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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89:황중립(1613-1615)
작성자장병창 @ 2013.05.18 06:35:33

  예천고을원(89) : 황중립(1613-1615) : '호종공신록권'을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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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중립(黃中立)은 1613년(광해군 5)에 노도형 군수 후임으로 부임하여 1615년(광해군 7)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황중립이 예천고을 원으로 있을 무렵인 1613년 예천읍 고평리 사람 정탁이 위성공신으로서 호종공신으로 추증되었다. 이때 임금이 약포 정탁(1529~1605)의 후손에게 내린 「호종공신록권」은 가로 38.2cm, 세로 35.8cm인데 1등 10명, 2등 17명, 3등 53명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이 문서를 비롯하여 정탁이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기록한 일기 등 13점이 1968년 12월 19일에 보물 제494호로 지정되었는데, 예천읍 고평리 466번지에 있는 약포 유물각인 정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1635년 내린 좌의정 사령장인 「정간공교지」, 임란 중 광해군을 호종할 때 피난지에서 기록한 친필 일기인 「용사일기」, 1592년과 1593년 광해군 호종 때의 사건들을 기록한 비망록인 「용사잡록」, 명 나라 장군의 접빈사로서 의주에서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용만견문록」, 접빈사로서 의주에서 쓴 시집인 「선조시집유묵」, 임진왜란 때 천기에 따라 사용했던 부적을 기록한 문건인 「약포선조유묵」, 셋째 아들 청풍자 정윤목에게 보낸 서한문인 「약포선조간첩」, 기로사에서 열린 연회 모습을 담은 화첩인 「기로연시화첩」, 명 나라 장수들의 활동상과 왜병의 간악상을 기록한 「선조초고유묵」, 평소에 사용하던 갓인 관립, 약포가 사용한 적황색 석재의 정방형 벼루인 석연 등이 그것인데, 임진왜란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정탁이 벼슬을 물러나 고평리에서 머물 때 충훈부의 화사가 와서 그린 초상화인 ‘약포영정‘도 보물 제487호이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2002-12-20 14:07:19)

 

황중립(黃中立, 黃立中) : 1613년(광해군 5)에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하여 1615년(광해군 7)에 이임하였다.

 

  황중립 [記事] : 태사묘/ 원문자료/ 태사묘중건기사(太師廟重建記事) : 상국(相國) 권반(權盼)은 우리 시조 태사공의 24대손이라 1613년 6월에 경상감사로 내려와서 정무(政務)의 여가에 태사묘를 참배하였다. 그런데 뜰이 낮아 물이 넘치며 마룻대와 추녀가 기울어지려 함을 보고 경주부윤 권태일(權泰一), 향내에 사는 종인(宗人)들과 상의하여 중건 공사를 시작하였다. 행가(行可:회호悔湖)와 향좌수(鄕座首) 권오(權晤)를 도감으로 삼고, 첨정(僉正) 권호(權?)와 주부(主簿) 권사도(權思道)를 감역으로 삼고, 유사(有司)는 묘유사 권극홍(權克弘)이 겸하게 하며, 공인들에게 음식물을 공급하게 하였다. 기구는 모두 상공이 제공하고, 또 부윤으로 하여금 내외 자손 중 본도 내에 수령으로 현임한 자에게 통고하여 재물을 수합하여 보조하게 하였다. 수령으로는 본부부사 이순경(李順慶), 인동부사 권경(權暻), 영해부사 이순(李焞), 흥해군수 금변(琴?), 험안군수 엄황(嚴惶), 영천군수 이사손(李士遜), 거제현령 황정렬(黃廷說), 영덕현령 한여옥(韓汝玉), 의성현령 이사수(李士修), 삼가현감 윤정현(尹廷賢), 연일현감 조인(趙認), 단성현감 최정호(崔挺豪), 사근찰밤 김영석(金英石), 병사 윤선정(尹先正)이 참여하였다. 혹은 면포(綿布)를 보내고, 혹은 해산물을 보내왔으며, 본부와 근읍에 사는 자손들이 모두 힘이 미치는 대로 미곡과 면포를 제공하였다. 농사의 여가를 기다렸다가 7월 7일에 착수하여 삼태사 위패를 무학당 서쪽 재사에 이안하고 고유하니, 좌랑 권위가 헌관이 되고 생원 권강(權?)이 축문을 읽고 권굉(權宏)․권양(權暘)․권경생(權慶生)․권옹(權?)․권춘혜(權春蕙)․권영수(權英秀)․훈도 권사진(權思進)․권중술(權重述)․권사활(權思?)․권극재(權克載)․권중정(權中正)이 각각 집사가 되었으며 제사에 참석한 자손이 20여 명이었다. 같은 달 10일에 옛 묘를 헐고 공사에 착수하니 목수가 18명, 석공이 2명, 와장이 3명, 철공이 2명이었다. 역군은 군내에 사는 자손들이 혹은 노비와 목수를 보내고 혹은 몸소 취역하여, 수리(首吏) 장자호(張自豪)와 김신개(金信凱)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케 하고 옛 터를 따라 돌을 쌓고 초석을 놓으니 높이가 한 길이 넘었다. 유사를 파견해 재료를 수집하니, 기와는 양장(羊腸:꼬불꼬불한 산길)에서 굽고, 돌은 제비원에서 캐어 독촉할 여가도 없이 수륙으로 운송하여 10일 안에 모두 도착하였다. 7월 20일에 입주하고 22일에 상량하여 이어 기와를 덮고 흙을 올린 뒤 단청을 시작하니, 화공(畵工) 6명은 모두 승려이었다. 10월 10일에 준공하니 묘우(廟宇)는 5칸인데 통하여 3칸으로 하고, 양쪽에 광창을 내고 중앙에는 정문을, 동서에는 협문을 두었다. ꡐ태사묘(太師廟)ꡑ란 큰 현판을 거니 후손 진사 권복흥(權復興)의 글씨이다. 앞에 신문(神門) 3칸은 제기고(祭器庫)이고, 비어 있는 두 칸은 제수를 비치하게 하고, 재실 18칸은 동서에 방실을 분설하였으니, 옛 제도에 따른 것이다. 제도를 조금 변경하여 벽토를 고쳐 단정을 올렸다.

 

  행랑 5칸은 셋째 칸에 대문을 달고, 문 밖에는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3태사 내외 자손으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하마하라는 글자를 새겼다. 보상고(寶上庫)와 유사청(有司廳)은 모두 예전 제도대로 하였다. 10월 20일에 환안(還安)하기로 택일하고, 21일에 관찰사가 시조묘에 먼저 행사하였다. 그 때 친동생 의정부 사인 흔(昕)과 아들 정자 경(儆)을 데리고 새벽에 출발하여 재사 앞에 이르러서는 외손 수령들과 족친들을 구별하여 맨 땅에 자리를 깔고 제례에 참여하게 하였다. 예천군수 황입중(黃立中)으로 하여금 짓게 하여 관찰사가 초헌하고 인동부사 권경이 아헌하고 사인이 종헌하니, 수령 및 후곤 70여 명이 모두 참제(參祭)하였다. 사인은 마침 봉명(奉命)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이곳에 이르렀고, 정차는 새로 문과에 급제하여 한 가지의 단계화(丹桂花)가 송가(松價)에 번쩍임에 보는 이가 모두 감탄하였으니 대덕이 후손을 넉넉하게 하는 감회는 어떠하올까! 제사를 마친 뒤 관찰사가 친히 산신제를 지내고 집사자로 하여금 평창군사공의 묘에 헌작하게 하였다. 그리고 물러와 수령들 및 종친과 더불어 복주(福酒)의 순배(巡盃)를 마친 뒤 어둠살이 끼일 무렵 파좌(罷座)하였다. 이틀을 지나 축시초(丑時初) 삼 태사 위판을 환완할 때 관찰사가 분향(焚香)하고 내외 자손 수령들과 타손들이 다 재배하였다. 그 다음 권 태사 위판은 권사도․권첨(權詹)․권홍극(權弘克)이 전도하고, 수리 권부룡(權富龍)이 초롱을 들고, 김 태사 위판은 김협(金鋏)이 전도하고, 향리 김영개(金榮凱)가 초롱을 들고, 장 태사 위판은 장흥효(張興孝)가 전도하고, 호장 장자호(張自豪)가 초롱을 들고, 관찰사 이하 여러 자손이 뒤를 따라 새 사당에 이르러 교의에 봉안하였다. 권 태사가 주위를 맡고, 김 태사가 동위, 장 태사가 서위로 모두 남향하니 옛 위차에 따른 것이다. 새벽에 행사할 때 초헌은 관찰사, 아헌은 경주 부윤이요, 종헌은 사인이 하고, 대축은 도사 김혜, 집례는 권종윤이요, 여러 집사 또한 타 성손으로 분정하였다. 참례한 사람은 상주목사 한술(韓述), 청송부사 강복성(康復誠), 대구부사 김윤안(金允安), 인동부사 권경, 전 첨지(前僉知) 김계신(金繼信), 초계군수 이윤(李胤), 영천군수 오여벌(吳汝?), 예천군수 황입중(黃立中), 함안군수 엄황(嚴愰), 울산판관 신의립(辛義立), 경산현령 이변(李?), 의홍현감 이유청(李幼淸), 연일현감 권경중(權景中), 군위현감 임길준(任吉浚), 고령현감 유직(柳稙), 전 현감 이명신(李明新) 등인데, 헌과의 뒤에 두 줄로 차례로 서고 참봉 권몽삼(權夢參) 이하가 두 줄을 지어 수령을 뒤에 섰다. 기타 300여 명은 내정에 들일 수 없어 신문(神門) 밖에 섰으니, 기명록(記名錄)은 묘현록(廟見錄)에 있으므로 기록하지 아니한다. 여러 집사가 행사에 분주했으나 조금도 실례 없이 제사를 마친 뒤 차례로 물러나와 장차 음복연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마침 비가 내려 중지했다. 24일 객사 대문 밖에 자리를 베풀고 정자의 축하연을 겸하여 거행하니, 장막은 구름 같고 구경군은 담장 같았다. 관찰사가 북벽을 사양하고 동쪽에 좌정하니 감히 지위로서 종족을 누를 수 없다는 뜻이라. 사인과 도사가 그 다음 자리에 앉고, 상주목사 이하 당상관 수령들이 한자리에 앉고, 당하관들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종중의 노인 권몽삼이 서쪽에 좌정하니 나이가 86세였다. 여러 종족이 모두 연치와 항렬을 따라 종각 앞까지 열좌하여도 다 앉을 수가 없어 수령들 아랫자리에 갈라 앉았다. 원근에서 모여든 구경꾼이 어깨를 부딪치며 진남문(鎭南門)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등 다 기록할 수 없다. 경주 제독(提督) 이삼성(李三省)과 학유 권성오와 신홍립(辛弘立)이 동서에 가로 앉았으니 모두 신급제로 회가(回家)되는 유희를 시작함인데 신급제인 김시주도 또 같이 참여하였다. 감사 출장소로부터 참석한 수령의 수에 따라 진수성찬의 재료를 나누어 주며 중락(衆樂)의 유희를 벌였으니 그지없는 인간 성사였다. 밤이 되어 파연하였으며, 25일에 관찰사가 상주․청송․대구․영천․초계․의흥 등 수령과 종친 20여 명과 함께 모은루(慕恩樓)에서 사인을 전송하였다. 저물녘 객사에 돌아와 또 연회를 배설하니 여러 수령이 모두 참석했고 봉상시정 김용(金涌)도 와서 참여하였다. 낮부터 밤까지 즐거움을 다하고 파회하였다. 관찰사는 또 경주 부윤과 권오(權晤)․권종윤(權終允)․행가(行可) 등과 함께 촛불을 밝히고 태사묘의 제례와 종중의 친목할 규례(規例)를 의논하여 정한 뒤에 부윤 이하가 다 물러갔다. 제례는 즉 오절일(五節日)이 너무 번거로울 뿐 아니라 또한 정례가 아니므로 다만 춘․추․중월(仲月)의 중정일로 작성하여 보궤(??) 변두(?豆)를 쓰기로 하고 절목은 별록으로 작성하였다. 아! 삼 태사의 의판은 원래 대청 북쪽 벽 위에 모셨던 것인데, 1543년(중종 38)에 부사 김광철(金光轍)이 통관 권곤(權鯤)과 향유사(鄕有司)와 의논하여 처음으로 사당을 세웠으나 그 제도가 미비하였다. 지금 70여 년 만에 벌써 기울어져 이제 중건하였는데, 묘의 모양은 나는 듯하고 뜰과 섬돌은 정결하며 향례 절목이 구비하였으니, 모든 것이 다 관찰사 상공이 극진하게 먼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금후 유사(有司) 되는 자는 각별히 부지런하게 수호하여 풍우의 피해를 방지하고 춘추로 향화를 올려 영구히 변함없이 거행하라. 그러면 우리 상공의 족의를 돈독하고 예를 봉행한 뜻이 무궁토록 전할 것이다. 행가가 상공의 명을 받아 중건공사를 관장하여 전말을 대략 알게 되었으므로 이렇게 기록한다. - 권행가(權行可)(www.koreastudy.or.kr 2007)

 

  황중립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八 / 雨午萬曆三十四年宣祖三十九年上 / 四月  / 二十三日 辛酉  /  細雨李慶祺拜持平 慶暹拜司成 申橈拜司藝 金止男拜禮正 黃中立 柳起門拜監察 鄭鳳壽拜僕簿 申慶昌拜喬桐○沈澱來見(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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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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