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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93-1:남염(1622-1623.7.3)
작성자장병창 @ 2013.06.13 20:57:30

  예천고을원(93-1) : 남염(1622-1623.7.3) : 이괄의 난 때 억울하게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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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염(南濂, ?~1624)은 1622년(광해군 14)에 심륜 군수 후임으로 부임하여 1623년(인조 1) 7월 3일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일명 남계이다.

  1615년(광해군 7) 6월 30일에 연풍 현감에 제수되었고, 1622년 예천 군수, 1623년 7월 3일 예천 군수로서 사간원 탄핵으로 이임되었다.

  1627년(인조 5) 3월 21일에 임금이 이르기를, ꡒ이괄의 난(1624) 때 원통하게 죽은 남염 등의 관작을 회복해 주라ꡓ라고 하였다.

  남염이 예천고을 원으로 있을 무렵인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하리면 우곡리 우곡서원에 제향된 황섬이 호위 1등 공신에 추증되었다.

  황섬(1544~1616)의 자는 경명, 호는 식암, 동지돈령부사 응규의 아들, 약포 정탁의 제자이다. 1564년(명종 19)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70년(선조 3)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이․호․예․병조 참의, 부제학, 호․예조 참판,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임진왜란(1592) 때 병조 참의로 모운사가 되어 공훈이 컸고, 광해군 즉위 직후 정인홍의 모함으로 유영경의 변에 관작이 삭탈되고 낙향하여 양몽재를 지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작고한 뒤 인조반정 후 복권되어 공신에 올랐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어 우곡서원에 제향되고, 시호는 정간공이다.

  저서로 「식암선생문집」이 있는데, 5권 3책, 목판, 30.3×19.8cm, 반곽은 19.8×15.4cm, 10행 20자, 사주쌍변, 유계, 주쌍행, 판심은 내향 이엽 화문 어미이다.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 존경각에 소장되어 있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542號, 2003-01-10 14:25:24) 

 

남염(南濂) : 1622년(광해군 14)에 부임, 1623년(인조 1) 7월 3일에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1624(인조 2), 일명 남계(南溪)이다. 1615년(광해군 7) 6월 30일에 연풍 현감에 제수되었고, 1622년에 예천 군수로 부임하여 1623년 7월 3일에 이임되었다. 1627년(인조 5) 3월 21일에 왕이 이르기를, "이괄의 난(1624) 때 원통하게 죽은 남염 등의 관작을 회복해 주라." 라고 하였다. (大東野乘 第46卷, 응천일록, 仁祖實錄)

 

남염(南濂) : 1622년(광해군 14)에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하여 1923년(인조 1) 7월 3일에 이임, 일명 남계(南溪), 1623년 7월 3일에 사간원(司諫院)의 계(啓)에, "예천군수 남계는 위인이 용렬(庸劣)하니, 파직(罷職)하라." 라는 것이 있었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남계는 체차(遞借)하라." 라고 하였다.(大東野乘 第46卷 응천일록)

 

  남염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1 刊) 응천일록(凝川日錄)에 실린 저자 미상(未詳)의 예천군수(1622-1623) 남염(일명 남계)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응천일록 3(凝川日錄三)/ 계해년 하(1623, 인조 1년) 6월 인조 계해(1623 ; 인조 1년 ) 6월부터 인조 무진(1628 ; 인조 6년 ) 3월까지/ ○ 3일 전교하기를,/ꡒ우상 김류(金?)와 이귀(李貴)ㆍ이시발(李時發)ㆍ이괄ㆍ이필영(李必榮)ㆍ이서(李曙)를 인견하겠노라.ꡓ하였다. 이필영은 오늘 숙배하고 하직하였다. 대사헌 이귀가 탑전에서 올린 신계(新啓)는, ‘예천 군수(醴泉郡守) 남계(南溪 : 南濂의 別名)는 위인의 용렬하니 파직하라.ꡑ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ꡒ남계는 체차하라.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ꡓ하였다.”이다.(www.minchu.or.kr 2006)

 

  남염 [記事]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九 / 丙午下 / 八月  / 初七日 癸卯  / 雨宋繼曾拜資直 禹廷深拜全都 柳?拜畿都 尹綬拜黃都 李?拜江都 申光立拜正言 金弘遠拜原州 閔德男拜修撰 鄭楮拜設坐 權昕拜禮佐 李繼先拜上土繕簿 南濂 興簿 姜進伯相換(www.history.go.kr 2007)

 

  남염 [記事]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九 / 丙午下 / 十月  / 二十九日 甲子  / 式年監試出榜生壯李惟達進壯南以雄也○李希聖拜德源 尹綎拜全州 趙琦拜咸平 韓希吉拜京畿水使 卞有憲拜平海 高曦拜龍川 鄭文龍拜寧遠 李卿雲拜興海 李?拜禮正 金致遠拜禮佐 梁應深拜刑佐 崔起南拜文學 金光燁拜修撰 金繰拜監察 高尙志拜禁都 權信中拜漢簿 南濂拜玄風 柳命男拜興簿(www.history.go.kr 2007)

 

  남염 [記事]:한국사료 총서/ 우곡일기 / 愚谷日記 / 愚谷日記庚戌日課 / 五月, 小  / 初三日  / 靑天間出, 雨徵則有之, 一日乍雨, 足於田穀, 而畓則反害之, 今若不雨, 則田家無望. 腰痛今夜則稍加於昨夜, 前日則受鍼輒有效, 而今則再度受鍼, 至鍼經絡而如此, 吾恐筋骨之重傷也. 全羅珍山?差使員, 昨夜入□ 郡 曉發行上京云. 靑山縣監頒敎差員當午入郡□ 卽 中殿冊封頒敎也, 靑山縣監乃南濂云爾. 生蓮實事□□入郡時, 已許狀啓, 而恐其/ <79>/ 腰痛呈由狀給由 / 受鍼 / 許筠 千秋使厭避事革職 / 烟軍催促使關來到 / 忘却簡通, 則□□貴, 區區事, 可敢忘之, 不可種種狀啓, 擇其□□弊?之大者, 一時收合狀啓云爾. 全羅舊監司來見, 出去時欲去, 則禮當拜出, 退避後還入見李好義令公可也, 而相拜而以腰痛之故不出, 退思則失禮太甚, 作書謝罪于稷山, 稷山以監司之言答之曰, 此疎外之言, 吾還爲未安云爾. 陽城叔母處送人還來. 腰痛呈由狀, 給由五日.(www.history.go.kr 2007)

 

  남염 [記事] : 선조실록 164권/ 선조 36년( 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7월 4일 무오 2번째 기사/ 이광정․서성․윤승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사(政事)가 있었다. 이광정(李光庭)을 판돈녕부사로, 서성(徐?)을 행 동지중추부사로, 윤승길(尹承吉)을 행 동지중추부사로, 권희(權憘)를 행 대사간으로, 조정(趙挺)을 첨지중추부사로, 신숙(申熟)을 사도시 정으로, 최유원(崔有源)을 헌납으로,【최유원은 간사하고 망령되므로 시론(時論)이 배척하였다. 그러자 전장(銓長)의 집에 정성을 다하여 날마다 가 뵙고 번번이 성찬(盛饌)을 장만해 보내면서 청하기를 ꡐ삼사(三司)의 말직(末職)이나마 되어 가문을 빛내고 싶다.ꡑ 하며, 간청하여 마지 않았다. 이에 마지 못하여 허락하니, 드디어 청현(淸顯)에 올랐다.】 심광세(沈光世)를 봉교로, 송석조(宋碩祚)를 대교로, 유형(柳珩)을 충청 병사로, 여우길(呂祐吉)을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윤계선(尹繼善)을 평안 도사로, 윤길(尹?)을 강원 도사로, 남염(南濂)을 사축 별좌(司畜別坐)로 삼았다. 이날 전교하였다. ꡒ남염이 곤궁하여 살아갈 수 없는데 벼슬을 주어 녹을 먹게 할 수 없겠는가? 쓸 만하지 않으면 의망할 필요 없다.ꡓ【남염은 상의 출(出)이다. 누이의 아들을 출이라 한다.】/ 【영인본】 24 책 500 면/ 【분류】 *인사(人事)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7)

 

  남염 [記事] : 광해군일기 38권/ 광해군 3년( 1611 신해 / 명 만력(萬曆) 39년) 2월 15일 을유 4번째 기사/ 사간원이 낙안 군수 정종염이 정철의 아들임을 들어 사판에서 삭제하기를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었다. ꡒ낙안 군수(樂安郡守) 정종명(鄭宗溟)은 간신 정철(鄭澈)의 아들입니다. 선왕께서 매우 미워하여 통절하게 물리치고, ꡐ독종ꡑ이라고 하교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의관(衣冠)의 반열에 끼어 백성을 다스리는 관직에 임명되니, 물정이 매우 놀라며 분해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사판에서 삭제하라 명하소서. 〈 종부시는 종실을 규찰하는 곳으로 그 맡은 일이 가볍지 않거니와 장관은 더욱 그러합니다. 종부시 정 이성길(李成吉)은 사람됨이 거칠고 사나워 평소 명망이 없으니, 본직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체차하라 명하소서. 청산 현감(靑山縣監) 남염(南濂)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용렬합니다.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다스리지 않고 정사를 하리(下吏)에게 맡기고 있어 백성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파직하라 명하소서. 무장 현감(茂長縣監) 안욱(安旭)은 성품이 잔악하고 옹졸하여 가는 곳마다 일을 그르치니 호남 같은 큰 읍은 결코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체차하라 명하소서.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 노세준(盧世俊)은 마음이 고약하고 잘못한 일이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지금 본직을 제수함에 물정이 매우 놀라 이상하게 여기고 있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ꡓ/ 【영인본】 31 책 602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 *가족-가족(家族)(www.history.go.kr 2007)

 

  남염 [記事] : 광해군일기 91권/ 광해군 7년( 1615 을묘 / 명 만력(萬曆) 43년) 6월 30일 을사 3번째 기사/ 남염을 연풍 현감으로 삼다/〈 남염(南濂)을 연풍 현감으로 삼았다.〉 / 【영인본】 태백산본/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남염 [記事] :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 1624 갑자 / 명 천계(天啓) 4년) 1월 17일 임신 1번째기사/ 문회․이우․권진 등이 이괄 등의 변란을 고하다. 이에 이들을 추국하다/ 전 교수 문회(文晦), 허통(許通) 이우(李佑), 전 첨사 권진(權?), 전 참봉 정방열(鄭邦說), 충의(忠義) 윤안형(尹安亨), 허통 한흔(韓?) 등이 대궐에 나아가 상변(上變)하니, 곧 궐내에서 추국하였다. 문회가 공초하기를, ꡒ윤인발(尹仁發)이 신의 아비가 비명에 죽었으므로 반드시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리라 여겨 지난해 7월에 신에게 저희끼리 음모한 것을 말하기를, ꡐ무인(武人) 성우길(成佑吉)이 일을 수창(首唱)하여 우리 5~6인과 유생(儒生) 정돈(鄭焞)․정찬(鄭燦)․성백구(成伯耈)․정방열 등이 학업을 익힌다는 핑계로 인성군(仁城君)의 이웃집에 모여 밤이면 들어가 뵈고 모의하였는데, 추대하는 일에 언급하면 자못 겸손하게 사양하며 「그대들은 다만 큰일을 이루라.」 하였다.ꡑ 하기에 신이 대장(大將)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말하기를 ꡐ이괄(李适)이 거의(擧義)한 날 집에 돌아와 분개하여 눈물까지 흘리며 「내가 남에게 속아서 이 일을 일으켰다.」 하였다. 이때부터 불궤(不軌)의 뜻을 품고서 한명련(韓明璉)의 세 부자와 정충신(鄭忠信)과 함께 모의하고, 그 아들 이전(李?)은 정돈․정찬과 함께 유산(游山)한다는 핑계로 외방을 두루 다니며 일을 같이할 사람을 맺었는데, 안변(安邊)의 수령인 정(丁)씨 성을 가진 사람도 그 일을 알고 있다.ꡑ고 하였으므로, 신이 바로 훈신(勳臣)들에게 밀고하고 왕복한 서찰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이어 그 동당(同黨)을 만나게 해주기를 요구했더니, 말하기를 ꡐ이전은 현재 일 때문에 시골에 내려갔으니 뒤에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다.ꡑ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에게 전복(戰服)에 쓸 호문단(虎紋緞)을 장만하게 하므로 신이 가산을 기울여 수십 필(匹)을 사서 그의 소원에 부응해주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윤인발이 충주(忠州)에 내려가면서 서로 도우라는 서찰을 남겨두었는데, 곧 윤인발이 이부치(利阜峙)에서 안개 속에 도둑을 만나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미 죽었고 다시 탐지할 길이 없으므로 정돈 등을 만나려고 다시 탐문하여 그 집에 찾아갔더니, 그 아비 정인영(鄭仁榮)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며 시국을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그 뒤로는 숨기고 나타내지 않았으니, 대개 신이 그 정상을 드러낼까 의심했던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이우가 정돈․정방열 등과 서로 친숙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우를 찾아가 만나서 윤인발의 흉모와 정인영에게 속임당한 정상을 자세히 말하고 그 모의한 것을 탐지하게 하였더니, 이우가 곧 허락하고 정방열과 함께 몰래 서로 왕래하였습니다. 하루는 정방열을 데리고 신의 집에 와서 잤는데, 정방열이 시국을 원망하는 시를 지으면서 이우에게 시구를 채워 완성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 신과 이우가 상변할 뜻을 지니고 있는가 의심하였으므로, 신들이 일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먼저 고변하였습니다.ꡓ하고, 이우가 공초하기를, ꡒ문회에게 다그침을 받아 자주 정방열을 보러 갔는데, 짐짓 난언(亂言)을 하여 꾀었더니 드디어 그 정상을 실토하기를 ꡐ이괄․한명련․정충신․이익(李?) 등이 지금 연결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 지난 가을에 어떤 사람이 홍 승지(洪承旨) 집에 투서하기를 「이괄․정인영․유경종(柳慶宗)이 반역을 모의한다.」 하였는데 홍 승지가 그 글을 유경종에게 보였다. 이 때문에 이괄 등이 크게 두려워하여 반역할 모의가 더욱 굳어졌다.ꡑ 하였습니다. 또 한준철(韓濬哲)이라는 자는 한희길(韓希吉)의 손자로서 평소에 서로 친했는데, 신을 불러 윤안형의 집에서 같이 자면서 신에게 계책을 말하고 일을 같이하기를 요구하므로 신이 곧 겉으로 허락하였습니다. 드디어 윤안형 등을 불러 회의하였는데 권진․문회도 참여하여 듣게 하였습니다. 안형이 말하기를 ꡐ기자헌(奇自獻)이 반정(反正)한 처음부터 이시언(李時言)과 함께 이미 이 모의를 하여 이성(李?)으로 하여금 주상(主上)의 명수(命數)를 논하게 하고, 또 한 왕자(王子)와 함께 이시언의 집에 모여 은자(銀子) 2천 냥을 이시언에게 주고 1천 냥을 성우길에게 주어 혹 도감(都監)의 군사를 모으기도 하고 무리를 불러 모으게도 하였다. 동참한 자는 성준길(成俊吉)․현즙(玄楫)․정충신․유비(柳斐)․안륵(安?)․한명련(韓明璉)․한겸(韓謙)․김복성(金復性)․한계(韓誡)와 이문빈(李文賓)의 다섯 아들과 권충남(權忠男)의 아들인 권이균(權以均)․권필균(權必均)과 성효량(成孝良)과 그 아들 성철(成哲)과 한욱(韓頊)․윤상철(尹商哲)․허익(許?)․한흥국(韓興國)․한창국(韓昌國)․김극전(金克銓)․김극명(金克銘)이고, 문신(文臣) 전유형(全有亨)․윤수겸(尹守謙)․이용진(李用晉)․유공량(柳公亮) 등도 그 모의에 참여하였다. 한창국․한흥국․이광호(李光澔)․신득지(愼得智) 등은 기자헌이 흉격(凶檄)을 투입하였을 때에 십삼학사(十三學士)라 부르던 자이다. 이시언이 고변(告變)한 것은 본심이 아니라, 신득지가 그 모의를 누설하였으므로 일이 발각될까 염려하여 먼저 이유림(李有林) 등을 고하여 스스로 신임을 받으려 한 것일 뿐으로 그 모의는 오히려 그만두지 않았다. 전라 병사 윤숙(尹?)은 왕자군(王子君)의 가까운 친족이므로 서방에 부방(赴防)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상경하여 그대로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마침 윤숙이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에 차출되지 않았으므로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근일 기자헌이 김정(金鉦)․남염(南濂)․조희형(趙希亨)을 이시언에게 잇달아 보내어 군사를 일으킬 시기를 재촉하게 하고 전유형․윤수겸 등이 정돈을 한명련에게 보내어 본도(本道)의 감사를 죽이게 하고 한명철(韓明哲)을 현즙에게 보내어 원수(元帥)를 도모하게 하였으며, 이미 어인(御印)을 주조(鑄造)하여 왕자의 집에 감추어 두었다. 한계가 일찍이 어떤 사람이 민씨(閔氏)가 얻을 것이라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는데, 왕자의 어머니가 곧 민씨이니 그 일이 매우 기이하다.ꡑ 하였습니다. 정방열도 말하기를 ꡐ광해가 인왕산(仁王山)에 인경궁(仁慶宮)을 지었으니 반드시 이 궁의 임자가 있을 것이다.ꡑ 하고, 윤안형이 말하기를 ꡐ우리들이 2월에 군사를 일으키기로 정하였으니 공들은 반드시 무사를 모집하여 따라야 한다.ꡑ 하니, 권진이 그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ꡐ나는 은화(銀貨)로 돕겠다.ꡑ 하고 1천 냥을 허락하였는데, 윤안형이 또 문회에게 1천 냥을 요구하니 문회도 허락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정방열이 그 말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상변할 생각을 하고 있으므로, 그보다 앞서 와서 고하고 정방열과 왕복할 서찰도 아울러 상달(上達)하였습니다.ꡓ하였다.

 

  권진이 공초한 말은 대개 이우 등의 말과 서로 부합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ꡒ윤안형이 말하기를 ꡐ이광영(李光英)이 강화 부사(江華府使)로 있을 때에 외원(外援)하려 하였으며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체임되어서는 그 군사로 도우려 하였다. 그런데 또 갈렸으므로 시행하지 못하였다.ꡑ 하였습니다.ꡓ하고, 한흔이 공초하기를, ꡒ신과 정찬은 척분이 서로 두터우므로 신이 상경하였다는 말을 듣고 와서 보고 말하기를 ꡐ너희 아버지가 처형되었으니 어찌 원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와 일을 같이하는 것이 어떻겠는가?ꡑ 하였습니다. 신이 듣고서 놀라와 대답할 바를 몰라 다만 묻기를 ꡐ이 일은 반드시 장자(長者)를 얻어서 주장하게 해야 할 것인데 과연 어느 사람인가?ꡑ 하였더니, 정찬이 말하기를 ꡐ정승 기자헌(奇自獻)인데 유경종(柳慶宗)․유몽인(柳夢寅)․유위(柳?)․유흠(柳?)과 무장(武將) 이시언․성우길이 다 같이 모의하고 도감의 장관(將官)도 많이 모의에 참여하였다.ꡑ 하였는데, 신이 평소부터 정찬이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도로 시골로 내려가다가 길에서 신대지(申大枝)와 유흠을 만났는데, 신대지는 신의 아비의 옛날 편비(?裨)였으므로 길가에 앉아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그가 신에게 말하기를 ꡐ너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뜻이 없는가?ꡑ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ꡐ그런 마음이 있더라도 어찌하겠는가.ꡑ 하였더니, 대지가 말하기를 ꡐ너는 아직 요즘의 일을 모르는가? 오래지 않아 거의(擧義)하여 폐주(廢主)를 복위시킬 것이다.ꡑ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ꡐ그렇다면 그 은의를 어떻게 갚아야 하겠는가?ꡑ 하였습니다. 유흠이 이어 신에게 가지 말라고 권하였으나, 신이 일이 있다고 핑계대고 드디어 시골에 내려 갔는데, 그 뒤에 들으니 유응형(柳應泂)이 고변(告變)하여 유흠 등이 다 죽었다 하였습니다. 저번에 맏형의 아들 한준철(韓濬哲)이 와서 신을 보고 말하기를 ꡐ이우․문회․윤안형 등이 요즈음 큰일을 꾀한다.ꡑ 하기에 신이 멸족될 일을 하지 말라고 매우 꾸짖었습니다. 준철이 간 뒤에 재삼 생각하니, 준철의 말은 국가에 관계될 뿐더러 사가(私家)의 큰 화(禍)가 있을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와서 고하였습니다.ꡓ하고, 정방열이 공초하기를, ꡒ평소 이우와 서로 친했는데, 이우는 신에게 잇달아 화환이 있어 가사(家事)가 탕패(蕩敗)한 것을 보고 매우 후하게 돌보아 주었습니다. 신과 함께 선친의 묘소 아래에서 같이 잘 때에 이우가 말하기를 ꡐ요즈음 들으니 영남․호서에 큰 변이 있을 것이라 하는데, 청주(淸州) 사람 박동명(朴東明)․유대명(柳大鳴)과 진위(振威)의 무인(武人) 김제정(金濟鼎) 등이 고을 군사로 남쪽 군사를 응원하려 하니 일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나도 경중(京中)과 백운산(白雲山)의 중 수백 인을 불러 모아 서로 응원하겠으나 단약(單弱)한 것이 한탄스럽다. 정찬 형제는 한명련과 혼인한 집안이고 또 이전과 서로 친하니 만약 정씨 두 사람으로 하여금 동지를 불러 모으게 하면 일이 완전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ꡑ 하였으나, 신이 허락하지 않고 이어 반역을 따라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타일렀습니다. 신이 정찬을 만나 이우의 반역을 꾀하는 정상을 말하였더니, 정찬이 말하기를 ꡐ오합지중은 일을 성취하지 못한다. 다른 한 곳에서 하는 일은, 철기(鐵騎) 10만이라도 못 당할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그들과 합세해야 큰 일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ꡑ 하였습니다. 신이 이우의 말을 이미 김자점(金自點)에게 고하였습니다.ꡓ하고, 윤안형이 공초하기를, ꡒ한준철(韓濬哲)과는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지난해 가을에 우연히 조용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준철이 천변(天變)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말뜻이 이상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ꡐ네가 무슨 소견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가?ꡑ 하였더니, 준철이 말하기를 ꡐ나는 본디 시국을 원망하는 사람이다. 기자헌․이시언이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를 보고 지금 거사를 꾀하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이 너만 못해서 이런 생각을 갖겠는가.ꡑ 하고, 이어 말하기를 ꡐ기자헌이 정명진(鄭名振)을 불러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폐주(廢主)에게서 은혜를 받은 것이 두터운데 어떻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정명진이 말하기를 「감히 공을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드디어 이시언에게 가서 알리게 하니, 시언이 곧 허락하였다. 이튿날 스스로 시언의 집에 갔는데, 인성군(仁城君)도 미복(微服)으로 와서 동지 10여 인과 함께 통곡하고 맹약하였다. 인성은 백금(白金) 3천 냥을 내어 군사를 모집하게 하고 기자헌과 유몽인은 격문(檄文)을 지어 도감의 장사(將士)에게 보냈다. 그리고 윤숙으로 하여금 호남(湖南)을 맡게 하였는데, 대개 윤숙은 거의(擧義)할 때 인성에게 뜻을 가졌었는데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마음에 불안을 품었기 때문에 인성이 비밀히 통한 것이다. 경외(京外)에서 모의에 참여한 자가 대략 3백여 인인데, 나처럼 복수하려는 사람은 이문빈․권충남의 아들들이다.ꡑ 하였습니다. 신이 곧 상변하려 하였으나 단서를 얻지 못하여 이제까지 참아왔습니다. 새해 들어 준철이 와서 말하기를 ꡐ어제 이우를 만났는데 일을 같이할 만하다.ꡑ 하고 이어 신의 집에 함께 모여 잤습니다. 이우가 강개하여 큰소리로 심정을 토로하니, 준철이 말하기를 ꡐ그대가 일을 같이하려 한다면 어떠한 계책을 써야 할 것인가?ꡑ 하니, 이우가 말하기를 ꡐ우리들이 경성(京城)에서 불러 모은 자가 5백여 인이고 호서에서 온 자가 5백여 인이고 수원(水原)의 천총(千摠) 이승충(李承忠)이 거느리는 자가 3백여 인이고 포천(抱川) 등산(燈山)의 승군(僧軍)으로 정예한 자가 50인이니 이것으로 일으키면 족히 성공할 수 있다.ꡑ 하였습니다. 주모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이우가 말하기를 ꡐ경중에 한 장자(長者)가 있고 외방에 상신(相臣)이 있다.ꡑ 하니, 준철이 말하기를 ꡐ그렇다면 우리들이 꾀한 것과 마찬가지이다.ꡑ 하였습니다. 하루는 이우가 사람을 보내어 와서 모이기를 청하므로 가보니, 좌상(座上)에 두 사람이 있는데 문회․권진이었습니다. 신이 권진에게 묻기를, ꡐ이우의 말은 이미 들었는데 그대가 얻은 것은 얼마나 되는가?ꡑ 하니, 권진이 말하기를 ꡐ나는 심복같은 벗이 1백 인이 있으니 1백 인이 각각 친병(親兵) 10인을 거느리면 1천 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ꡑ 하였습니다. 정월 15일 저녁에 신이 이웃 사람과 달을 보고 돌아가는데 성탁(成琢)이 시국을 원망하는 말을 하기에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ꡐ우리 외삼촌 전회(全晦)는 평소 이용진과 서로 친한 사이인데 지금 이용진․윤수겸․전유형과 함께 반역을 꾀하고 있다.ꡑ 하였는데 그 말이 한준철의 말과 서로 부합하였습니다. 신이 이우․권진에게 말하기를 ꡐ이용진 등 여러 사람의 모의를 우리가 알게 되면 함께 모의할 길이 있을 것이다.ꡑ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한준철이 신에게 비밀히 말하기를 ꡐ이 일은 장차 드러날 것이므로 우리 얼숙(?叔)이 상변하여 잡류(雜類)를 제거함으로써 사람들의 의심을 막으려 한다. 그런데 윤수겸 등이 꾀하는 것은 매우 크므로 장차 그 쪽을 따를 것이니, 너도 함께 상변하는 것이 좋겠다.ꡑ 하였습니다. 신이 따르지 않고 홀로 고하려 하였는데 이우․권진 등이 함께 상변하므로 한꺼번에 와서 고하였습니다.ꡓ하였다. 애초에 한흔이 김광소(金光?)에게 역모를 누설하자 광소가 훈신들에게 밀고하였으므로 이때에 와서 광소를 나문(拿問)하였는데, 공초하기를, ꡒ한흔은 신의 아내의 동생인데, 신의 병이 심하여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시골에서 문병하러 왔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신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ꡐ근래 유응형․이시언의 두 옥사(獄事)에 대해 사람들이 다 부실하다고 의심하고 국청(鞫廳)에서도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끝까지 다스리지 않았으므로 흉도(凶徒)가 법망에서 빠져나가 그지없이 난을 모의하고 있다. 하루는 유흠․신대지가 와서 나를 보고 말하기를 「이번 반정에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여서 인심이 따르지 않으므로 우리들이 장차 다시 거의할 것이다. 너희 아버지도 죄없이 죽었으니 우리들과 일을 같이 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는가?」 하기에, 내가 그 모계(謀計)의 대강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문신(文臣)은 기자헌이 대장이고 유몽인․유경종이 다음이며, 무신은 이시언․현즙․성우길 등이 대장인데, 이시언은 여러 차례 도감의 대장이 되었으므로 뭇사람들이 따르고 있다. 그리고 항왜(降倭) 50여 인이 그의 심복이며 반정 뒤에 죄받은 사람의 자제․노복으로서 서로 약속한 자가 매우 많고 도감의 장관(將官)도 많이 호응하고 있다. 우리들이 각각 초군(哨軍)을 거느리고 사사로이 훈련한다고 핑계대고 동쪽은 살곶이[箭串]에 주둔하고 서쪽은 연서(延曙)에 주둔하였다가 동서에서 함께 종가(鐘街)에 들어가 진치고 복수기(復讐旗)를 세우고서 도하(都下) 사람들을 타이르고 무리를 나누어 보내어 공신(功臣)들을 제거하면 기세가 웅장할 것인데, 조정에서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는가. 폐주를 맞이하여 복위하고 몇 달 뒤에 왕자 중에서 평소에 어질다고 일컬어진 자에게 양위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오늘날의 큰 계책이다…….」 하였다.ꡑ 하였습니다. 신이 한흔에게 묻기를 ꡐ왕자 중에 어진 자란 누구인가?ꡑ 하니, 한흔이 말하기를 ꡐ인성의 아우 인흥(仁興)인데 인흥이 즉위하면 국가가 태평할 것이다.ꡑ 하였습니다. 한흔이 또 말하기를 ꡐ우리들이 장차 강홍립(姜弘立)․김경서(金景瑞)에게 알려서 노병(奴兵)을 이끌고 경상(境上)에 와서 진압하며 조정을 협제(脅制)하여 구주(舊主)를 복위시키게 하고 우리들이 안에서 일어나면,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꾀할 수 없을 것이다.ꡑ 하였습니다. 한흔이 또 말하기를 ꡐ이선철(李先哲)․위정철(魏廷喆)이 반역을 꾀하다가 석방되었는데, 그들이 서방으로 가겠다고 자원한 것은 겉으로 은혜에 감격하여 목숨을 바치는 체하면서 실은 그 간계를 부리려는 것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ꡑ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ꡐ반역을 꾀한 무리가 살을 찔러 피를 내어 맹세하기를 「우리들이 불행하게 되더라도 맹세코 각자 스스로 죽고 서로 끌어대지 않는다.」 하였으니, 전후의 옥사에서 사실을 고한 자가 아주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ꡑ 하였는데, 이것은 한흔이 신이 그 아비를 거두어 묻어준 것을 감사하게 여겨서 화기(禍機)를 알려 난병(亂兵)을 면하게 하려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ꡓ하였다. 이에 드디어 공초에서 끌어댄 사람들을 국문(鞫問)하였는데, 이괄․유비․정충신․유숙 등은 나문하지 말라고 명하고, 갇힌 죄인 중에서 정인영․정찬․성백구․성철(成哲)․한준철․김정․성탁․한창국․한흥국․신승남(申承男)․신경남(申慶男)․이담(李澹)․이항(李沆)․권이균(權以均)․권필균(權必均)․성대익(成大翼)․윤상철(尹商哲)․민유장(閔有章)․한명철(韓明哲) 등은 모두 형신하였다. 정찬이 공초하기를, ꡒ이괄이 비기(?記)를 얻었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딴 뜻을 품었는데, 남건(南楗)은 요술로 서로 친하고 남응화(南應華)는 망기(望氣)를 잘하여 이괄의 집에 가기(佳氣)가 있다 하였고, 윤수겸은 이괄이 갑자년 명수(命數)를 타고나 극히 길(吉)한 것으로서 한번 지휘하면 태평을 이루게 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이괄의 종손(從孫) 정석필(丁碩弼)에게서 들었는데, 신의 아비와 형이 다 이괄의 모계를 알고 있습니다.ꡓ하였다. 정인영은 이미 역모에 참여하여 들었다고 승복하였으나 실토하지 않았고, 한준길은 역모에 같이 참여한 것을 자복하였고, 성탁도 윤안형과 함께 모의하였다고 공초하였다. 성탁은 곧 처형하고, 정찬은 그대로 가두고서 여러 죄수를 빙문(憑問)할 바탕으로 삼고, 정인영은 미처 처형하기 전에 죽었고, 김정․한창국․한흥국 등도 형장(刑杖)을 맞아 죽었다. 정석필을 나래(拿來)하여 형신하니, 공초하기를, ꡒ이괄의 내응(內應)은, 전라 감사 이명(李溟), 병사 윤숙, 강원 감사 윤안국(尹安國), 수원 부사 이경립(李景立)과 윤수겸(尹守謙)․전유형(全有亨)․성효량(成孝良)․오문갑(吳門甲)․김대현(金大賢)․신계영(辛啓榮)․조사언(趙士彦)․송경(宋璟)․손득일(孫得一)입니다.ꡓ하였는데, 이경립․윤안국․이명은 나래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영인본】 33 책 570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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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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