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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을원(84-3) :김용(1606.8.16-1607.10.5) : 정직한 마음을 가진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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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 [記事] : 안동시사 5/ 간행년 : 1999/ 저자 : 안동시/ 발행처 : 안동시청/【義城 金氏】/ 김용(金涌):1557(명종 12, 정사)~1620(광해군 12, 경신). 본관 義城. 자는 道源. 호는 雲川. 守一의 子. 외조는 漢陽 趙孝芬. 1590년 문과 급제. 檢閱鎖直 봉직 중 병을 얻어 귀향. 임란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킴. 이어 司諫院 正言ㆍ司諫院 獻納ㆍ弘文館 校理 역임. 외직으로 善山 府使ㆍ尙州 牧使 역임하며 선정을 베품. 다시 내직으로 編修官이 되어 『宣祖實錄』 편수에 참여함. 저서:『雲川集』. ▣참고:「行狀」(趙德隣 撰) ??집필:이원걸(www.koreastudy.or.kr 2007)
김용 [記事] : 안동시사 1/ 간행년 : 1999/ 저자 : 안동시/ 발행처 : 안동시청/ 2. 산업(産業)의 발달과 경제적 성장/ 1) 농업 생산력의 증대/ 조선시대 안동의 호구 추이(戶口推移) : ... 예컨대 17세기 초반이기는 하나 천전(川前)의 경우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노비 64명은 모두 김용(金涌, 醴泉郡守)가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79명의 양인 가운데 12명이 소작인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당시 김용이 경영하던 토지가 676.7두락(斗落)이었기 때문에249) 1두락을 200평으로 계산하면 135,340평으로 양인ㆍ노비를 합한 76명을 20호로 보았을 때 호당 경작할 토지는 약 6,800평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머지 양인들도 다른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농이거나 설령 자영농으로 소농(小農)의 위치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빈농(貧農)의 처지에 놓였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www.koreastudy.or.kr 2007)
김용 [記事] : 통합검색 - 멀티미디어유물관/ 유물명 시판(운천)(詩板(雲川))/ 유물형태 시판/ 기탁자 의성김씨 운천공 종택/ 상세설명 운천 김용의 시 3수를 판각한 현판이다. 김용은 귀봉 김수일의 아들이자 김성일의 조카이다. 일찌기 조정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다가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 예천 군수․상주 목사 등 외직에 몸담았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4년만에 죽었다. 첫 번째 시는 김진의 ꡐ원운ꡑ을 차운하여 지은 시이고, 두 번째 시는 산과 물이 좋은 절경을 배를 타고 유람하는 흥취를 읊은 시이며, 세 번째 시는 아버지 김수일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ꡐ경차선운(敬次先韻)ꡑ이라는 작품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모 그려 지은 정자 물가에 서있고/ 송대로 난 오솔길은 높기도 하여라/ 모시고 따르던 때 어제와도 같으니/ 선영 가 쳐다보며 보고픈 마음 읊겠네/ 흰구름 머무는 언덕 누가 있어 쳐다볼까/ 분전을 책상 가득 쌓고 미동하지 않으리/ 더구나 우리 조부 계주시(戒酒詩) 남기셨거늘/ 이 마음 어찌 놓으리 술잔 잡을 때라도.(www.koreastudy.or.kr 2007)
김용 [記事] : 통합검색 - 멀티미디어유물관/ 유물명 운천선생문집(雲川先生文集)/ 유물형태 책판/ 기탁자 의성김씨 천전파 대종택/ 상세설명 『운천선생문집(雲川先生文集)』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한 김용(金涌 ; 1557~1620)의 시문집으로 5권 4책의 목판본이다. 이 문집은 1694년(숙종 20)에 간행되었다. 김용의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본관은 의성이다. 1590년(선조 23) 문과 급제 후 승문원 정자(正字)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사퇴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 항쟁하였고, 이듬해 이조 좌랑․교리를 역임하고 독운어사(督運御史)․체찰사 종사관(體察使從事官) 등을 지냈다. 1598년 영의정 류성룡이 모함을 받아 삭직되자 함께 배척을 받아 산관(散官)․선산 부사(善山府使)․예천 군수(醴泉郡守) 등 외직(外職)을 행하다,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이르러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www.koreastudy.or.kr 2007)
김용(金涌) [記事] : 생애이야기/ 성명 : 김용(金涌) (1557년 ~ 1620년) / 본관 : 의성 (義城) / 자 : 도원 (道源) / 출생지 : 안동(安東) 소호리(蘇湖里) / 출신지 : 안동(安東) / 분묘지 : 안동(安東) 신곡(申谷)에서 지동(枝洞) 독자산(獨自山)으로 이장 / 입사경로 : 1590년(선조 23) 증광시(增廣試) 급제 / 외관직 : 예천 군수(醴川郡守), 상주 목사(尙州牧使), 홍주 목사(洪州牧使) / 증직 및 기타 : 병조 참판(兵曹參判)(www.koreastudy.or.kr 2007)
김용(金涌) [記事] : 원문자료/ 운천 김선생 신도비(雲川金先生神道碑) : 지난 1620년(광해군 12)에 병조참의 운천 김 선생이 돌아가셨다. 그 뒤 32년, 우리 효종대왕 2년인 1651년에 대신의 건의에 의해 가선대부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창의한 공로 때문이었다. 양천(陽川) 허문정공(許文正公:목穆)이 묘갈명을 썼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29년만인 임진년 다시 그 난리가 났던 갑자를 맞아 느낀 바 있어 다시 자헌대부 이조판서 증직을 더함에 태상시(太常寺)에서 의논해 절차를 밟아 거행했다. 선생의 도학과 훈절은 이미 당세에 드러났으나, 관직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법도에 상고해 보더라도 의당 성전(盛典)을 베풀어 신도비를 세워야 했다. 그리하여 선생의 후손 여러 분들은 빗돌에 새기는 글을 내게 명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뒤늦게 태어났고 또 학문도 보잘 것 없으며 식견이 얕고 고루한 내가 어찌 이 일에 말을 붙여 선현의 아름다운 자취를 서술할 수 있겠는가? 사양하였으나 더욱 책임을 지웠기에 삼가 여러분들이 지어 둔 글을 모아 정리하였다. 선생의 이름은 용(涌), 자는 도원(道源)이다. 그 조상은 본래 신라의 왕자인 석(錫)으로 의성을 식읍으로 받았던 분이다. 태자 첨사(太子詹事)를 지낸 김용비(金龍庇)가 봉군을 이어받았기에 자손들이 드디어 그것으로 관향을 삼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김거두(金居斗)가 안동에 살기 시작하였고,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 김한계(金漢啓)는 단종이 왕위를 물려준 뒤에 벼슬을 그만두고 세상을 마쳤다. 그의 아들 김만근(金萬謹)은 좌통례(左通禮)에 증직되었는데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는 김예범(金禮範)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고, 조부는 김진(金璡)으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는데 호를 청계(靑溪)라고 했다. 부친은 김수일(金守一)로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인데 호가 구봉(龜峯)이고, 모친은 한양 조씨 사과(司果) 조효분(趙孝芬)의 딸이다. 청계공은 덕을 베풀고 가업을 넉넉히 하여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부자간 육현(六賢)이 함께 사빈서원(泗濱書院) 경덕사(景德祠)에 올랐는데, 구봉공은 둘째이다. 1557년(명종 12) 일직현 귀미리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모습이 우뚝하고 정신이 밝고 빼어났는데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재사(才思)가 더욱 드러났다. 일찌기 『논어』 한 권을 외우면서 한 글자도 착오가 없었다. 숙부였던 학봉(鶴峯) 선생이 매우 열심히 가르쳤는데, ꡒ우리 집안의 희망이 이 아이에게 달려 있다.ꡓ고 했다. 청계 부군께서 집안에서 전해오는 신라시대 고검을 선생에게 주었으니 세칭 문장검(文章劒)이 이것이다. 관계를 마친 후 이문순공(李文純公) 가문의 사람을 아내를 맞았는데 문하에서 배웠던 여러 어진 분들로부터 학업을 닦았다. 선생은 집안에서는 대대로 내려온 문헌을 이어받았고, 나가서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받아 덕업을 성취하여 남보다 크게 뛰어났다. 계미년에는 찰방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법도에 따라 여묘살이를 마쳤다.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듬해에 예문관검열로 사원에 몸담았는데 종두병이 심하자 국왕은 내시를 보내 차도를 물었고, 심지어는 ꡒ이 사람은 좋은 바탕을 타고나 걱정이 없을 줄 알았는데, 좋은 모습이 변할까 걱정일세.ꡓ라고 했다. 병이 낫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듬해인 임진년 여름 왜구들이 쳐들어와 삼경(三京)이 무너지고 국왕의 수레가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다. 선생은 길이 막혀 달려가 문안하지 못하자 즉시 안동부로 들어가 의병을 일으켰는데, 당시 안집사(安集使) 김륵(金?) 공이 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선생은 붓을 휘둘러 격문(檄文)을 초하여 향병을 일어나라고 휘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협조하였다. 힘을 다해 성을 쌓고 무기를 갖추고 정예병을 사방으로 보내 많은 적병을 물리쳤다. 당시 숙부인 문충공은 경상우도를 초유(招諭)하고 있었는데 글을 각 고을로 보내 충의를 힘쓰게 하자 비로소 온 도(道)에서 성세가 서로 협조되어 우뚝하게 적을 방어하는 세력이 되었다. 1593년 여름 문충공이 진주에서 돌아가셨어도 선생은 부진(府鎭)을 지키느라 가서 곡하지도 못했으나, 공과 사에 있어도 통곡해 마지않을 뿐이었다. 이 해 가을, 사잇길로 국왕이 임시로 계신 곳으로 가서 다시 사국(史局:한림원)으로 들어갔고 봉교(奉敎)와 대교(待敎)로 옮겨 사필(史筆)을 잡았다. 당시에 깨끗지 못한 재상이 있었는데 있는 그대로 그의 욕심 많고 더러운 모습을 쓰자 조정에서 모두 강직함을 칭찬했다. 전적으로부터 병조의 낭관으로 옮겼다가 갑오년에 사간원 정언 겸 동궁 시강원 사서가 되었다. 여러 동료들과 같이 징사(徵士) 최영경(崔永慶)의 억울함을 논했는데, 계사(啓辭)가 선생의 손에서 나왔다. 을미년에 옥당(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이 되었고, 이조의 좌랑에서 정랑이 되었다. 앞뒤로 역임한 관직은 천거와 탄핵으로 넉넉지 못했는데 탁류에 부딪치며 깨끗함을 드러냈다. 풍채가 늠연하여 학사 조정립(趙正立)이 남에게 ꡒ내가 조정에 나온 뒤로 이조에서 전랑이 되어 청백하고 정직한 사람은 오직 김도원(金道源)과 정경임(鄭景任)만을 보았다.ꡓ라고 말했다. 사간, 사성, 집의를 역임하면서 춘방(春坊)의 보덕(輔德)을 겸하였다. 1597년(선조 30) 왜구들이 재침하자 오리(梧里)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이 제도도체찰사가 되어 내려와 선생을 불러 종사관을 시켰는데, 그를 도와 계책을 세워 모두 일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무술년에 교리 집의 사상으로 독운어사(督運御史)를 겸하였는데, 당시 명 나라 군대 10만이 우리 나라를 도우려 출정하였으나 양식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선생은 지성으로 양식을 날라 떨어짐이 없도록 하여 곤궁한 형편을 구제시켰다. 서애 유 선생이 참소를 입고 조정에서 물러나자 선생 역시 향리로 돌아왔다. 가을에 선산 부사가 되었는데, 그곳은 적병의 요충지로서 온 주위가 쓸쓸한 지경이었다. 선생께서는 흩어진 백성을 불러 모아 안주시키고 고을을 복원하여 유교로써 점차 교화시켰다.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이건하여 난리를 겪은 뒤의 문교(文敎)를 진작시키고자 했다. 계묘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시강원 필선이 되었다. 당시 동궁에는 실덕(失德)이 많아 선생은 ꡐ잘못을 후회하고 고치는 의미ꡑ에 대해 간절하게 아뢰고 수천 마디로 글을 올렸으니, 이는 대개 뒷날 혼폐(昏蔽)한 조짐을 걱정하여 먼저 공경하고 힘쓰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갑진년에 외직으로 나가 상주 목사가 되고, 병오년에 예천 군수가 되었는데,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기름에 있어 선산에서와 같이 하였다. 당시 고을 자제들은 흡연히 교화되었다. 경술년 상을 당하여 복을 벗은 뒤 내직으로 들어와 봉상시 정이 되었고, 편수관으로서 선조실록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선생은 ꡒ서애(西厓) 상공은 덕업이 혁혁하신데도 사신들의 표현은 현저히 낮추거나 높였으니 직필이 아니다.ꡓ하고 삭제하거나 덧붙여 쓰니 제도를 맡고 있던 기자헌(寄自獻)은 지극히 공평함과 믿을 수 있음에 탄복했다. 그때 부평(富平) 고을에 의옥(疑獄)이 발생했는데 오랫동안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모두 ꡒ오직 김 아무개만이 판결할 수 있다.ꡓ라고 했다. 선생은 가서 신속하게 판결을 내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복종하였다. 을묘년에 왕조실록을 편찬한 공로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 참의가 되었다. 이어서 여주 목사가 되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관직에 무심하고 조정에 있기를 즐기지 않았다. 특히 여주는 경치가 좋은 고을이기 때문에 1년을 머물렀다. 그 고을에는 청심루(淸心樓)가 있으니 바로 선왕께서 오셨던 곳임에도 오랫동안 무너져 터만 남아 있었다. 선생은 녹봉을 내어 중건하면서도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다. 맏아들 좌랑공의 죽음을 맞자 그날로 고향으로 돌아오려 하자 관리와 백성들이 길을 막고 그렇게 하지 못하고서 슬프게 돌아갈 배를 바라보며 탄식할 뿐이었다. 무오년에 동지하사로 뽑혔으나 병으로 사직했다. 이 해부터 더욱 노쇠하였고 시대는 더욱 어려워졌으나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는데도 뜻이 없었다. 이미 사직한 뒤에는 집안에서 거처하지 않고 좋은 경치를 만나면 문득 그곳에서 생활하다 늙어 죽을 계획을 세웠다. 글을 읽고 뜻을 구하며 정신을 맑게 하여 날마다 제자나 자제들과 도를 강론하고 수업하며 다시는 조정의 시사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더러운 왕실을 잊지 못해 강호의 근심을 금하지 못했다. 생질인 황중윤(黃中允)이 헌납으로 부름을 받고 선생을 찾아뵙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둥근 것을 하필 깎아 모나게 할까/ 일에 임해서는 의당 기둥을 잘 세워야 하리./ 만약 향기나는 풀이 끝내 바뀐다면/ 냄새없는 저 쑥대만도 못하게 되리니./ 우복(愚伏) 정 선생이 이 시를 듣고 편지를 보내 감탄하였다./ 고인들의 유람의 정취를 본래부터 좋아하여 명현들의 유록 시서(時序)나 한거잡영을 모우고서 ꡐ촉령록(矗?錄)ꡑ이라고 이름하고서 읽을 때마다 흥을 덧붙이곤 했다. 일찌기 가볍게 세상에 나간 것을 한탄하고 늦게 돌아와 더욱 자신을 반성하고 본원(本源)을 함양하여 연수가 부족함도 알지 못하는 듯 했다. 늘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ꡒ맹자께서 말씀하신 ꡐ곤궁하더라도 의리를 잃지 말며, 출세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말라.ꡑ는 여덟 글자의 말씀을 너희들은 마음에 새기고 잘 살펴야 할 것이다.ꡓ라고 했다. 경신년 10월 조금 편찮은 기색이 있자 종자(從子)인 시온(是?)에게, ꡐ선을 행하라(爲善).ꡑ는 두 글자로 경계하고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4세였다. 선생은 타고난 품성이 영위(英偉)하였고, 시례(詩禮)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또한 지절(志節)을 안으로 세우고 벼슬살이로 드날렸다. 일찌기 도를 들어 높게 자립했다. 학봉 선생께서 사문(師門)의 정맥(正脈)을 세웠으니 홍의(弘毅) 강대(强大)함은 선생이 가정에서 영향받고 익힌 바로서 곧 이 한부의 심법(心法)이었던 것이다. 궁하든지 달하든지 오직 도와 의를 볼 따름이었다.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섬길 때부터 한결같은 절개가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사필(史筆)을 잡고서는 추상같이 늠연하게 했고, 고을 수령이 되어서는 봄바람처럼 따스하게 다스렸고, 사헌부에 나아가서는 기강을 가지런히 했고, 경연(經筵)에 입시해서는 규계(規戒)를 다하였다. 현달한 직책을 차례로 거치로서 외직을 번갈아 맡았으며, 이험(夷險)과 진퇴 사이에서 조금도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경우에 따라 도를 믿어 호연하게 다함이 없는 분이었다. 당초 전쟁의 혼란한 시기에 참소하는 자들의 입에 걸려서 끝내는 나라를 혼미하게 하여 충현들을 모두 내쫓으니, 그러한 낌새를 알아채고 물러나 덕을 잡아 혼란을 피하고 어긋나게 행해 놓아두게 하니 작작하게 여유가 있었다. 비록 유익한 곳에는 처하여 닦은 학문을 펼치지는 못했어도 이것이 어찌 선생에게 한이 될 일이겠는가? 진작 자연으로 물러나 학문탐구에 전심하고 넉넉히 채우고 길었으며 더욱 독실하게 수양하였으니, 한결같이 도학을 이어받아 후생을 깨우치는 일로 자신의 소임으로 삼고자 했으나 70도 되지 못해서 갑자기 후학들을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바로 사문(斯文)들이 유감으로 여기는 것이다. 선생은 『학봉언행록』을 편했고, 또 가장을 찬술하여 그 시종을 갖추어 우복 옹에게 묘갈문을 청하였다. 만년에는 임천의 운정(雲亭)이란 의미를 취해서 자신의 호를 삼았으니 조상을 추모하는 도리가 지극함이다. 무릇 선생께서 도를 닦고 덕을 이룬 실상은 세상에서 논의할 바가 아니나 그 대략만을 서술함은 마치 선생의 미언소절(微言疎節)과 같은 것으로서 또한 빗돌에 모두 쓸 정도가 아닐 것이다. 정부인 이씨는 곧 문순공의 손녀로 첨정 이준(李雋)의 딸이다. 어려서 대현의 좋은 가르침을 받았고, 출가한 뒤에는 부도(婦道)를 매우 삼가 50여 년간 안살림사리에 장화(莊和) 숙목(肅穆)하였다. 아름다운 바탕과 맑은 행실로 여사(女士) 중에 으뜸이라고 했다. 선생은 처음에는 임하현 동쪽 신곡(申谷) 둔덕에다 장사를 했으나 침수의 우려가 있다고 현손 김휴(金烋)에게 현몽하여 현 남쪽 지동(枝洞) 병향 둔덕으로 이장했으니, 부인과는 합장이다.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어질고 글재주도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김시주(金是柱)는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 김시건(金是楗)은 좌승지에 증직, 김시정(金李楨)은 생원, 김시릉(金是?), 김시상(金是相)이다. 두 사위는 판관 배상익(裵尙益), 생원 이정준(李廷俊)이다. 맏이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김희(金熙)와 김임(金恁)은 생원으로 대사헌에 증직되었고, 김훈(金薰), 김후(金煦)이다. 네 사위는 참봉 이완(李?), 주서(注書) 김숭조(金崇祖), 사인(士人) 이업(李白+業)으로 참의에 증직되었고, 전상구(全尙?)이다. 둘째는 아들이 없어 김임으로 후사를 이었다. 셋째는 아들이 김휴이니 참봉이며, 사위는 김시성(金時聖)이다. 넷째는 아들 한 분이니 김도(金壽)로 부호군이다. 김시상은 자식이 없어 종부형의 아들 김기(金?)를 후사로 이었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너무 번창해서 모두 싣지 못한다. 벼슬에 오른 분으로는, 김태기(金泰基)가 주부, 김이기(金履基)가 동추, 김익기(金益基)가 부호군, 김태중(金台重)이 참봉, 김세흠(金世欽)이 교리, 김창석(金昌錫)이 정언, 김세호(金世鎬)가 한림이며, 그 나머지 성균관에 유학하는 자들이 매우 많다. 비록 궁거(窮居)하며 명위(名位)가 없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참으로 성하도다! 지금 주사(?嗣)가 된 분이 11대손 김주병(金周秉)이요, 비명을 물은 분은 상사(上舍) 김서락(金瑞洛)이다. 나 역시 외손의 한사람으로서 삼가 손을 씻고서 이 글을 썼다. 명은 이러하다./ 문소의 빛나는 가업이여, 여러 대에 빛났다네./ 청계의 가정에는 다섯 분이 꽃다웠지./ 빼어나고 특이한 자질을 선생이 타고나셨어라./ 초학시절 신동이라 칭찬이요, 약관에는 뜻이 높았더라./ 문사(文詞)가 빛이 남에 일찌기 준걸하다 이름났지./ 다른 집에서 복습하니 마치 주문(朱門)처럼 컸고,/ 학봉께서 받은 가르침을 처가에서 다시 들었다네./ 가정에서 사숙(私淑)하여 친절하게 이어 받았다네./ 처음 벼슬길에 나아감에 나라 형세 위태할 때였다네./ 이에 기운을 평치고 일어나니 의병들 굳세고 굳세었네./ 대란 막 평정되자 이어서 조정의 번열에 올랐다네./ 봉황의 날개를 밝은 조정에 드리우고 고니가 대 끝에 안은 듯 하였다네./ 좋은 직책 차례로 뽑히었고 왕의 총애는 날로 더했다네./ 중간에 어려움을 만나 나가서 가시넝쿨에 깃들었지./ 맡은 소임에다 갖은 정성 기울였네./ 나라 조짐 점차 어그러지자 벼슬살이 날로 뜻이 없어졌네./ 둥궁에서 경계의 말씀 아뢰었으니 나쁜 덕을 바로잡게 한 것일세./ 세상이 혼탁해지자 충현들을 모두 내렸다네./ 임기가 채 차기도 전에 숲과 구렁에 생각이 깊었다네./ 우리 유학엔 가르침을 남기셨으니 어찌 스스로들 힘 쏟지 않았을까./ 칠십 해도 채 못 되어 어쩌다 이승을 떠나셨나./ 시종일관 공(公)을 따르셨고 한결같은 그 절개 변함없었네./ 때로는 소회를 펼치셨으나 나가고 물러남은 오직 의리에 있을 뿐./ 문과 질이 서로 조화되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셨네./ 아득히 남긴 그 모습 생각하니 저 백세 이전일세./ 끊임없이 이어진 후손들은 대대로 유풍을 떨쳤다네./ 국왕이 그리는 정 한량없어서 관작은 더욱 높게 내려주셨네./ 저승에서 그 은혜 칭송할 테니 그 내용 돌에다 새겨두어야 하리./ 내 말은 이전의 기록이니 길이 이어져 다함이 없으리./ 후학 가선대부 전 행 돈녕부도정 안동인 권연하(權璉夏)가 삼가 짓고, 10대손 한락(翰洛)이 삼가 쓰다. - 김한락(金翰洛)(www.koreastudy.or.kr 2007)
김용 [記事] : 선조실록 202권/ 선조 39년( 1606 병오 / 명 만력(萬曆) 34년) 8월 16일 임자 4번째기사/ 유공량․송준․최동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유공량(柳公亮)을 동부승지로, 송준(宋駿)을 호조 참의로, 최동식(崔東式)을 사예(司藝)로, 유사경(柳思敬)을 예조 좌랑으로, 이수록(李綬祿)을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김용(金涌)을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조공근(趙公瑾)을 평창 군수(平昌郡守)로, 윤형(尹泂)을 서천 군수(舒川郡守)로, 윤길(尹?)을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신율(申慄)을 겸 어천 찰방(兼魚川察訪)으로 삼았다./ 【영인본】 25 책 252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선조실록 217권/ 선조 40년( 1607 정미 / 명 만력(萬曆) 35년) 10월 5일 갑자 3번째 기사/ 헌부에서 전 남병사 이광악․예천 군수 김용을 탄핵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ꡒ요즈음 군율이 해이하여 장수의 직임을 맡은 자가 자기 한몸의 편안만을 도모하고 국가의 위급함은 생각하지 않으니 식자가 한심스럽게 여긴 지 오랩니다. 지난번 전 남병사(南兵使) 이광악(李光岳)은 북변(北邊)이 매우 어려운 때를 당하여 감히 거만스레 병을 칭탁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하서(下書)하여 회유(回諭)하도록만 청하였으니 당연히 석고 대죄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고 몹시 거만스러운 사의(辭意)로 다시 천청(天聽)을 번독스럽게 하여 기필코 체직되고야 말려 하였으니 신하의 의리를 크게 저버렸습니다. 물정이 몹시 분개하고 있으니 잡아다 국문하고 그 도(道)에 충군(充軍)시키소서. 예천 군수(醴泉郡守) 김용(金涌)은 술마시는 것을 일삼고 있으므로 관무(官務)가 많이 폐지되어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고 있으니 파직시키소서.ꡓ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영인본】 25 책 369 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司法) / *군사-군정(軍政)(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善山 / 名宦 / 新羅 日夫 眞平王三十六年爲軍主 高麗 李得辰 洪武癸亥五月倭寇?入州境焚州?得辰保觀心平寇退築邑城以守寇不復至邑人德之寫眞以祀焉 本朝鄭以吾 知州事淸而簡文治有餘 崔關 禹均 金爾音 俱爲府使 李希文 丙辰飢荒希文載?輿粥晨出夜入民無餓死 李吉培 政淸訟簡且勤於勸學以校生中科第者多朝庭褒之特加二資 金子? 修繕學校 權得經 爲府使 舊增金宗直 柳希轍 居官淸勤 新增金涌 有淸白之操壬辰亂/ <하권0455-4>/ 後始建學校文化大行 趙?韓 文雅爲治儒風蔚興 朴弼健 當戊申之變率金烏鎭兵馬擒希亮輩錄決幾奮武功臣號封錦陵君(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安東 / 壇廟 /... 黙溪精舍 在府東六十里立祠祀掌令 玉沽 大司諫 金係行 贈參判 金涌 泗?影堂 在臨河縣東三里立祠祀 贈判書 金璡配享司成 金克一 察訪 金守一生員金明一 文忠公金誠一 司成 金復一 栢麓里社 在奈城縣南立祠祀校理 李宗準 進士 李弘準 大司諫 鄭惟一 參奉 洪浚亨 觀察使 金聲久 正郞 權斗寅(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安東 / 樓亭 / ...白雲亭 在臨河縣北二里察訪 金守一所構○金璡詩鑿壁開亭翠?頭江山明媚拂人眸日臨鏡面魚紋動雲掃天心雁字稠百里游歌曾物色一區花草亦光木樽前知有無窮樂只恐兒孫醉似劉○金誠一詩喜看堂/ <하권0535-3>/ 構傅巖頭景物依然集遠眸兩岸秋山霜後爭一江春樹雨來稠星垂南極應難老?八周詩可匹休勝事欲歌無好語淸詞誰借建安劉○李安訥詩永嘉東面襄西頭地僻亭高爽客眸玉鏡涵天春浪細石屛圍野晩蜂稠江山父子能相保麴孼功名早自休聞說龍蛇兵火遠桃源元不屬?劉○金涌詩白雲亭子翠微頭雲去雲來幾入眸潭影悠悠飄練闊山容皓皓變衣稠萬千氣象還多感十二詩思??休坐臥於斯歌又哭吾知免矣慕天劉 ...(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安東 / 人物 / ...金涌 守一之子/ <하권0541-2>/ 號雲川登第歷敭淸顯正直持論風彩動朝官至兵曺參議以原從功 贈吏曺參判後人祀于黙溪精舍 鄭士信 登第又中重試歷修撰至判決事 ...(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용호한록 / 龍湖閒錄二 / 第六冊 / 三一七, 東國文獻院宇篇 / ...安東甫溪院 萬曆丙子建丙辰額 , 退溪 李滉․西崖 柳成龍․鶴峰 金誠一。/ ○三溪院 萬曆戊子建順治庚子額 , ?齋 權撥。/ ○周溪院 萬曆壬子癸酉建額 , 松潭 具鳳齡․晦谷 權春蘭。/ ○屛山院 萬曆辛丑建 , 西崖 柳成龍, 贈?議 柳袗。/ ○道東院 丙子建 , 祭酒 禹倬。/ ○?城院 萬曆壬辰建 , 松岩 權好文。/ ○勿溪院 順治辛丑建 , 上洛 金方慶․鶴沙 金應祖。/ ○鏡光院 隆慶戊辰建 , 栢竹 裵尙志․?齋 李宗準․松巢 權宇․敬堂 張興孝。/ ○魯林院 癸巳建 , 賁趾 南致利。/ ○道淵院․寒崗 鄭逑。/ ○泗濱院 乙丑建 , ?溪 金璡, 藥峰 金克一 龜峰 金守一, 雲岩 金明一, 鶴峰 金誠一, 南岳 金復一, ○德峰院, 甲申建 雲川 金涌。/ ○?溪精舍 丙子建 , 凝溪 玉沽, 宗白 金係行。/ ○伊溪精舍 甲申建 , 松巢 權宇。/ ○栢麓里祠 乙丑建 , ?齋 李宗準․文峰 鄭惟一․梅軒 洪俊亨。/ ○古昌廟, 權太師幸․金太師宣平․張太師貞弼。/ <2권22>...(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三 / 丙申下 / 十二月 / 十四日 丙子 / 院啓司贍正 田見龍爲人鄙?曾爲守令多有冒濫之事且居鄕里顯有豪制之弊請罷○李廷馨拜吏參 柳永慶拜大諫 金涌拜吏正 金藎國拜吏佐 朴鼎吉拜咸悅 趙應瑞拜萬頃 安璡拜金堤 成恬拜陽川 丁鳳壽拜康翎 林忠?拜奉僉(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六 / 甲辰萬曆三十二年宣祖三十七年上 / 二月 / 十一日 壬辰 / 余與安大進觀魚於盤津醉歸○姜?拜典翰 金涌拜執義 閔德男拜正言 成啓善拜舒川 金善徵拜金溝 李效元拜承旨 朴大謙拜禮佐 李振先拜兵正 林●拜茂長(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七 / 乙巳萬曆三十三年宣祖三十八年上 / 六月 / 二十一日 甲子 / 辛汝和拜衣直 趙弘緖拜導簿 尹安性拜判決事 李有賓拜資簿 金天英拜贍奉 安德仁 奇廷獻拜兼參軍 權益中拜工佐 柳悅拜勳都 韓潔拜訓副 吳定邦拜訓鍊都正 柳成民 金挺立拜引儀李 缺 拜贍直 洪汝亮拜贍簿 沈仁輔拜禁都 曺倜拜宰參 曺倬拜校理 許?拜工正 柳益保拜四山監役 崔挺豪拜 二字缺 朴?拜奉副 沈挺世拜儲簿 朴成章拜四山監役 韓汝儉拜禁都 柳永 缺 拜監役 柳世溫拜廣簿 曺明?拜火坐 李挺能拜濟原 李志完 金涌拜典籍 / <035_0684>/ 柳永範拜平直 成俊耈拜校理 盧勝拜濟奉 愼守身拜金井 南以傑拜衣別 洪 缺 拜厚坐 李山垓拜僕簿 嚴滉拜器參 閔汝任拜持平 洪有煥拜四山監役柳灝拜摠歷 崔洛拜奉簿○府啓軍器判官 邊應角 吏曹考講時終始巧避請罷引儀 李匡國年紀衰耗玄禮祥門地卑微請竝遞淸安縣監 申景逸赴任之後專事?克請罷○院啓禮賓主簿 崔彦潭居官不謹請罷漢城參軍 尹肇身有廢疾請遞(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九 / 丙午下 / 七月 / 十一日 戊寅 / 府啓左參贊 宋言愼頃因右相箚子請解其職此固出於自明一之猶可至於再啓多費辭說有若與大臣相校者然請推又啓曰忠順衛忠贊衛定虜衛等各司書寫處及坊中易書勿爲定送何如○李天文拜泰安 李愼元拜淳昌 李必榮拜持平 李禎慶拜務安 李善復拜承旨 朴魯賢拜說書 梁應沆拜乶下 李智覺拜柔遠 趙德秀拜撫夷 李卿雲拜兵正 吳汝撥拜兵佐 金涌拜司藝 申景禎拜上土 李受訓/ <035_0799>/ 拜端川 姜仁立拜碧團 宋興宗拜靑水 朴 缺 拜禁都(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九 / 丙午下 / 八月 / 十六日 壬子 / 李綏祿拜尙州 金涌拜醴泉 尹?拜舒川 趙公瑾拜平昌 金孝男拜器簿 鄭希玄拜加里浦 曹明?拜說書 柳思敬拜禮佐 崔東式拜司藝 柳公亮拜承旨 鄭鳳壽拜監察 尹造拜江都 宋駿拜戶議 申慄 / <035_0813>/ 拜魚川 李命男拜典籍 蔡慶先拜直講(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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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