(領相)의 임명을 받았다. 위란(危亂)한 즈음에 죽기로써 소임을 수행하였으므로 상(上)도 그를 의지하고 믿어서 매우 중하게 여겼는데, 소인(小人)이 틈을 타고 밤낮으로 온갖 계책을 써서 저해하여, 상의 마음을 노엽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유공(柳公)이 직위에서 물러나자, 조정에 있던 선량한 사람이 하나하나 쫓겨 가게 되었고 공도 쫓겨나는 화를 당하여 조정에서 용납될 수 없었으므로, 산직(散職)에 버려지거나 외직(外職)에 전보되어, 선산 군수, 예천 군수, 상주 목사, 홍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전란에 즈음하여 안팎이 소란하고 치도(治道)가 크게 무너진 때였으므로, 공은 가는 곳마다 백성 보호와 학교 재건과 풍속 개선에 힘을 썼지만 관직에 오래 있을 수 없었고, 길어야 1, 2년에 지나지 않았다./ 홍주에 있은 지 1년만에 대부인(大夫人)의 연세가 높아 부모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 다음해에 대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공의 나이 벌써 54세였으나, 상중에 하는 절차를 늙었다 하여 조금도 변동하지 않았으며, 상복을 벗은 다음에는 태상정(太常正)이 되었다. 편수관(編修官)으로서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수하는 데 참여하였는데, 소인들이 정권을 잡은 터라 시비(是非)가 크게 엇갈렸다. 그 때마다 공은 얼굴빛을 엄정히 하고 하나하나 바로잡아 나가니, 영상 기자헌(奇自獻)이 탄식하며 말하기를,/ꡒ선조 때의 일을 명백하게 알기로는 이 사람보다 더 나은 이가 없다.ꡓ/ 하였다. 부평(富平)에 의옥(疑獄) 사건이 있었는데, 오래도록 해결을 못하자 본도(本道)가 계문(啓聞)하였으므로, 조정에서 특별히 사람을 택하여 파견하게 되었는데, 공이 명을 받고 가서 원고와 피고의 말을 듣고 사실과 허위를 조사한 다음 그 자리에서 판결을 하니, 인심이 크게 기뻐하면서 모두들,/ꡒ인재로군, 인재야.ꡓ/ 라고 하였다. 태상정에서 규례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서반(西班)에 있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되던 해에 공의 나이 벌써 60세였고, 세도(世道)가 크게 어지러운 때라 공은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어졌다. 아문(衙門)의 일이 끝나면 여주 강상에서 조용하고 한가하게 지내다가 공의 장자(長子)가 죽자 돌아가 장사 지낸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가게 되었는데, 배를 타고 북강(北江)으로 올라가는 행색이 초라하고 쓸쓸하기만 하였다. 여주의 부로(父老)와 아전들이 강가에서 송별할 때 한참을 결백한 행정에 대해 서로 감탄하다가 해산하였다. 공이 시골로 돌아간 지 4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경신년(1620, 광해군12) 10월 19일로 나이는 64세였다./ 공은 평생에 담소(談笑)가 적었고 외모(外貌)가 우아하고 수려하였으며, 입으로 남의 잘잘못과 조정의 득실(得失)을 말하지 않았으며, 책을 즐겨 읽고 사물(事物)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가까이할 만한 이를 가까이하고 착한 이를 착하게 여겼으니, 행동과 마음가짐의 올바름을 볼 수 있었다. 자제(子弟)를 훈계할 적마다 말하기를,/ꡒ성현의 글을 읽고 실천이 없으면 빈말이 되어 유익함이 없다. 내가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중간에 반평생을 헛되이 보내고, 나이 늙어 잘못을 고치려고 하였으나 미칠 수 없었다. 내 평생 가슴에 새겨 둔 것으로는 ꡐ궁해도 의리를 잃지 않고 영달하여도 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窮不失義 達不離道]ꡑ는 것이었으니 이 여덟 자의 말에 힘쓰라.ꡓ/ 하였다. 성품이 담담하여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없었고, 산수(山水)로 즐거움을 삼은 까닭에 자호(自號)를 운천(雲川)이라 하였으며,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세속과 더불어 평온하게 지내면서 재주와 덕을 감춘 채 생을 마쳤다. 임종(臨終)에는 부인을 물러가게 하고 말하기를,/ꡒ예에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운명하는 것이 아니다.ꡓ/ 하고, 가사에 대하여는 말이 없이 편안하게 돌아가니, 생을 잘 마친 군자라 이를 만하다. 다음해 정월 갑신일에 임하(臨河 안동) 신곡(申谷)에 안장하였다./ 숙부인 이씨는 군기시 첨정 이준(李寯)의 딸이며, 도산(陶山) 이 문순공(李文純公 이황)의 손녀인데, 부인은 본디 부덕으로 칭찬을 받았으며, 시부모 섬기기를 예법대로 하여 온 가문이 그 어짊을 칭찬하였다. 또 잉첩(?妾 시중드는 여자 종)에게는 인자하고 종족에게는 돈독히 하니, 모두들 대현(大賢)의 세가(世家)에서 가정 교육을 잘 받아서라 하였다. 부인은 공과 동년생으로 공이 세상을 떠난 후 슬픈 마음으로 삼년(三年)을 곡읍(哭泣)하였고, 67세에 세상을 떠나니 10월 9일이었다. 임당(林塘)에 안장하였다. 5남을 두었으니 김시주(金是柱), 김시건(金是楗), 김시정(金是楨), 김시릉(金是?), 김시상(金是相)이다. 김시주는 을유년에 국자감 시험에 장원을 하고 대과(大科)에 합격하여 병조 원외랑이 되었으며, 김시정도 동방(同榜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함) 생원이었으나, 불행히 명이 짧았다. 공보다 먼저 죽은 이가 네 사람인데. 김시주는 공이 여주에 있을 때 43세로 죽었으므로 돌아와 장사를 지낸 분이다. 김시건은 21세, 김시정은 34세, 김시상은 28세이며, 김시릉은 공이 세상을 떠날 때에 44세였으나, 상사(喪事)를 감당하지 못하고 1년이 못 되어 그도 죽었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 20년 기묘년(1639, 인조17)에 장손(長孫) 김희(金?)가 묘지를 다시 정하여 임하 지동(枝洞)에 합장하고, 또 13년 뒤 신묘년(1651, 효종 2)에 효종이 처음 등극하였을 때에, 임진년에 향병을 모집하여 방어한 사실을 상에게 아뢴 사람이 있어, 공이 특별히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부인도 정부인이 되었다. 지금 와서 묘명을 청하는 사람은 김 원외랑의 손자로, 효릉 재랑(孝陵齋郞 인조릉의 참봉을 말함) 김태기(金泰基)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 / 嗚呼/ 군자의 나라 / 君子之邦/ 군자의 가르침 / 君子之敎/ 군자의 인격이라 / 君子之人/ 노 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 魯無君子/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러하리요 하였으니 / 斯焉取斯/ 실로 이와 같은 사람이 있구나 / 信有若人/ [주D-001]태상정(太常正) : 봉상시(奉常寺)에서 제사와 시호(諡號)의 의정에 관한 사항을 관장한 당하관(堂下官)으로 정3품이다./ [주D-002]노 나라에 …… 이러하리요 : 이 말은 공자(孔子)가 노(魯) 나라에 현인(賢人)이 많으므로, 도예(道藝)를 성취하는 사람이 많게 되었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論語 公冶長》”이다.(www.minchu.or.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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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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