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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84-4:김용(1606.8.16-1607.10.5)
작성자장병창 @ 2013.03.05 20:45:55

  예천고을원(84-4) :김용(1606.8.16-1607.10.5) : 정직한 마음을 가진 고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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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 [記事] : 한국사료 총서/ ID : su03/ 朝鮮時代 承政院과 春秋館은 왕권의 측근에서 王命의 出納을 관장하고 朝廷의 時事를 기록․정리하는 임무를 띤 기구이다.  승정원은 太祖원년(1392) 7월의 관제조직에 의하여 中樞院으로 출발하였다. 초기에는 왕명출납과 더불어 軍國機務를 관장하였으나, 그 권한이 막강해짐에 따라 太宗代에 이르러 군기는 義興三軍府에 이관시키고, 별도로 왕명출납만을 담당하는 기구를 개설하여 승정원이라 하였다. 대개 승정원에는 정3품 堂上官들인 承旨 6인, 즉 도승지․좌우승지․좌우부승지․동부승지가 있고 정7품직인 注書 2인이 있었다. 그 뒤 정7품의 事變假注書 1인을 더하였으며, 이외 다수의 胥吏들이 있었다. 6승지는 分房하여 각각 吏․戶․禮․兵․刑․工房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그리고 정7품직의 주서는 특별히 堂后官이라 불렀는데, 이는 그들의 거처하는 방이 堂后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들이 기록한 사초를 堂后日記라 하였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畢齋 金宗直의 『畢齋堂后日記』, 雲川 金涌堂의 『堂后日記草本』, 權斗紀의 『堂后日錄』, 필자미상의 『堂后日記』 등은 모두가 이들이 당후관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題名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춘추관은 高麗의 藝文春秋館제도를 답습하여 敎命의 논의와 국사편찬 등의 일을 관장하였는데, 태종때에 이르러 예문관과 춘추관이 분리되면서 춘추관은 하나의 兼官職廳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1품 領事에서부터 監事․知事․同知事․修撰官․編修官․記注官․記事官의 직제로 구성되는 총 78인이 관원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춘추관직을 겸하는 관원을 넓은 의미의 史官이라고는 하나, 실질적으로는 일상의 사관업무를 수행하는 예문관의 參下職인 奉敎(정7품, 2인) 待敎(정8품, 2인) 檢閱(정9품, 4인) 등 총 8인을 사관이라 하였다. 이들은 그날그날의 조정시사에 대한 史草를 작성하고, 이를 종합하여 時政記를 편찬하였으며 이는 바로 실록편찬의 기본 자료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소개하는 李瀏의 『春秋館日記』 등은 모두 겸관직 춘추관원이 쓴 기록이지만, 특히 『兼春秋日記一事』, 『庚午春夏江原道記事冊』, 『工曹兼春秋日記』, 『兼春秋日記』, 『兼春秋記』등은 호조나 공조 및 지방관원이 겸춘추관원으로서 기록한 것인데, 이는 中宗이후 각 도의 都事 및 문관 수령에게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 畢齋堂后日記 :『畢齋堂后日記』는 ?畢齋 金宗直(1431, 세종13~1492, 성종23)이 成宗13년(1482, 임인) 11월 초1일부터 12월 25일까지 2개월간 기록한 것이다. 김종직은 圃隱 鄭夢周․冶隱 吉再로부터 그의 아버지 金叔滋로 이어지는 학통을 물려받아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며, 嶺南學派의 宗祖로 받들어진 인물이다. 그의 생전에 「弔義帝文」을 지어 世祖의 왕위찬탈을, 項羽가 楚懷王을 죽인 중국 고사에 비유하여 비난하였다. 사후 그의 제자인 金馹孫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에 이를 실은 것이 빌미가 되어 1498년(연산군4)에 戊午士禍(史禍)가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그는 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그의 많은 저술들이 이때 소실되고 『畢齋集』, 『遊頭流錄』, 『靑丘風雅』, 『畢齋堂后日記』 등 몇가지 만이 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필재당후일기』는 점필재의 17세손인 金炳埴宅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서, 책의 규격은 39x34․5㎝, 1책44장으로 된 필사본이다. 책의 앞뒤장이 마모되어 낙장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양호한 상태이다.  일기의 서술양식은 년월일․날씨․經筵常 與否를 먼저 쓰고 그 다음에 본론에 해당하는 그날의 시사를 기록하여 대개 일반적인 시정기양식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堂后日記草本 (雲川先祖 經筵奏對 天) : 雲川 金涌(1557, 명종12~1620, 광해군12)이 남긴 經筵記錄이다.  김용은 본관이 義城으로 守一의 아들이며, 鶴峰 金誠一의 조카이자 退溪 李滉의 孫壻이다. 임진왜란 당시 향리인 安東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조정의 여러 관직을 거쳐 1609년에 奉常寺正 兼 春秋館編修官으로서 『宣祖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병조참의, 여주목사 등의 관직을 지낸 인물이다. 『堂后日記草本』은 원래 그 표제명이 『雲川先祖經筵奏對』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그 후손에 의하여 붙여진 제명 같으며, 天․地․人 3책으로 된 필사본을 日帝시기 朝鮮史編修會에서 재 등사하여 1책으로 제본한 것이 國史編纂委員會에 소장(도서번호 B6B-80)되어 있다.  내용은 1615년 乙卯(광해군7) 윤8월 초6일에서 1616년 丙辰 6월 18일 사이의 경연내용을 기록한 것이지만 빠진 날짜가 매우 많다. / 兼春秋日記一事 : 1629년 己巳(인조7) 10월 27일에서 12월 11일까지의 겸춘추일기로서 월일․날씨와 함께 간략한 시사를 抄錄하였다. 末尾에 通訓大夫 行戶曺正郞 兼 春秋館記注官 臣 羅緯素라 하여 그가 썼음을 적기하였다. 이 책은 규장각에 소장(No. 20902)되어 있는 도서로서 규격은 27x24㎝, 1책6장으로 되어 있다. / 庚午春夏江原道記事冊 : 1630년(인조8, 경오) 6월 1일자로 高城郡守 겸 춘추관편수관 許某가 上啓한 강원도 겸춘추기사책이다. 정월에서 5월까지의 월별 주요 상황을 보고한 것이지만 주로 그 달의 大雪․大風 등 기상상태를 보고한 것이고, 3월에는 嶺西山郡에 逃來한 漢人이 村氓을 侵擾하였다는 내용이다. 규장각도서(No. 25293)로 규격은 39x29․5㎝, 1책2장이다.  / 工曺兼春秋日記 : 前工曺佐郞 池德海가 겸춘추기사관으로서 1630년(인조8, 경오) 9월 16일 壬辰 ~ 9월 26일 壬寅까지 기록한 工曺관계 기사이다, 이 책은 규장각도서(No. 20905)로서 규격은 25x27㎝, 1책5장으로 되어 있다. / 兼春秋日記 : 公淸道都事 兼 春秋館記事官 都愼修가 1634년(인조12, 갑술) 2월 ~ 6월까지 湖西지방에 관한 내용을 각 월별단위로 보고한 기록이다.  2월은 湖西列邑의 大同法실시 便否에 대한 내용이고, 3월은 養戶革罷문제, 4월은 湖西士習과 書院․鄕校관계, 5월은 호서에 부여된 樂工․樂生保의 ?減문제, 6월은 호서 沿海郡邑의 軍餉․??문제 등을 적기하였다. 규장각도서(No. 20903)로서 규격은 31․7x24㎝, 1책6장이다. / 兼春秋記 : 奉直郞 전 공청도도사 겸 춘추관기주관 李某가 기록한 辛未年 7월~11월의 각 월별 겸춘추기이다.  7월은 逃故․物故에 관한 문제, 8월은 餘丁號牌문제, 9월은 各衙門 匠人의 罷牌문제, 10월은 公淸右道 山郡․海郡의 土地肥瘠문제 그리고 11월은 號牌․軍籍문제 등을 적기하고 있다. 규장각도서(No. 22182)로 규격은 31․7x24㎝, 1책6장이다. /

 

  春秋館日記 : 춘추관기사관 李瀏(1662, 경종3~1716, 숙종42)가 1693년(숙종19, 계유) 10월 27일~11월 13일까지의 조정시사를 기록한 춘추관일기이다. 이유는 原州李氏江陵公派 仁健의 7세손으로 1690년(숙종16, 경오)에 문과에 급제하여 奉常寺奉事를 거쳐 1694년(숙종20, 갑술)에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었고, 병조좌랑․茂長縣監 등의 관직을 지내었다. 『春秋館日記』는 바로 그가 춘추관기사관으로 있으면서 抄錄한 사초로서 亂草로 쓰여져 있다. 이 책은 그의 종손인 全南 海南의 李基旭宅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서 규격은 21․2x15․2㎝, 1책76장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매일별로 분책된 것을 1책으로 합본하여 그 규격이 일정하지 않다.  기재양식은 임금이 소재한 궁궐과 경연입시, 날짜, 좌목을 쓴 다음에 본론인 조정시사를 기록하였다. / 堂后日錄 : 堂后官인 承政院假注書 權斗紀(1659, 효종10 ~ 1722, 경종2)가 기록한 당후일기이다.  권두기는 본관이 안동으로 右?贊 ?齋 權?의 5세손이며, 濡의 아들. 1687년(숙종13)에 司馬試, 1696년(숙종22)에 丙子式年文科에 급제한 뒤 승문원정자․예조좌랑․海運判官․정언․지평 등의 관직을 지냈다.『堂后日錄』은 乾․坤 2권으로서 乾卷은 1700년(숙종26, 경진) 11월 초7일부터 다음 해인 1701년 2월 초2일까지 되어 있으나, 실제는 11월 초7일에서 11월 18일까지와 다음 해 2월 초2일자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2월․1월 일기는 빠진 셈이다. 그리고 坤卷은 건권을 이어 1701년(숙종27, 신사) 2월 초3일에서 같은 달 12일까지를 적기하고 있다. 이 책은 원 소장자가 慶北 奉化의 權徹淵으로 되어 있는데, 1929년 일제의 조선사편수회가 採訪하여 등사해 놓은 사본이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도서번호 B6B-79)되어 있다. 내용은 연월일․날씨와 승정원 入仕座目, 임금의 소재궁궐 및 상참경연여부 그리고 각 조정시사를 적기하고 있다. / 堂后日記 : 1735년(영조11, 을묘) 윤4월 23일의 당후일기이다. 필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기에 나타난 堂后官이 假注書 李象靖이고, 또 이 등사본의 말미에 원소장처가 安東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상정이 기록한 것 같다. 大山 이상정(1710, 숙종36~1781, 정조5)은 退溪 李滉의 학통을 이어 받은 性理學者로서 안동의 大夕山에 大山書堂을 열어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쓴 인물이다.  이 책은 단 하루 동안의 일기로서 임금의 晝講入侍 때에 知事 金在魯, 特進官 李眞淳 등이 참석하여 논의한 조정시사를 기록한 것으로, 재 등사본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도서번호 B6B-79a)되어 있다.(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한국사료 총서/ 계암일록 상 / 溪巖日錄 一 / 癸卯 / 七月  / 十四日  / 晴, 金善山涌送訊, 往見于日休堂, 仍與善山及諸兄, 至以志家, 善山大醉,(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한국사료 총서/ 계암일록 상 / 溪巖日錄 一 / 甲辰 / 八月  / 二十日  / 陰, 食後往見判事兄, 聞尙牧 金涌氏, 被酒戱慢, 監司 李時發見罷, 金公之酒/ <상 23>/ 書院儒生會奠 / 失, 不知如何, 而李之量亦可知矣, 景望丈自廬江, 金溪丈自浮浦皆至養正堂, 俄而李中立 馨遠 馨甫, 自月川尋余到雪月堂, 余?還下, 馨遠向周村, 中立 馨甫與二丈共夕飯, 無酒爲恨, 盖二丈自上里至矣, 與四客話, 夜久乃宿(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한국사료 총서/ 계암일록 상 / 溪巖日錄 一 / 丙午 / 八月  / 二十三日  / 晴, 聞臺諫請罷增廣初試, 盖今年試事, 極無形樣, 嶺南左右道旣如此, 黃海道監試, 不得出榜, 溪城則紊亂尤甚, 非徒公道掃如, 以誤合割封, 中選者皆非/ <상 62>/ 金涌 / 已試券也, 或以疑文參進試, 或以詩賦參生試, 或入等而皮封貫於見出者, 券則終不中, 或見黜而皮封貫於入等者, 券則遂得中, 兩所壯元以下, 無不皆然, 二所進壯尹暾之子, 上疏白其事, 朝廷下禮曺刷之, 一榜皆然, 宰相子弟, 皆不之問, 而猶摘五六十券, 患失之輩, 隱匿試券, 雖被督令, 終不納焉, 末世士習可見矣, 自國初以來, 京外試所, 一或有變, 則皆罷榜, 一人試券, 有違法者, 亦皆罷榜, 今則嶺南左右道, 監試東堂, 黃海及京中無前之變如此, 又?四十年?位之大慶, 實非尋常科擧比, 人無愚智, 有口者皆曰罷可也, 宰相子弟, 利於擧子數?, 自首相 柳永慶, 大憲 成泳, 皆不欲罷之, 柳之子壻姪, 成之子弟, 自中選故也, 成迫於衆論, 不得不啓, 而思必不罷之端, ?請前年式試而罷之, 爲憲長者若此, 安得回天乎, 諸臺諫猶力請罷之, 終未蒙允./  二十六日  / 晴, 堤川叔氏, 金尙州涌氏問訊, 夕龍人來, 李兄問成佐?浹, 劑送補中益氣湯, 加十餘材二貼.  / 二十八日  / 陰, 平甫兄傳義精書, 聞豊山李佐郞丈來河陽宅, 而病未拜.(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한국사료 총서/ 계암일록 상 / 溪巖日錄 三 / 丁巳 / 正月  / 二十一日  / 晴, 本道監司 成晋善, 爲治無狀, 一路??, 當其除授, 已有臺議, 恬不知避, 去秋又有臺評, 而非徒不遞, 且令限歲前仍任, 今則可以去矣, 朝廷尙未差, 其代得久住, 李泂, 又上?論爾瞻成本西人, 趨付時輩, 行已鄙陋, 觀於吳益煥慶宴一事可知矣, 前秋臺評, 出於掌令 琴愷, 愷亦以其妻家訟事, 挾私憾而發矣, 新監司望十餘人, 吳澐 金涌 權泰一皆與焉, 吳之老病, 靑松僻郡, 尙不堪下手, ?嶺南方伯乎, 以此而猶擬望, 眞兒戱也, 都事 安璹, 亦時輩之卒徒也, 前都事 林?, 前十月見遞.(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국역비변사등록 새창/ 기사제목 江原監司薦 .  / 왕 재위년도  광해군 9년  / 월일  광해군 9년(1617) 5월 ○일 / 강원감사 추천 / 김용(金涌)․박사제(朴思齋)․민인백(閔仁伯)․이이경(李?慶)․민여임(閔汝任)․○이욱(李稶)․이심(李?)․원탁(元鐸)․장세철(張世哲)(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8월 10일 신묘 7번째 기사/ 왜적의 동향, 혜성의 변고, 풍수, 환도, 명군의 유병 문제를 의논하다/ 상이 편전(便殿)에 나아가 영중추부사 심수경(沈守慶), 좌의정 윤두수(尹斗壽),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병조 참판 심충겸(沈忠謙)을 인견하였는데, 동부승지(同副承旨) 장운익(張雲翼), 주서(注書) 남이신(南以信), 봉교(奉敎) 조수익(趙守翼), 검열(檢閱) 김용(金涌)이 입시(入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오늘의 적정(賊情)이 어떠한가?ꡓ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ꡒ근자에 한효순(韓孝純)의 장계를 보니, 적이 물러갔다고 하였습니다.ꡓ하고, 충겸은 아뢰기를, ꡒ근일 비록 강화(講和)를 한다고는 하지만 중국 군사가 적에게 화친(和親)과 조공(朝貢)을 애걸하는 형편이니, 어찌 적이 돌아간다고 기필할 수 있겠습니까.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오늘의 일에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겠는가?ꡓ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ꡒ전라도의 양곡을 경상도로 운송하여 공수(攻守)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 상책(上策)입니다.“ 하였다. 상이 수경에게 이르기를, ꡒ나의 죄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다시 만나게 될 줄 알았겠는가.ꡓ하니, 수경이 아뢰기를, ꡒ노병(老病)으로 인하여 어가(御駕)를 수행하지 못하고 지금에서야 나와서 알현하니 황공합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왕자가 나온다고 하니, 황은이 망극하여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러나 서장(書狀)1979) 중에 ꡐ연해(沿海)의 8성(城)에 적이 굴혈을 이룬 채 여전히 머물러 있고 돌아가지 않는다.ꡑ 하였다. 이 적은 본래 잠시의 노략을 목적으로 나온 것이 아닌 데다가 별로 패전한 적도 없으니 어찌 돌아갈 리가 있겠는가. 중국군이 단지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군사가 철수할 경우 아침에 중국군이 떠나면 저녁에는 왜적이 쳐들어올 것이다. 저 왜적을 변경(邊境)에 둔 채로는 나라를 수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방도가 없다. 경략(經略)과 제독(提督)도 품첩(稟帖)의 보고만을 믿고 오래지 않아 철수하여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하니, 반드시 송 경략(宋經略)과 이 제독(李提督)이 들어가기 전에 이 적을 제거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이 적이 우리 나라를 다 함락하였다가 하루아침에 서울을 버리고 떠난 것은 더욱 그 속을 헤아릴 수 없다. 저들이 중국군을 두려워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그렇지 않다. 벽제(碧蹄)의 전투에서 약탈과 살륙을 자행하다가 잠깐 퇴각한 것은 중국군의 마음을 느슨하게 하려는 데 불과한 것이니, 중국군이 돌아간다면 반드시 흉모를 펼쳐 날뛸 것이다. 중국군이 철수할 때까지는 부산만을 점거하려 하기 때문에 이미 함락한 진주를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 또 경주를 도모하고자 하니 마땅히 시기를 놓치지 말고 물리쳐야 한다. 우리 나라는 평상시부터 양병(養兵)할 줄을 몰랐다. 중국에서는 5정(丁) 중에서 1정을 뽑아 평소에 훈련을 시키기 때문에 농부와는 달리 오직 전투에만 종사하고 있으나, 우리 나라는 가난하여 미리 양병을 하지 못하므로 군사란 자들이 농부와 다른 것이 없으니, 비록 십만 명을 뽑는다 한들 어찌 왜적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ꡓ하였다. 항복(恒福)이 아뢰기를, ꡒ혜성(彗星)에 대한 일을 김상(金相)에게 물었더니, 자세히 답신해 왔습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뭐라고 말하던가?ꡓ하자, 항복이 아뢰기를, ꡒ혜성이 나타난 것은 우리 나라의 응보가 아니라 바로 중국에 근심거리가 생길 조짐이고, 지난 정축년의 혜성은 우리 나라가 적의 침입을 받고 침입해 온 왜적 중에 한 장군이 죽을 조짐이니, 지금 왜가 돌아가지 않을 이치가 없으며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이번에 나타난 혜성의 보응은 내란(內難)을 예고하는 것이니, 절강(浙江)이 다시 침범당하는 변란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지난 정축년에 치우기(蚩尤旗)가 나타났는데 그 별이 매우 장대하였다. 이 별이 기성(旗星)과 미성(尾星)에서 나와 우성(牛星)과 두성(斗星)에서 사라졌는데, 기성과 미성은 연(燕)의 분야(分野)이고 우성과 두성은 월(越)의 분야이므로 조선이 침입을 받고 왜적이 마침내 패망할 것이라고 했다 하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매우 신묘(神妙)하다. 최우(崔遇)가 북도(北道)로 갔다가 숙천(肅川)으로 와서 복명(復命)할 적에 김상과 서로 주고 받은 말을 물어보니, 김상이 ꡐ왜적이 4월에 물러갈 것이다.ꡑ라고 했다 한다. 이 말이 범연히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점(占)이 용하기 때문에 언급하는 것이다.ꡓ하니, 항복은 아뢰기를, ꡒ유 원외(劉員外)도 역시 ꡐ이번에 성변(星變)이 있었지만 그대 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ꡑ 하였고, 김상도 ꡐ10월 이후에는 그대 나라가 침략을 면하게 될 것이다. 이 혜성은 중국의 우환(憂患)을 가리킴이니, 외환(外患)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내란(內難)마저 있을 것 같다.ꡑ 하였습니다.ꡓ하고, 두수는 아뢰기를, ꡒ김상이 말하기를 ꡐ풍중영(馮仲纓)와 왕종성(王宗盛)이 한양(漢陽)의 풍수(風水)를 보고 극찬하면서 「2백 년 만에 재액(災厄)이 있을 것이나 그 뒤로는 무사할 것이다.」 했다.ꡑ 하였습니다. 이 기회에 조사(朝士)를 보내어 가서 만나 보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지리(地理)에서 영산(迎山) 역수(逆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이름인가?ꡓ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ꡒ이는 필시 산수(山水)의 왕래를 인하여 말하는 것입니다.ꡓ하였다.

 

  수경이 아뢰기를, ꡒ천문(天文)은 그대로 괜찮지만 지리는 워낙 허무한 것입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천문과 지리는 하나인데 어찌하여 두 가지로 보는가.ꡓ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ꡒ흉모를 예측하기 어려운데, 군신(群臣)들은 모두 내가 서울로 가야 한다 하니, 나는 가겠으나 내전(內殿)은 적의 형세를 보아가며 진퇴(進退)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ꡓ하니, 수경은 아뢰기를, ꡒ묘사(廟社)의 신주(神主)와 내전은 뒤에 가도 괜찮습니다.ꡓ하고, 두수는 아뢰기를, ꡒ당 명황(唐明皇)이 촉(蜀)으로 파천(播遷)하였을 적에 숙종(肅宗)이 양경(兩京)1980) 을 수복하고서 도성(都城)으로 들어갈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때 사사명(史思明)1981) 이 아직 버티고 있었으므로 인심을 되돌리는 것이 회필(回?)1982) 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숙종이 이필(李泌)의 말을 받아들여 현종(玄宗)에게 표문을 올려 청하여 모시고 장안(長安)으로 들어가서 인심을 수습하였습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계획은 마땅히 북쪽으로 건강(建康)을 바라보아 중원(中原)의 기대를 묶어둔 것 같이 하여야 됩니다. 지금 만약 서울로 가는 것을 늦춘다면 사방의 기대가 점차 해이해 질 것입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우리 나라의 사세는 중국과 다르다. 서울로 전진(前進)하자는 의견은 옳지만, 이 적을 방어하는 것이 어찌 사사명을 방어하는 것과 같겠는가. 비록 전진하더라도 나만 가고 내전은 머물러 있으면서 기다려야 할 것이다.ꡓ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ꡒ소신의 생각에는 의주(義州)에서 정주(定州)까지 오시는데도 서둘러 오신 것이 아닌데 지금 여기서부터는 전과는 달라야 한다고 여깁니다. 서울서부터 수백 리 밖까지 죽어가는 백성이 하루에 수백 명씩으로 백성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어미의 젖을 바라듯이 거가(車駕)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으니, 방비(防備)도 물론 긴급하지만 인심을 묶어두는 것이 우선인데, 만약 대가(大駕)가 전진하지 않는다면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대가가 머무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로 도회(都會)를 이루는데 도성 사람들은 매양 대가가 언제 전진하느냐고 묻고 있으니, 만약 오래 머물고 바로 전진하지 않으면 인심이 실망할 것입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내가 아무리 미혹하다 할지라도 어찌 모르겠는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누군들 없겠는가. 지금이 어떤 기회인데 경솔히 하겠는가.ꡓ하니, 운익이 아뢰기를, ꡒ재령(載寧)에는 주가(駐駕)하실 수 없다고 합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그렇다면 해주(海州)로 가려는 것인가? 해주성 밖에는 굽어볼 수 있는 산이 있다고 하였다.ꡓ하니, 수경이 아뢰기를, ꡒ연안(延安)에는 비록 관사(官舍)가 있지만 해주만은 못합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이 문제는 그만해 두자. 자문에 관한 일이 중대하다.ꡓ하니, 운익이 아뢰기를, ꡒ소신의 생각에는 경략 아문(經略衙門)에 왕자께서 서명(署名)한 서장(書狀)을 보냈으면 합니다.ꡓ하고, 수경이 아뢰기를, ꡒ별로 숨길 만한 내용이 없다면 보내는 것이 좋습니다.ꡓ하였다.

 

  두수가 아뢰기를, ꡒ오억령(吳億齡)이 유병(留兵)에 관한 일로 사람을 보내왔으니 회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ꡓ하니, 운익은 아뢰기를, ꡒ유병에 관한 일은 우선 제쳐놓고, 이 적을 먼저 제거할 내용을 앞에 진술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ꡓ하였다. 항복은 아뢰기를, ꡒ간곡히 진술한 뒤에, 유병에 관한 문제는 적이 물러가기를 기다려 정하자는 내용으로 글을 만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서둘러 하라. 만약 일도 주선하기 전에 철수하여 돌아간다면 미치지 못할 걱정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다.ꡓ하였다./ 【영인본】 22 책 67 면/ 【분류】 *역사-고사(故事) / *왕실-국왕(國王) / *왕실-행행(行幸)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과학-천기(天氣)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註 1979]서장(書狀) : 왕자의 서장. ☞ / [註 1980]양경(兩京) : 낙양(洛陽)과 장안(長安). ☞ / [註 1981]사사명(史思明) : 당(唐)나라 때 영주(寧州)의 오랑캐로 돌궐종(突厥種)이다. 현종(玄宗) 때 안녹산(安祿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녹산이 죽은 뒤에 스스로 대연 황제(大燕皇帝)라고 칭하였으나 그 자식 조의(朝義)에게 시해(弑害)되었다. ☞ / [註 1982]회필(回?) : 환가(還駕). ☞(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8월 16일 정유 3번째 기사/ 율곶의 선상에서 한 배에 탄 사람으로서의 합심을 강조하다/ 상이 율곶(栗串)에서 나룻배를 탔는데, 도승지(都承旨) 심희수(沈喜壽), 좌승지 홍진(洪進), 좌부승지(左副承旨) 정희번(鄭姬蕃), 동부승지 장운익(張雲翼), 부제학(副提學) 이곽(李?), 직제학 백유함(白惟咸), 교리(校理) 김권(金權), 주서(注書) 심언명(沈彦明)․남이신(南以信), 봉교(奉敎) 조수익(趙守翼), 검열(檢閱) 김용(金涌)이 입시(入侍)하였다. 상이 이곽에게 이르기를, ꡒ그대가 경연(經筵)의 장관(長官)이니 내가 한 마디 하고자 한다.ꡓ하니, 이곽이 앞으로 나아가 부복(俯伏)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옛사람이 말하기를 ꡐ물이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엎기도 한다.ꡑ 하였고, 또 ꡐ한 배를 타면 원수 사이도 한 마음이 된다.ꡑ고 하였다. 오늘 나도 배를 띄우기도 하고 배를 엎기도 한다는 뜻을 생각할 것이니 그대들도 한 배를 탔다는 뜻을 생각하라.ꡓ하니, 괵이 아뢰기를, ꡒ지금 배를 함께 탄 사람들은 모두 경악(經幄)의 신하들인데 성교(聖敎)가 이에 미치니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조정에서 성상의 뜻을 봉행하지 못하여 오늘의 사태가 있게 하였으니, 앞으로도 이러한 성상의 뜻을 봉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ꡓ하고, 심희수가 아뢰기를, ꡒ백성을 물에 비유하신 것과, 한 배를 탄 사람은 서로 합심해야 한다고 하신 경계에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ꡓ하고, 홍진이 아뢰기를, ꡒ지금 상의 전교를 받들고서 만조 제신(滿朝諸臣) 중에 누가 힘을 다하여 일심(一心)이 되기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곽의 말이 절당(切當)2006) 합니다. 이후로도 성상의 뜻을 봉행(奉行)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죄가 클 것입니다.ꡓ하였다. 희수가 또 아뢰기를, ꡒ상께서 이런 전교를 내리시니, 우리 나라 만세의 복입니다.ꡓ하고, 이곽이 아뢰기를, ꡒ조정에 있는 신료(臣僚)들이 한 배를 탔다는 뜻을 잊지 않는다면 자연히 화합(和合)될 것입니다.ꡓ하고, 장운익이 아뢰기를, ꡒ성상께서는 전부터 매양 화합시키고자 하였으나 신료들이 봉행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오늘 마침 배를 탔었기 때문에 이 배를 본 김에 말하였을 뿐이다.ꡓ하였다./ 【영인본】 22 책 75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註 2006]절당(切當) : 사리에 맞음. ☞(www.history.go.kr 2007)

 

  김용 [記事] :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2월 3일 임자 1번째 기사/ 좌의정 윤두수를 불러 왜군의 동태․군사 징병 방법․농사 상황 등을 물어보다/ 상이 편전(便殿)에 나아가 좌의정 윤두수를 인견하였는데 동부승지 윤승길(尹承吉), 주서 홍준(洪遵), 봉교 김용(金涌), 대교 심흔(沈炘)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좌상이 국사 때문에 내려가서 혼자 노고하고 있어 미안스러운 마음 그지없다.ꡓ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ꡒ신은 별로 한 것이 없는데 무슨 노고가 있겠습니까.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전번에 경이 적이 물러갔다고 치계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ꡓ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ꡒ적진을 바라보니 물러가는 것 같다고 했기 때문입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군량을 의령(宜寧)에다 적치(積置)하여 놓았다고 하는데 적에게 노략당하면 어찌하려는가?ꡓ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ꡒ나주(羅州)․곤양(昆陽)․사천(泗川)에서 의령으로 수송하여 들여온 것은 중국군의 군량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아군의 군량으로 쓰기 위한 것입니다. 중국군은 멀리에 주둔하고 있어서 적이 쳐들어온다면 사세상 제때에 도착할 수 없을 것이니 반드시 아군으로 방어하여야 합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우리 나라의 병력으로 적을 방어할 수 있겠는가?ꡓ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ꡒ만약 대진(對陣)하여 야전(野戰)을 하게 될 경우에는 어렵습니다만, 번갈아 출입하면서 화공(火攻)을 하면 가능합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우리 나라의 군대를 써야 된다면 징병(徵兵)하는 것이 어떻겠는가?ꡓ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ꡒ전라․충청도 등에서 초발(抄發)하기로 이미 의논하였습니다. 동궁께서 내려가시어 과거(科擧)를 베풀어 취인(取人)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위안시키고 명수(名數)를 기록하여 입송(入送)하게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비변사의 의논이 모두 그러한가?ꡓ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ꡒ그렇습니다. 전라좌도는 순찰사가, 우도는 도원수가 주재하게 하고, 충청도는 감사와 병사에게 주재하게 해야 합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초시(初試)를 해야 하겠는가?ꡓ하니, 아뢰기를, ꡒ복시(覆試)를 해야 합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동궁(東宮)이 있는 곳에서는 초시(初試)를 하고 상경(上京)하여 복시(覆試)를 보이는 것이 온당하다. 순찰사(巡察使) 등이 있는 곳에서 복시를 보이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ꡓ하니, 아뢰기를, ꡒ그렇게 하는 것도 온당하겠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중국군은 매양 습진(習陣)을 할 때에 장관(將官)까지도 직접 나서서 무술 훈련에 참여하여 솔선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장관은 손을 마주잡고 높이 앉아만 있으니 이렇게 하고도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ꡓ하고, 또 이르기를, ꡒ적의 정세가 어떠하던가?ꡓ하니, 아뢰기를, ꡒ평조년(平調年)의 말을 들으면 반드시 물러갈 리가 없다고 합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평조년이 무슨 일 때문에 나왔는가?ꡓ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ꡒ심유경(沈惟敬)을 청할 일 때문에 나왔다고 합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심유경이 들어간다면 왜적이 물러가도록 꾈 수가 있겠는가?ꡓ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ꡒ총병의 말에 의하면, 심유경이 들어가려고 할 경우에는 구류시켜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소서비(小西飛)는 무엇 때문에 요동에 들어갔다던가?ꡓ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ꡒ준봉(準封)하는 일 때문에 들어갔다는 것 같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준봉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결말이 나겠는가?ꡓ하니, 아뢰기를, ꡒ그 결과에 대해서는 헤아려 볼 수가 없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소서비가 나아올 경우 평양 이서(以西)에서 요동까지의 텅 빈 상황을 모두 보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매우 걱정스럽다. 중국에서는 이 왜적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슬기가 훌륭하다.ꡓ하고, 또 이르기를, ꡒ경은 남원(南原)엘 가보았는가? 적변(賊變)이 일어났을 때 거민들이 모두 도망하였다고 하던데 지금은 다시 모였는가?ꡓ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ꡒ이미 도로 모였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유 총병이 진을 쳤던 도형을 보니 목책(木柵) 위에 여장(女墻) 같은 것을 설치하였던데 그것이 무엇인가?ꡓ하니, 아뢰기를, ꡒ목책은 한 아름 되는 큰 나무를 세워 반은 땅속에 묻은 다음 진흙을 바른 것인데 그 밑에다 참호를 팠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만일 화전(火箭)을 쏘게 되면 타버릴 것이 틀림없는데 이 제도가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ꡓ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ꡒ화전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돌진하여 와서 도끼로 찍는다면 이 점은 우려스럽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경상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ꡓ하니, 아뢰기를, ꡒ그렇습니다. 신이 팔거(八?)에 갔을 때에 사람을 잡아서 먹은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군관(軍官)을 보내어 베었습니다. 양호(兩湖)에 들어갔을 적에는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을 못들었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전라도는 농사가 어떠하던가?ꡓ하니, 아뢰기를, ꡒ만경(萬頃)․옥구(沃溝) 같은 바닷가의 경우는 물에 잠겨 흉년이 들었으나 다른 곳은 그리 심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ꡓ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군량을 조처할 수가 없게 되면 결단코 일을 할 수 없는 형세가 되고 만다. 전라도의 민간인 가운데 곡식을 저축해 둔 자가 있던가?ꡓ하니, 아뢰기를, ꡒ민간에게서 1만여 석을 수득(搜得)하였는데 이 곡식을 실어다가 구황(救荒)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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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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