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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고을원94-1:홍위(1623.7.3이후-1624.9)
작성자장병창 @ 2013.06.18 21:17:15

  예천고을원(94-1) :홍위(1623.7.3이후-1624.9) : 선정하다가 병으로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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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위(洪瑋, 1559~1624)는 1623년(인조 1) 7월 3일 이후에 남렴 군수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1624년(인조 2) 9월에 작고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군위 출신, 자는 위부(瑋夫), 호는 서담(西潭), 본관은 남양, 함창훈도 흔의 아들, 박의 형, 종경․선경․중경의 아버지, 서애 유성룡의 제자이다.

  부모 슬하에서 유학으로서 1588년(선조 21)에 식년 생원시에 3등 54위로 합격하였고,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1601년(선조 34)에 식년 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하였다.

  벼슬이 누진하여 사헌부 감찰(1606년 6월 23일)일 때는 증광 사마시의 시험관을 겸하였다. 그 후 예조 좌랑(1606년 12월 25일), 병조 좌랑(1607년)을 거쳐 정언(1609년 6월 17일)이 되어 공적인 일에 근면하고 공정하여 개인 사정에 흔들리지 않았고, 사서(1609년 8월 3일), 정언(1609년 8월 13일)을 거쳐 1609년(광해군 1) 9월 24일에는 사헌부 지평이 되어서는 언론에 강직하고 공명하여 꺼리는 바 없었으나 죄인에게 태형을 가한 사건으로 무고를 받고 귀양갔다.

  인조반정(1623)으로 풀려나 병조 정랑을 거쳐 성균관 사예를 지내고, 예천 군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예천 사람 중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서 부정을 무고 당하여 구속되었다가 인조 임금의 호의로 석방되었으나 이어 병으로 작고했다. 효성이 돈독하여 이웃의 칭송을 받았다.

  맏아들 종경(1581~?)의 자는 유길, 부모 슬하에서 유학으로서 1616년(광해군 8) 증광 진사시에 3등 65위로 합격하였다. <張炳昌 論說委員>(醴泉新聞 543號 2003-01-20 11:13:37)

 

홍위(洪瑋) : 1623년(인조 1) 7월 3일 이후에 부임, 1924년(인조 2)에 작고 이임한 예천 군수이다. 1559(명종 14)-1624(인조 2), 군위 출신, 자는 위부(瑋夫), 호는 서담(西潭), 본관은 남양, 함창 훈도(咸昌訓導) 흔의 아들, 박(璞)의 형, 종경(宗慶)ㆍ선경(善慶)ㆍ중경(重慶)의 아버지, 서애 유성룡(西厓柳成龍)의 제자이다. 부모 슬하(具慶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588년(선조 21)에 식년 생원시에 3등 54위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1601년(선조 34)에 식년 문과에 병과(丙科) 2위로 급제, 누진하여 1607년(선조 40)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어 공사(公私)에 근면하고 공정하여 사정(私情)에 흔들리지 않았고, 사헌부 감찰일 때인 1606년(선조 39) 증광 사마시의 시험관이었다. 1609년(광해군 1) 정언에 이어 사서(司書), 전적, 통영 종사관(統營從事官) 등을 역임했다. 또한 언론에 강직하고 공명하여 꺼리는 바 없었으나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죄인에게 태형(笞刑)을 가한 사건으로 무고(誣告)를 받고 흥양(興陽)으로 귀양을 갔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으로 풀려나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거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지내고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예천 사람 중에 그를 혐오하는 자가 있어서 부정(不淨)을 무고(誣告) 당하여 구속되었다가 인조의 호의로 석방되었으나 이어 병으로 죽었다. 효성이 돈독하여 이웃의 칭송을 받았다. 맏아들 종경(1581生, 字裕吉)은 부모 슬하(具慶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616년(광해군 8) 증광 진사시에 3등 65위로 합격하였다. [우암정(雨岩亭)] : 경북 군위군 소보면 내의리 629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으로, 경북 문화재 자료 제216호(1989.5.29 지정)이다. 예천군수 홍위가 자연을 음미하며 성리학을 연마하기 위해 1612년(광해군 4)에 세운 건물이다. 1868년(고종 5)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888년(고종 25)에 다시 세웠다. 경관이 뛰어난 위천(渭川) 옆의 절벽 끝에 있고, 주변에는 흙과 돌로 담장을 둘러놓아,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뒤로 돌아 정면으로 출입하도록 되어있다. 정면에는 대문을 세웠고, 문 오른쪽에는 '우암정'이라고 새긴 암석이 있다. 후손인 홍순철이 소유, 관리하고 있다. [칠탄숙강당(七灘塾講堂)] : 경북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에 있는 1629년에 예천군수 홍위가 세운  서숙으로, 경북문화재자료 제215호(1989.5.29 지정)이다. 칠탄은 외량리를 감싸며 흐르는 물의 일곱 여울을 일컫는 말이다.(司馬榜目, 文科榜目, 人物考, Yahoo 百科事典)

 

홍위(洪瑋) : 1559(명종 14)-1624(인조 2), 1623년(인조 1)에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하여 1924년(인조 2)에 이임, 자는 위부(瑋夫), 호는 서담(西潭), 본관은 남양, 소(訴)의 아들, 서애 유성룡(西厓柳成龍)의 제자,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1601년(선조 34)에 식년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누진하여 1607년(선조 40)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어 공사(公私)에 근면하고 공정하여 사정(私情)에 흔들리지 않았다. 또한 언론에 강직하고 공명하여 꺼리는 바 없었으나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죄인에게 태형(笞刑)을 가한 사건으로 무고(誣告)를 받고 귀양갔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하자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거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지내고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예천 사람 중에 그를 혐오하는 자가 있어서 부정(不淨)을 무고(誣告) 당하여 구속되었다가 인조의 호의로 석방되었으나 이어 병으로 죽었다. 효성이 돈독하여 이웃의 칭송을 받았다.(人物考)

 

  홍위(洪瑋) : 예천 군수이다. 1559(명종 14)~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위부(偉夫), 호는 서담(西潭), 군위 출생, 참봉 우식(禹軾)의 손자로, 증한성부우윤 흔(?)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홍혼(洪渾)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부모를 정성껏 보호하였다. 이듬해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파견되었을 때 수천언의 척화토적책(斥和討賊策)을 진언(陳言)하여 크게 참고하게 하였다. 1601년 생원으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지평․예조 좌랑․성균관 전적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통제영 종사관(統制營從事官)으로 선임되어 통제사를 보좌하여 백성을 구휼하였으며, 전비를 강화하는 데 공이 컸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춘추관 기사관․세자시강원 사서․정언․지평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직언으로 시사를 바로잡았다. 광해군 때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후생 교육에 힘썼다. 그 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에 다시 벼슬길에 나가 병조 정랑․예천 군수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정경세(鄭經世)․장현광(張顯光)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저서로는《서담집》이 있다.(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西潭集, 金龍國(韓國學中央硏究院))

 

  홍위 : 예천 군수이다. 서담선생문집(西潭先生文集)은 홍위(洪瑋 ; 1559~1624)의 시문집이다. 홍위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위부(偉夫), 호는 서담(西潭)이다. 이 책은 1785년(정조 9) 5대손 홍한(洪瀚)이 편집․간행했다. 「상마제독시가(上麻提督詩歌)」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明) 나라 군대가 돌아갈 때 그 은공을 찬양해서 지은 글이다. 본집(本集)은 대부분이 시(詩)와 개인 역사에 관한 것이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데 참고가 될 수 있는 자료이다. 홍위는 군위 출생이며, 참봉 우식(禹軾)의 손자로, 증한성부우윤 흔(?)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홍혼(洪渾)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부모를 정성껏 보호하였다. 이듬해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파견되었을 때 수천 언의 척화토적책(斥和討賊策)을 진언(進言)하여 크게 참고하게 하였다. 1601년 생원으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지평․예조 좌랑․성균관 전적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통제영 종사관(統制營從事官)으로 선임되어 통제사를 보좌하여 백성을 구휼하였으며, 전비를 강화하는 데 공이 컸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춘추관 기사관․세자시강원 사서․정언․지평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직언으로 시사를 바로잡았다. 광해군 때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후생 교육에 힘썼다. 그 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에 다시 벼슬길에 나가 병조 정랑․예천 군수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정경세(鄭經世)․장현광(張顯光)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http://www.koreastudy.or.kr 2005)

 

  홍위 [記事] : 한국문집총간(076_333a) 경정집(敬亭集, 1664)에 실린 이민성(李民宬)의 예천군수(1623-1624) 홍위(字 偉夫)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敬亭先生集卷之九/ 詩/ 挽洪醴泉偉夫/ 少日?衣厓相門。端良文行?超群。中年柏署名時?。晩境槐安謝世紛。官謗自來循好惡。鄕評何事雜?薰。山陽他夕重經過。隣笛凄然不忍聞。”이다.(www.minchu.or.kr 2006)

 

  홍위 [記事] : 한국문집총간총목차 076집 경정집(敬亭集)에 실린 이민성(李民宬)의 예천군수(1623-1624) 홍위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32 送辛從事啓榮之日本 333 次?翁慰海行韻 333 挽洪醴泉偉夫偉 333 村居四景 ...”이다.(www.minchu.or.kr 2006)

 

  [선조실록] : 벼슬이 누진하여 사헌부 감찰(1606.6.23), 공조 좌랑(1606.12.1), 예조 좌랑(1606.12.25)을 거쳤다. [광해군일기] : 정언(1609.6.17)일 때는 곽규의 일로 인한 자신의 파직을 스스로 왕에게 요청하였는데, 그 이튿 날 사간원의 체차 건의에 왕이 윤허하였다(1609.8.1). 1609년(광해군 1) 8월 3일에는 사서가 되고, 동년 8월 13일에는 다시 정언, 사헌부 지평(1609.9.24-1610.3.22)을 거쳐 병조 좌랑으로서 1616년(광해군 8) 11월에 편찬한 <선조실록> 의 편수관을 지냈다.

 

  [저서] : 시문집으로, <서담선생문집(西潭先生文集)>(奎5937, 4卷 附錄 2卷 合 2冊, 木版本, 32.3x21.3cm, 四周雙邊, 半郭은 21.9x15.6cm, 有界, 10行 20字, 註雙行, 版心은 上下花紋魚尾)이 있는데, 5세손 홍한(洪瀚)이 1785년(정조 9)에 편집 간행했다. 권1-2에는 시(詩) 176수, 사(詞) 1수(輓西厓先生), 권3에는 소(疏) 1편(諫院疏), 서(書) 20편(上體察使梧里李相公元翼, 上體察使南以恭 等), 권4에는 제문(祭文) 7편(祭西厓先生文, 祭李南溪文 等), 묘갈(墓碣) 3편(習讀文公墓碣 等), 잡저(雜著) 8편(上麻提督詩歌幷序, 族譜序, 洪貳相進先世分派辨, 營建南溪書院議師門問答, 問目, 遺戒 等), '부록 상(上)'에는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묘비명(墓碑銘), '부록 하(下)'에는 '일시기증시찰(一時寄贈詩札)' 35수, 만사(輓詞) 9수, '칠탄서당상량문(七灘書堂上樑文)', '양천사봉안문(良川社奉安文)', '문집간역고성문(文集刊役苦成文)' 등이 각각 들어있다. '간원 소'는 1609년에 올린 것으로 유신(儒臣)과 정인(正人)을 가까이하고 경연(經筵)을 자주 열어 강학(講學)하고 직언(直言)으로 받아들이고 수설(수說)을 멀리하고, 군부세(軍賦稅)를 줄이고 외적을 물리칠 계책 등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들이다. '상 체찰사 이원익'은 임진왜란 당시 이원익이 남쪽 지방을 순찰할 때 화의(和議)를 배척하고 전토(戰討)할 대책을 마련해서 바친 글이고, 기타 편지에도 이같은 내용들이 일부 들어있다. '문목'에는 홍위가 미성년의 큰 아들이 죽음을 당해서 복제(服制)에 관해 장현광(張顯光)한테 물은 내용과 3년상(三年喪)은 불필요하다는 답변이 간략하게 들어있다. '상 마제독 시가'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 나라 군대가 돌아갈 때 그 은공을 찬양해서 지은 글이다. 이 책은 대부분이 시와 개인 역사에 관한 것이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데 일부 참고가 될 수 있는 자료이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단국대(서울), 안동대이다.(인터넷 야후 2001)

 

  홍위 [記事] : 전원집(田園集) 8권 4책 중 卷3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記 / 兩巖亭記 10/ 西潭 洪瑋(1559˜1624)가 水石의 幽?을 즐겨하여 西潭 상의 兩巖 사이에 정자를 지어 강학에 힘쓰면서 兩巖臺란 세 글자를 새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삼백 년 후 예전에 새긴 兩巖臺 세 글자를 새롭게 하고, 원래의 정자 자리 옆에 다시 정자를 지어 兩巖亭이라 하였다. 후손 鍾運, 鍾韶, 鍾呂 등이 記文를 청함에 지은 것이다.(www.koreastudy.or.kr 2007)

 

  홍위 [記事]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軍威 / 人物  / 本朝孝子朴約之 年七十遭父喪居廬三年杖而後起後喪母又居廬三年一日野火將及於廬約之呼痛火自滅人以爲孝誠所感 烈女本朝徐氏 故郞將 徐思達之女嫁同縣人都雲峯?一年而夫死哀毁過禮常就堂後竹林抱竹呼泣宣德癸丑春忽一日生白竹三叢三年至七八叢正統戊午春 世宗大王命圖白竹以進復戶旌閭 新增人物玉沽 宜寧人中生員文科歷集賢殿校理世宗朝選淸白享安東黙溪書院 洪世琛 南陽人中司馬以學行 成廟朝登 聞授 王子師傅 洪瑋 南陽人天資孝友學問精博中司馬登文科官持平昏朝被謫 反正之初起廢 特召甲子适變奔問 行在上疏言事而/ <하권0700-4>/ 辭甚激切 上嘉納焉號西潭有文集 張士珍 壬辰亂倡集義旅號復讐軍遮守南界賊不敢犯稱以張虎又曰飛將軍游擊?襲殺獲甚多一日賊斫其一臂隻手揮攫賊猶不敢逼力戰乃死事 聞行在特 贈水使 烈女柳氏 幼學鄭三老妻也壬辰倭亂避賊鋒竄伏林藪爲賊所逼恐見汚自投深淵賊以長?擊殺之事 聞旌閭(www.history.go.kr 2007)

 

  홍위 [記事]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六 / 壬寅下 / 十一月  / 初四日 辛酉  / 李善復拜持平 姜弘立拜校理 韓致謙拜泰川 權滉拜高陽 南大海拜平邱 柳起門拜兵佐 金壽賢拜正言 許?拜禮佐 白大珩拜工佐 洪汝諄拜同經筵 權渫拜典籍 洪瑋拜奉常參奉○京畿監司書/ <035_0494>/ 狀高陽郡守 鄭淑夏托以使行支待收米民間罷黜事入啓(www.history.go.kr 2007)

 

  홍위 [記事]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八 / 雨午萬曆三十四年宣祖三十九年上 / 六月  / 二十三日 庚申  / 行都政 南彦義拜泰安 尹?拜咸安 李?拜加平 李策拜摠歷 趙希逸拜禮佐 趙德年拜饔簿 許寔拜漢簿 朴孝悌拜稷山 尹三聘拜壤尹 金權拜通禮 姜弘立拜禮正 尹履之拜殷山 梁?拜器簿 李涵拜儲簿 李廷英拜漢參 愼俊慶拜江陰 崔應澤拜乶下 安聃壽 金致遠拜典籍 宋惟諄拜繕簿 嚴悅拜/ <035_0792>/ 繕奉 沈澱拜饔奉 崔弘載拜兵正 沈?拜 廟直 趙誠立拜修撰 黃瑩中拜賓直 閔汝賢拜獄奉 具憲拜禁都 李汝?拜碧沙 申景遇拜興奉 曹倬拜校理 奇蘭拜興簿 韓謹拜興副 趙宏中拜設別 洪雲拜 孝敬殿參奉 金終男 洪瑋 宋惟諄拜監察 閔機拜銀溪 柳希老拜贍直 洪?拜 宣陵參奉 宋爾昌拜獄簿 李文蘭拜侍直 丁好誠拜 璿源殿參奉 丁好善拜典籍 柳之新拜 裕陵參奉尹 孝先拜吏佐 韓?拜 缺 李惟弘拜副學 南廉拜繕簿 趙緯韓拜繕奉 洪繼先拜饔奉 李應天拜禁都 任?拜持平 沈說拜兵知 / <035_0793>/ 李義傅拜水判 朴源拜重林 朴守謹拜 英陵參奉○禁府啓部將 李光白拏囚卽放因李時楨之招也(www.history.go.kr 2007)

 

  홍위 [記事]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九 / 丙午下 / 十二月  / 初一日 乙未  / 雪院啓災傷尤甚處守令罷職自是法例而頃者忠淸 全羅 黃海 咸鏡道等都事啓聞中其所罷職者或以他事已罷者及或在喪者苟然充數顯有循私之跡請?推又啓曰洪原爲邑介在兩營之間累經匪人公私蕩竭起弊蘇殘非年少武夫所堪該縣監 權憬遞差以文官擇遣何如○朴景範 / <035_0842>/ 拜 孝陵參奉 李尙寬拜祥原 李彦佐拜价川 沈?拜玉果 鄭光成拜正言 尹讓拜文學 金時獻拜兵議 洪瑋拜工佐 張畯拜藍浦 曹允禧拜 缺 參黃敬中拜兵正 奇協拜兵佐 黃謹中拜慶都 李時立拜監察(www.history.go.kr 2007)

 

  홍위 [記事] : 선조실록 200권/ 선조 39년( 1606 병오 / 명 만력(萬曆) 34년) 6월 23일 경신 14번째 기사/ 이유홍․심열․김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유홍(李惟弘)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심열(沈悅)을 병조 참의로, 김권(金權)을【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사당(邪黨)에 빌붙어 외람되이 학사(學士)의 반열에 올랐으므로 세상의 비웃음을 받았다.】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로, 이심(李?)을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이정험(李廷?)을 성균관 사성으로, 조탁(曺倬)을 홍문관 교리로, 성준구(成俊耈)를 이조 정랑으로, 강홍립(姜弘立)을 예조 정랑으로, 최홍재(崔弘載)를 병조 정랑으로, 임연(任?)을 사헌부 지평으로, 윤효선(尹孝先)을 이조 좌랑으로, 조성립(趙誠立)을 홍문관 수찬으로, 오익(吳翊)을 사헌부 감찰로, 홍방(洪?)을 공조 좌랑으로, 안욱(安旭)을【사의(邪議)에 동조하였으니 이미 취할 점이 없는데다 위인이 아둔하고 용렬하여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탐비(貪鄙)스럽다는 것으로 논척(論斥)받았었다.】 공조 좌랑으로, 김종남(金終男)을 사헌부 감찰로, 정호선(丁好善)을 성균관 전적으로, 홍위(洪瑋)를 사헌부 감찰로, 송유순(宋惟諄)을 사헌부 감찰로, 조희일(趙希逸)을【집안 내력이 사의(邪議)를 답습하고 당론(黨論)을 고집하였다.】 예조 좌랑으로, 임장(任章)을 시강원 설서로, 윤인(尹?)을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남언의(南彦義)를 태안 군수(泰安郡守)로, 이원(李?)을 가평 군수(加平郡守)로, 박효제(朴孝悌)를 직산 현감(稷山縣監)으로, 윤이지(尹履之)를【해숭위(海崇尉)의 형이라는 것으로 풍요로운 고을을 가려서 점유하였으니 조정에서 벼슬자리를 위하여 사람을 고른다는 의의에 어긋난 처사다.】 은산 현감(殷山縣監)으로, 신준경(愼俊慶)을 강음 현감(江陰縣監)으로, 민기(閔機)를 은계 찰방(銀溪察訪)으로 삼았다./ 【영인본】 25 책 218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7)

 

  홍위 [記事] : 선조실록 206권/ 선조 39년( 1606 병오 / 명 만력(萬曆) 34년) 12월 1일 을미 6번째 기사/ 이수․김시헌․윤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수(李燧)를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으로, 김시헌(金時獻)을 병조 참의로, 윤양(尹讓)을 문학으로, 황경중(黃敬中)을 병조 정랑으로, 정광성(鄭廣成)을 정언으로, 기협(奇協)을 병조 좌랑으로, 홍위(洪瑋)를 공조 좌랑으로, 이시립(李時立)을 감찰로, 송극인(宋克?)과 이현(李俔)을 봉교로 삼았다./ 【영인본】 25 책 291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7)

 

  홍위 [記事] : 선조실록 206권/ 선조 39년( 1606 병오 / 명 만력(萬曆) 34년) 12월 25일 기미 2번째 기사/ 박홍로․강연․최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홍로(朴弘老)를 동지중추부사로, 강연(姜?)을 첨지중추부사로, 최한(崔漢)을 첨지중추부사로, 홍창세(洪昌世)를 첨지중추부사로, 최유원(崔有源)을 부응교로, 권태일(權泰一)을 사성으로, 송석경(宋錫慶)을 홍문 교리로, 강홍립(姜弘立)을 직강(直講)으로, 조수곤(趙壽崑)을 장악 첨정으로, 정숙도(鄭淑度)를 선공 첨정으로, 김수현(金壽賢)을 예조 정랑으로, 남복규(南復圭)를 형조 정랑으로, 정홍좌(鄭弘佐)【인품이 잔약하고 용렬하며 글을 알지 못하였다. 정홍익(鄭弘翼)과 함께 장옥(場屋)에 들어갔는데, 홍익이 자기가 지은 글을 홍좌의 이름이 쓰여진 종이에 쓰다가 반쯤 썼을 때에야 홍좌의 종이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대로 써 내어 과거에 합격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요행스러운 사람을 말할 때면 반드시 홍좌를 일컬었다.】를 교서관 교리로, 홍위(洪瑋)를 예조 좌랑으로, 안응형(安應亨)을 병조 좌랑으로, 김종남(金終男)【술을 즐기고 어리석어 남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을 공조 좌랑으로, 곽지선(郭止善)【인품이 용렬하였다.】을 종묘 령(宗廟令)으로, 송구(宋耈)를 공조 좌랑으로, 박재(朴?)를 감찰로, 구인(具寅)을 감찰로, 송이창(宋爾昌)을 감찰로, 민기(閔機)를 공조 좌랑으로, 조즙(趙?)을 수찬으로, 김광엽(金光燁)을 전적으로, 유진증(兪晉曾)을 전적으로, 유학증(兪學曾)을 봉교로, 박증현(朴曾賢)을 대교로, 이기빈(李箕賓)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김억추(金億秋)를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삼았다./ 【영인본】 25 책 299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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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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