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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84-2:김용(1606.8.16-1607.10.5)
작성자장병창 @ 2013.03.01 20:48:15

  예천고을원(84-2) :김용(1606.8.16-1607.10.5) : 정직한 마음을 가진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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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 [記事] : 한국문집총간총목차 059집 오봉집(五峯集)에 실린 이호민(李好閔)의 예천군수(1606-1607) 김용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 蕩春臺 332 訪安景容不遇 332 白雲亭八景 爲金醴泉涌賦之 332 長林微雨 332 ...”이다.(www.minchu.or.kr 2006)

 

  김용(金涌) [記事] : <표은선생문집[瓢隱先生文集, 1884]>에 실린 김시온[金是?]의 예천군수(1606-1607) 운천 김용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伯父、通政大夫、兵曹參議、知製敎、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五衛都摠府副摠管府君、贈貞夫人李氏、合葬墓誌/ 歲戊申冬十月十九日、公之孫燾、嗚咽似不能言、曰/ 今日非祖考諱辰耶、從兄弟皆已歿、惟不肖獨與祭。/ 而顧諸父行、亦惟叔耳。今去祖考之葬四十有八年、/ 而壙內尙無文、此豈特爲不肖罪。叔其誌之、否者、無/ 以示諸後、將若之何。言未卒、淚??下。余與之泣良/ 久曰:君不圖於秉筆君子、而必於余、懼後之有今耶。/ 急矣。其敢曰?、不敢以棄筆硏辭、遂?血而謹爲之/ ▶ Page 051/ 敍。曰:嗚呼、嶺之南、福之州、有大夫之賢者、雲川其號/ 也。嘉靖丁巳生、萬曆庚申卒。至我孝宗辛卯、以/ 宣祖朝宣武勳、贈吏曹參判、兼帶眞焉。公自幼英/ 達夙成、藻思逸發。叔父鶴峯先生、或撫之、或懷之、曰:/ 門戶之望、在汝。嘗讀論語、一誦七卷、而不錯一字。判/ 書公贈寶劍、以志喜。癸未、丁外艱。廬墓旣、三年屢捷/ 鄕解、皆居前列。庚寅、始登第、人以爲晩成。辛卯夏、選/ 補承文院。冬、薦入藝文館、以檢閱入直。?痘疾、上/ 遣中人踵問、乃曰:天旣厚賦、必不使早死、第美貌得/ 無變耶、是可惜已。聞者榮之、疾已還鄕。居無何、倭寇/ ▶ Page 052/ 充斥、車駕播遷、而道梗不得扈從、是壬辰也。募兵/ 守城、分勇士四出、斬獲甚多。癸巳、復檢閱、轉待敎奉/ 敎。書事無所避。時相有貪懦者、公直評其爲人、時論/ 快之、謂得古書法。冬遷典籍、日未?、薦移兵曹佐郞。/ 甲午、拜正言者三、兼司書者一。乙未、拜獻納已、選副/ 修撰、兼經筵檢討官已。持平四月至戊戌二月、以/ 佐郞/ 正郞在吏曹。趙公正立謂公於人曰:吾自筮仕/ 以來、爲銓郞者、皆知其人。而其淸直、不可犯者、惟金/ 某耳已。拜司諫已、司成已、執義皆兼輔德。李相元翼/ 之爲體察使也、其從事曰:公人問幕賓之可者、則曰:/ ▶ Page 053/ 金某是吾彊佐、凡機務、悉委之公。旣治、必大悅曰:眞/ 通才、通才。尋以弘文館校理、分執義、出督運御史。/ 己亥正月、改司成、而御史仍初。諸郡承風、恐後事/ 甚辦。爲不悅者所劾、罷。秋、爲善山府使。府新?於兵、/ 瘡痍未起、弦誦久絶。公憂其然、?民病、修學政。比數/ 年、里閭俱完、儒風始振。癸卯、入濟用軍資監正已、弼/ 善。甲辰、直講已、執義已、司藝已、出牧尙州。未久、?方/ 伯、遂拂衣而去。丙午、由司藝出守醴泉/ 、旣至、以育才/ 爲務。揀郡儒之聰敏者、而月大會、或令講讀、而與之/ 論難、或令製述、而第其高下、以賞罰勤慢。時大夫人/ ▶ Page 054/ 尙康寧矣。衙罷則每置酒張樂、以爲壽。前此、亦未嘗/ 不然。己酉、爲洪州牧、以親病解歸。庚戌二月、丁憂。年/ 旣老、氣亦衰、而守制如癸未壬子。服?、癸丑入奉常/ 正、以編修官與修宣祖實錄。公謂提調、曰:夫纂修/ 要當以實、不可奸焉也。某事不可不錄、某事不可不/ 刪。而且如西厓相公、其德望勳業、表著一世。而今見/ 史評、誣以成過、使不得爲完、人此豈史筆之取信於/

 

  後世者也。就其中去其甚者提調、賢公之爲屢稱歎/ 曰:通知先王時事者、在朝不過三數人、而某其尤/ 也。富平有疑獄未決者累年、雖列邑之號剛明者、皆/ ▶ Page 055/ 不能焉。監司具聞、光海問誰可決此獄者、朝議以爲/ 無踰奉常正金某公。承命以行、片言而折之。朝右皆/ 驚服、一道亦莫不稱其神明。凡聽獄訟、皆類此。乙卯、/ 例陞折衝階、西敍護軍已、遷兵曹參議。丙辰、又爲護/ 軍/ 驪州牧使、則二月也。暮境臨民、非公所樂、而愛其/ 山水、留過一年。公之政聲、聞於遠近。訟大小、皆歸之。/ 例得紙布?甚。公曰:淸心樓、世宗大王曾所臨御、/ 而今廢爲丘墟、此實州之大欠也。今此例布、猶足以/ 支其費。遂方便鳩材陶瓦工、將訖功、而佐郞公卒。託/ 以歸葬、購舟而還、歲蓋丁巳。行李蕭然、惟梅花四季/ ▶ Page 056/ 二益而已。前一年砥平?、許姓人來告于公曰:慶尙/ 監司缺、該局方擬公、吾欲爲公圖之、何如。三發問而/ 皆不答。??然而退。光海之姬親也、在內常帶三字/ 銜史官。則雖外或兼之玉堂也。侍經席、聖明?稱、/ 而疏章多出公手。薇垣也、正直持論、風彩振朝。皆曰:/ 眞鶴峯姪、柏府也。雖憲長、不可於意、棘棘不阿、皆目/ 之爲古之眞御史。入春坊、講必莊其色、諫則中於病、/ 光海敬憚之。爲邑宰、或棄或罷、無考滿者、而民父母/ 之。內而諸省列寺之吏、外而一郡一府三州之氓吏、/ 一口言曰:耳於古、目於今、而淸白無如某爺云。公天/ ▶ Page 057/ 分豪邁、風神峻朗、儀觀?秀。凡士之見者、無不聳服、/ 而願爲之交。其所從遊、皆宏儒碩士。而金東岡/ 宇?、/ 則公之同宗而相厚者也。己丑、爲白惟咸所構、謫于/ 會寧。而貧無以爲乘、公脫騎與之。士友稱嗟、以其高/ 風厚義、當求之古人。及赦還其馬、公不受、曰:吾已許/ 之公、之急人之急者、大抵如此。居官如水、律己若繩。/ 不以關節及人、人亦不敢關節以?公。臨事不撓、執/ 法不貸、確乎有不可拔之操。而及其退休、簾閣終日、/ 斂膝淸坐、不是非時政之得失、不議論人物之長短。/ 居家則事親孝謹、侃侃自將。而事死如事生。與弟友/ ▶ Page 058/ 愛、怡怡旣篤。而撫其孤、如已子。雖燕處、必正顔色、寡/ 言笑、凜然難犯。門庭之內、肅如。敎子弟有恒言、曰:雖/ 讀書不能身踐、?是說話。又曰:吾終身有八字符:窮/ 不失義、達不離道。是也。汝曹亦佩服而勿失、則吾之/ 志願畢矣。常坐明?、必整?案。非有大病、未嘗不對/ 黃卷中古人以自娛。終始不以家事經心、雖屢空晏/ 如也。平生不起第宅、亦無定居。遇山水、輒寓焉。而白/ 雲亭、則察訪公所築也。晩年、歸栖于此、溫繹舊業、而/ 道益崇、德彌邵。雖古之名賢、奚加焉。公爲詩、酷好李/ 白。少時頗襲其句格、老來藏鋒韜穎、有遺稿藏于家。/ ▶ Page 059/ 公嘗無恙、十月初示憊。未數日、遂?余還。自醫家、則/ 已革矣。誡余曰:爲善、屛婦人、曰正終。翌日、命訖。春秋/ 六十四。其葬也、曹承旨友仁作詩送哀曰:淸氷若檗/ 平生節、粹玉精金間世英。當時、以其句爲公實錄云。/ 公、義城人、姓金氏。羅之敬順王、其先也。連數世、封君/ 於義城。故子孫因籍焉。有諱龍庇、仕於麗、爲太子詹/ 事。於公、爲遠祖也。尙書左僕射、曰宜內盈少尹曰:/ 瑞之文睿府左司尹曰台權、入國朝有曰工曹典書/ 居斗、是詹事之子孫。曾玄四代、而以僕射故、贈詹事。/ 僕射/

 

  典書生進禮島僉節制使諱?、是生新寧縣監/ ▶ Page 060/ 諱永命、是生諱漢啓、集賢殿修撰。與成三問/ 河緯地/ 齊名。後遂不仕。是生公之高祖諱萬謹、進士、贈左/ 通禮。曾祖諱禮範、贈左承旨、祖諱璡、生員、贈吏/ 曹判書。三世之贈、用鶴峯貴也。考自如道察訪諱/ 守一、?漢陽趙氏。司果/ 孝宗之女、漢山伯/ 襄烈公仁/ 璧之後。世之論甲族之賢大夫、指無先公、屈者。義城/ 之金、世有聞人君子云。配、眞城李氏。軍器寺僉正/ 寯/ 之女、文純公退溪先生之孫。乙卯封淑夫人。自穉齒、/ 性頗明敏。先生愛之、偏十七歸于公。事舅姑承順、顔/ 色務盡誠謹。鷄初鳴、?櫛。未明、衣服。適舅姑所、問起/ ▶ Page 061/ 居安否。然後退而執事。事公如嚴父兄、敬謹之心罔/ 敢或弛。生理如寒士家、其苦有所不堪。而一不以告/ 于公。所祭祀賓客、力貧使奇?必洗?、酒食必?潔。/ 雖親戚、皆莫知其爲貧持內。凡四十八年、而益自肅/ 括、不敢專輒行、實純備內職、甚修識者、咸稱曰若使/ 男子如夫人、足以繼先生之跡。夫人與公同年生也、/ 及公之卒、年踰不毁、身且有病、而執喪過哀、?過三/ 年、嘔血?盡。癸亥之十月初九日也。行不愧於祖德、/ 無違於公、於?盛哉。擧丈夫子五、女子子二。長、是柱、/ 己酉魁、司馬、癸丑擢文科、官至兵曹佐郞。次、是楗。次/ ▶ Page 062/ 是楨、己酉生員。次、是?、是相。女、適晉州判官/ 裵尙益、/ 生員李廷俊。佐郞娶權正郞/ 暐女、生子曰熙、恁、薰、煦。/ 恁、生員。女參奉/ 李?、注書/ 金崇祖、士人李?/ 全、尙耈。/ 是楗、娶安護軍/ ?女、無嗣、以恁後。是楨、聘於金參判/ ?之門、生進士烋、文名藉甚、以參奉/ 終。女、金時聖。是/ ?、爲主簿、李珍壻。生一子、卽請誌君。是相、娶平海黃/ 氏慶一之女、無子。公命是?子?爲其嗣。女、生員李/ 朝英。外孫而裵曰、進士。幼華、今爲金泉察訪。幼章、有/ 高士風。女、趙壽?、丁時遠、金時望。李曰、天標、地標、民/ 標。女、權確、李基情、李緯漢。曾孫、男之生於烋、曰學基、/ ▶ Page 063/ 進士。於熙曰學達、士達、邦達。燾之生曰生員、善基、昌/ 基、碩基。恁再娶、而有六子:泰基、履基、益基、鼎基、前之/ 出、有基、觀基。後之出、履基、生員。薰、煦、皆四:學圭、學載/ 學周、學時、宇基、業基、亨基、弘基。玄孫?錄其承公之/ 重者、世鍵其名。噫、公以公輔器、値世道晦塞、不究其/ 用、五才子皆早夭、不食其報。人莫敢不疑於天、而君/ 子獨曰:躬不?則惠、其後未幾。內外孫、多不可勝記。/ 而皆有文行、不墜家聲。人乃今知公之獲天福否耶。/ 初、公葬於臨河縣東申谷、夫人林塘。公夢烋而責曰:/ 汝曹葬我於泉竇中、我其魚耶。烋驚覺、卽告群從。烋/ ▶ Page 064/ 歿之明年、熙與諸弟、卜葬於縣南之獨自山己卯。十/ 月甲辰、啓公之墓、水果滿矣。而夫人之葬、亦諸孫之/ 所欲改也。越六日、己酉遷奉二柩、合?於負壬之原。/ 公諱涌、字道源。夫人從公爵、贈貞號。燾之屬余銘/ 雖勤、余非其人、惟記其履歷及世係及子孫、而納諸/ 幽。嗚呼、天乎。余其忍誌公之墓耶。余之誌、其將不朽/ 公耶。痛哉痛哉。瓢隱先生文集卷之三“이다.(www.koreastudy.or.kr 2006)

 

  김용 [記事] : 宣祖實錄 217卷/ 선조 40年 10月 5日(甲子) 003 / 司憲府에서 醴泉郡守 金涌을 彈劾하다) [實錄] : 날짜 : 1607년 10월 05일(음력)/ 헌부에서 전 남병사 이광악․예천 군수 김용을 탄핵하다/ 헌부가 아뢰기를,ꡒ요즈음 군율이 해이하여 장수의 직임을 맡은 자가 자기 한몸의 편안만을 도모하고 국가의 위급함은 생각하지 않으니 식자가 한심스럽게 여긴 지 오랩니다. 지난번 전 남병사(南兵使) 이광악(李光岳)은 북변(北邊)이 매우 어려운 때를 당하여 감히 거만스레 병을 칭탁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하서(下書)하여 회유(回諭)하도록만 청하였으니 당연히 석고 대죄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고 몹시 거만스러운 사의(辭意)로 다시 천청(天聽)을 번독스럽게 하여 기필코 체직되고야 말려 하였으니 신하의 의리를 크게 저버렸습니다. 물정이 몹시 분개하고 있으니 잡아다 국문하고 그 도(道)에 충군(充軍)시키소서. 예천 군수(醴泉郡守) 김용(金涌)은 술마시는 것을 일삼고 있으므로 관무(官務)가 많이 폐지되어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고 있으니 파직시키소서.ꡓ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원전】 25집 369면/【분류】 *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司法) / *군사-군정(軍政)/ 정보제공기관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제공기관 : 국사편찬위원회(www.knowledge.go.kr 2006)

 

  [저서] : 시문집으로 1) <운천선생집(雲川先生集)>(奎15415, 5卷 附錄 合 4冊, 筆寫本, 30.2x20.8cm)이 있는데, 1642년(인조 20)에 간인(刊印)된 책으로 필사한 것이다. 권두(卷頭)에는 1642년에 대사헌 권해가 쓴 서문이 실려 있다. 권1에 시(詩) 264수(雨中菊, 希夷堂十詠 等), 권2에 시 132수(白雲亭敬次叔父鶴峯先生十二詠韻, 挽呂陜川大老 等), 부(賦) 2편(病鶴, 不貳室), 권3에 소(疏) 1편(乞遞洪州牧使疏), 서(書) 5편(上宣惠廳堂上, 答裵明瑞 等), 잡저(雜著) 1편(募兵文), 서(序) 2편(洞中立約序, 開湖鍾松序), 교서(敎書) 1편(敎咸鏡道觀察使柳公亮書), 전(箋) 2편(誕日賀箋, 冬至賀箋), 상량문(上樑文) 2편(驪州淸心樓上樑文, 臨川慶老堂上樑文)이 실려 있다. 여기 소(疏)는 홍주 목사로 있으면서 병으로 체직해 줄 것을 올린 것이고, 서(書)는 시사(時事)에 관한 글이고, 잡저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는 글이 실려있다. 권4에는 제문(祭文) 28편(社稷祭壇祈雨文, 臨川書院奉安文, 祭冶隱吉先生文, 祭月川趙先生文, 祭西厓柳先生文 等), 묘갈(墓碣) 2편(成均生員權公墓碣銘 等), 묘지(墓誌) 3편(先考宣務郞自如道察訪府君墓誌 等), 권5에 언행록(言行錄) 1편(叔父鶴峯先生言行錄)이 실려있다. 여기에는 학봉 김성일의 생애와 당시에 겪었던 임진왜란과 같은 큰 난리에 관계되는 기술이 많이 있다. 권6은 부록으로 세계도(世系圖 : 一世 錫으로부터 20세까지의 家乘), 운천 김용의 연보(年譜), 조덕린(趙德隣)이 쓴 행장(行狀), 질자(侄子) 시온(是縕)이 쓴 시문(詩文), 김태기(金泰基)가 쓴 갈문(碣文), 허목(許穆), 권위(權暐) 등이 쓴 제문(祭文) 5편, 노림서원봉안문(魯林書院奉安文 : 李玄紀 撰), 묵계정사(黙溪精舍) 이안(移安) 때의 고유문(古由文 : 李栽 撰), 이안 후 제문(移安後祭文), 상향축문(常享祝文), 장현광(張顯光) 등이 쓴 만사(輓詞) 8편이 실려 있다. 권미(卷尾)에 <운천유묵(雲川遺墨)>으로 시(詩) 9수가 실려 있는데 앞의 1수는 '아양루시첩원운(아洋樓詩帖元韻)'이고, 아래 8수는 '백운정연방세고(白雲亭聯芳世稿)' 중에서 초(抄)한 것이다. 임진왜란의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2) 또 <운천선생문집(雲川先生文集 卷1-4)>(KDC D3B)도 있는데, 6권 부록 합 4책, 도(圖), 31x20.5cm,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은 20x15cm, 유계(有界), 10행(行) 19자(字), 주쌍행(註雙行), 판심(版心)은 이엽 화문 어미(二葉花紋魚尾)이고, 서문은 1898년 권해가 썼고, 1898년(광무 2)에 중간(重刊)되었고,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고,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경북대, 경상대, 고려대, 대구가톨릭대, 안동대, 영남대, 조선대이다. 3) <운천호종일기>는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의주(義州)로 호종하였던 김용의 일기로, 1책, 필사본, 보물 제484호이다. 표제(表題)에는 '운천 선조 호종 일기(雲川先祖扈從日記)'라 씌어있고, 경북 안동시 임하면에 거주하는 김종해(金鍾海)가 소장하고 있다. 피난 중에 체험하고 견문한 사실의 기록으로, 당시의 사생활은 물론 정치ㆍ군사ㆍ외교 등 각 방면에 걸쳐 참고가 되는 사료이다. 1977년에 그의 시문집 <운천집> 등과 합본하여 영인, 출간되었다. [운천신도비(雲川神道碑)] : 경북 안동시 임동면 지리 294-1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예천 군수 운천 김용의 신도비로, 경북문화재자료 제60호(1985.8.5 지정)이다. 1892년(고종 29)에 세워졌다. 비문에 임진왜란 당시의 김용의 업적을 적어 놓았는데, 임하댐 건설로 인해 1989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총높이 180cm, 가로 72cm, 세로 114cm의 대좌 위에 까마귀 모양의 비신을 세웠고, 이수는 높이 64cm이고,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비문은 돈녕부도정 김연하(金璉夏)가 짓고 감한락(金翰洛)이 썼다. 후손인 김승태가 소유 관리하고 있다.(인터넷 야후 2001, 이야기 꿈동산)

 

  김용(드라마 신돈에서 나오는 김용의 一代記는?) [答辯] : 본관 의성(義城). 자 도원(道源). 호 운천(雲川). 경북 안동 출생.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급제,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로 등용되어 검열(檢閱)을 역임 중 신병으로 사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규합, 항쟁하다가 이듬해 왕의 행재소(行在所)로 올라가서 이조 좌랑․교리(校里)․독운어사(督運御史)․체찰사 종사관(體察使從事官) 등을 역임하였다. 1598년(선조 31)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모함을 받아 삭직당하자 함께 배척을 받고 산관(散官) 또는 선산 부사(善山府使)․예천 군수(醴泉郡守) 등 외직(外職)으로 전전하다가 1609년(광해군 1) 태상시 정(太常寺正)으로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수찬(修撰)에 참여하였다. 이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 참의를 지냈고,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이르러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안동의 덕봉서원(德峯書院)․묵계서원(黙溪書院) 등에 제향되고, 저서에 《운천집(雲川集)》 《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 등이 있다.(오마님 作成 다음新知識 06-03-31 14:40)

 

  김용(詩板 (雲川)) [嶺南儒敎文化遺物] : 유물형태 시판/ 기탁자 의성김씨 운천공 종택/ 이는 운천 김용의 시 3수를 판각한 현판이다. 김용은 귀봉 김수일의 아들이자 김성일의 조카이다. 일찍이 조정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다가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 예천 군수․상주 목사 등 외직에 몸담았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4년만에 죽었다.  첫 번째 시는 김진의 ꡐ원운ꡑ을 차운하여 지은 시이고, 두 번째 시는 산과 물이 좋은 절경을 배를 타고 유람하는 흥취를 읊은 시이며, 세 번째 시는 아버지 김수일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ꡐ경차선운(敬次先韻)ꡑ이라는 작품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모 그려 지은 정자 물가에 서있고/ 송대로 난 오솔길은 높기도 하여라 / 모시고 따르던 때 어제와도 같으니 / 선영 가 쳐다보며 보고픈 마음 읊겠네 / 흰구름 머무는 언덕 누가 있어 쳐다볼까 / 분전을 책상 가득 쌓고 미동하지 않으리 / 더구나 우리 조부 계주시(戒酒詩) 남기셨거늘 / 이 마음 어찌 놓으리 술잔 잡을 때라도.(韓國國學振興院 2006)

 

  김용(雲川先生文集) [嶺南儒敎文化遺物] : 유물형태 책판 / 기탁자 의성김씨 천전파 대종택 /『운천선생문집(雲川先生文集)』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한 김용(金涌 ; 1557~1620)의 시문집으로 5권 4책의 목판본이다. 이 문집은 1694년(숙종 20)에 간행되었다. 김용의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본관은 의성이다. 1590년(선조 23) 문과 급제 후 승문원 정자(正字)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사퇴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 항쟁하였고, 이듬해 이조 좌랑․교리를 역임하고 독운어사(督運御史)․체찰사 종사관(體察使從事官) 등을 지냈다. 1598년 영의정 류성룡이 모함을 받아 삭직되자 함께 배척을 받아 산관(散官)․선산 부사(善山府使)․예천 군수(醴泉郡守) 등 외직(外職)을 행하다,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이르러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韓國國學振興院 2006)

 

  [宣祖實錄] : 1593년(선조 26) 8월 10일에 검열(檢閱)에 재임 중이었고, 봉교(奉敎, 1593.12.3 재임 중), 병조 좌랑(1593.12.26), 정언(1594.7.16 재임 중), 헌납(1595.1.12), 홍문관 수찬(1595.2.3), 이조 좌랑(1595.4.5), 경상도 도체찰사 종사관(1596.11.12 재임 중), 이조 정랑(1596.12.14), 보덕(1598.3.9), 사성(1598.3.26), 집의(1598.4.14), 홍문관 교리(1598.8.14), 성균관 사성(1599.1.21), 선산 부사(1599.9.16-1601.8.21), 제용감 정(1603.10.30), 필선(1603.12.27), 성균관 직강(1604.2.4), 사헌부 집의(1604.2.11), 성균관 사예(司藝, 1604.2.13), 상주 목사(1604.2.29), 전적(1605.6.20), 성균관 사예(1606.7.11)를 거쳤다. 1606년(선조 39) 8월 16일 예천 군수에 제수되어 1607년(선조 40) 10월 5일에 이임하였다.

 

  [光海君日記] : 봉상시정 지제교(奉常寺正知製敎)로서 1609년(광해군 1) 7월 12일에 편찬된 <선조실록>의 편수관이었고, 동년 12월 7일에는 홍주 목사로 재임 중이었고, 1617년(광해군 9) 7월 23일에는 여주 목사로 재임 중이었다. 1618년(광해군 10) 7월 5일에는 분병조 참의(分兵曹參議)에 올랐다.

 

  김용 [記事] : 고산집(孤山集) 9권 5책 중 卷7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墓誌銘/ 宣敎郞義城金公宜人禮安李氏合葬墓誌銘 14 / 선교랑 金是?과 그의 부인 예안 이씨의 합장 묘지명이다. 김시릉의 자는 以方이고, 본관은 의성이다. 아버지는 涌이고 어머니는 진성이씨 준의 여식이다. 일직현 소호리에서 태어났다. 특이한 자질을 타고나 일찍부터 문예가 뛰어났다. 공의 형제가 모두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으나 불행히도 수년 동안 모두 세상을 뜨고, 공만이 남았지만 그도 어려서부터 심장병을 앓았다. 발작이 있을 때마다 책상을 마주하고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쳤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병이 있는지 몰랐다. 향시에는 수차 합격하고 회시에도 입격했지만 고관 가운데 참의공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 끝내 실패하였다. 합장된 예안 이씨는 저자의 조부인 ?의 여식으로 1남을 두었다. [김용은 예천군수(1606.8.16-1607.10.5)였다.](www.koreastudy.or.kr 2007)

 

  김용 [記事] : 운천선생문집(雲川先生文集)/ 기탁자 : 의성김씨 천전파 대종택 / 『운천선생문집(雲川先生文集)』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한 김용(金涌 ; 1557~1620)의 시문집으로 5권 4책의 목판본이다. 이 문집은 1694년(숙종 20)에 간행되었다. 김용의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본관은 의성이다. 1590년(선조 23) 문과 급제 후 승문원 정자(正字)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사퇴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 항쟁하였고, 이듬해 이조 좌랑․교리를 역임하고 독운어사(督運御史)․체찰사 종사관(體察使從事官) 등을 지냈다. 1598년 영의정 류성룡이 모함을 받아 삭직되자 함께 배척을 받아 산관(散官)․선산 부사(善山府使)․예천 군수(醴泉郡守) 등 외직(外職)을 행하다,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이르러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http://www.koreastudy.or.kr 2007)

 

  김용 [記事] : 안동의 서원/ 간행년 : 1994/ 저자 : 안동문화원/ 발행처 : 안동문화원/ 11. 泗濱書院 : 소재지: 안동군 임하면 임하면 임하리/ 원래 安東府 臨河縣 景出山에 있던 靑溪 先生의 墳庵을 1675년(숙종 元)에 확장하여 선생의 遺像(현재 종택에 봉안)을 봉안하고 '泗濱影堂'이라 하였다. 이를 1685년(숙종 11) 士林과 內外孫들이 합의하여 선생은 主享으로, 그리고 다섯 子弟인 藥峯 金克一ㆍ龜峯 金守一ㆍ雲巖 金明一ㆍ鶴峯 金誠一ㆍ南嶽 金復一 선생을 配享하고 廟號를 '景賢祠'라 했다. 1709년(숙종 35)에 동구 밖 泗水 가로 이건하여 '泗濱書院'이라 하였다가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882년(고종 19) 사림과 본손들에 의해 복설되었으나, 1989년 임하댐 공사로 인해 임하면 사의리에서 현위치인 임하리로 이건했다. 현재 향사하지 않는다. 경상북도 지방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사빈서원 봉안문은 『泗濱志』(金時雨氏 藏)에 수록되어 있다.../ ○ 金守一(1528, 중종 23~1583, 선조 16) : 義成人. 자는 景純, 호는 龜峯. 1555년(명종10) 생원시에 합격하고, 향시에 여러 번 장원을 하였다. 임하 傳巖에 精舍를 짓고 학문에 힘썼다. 뒤에 遺逸로 추천되어 자여도찰방에 임명되어 부임 도중 몰했다. 아들 雲川公 涌은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고, 藥峯公은 뒤를 이어 宗嗣가 되었다.(www.koreastudy.or.kr 2007)

 

  김용 [記事] : 안동의 뿌리 찾기/ 간행년 : 1997/ 저자 : 안동문화원/ 발행처 : 안동문화원/ 4) 안동의 비석/ 신도비 : 다음으로는 안동권씨의 시조인 권태사의 신도비를 들 수 있다. 권태사의 신도비는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393번지에 있는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비는 현종 2년(1661) 권 태사의 24세손인 군수 권성원에 의해 세워졌다. 비 높이는 3.75m로 좌대의 귀부 위에 비신과 이수를 얹은 구조다. 비문은 23세손 권시가 지었고, 글씨는 우의정을 지낸 미수 허목이 쓴 것으로 유명한데, 화재를 만나 비각이 타면서 빗돌 표면 일부가 갈라져 글씨 전체를 판독할 수는 없다./ 신도비각 내부 : 이 비를 가까이에서 보려면 새로 조성된 신도비각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관리인에게 요청하면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 이 비의 판독이 어렵게 되자 후손들에 의해 별도의 비와 비각이 건립되었다. 묘비 가운데 운천 김용 선생의 비가 돋보인다. 운천 김용은 어떤 분인가?/ 김용(金涌, 1557 명종 12-1620 광해군 12) : 의성인(義城人),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이다. 귀봉(龜峯) 수일(守一)의 아들로 일직(一直) 구미(龜尾)에서 태어났다. 의표(儀表)가 준수하고 총명하여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함으로 조부(祖父) 진(璡)으로부터 전해오는 보검(寶劒)을 수상하였다. 학봉(鶴峯)에게 수업(受業)하여 선조 23년(1590)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전적․정언․지평․이조 정랑․예천 군수․상주 목사 등을 거쳐 병조 참의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고, 정유재란시에는 제도제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임진호종공(壬辰扈從功)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扈從日記』(보물 제484호)와 옥적(玉笛)․매화석(梅花碩)․연하침(煙霞枕) 등 보물(寶物)을 후손에게 전했다. 문집이 있다./ 운천 김용 선생 묘비 : 운천 선생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ꡐ궁하더라도 의리를 잃지 말고 출세하더라도 도를 버리지 말라(窮不失義 達不離道)ꡑ라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지금까지 의성 김씨의 ꡐ문중훈(門中訓)ꡑ과도 같이 내려오는 구절인데, 그 주인공이 바로 운천 선생이라는 데서 선생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운천 선생의 묘소는 안동시 임동면 지리에 있는데, 이곳에는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재사(지동재사)와 신도비가 있다. 선생의 묘비는 이수 부분의 조형이 돋보이며 전면 중앙부를 다시 깎아 새로 새긴 모습이 특이한데, 아마도 추증이 재차 이루어져 다시 세우지 않고 비면을 깎아 새로 새긴 것이 아닌가 한다. 이곳을 찾으면 재사와 신도비 그리고 독특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묘비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집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운천 선생의 주손이 사는 집은 청계 선생의 둘째 아들인 귀봉 김수일 공의 종택이다.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운천 선생의 임진왜란시 호종일기가 보관되어 있다. 이 일기는 보물 제4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반에는 내앞 ꡐ작은종가ꡑ로 불리운다.../

 

  운천 선생의 신도비는 고종(高宗) 29년(1892)에 세워졌다. 신도비의 총 높이 180cm, 가로 72cm, 세로 114cm의 좌대 위에 오석(烏石)의 비신(碑身)을 세웠으며 이수(?首)의 높이는 64cm이고 화강석(花崗石)이다. 신도비의 비문은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재(?齋) 권연하(權璉夏, 1813-1896)가 짓고 김한락(金翰洛)이 썼다. 지동재사(枝洞齋舍)는 운천(雲川) 김용(金涌, 1557-1620) 선생과 그의 부인(夫人) 이씨(李氏)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인조(仁祖) 17년(1639)에 건립한 것이다.  정면 4간, 측면 5간의 ꡐᄆꡑ자형 팔작 및 박공집으로 전형적(典型的)인 재사형 건물 양식으로 매우 검소한 느낌을 보여 주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신도비로는, 권태사 신도비, 고성이씨영산현감 이증 신도비, 운천 김용 신도비, 화산 권주 신도비가 있다. 묘소나 묘비가 지정된 경우는 아직까지 없지만, 가치가 있는 경우 지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답사를 권할 만한 그 외의 비로는, 퇴계 선생의 묘비, 학봉 선생의 신도비와 묘비, 화산 권주 선생(퇴계 선생의 처조부), 퇴계 선생의 큰 제자인 월천 조목 선생의 묘비 등이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김용 [記事] : 안동의 서원/ 간행년 : 1994/ 저자 : 안동문화원/ 발행처 : 안동문화원/ 36. 臨湖書院(德峯書院) : 소재지 : 안동군 임하면 임하리 912-2/ 雲川 金涌 先生을 제향하던 서원이다. 당초 臨川書院 舊趾 옆 강당을 세워 운천 선생을 제향했는데, 1981년 현위치로 옮겼다./ ○ 金涌(1557, 명종 12~1620, 광해군 12) : 義城人. 자는 道源, 호는 雲川이다. 龜峯 守一의 아들로 一直 龜尾에서 태어났다. 儀表가 준수하고 총명하여 學問에 精進함으로 祖父 璡이 전해 오는 寶劒을 수상하였다. 鶴峯에게 受業하여 선조 23년(1590)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ㆍ전적ㆍ정언ㆍ지평ㆍ이조 정랑ㆍ예천 군수ㆍ상주 목사 등을 거쳐 병조 참의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고, 정유재란시에는 제도체찰사 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壬辰扈從功으로 吏曹 判書에 贈職되고 『扈從日記(보물 제484호)』와 玉笛ㆍ梅花硯ㆍ煙霞枕 等 寶物을 후손에게 전했다. 문집이 있다. 아양루 전경은 운천 선생의 시판에 게판되었다.(www.koreastudy.or.kr 2007)

 

  김용 [記事] : 안동인물초색인/ 간행년 : 2000/ 저자 : 권오신 외/ 발행처 : 안동문화원/ 김용(金涌) : 1557(명종 12, 정사) ~ 1620(광해군 12, 경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수일(守一)의 장자.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등용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역임 중 신병으로 사임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안동 수성장(安東守城將)으로 향군(鄕軍)을 일으켜 고장을 지키다가 그해 가을에 왕이 파천해 있는 의주(義州)로 올라가서 예문관의 검열(檢閱)ㆍ대교(待敎)ㆍ봉교(奉敎)를 역임했다. 환도 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ㆍ사간(司諫)ㆍ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며 과연 학봉(鶴峯)의 조카답다는 칭찬을 들었다. 1594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인사를 처리함에 극히 공정했으며,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올라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했다. 1597년 정유왜란(丁酉倭亂)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ㆍ독운어사(督運御史)를 거쳐 사성(司成)이 되었으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모함을 받아 삭직당하자 함께 북인(北人)의 배척을 받고 선산 부사(善山府使)ㆍ예천 군수(醴泉郡守) 등 외직(外職)으로 전전하다가, 1609년(광해군 1) 태상시 정(太常寺正)으로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수찬(修撰)에 참여하였다. 이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냈고, 1615년(광해 7)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이르러 병을 칭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하(臨河) 임호서원(臨湖書院 : 舊 德峯書院)에 제향되고, 저서에 『운천집(雲川集)』, 『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ㆍ國朝人物考ㆍ國朝榜目ㆍ安東鄕土誌(宋志香)(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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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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